[스크랩] 조선의 돌격전함,`거북선`. 조선의 주력전함 ‘판옥선’(板屋船)

2019. 1. 17. 16:48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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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표준영정(현충사)

 

 

한국인에게 거북선(龜船)이란 과연 무엇인지, 누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아마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었던 임진왜란 때 누란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한 민족의 성웅 이순신(李舜臣)이 발명한 배, 한민족 지혜의 정수가 담긴 세계 최초의 철갑선, 입으로는 연막을 뿜고 등에는 철갑과 송곳을 씌웠으며, 옆구리에서는 대포를 마구 쏘아대는 천하무적의 군함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에 대한 이미지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이미지의 거북선은 예전에는 지폐와 동전, 그림 등에 그 모습을 자주 드러냈고, 지금도 관광지의 기념품, 박물관의 축소 모형과 실물 크기 복원 거북선 등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 학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된 거북선의 원형에 관하여 아직 합의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이미 일제 강점기 때부터 수십 명의 학자와 연구자가 사료를 해석하여 나름대로 거북선을 제시해오고 있지만, 여러가지 의문을 완벽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북선(전쟁기념관)

 

 

우리 역사 속의 거북선

 

거북선이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조선 초기다. 태종 13년(1413)과 태종 15년(1415)에 거북선에 관한 내용이 실록에 언급되고 있으나 형태와 규모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 후 180여 년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이 쓴 임진왜란 당시의 『난중일기』와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한 후 올린 장계 등에서 거북선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북선은 이순신이 건조한 전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된 문헌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외부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되고 있을 뿐,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는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의 관계도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거북선이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정도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 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龜頭)로 되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해졌는데, 임진왜란 후 200여 년이 지난 정조 19년(1795)에 정조의 명에 따라 이순신과 거북선에 관한 자료를 총망라해 정리한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거북선의 외형을 가늠해볼 수 있는 몇몇 그림 자료가 남아 있다. 먼저 이순신 종갓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거북선 그림으로 『충무공전서』의 거북선과는 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판옥선처럼 장대(將臺)가 존재하고, 용머리가 없는 것도 있어 일부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근거로 거북선의 머리가 안팎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현재 10여 종이 남아 있는 조선 수군의 조련도에 묘사된 거북선이 있다. 흔히 이순신의 학익진(鶴翼陣) 병풍으로 알려졌는데, 장대가 있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어 적어도 19세기 이후에 이러한 거북선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무공전서 - 전라좌수영거북선

 

 

충무공전서 - 통제영거북선

 

충무공전서

 

 

한편 2004년에 조선시대 거북선의 실물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서화가 재미교포에 의해 공개됐다. 이 그림에는 가로 176cm, 세로 240cm의 비단 천에 모양은 다르지만, 용의 머리와 거북의 몸체 형태를 지닌 전선 4척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 거북선 위의 장대에서 회의 중인 장수들과 판옥선 및 소형 선박에서 무기를 점검하는 병사들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의 왼쪽 하단에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쓴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거북선 설명이 동일하게 적혀져 있어 19세기 이후에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1940년 전후에 오오타 텐요오(太田天洋, 1884~1946)라는 일본 화가가 그린 ‘조선전역해전도(朝鮮戰役海戰圖)’이다. 이 그림은 일본 해군 역사서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군의 무용을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선전화’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소 왜곡은 있을 수 있지만 전투상황 묘사가 매우 정밀하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좀 더 면밀하게 판단해야겠지만 이를 토대로 이순신이 건조했던 거북선의 모습을 다소나마 추정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산대첩도(전쟁기념관)

 

사천해전도(해군사관학교박물관)

 

조선전역해전도(일본 아오키 화랑)

 

 

조선의 돌격전함, 거북선

 

거북선은 기존 조선 군함인 판옥선에다 철판으로 마감된 덮개를 씌우고 용머리를 붙여, 발명이라기보다는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전함이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태종 때부터 있던 거북선을 개량하여 본영(本營)과 방답진(防踏鎭), 순천부(順天府)의 선소(船所)에서 3척을 제작했다. 이후 한산도로 진영을 옮긴 후 2척을 더 건조해 조선 수군은 총 5척의 거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거북선은 판옥선과 더불어 조선 수군이 운용해온 돌격전함으로서 사천해전에서부터 투입되어 한산대첩, 부산해전 등 조선 수군이 왜선을 격파하고 연승을 거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직까지 거북선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충무공전서』, 이분(李芬)의 『행록(行錄)』, 실록등 문헌을 토대로 살펴볼 수 있는데, 거북선의 외형은 전면에 용두가 있고, 좌·우측에 각각 6문의 포가 설치되어 있으며, 상판 덮개에는 +자형의 길이 나 있다. 내부 구조는 2층(또는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 창고·선실 등이 있고 갑판 위 2층에는 선장실을 비롯하여 노군과 전투원이 활동하는 공간이 있다.

덮개를 씌워 적선과의 접근전에서 승무원 전원을 개판으로 뒤덮어서 보호하고, 또 쇠꼬챙이를 박아 놓아 거북선에 오르는 적병을 차단하려 하였다. 지금까지 복원된 거북선은 모두 『충무공전서』에 기록된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미국에서 공개된 거북선도(윤원영)

 

이순신 십경도 중의 거북선 건조장면(현충사)

 

 

거북선의 전함으로서의 우수성을 든다면 내부 전투원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과 화포 및 방호력의 강력함을 꼽을 수 있다. 거북선은 전투 개시 직후 적 함선 대열에 뛰어들어 돌격전을 함과 동시에 대포를 쏘아서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데, 이를 위해 두터운 재질로 제작되었으며, 적의 침입으로부터 승무원을 보호하고자 개판을 씌우고 송곳을 꽂아놓았다. 또 전후좌우에 14개의 화포가 장착되어 있어 적선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공격할 수 있다. 특히 『난중일기』를 보면 거북머리의 입에 포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전면 화포 공격까지도 가능했다. 또한, 개판에 철판이 씌워져 있어 방호력이 우수하므로 적선이 접근전을 펼쳐도 쉽게 침입할 수 없어 거북선이 맹렬히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포를 쏘고, 용두를 이용함으로써 당파전술을 펼칠 수 있었다. 거북선의 이러한 전술적 기능은 그리 크지 않는 규모와 내부 구조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거북선은 해상의 탱크라 할 수 있다.

 

거북선에 관한 연구

 

거북선이 신비의 군함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하는 것은 20세기로,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인들이 먼저 주목했다. 1933년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던 언더우드(Horace Underwood)는 논문을 통해서 거북선을 소개했는데, 이 논문은 거북선 연구의 기초와 방향을 제시했고 ‘거북선 신화’를 형성하는 데도 한몫했다.

 

이후 많은 연구자에 의해 수정·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서 거북선이 대체로 판옥선에 지붕을 씌운 배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 『충무공전서』에 실린 거북선은 다르다, 거북선도 우리의 전통 배와 마찬가지로 한국식 노를 사용한다는 점 등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으나, 그 구체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돌격전함으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숙종 대 까지 5척이었던 거북선은 영조 22년(1746)에는 14척으로 늘어나고, 정조 6년(1782)에는 무려 40척에 달했다. 그 이후에는 척 수가 점차 줄어들어 순조 9년(1809)에는 30척, 1817년에는 18척의 거북선을 보유했다. 한편 고종 때까지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어 앞으로 관련 자료의 새로운 발굴을 기대하며, 이를 통해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원형이 완성되기를 기대해본다.

 

 

출처 :

한국문화재재단 - Korea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월간문화재 : 2014. 04.

 

 

 

 

우리나라의 전통무기

 

조선의 주력전함 ‘판옥선’(板屋船)

 

글 | 박재광 _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된 판옥선 모형

 

 

판옥선은 조선시대 명종 10년에 처음 개발된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 전투용 함선이다. 그러나 개발당시 구조적인 특징 때문에 붙여졌던 판옥선이란 명칭은 이후 기능적인 명칭인 전선으로 바뀌게 되어 우리에게서 잊혀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 군선이라고 하면 거북선을 이야기한다.
한강에도 모형이 하나 있고 무수한 책에도 나온 거북선의 이름을 모르는 한국인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조선의 주력 전함은 거북선이 아닌 판옥선이었다. 물론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조한 전투함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 군선은 거북선’ 이라는 도식을 그려내는 것은 잘못이다.

원래 조선 초기의 군선은 맹선이었는데 삼포왜란 후 재래식 군선인 맹선으로는 종래와는 달리 화기로 무장한 왜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새롭게 만든 전선이었다. 판옥선은 거북선이 그랬던 것처럼 임진왜란 직전인 명종 10년 처음 나타난다.

 

 

여∙원연합군과 싸우는 일본군(몽골습래회사)

 

고려전함에서 싸우는 여∙원연합군(몽골습래회사)

 

고려, 독자적인 조선술 운영해 왜구 토벌

 

고려시대에 있어서 수군의 활동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건국 당시부터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은 각각 수십~수백 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서해의 제해권을 두고 경쟁하였고, 고려 중기에는 원의 일본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수백 척의 군함을 건조해야만 했다. 해전의 경험이 없던 원나라는 일
본 정벌에 필요한 병선의 제조를 강요함으로써 이를 통해서 고려는 해군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원연합군은 1274년(원종 14)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쳐 출정했다.

1차 원정은 1274년 5월, 충렬왕이 즉위하던 해에 김방경과 다구가 이끄는 원군 2만5천 명, 고려군 8천 명은 전함 900척에 나누어 타고 합포를 출발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고 이키도를 정벌했다. 이후 일본 하카타에 상륙한 여∙원연합군은 본토군을 격멸하는 데 성공했으나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배가 침몰하고 보급이 끊겨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고 퇴각했는데 이 때 돌아오지 못한 자가 1만3천500명이었다.

2차 원정은 1281년 5월에 시작되었는데, 김방경을 비롯한 박 구∙김주정 등과 원나라의 흔도∙ 다구 등이 왕이 열병하는 가운데 합포를 출발하여 일본 원정의 길을 떠났다. 이들은 6월까지 일본의 본토를 강습했으나 공교롭게도 또다시 태풍을 만나 일본 정복에 실패했다. 결국 여∙원 연합군의 두 차례의 일본 정벌이 태풍 때문에 좌절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연유한 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시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 일본 정벌은 두 번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전투를 통해서 고려가 독자적인 조선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성능 면에서 중국의 그것보다 우수했음을 입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차 전쟁 당시 연합군의 병력 수가 4만 명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고려의 조선술을 가늠하는 자료가 된다. 또 다음의 두 자료도 이를 잘 뒷받침한다 할 수 있다.

 

 

"원종 15년(1274) 원의 황제가 일본을 치고자 하여 김방경과 다구에게 조칙을 내려 전함을 조성케 하였다. 만약 배를 중국식으로 만든다면 비용이 많이 들뿐만 아니라 기일을 맞추기도 어려워 온 나라가 걱정하였다. 김방
경이 동남도독사로 먼저 전라도에 부임하여 사람을 원에 보내어 양해를 얻어 배를 본국(고려)식으로 만들도록독려했다‘(고려사’ 열전 김방경조)"

 

"고려의 사신이 제(帝)를 배알하는 자리에서 정우승이 아뢰기를 강남의 전선이 크기는 하지만 부딪치면 깨지니 이것이 지난번에 실패한 까닭입니다. 만일 고려로 하여금 배를 짓게 하여 다시 치면 일본을 가히 정복할 수
있다하였다‘(고려사’세가충렬왕18년(1292) 8월정미조)."

 

 

이후 고려말에는 날로 극심해져 가는 왜구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화약 무기를 개발하는 한편, 군함의 제도도 일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흐름에 따라 고려의 역사에는 대선, 누선, 과선, 검선 등의 다양한 명칭을 지닌 군함들이 등장하였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이 바로 과선과 검선의 개발, 그리고 화약 무기의 도입이
다. 고려 중기와 말기에 각각 개발된 과선과 검선은 이름 그대로 배의 측면에 짧은 창과 칼을 빽빽이 꽂아 두어 적병이 배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훗날 이순신이 개발한 거북선의 경우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재미있다고 하겠다.

 

또한 고려말 최무선은 화약과 화약 무기를 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함을 제작해 직접 이것을 해전에 도입하여 왜구를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화기로 무장된 고려의 전함이 왜구와의 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1380년(우왕 6)에 벌어진 진포해전과 1383년에 벌어진 남해의 관음포해전이었다.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

 

「각선도본」에 나와있는 판옥선

 

 

1380년 8월, 왜구는 50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 진포를 거점으로 삼아 내륙에 침입하면서 벌어진 진포해전에서 고려 수군은 적선 500척을 전소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진포해전은 우리 나라 해전사에 있어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먼저 자체 생산한 화약과 화포로 장비한 수군이 치른 최초의 해전이었다는 점이 하나고, 또 하나는 세계 해전술상에 있어 화포가 장비된 전함이 투입되어 함포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이다.

즉, 기존의 해전에서의 기본 전술이라 할 수 있는 당파전술보다 한 차원 높은 함포전술이 가미되어 새로운 변화를 이룩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포해전은 이러한 점에서 세계 해전술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고려 수군은 관음포해전에서 다시 한 번 위력을 발휘하였는데, 진포해전에 대한 보복을 위해 120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다시 침입한 왜구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던 것이다. 이후 고려는 해전에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종래의 수세적인 왜구 토벌작전에서 적극적인 공격전략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이렇듯 고려말에 벌어진 두 차례의 해전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가 탁월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있으나 고려 전함의 우수성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전에서의 전통은 훗날 임진왜란 시기까지 이어지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을묘왜변 후 판옥선 배치, 맹선 체계 대체

 

조선이 건국할 당시 조선 수군의 최대 과제는 이전의 고려말과 마찬가지로 왜구의 토벌이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그때까지 간간이 이어져 온 왜구의 침략에 단호히 대처해 나갔고,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이종무로 하여금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아예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세종대에 대마도주와 화친 조약을 맺고 부산포, 제포, 염포 등의 삼포를 개방하고 무역을 허락하면서, 조선은 이후 수십 년간 왜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조선으로서는 왜구를 토벌하던 시기에 무질서하게 제작되어 온 군함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재분류하고, 또한 어느 정도 척수를 줄여
평화기의 국방 정책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개발된 것이 바로 맹선(猛船)이었다.

 

이미 세조대에 신숙주가‘군용과 조운에 겸용할 수 있는’병조선을 만들 것을 건의하고 그에 따라 대∙중∙소선을 제작하였고, 이후 성종대에 반포된‘경국대전’에서는 이것이 대∙중∙소맹선 체계로 확립되게 된다.

대맹선은 80명, 중맹선은 60명, 그리고 소맹선은 30명이 승선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세미(稅米)를 실어
나르는 조운선의 역할을 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전체 맹선 수의 1/3 이상을 예비용으로 돌려서 보관해 두었으니, 이것 역시 평화시에 사용하기 위하여 개발된 맹선 체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지만 평화시에 사용하기 위하여 개발된 맹선 체계는 멀지않아 그 허점을 드러내게 된다. 조선의 군선인 맹선은 왜구를 제압하기 위해 많은 인원과 무기, 그리고 군량을 적제하고 해안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해적질을 목적으로 조선 연해를 침입하는 왜구의 선박은 조선의 맹선에 비해 선체가 작고 날렵했다. 따라서 왜구
선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선체가 둔하여 나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수군들은 왜구선을 나포하기 위해 왜군선과 크기가 유사한 비거도선이라는 소형 경쾌선을 임기응변적 군선으로 활용하였다. 비거도선이란 당시 어로 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소형 선박이었다.

 

맹선제는 선체가 둔하고 속력이 느려 왜구를 추격할 수 없다는 건의와 현지에서 비거도선과 같은 소형 경쾌선을 제작하여 왜구방어에 이용된다는 보고는 세종 때부터 연산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맹선제를 개선하여 속력이 빠른 군선 건조가 요구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의 군선이 소형 경쾌선으로 선형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삼포왜란이 발생했다. 삼포왜란이란 1510년(중종 5) 제포, 염포, 부산포에 살고 있던 일본 거류민들이 조선의 각종 제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대마도 왜인들과 연계하여 삼포에서 일으킨 대규모 반란 행위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 수군은 효과적인 대처를 전
혀 할 수 없었다. 또한 사량진왜변(1544) 때 왜구는 마침내 화약 무기로 무장까지 하였고, 을묘왜변(1555) 때는 아예 조선의 대맹선보다 더 큰 배를 이용해 침략했다. 이는 16세기 초반 이후 왜구의 침략에 동참한 중국과 서양 출신의 해적들에게서 조선 기술과 화약무기 기술을 배운 결과로 보인다.

 

 

전쟁기념관의 한산대첩 디오라마 모형

 

 

당시까지 왜구에 대한 조선의 전통적인 대처 방안은 왜구의 것보다 더 큰 배에 화약 무기를 싣고 맞서 싸우는 것이었으니만큼, 이러한 전력상의 오랜 우위를 마침내 상실할 위기에 처한 조선 정부는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조선 정부에서는 성종대부터 소위‘대함주의’와‘소함주의’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척수가 적더라도 큰 배를 중시하는 대함주의자들과 작은 배를 사용하더라도 다수의 군함을 보유해야 한다는 소함주의자들이 대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등 왜구의 크고 작은 침략에 시달리던 중종대에 와서 더욱 심화되었지만, 보다 큰 배와 화약 무기로 무장한 왜구에 대한 위협이 마침내 현실화되면서 점차 대세는 대함주의자들에게 유리해지게 되었다.

 

결국 을묘왜변이 발발한 명종 10년(1555)에 신형 군함이 개발되어 왕이 참석한 가운데 시범을 보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판옥선이었던 것이다. 판옥선은 주변국의 선형변화에 대처하고 국제전에 대비하기 위해 명나라와 일본의 선형을 참조하여 개발한 군선이다.

 

판옥선은 이전의 군함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 하는 군함이다. 맹선 등을 포함한 기존 군함의 경우 갑판 위에 여러 층의 누각을 쌓아올린 경우는 종종 있어 왔지만, 기본적으로는 갑판이 하나밖에 없는 평선으로 그 갑판 위에 사부(射夫), 포수(砲手) 등의 전투원과 노꾼(櫓軍)과 선원 등의 비전투원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
러다 보니 전투와 주행 모두 효율성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노꾼들의 안전 역시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판옥선의 경우 기존의 갑판 주위에 판자로 된 두꺼운 방패를 빈틈없이 세우고 그 위에 또 하나의 갑판을 설치하였으니, 이름 그대로 갑판 위에‘판자로 집을 지은’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노꾼들은 2층 갑판 아래의 보호된 공간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전투원들은 2층 갑판 위에서 노꾼들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전투에 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판옥선은 맹선에 비해 배의 높이가 보다 높아졌는데, 이로 인하여 적병이 배 안으로 뛰어들기 힘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화약 무기의 명중률과 사거리 역시 높아지는 효과를 보았다.

 

이러한 장점을 지닌 판옥선은 을묘왜변 이후 점차 전국적으로 배치되어 맹선 체계를 대체하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조선 수군의 명실상부한 주력 군함으로서 일본 수군에 대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이 때 이후 판옥선은 군함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은 거북선과 같은 특수 군함, 병선 ∙ 방선과 같은 중형 군함, 그리고 사후선(伺候船) 등과 같은 소형 보조함 역시 보유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 즉 판옥선은 구한말의 군제 개혁으로 구식 수군이 혁파될 때까지 변함없이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임진왜란기 조선 수군 백전백승의 일등공신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지휘하에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면서도 또한 완벽한 것이었다. 7년의 전쟁 기간 중 24회의 해전에서 일본 군함 700척을 격침시키고 23척을 나포했던 반면, 전투로 인한 군함 손실은 사실상 한 척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상자 역시 매 해전에 있어서 십 수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이러한 완벽한 승리의 원인을 이순신 개인의 탁월한 전략∙전술적 능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하지만 그 외에도 군함과 화약 무기로 대표되는 해상 무기체계에서 조선이 일본에 비해 상당한 우위에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러한 무기 체계상의 우위를 100% 발휘할 수 있도록 전력을 조정하는 면에서 탁월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인 판옥선이 일본 수군의 주력 군함인 안타케, 세키부네 등에 비해 어떠한 점에서 우수하였는지를 살펴보겠다.

 

 

일본군의 전함 안타케부네(安宅船) 모형

 

판옥선(왼쪽)과 세키부네의 비교도

 

 

먼저 판옥선의 구조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서양의 경우 배의 바닥에 용골이라고 하는 길고 좁은 각재 하나만을 깔고, 그것을 뼈대로 삼아 외판을 붙여 나가는 첨저선이었다. 반면 판옥선과 같은 우리 나라의 한선은 배의 바닥에 저판 여러 쪽을 깔고 마치 뗏목처럼 그것들을
이어 붙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배의 이물과 고물 역시 뾰족한 것이 아니라 뭉툭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서양의 배가 바닥이 좁고 뾰족하다면, 한선은 넓고 뭉툭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선의 바닥이 평평하다고 하는 것은 한선의 단점이자 곧 장점이 되었다. 우선 이물이 뾰족하지 못하기에 파도를 헤쳐 나가는 능력은 그만큼 부족하였다. 또한 바닥이 평평하기에 첨저선에 비해 물에 닿는 면적은 큰 반면 흘수선은 낮았는데, 이는 배에 대한 물의 저항을 크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배의 직진 능력에도 좋지 않
은 영향을 주었다. 즉 한선의 경우 서양의 배에 비해 그만큼 속도가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들과 함께 장점 또한 여러 가지 있었으니, 바닥이 평평하므로 갑작스레 썰물이 되어도 배가 좌초되어 전복될 위험이 없었고, 또한 평저선의 경우 첨저선에 비하여 좌우 선회 능력이 뛰어났는데, 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섬
과 암초가 많은 한국의 바다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투시에 첨저선은 기동력이 유리하지만 일단 선체 하부의 구조가 좁기 때문에 상갑판에서 화포를 발사할 때의 하중이나 반동을 흡수하기가 불리한 반면 판옥선은 평저선으로 반동 흡수에 유리한 구조였다.

 

아울러 판옥선은 전통 한선의 방식으로 제작된 배였으므로 일본의 배에 비해 구조적으로 튼튼하였다. 우선 목재로 사용하는 소나무가 일본의 삼나무, 전나무보다 단단하였고, 배에 쓰이는 판자 역시 더욱 두꺼웠을 뿐만 아니라, 쇠못이 아닌 나무못으로 목재를 결합하였으므로 배가 오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판옥선은 그 높
이가 높았고 거북선은 아예 위를 판자로 덮고 송곳 등을 꽂아 두어, 조총을 일제 사격한 뒤 적선 위로 뛰어드는 단병 전술을 주로 하는 일본 수군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의 군함은 승선하고 있는 장수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배의 주위에 화려한 휘장이나 장막을 걸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조선 수군의 화전 공격의 좋은 목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수군조련도」에 나와 있는 판옥선

 

 

판옥선의 기동력과 관련하여‘성종실록’에는‘우리 나라의 병선은 몸집이 크지만 느리고, 일본의 배는 작지만 경쾌하다’라는 단적인 표현이 나온다. 실제로 일본의 배는 가볍고 날렵한 모습이어서, 조선의 배에 비해 항상 속도가 빨랐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판옥선을 포함한 조선의 주력 군함은 거의 예외 없이 돛대가 두 개 달려 있었던 것에 반해, 일본의 군함은 대부분 돛대가 하나밖에 없었다.

돛 역시 조선의 경우 역풍에 강하고 다루기도 쉬운 세로돛을 사용하였지만, 일본의 경우는 역풍에는 무용지물이 되고 다루기도 불편한 가로돛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군함에는 대개 4~6명이 젓는 커다란 노가 달려 있었던 반면, 일본의 군함에는 1명이 젓는 노가 수십 개 달려 있었다. 같은 수의 노꾼들이 노를 저을 경우, 조선의 큰 노 하나를 젓는 것이 일본의 작은 노 여러 개를 젓는 것에 비해 보다 효율적이라고 한다.

결국 일본의 군함은 순풍이 불거나 돛 없이 노만을 저을 경우에만 조선의 군함보다 조금 빨랐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 역시 배가 가볍고 날렵하기에 그런 것이지 돛이나 노의 성능이 조선의 군함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우수성에 덧붙여 판옥선에는 이미 고려 말부터 200년간에 걸쳐 발전해온 위력적인 함포가 장착되어 있었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 서양으로부터 화기 제작기술을 도입한지 겨우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해상에서의 함포를 이용한 전술능력도 떨어졌다. 특히 조선은 군함에 탑재한 화기를 사용하여 왜구를 토벌하
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도 판옥선에서 천∙지∙현(玄)∙황자총통 등의 대형 화포와 승자총통 등의 소형화기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였다. 따라서 해전이 벌어지면 일본 수군은 중소형선과 조총을 중심으로 하여 배의 현(舷)을 붙이고 백병전을 위주로 전술을 편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선박의 전후좌우에 장착된 각종 대
형 화포를 바탕으로 함포전술을 구사하였다. 특히 조선군이 사용한 화포는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사거리가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육전과는 다르게 조선 수군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판옥선은 구조적으로 높이가 높고 튼튼해 화포를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면서 발사함으로써 사거리를 늘리고 명중률을 높였으며, 노꾼과 사부를 판옥으로 보호하여 안정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였다. 특히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활동 공간을 두 개층으로 분리∙운용하였다는 점에서 화기 운용에 더 효율적인 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군함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 과학의 기술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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