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 - 図․画․회화(絵画)․사(写)의 語源을 통해 본 동양화의 의미 김 기 주 **2)
Ⅰ. 서언(緒言) Ⅱ. 회화-화(画)․도(図)․회화(絵画)․사(写)의 정의 1. 画의 정의 1) 画의 정의 가. 画의 정의와 기능 나. 画의 공능과 인간본연성과의 관계 2) 한(漢)과 육조(六朝)에서의 회화의 효능 3) 서화동체론(書画同体論): 見其形 2. 図의 정의 3. 회화(絵画)의 정의 4. 사(寫)의 정의 1) 사(寫)의 용도와 전변(轉變) 2) 사생 가) 종병(宗炳)의 산수사생 나) 화조화-황전의 사생(寫生) Ⅲ.결어
* 본 논문은 동덕여자대학교 교내 학술연구지원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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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언(緖言) 한국에서는 아직도 회화가, 한국화, 또는 동양화와 서양화로 나뉘고 있고, 이것은 대학교의 학과명칭도 마찬가지이다. 21세기인 지금 단지 지역구분에 불과한 한국화, 동양화와 서양화로 나뉘고 있는 회화의 척도와 정의는 무엇일까? 한국미술도 20세기 초 일본 유학, 해방 전후의 구미(歐美)로의 회화 유학(遊學)의 역사가 한 세기나 되었고, 최근에는 한국만의 독자적인 근현대미술사학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연구방향은 예술가 자신의 역사적 환경이나 그림의 년대, 그림의 양식상의 수용과 전이는 연구하면서도, 역사적으로 그 당시 그 그림을 평가하는 척도나 정의는 어떠했으며, 역사적인 평가의 변이(變異)는 왜 일어났는지 등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주어지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일찍이 宋의 곽희(郭熙)가, “회화에서의 … 주된 의의(意義)가 어찌 쉽사리 얻어지겠는가? 환경의 분위기가 이미 무르익고 마음과 솜씨가 그것에 적응되어야 비로소 가로 세로가 정도에 맞고 좌우가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저 즉흥적으로 감정에 좀 거슬리더라도 그럭저럭 해치우는 경향이 있다”1)고 말한 바 있듯이, 한국회화사에서 과연 언제부터 우리 그림의 주된 의의가 상술한 환경․마음․솜씨가 어우러져 근원을 만나고, 그것에 집중해서 연구한 결과 한국 나름의 고유한 회화가 나타났을까? 곽희의 북송 시대에 상당하는 현존 고려불화도 상당한 경지에 있었으므로, 이제는 그 득실(得失)과 우리 상황에 맞게 변한 그 변이(變異)의 모습과 정당성을 따지고, 우리 그림의 실체를 따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회화는 역사적으로 중국회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한글도 조선조 세종 때 창제(創製)되었으며, 그 후에도 한자는 지속되었다. 조선조 초기까지는 체계적인 한국 화론을 찾을 수 없으므로, 본고에서는 한국화 내지는 동양화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하는 의도에서, 중국인은 강력한 숭고(崇古)의식이 있기 때문에 우선 중국의 초기 그림, 즉 그림의 용어인 (画)․도(図)․회화(絵画)․사(写)의 어원에 의한 정의부터 찾아, 회화가 어떤 의미로 시작되고 발전되었는가를 살피면서, 아울러 초기 회화의 목적과 미적 가치척도도 알아보고자 한다. 이 작업은 중국 회화의 시원(始原)은 물론이요 그 후의 중국회화의 발달,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그림 및 우리 그림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1) 곽희(郭熙), 『임천고치(林泉高致)』「畵意」.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99 그런데 중국에서는 唐, 장언원(張彦遠) 이전, 즉 남제(南齊)의 사혁(謝赫)과 그 밖의 繪畵品評(회화품평)들이 개인의 작품의 우열을 논한 데 지나지 않았는데 비해 唐, 장언원에 이르면, 자기 시대까지 회화사의 전개를 네 시대, 즉 상고(上古), 중고(中古), 근대, 금인(今人)의 시대로 구분하는 회화사 의식과 더불어 회화의 품평이 나타나고 있다.2) 그런데 그는 최고(最高)의 시대를 자기 시대가 아니라 六朝 初期인 上古, 즉 진(晉)․송(宋)의 고개지․육탐미의 시대로 보면서 상고를 추숭하는, 즉 숭고(崇古)의식을 드러내는 한편으로 唐人인, 오도자, 장조도 높이 평가하는 두 개의 시각을 갖고 있다.
장언원은 또 한편으로 “뛰어난 그림(画之妙)은 秦․漢부터 얻어 기술할 수 있지만, 거장은 남북조시대에나 배출된다”3)고 말함으로써, 이미 진(秦)․한(漢)시대에 뛰어난 그림이 있었음을 알 수는 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진․한시대의 뛰어난 작품은 한대 분묘의 선각화나 벽화, 전적(典籍)을 통해서밖에 그 모습을 추정할 수가 없다. 따라서 중국회화사에서는 회화가 아직도 고개지․육탐미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므로 숭고가 송․원․명․청을 통해 이어졌다고 해도, 그 숭고는 소식이나 미불의 당(唐), 조맹부(趙孟頫)나 전선(錢選)의 당(唐), 원말 사대가의 송(즉 董源) 등 대부분이 당․송에 집중되고 있다. 본고(本考)에서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고대에서 당(唐)까지의 가장 신뢰할만한 미 2) 장언원은 『역대명화기(歴代明画記)』 「서화지원류(敍画之源流)」에서 畵를 정의하고 그에 준거해 자기시대까지 회화사의 전개를 네 시대로 구분하여 1. 上古, 즉 고개지와 육탐미의 晋․ 宋시대, 2. 中古, 즉 전자건과 정법사의 隋시대, 3. 근대, 아마도 初唐, 盛唐시대, 4. 今人의 시대, 아마도 장언원이 『역대명화기』를 찬술할 그 당시로 나누고, 시대의 추이, 양식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파악하면서, 각 시대의 특징을, “상고(上古)시대의 그림은 붓 자취가 간결하고 그림의 뜻이 담박하면서도, 기품이 우아하고 바르다. 고개지․육탐미 유파가 이것이다. 중고(中古)시대의 그림은 세밀하고 정치(精緻)하면서도 화려함을 다하고 있다. 전자건․정법사 유파가 이것이다. 근대의 그림은 눈에 띄게 화려하면서도 기술적인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오늘날의 그림은 무질서하게 뒤섞이어 (통합된) 주장이 없는데, 많은 화공들의 그림이 이것이다”고 말해, 六朝 初期, 그의 시대 구분에 의하면 上古를 예찬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의 시대인 晩唐(만당)시대의 회화의 쇠약에 대해서는 실망을 드러내고 있다. 장언원 외역, 김기주 역주, 중국화론선집, 미술문화, 2002, p.85). 3) 張彦遠, 앞의 책, 卷一, 「敍畵之源流」(앞으로 『역대명화기』卷一의 각 장(章)은 장(章)의 명칭만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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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本考)에서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고대에서 당(唐)까지의 가장 신뢰할만한 미학․미술사 자료인, 당(唐), 장언원의 『역대명화기』를 통해 회화의 정의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우선 Ⅱ章에서는, 장언원의 『역대명화기』가 중국 회화 초기 중국 先人들이 그림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그림’이라는 한자어인 화(画), 도(図), 회화(絵画), 사(写)의 문자적 정의와 그 탄생 배경, 기능 및 효능을 통해 알아보고, 사(寫)에서는 사(寫)의 문자적 정의와 중국의 이대(二大) 화맥(画脈)인 산수화와 화조화에서 ‘산수사생’으로 일컬어진 종병의 산수사생과 화조화에서 사생(写生)으로 일컬어졌던 황전(黄筌)의 ‘사생(寫生)’ 에서의 ‘사(寫)’ 의 특징을 考究해 보되, 사(寫)의 문자적 의미는 고대 문자학서인『설문해자(説文解字)』의 정의와 『사원(辞源)』의 정의로 나누어 살펴보고, 북송에서 시작되어 각 화과(画科)로 확대된 사의(写意)는 지면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상의 자료를 통해, 동학(同學)들로 하여금 서양회화와의 차이점과 20, 21 세기에 한국그림에도 남아 있는 그러한 그림의 면모를 살펴, 현대 한국그림의 의미의 정체성 성립의 기초를 찾게하고자 한다. Ⅱ. 회화-화(畵), 도(圖), 회화(繪畵), 사(寫)의 문자의 의미 필자는 중국 회화사에 나타난 명․청 시대까지의 강력한 숭고(崇古)의식은, 한편으로는 세계회화사상 유례없이 일관된 회화, 특히 문인화의 번창과 회화사 및 회화미학의 번창을 낳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면 중국 회화사에서 과연 회화의 정의(定義)는 어느 시기에 비롯되었으며, 그 정의는 무엇인가?
본 장(章)에서는, 상술했듯이, 21세기 지금 회화(繪畵)로 볼 수 있는 화(畵), 도(図), 회화(繪畵)의 문자의 의미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의미로 쓰여졌는지, 그 정의를 차례로 장언원의 『역대명화기』를 통해 알아보고, 그 후에 사(寫)의 의미를 고구(考究)해 보고자 한다. 상술했듯이, 장언원의 『역대명화기(歴代明画記)』에 의하면 그림이 이미 秦․漢 시대에 발달했다고 해도, 작품은 기록이나 무덤분묘의 벽화나 화상석, 또는 공예작품 등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고, 본격적으로 작가기(作家気)를 가진 작가의 회화를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六朝 三期인 남북조시대이다.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01
담단경(譚旦冏)은 남북조시대 대표적인 화가로, 한말(漢末)․삼국시대의 작가 조불흥(曺不興), 동진(東晉)시대의 고개지(顧愷之), 남북조시대의 육탐미(陸探微), 종병(宗炳), 왕미(王微), 사혁(謝赫), 장승요(張僧繇)를 대표적인 작가로 들고 있다4). 그런데 중국회화는 육조, 즉 4-6세기의 화가, 고개지나 종병, 왕미, 사혁 등의 화가들이 자신의 예술관에 의해 자신의 작품 논리를 설명하고 다른 작가들을 품평하는 화론(画論)문화가 정착하면서 그림의 실체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것이 최근까지 중국회화사에서 문인화가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송의 곽희의 『임천고치』에서 보듯이, 화원화가에 의해서도 지속되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중국인의 崇古는 이론과 실제 양면을 통해 추적이 가능하지만, 전란(戦乱)이 많았던 탓인지 한국의 상황은 이와 크게 달라, 고대 한국의 작가나 현금의 작가들에게는 그러한 이론과 토론문화가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한 고대 중국화가의 대표적인 예는 고개지인데, 그는 약관의 나이에 건강(建康, 지금의 南京) 와관사(瓦官寺)에 유마힐상을 그려, 젊었을 적부터 인물화가로 이름을 떨친 당시 인물화의 거장 -그의 작품으로 <여사잠도(女史箴図)>, <낙신부도(洛神賦図)>, <열녀도> 등의 작품이 임모작(臨模作)으로 남아있다 - 이요, 최초로 산수화를 인물전신(人物伝神)에서 산수전신(山水伝神)으로 전환하여 산수화를 창시(創始)했다고 알려진 인물로, 인물화법에 대한 『画評』, 자신이 홀로 공부하던 중 독특하게 수확한 회화의 기교운영방면에 관한 『위진승류화찬(魏晉勝流画賛)』, 산수화법을 논한 『画雲台山記』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한 화론가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선 회화의 원류(源流)시대인 진(秦)․한(漢), 남북조(南北朝)시대의 회화의 의미를 『역대명화기』 「서화지원류(敍画之源流)」章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장언원의 『역대명화기』卷一 중 제일 「서화지원류」는, 그림의 정의에 관한 한, 중국인의 崇古정신의 ‘古’의 원류와 자기 시대인 당말(唐末)까지의 정의의 진전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대의 회화가 남아있지 않은 현재, 무덤벽화와 공예작품상에 남아 있는 그림을 기반으로 해서 그 시대의 그림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은 현대같이 정의가 폭주하면서도 사실상 주도하는 회화의 정의가 없는 ‘개방개념(open conception)’시대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동시에, 문헌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한다.
현대의 ‘회화’라는 용어는 최근에 쓰여지고 있는 용어이고, 우리는 20세기 초, 더 가까이로는 60년대만 해도 서화(書画)같이 화(画) 내지 도(図), 도화(圖畵)를 많이 썼다. 4) 譚旦冏 主編, 中國繪畵史綱 中,臺北, 光復書局, 民國 63년, 譚旦冏, 魏晉南北朝藝術, pp.22-25 (김기주 역, 중국예술사, 열화당, 1985, pp.7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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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언원의 『역대명화기』의 경우에도, 대개는 画이지만 図․画․회화(絵画) 등 세 가지로 쓰여 지고 있다. 각각은 공통점도 있지만, 그 쓰임새가 다르기도 하므로, 아래에서는 장언원의 『역대명화기』를 주로 해서 고대에서의 図․画․회화 등의 순서로 정의(定義)를 알아봄으로써 그 시대의 그림을 평가하는 기본 정의와 척도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画의 정의 1) 画의 정의 가. 화(畵)의 정의와 기능: 장언원은『광아(広雅)』,『미아(爾雅)』,『설문(説文)』,『석명(釈名)』에서의 화(画)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광아(広雅)』: “画(그림)는 類(류)라는 뜻이다(종류의 형태대로 그린다는 뜻이다)” 『미아(爾雅)』: “画는 形(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설문(說文)』: “畵라는 글자는 밭 사이에 생긴 경계(畛)(로부터 도출된 글자)라는 뜻이다. 글자 자체는 밭의 경계와 밭두둑을 묘사한 것으로 그 자체가 그림이다” - 이것을 이어가면 오대말, 송초(宋初), 荊浩 의 “畵는 劃이다(畵者劃也)”, 석도(石濤), 『약과화상화어록(若瓜和尙畵語錄)』의 「일획장(一畵章)」에서의 “뭇 유(衆有)의 本이요, 만상(萬象)의 뿌리로 용(用)을 사람에게는 숨기고 신(神)에게만 드러내 세속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획의 정의"5)까지 도출될 수 있다. 『釈名(석명)』: “画는 挂이다. (윤곽을 취해) 채색을 사물의 형상에 거는 것이다”고 말해, 画가 ‘형사(形似)’, ‘상형(象形)’부터 ‘경계를 묘사’하고 ‘채색을 사물의 형상에 거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근거로 상상상의 사물인 정(鼎)이나 종(鐘)의 표면에 주조(鋳造)해 놓은 도깨비를 알게 하고, 귀신이나 괴상하고 기이한 사물(怪異)을 알게하는 인식기능, 천자의 기(旗) 표시에 (천자의 상징인 日月星辰(일월성신)을) 분명히 표시해 놓은 것을 보고 백관들이 기율(紀律)을 분명히 하고 국가의 체제를 완비할 수 있게 하는 위계인식기능, (天子의 상징인 山․竜․華虫을 그린) 종묘(宗廟)의 (祭器제기 중) 술그릇(酒器)을 숙연하게 (神앞에) 진열하는 체재인지 기능, 천하의 토지측량 기능, 토지의 경계를 알게 하는 기능, 토지를 바르게 알아 각지에 적합한 농작물을 재배시키는 것(理)이 명확히 되는 기능 등 画의 광범위한 기능을 소개하였다.
5) 釋道濟 撰,, 『若瓜和尙畵語錄』 一畵章: “太古無法,太朴不散,太朴一散,而法立矣. 法於何立? 立於一畵. 一畵者, 衆有之本, 萬象之根, 見用於神, 藏用於人, 而世人不知. 所謂一畵之法, 乃自我立. 立一畵之法者, 蓋以無法生有法, 以有法貫衆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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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画의 공능(功能)과 인간 본연성과의 관계: 화(畵)는 이상의 기능 외에 당(唐) 현종(玄宗)의 개원(開元, 713-741)․천보(天寶,742-756)년간에 이르면 문물의 융성은 화육법(畵六法) 모두를 갖추지 않고 하나의 기량만으로도 선택가능하게 될 정도로 화단이 전문화되었다.6) 장언원의 畵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했던 듯, 그는『역대명화기』 모두(冒頭)인 「서화지원류」의 서두를 다음과 같은 화(畵)의 정의부터 시작하면서 회화의 공능(功能) 면과 인간본연성과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대저 회화란 것은 교화를 하고, 인간의 윤리를 조장하며, (造化의) 신비한 변화를 궁구하고, 깊숙한 것과 미세한 것을 헤아림이 여섯 가지 경서(経書)와 공(功)을 같이하며, 사계절의 운행과 그 운행을 함께 하는 것으로, 천연(自然)에서 나와야지 지어서 만든 것(述作)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7)
畵의 공능이 정치․문화․사회적인 면에서 문인사대부들이 으뜸 근거로 여기는 六經의 공능과 같이 인식행위로부터 더 나아가 초월로 우주의 근거까지 이해하는 경지까지 확대됨으로써, 앞으로 문인들이 대거 예술, 특히 서화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畵, 즉 예술행위를 인간 본연성의 자연적인 표출, 즉 ‘発於天然’이라고 보는 폭탄과 같은 선언을 함으로써 예술작업이 인간의 본성 상 어쩔 수 없는 표출본성으로 ‘자연’이라는 의식에 의해 후대 중국회화사에서 ‘창조’, ‘영감’이나 ‘천재’를 중시하는 왕유나 소식 등의 문인 회화관이 자리 잡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6) 장언원, 앞의 책, 卷一「敍畵之興廢」: “어찌 반드시 육법 모두를 온전히 갖추어야만 하겠는가! 단지 하나의 기량만 갖추어도 선택할 만하다. 혹시 인물화라든가, 옥우화, 산수화, 말그림, 귀신 그림, 화조화는 화가들이 각각 득의로 하는 바가 있다(開元天寶 其人最多 何必六法俱全 但取一技可采. 謂或人物 或屋宇 或山水 或鞍馬 或鬼神 或花鳥 各有所長).” 7) 장언원, 앞의 책, 卷一「敍畵之源流」: “夫画者..成教化 助人倫 窮神変 測幽微 与六籍同功 四時並運 発於天然 非由述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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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漢)과 육조에서의 회화 효능의 변화: 그러나 장언원의 以上의 말은 漢代에 왕충(王充, 27- 89년에서 104년?)8)이 “옛날 현인들이 남긴 글이 담이나 벽 따위의 그림 만이 겠는가?”9)고 자문하면서, 기존의 형사(形似)기능만으로는 그 말과 행동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회화의 효능이 문자에 의한 저작만 못하다’고 한 말이 육조를 거치면서 회화에 대한 시각이 크게 변모한 것을 보여준다. 즉 唐에 이르면, 왕충이 그의 『논형(論衡)』십여 편을 한마디로 말해 “허황되고 망령된 것을 미워함(疾虛妄)”이라고 하면서 예술도 허황되고 망령된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현실을 반영해야한다는 주장이나, 한대(漢代)에 나타나기 시작한 ‘고대를 높이고 현대를 낮추는(尊古卑今)’에 대한 반대는 화단에서 대세(大勢)가 되지는 못할 정도로 회화관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술이 실제생활과 달리, 漢代『회남자』에서 보였던 상상력의 지대한 역할을 하고 우리에게 그 점이 기여한 바가 크다 는 점이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대에 이러한 논의가 왕충(王充)과 같은 석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당시에 이미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신화나 귀신에 대한 그림이 상당히 번창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고, 이는 중국 철학에서 漢, 동중서에 의해 귀신의 유무에 대한 논란이 ‘귀신은 없다’ 쪽으로 결론이 난 것과 맥(脈)을 같이 한다. 그러해서인지 한대에 번창하던 상상상의 동물, 예를 들어, 농사의 신, 철(鐵)의 신(그림 1) 四神圖 등이 고구려에서는 오회묘, 강서 대묘에서와 같이 6, 7세기까지 보임에 비하면, 중국에서는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一號墳 출토 비의(飛衣, 帛畵)에서 보이는 四神(그림 2)이 早期에 소멸하였고, 분묘벽화조차 현실이 주제로 그려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한 『역대명화기』 모두(冒頭)는 당(唐) 장언원 시대 회화의 위상을 알게 하는 글임과 동시에 앞으로 宋시대 이후 회화가 왜 산수화와 화조화로 나뉘어 번성했는가를 예고하는 글이기도 하다. 8) 이 생존년대는 北京大學歷史系《論衡》注釋小組에서 출간한 『論衡注釋』(中華書局, 1979), p.1에 의거함. 9) 王充,『論衡』, 卷 12,「別通篇」: “빈 벽 위에 형용을 갖추어 놓았으나 사람들이 권장하고 격려하지 못하는 원인은 그 말과 행동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 현인들이 남긴 글이 대나무나 비단(즉 古書)에 찬란하게 실려 있거늘 어찌 한갓 담이나 벽 따위의 그림 만이겠는가(置之空壁, 形容具存, 人不激勸者, 不見言行也. 古賢之遺文, 竹帛之所載粲然, 豈徒墻壁之畵哉”(이 문장 번역 역시 앞의 책, 『論衡注釋』에 의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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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화동체론(書画同体論), 見其形 : 장언원은 「서화지원류」에서, 전적(典籍)과 도화(図画)는 하도(河図)에서 싹텄고, 사황(史皇)이나 창힐(蒼詰)이 낙수(洛水)에서 낙서(洛書)를 얻어 書를 형상화했지만, 초기에는 “서화가 아직 나뉘지 않은 상태이었으므로 (서화의) 형상화의 기준이 비로소 창제되었지만 아직은 간략했다. 그 뜻을 전할 수(伝其意) 없으므로 書가 존재하게 되었고, 그 형태를 볼 수(見其形) 없으므로 그림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과 땅, 성인의 뜻이었다”고 말해, 서화 각각의 존재 이유가 ‘그 뜻을 전하는 것(伝其意)’과 ‘그 형태를 볼 수 있게 하는 것(見其形)’ 이고, 그것을 天地․聖人의 뜻으로 보았다. 즉 그림의 존재 이유가 형태를 볼 수 있게 하는 象形이었고, 상형이기에 형태의 특성상 형에서 色이 떠나지 않게 되어 사혁(謝赫)의 화육법(畵六法)이 나오게 한 계기가 된 동시에, 후대에 화(畵)가 ‘평담간솔(平淡簡率)’ 의 ‘간솔’함을 높이 평가한 것도 근원을 중시 여기는 중국문화가 서화가 아직 나뉘지 않은 그 상태, 그 근원을 중시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라고도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서화 초기의 ‘서화동체’의 입장에는 다음 두 가지도 큰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하나는 문자학의 서체, 즉 六書(古文․奇字․篆書․佐書․繆篆․鳥書)와 연결지어 그 중 기치(旗幟)나 할부(割符) 위에 쓰는 글씨의 필획의 끝이 새머리(鳥頭)인 조서(鳥書)가 그림의 종류이고, 또 “ 『주관(周官)(『周禮』)』에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 즉 國子의 교육을 육서(六書) - 육서란 지사(指事), 해성(諧聲), 상형(象形),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로, 모두 蒼頡(창힐)이 남긴 문자의 법(法)이다- 로 한다"고 했는데, 이 양자에 이미 상형이 공유되어 있어, 사실상 서화(書畵)가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동체(同體)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육조시대 東晋의 왕희지(王羲之, 307~365)10)가 서예가에게 ‘글씨를 쓰기 전에 문자를 시각화하라’는 충고를 한 바 있듯이, 사실상 書가 ‘그 뜻을 전하는(伝其意)’ 기능만으로는 해서․행서 외의 다양한 서체, 특히 예술서체인 예서와 전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왕희지의 ‘시각화’ 요구 속에는 마치 서양의 크로체가 직관과 표현을 일치시켰듯이, 동양의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특성상 중국의 書는 고도로 추상적이면서도 필묵에 의해 순간적으로 직관으로 이해된 사상과 감정의 전달의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에, 서화동원이라는 의미 속에는 화도 그러한 요소를 동반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10) 중국 진(晉)나라의 서예가. 자(字)는 일소(逸少). 우군 장군(右軍將軍)을 지냈으며 해서․행서․초서의 3체를 예술적 완성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서성(書聖)이라고 불린다. 작품에 <난정서(蘭亭序)>, <상란첩(喪亂帖)>, <황정경(黃庭經)>, <악의론(樂毅論)> 따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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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図의 정의: 장언원은「서화지원류」에서 図․画를 ⅰ) 하나로 할 경우, 육기(陸機)의 말을 빌어, 사 물을 선양하는 기능과 형상을 남겨놓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하였고, ⅱ) 구분할 경우, 나 라가 위태로울 때 가장 먼저 챙겨야 할, 나라를 존재하게 하는 절대적인 보물(鴻宝)이요 혼란함을 다스리는 보물로, “안광록(顔光禄, 즉 안연지(顔延之): 384-456)은 “도(図)를 묘사 해 싣는 뜻에는 다음 세 가지, 즉 첫째는 『역(易)』의 괘상(卦象)같이 이법(理法)을 그림 으로 한 것(図理), 둘째는 文字学같이 개념을 그림으로 한 것(図識), 셋째는 絵画같이 형상 을 그림으로 한 것(圖形)이라고 한 것 중 셋째가 도형임을 말해, 중국의 図의 영역이 図 理․図識․図形, 즉 写形으로부터 이법(理法)․개념까지 상당히 광범위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중국이나 한국회화사에서 장르면으로는 ‘산수화’, ‘화조화’라고 하면서 작품제목에는 ‘산수도’, ‘화조도’라든가 ‘몽유도원도’, ‘강산무진도’ 등으로 ‘도(図)’가 지속되었다는 것은 작 품의 개념 속에 이 図理․図識․図形 세 가지 의미가 지속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 다.
3. 회화(絵画)의 정의: 회화라는 말이 오늘날에는 도화․도․화․회화를 총괄하는 말로 통용되는가 하면, 미술 내에서 장르를 구분할 때 사용되고 있으나, 고대로 올라가면 “(창힐 후에) 유우씨(有虞氏, 즉 순임금)가 (관복官服의) 오색(五采)을 제작함에 이르러, 회화는 그것에서 그 독자성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회화가 이미 눈부시게 오채(五彩)를 분명하게 베푸니, 그로 인하여 높고 낮음의 상징도 깊어졌다. 이에 예악이 크게 선양되고, 교화도 그로 말미암아 흥성해 졌다. 그 결과 순 임금은 겸허하고 온화한 태도를 취해 천하가 자연스럽게 다스려졌고, 찬 란하게 시가와 문장이 갖추어졌다”(「서화지원류」)고 하므로, 회화는 오히려 실제 생활인 의례(儀礼), 다시 말해서 관리들의 복식으로 위계를 구분하는 오채(五采), 즉 형만으로는 안 되는 색과 상당한 관련이 있었고, 회화가 오채가 예악과 교화의 역할을 깊게 하고 임 금과 문인의 정서를 순화하는 기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동양보다 색 이 큰 역할을 하는 서양의 painting의 번역어로 유행되게 되었음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드 는 동시에 우리가 서양화를 어떻게 보았는가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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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寫)의 정의 1) 사(寫)의 용도와 전변(轉變) 1960년, 1970년대 만 해도 화가들이나 회화과 학생들의 그림에 흔히 쓰였던, 누가 언제 어디에서 사(写)했다거나 화(画)했다는 관지(款識)는 대학의 취득 졸업학점 수 감소와 학 부제로 ‘서예’, ‘전각(篆刻)’ 등의 과목과 국사, 국어 등의 과목이 없어짐에 따라 사라졌고, 그 결과 동양화 내지 한국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필력(筆力)이나 필의(筆意)조차 점점 찾기 힘들게 되었다. 이제는 도(図)나 화(画), 또는 도화(図画)라는 용어는 물론이요 사(写)라는 언어 역시 거 의 사라지고, 서양의 painting의 번역어로 서양화 내지 회화라는 말이 보편화되게 되었다. 과연 60년대, 70년대까지는 왜 사(写)라는 의미를 썼고, 지금은 사라지게 되었을까? 우선 ‘사(写)’가 쓰이는 용도를 알아보고, 그 의미를 살펴보자. 가) ‘사(写)’가 쓰이는 경우 : 일반적으로 20세기 초 유럽에서 출발해서 지구전체를 덮 어버린 ‘추상’의 상대어로 우리는 ‘사실(写実)’을 쓰고 있고, ‘사실주의’는 흔히 ‘realism’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写’가 쓰여진 경우를 살펴보면, 사모(写貌), 사생(写生), 사의(写意), 사형 (写形), 사경(写景), 사실(写実) 등으로 쓰이고 있다. ‘사(写)’하는 내용이 모습(貌), 생(生), 의(意), 형(形), 경(景), 실(実), 형(形) 등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비가시적인 관념(意)에 이르 기까지 다양하여, 과연 동양화로 사(写)하지 못할 것은 없으니, 회화사에서 후기로 갈수록 초기의 도․화(図․画)개념보다 사(写)개념이 보편화된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회화사를 살펴보면, 사형(写形), 사모(写貌)는 중국에서 남제(南斉) 사혁(謝赫)의 화육법 (画六法)중 제 삼법인 응물상형(応物象形)과 제사법인 수류부채(随類賦彩)로 인물화에서 제시된 이래, 대상의 형과 색을 그린다는 것이 모든 화과(画科)로 확대되어 그림의 기본이 되었고, 사생(写生)은 중국회화의 이대맥(二大脈)인 산수화와 화조화에서 이루어졌다. ‘사 생산수(写生山水)’라는 용어가 4세기의 불교학자요, 산수화가인 종병에 의해 처음 쓰였고, 화조화에서는 송, 심괄(沈括, 1031-1095)에 의해 오대(五代) 후촉(後蜀)의 화조화가로 송 왕조에서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賛善大夫)를 지냈던 황전(黄筌, ?-965)11)의 채색 꽃 그림 11) 『도화견문지』와 스즈끼(鈴木敬)의 이력 내용은 字는 요숙(要叔). 사천 성도인(四川 成都人). 어려서 화성(畵性)이 있었고 장성해서는 기이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만 일치할 뿐, 많은 차이가 난다. 『도화견문지』에 의하면, 그는 17세 때 전촉(前蜀)인 왕촉(王蜀)의 후주(後主) 를 섬겨 대조(待詔)가 되었고, 맹촉(孟蜀)에 이르러 官은 検校少府監에 이르렀으며 금자(金 紫)를 받았다. 스즈끼에 의하면, 송에 들어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賛善大夫)를 지냈다. 처음 108 美術史學報 제27집 이 ‘사생’이라고 평가되었다.12), 북송대 화조화에 ‘사생 조창’이 있지만, 본 논문에서는 대 표 화가로 황전만 다루기로 한다. 화조화는 북송 말 휘종대에 이르면 휘종 자신이 채색 화조화에서 수묵화조화까지 화조화의 명인이었고, 그 후로는 꽃의 영역이 기이하고 특수 한 꽃만이 아니라 일반 꽃까지 확대되었다. 북송 말에 그러한 궁정취미 외에, 다른 한편으 로 구양수, 소식, 이공린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출현하여 詩와 辞가 번창하는 한편 그 들에 의해 화단이 주도되어 화단이 양분(兩分)되면서 이후 화원화가와 문인화로 이분(二 分)되는 현상의 기초가 닦여졌다. 그런데 문인화는 사의화(写意画)로서 “소식의 회화와 시 에 대한 판단척도는 ‘천분’과 ‘독창성’이었기 때문에, 그는 회화도 자연의 힘처럼 노력하지 도 않고 흐르는 분출하는 물로 생각하는”13) 문인화가 발달하였다. 이는 장언원의 화(畵)의 정의 즉 ‘發於自然’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소식이 ‘자기와 왕유사이에는 간극이 없다’ 고 하면서 왕유를 추숭한 이유도 아마도 문인화의 이러한 천분과 독창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고, 불교에 대한 독실함도 그 집중에 의한 초월에 한 원인이 되었으리라고 생각된 다. 언뜻 보기에, 이렇게 생(生), 의(意), 실(実), 형(形)등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비가시적인 관념(意)에 이르기까지 사(寫)의 내용이 다양하여, ‘사(写)’의 내용이 다른 것 같지만, 그러 나 산수나 화조에서의 사생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自然’이라는 문자가 지니고 있 는 의미, 즉 ‘自焉’ ‘自成’ ‘自若, 또는 自如是’의 뜻,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스스로, 저절 에는 천복년간(天復年間, 901-903)에 입촉(入蜀)한 섬서(陝西) 옹경(雍京)의 処士 조광윤(刁 光胤)에게 竹石․꽃과 참새(花鵲), 손위에 관해서는 竜水․松石․墨竹, 이승(李升)게서 산 수․竹樹, 학(鶴)은 설직(薛㮨)을 배워 -『도화견문지』는 화조는 조 처사(刁 処士), 산수는 이승, 인물․竜水는 孫遇를 스승으로 했다고 한다 - 여러 장점을 두루 모아 스스로 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황전의 그림을 보면, 그의 그림은 사실에 치중하였고, 형태가 핍진(逼真)하며, 용필이 精細 하고 부색(敷色)이 미묘하다. 그리하여 대개 궁정중의 기이한 화초, 상서롭고 진기한 새나 짐승(珍禽瑞鳥, 奇花怪石)을 그렸으므로(写), 郭若虚의『図画見聞誌』卷一「論黄徐二家体異」 에서 ‘황씨 일가의 부귀(黄家富貴)’와 ‘서씨 일가의 야일(徐家野逸)’이라고 일컬어졌다. ‘徐黄 異体’로 병칭(並称)되면서, 오대, 송초의 양대(両大) 화조화의 이대맥(二大脈)인 황씨체(黄氏 体)의 전조가 되었고, 그 화법 및 풍격은 북송 초 한림도화원의 표준체가 되었다. 배우는 사 람이 심히 많아 후세에 영향을 끼친 바가 크다. 인물, 산수, 용수(竜水), 묵죽을 잘 했고, <사생진금도(写生珍禽図)>가 전한다(路矧,『簡明中国画辞典』, 上海, 上海書画出版社, 2004, p.115 ; 鈴木 敬, 중국회화사, 1981, 吉川弘文館, p.158 참조) 12) 沈括,『夢渓筆談』巻 17,「書画」중「論徐黄二体」: “諸黄画花, 妙在賦色, 用筆極新細, 殆不見 墨迹, 但以軽色染成, 謂之写生, 徐煕以墨筆画之, 殊草草, 略施丹粉而已, 神気迥迵出, 別有生動 之意. 筌悪其軋已. 言其画麄悪不入格罷之.” 13) Susan Bush, The Chinese Literati on Painting,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p.35.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09 로;스스로 이루다, 저절로 이루어지다’; ‘처음부터 그러하다, 저절로 그러하다’라는 뜻을 갖 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14) 그런데 사(写)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그 문자적 의미를 알아보자. 나) 사(写)의 문자적 정의 : 사(写)의 문자적 정의는 한자의 뜻과 형태를 해설한『설문 해자(説文解字)』와 『사원(辞源)』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写’라는 글자는 “물체를 옮겨놓는 것(移置物体)”이라고 되어 있고, 서호(徐灝)의『단주전(段注箋)』에 주석하기를, “옛날에는 집 아래에 사물을 옮겨 놓는 것을 写라고 한다. 그러므로 집으로부터, 대체로 다른 곳에서 이방에 놓는 것이다(“古謂置物於屋下曰写, 故従宀, 蓋従他処伝置於此室也)”라고 되어 있다.『説文解字』의 입장에서 보면, 그림에서의 ‘사(写)’의 주체는 화가이 고, 화가가 화면 위에 물체든, 의(意)이든 옮겨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원(写源)』에 의하면, 写에는 ①모뜰사(摹画) ② 베낄사(謄鈔) ③ 쏟을사(曳 也) ④부어만들사(鋳像)이라는 뜻이 있다. 이 네 가지 의미를 보면 모습(貌), 생 (生), 형(形),경(景), 실(実), 형(形)은 ①, ②의 의미가, 의(意)나 実은 ③, ④의 의 미가 아닐까 추정된다. 다) 사(写)의 내용의 전변(転変) : 한대(漢代)이래 유교는 통치수단이요, 학문의 중심이요, 과거시험 과목이었는데, 유교의 가르침의 중추는 충(忠)과 효(孝)였다. 그 결과 회화는 정 치, 교화(教化)라는 유교적 필요에 의해 명군(名君), 현군(賢君), 충신(忠信), 효자, 열녀 등 의 인물초상화가 주였고, 충효의 결과 불교와 국가 간의 갈등도 지속되어 국가적 차원에 서의 공인은 325-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졌지만, 인물화의 발달은 그 후 불교가 국교가 된 육조시대에 불보살 같은 인물화, 또는 인물조각을 통해 불교 예술의 꽃을 피우 게 되었다. 그런데, 한대(漢代)에는 최대의 관심이 귀신의 유무(有無)였으므로 인물화에서도 형(形) 보다는 신(神)의 문제에 집중되어, 漢 고조(高祖)의 증손인 유안(劉安, 179-122 B.C.)은 그 의 『회남자(淮南子)』에서 ‘군형(君形)’과 ‘근모이실모(謹毛而失貌)’론을 주장하면서 -갈로 (葛路)의 의견에 따라- 군형, 즉 전신(伝神)의 중요함을 주장한 바 있고15), 육조의 고개지 14) 김기주, 중국산수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pp.36-47. 15) 유안은『회남자』권 16「설산훈(說山訓)」에서, “서시의 얼굴을 그렸는데 아름답기는 하나 즐거움을 줄 수 없고, 맹분의 눈을 그렸는데, 크기는 하나 두려움을 줄 수 없다면, 군형(君 形)을 잃은 것이다(畵西施之面, 美而不可悅, 規孟賁之目, 大而不可畏, 君形者亡焉)”고 했고, 『회남자(淮南子)』권 17「설림훈(說林山訓)」에서는 화가가 만약 그것을 관찰하고 표현하고 자 한다면, 서로 다른 대상의 특징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방법을 택하여야만 한다고 하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과 화살을 쏘는 사람의 방법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심상 110 美術史學報 제27집 (顧愷之)도 초상화의 최대관건을 전신(伝神)에 두었지만, 그의 전신의 관건은 아도전신(阿 堵伝神)으로 눈동자였다. 유안이나 고개지의 초상화론을 보면, 서시(西施)의 얼굴이나 맹분 (孟賁)의 눈은, 서시의 경우는 대상의 특성이 각각 아름다우면서 즐거움을 주는 얼굴, 맹 분은 크고 두려움을 줄 수 있는 눈이 군형(君形)을 좌우하는 것이었으므로, 한대부터의 관 상학의 발달과 귀신론의 발달은 육조라는 난세에 이르면, 한대이래의 인물화 전통이 이미 관상에 의한 형신(形神)상의 어떤 전형을 낳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그 후 불교회화 및 조 각인물상들이 발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육조 이기(二期)인 동서(東西) 양진(両晉)시대에 고개지에 의해 인물전신이 산수 전신으로 확대되고, 육조 삼기(三期)인 남북조 대치시대에, 종병(宗炳, 375-443)에 의해 ‘산 수사생’이 주장되었고, 당(唐)의 장언원은 당의 오도현(呉道玄)의 촉(蜀)의 사모(写貌) 산수 16)가 산수 변법(変法)으로 이어지면서 산수화가 李思訓 부자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17) (그림 5)고 말한다. 그런데 중국회화사상 산수전신, 산수사생에 이어 사모산수(写貌山水)가 나온 후 산수화는 이루어졌다(成)면, 그 사생의 의미는 화조화에서도 같은 의미일까? 오대 (五代)에 화조화가 탄생하면서 심괄에 의하면, 황전의 (화조)사생이 있었다. 화조화의 경우 도 ‘사생’이라는 말은 정치적 혼란기, 그것도 산수가 수려하고 예술이 발달한 촉(蜀)지방에 서 나와 그 이후 안정기가 되어서야 하나의 독립 장르가 되었다. 즉 산수화는 수․당대, 화조화는 북송대에 급격히 발전하는데, 그것은 왜 그럴까? 한국에서는 영․정조대에 겸제 나 단원의 화조화를 보게 되고, 우리만의 특성도 보이는데, 그것은 중국화만의 특성일까? 그러나 양국의 화조화는 문물이 발달했을 때 발달했다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영․정조대의 화조화에 대해 화론의 논의나 주목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 (尋常, 尋은 8자요 常은 16자)을 벗어나면, 그림 그리는 사람은 터럭 하나하나에 힘쓰다 그 모습을 잃는다. 활 쏘는 사람은 작은 것을 겨누고 큰 것은 버린다(尋常之外, 畵者謹毛而失貌, 射者儀小而遺大).” 갈로는 위 두 예를 인용하면서, “군형은 회화에서 표현되든, 음악에서 표 현되든, 전신(傳神)이니 예술창작과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p.55)고 “군형은…전신이 다”고 말하고 있다(갈로 저(著), 강관식 역(譯), 중국회화이론사, 미진사, 1989, pp. 54-57 참 조). 16) 사모산수의 ‘사모(寫貌)’에 대해서는 장언원외 저(著), 김기주 주석, 중국화론선집, 미술문화, 2002, p.97, 註 277 참조. 17)『歴代名画記』巻一, 五. 「論画山水樹石」: “(오도현이) 촉을 여행하는 중에 (자연에 따라 中 原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뛰어난) 산수와 닮은 산수를 그렸는데, 이것을 계기로 하여 산수 화의 変法(즉 혁신)이 오도현에서 시작하여 두 이씨(이장군과 이중서)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於蜀道写貌山水, 由是山水之変, 始於呉, 成於二李)”.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11 문들이 해명되어야 한국이나 중국의 회화사 내지 회화작품의 진정한 이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라) 사의(寫意) : 사생 이후 우리는 북송 문인에 의한 사의화의 탄생과 성장을 보게 되 고, 이것은 그 후 원대말기에 이르러 급성장한다. 수잔 부시는 사의를 두 가지 태도로 보 고 있다. 하나는 사의(寫意)를 “생각을 스케치하는 것, 또는 적는 것”인데, 이 경우는 일반 적으로 사군자, 즉 매․난․국․죽에 쓰이는 사(寫)요, 또 하나는 송대 문인전통에서 후에 문인들의 그림에 종종 적용된 ‘사의(寫意)’라는 용어에 이르게 된 것에 가장 가까운 ‘취 (趣)’로 보면서, ‘의취(意趣)’를 합성어로 쓰는 경우이다 -趣를 시작한 미불의 경우에는 그 의 意=趣를 확인시키려는 듯이, 합쳐서 ‘意趣’ - 문맥상 ‘분위기(mood)’로 번역되는 것이 좋을 듯하다-라는 합성어로 쓰기도 하였다.18) 그런데 ‘취(趣)는 구양수(歐陽修)가 산수화 위 에 쓴 제발(題跋)로부터 볼 수 있듯이, “쓸쓸함과 평온한 것, ……도달하기 어려운 분위기 (趣)의 감정들(蕭條澹泊……閒和嚴靜)”, 즉 형상화하기가 어려운 취(趣)이므로 의(意)’, 즉 ‘생각’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그러나 생활에 어떤 감정이 내포된 趣를 意로 본다. 그러나 이 사의는 본 논문의 지면(紙面)의 제약과 논의의 방향이 그림이란 무엇인가?이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중국 산수화의 이대맥인 산수화와 화조화에서의 사생만 살펴보기로 한다. 2) 사생 우선 중국화의 최대 화과(画科)요, 이 화과로 모든 것을 총괄할 수 있다는 산수화에서의 ‘산수사생’, 즉 종병의 산수사생과 오대 말 宋初의 황전의 화조화에서의 사생을 순차적으 로 살펴 사(写)의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 가) 종병(宗炳)의 산수사생 남조(南朝) 송(宋)의19) 종병은 흑백론(黑白論)의 형신론(形神論)을 주도했던 유명한 불 18) “내 수장품 중에 있는 동원의 구름 낀 경치의 산수화는, 전 폭을 옆으로 펼치면, 산의 구조 가 숨었다 나타났다 하고, 나무 가지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데, 분위기(意趣)가 고고하 면서 고풍을 띠고 있다(余家董源霧景橫披全幅, 山骨隱顯, 林梢出沒, ‘意趣高古’)”는 미불의 말 과 조보지의 거연 그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평, 즉 “승(僧) 거연의 그림은 가까이에서 보 면 사물의 형상이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은 듯하지만, 멀리에서 보면 어두움과 밝음, 앞과 뒤의 ‘의취(意趣)’가 모두 포착되어있다(翰林沈存中筆談云: ‘僧巨然畵, 近視之幾不成物象; 遠 視之則晦明向背, 意趣皆得.’)”(조보지(晁補之),『계륵집(雞肋集)』,Ⅶ.33. 20b-21a)를 비교해 보 면 ‘의취’의 의미가 어느 정도 이해될 것이다(Susan Bush, The Chinese Literati on Painting,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p.68 참조). 112 美術史學報 제27집 교학자요 20), 거문고를 잘한 山水画家이다. 일반적으로 중국회화사에서 산수화는 고개지 (343, 344, 345-406)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나, 본격적인 출발은 종병의 산수사생과 왕미(王 微, 415-443)의 상징도식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이 후대까지 지속되므로, 그들의 문자적 의미뿐만 아니라 화론을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지면의 한계상 여기에서는 종병의 이론만 살펴보기로 한다21). 장언원(張彦遠)은 『역대명화기(歴代名画記)』에서 임학(林壑)에 정(情)을 쏟으며 거문고와 술(琴酒)과 더불어 연하(煙霞, 즉 산수) 속에서 홀로 살았던 종병의 산수에의 뜻이 멀고 자취가 높음(意遠迹高)을 말하고 있는데22), 그의 은일적 문인의 견지에서의 산수사생론이 어떤 모습을 취해 나타나고 있는지를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① 사생산수: 종병은 고조(高祖)의 벼슬 제의를 사양하고 후한(後漢)의 은자(隠者) 상평 (向平)의 뜻을 본받아 은둔한 은둔자였다. 그의 저서인『화산수서(画山水序)』에 의하면, 그의 산수화는, 한편으로는, 신(神)은 본래 단초가 없으므로 그림자 자취인 산수의 형을 통해 이치가 들어가게 그려낼 수 있다면 실로 다한 것이라는 생각 하에,23) 산수사생은 산 수의 理 에 들어가기 위한 형의 사생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늙고 병들자 명산(名山)을 두루 멀리 노닐기(遠遊) 어려우므로 山水를 그려놓고 ‘가슴을 맑게 해서 형상을 완미한다 (澄懐味象)’는 현자(賢者)의 열(列)에서 누워서 노닐기(臥遊) 위함이었다.24) 형을 통해 신 19) 田中勇次郎은 “梁에 宗炳있다”고 宗炳을 梁人으로 보나(田中勇次郎, 文人畵論集, 中央公論社, 東京, 1982, p.37) 宗炳의 没年은 宋 文帝(424-453) 年間이므로, 일반적으로 기술되듯이, 宋人 으로 보기로 한다. 20) 그는, 도안(道安) 문하(門下)에서 수행을 시작하였으나 乱으로 그와 헤어진 후 평생을 여산 (廬山)에서 나집(羅什)과의 서신(書信)이나 인편(人便)을 통해 질문함으로써 불교의 난해한 사상을 쉽게 풀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장안(長安)의 구마라집(鳩摩羅什)과 쌍벽을 이룬 여산 (廬山) 혜원(慧遠, 334-416)의 제자로, 양대(梁代)에까지 미친 신멸(神滅)․불멸론(不滅論)의 논쟁 중에 나온 하승천(何承天)의 <달성론(達性論)>에 대한 반박서(書인) <명불론(明仏 論)>, 혜림(慧琳)의 「흑백론(黒白論)」,一名 「균선론(均善論)」(未伝)에 대한 반박서인 「난흑백 론(難黒白論)」(『弘明集』 卷 第二및 三 所載)등을 저술한 불교학자이기도 하다. 21) 종병의 사생산수 부분은 김기주, 「중국산수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동국대학교 철학과 박 사학위논문, 1992) pp.134-140을 발췌 요약한 것임. 22) “종병(宗炳), 왕미(王微)는 모두 소유(巣由, 즉 巣父와 許由)를 본떠, 임학(林壑)에 정(情)을 쏟으며 거문고와 술(琴酒)과 더불어 연하(煙霞, 즉 산수) 속에서 홀로 살았다. 각각 화서(画 序)가 있는데 그 뜻이 멀고 자취가 높아 그림을 모르는 자와 논하기가 어렵다” 23) “神本亡端 棲形感類 理入影迹 誠能妙寫 亦誠盡矣” 24) “거문고와 글씨(琴書)를 妙하게 잘하고, 말의 이치(言理)에 정통(精)하며, 산수에서 놀 때는 가면 돌아옴을 잊었다. 늙으면 명산을 두루 보기가 어려워, 가슴속 회포를 맑게 하여 도(道)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13 (神)이나 리(理)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생을 통한 형의 숙지(熟知)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그에게 “道를 명상하는 것만큼이나 道의 이해로 다가가는 데 효과적인 길”이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에 산수시(山水詩)의 유행과 길을 같이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산수화론에는 그가, 선(禅) 경전(経典)과 번역에 대해서 열렬한 관심을 보 여,25) 30여 년 동안 여산(廬山)을 내려오는 일이 없이 선(禅) 경전의 역출(訳出)과 염불삼 매에 정진한 혜원이 420년 불법(仏法) 홍보를 위해 염불삼매와 아울러 서방왕생(西方往生) 을 서약하면서 결사(結社)한, 엄격한 ‘백련사(白蓮社)’26) 123人의의 회원 중 한 명이었다는 점, 다시 말하면 청정성과 엄격함이 보인다. 혜원은 반야학자(般若学者)이면서 또 유(儒)․ 노장(老荘)에 통달했는데, 종병 역시 신불멸(神不滅)과 윤회응보(輪廻応報) 등 사후(死後) 문제에서는 불교에 가깝고, 마음을 정화해서 정신을 수양하는[洗心養神] 生문제에 관해서 는 도가나 신선가(神仙家)에 가까운 성향을 띠고 있어 혜원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 다. 그러므로 그가 산수화를 도(道)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나, 그의 산수화에는 몇 가(家)의 도(道)가 융합되어 있고, 그가 말한 성인(聖人) 역시 현자(賢者)에 비해 한 차원 높은 자 (者)를 말함에 불과하다. 이 시대의 회화 수준 상에서 보면, 회화사상이 선행(先行)하고 실 제의 제작양태는 뒤짐도 보이지만, 시행기(試行期)가 갖는 자유로움과 새로운 규칙이 지배 적이었던 듯이 보여진다. 를 보면서(澄懐観道) 누워서 그곳에서 놀고자 하였다. 무릇 놀면서 밟은 곳(遊履) 모두 이것 을 방(室)에다 그렸다.” 25) 道安門下에서 小乗禅을 배우면서 禅経典의 訳出이 적고 安世高系의 禅経典이 雑然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중, 391년 廬山에 온 僧 伽提婆를 따뜻하게 맞아 「阿毘曇心論」 4권 을 尋陽에서 역출(訳出)하게 한 데 이어, 410년경에는 구마라집에게 배척을 당한 禅을 잘하 는 북인도 출신 持律沙門. 仏駄跋陀羅와 그의 門下 一団을 영입하여 - 그 중에는 그의 門下 로 구마라집에게 유학(留学)하여 뛰어난 禅의 達人인 仏駄跋陀羅에게 귀의한 慧観도 섞여 있었다 - 禅의 지도 및 達摩多羅가 仏大先에게 준 説 - 切有部의 중심지 罽賓에 있어서 정 통이면서도, 専門 禅経典으로 五部분열 이전의 근본 禅을 説하고 있는 『修行方便禅経』의 訳出을 의뢰하여 이루어 냈다. 26) 혜원은 오호(五胡)의 난으로 유망(流亡)한 동진(東晉)의 신래(新来)귀족의 음울한 청담(清談) 의 유민(遺民)적 경향의 허무념담(虚無恬淡) 사상에 대해 염불삼매(念仏三昧) - 이 염불은 「반야삼매경(般若三昧経)」에 의해 시방현재불(十方現在仏)의 하나로서 미타를 념(念)하는 미 타염불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한다 - 를 제창하고 실행함으로써 새로운 기풍이 형성되게 해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한편, 420년 불법(仏法) 홍보를 위해 염불삼매와 아울러 서방왕생(西 方往生)을 서약한 ‘백련사’를 결성하였는데, 입사(入社)가 엄정하여 귀신(貴紳)가운데서도 사 령운(謝霊運)은 심루(心陋)하다 하여 입사가 거부되는가 하면, 도연명(陶淵明)은 음주 때문에 자신이 입사를 고사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114 美術史學報 제27집 그의 사생산수는 상당히 자연대로에 가까운 산수사생이면서도,『역대명화기』가 “표연 (飄然)한 물외(物外)의 정(情)은 속화(俗画)로서는 그 의지(意旨)를 전(伝)하기 어렵다”고 평하게 할 정도로 속기(俗気)가 전혀 없는 경지여서, 현대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사생 의 의미라든가 앞으로 황전의 사생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의 사생은 투시법(透視法) 이라는 점에서는 서양화의 사생화와 일치하는 면도 있지만, 『화산수서(画山水序)』에서 보이듯이, 서양화에서의 사생과는 제작․감상 양면에서 전혀 다른 고도의 정신성을 요(要) 하는 독특한 경지의 사생관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산수를 질(質)을 갖고 있으면 서 영(霊)을 좇는(有質而有霊), 영적인 존재로 해석하였다. 이것은 天․地․人 三才를 하나 로 보는 한대사상을 잇는 것으로, 그 후 중국 산수화가 세계회화사상 유례없이 발달한 이 유 및 자연관의 기본이 되었다. 그러기에 산수는 인지(仁智)의 낙(楽)이 된 동시에 유(游)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27) 이것은 송까지 그대로 전승되어 『임천고치』에서는 ‘거유 (居遊)’의 산수로 전이되었다. 그에게, 성인과 현자는 도(道)를 품고 있어서 만물의 변화에 응하면서 물상(物象)을 통 과해 추상적인 도를 밝힐 수 있고, 물적인 존재이면서 영적인 존재인 산수 역시 도를 체 현(体現)할 수 있다. 이는 종병이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모두 ‘도(道)’로부터 시작해, 도 라는 관념 하에서 통일시키고 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형으로서 道를 꾸민(以形媚道) 山 水는 ‘질(質)을 갖고 있으면서 영(霊)을 좇으므로(質有而趨霊)’, 산수의 상(象)은 ‘마음을 맑 게 한’ 고죽지류(孤竹之流)의 마음,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관계는 현학가가 말 하는 ‘의(意)’와 ‘상(象)’의 관계로, 처음에는 허현(虚玄)의 도(道)로부터 말해 사람으로 하 여금 어려운 감을 느끼게 하는 점은 있으나, 이로부터 자연에 응대하는 태도에서 오히려 화가를 발휘하여, 자연에 내재하는 의미를 표현함에 있어서 오히려 주체의 창작의 공능성 (功能性)이 적극적인 의의를 갖게 되는 면이 있다. 27) 종병,『화산수서』: “성인(聖人)은 도(道)를 함유하고 物에 응하며(含道応物), 현자(賢者)는 마음을 맑게 해 象을 음미한다(澄懐味象). 山水에 이르면, 山水는 질(質)을 갖고 있으면서 영(霊)을 좇으니(質有而趨霊), 그 태도는 헌원씨(軒轅氏, 즉 黄帝), 요(尭), 공(孔), 광성(広 成)), 대외(大隗), 허유(許由)등 고죽지류(孤竹之流)로서이고, 반드시 공동(崆峒), 구자(具茨), 막막(藐邈), 기수(箕首), 대몽(大蒙)의 유(游)가 있다. 또 인지(仁智)의 낙(楽)이라 칭할 수 있 다. 성인(聖人)은 신(神)으로서 도(道)를 法받으니 현자는 통하고, 산수는 형으로서 道를 꾸 미니(以形媚道) 仁者는 楽한다. 또한 가깝지 아니한가?”(王伯敏 主編, 『中國美術通史』, 山 東敎育出版社, 1987, pp. 116-117).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15 ② 자연의 道의 감신(感神)→신초(神超)→이득(理得)과 와유(臥遊)의 경계(境界) : 그 런데 그 경우 성인은 신(神)으로 도(道)를 法하고, 산수는 형태로 도를 아름답게 하고(以形 媚道) 있으며 孤竹之流로서 游하는 경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때의 游의 경계는 그가 지니 고 있는 道․釈․儒 중 어느 것인가? ‘예에서 노닌다(游於芸)’의 유가적 ‘유(游)’인가? 장자 (荘子)의 「소요유(逍遥遊)」의 유(遊)인가? 종병의 기술(記述)을 보면, 동진(東晋) 말(末)․유송 초(劉宋 初) 시인들이 노장(老荘)을 논하지 않고, 이미 청담(清談)으로 눈에 가득 찬 아름다운 산수에 들어가 화가가 몸둘 바 를 모르고 山水와 노닐면서, 원래 신본무본(神本無本)인 산수화가이지만, 주객체(主客体)가 교융(交融)하는 가운데 趣에 오히려 자신의 신사(神思)가 녹아 理가 획득되는 경지임을 설 명하고 있어,28) 儒․道家 両面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이때의 ‘이치가 획득됨(理得)’ 이 감신(感神)후에 신이 초월해야(神超) 가능하다 함은 회화사에서 세 가지 의미를 가진 다. 하나는 정신이 초월한 경지에서 인간이 神과 同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즉 한대(漢 代)의 동중서(董仲舒)의 “天地人主一也”를 이어, 왕충(王充)이 주장한 ‘하늘과 사람은 같은 도를 가졌다(天人同道)’의 천(天)을 자연으로 바꾼 것으로, 그때 인간은 자연과 하나가 된 다는 점, 이는 청담과 노장유행의 결과 자연에 대한 찬양과 집중이 만들어낸 육조시대의 특성인 동시에 염불삼매(念仏三昧)와 선삼매(禅三昧)를 주창하고 실행한 혜원 문하에서의 삼매라는 특수한 경지에서 정신이 초월하여 리(理)를 획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다른 하나는 “산수에 머무는 것이 道에 접근하는 최고의 방 법이다.” 즉 산수에서 삶의 기쁨을 심상(心賞)하여 눈→마음→神으로, 다시 말해서, 산수에 서의 감동이 결국 神이 비상하여 理를 얻는 ‘神超理得’, 즉 신(神)보다 리(理)를 상위에 둠 으로써 당시의 노장(老荘)의 풍조와는 또 다른 불교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령운의 용맹정진하는 산수시(山水詩)의 경계보다 오히려 더 여유로운 ‘유(游)’의 자세이다. 세 번째는 자연과의 감응이다. 이러한 감응 내지 감동은 인간의 감정을 열어놓 은 상태로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 것으로 감정을 배제한 서양과는 전혀 다른 요소이다 28) 다음과 같은 기술이 바로 그 예가 될 것이다: “나는 여산(廬山), 형산(衡山)을 사모하고, 형산(荊山), 무산(巫山)에 왔다 갔다 하면서 늙음이 장차 올 것을 알지 못했다.” “몸은 우물쭈물 방황하는 바인데, 눈에는 (볼 것이) 빽빽하게 들어선 바이다(身所盤桓目所綢繆).” “눈으로 마음을 회득함이 理이다(以目会心為理)” “응당 神과 감응할 수 있어야 神이 비상하여 理를 얻는다(応会感神 神超理得).” “만 가지 趣가 그 신사(神思)를 녹인다(万趣融其神思).” 116 美術史學報 제27집 라는 점이다. 쉴러에 이르러 서양에서는 완전한 인간이란 감성과 이성이 조화로운 상태라 고 함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순수이성자인 신(神)이 아니라 감성을 지닌 인간임이 인정되 었는데, 중국에서는 일찍이 희로애락(喜怒哀樂愛惡懼)이나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인정되었었고, 이것이 오히려 예술의 다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되면 참다운 산수(真山水)를 찾는다 해도 그림보다 나을 것이 있겠는가!” 고 자문(自問)하고 참다운 산수화가 오히려 산수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늙어서 真山水를 못 찾게 된 그가 山水画로 그것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 명불론」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명불론』은 논리 면에서 보면, 『역(易)』의 ‘신(神)’철 학과 노장의 ‘양신(養神)’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이 자신이 소유한 불멸의 정신에 의해 궁극적으로 불자(仏者)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고 성불(成仏)의 가능성과 그 근거를 철학적으로 밝힌 것인데, 이것은 혜원의 “불이 땔감에 전해짐은 神이 다른 形에 전해짐과 같다”, 다시 말해서 산수화의 形의 실감나는 완성은 불이 땔감에 전해지듯이, 현실 속의 자연과 상응하며 우리의 정신을 움직일 것이고, 그리하면 우리의 정신은 앙양되어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③ 산수의 빼어남과 영(靈)의 재현의 조건 : 그러나 그의 산수사생의 특징은 독특한 투시화법과 그 목적이다. 산의 크기는 원근에 따라 달라져 곤륜산(崑崙山)같은 큰 산도 손 가락 한 마디로 축소될 수 있지만, 실제의 거리와 그림 속의 거리의 대비는 자유로워 ‘작 은 것을 제어해 비슷함에 빠지지 않고’ 나의 본래의 神을 지켜 ‘자연의 세(自然之勢)’를 얻어야 비로소 숭산(嵩)․화산(華)의 빼어남, 현빈(玄牝)의 霊이 그림 위에서 현현될 수 있고29), 바로 이것이 산수내지 산수화가 관람자로 그 감응이 이어지는 매개체이다. 그 런데 요최(姚崔)는 『속화품(続画品)』에서 그 당시에 양(梁)의 소분(蕭賁)이 “일찍이 부채 그림 위에 산천을 그린 적이 있는데, 지척(咫尺)내에 만리(万里)의 멈(遠)이 보이고 네모 29) 종병,『畵山水序』: “곤륜산(崑崙山)의 큼도 눈동자의 작음도 눈에 다가가 한 마디쯤 크기 (寸)가 되면 그 形은 보이지 않는다…… (전통적인 遠小近大의 원근법에 대해서 과학적인 写生에 근거한 원근법으로 접근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렇다고) 점점 멀어지면 그 모습은 더 욱 더 작아진다. 지금 비단 바탕을 펴 멀리서 베낀다면 곤륜의 形은 네모 한마디(方寸)안으 로 들어올 것이다. 세로 획(竪劃) 세 마디(三寸)는 천길 높이에 해당하고, 가로(横墨) 수척 (数尺)은 백 리(百里)의 멈(遥)을 체(体)한다…… 이러므로 그림을 보는 자는 단지 종류(類) 가 공교하지 못함을 두려워하는데, 작은 것을 금함(制)으로써 그 비슷함에 연좌되지 않는 것, 이것이 자연의 세(勢)이다. 이와 같다면 숭산(嵩)․화산(華)의 빼어남, 현빈(玄牝)의 霊은 이것 모두를 한 그림에 얻을 수 가 있다.”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17 한 마디(方寸)안에 천길(千尋)의 가파름(峻)을 변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지척이 만 리(咫尺万里)이고, 霊이 있고 빼어남이 있는 산수화’는 사실상 종병의 투시원리(透視原 理)의 운용이 없었다면 얻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이는 종병의 투시원리가 양대(梁代)까지 이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제작상, ‘応会感神’과 ‘神超理得’의 경지의 근거로 투시화법을 요구하였지만, 감응은 사물에 응해 형을 그릴 것(応物象形)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투시도법과 응물상형 위에 神지킴이 요구되었는데, 그 神지킴은『명불론(明仏論)』으로 볼 때, 인간의 마음이 바로 神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도(自然道)를 체험하고자 하면, 즉 본래 神을 지키면 道 의 작용인 神과 일치하는 것이므로, 主와 客이 自然道로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④ 창신(暢神)․양신(養神)의 도(道) : 그러나 写生山水에서의 수양의 삼매(三昧)의 경 지는 중국회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과연 자연에의 감응과 수양의 삼매(三昧)의 경지와 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전변화했는가? ‘수양설’ 면에서 볼 때, 그에게는 또 “기를 응축시켜 몸을 편하게 한다(凝気怡身)”“이기 (理気)에 편안히 산다(閑居理気)”등 도가(道家)의 ‘양생(養生)’의 색채가 있다. 이는 동양에 서는 그림공부와 양생공부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차원에서의 이야기임을 알게 한다. 그것을, 예술상에 운용하면, 도가의 양생은 “含道暎物”, “澄懐味象”을 위한, 즉 자연의 이해 와 감수(感受)에 전제가 된다. 이 전제 위에서, 그는 자연이 사람에게 주는 미적 향수와 자연미(自然美)를 재현한 산수화가 사람에게 주는 미적 향수는 모두가 신을 펼치는 ‘창신 (暢神)’이라고 인정하고, 따라서 산수화는 ‘창신(暢神)’ - 이 ‘신(神)’은 그의 철학의 중추가 되는 개념으로 ‘양신(養神)’의 神이기도 하다 - 을 주로 할 것을 주장한다. 이 ‘창신론’은 산수화가 인물화의 특수 공능(功能)과 다름을 정확히 반영한 것으로, 산수와 아울러 산수 화의 위치도 서양화에서 본 일반적인 사생산수와는 판연히 다른 최상의 경지에 이르게 하 여 이후 중국회화에서 산수화가 주가 되는 근거가 되었다. 그 경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혜원을 알아보는 것이 그 간극(間隙)을 해결해 주리라 믿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 다.30) 30) 中村元․笠原一男․金岡秀友 監修‧編集, 『アジア仏教史 中国編Ⅰ』, 1976, 東京, 佼成出版社, pp.32-33, pp.103-110 참조; 김기주, 중국 산수화의 기원, Ⅳ章 1節 2. 南朝의 形神観 참조. 118 美術史學報 제27집 나) 화조화 - 황전(黄筌)의 사생(写生) ① 황전(黄筌)의 사생기법 오대에 서희와 황전(?-965)31)이 병립(並立)한 후, 宋에 이르면 인물화가 쇠진하고, 산수 화와 화조화가 융성하여 중국화의 이대 화맥(二大 画脈)으로 자리 잡았고, 이것은 중국뿐 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송초의 산수화가 대산(大山) 위주의 대관(大観) 산수, 즉 전도(全圖)양식에서 북송 말에 중요한 부분만을 그리는 ‘일폭화(一幅 画)’로 진행되었다면, 화조화는 오대 말 송초에 이미 중요한 부분만 확대하는 현대회화에 서의 일폭화 개념이 서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폭화의 연장선상에서 황전의 사생화조화의 특성과 의미를 심괄(1031-1095)의『몽계필 담(夢溪筆談)』권17「서화(書畵)」와 남송 말, 조희곡(趙希鵠)의『동천청록집(洞天清禄 集)』의「고화변(古画辯)」, 곽약허의『도화견문지(図画見聞誌)』卷一「論黄徐二家体異」, 현대의 유곤(兪崑)의 기술 등을 통해, 혹은 서희의 몰골화(沒骨畵)와의 비교를 통해 추정 해 보기로 한다. 黃氏體 사생의 작법(作法)과 서희 몰골화(沒骨畵)의 차이점: 심괄(沈括)은 황전의 그 림이 가벼운 색으로 물들이되 거의 먹자취가 보이지 않는 채색의 묘에 있었고, 서희는 특히 간략하고 거칠고(草草), 거칠고 예쁘지 않은(麄惡), 대략 붉은 분을 베풀었을 따름의 묵필(墨筆) 그림이었지만, 신기(神気)가 빛나고(迥出), 별도로 생동(生動)의 경지(生動之意) 가 있었는데, 황전의 거칠고 예쁘지 않아(麄惡) 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비평에 그의 아들 서숭사가 채색 몰골로 바꾸자 오히려 그림의 기운이 서희에 미치지 못함이 멀고 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32) 그러므로 기운 중시의 중국화에서는 서희와 서숭사의 수묵몰골과 채색 31) 공숭(孔嵩)과 같은 선생에게 사사했으나 공숭은 師法을 지켰을 뿐 따로 새로운 의 도(新意) 를 내지 못했으나, 전(筌)은 결국 스승의 예(芸)를 초월했다고 알려졌으며, 한림원대조(翰林 院 待詔)를 받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兪昆, 新正中国絵画史, 華正書局, 1982, p.161. 32) 沈括, 『몽계필담』권17「서화」: “国初(즉 송초)에 江南布衣 서희…한림대조 황전은 모두 画를 잘 하는 것으로 저명했고, 더욱이 花竹을 잘(長)했다. 後蜀이 평정되자 황전 및 그 아 들 居宝와 居実, 아우 惟亮은 모두 한림도화원에 예속되어 一時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강 남이 평정되자 서희가 수도에 이르러 図画院에 (그의 그림을) 보내어 그 화격(画格)을 품평 하게 하였다. 황전과 그의 아들과 동생은 꽃을 그림에 묘(妙)는 채색에 있었다. 용필이 새롭 고 섬세했으며, 거의 먹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벼운 색으로 물들여 이루어 놓았는 데, 그것을 ‘사생’이라고 한다, 서희는 묵필(墨筆)로 그것을 그렸는데, 특히 간략하고 거칠고 (草草), 대략 붉은 분을 베풀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신기(神気)가 빛나고(迥出), 별도로 생동(生動)의 경지(生動之意)가 있었다. 황전은 반목함을 싫어하여(筌郡其軋已) 그의 그림이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19 몰골이 오히려 수묵담채의 몰골로 명청대 문인 화조화로 이어졌다. 화조화의 대상과 作法-부귀(富貴)이지만 생의(生意)가 있고, 似粉堆而不作圏線 :『동 천청록집(洞天清禄集)』의「고화변(古画辯)」에서는“황전인즉 맹촉 주(主)의 화사(画師)로, 눈으로 부귀를 보아, 제작한 바 대개 아름다운 정원의 아름다운 꽃(綺園花錦)은 참으로 분 채를 쌓아놓은 것 같은데 도선(圏線)33)을 만들지 않는다. 공작이나… 아름다운 새나 짐승 은 움직이고 멈추는데 생동하는 뜻(生意)이 있다34)”고 말해, 그의 화조화의 대상이 아름다 운 정원의 아름다운 꽃(綺園花錦)과 아름다운 새나 짐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화원화 가였던 만큼 장식적인 그림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지만, 그의 그림이 “움직이고 멈추는데 생동하는 뜻이 있다” 즉 ‘動止生意’로 평가되었음은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즉 그의 그림이 명품인 이유는 사생이면서 생의가 있었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대상의 표현방법은 어떤 방법이었을까? 스즈끼는 상술한 내용을 ‘황전 그림 은 철선묘 같은 굳세고 예리한 구륵선이던가, 또는 안료를 두껍게 쌓아올려 구륵선이 은 폐될 정도로 분채(粉彩)에 가리어졌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고 추정하면서, 조희곡 이 송말 理宗(리종, 1224 -1264)경의 사람이라는 것과 송대 화조화풍에 몇 번인가의 변화 가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강남화(江南画)에 특히 애착을 보인, 북송 말 미불(米芾)의 『화사(画史)』에 의거해 황전의 화법이 강남화 법의 창시자의 일인(一人)으로 서희와 대립하는 화법이었다고 말하면서, 황전의 그림은 모 사하기가 쉽지만 수집하기가 만족스럽지 못한데, 서희의 그림은 모사할 수가 없다고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35) 이것은 미불시대에 황전의 화조화가 이미 일반화되었음과 그의 거칠고 예쁘지 않아(麄惡) 格에 들어가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내쳤다. 서희의 아들은 곧 여러 황씨(즉 아들 居宝와 居実, 아우 惟亮)의 格을 모방하고, 다시는 묵필(墨筆) 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채색으로 그것을 그렸는데(図) 그것을 ‘没骨図’라고 하였다. 정교 함(工)이 황씨들과 아래하지 많았으므로 황전 등이 다시는 하자를 지적할 수가 없었다. 결국 화원에 작품을 나란히 설 수(歯)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운은 모두 서희에 미치지 못함이 멀고 심했다(遠甚).” 33) 스즈끼는 도선(圏線)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다. “도선은 선으로 둘러싼다는 뜻일 까?” 같은 「고화변」 중에서 “최백은 대개 고격(古格)을 사용한다. 화조를 제작하는 데는 반드시 도선을 한다. 굳세고 날카로운(勁利) 철사(鉄糸) 같고, 메꾸는 데는 중채(重采)로 하 는데, 참으로 핍진하다”고 되어 있어, 철선묘 같은 구륵선을 사용한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 서 宋末에는 황전의 그림 중에 구륵선이 없거나 또는 구륵선이 은폐될 정도로 안료로 메꾼 작품이 있었음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鈴木敬, 中国 絵画史 上 図版, 註 126, p.41 참조). 34)『동천청록집(洞天清禄集)』,「고화변(古画辯)」: 黄筌則孟蜀主画師, 目閲富貴, 所作多綺園花錦, 真似粉堆, 而不作圏線, 孔雀鸂氵+勅+鳥豔麗之禽, 動止生意. 120 美術史學報 제27집 작법상, 또는 화원화가였기에 이미 수집이 어려웠음과 동시에 모방의 난이(難易)로 서희의 독특한 정신성의 깊이를 암시하고, 그것으로 그림의 우열을 평가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 다. 그러나 황전의 기법은 “당대(唐代)에 싹튼 사생주의의 하나의 귀결점을 보여주는”36), 唐朝 정통적 화조화풍의 계승자임과 동시에, 일면으로는 오대 成都 화단의 일반적 경향도 겸비해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翎毛骨気尚豊満 : 곽약허,『도화견문지』卷一「황․서 이가체(二家体)의 다름을 논함(論 黄徐二家体異)」에서 강남의 처사(t江南処士)로서의 서희가 지조와 절개가 고매하고 언행 의 구속을 받지 않는, 활달한 문인적인 기질이 있어서 그림의 내용이 궁전이나 정원의 화 려한 꽃이나 새를 그리는 황전과 달리, 江湖에 있는 물가의 꽃이나 야죽(野竹), 물새, 연못 의 물고기, 오리, 기러기, 해오라기, 부들, 말, 게, 물고기, 折枝, 정원의 야채, 약초의 모(薬 苗)같이 일상적인 것을 그리고 있고, 그의 영모(翎毛)는 황전의 “영모가 골기가 풍만한 것 을 숭상하는데(翎毛骨気尚豊満)”비해 “영모의 형태의 골기가 가볍고 빼어난 것을 귀히 여 긴다(翎毛形骨貴軽秀)”37) 고 양자를 비교분석하고 있다. 양자는 화조화의 대상이나 기풍, 개념이 전혀 달랐고, 황전과 서희의 화조화가 화조의 모방단계를 벗어나 그 독특한 경계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륵전채(鈎勒填彩) : 유곤(兪崑)은 황전과 서희는 이미 父子로 전승되어 황씨체와 서 씨체를 이루었다. 황전의 아들인 황거채(黄居寀)(居宝와 居実, 아우 惟亮)는 구륵전채(鈎勒 填彩)로 일파를 이루어 院体의 표준이 되었고, 서숭사(徐崇嗣)는 색을 중첩하는(畳色的) 지 염(漬染)의 몰골(没骨)로 일대의 화풍을 좌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38). 결국 황씨체와 서씨 체의 특징은 구륵전채와 첩색적(畳色的) 지염(漬染)의 몰골(没骨)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사생의 의미 : 심괄은 황전의 채색 꽃 그림이 ‘사생’이라고 평가하였는데, 사생의 의 미가 어떠한 것인지 화론서에 나오는 다음 두 가지 이야기의 예를 통해 추정해 보자. 35) 米芾,『畵史』, “黃筌畵不足收,易摹, 徐熙畵不可摹.” 36) 鈴木敬, 中國繪畵史 上, 吉川弘文館, p.160. 37) 郭若虛,『圖畵見聞誌』「論黃徐二家體異」: “志節高邁,放達不覇, 多状江湖所有汀花野竹, 水鳥 淵魚. 今伝世鳧雁鷺鷥, 蒲藻蝦魚, 叢豔折枝, 園蔬薬苗之類是也. 又翎毛形骨貴軽秀, 而天水通色. -言多状者…骨気多不及蜀人, 而蕭洒過之也. -二者猶春蘭秋菊, 各擅重名, 下筆成珍, 揮毫可 範.”(于安瀾編,『画史叢書』, 上海人民美術出版社, p.13) 38) 兪崑, 新訂中國繪畵史, 華正書局, 臺北市, 1982(民國73년), p.187.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21 하나는 회남(淮南)에 초빙을 받았는데 살아있는 학 몇 마리(隻)가 있었다. 蜀主가 편전 (便殿) 벽에 그릴(写)것을 명하였다. 정채(精彩)한 태도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해 왕왕 그 림 옆에 살아있는 학을 이르게 했다. 촉주가 탄성을 지르며 결국 ‘육학전(六鶴殿)’이라고 명명하게 했다. 두 번째 예는 후에 새로이 팔괘전(八卦殿)을 구축하여 전에게 사벽에 사계 절의 꽃과 대나무, 토끼와 꿩, 새와 까치(花竹兎雉鳥雀)을 그릴 것을 명령했다. 그해 겨울 오방사(五坊使)가 이 전각(殿) 앞에서 웅무군(雄武軍)에 진상한 흰 매(白鷹)가 殿上에 있는 꿩이 산 것이라고 생각하고 (꿩의) 앞발을 끌어당긴 것이 넷을 헤아렸다고 전한다.39) 이상의 이야기는 우리가 신라 시대 솔거의 <노송도>의 소나무가 너무나 소나무 같아 참새가 부딪쳐 죽었다는 핍진(逼真)의 의미와 진배없다. 즉 두 이야기의 황전의 사생의 의 미는 핍진과 생의(生意), 즉 ‘살아있는 것을 그렸는데 산 것보다 더 살아있는 듯하다’로 압 축할 수 있다. ③ 황전그림의 특성: 山水分色’ : 그러나 황전은 하늘과 강물의 색을 나눈데(天水分色) 비해 서희는 색을 나누지 않았다(天水通色)는 기사, 즉 하늘과 강물을 색을 나누느냐 안 나누느냐의 문제는 화조화를 화조화만의 장식적인 ‘부귀화(富貴画)’로 생각하느냐, 또는 산 수중의 일부로 생각하여 자연의 일상적인 화조로 보는가와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산수화 에서는 송초, 이성(李成)이 강과 하늘의 빈곳을 전부 호분으로 메웠다든가40), 伝 조백구 39) 圖畵見聞誌』「論黃徐二家體異」: 兪劍方, 中國繪畵史 上, 臺灣商務印書館, 1976, p.161. 40) 이성의 회화상의 실험은 ‘하늘과 강을 호분으로 메운 것’ 뿐만 아니라 앙첨(仰瞻)의 표현에 도 나타났는데, 당시에도 “강과 하늘의 빈곳을 전부 호분으로 메워 논하는 사람들이 기이하 게 여겼다(水天空処, 全以胡粉填之, 論者奇之)”(兪崑 編著, 新訂 中國繪畵史, 民國 73년, 臺北 市, 華正書局, p.175)고 할 정도였고, 앙첨, 즉 “원근투시법을 깨달아 산 위의 정관(亭観)을 ‘위로 쳐다보아 날아오를 듯하게 그린 처마(仰画飛詹)’에 대한 평가는 심괄(沈括, 1031-1095) 의『몽계필담』에 “대체로 산수의 법은 대개 ‘대(大)로 소(小)를 보아야(以大観小)’ 한다”고 비판당한 후 쓰이지 않게 되었다. 산수를 그리는 것이 곧 대(大)로 소(小)를 보아 결국 투시 학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송 이후의 산수화는 자연실경을 떠나 (시대가) 나아갈수록 점점 더 멀어져 결국 공상․허구에 빠져 버렸다. 그 후 이성파는 気를 전한 허도령(許道寧?), 형 (形)을 전한 이종성(李宗成), 風을 전한 책원심(翟院深)이 있어 高克明, 곽희로 전해졌다(참 조 :『몽계필담』: “이성은 산 위에 정관(亭観) 및 루탑(楼塔)을 그렸는데, 모두가 ‘위로 쳐다 보아 날아오를 듯하게 그린 처마(仰画飛詹)’였다. 그 말은 아래에서부터 위를 바라본 것이라 고 생각되는데, 예를 들어, 사람이 평지에서 탑의 처마 사이를 바라보면서 그 서까래(榱桷) 를 본 것이다. 대체로 산수의 법은 대개 ‘대(大)로 소(小)를 보아야(以大観小)’ 하는데, 사람 이 가산(仮山)을 보는 것과 같다. 진짜 산(真山)의 법은 아래에서 위를 보면, 단지 하나의 중 첩된 산을 보는 것과 같으니, 어찌 거듭 중첩된 것을 다 보겠는가? 겸해서 그 계곡사이에서 의 일도 응당 보지 못할 것이며, 또 집(屋舎)의 일도, 그 중정(中庭)이나 後巷 중의 일도 응 122 美術史學報 제27집 (趙伯駒, 1120-1182)의 <강산추색도권(江山秋色図巻>(그림 6)의 강물이 푸른색으로 칠해진 경우가 있고, 화조화에서는 북송 말 휘종의 <서학도(瑞鶴図)>(그림 7)에서 하늘이 푸른색 으로 칠해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지만, 남송의 대가인 마원의 <한강독조도(寒江独釣 図)>(그림 8)에는 이미 천(天)과 수(水)의 구분은 없고, 그 후 그것은 산수화의 한 모습이 되었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임천고치』에서 산수같이 너무나 큰 물체(“山 水大物也”)는 오히려 색을 칠하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 불가(佛家)의 허공(虛空)이나 노장 의 有를 생하는 無로 남기는 것이 문인화가는 물론이요 화원화가라도 산수화 쪽에서 보편 화되었다는 것은 산수화가 그들의 자연관이나 우주관과 얼마나 밀접하게 발전해왔나를 말 하는 것인데, 조백주의 경우는 예외이다. 황전의 경우는 화원화가였으므로 문인화가와 달리 자유가 없어, 제도가 요구하는 대로 그 대상이 궁중이나 사대부의 정원 중 특정한 대상, 즉 진기한 짐승이나 상서로운 새, 기 이한 꽃과 괴이하게 생긴 바위(珍禽瑞鳥,奇花怪石)였던 결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는 회 화사에서 당(唐)의 태종이 염입본에게 궁중정원에 날아온 기이한 새를 그리게 하자 그 자 손에게 다시는 그림을 그리게 하지 말라고 했다는 사건이 기술되어 있는 만큼, 그의 그림 은 화원화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고, 또 화원화가이기에 서희의 그림을 격에 들지않 는다고 판단할 정도로 사고의 영역이 넓지 않아 시계가 산수로 전홛되지 않은 결과로 보 여진다. 그러므로 스즈끼가 “황전은 당조(唐朝)의 정통적(正統的), 전통적 화조화풍의 계승 자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오대(五代) 성도(成都) 화단의 일반적 경향 - 현저한 수묵지향 도 아울러 갖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41)고 말한 것도 이러한 면모로 보여진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비록 그의 스승이라고 일반적으로 통칭되는 조광윤의 화풍 이나 그의 화법에 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기는 하지만, 상술한 그의 그림의 형태 나 사상은 화론서들의 기술, 즉 구륵전채라기보다는 오히려 ‘가벼운 색으로 물들이되 거의 먹자취가 보이지 않는 채색의 묘’ 같은 가벼운 채색과 생의(生意), 참으로 분채를 쌓아놓 은 것 같고 도선(圏線)42)을 만들지 않고, 사계절의 화조가 체재가 정치하고 절묘하다거나, 당 보지 못할 것이다.… 李君은 대(大)로 소(小)를 보는 법을, 그 사이에 높은 것과 먼 것을 꺾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妙理를 갖고 있는데 흔옥각(掀屋角)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 이론 은 그릇된 것이다.) (兪崑 編著, 新訂 中國繪畵史, 民國73년, 臺北市, 華正書局, pp.175-6) 41) 鈴木敬, 中国 絵画史 上 , p.159. 42) 스즈끼는 도선의 의미를 추정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선은 선으로 둘러싼다는 뜻일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23 골기(骨氣)가 풍만함을 숭상했다는 기술43)과 자호(自號)를 사생조창(寫生趙昌)이라고 했던 조창의 화조화가 “손 안에서 채색을 조절하여 그렸는데, 스스로를 ‘사생조창’이라고 했다 (手中調彩色寫之自號寫生趙昌)44)고 하는 기사와 비교하여 ‘사생’의 의미를 생각하면, 조희 곡의 말이나 심괄의 『몽계필담』의 기사의 상식적 해석에 다소의 정정(訂正)이 필요하다 고 생각하지만 작품의 유전(遺傳)이 극히 적은 상황에서 그 진위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 나 잔존 작품인 <사생진금도(寫生珍禽図)>(그림 9) 등을 통해 그의 그림이 화조화의 이대 맥(二大脈)으로 산수화와 경쟁할 장르가 되었음을 어느 정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중국 회화사에서 보여주듯이, 회화는 역사상 장식적 역할과 정신집중과 오랜 심신(心身)의 수양 의 결과 고도의 사상의 표출,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화조화와 산수화가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Ⅲ. 결어 본고는 한국어로 ‘그림이란 무엇인가? 한국화, 동양화, 서양화라는 지역구분에 의한 회 화가 아니라 과연 ‘동양화’의 畵, 즉 그림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필자 는 그 가장 정확한 방법이 아마도 말의 어원을 추적하는 것일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한국 어로 그림은 ‘그리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지만, 현대 한국에는 그리지 않는 그림도 너무 나 많다. 그리지 않는 그림을 그림이라고 칭할 수는 없으므로, 회화라는 용어도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현대에는 그림의 정의가 변할 것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용어를 대체할 용어의 출현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림’이라는 의미의 한자에는 도(圖)․화(畵)․회화(繪畵), 사(寫)라는 용어가 있 까? 같은 「고화변」중에서 “최백은 대개 고격(古格)을 사용한다. 화조를 제작하는 데는 반 드시 도선을 한다. 경리(勁利)한 철사(鉄糸)같고, 메꾸는 데는 중채(重采)로 하는데, 참으로 핍진하다”고 되어 있어 철선묘같은 구륵선을 사용한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宋末에는 황 전의 그림중에는 구륵선이 없거나 또는 구륵선이 은폐될 정도로 안료로 메꾼 작품이 있었음 을 가르키고 있을 것이다(鈴木敬, 中国 絵画史 上 図版, 註 126, p.41 참조). 43) 곽약허,『도화견문지』: “刁光胤, 長安人. 天復中避地入蜀, 工画竜水竹石花鳥猫兎. 黄筌,孔崇, 皆門弟子. 嘗於大慈寺承天院内窗邊小壁四堵上画四時花鳥, 体裁精絶. 後黄居寀重装飾之.亦有図 軸伝於世”. 44) 兪劍方,中國繪畵史 上,臺灣商務印書館, 1976, p.188. 124 美術史學報 제27집 고, 장언원의『역대명화기』에 의하면 이미 진(秦)․한(漢), 육조시대에 정의가 이루어져, 이것을 기반으로 그 후의 회화에서도 그 정의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저변에 깔려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용어들을 추적해 본 결과, 현재 많이 쓰이는 ‘회화’보다는 오히려 ‘圖’와 ‘화(畵)’의 의미가 즉 다양했고, 특히, 가장 늦게 나타나 1970년 쯤 해도 흔히 쓰이던 ‘寫’라 고 하는 문자의 의미는 대체로 “다른 곳에서 이방에 놓는 것”이므로 기운생동을 추구하던 동양화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였다. 종병에게서 시작된 산수사생의 산수화는 그것이 그에게 道를 명상하는 것만큼이나 道의 이해로 다가가는데 효과적인 길이었다. 그의 산수화는 자연의 道의 감신(感神)→신초(神 超)→이득(理得)의 순서로 이치를 얻은 순간 그는 산수와 더불어 와유(臥遊)의 경계(境 界)에 들 수 있었다. 그러산수의 빼어남과 영(靈)의 재현 조건은 그에게 神을 지켜 ‘자 연의 세(自然之勢)’를 얻어야 비로소 숭산(嵩)․화산(華)의 빼어남, 현빈(玄牝)의 霊이 그림 위에서 현현될 수 있었다. 산수화는 그러므로 창신(暢神)․양신(養神)의 도(道)의 하나였다. 그러나 산수화에서 시작된 사생은 사모로 이어져 산수화가 되었고, 그후 화조 화로 전이되었다. 고개지에 의해 인물전신이 산수전신이 되었지만, 화조화에서의 사생은 ‘생의’와 ‘핍진’이 중요한 요소였다. 사생은 산수화에서 시작되어 불교학자인 종병의 산수의 의미는 현대의 산수화의 의미와는 다른 ‘寫’가 문인화의 발달과 더불어 사생(寫生)에서 사 의(寫意)로 확대되면서, 사의의 영역이 현대 회화로 보면, 중국화의 기조인 사실(寫實)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변화하는 시대를 아우르는 용어가 될 수 있음도 보여주었다. 그러면 다시 우리는, 현대의 그림을 포괄할 수 있는 용어는 과연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의문, 즉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천재론(天才論)에서 말했듯이, 천재, 즉 예술가의 가장 큰 특성은 ‘독창성’이다. 그러나 중국인에게 독창성은, 석도(石濤)가 “나는 나 자신의 방법을 사용한 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듯이, 고(古) 양식에의 충실성으로 그림을 판단하는 것이나 고(古) 대가를 모방한다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자연의 관찰과 숭고(崇古)에 의해, 옛 화파나 대가의 양식에 근거하기는 하나 그것에서 탈피해서 자신의 방법으로 그려야 한다. 도제는 자신의 예술창조과정을 통해 나 자신의 방법, 즉 자신의 규칙들과 방법의 창출을, 목적이 활성화되어야 감정이 움직여 창조력이 일어나며, 창조력이 일어날 때 규칙들과 질서들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45) 이것은 이미 종병의 산수사생에서 보이던 내용이다. 그러면 그 45) “자신의 목적(또는 개념)이 활성화되었을 때, 작가의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정이 움 직이기 시작할 때 창조력이 일어난다. 그리고 창조력이 일어날 때 그것이 규칙들과 질서들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25 것은 지금 어떤 용어로 말해야 하는가? 한국어의 용어 정비의 시급함과 아울러 우리가 전 통적으로 사용해온 의미도 되새겨 그림의 의미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로 나타난다. (이 과정의) 달성은 본래의 지각을 결코 초월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무진장의 변화에 대한 잠재력은 갖고 있다. 규칙들과 방법은 질서에 대한 예술가의 개인탐구의 자연 스러운 산물이지, 밖에서 부과된 억제된 규정이 아니다”(James Cahill, The Compelling Ima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82, pp. 206-7.)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27 1 2 3 1. 농사의 신, 철(鐵)의 신, 오회묘. 2. 四神圖, 강서대묘. 3.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일호분 출토 비의(飛衣, 帛畵)의 四神. 128 美術史學報 제27집 4 5 4. 한(漢), <荊軻刺秦王圖>, 화상석 탁본, 147-151년, 73×63cm, 무량사(武梁祠). 5. 傳 唐人, <명황행촉도(明皇幸蜀圖)>, 비단에 설색, 대북 고궁박물원.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29 6 7 6. 伝 조백구(趙伯駒, 1120-1182), <강산추색도권(江山秋色図巻>, 견본, 설색, 56×323.2cm, 고궁박물원. 7. 휘종, <서학도(瑞鶴図)>, 견본, 설색, 51×138.2, 요령성박물원 소장. 130 美術史學報 제27집 8 8. 마원, <한강독조도(寒江独釣図)> 동양화-그림이란 무엇인가? 131 9 9. <사생진금도(寫生珍禽図)>, 견본, 설색, 41.5×70.8cm, 고궁박물원.
132 美術史學報 제27집
주제어 Key words : 圖 tú 畵 huà 繪畵 huì-huà 寫 hsieh 寫生 hsieh-sheng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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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What is Oriental Painting-Grim(그림)? - The Meaning of Oriental Painting through origin of Tú(圖)․‘Huà(畵)’․‘Huì-Huà(繪畵)’․‘Hsieh(寫)’ Kim Kijoo (Professor, Dongduk Women's University)
This study was started from the question what is grim(그림) in Korean, and what is not meanning of painting by regional distinction like Korean painting, Oriental painting and Western painting but true meaning of painting(繪畵) in Oriental painting. I thought that its correct method might pursuit origin of the word. Thouht ‘grim’ in Korean is the noun type of the verb of ‘grida’, there are many works not to paint in contemporary Korean painting. Because we cannot call paintings what do not painting painting(grim), I think, we need to study the meanning of terminology of huì-huà(繪畵). Therefore, now, we need not change the definition of painting, rather, we must change it new word.
However, there are four characters in Chinese characters to have meaning of ‘grim(그림)’, that is, ‘tú(圖)’․‘huà(畵)’․‘huì-huà(繪畵)’․‘hsieh(寫)’․According to Chang Yen- Yüen's Li TAI MING HUA CHI, its definition was already made in Chin․Han Dynasty and was widely used on the basis of it in China. As a result of studying of the words, meannings of tú(圖) and ‘huà(畵)’ ‘rather than huì-huà(繪畵)’ included many meanings and especially meaning of ‘hsieh(寫)’ which had universally written in 1970's, that is, to move here in other place, because of it's meaning's variety, made me look back the meaning of Oriental painting. The landscape painting of ‘shan shui-hsieh sheng(山水寫生)’ which started from Zong-Bing(宗炳) was a effective way to go nearer to understanding of Tao as meditation of Tao. 136 美術史學報 제27집
He thought that he could enter into the boundary of ‘wὸ-yσu(臥游)’ with the nature in the moment which he obtained it's li (理) by taking it in runs. However, condition to represent graceful figure and spirit of landscape is to keep it's spirit and obtain the nature's shὶ(勢). After doing it, the grace of the Mountain Song and the Mountain Huà, and the spirit of xuán-piìn(玄牝) can be reveal on the painting. Therefore, landscape painting was one among Tao of spreading spirit(chàng-shen, 暢神)․nourishing spirit(yang-shen, 養神).
As the spread of hsieh (寫) was expanded from hsieh-sheng to hsieh-yὶ(寫意) along with development of literati painting, hsieh showed us to be a terminology which did not leave realism(寫實) which was basis in Chinese painting and put together changing period. No wonder that I have return again the question how do we use terminology which can include contemporary painting.
As I. Kant says in “Kritik der Urteilskraft”, one greatest characteristic of genius, that is, artist is originality. As Tao Chi said, “I use my own method”, originality of Chinese make them forbid to “imitate the old masters, along with critics who judge paintings by their fidelity old styles. Although he bases on old school and ancient master, he has to break from it and paint by his own method. Tao-chi said my own method, that is, to create my own rules and methods through the process of artistic creation like this: “when one's purpose(or conception) is activated, then one's feelings are stirred. When the feelings are stirred, a (creative) force arises; and when that force arises, it is manifested as rules and order.” If it is so, now, which terminology do we use? We need reconsider urgency to put in good order korean terminology and meaning of ‘grim(그림)’ to have traditionally us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