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작자미상의 맹호도(猛虎圖)

2019. 3. 11. 00:05美學 이야기



조선후기 작자미상의 맹호도(猛虎圖) 그림과 글씨의 내용 해독 

2015. 9. 1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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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본담채화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 추정 맹호도(猛虎圖) 입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형태의 호랑이 자세로서 앞쪽으로 막 방향을 바꾼 호랑이의 순간적인 동작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호랑이 털의 세밀한 묘사가 대단히 뛰어난 작품입니다.





 

[제화시의 원문과 해석]





  



擰猛磨牙孰敢逢(영맹마아숙감봉)   어지럽고 사납게 갈고 있는 어금니를 누가 감히 만날까?

愁生東海老黃公(수생동해노황공)   근심이 생긴 동해의 노인 황공이네.

于傘跋扈橫行者(우산발호횡행자)   우산을 쓰고 제멋대로 날뛰며 행동하는 자들

誰識人中此額同(수식인중차액동)   그 인간들이 이 짐승 이마와 한가지인 걸 누가 알리오.

 

甲午南至日(갑오남지일)        갑오년 동짓날

 

* 跋扈 (발호) :  발호하다 제멋대로 날뛰다 설치다

* 橫行 (횡행) :  가로줄  제멋대로 행동하다  횡포한 짓을 하다 .

 



[느낀 점]

 

   호랑이는 소나무 또는 대나무, 까치 등과 함께 그리기도 했지만 이 그림에서는 배경을 생략하고 화면에 꽉 차게 호랑이만을 그려져 있습니다. 안으로 야무지게 말린 꼬리, 눈빛과 표정, 묵직한 발놀림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화가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가는 붓으로 꼼꼼히 그린 치밀한 묘사는 심사정과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동물화의 특징입니다.

호랑이는 동물의 왕이며 영물로서 그린 그림은 힘과 용맹을 상징하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화시의 내용을 보면 호랑이의 위엄 있는 모습을 통해 백성들에게 횡포하게 구는 관료나 아전 등 세금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의 모습을 비유한 시()가 적혀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림이 제작된 이후 후대에 새로 적혀진 글씨로 보이며, 이 제화시를 적던 시대에 백성들의 핍박이 극심했음을 반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랑이가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맹호행(猛虎行)’이라 하여 고난만 있을 뿐 성공은 어려운 조촐한 군자의 인생길을 표현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회남자(淮南子)에 실린 진()나라의 육기(陸機)가 쓴 맹호행(猛虎行)이라는  시에서도 이러한 사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猛虎行(맹호행진대(晉代:265~420), 陸機 (육기)

 

渴不飮盜泉水(갈불음도천수목이 말라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않고

熱不息惡木陰(열불식악목음뜨거워도 악목의 그늘에서 쉬지 않으리.

惡木豈無枝(악목기무지)        악목이라고 어찌 가지가 없으리오만

志士多苦心(지사다고심)        지사의 길에는 고심이 많다네.

整駕肅時令(정가숙시령)        수레 정비하여 시대의 령에 따르고

杖策長遠尋(장책장원심)       정책을 가지고 먼 곳을 찾는다.

饑食猛虎窟(기식맹호굴)        배고프면 맹호 굴 에서도 먹고

寒棲野雀林(한서야작림)        추우면 들판의 참새 숲에서도 잔다네.

日歸功未建(일귀공미건)        세월은 가건만 공은 세우지 못하고

時往歲載陰(시왕세재음)        시간은 흘러 또 한해가 저무네.

崇雲臨岸駭(승운임안해)        높은 구름은 강가에서 흩어지고

鳴條隨風吟(명조수풍음)        새  우는 가지는 바람따라 읊조리네.

靜言幽谷底(정언유곡저)        그윽한 골짜기 말없이 지내고

長嘯高山岑(장소고산잠)        높은 산마루에서 길게 읊조리네.

急絃無懦響(급현무나향)        세찬 현의 울림에 나약한 소리 없고

亮節難爲音(양절난위음)        밝은 절조는 소리가 되기 어렵다네.

人生誠未易(인생성미이)        인생살이가 참으로 쉽지 않은데

曷云開此衿(갈운개차금)        이 마음을 열라고 어찌 말하는가.

眷我耿介懷(권아경개회)        나의 굳건한 생각을 돌아보니

俯仰愧古今(부앙괴고금)        우러르고 굽어보니 고금에 부끄럽네.

 

* (놀랄 해) : 소란하다, 혼란하다, 흩어지다, 어지럽다, 경계하다.

* 長嘯 (장소) : 긴 휘파람, 를 길게 읊조리다.

* (게으를 나,겁쟁이 유) : 나약하다, 여리다, 무기력하다.

* (옷깃 금) : 앞 섶, 가슴, 마음 , 생각, 두르다 .

* (어찌 갈) : 어찌하여, 언제, 누가.

* : 돌아보다 , 보살피다. (빛 경) : 한결같은 모양, 명백하다, 굳다, 맑다, 빛나다.

* 介懷 : 개의(介意)와 같음(어떤 일 따위를 마음에 두고 생각하거나 신경을 씀).

 

渴不飮盜泉水(갈불음도천수) : 목이 말라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않는다 .

     孔子께서 어느 날 勝母(승모) 라는 마을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으나 머물지 않았고, 盜泉(도천)

     지나면서 목이 말랐으나 그 물을 마시지 않았다.

     勝母 어머니를 이긴다라는 뜻이니 子息道理 에 어긋나고 盜泉 도적의 샘이니 어찌

     마시리오.(說苑 ) 盜泉 山東省 泗水縣 東北 에 있다한다.

 

   이 시()의 첫 구절에서 渴不飮盜泉水(갈음도천수) 熱不息惡木陰(열불식악목음) ‘갈증이 나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않고, 더위에도 악목의 그늘에서는 쉬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선비로서 부정과 불의를 멀리하는 마음가짐과 오해·중상·모략·유혹 등을 받을 우려가 있는 곳을 가까이하지 않는 몸가짐으로 처신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제화시에서 나오는 동해황공(東海黃公) 에 대한 고사(古事) 는 한()나라 유흠(劉歆)이 짓고 ()나라 갈홍(葛洪) 이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서경잡기(西京雜記) 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東海人黃公 少時爲術 能制蛇御虎 佩赤金刀 以絳繪束髮 立興雲霧 坐成山河 及衰老氣力赢憊  飮酒過度 不能復行其術 秦末有白虎見于東海 黃公以赤刀往厭之 術旣不行 遂爲虎所殺

   동해사람 황공이 소시 적에 술법을 익혀 뱀과 호랑이를 제압할 줄 알았다. 적금도를 차고 다녔고 붉은 그림을 머리에 묶었고 일어나 운무를 일으키고 앉아서 산하를 이루었다. 마침내 노쇠하여 기력이 줄어들고 술을 지나치게 마셔 그 술법을 다시 행할 수 없었다. 진말에 백호가 있어 또다시 동해에 나타나자 황공은 적도로 제압하고자 갔는데, 술법을 이미 행하지 못해 마침내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동해황공(東海黃公)에 대한 고사(古事)는 중국 당나라 시절 이하(李賀) 가 지은 시() 猛虎行(맹호행)’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猛虎行(맹호행) 이하(李賀, 790~ 816)

 

長戈莫舂(장과막용) 長弩莫抨 (장노막평)   긴 창으로 찌를 수 없고 큰 활로도 쏠 수가 없네.

乳孫哺子(유손포자) 教得生獰 (교득생영)   젓 먹이 새끼 자식으로 길러 사납게 되도록 기르네.

舉頭為城(거두위성) 掉尾為旌 (도미위정)   머리를 들면 성이 되고 꼬리를 흔들면 깃발이 되니

東海黃公(동해황공) 愁見夜行 (수견야행)   동해 황공은 근심스럽게 보며 밤에 나가네.

道逢騶虞(도봉추우) 牛哀不平 (우애불평)   길에서 만난 마부는 염려하고 소는 공평하지 못해 슬픈데

何用尺刀(하용척도) 壁上雷鳴 (벽상뢰명)   큰 칼은 어디에 쓸 것인가 벽 위에선 천둥치는 소리네.

泰山之下(태산지하) 婦人哭聲 (부인곡성)   태산은 아래이고 아낙네 통곡소리에도

官家有程(관가유정) 吏不敢聽 (리불감청)   관가는 한도가 있어 관리가 감히 듣질 않네.

 

   그러므로 이 그림의 호랑이 모습과 제화시를 함께 견주어 판단해 보면 관가의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기 보다는 그들 일신의 이익과 향락을 위해 백성을 수탈의 대상으로 보고 행동하는 횡포를 무서운 호랑이에 비유하고 있는 사회 비판적인 작품이라고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아마도 18세기 후기 이후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와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이 극심하던 시기 백성의 수탈을 바라보며 분개하는 은자(隱者)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육기(陸機 , 260~303)

 

   字 士衡(사형), 三國時代 吳名臣 陸遜 (육손)의 손자로서 아우인 陸雲 과 함께 二陸 으로 불리었으며, 나라를 정벌한 덕으로 二俊 (이준)을 얻었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大將軍 , 河北大都督 (하북대도독)이 되었으나 謀罪(모죄) 에 빠져 華亭(화정) 鶴唳聲(학려성) 어찌 듣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한다. 華亭江蘇省 松江縣 西方 平原村 에 있고 祖父陸遜 華亭侯로 책봉된 후로 代代지내던 곳이다.

  


이하(李賀, 790~ 816)

 

   당나라 종실(宗室) 의 후예. 자는 장길(長吉)이다. 두보(杜甫 )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창곡(昌谷)의 소지주였고, 아버지 이진숙(李晉肅) 은 변경의 관리로 근무하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7살 때 문장을 지을 줄 알아 한유(韓愈)와 황보식(皇甫湜)의 인정을 받았다.

매일 아침 말을 타고 종자를 거느린 채 등에 비단 주머니를 매게 하고, 도중에 가구(佳句 )얻으면 주머니에 집어넣어 해질녘에 귀가하여 시를 완성했다.


   작품이 항상 기궤(奇詭)하여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다. 성공을 위해 목표로 삼았던 진사시(進士試)는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으로부터 아버지의 이름이 진숙인데 진()()은 동음이라 하여 휘를 범한다는 이의가 나와 단념했다.

이듬해 협률랑(協律郞)이란 아주 낮은 직위에 2년간 근무했다.

 

   이런 요소들이 사고에 영향을 끼쳐 사상적 경향이 염세적 색채가 짙게 되었다.

기이한 시세계 때문에 시귀(詩鬼)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 별칭은 북송(北宋) 시대의 수필집 남부신서(南部新書) 와 그 밖의 책에 적혀 있다 .

대표작은 안문태수행(雁門太守行) 소소소(蘇小小 ) 의 노래 등인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장진주(將進酒 ) .

좌절된 인생에 대한 절망감을 굴절된 표현으로 노래했기 때문에 난해하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특이한 매력을 지녀 애호자도 많다.

악부사(樂府詞 ) 도 수십 편 지었는데, 모두 음률이 붙여져 읊조려졌다. 27살 나이로 요절했다.

저서에 이하가시편(李賀歌詩篇) 4외집(外集) 1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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