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25. 18:22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강홍립
姜弘立
실리외교로 전쟁을 조율한 장수
출생 | 1560년 |
---|---|
사망 | 1627년 |
광해군, 무장 강홍립을 오른팔로 삼다
나라에 큰 전란은 역설적으로 명장이 태어나는 좋은 조건이 된다. 우리나라는 잦은 외침 탓으로 많은 명장이 배출되었다. 조선조는 비록 문관 위주의 관료사회였지만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이 있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임경업이 있었다. 그런데 시대적으로 그 중간에 드는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은 여러모로 따져 볼 때 불행한 장수였다. 그는 명장의 바탕을 지녔고 조정 정책에 충실한 장수였는데 왜 핍박을 받아야 했을까?
그는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높은 벼슬을 누리어, 그는 비교적 유복한 성장기를 거쳤다. 그의 할아버지 강사상(姜士尙)은 우의정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 강신(姜紳)은 우찬성을 지냈다. 문벌을 중시하던 그 시대에 그의 앞날은 탄탄할 것처럼 보였으며, 다른 동료들의 부러움을 살 만했다.
그는 정해진 과정대로 젊은 나이에 알성문과(謁聖文科, 임금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보이던 최종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그가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섰을 때에는 임진왜란이 끝나 나라가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만저만한 벼슬을 지내다가 1605년 도원수 한준겸의 종사관(실무책임자)이 되었다. 그는 문관으로서 도원수 휘하에 들어 용병술을 배웠다. 이때부터 그는 병사 관계의 일에 종사하게 되었고 군대의 지휘, 병법의 요령을 배웠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장수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사실을 알리는 소임을 띠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도 또 한 차례 뛰어난 외교관 이덕형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북경을 드나들면서 명나라는 꺼져 가는 태양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 광해군에게는 자신의 뜻을 실행시켜 줄 훌륭한 인재가 필요했다. 광해군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나 같은 어머니를 둔 형 임해군을 제치고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늘 위태로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일선에서 몸소 겪었는데, 당시 만주에서 한창 힘을 떨치고 있는 여진 세력에 대해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이런 마당에 조선 조정에서는 늙은 호랑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분위기가 임진왜란 이후 더욱 팽배해 있었다.
광해군은 국내외에 걸쳐 위기상황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았다. 왕위에 오르자 만주 일대 여진족의 동정을 상세히 살피도록 해 그쪽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때에 광해군의 눈에 든 사람이 바로 강홍립이었다. 강홍립은 남병사(南兵使)각주1) 로 국경지대에 있으면서 그쪽 방면의 동정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병권을 잘 처리하고 전술을 잘 구사해 벼슬아치들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중용할 마음을 먹고 그를 주목했다. 그를 우선 한성부 부윤으로 삼아 가까이에 두어 임금의 뜻을 알게 했고, 진녕군(晉寧君)으로 봉해 임금의 신임을 내외에 알렸다. 이것이 어찌 보면 그를 불행의 길로 이끈 실마리가 되었다.
광해군의 뜻에 따라 적군에 투항하다
이럴 즈음 여진은 더욱 힘을 떨쳐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누르하치가 후금 황제의 위에 올라 명나라에 맞섰다. 천자의 나라를 자처하는 명나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끼고 있는 판에 후금은 요동 일대를 무력으로 차지했다. 명나라는 이를 응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요동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차지하는 세력이 중원(中原,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본토)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명나라는 후금 정벌계획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공을 갚으라는 뜻도 이 원군 요청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광해군은 나라의 사정 때문에, 또는 왜구가 다시 침입할 조짐이 있다든지 하는 핑계로 원병을 미루었다.
1618년(광해군 10)에 들어 명나라의 원병 요구는 강경했고, 사대은의를 내세우는 조정 대신들의 여론 또한 억누르기만 할 수도 없어 마침내 원병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도원수를 강홍립, 부원수를 김경서(金景瑞)로 임명하고 포수 3500명을 중심으로 1만 3000명 가량의 군사를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고려 때 몽골과 연합군을 편성해 일본정벌에 나섰던 일이 있었는데, 이 파병은 아마도 역사상 두 번째에 속할 것이다.
강홍립은 문관 출신이고 그 아래는 모두 무관 출신이었다. 강홍립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도원수의 직책을 세 차례나 거듭 사퇴했다. 그의 사퇴는 아마도 이런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첫째, 앞으로 그의 향배에 대해 조정의 비난을 면할 수 있는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
둘째, 앞으로 사건의 전개에 따라 명나라에 변명할 구실을 만들어 두려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가 사퇴를 표명할 때마다 광해군이 간곡하게 당부를 했다. 여러 조정 중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강홍립은 자기의 재주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표명했다. 그러자 광해군이 거듭 당부를 했고,
일이 위급하니 사양하지 말고 일을 처리하라. 속히 내려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능히 계책을 써서 내 근심을 풀어 달라.
- 《광해군일기》 권131, 10년 8월조
마침내 강홍립은 출정길에 나섰다. 그가 만약 형조참판이라는 문관의 직책을 누리며 조정에서 지냈더라면 그의 앞날은 평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운 역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강홍립이 이끄는 군대가 8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평안도에서 머뭇거리다가 압록강을 건넌 것은 7개월이 지난 뒤였다. 그는 계속 명군의 동정을 살피고 후금의 눈치를 보며 행동했던 것이다.
강홍립은 명군과 합류하고 있는 처지에서도 양식이 떨어졌다거나 무기가 모자란다는 등의 핑계를 대고 명군의 뒤에 처져 앞장서지 않았다. 한편 그는 명군 몰래 밀사를 후금의 장수에게 보내 명나라의 강요에 의해 출병했다는 것을 알리고 조선은 후금과 적이 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명나라 군대가 후금군에게 패한 뒤 강홍립 부대는 후금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적당히 싸우는 체하다가 투항하고 말았다. 1619년 3월 4일 투항한 다음날, 그는 후금군과 화의를 맺었고 또 그 다음날에는 누르하치를 만나 조선의 뜻을 전했다. 후금과의 형식적인 전투에서 종사관 김응하 등이 전사하기도 했으나 조선의 주력 부대는 별다른 희생이 없었다. 강홍립 · 김경서 등은 후금에 억류되었고 그 아래의 장수들은 송환되었다. 이때부터 강홍립은 8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게 되었다.
강홍립은 광해군이 은밀하게 당부한 관형향배(觀形向背, 형세를 보아 행동을 결정하는 것)의 전술을 충실하게 구사했다. 그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여 많은 군사를 살렸으며 전쟁을 막았다.
강홍립이 투항했다는 전갈이 오자, 평안감사 박엽은 강홍립의 가족을 모두 잡아 가두었다. 또 강홍립 첩의 자식을 삭주에 감금해 두고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투항한 장수 강홍립을 역장(逆將)으로 다스려야 하며 그의 가족은 모두 죽여야 한다며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의 가족을 서울로 데리고 오게 해서 물품을 하사하는 등 평안히 지내도록 조처했다. 중신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지만 강홍립에게 죄를 주자는 소동도 수그러들었다.
조선과 후금 사이에서 외교수완을 발휘하다
이 모든 과정은 광해군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곧 명나라에 대해서는 겉으로 복종하는 체하면서 책잡힐 빌미를 주지 않고, 후금에 대해서는 명의 강요에 의해 출병했을 뿐, 그들과의 우호를 계속 지키겠다는 양면의 계책을 쓴 것이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계획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억류되어 있으면서 계속 조정에 밀서를 보냈다.
그는 그곳의 사정을 낱낱이 염탐해서 적거나 그곳 장수들의 동태를 상세하게 적은 종이를 노끈으로 꼬아서 보내기도 하고 말안장에 넣어 보내기도 했다. 그가 올린 비밀 장계를 통해 조정에서는 후금의 동정을 알아냈고 그에 따라 정책을 세워 나갔다. 이중생활을 해야 하는 억류생활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양면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끝내 쫓겨나면서 조선과 후금 사이에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광해군이 쫓겨난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친명사대파 또는 모화주의자들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명나라에 대한 은의만을 내세우는 존명사대파는 오랑캐인 후금(뒤에 ‘청’으로 바꿈)과 결코 야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서인들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광해군은 동인 또는 그곳에서 갈라져 나온 대북파를 주축으로 정권을 다졌는데, 소외된 서인들이 군사를 동원해 광해군을 축출한 것이다.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후금에 강한 적의를 보였다. 후금의 사신을 죽이려고 위협하기도 하고 도망쳐 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황해의 가도에 근거지를 제공하고 쌀 60만 석을 공급하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누르하치가 죽고 그 아들 태종이 들어섰다. 태종은 중국을 전면적으로 치기 전에 후환이 되는 조선을 먼저 치기로 했다. 1627년, 후금은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이를 정묘호란이라 부른다. 강홍립도 후금의 군사를 따라 들어왔다.
후금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인조는 허겁지겁 강화도로 들어가고 왕세자는 길을 달리해 전주로 갔다. 이때 강홍립은 막후에서 외교수완을 발휘해 화의를 성립시켰고,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로 약속하고 강화를 맺었다. 이 화의가 성립되자, 후금은 인질로 억류되어 있던 강홍립 · 박난영 등을 송환했다. 오랜 억류생활이 끝났지만 그의 몸은 병이 깊었다.
반드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존명사대파는 그를 들볶았다. 역장이라느니 역신이라느니 하면서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그리워하던 고향집의 마루에 앉았어도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앞뒤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인조는 그에게 죽음을 내리지 않고 벼슬만 떼어 버렸다. 이런 등쌀에 못 견뎌 그는 고국에 돌아온 지 3개월 만에 마침내 파란 많은 삶을 끝마쳤다.
강홍립이 죽자, 인조는 그의 관직을 복구시키고 초상비용을 내리도록 조치했다. 인조는 그의 처신을 상당히 이해했으며 아무 대비도 없이 전쟁을 부르짖는 존명사대파를 마음속으로는 싫어했다. 그러나 이 조치에 대해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그 부당함을 지적했다. 인조도 어쩔 수 없이 위의 조처를 철폐했다(《인조실록》 5년 7월조).
그 뒤 조정에서는 더욱 심하게 후금을 적대관계로 대하다가 마침내 1636년 병자호란을 불러와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형제의 나라’에서 ‘군신의 나라’로 굴복하고 말았다. 광해군이 폐출된 뒤에는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강홍립이 죽고 난 뒤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강홍립의 후손들은 온갖 핍박을 받으며 살면서 몰락을 거듭했다. 임경업(林慶業)은 쓰러져 가는 명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친 공로로 조정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강홍립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의 후손들은 그의 문집과 그에 대한 기록을 관악산 연주암 주변에 묻었다고 말한다(강희영 《도원수 강홍립》).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그의 자세한 행적을 더듬기가 어렵다. 1990년에 시흥 땅 난곡에 있던 그의 무덤을 옮겼는데, 그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이었고, 키는 6척 장신이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강홍립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과 전술도 기려야 하지만 진정한 국가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친 강홍립도 바르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재단에 따라 왜곡해서는 역사의 진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가 역사적으로 재평가를 받은 탓인지 많은 답사자들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 난곡의 진주 강씨 묘역에 있는 그의 무덤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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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사 역사인물들 중에서 꼭 알아야 할 100여 명을 엄선하여 생생하게 재조명한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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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이화출판사 주니어김영사목차 목록
ㅡ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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