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10. 10:32ㆍ美學 이야기
중국 명대(明代) 서위(徐渭)의 하화도(荷花圖) 그림과 글씨의 내용 해독
2015. 8. 26. 10:24
https://blog.naver.com/kalsanja/220462296892
規格:纵136cm,横36cm
材質:纸本水墨
所藏地:2006年 北京嘉宝国际拍卖(International Auction)
拂拂孤香滿鏡湖(불불고향만경호) 만경호(滿鏡湖 )에 외로운 향기 솔솔 부니
採蓮人靜月明孤(채련인정월명고) 고요하게 달 밝은데 연꽃 따는 사람 외롭네.
空除一隻徐熙手(공제일척서희수) 한 가지를 뺀 서희(徐熙 )의 수법으로
收拾風光在畵圖(수습풍광재화도) 경치를 수습하여 겨우 그림을 그렸네.
青藤道士(청등도사) 서위(徐渭)
* 拂拂 (불불 ) : ① 솔솔 부는 모양 ② 살랑거리다
* 收拾 (수습 ) : ① 거두다 ② 정돈하다 ③ 수습하다
当代画家齐白石自称 “ 恨不生三百年前 为青藤磨墨理纸 ”
현대 화가 제백석(齊白石) 이 스스로 말하기를 “삼백년 전부터 나오지 않은 한(恨)이 서위(徐渭)가 먹을 갈아 종이로 다스렸다.”하였다.
서희(徐熙, 10세기경)
오대(五代) 말에서 송나라 초 때의 강녕(江寧) 사람.
강남(江南) 의 사족(士族)으로, 한가하게 여유를 즐기면서 고아(高雅)함으로 자임(自任) 했다.
화목(花木)과 금어선접(禽魚蟬蝶), 소과(蔬果) 를 잘 그려 남당(南唐)의 후주(後主) 가 몹시 아꼈다.
항상 비단 화폭(畵幅) 에 무더기로 쌓인 돌과 사이에서 자라나는 약초(藥草) 싹에 새와 벌, 매미 등이 어우러진 그림을 그려 후주의 궁중을 장식하는 도구로 제공되었는데, 포전화(鋪殿花) 또는 장당화(裝堂花)라 불렸다.
송나라 태종은 일찍이 “꽃과 과일의 오묘함을 나는 오직 서희에게만 있음을 아노라(花果之妙 吾獨知有熙)”라고 말했다.
후촉(後蜀) 의 황전(黃荃)과 함께 ‘황서(黃徐)’로 병칭되었는데, 오대 화조화 양대 유파(流派)의 중요 작가이다.
아들 서숭사(徐崇嗣) 와 함께 골격을 겉에 나타내지 않아 부드럽고도 고상한 화풍인 몰골도(沒骨圖) 를 창시했다.
몰골도란 윤곽의 선이 드러나지 않게 그리는 화법이다. <몽계필담(夢溪筆談)>
고려말 학자 이인로(李仁老) 는 ‘點畵精强(점화정강) 力出於外而得徐家之風骨(역출어외이득서가지풍골) 점획이 정하고 강하여, 힘이 밖으로 노출되면서도 서희의 고상한 품격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題張學士雙明齋額題後(제장학사쌍명재액제후)>
제백석(齊白石, 1860년 ~ 1957년)
청나라 말기 호남(湖南) 상담(湘潭) 사람.
이름은 황(璜) 이고, 백석(白石)은 호인데, 제황(齊璜) 이라고도 한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북경(北京)에서 죽었다.
40살 무렵까지 고향에서 소목장(小木匠) 을 주업으로 하면서 그림을 그려 팔아먹고 살았다.
화초와 영모(翎毛), 초충류(草蟲類) 의 명수가 되었다.
처음에 송나라와 원나라 때의 그림에 촉발되고, 육유(陸游) 의 시에서도 자극을 받아 주로 독학으로 시서화(詩書畵) 를 함께 배워 능통하게 되었다.
전각(篆刻 )에도 솜씨가 있었다.
50 살 이후 북경으로 이사하여 한때 미술전문학교 교수가 되었고, 중국회화협회 회장을 지냈다.
대개 커다란 산수화보다 규모가 좀 더 작은 일상의 모습으로 다양한 흥미와 경험을 반영하고 있으며, 점차 서위(徐渭) 와 석도(石濤), 주탑(朱耷)과 같은 개성주의(個性主義)의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양주계(揚州系) 화풍을 발전시켰다.
작품에 「남과도(南瓜圖)」와 「하엽도(荷葉圖)」, 「화훼화(花卉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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