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환의文響’은 문화재 평론가인 김대환 두양문화재단 이사가 격주로 집필하는 칼럼입니다. ‘文響’은 문화재와 관련한 다양한 울림을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명명했습니다. 문화재 발굴현장에서부터, 유물의 보존과 보관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민족문화 유산의 의미를 새롭게 읽어내고자 합니다. 문화재를 둘러싼 시각들은 때로는 첨예한 이론적 대립과 긴장도 있게 마련입니다. 분석과 고증을 통해 발굴 유물의 가치와 의미를 평가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는 한편, 올바른 문화재 향유를 위해 학계와 정부, 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짚어내고자 합니다.
작년 12월,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S옥션에서 한해를 마무리하는 미술품 경매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현대미술품과 고미술품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출품작이 많은 현대미술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고미술품을 보다가 유리장식장안에 얌전히 놓여있는 작은 고려청자향합에 시선이 고정됐다. 12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이는 秘色의 여성용化粧容器였다. 굽바닥에 陶工의 이름으로 보이는 銘文이 흐릿하게 음각돼 있었기 때문에 여성용 화장용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사진1).
고려청자에 銘文이 새겨진 경우, 대개 그 명문의 내용은 제작년도, 사용기관, 詩, 사용처 등을 표기한 경우인데, 명문 자체는 어느 경우든 매우 귀하다. 그중에서도 도공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새겨진 완품 청자의 사례는 손꼽을 정도인데 국내에는 보물 제237호인 청자순화4년명항아리(靑磁淳化四年銘壺)에 최길회라는 도공의 이름이 굽바닥에 음각돼 있고(사진2. 사실은 933년 제작한 고려백자다), 일본에도 단 두 점이 있을 뿐이다. 일본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에 소장된 고려청자양각 연화무늬정병(사진3)과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청자음각 연화절지무늬 매병이다(사진4). 이 유물들의 굽바닥에는 각기 음각으로 ‘孝久刻’, ‘照淸造’라고 새겨져 있어서 그동안 문헌에서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청자 匠人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됐다. 특히 부안 청자요지에서 출토된 청자 굽바닥 파편 중에 ‘孝文’명이 새겨진 것이 발견돼 일본 네즈미술관 정병에 새겨진 ‘孝久’와 ‘孝文’의 관계를 친인척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청자향합 굽바닥의 ‘仁淸’명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의 고려청자매병바닥에 새겨진 ‘照淸’명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또한 친인척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고려시대 진상용 도자기에 도공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청자에 새겨진 이름은 작거나 흐려서 잘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공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새겨진 청자도 몇 점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세계 제일의 고려청자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것을 제작한 고려 도공의 이름은 국내에서 알려진 사례가 거의 없었다.
지난해 말, S옥션 경매 전시회장에서 만난 이 향합의 온몸에는 맑고 투명한 비취색의 유약이 골고루 덮여 있으며 바닥에는 세 군데의 耐火土받침 흔적이 있었다. 향합의 몸체와 뚜껑 주연부는 골이 지도록 정교하게 깎았으며 뚜껑 가운데는 커다란 연잎 한 장을 그려 넣었다. 몸체와 뚜껑이 맞물리는 곳은 유약을 훑어내고 일곱 곳에 내화토괴임을 해 뚜껑을 몸체와 맞물리게 하고 燔造한 흔적이 있다. 맑고 투명한 청자유약을 온 몸에 골고루 施釉(도자기를 만들 때에, 잿물을 바르는 일. 유약치기)한 탓에 秘色을 띄고 있으며 여인의 한손에 딱 맞게 쥐어질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졌다. 12세기 초의 官窯인 강진이나 부안에서 최상품으로 제작한 것으로 진상용 고려청자다.
고려청자의 비색은 보통 비가 개인 가을하늘의 푸른색으로 비유되는데, 중국청자에 비해 청자유약의 기포가 적고 맑고 투명해 바탕흙(胎土)까지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北宋의 汝窯靑瓷는 유약에 기포가 많고 불투명해 탁하고 색칠한 하늘색의 느낌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뛰어난 청자인지는 추구하는 목표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정할 수 없다. 사람들의 취향이 서로 다르듯이 민족의 취향도 매우 다르고 그 민족의 정서에 맞는 작품을 최고로 생각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청자가 중국청자보다 우월하다거나 그 반대라고 주장하기에는 모순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천 년 전에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고려국과 중국뿐이었다는 점이다. 고려초기의 가마형태와 생산된 자기의 형태가 중국의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중국도자기술의 수입을 주장하는 전공자들이 있으나 이는 우리나라 陶瓷史 연구에 있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잘못된 과거의 생각이다. 삼국시대의 施釉陶器나 磁器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의 不在와 문화적 사대주의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자기 생산 기술능력을 확보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우리나라 도자기의 발생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고려시대부터라고 생각하며 고려이전 시기와의 연속성을 등한시해 범한 오류다. 조선백자와 고려청자를 연구할 때는 반드시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시유도기나 자기를 염두에 둬야 한다(사진5~6). 중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唐三彩[당의 대표적인 유약 도자기. 유약을 바르지 않은 바탕이나 살짝 구운 바탕에 갈색·녹색·백색·황색·감색·벽색 등의 유색 유약을 칠해 750~850°C의 낮은 화력에서 구워 낸 것으로, 주로 백색, 녹색, 갈색의 세 가지 색으로 배합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삼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의장 무늬는 서역적인 향기가 짙으며, 형태는 세련되고 색조가 명쾌해 대체로 호화로운 느낌을 줌으로써 국제적인 唐代 귀족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송·원· 명代에도 계속 만들어졌으며, 일본·발해·요에도 영향을 줬다-편집자]가 있었듯이 우리나라에도 渤海三彩와 新羅三彩를 이미 생산하고 있었다(사진7~8). 그런데 왜 우리나라의 三彩磁器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후손으로서 깊이 반성해야할 대목이다.
2014년 겨울, 한 경매장에서 만난 청자 명문 향합. 아마도 이 향합은 900년 전, 강심장의 고려도공 仁淸에 의해 정성껏 만들어져 배를 타고 서해를 항해해 마침내 開京 어느 한 귀부인의 품속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녀의 품속에서 오랜 시간을 동고동락하다가 함께 생을 마감하고, 어느 해인가 수백 년 만에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남겨진 도공의 이름과 함께. 어쨌거나 이 작은 향합은 몇 점 남아있지 않은 고려청자의 陶工銘이 새겨진 사례로 高麗靑磁史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 역할을 할 중요한 유물이며 고려청자를 연구하는 전공자는 물론이고 후손들에게도 안전하게 남겨져야할 귀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다행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연구할 수 있는 곳에서 가져가게 돼 마음이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