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 모차르트와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2019. 1. 31. 04:14율려 이야기



모차르트와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베네치아

1771년 2월 20일


   모차르트 부자는 2월 20일 세찬 바다 바람을 맞으며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베네치아는 117개의 섬과 150개의 운하 그리고 378개의 다리로 연결되었고, 그 한가운데를 흐르는 대운하가 있다. 베네치아는 오페라 발달 역사에 어느 도시들보다 큰 기여를 했다. 각종 길드의 후원으로 17세기 말까지 16개의 오페라하우스가 설립되었고, 350곡이 넘는 오페라가 창작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모차르트 부자는 2월 11일 파도바에 머물었고, 2월 20일 베네치아에 도착했는데 그렇다면 열흘간 두 사람의 행적은 어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시기의 행적에 대해 문헌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한 달 전에 15살 생일을 맞은 사춘기의 모차르트는 베네치아에서 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또 목소리도 변했다. 잘츠부르크를 떠날 때 하겐아우어는 베네치아에서 대규모 상업을 하는 친구 요한 비더를 레오폴트에게 소개해주었는데, 비더는 이곳에서 벤투리나 로제티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무려 19명이 낳았으나 6명만 유아기를 넘어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 6명이 모두 딸이었다.

베네치아의 상가들은 가게 문을 일찍 열었으며 거리에는 일찍 일어난 나그네와 아침 장사를 하러 나온 상인들로 활기가 넘쳤다. 1개월 동안 모차르트는 사육제에 들뜬 베네치아의 저자와 극장, 산 마르코 광장과 카페와 거리를 비더의 딸들과 더 없이 재미있게 어울려 다녔다. 낭만적인 곤돌라도 타면서 말이다. 그런 반면 레오폴트는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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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가량 베네치아에서 지내는 동안 모차르트는 제노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자 극장 감독 자코모 두라초 백작을 만나 오페라 시장, 음악계의 암투, 그리고 오페라를 공연한다는 것은 음악활동만이 아닌 정치활동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두라초 백작은 글루크가 이탈리아 오페라를 개혁하는데 협조한 사람이었지만, 빈 궁정악장 칼 로이터의 계략으로 1764년 빈을 떠났다. 칼 로이터는 1740년 하이든을 성가대로 뽑은 사람으로서 1751년부터 빈 궁정악장을 맡고 있었다. 한때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알려진 〈De profundis, KV. 93〉은 로이터가 작곡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모차르트는 귀향길에 밀라노에서 주문받은 오페라의 내용이 확정되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것은 모차르트가 밀라노에서 작곡한 3편의 오페라 중 마지막 작품인 〈루치오 실라〉로서, 1772년 12월 26일 공연된다. 또한 빈으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3남 페르디난트 대공의 결혼식에 사용할 오페라가 필요하다는 연락도 받았다. 그것이 바로 1771년 10월 17일 밀라노에서 초연된 〈알바의 아스카니오〉이다.

모차르트 부자는 3월 12일 베네치아를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레오폴트는 베네치아를 떠나며 들뜬 아들에게 타일렀다.

“이 세상의 소란에는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말거라. 세상의 호감을 얻으려고 하다가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단다.”

카페 플로리안

1554년 이스탄불에 세계 최초의 카페인 차이하네(Chaihane, 이란어로 찻집)가 문을 열었고, 곧이어 이스탄불에는 600개가 넘는 카페가 생겼다. 르네상스 시대 말기쯤 해서 이탈리아에는 동양으로부터 커피가 들어왔다. 터키 주재 베네치아 대사 지안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1585년 베네치아로 귀환하면서 커피를 갖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터키인들은 까만색 물을 뜨겁게 하여 마시는데, 그것은 Cavee라고 불리는 나무의 씨앗으로서 남자들을 깨어있게 한다.”

그 직후 베네치아의 거리에 보테가(Bottega)라고 불리는 가게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카페 플로리안의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플로리아니 프란체스코니가 산 마르코 광장에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카페 플로리안(Cafe Florian)을 개업한 것은 1720년 1월 29일이었다. 그 후 이곳은 유명한 커피하우스(botega da caffe)로 자리 잡았고, 괴테, 니체, 나폴레옹, 스탕달, 바이런, 릴케, 찰스 디킨스, 화가 모네와 마네 등이 찾았다.

1683년 터키 군대가 빈에서 퇴각할 때 커피원두를 몇 포대 두고 갔는데, 그 후 빈에서는 비너카페하우스(Wiener Kaffeehaus)가 크게 유행했고 그 유행을 따라 잘츠부르크에서도 1705년 카페 토마셀리(Cafe Tomaselli)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모차르트 부자가 궁정에서 퇴근하여 게트라이데 가세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종종 들렀을 터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커피와 관련된 일화는 없다. 그러나 로만틱 가도의 도시 로텐부르크는 매년 모차르트 음악제를 개최하는데, 그 이유는 모차르트가 여행을 하다가 잠시 마차의 말을 교체하는 동안 이 마을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떠났다는 것이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

바흐, 베토벤, 브람스 소위 3B는 모두 커피 애호가였다. 바흐가 활동했던 1700년대 초반, 독일에서도 엄청난 커피 열풍이 불었는데 의사들은 커피가 불임의 원인이 되며 얼굴빛이 검어진다고 여겨 여성들에게 커피를 못 마시게 했다. 바흐는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 칸타타를 작곡했다. 칸타타에서 커피를 좋아하는 딸을 가진 아버지는 이렇게 한탄한다.

“딸 가진 부모는 천 가지 걱정을 안고 산다.”

하지만 딸은 부모의 걱정도 아랑곳없이 이런 말을 하며 커피를 마셔댄다.

“아, 커피의 맛은 얼마나 기가 막힌가! 천 번의 키스보다 더 사랑스러우며 포도주보다도 달콤하다네. 내게 즐거움을 주려거든 제발 커피 한 잔을 따라줘요.”

바흐는 이런 내용의 커피 칸타타(BWV, 211)를 작곡했는데, 원제목은 〈조용하게, 떠들지 말고〉(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이다. 원래 이 곡의 대본은 아버지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있었으나 커피 애호가인 바흐는 딸이 결혼 후에도 커피를 계속 마시는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 바흐는 이 곡을 라이프치히의 커피하우스에서도 연주했다.

베토벤은 아침식사로 항상 커피만 마셨다. 아침마다 최상급의 원두를 정확히 60알 넣어 끓여 마셨다. 브람스도 매일 아침 5시경에 일어나 담배와 함께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브람스는 자신이 마실 커피는 꼭 자신이 타먹었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나처럼 커피를 진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로시니는 롤빵 한 개와 커피 한 잔, 그것도 매우 큰 잔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이탈리아를 사랑한 바그너, 베네치아에서 숨을 거두다

필자는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를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자택에서 만나 종종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해 겨울 드러커 박사가 나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냐고 묻기에, 내가 캐나다라고 답하자 이렇게 질문했다.

“겨울철 캐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가 어딘지 알아요?”
“그야 토론토지요.”
“아닐세, 겨울철에는 은퇴한 캐나다인, 돈 많은 캐나다인, 휴가를 온 캐나다인 등등 합해서 세계에서 캐나다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는 LA이지.”

알프스 이북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탈리아는 동경의 땅이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탈리아를 좋아했는데, 1852년 7월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한 후, 1883년 2월 베네치아에서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를 아홉 번 여행했다.

아홉 번의 여행 중 다섯 번은 북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2주 정도의 여행이었지만, 장기 체류도 많았다. 바그너는 남쪽으로 볼로냐, 피렌체, 시에나,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섬까지 갔다. 여섯 번째 여행 때는 소렌토에서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났다. 1882년 여덟 번째 여행 때는 시칠리아 섬에 머물렀고 〈파르지팔〉(Parsifal)의 총보를 완성했다. 그때 화가 르누아르가 방문하여 바그너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그림은 지금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바그너가 베네치아에서 장기간 휴가를 즐기던 1883년 2월 12일, 동행한 화가가 독서 중인 바그너를 스케치했다. 다음날 13일 바그너와 코지마 부부는 베니스에서 대운하를 가로 지르는 팔라초 벤드라민(Palazzo Vendramin)을 구경하고 있던 중 갑자기 바그너가 바닥에 쓰러졌고, 오후 3시 반경 심장 발작으로 코지마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70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2월 16일 바그너의 유해는 곤돌라로 베네치아 역까지 옮겨지고, 기차로 뮌헨을 경유해 바이로이트로 옮겨졌고 반프리트 저택(Villa Wahnfried)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바그너가 베네치아에서 처음 숙박한 호텔 다니엘리(Hotel Danieli)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 앞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 이 호텔은 발자크, 드뷔시, 조르주 상드 등도 머물렀다. 바그너는 1840년 〈독일 음악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이든은 ‘할아버지 하이든’이라는 말이, 모차르트는 ‘청년 모차르트’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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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집필자 소개

   1970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성학과를 졸업한 후 현대자동차에 근무했고 영진약품에서 이사를 역임했다. 1981년부터 대구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 동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삼익 THK의 사외이사로 있다. 저자는 6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는데, 처음에는 대학에 근무하면서 쓴 고재가 주요 장르였고, 1992년 이후부터는 피터 드러커의 저서를 집중적으로 번역 소개했다. 최근에는 예술과 경영을 결합한 새로운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접기

출처

모차르트와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모차르트와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 저자이재규 | cp명21세기북스 도서 소개

모차르트는 3,720일을 유럽 10개국과 204개 도시를 여행했다. 모차르트의 부친 레오폴트는 아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모차르트에게 세상을 보여주었고, 철저하게 가르쳤다. 18세기 유럽 문화의 절정을 꽃피웠던 이탈리아와 함께 모차르트의 음악을 소개한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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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1771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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