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대(元代) 예찬(倪瓚)의 육군자도(六君子圖) 外

2019. 3. 10. 21:43美學 이야기


중국 원대(元代) 예찬(倪瓚)의 육군자도(六君子圖) 그림과 글씨의 내용 해독

2015. 9. 7. 13:41


복사https://blog.naver.com/kalsanja/220474148928

엮인글 2번역하기전용뷰어 보기



   중국 상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국 원대(元代) 예찬(倪瓚) 의 그림입니다.

   중국 산수화의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이 그림은 역대 수많은 감상자들과 화론가들이 중국 산수화 최고의 명작으로 제시하는 그림 중 하나의 작품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일품(逸品)’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육군자도(六君子圖)1345년 친구인 노산보(盧山甫)가 그려달라는 요청에 따라 배위에서 그린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찬(倪瓚) 의 이 그림에는 원래 별도의 제목이 없었으나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황공망(黃公望 )쓴 제화시(題畵詩)육군자(六君子)'라는 말이 들어있어 육군자도(六君子圖)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육군자(六君子)라고 하면 고대의 덕이 높은 여섯 성왕을 지칭하여 흔히 하우(夏禹), 성탕(成湯), ()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성왕(成王), 주공(周公)을 이르는데, 여기서 말하는 육군자란 그림에 나오는 여섯 그루 나무를 가리키니 곧, 소나무() · 잣나무() · 느릅나무() · 회화나무() · 녹나무() · 장목(樟木) 여섯 나무인데 모두 지면이 평탄하지 않고 굴곡진 곳(陂陀) 에서 산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화시의 원문과 해석]




盧山甫每見輒求作畫

노산보가 매일 만나며 그림을 그려 주기를 청하더니

 

至正五年四月八日泊舟弓河之上而山甫篝燈出此紙苦徵畫

지정 5 48 일 정박해 있는 궁하(弓河) 의 배 위에서 등을 달고 이 종이를 내놓아 힘써 그림을 이루었다 .

 

時已憊甚只得勉以應之

당시 이미 매우 고단하였는데, 부득이 권하며 격려하여 응하였다.

 

大癡老師見之必大笑也倪瓚

대치(황공망) 노 스승이 본다면 반드시 크게 웃을 것이다. 예찬

 

* 篝燈 (구등) : 바람을 막기 위하여 불어리를 들씌운 등.

* 只得 (지득) : 부득이 할 수 없이 부득불






遠望雲山隔秋水(원망운산격추수)   멀리 바라보니 구름 낀 산과 가을 산이 떨어져 있고

近看古木擁陂陀(근간고목옹피타)   가까이 보니 고목(古木)은 비탈진 둑에 끼어있네.

居然相對六君子(거연상대륙군자)   뜻밖에 육군자(六君子)를 마주하니

正直特立無偏頗(정직특립무편파)   바르고 곧으며 뛰어나게 서 있는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네.

大癡贊 雲林畵                              대치가 짓고 운림이 그렸다.


 

* 陂陀(피타) : 평탄치 못하다 험하다 순조롭지 못하다

* 居然(거연) : 뜻밖에 생각 밖에 의외로

* 大癡(대치) : 황공망(黃公望 , 1269~1354) 은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는 자구(子久),

                     대치도인(大癡道人) 이라는 호() 를 갖고 있었다. 후대인들에 의해 오진·예찬(倪瓚

                     왕몽(王蒙) 과 더불어 원4대가로 일컬어지며, 그중 가장 연장자이다.






江頭碧樹動秋風(강두벽수동추풍)   강기슭 푸른 나무는 가을바람에 움직이고

江上靑山接遠空(강상청산접원공)   강 위 푸른 산은 먼 하늘과 붙었네.

若向波心添釣艇(약향파심첨조정)   만약 물결 중심에 낚시배를 보태고자 한다면

還須画我作漁翁(환수화아작어옹)   틀림없이 그림에 나는 고기잡는 늙은이를 그려야겠네.

朽木居士(후목거사)                     후목거사

 

* 江頭 (강두) : 강가의 나루 근처강기슭  강가 .

* 波心 (파심) : 물결의 중심. 또는 물결의 한가운데






天風赽雲林(천풍결운림)      하늘에 바람은 운림(雲林)으로 달려가는데

衆樹動秋色(중수동추색)      나무숲은 가을빛으로 움직이네.

仙人招下來(선인초하래)      신선이 아래로 오라고 부르니

空山倚晴碧(공산의청벽)      빈산은 푸른 하늘에 의지하네.

澂江趙覲(징강조근)            진강 조근

 

* 晴碧(청벽) : 맑고 푸르다 갠 날의 푸른 하늘






黃公別去已多年(황공별거이다년)    황공과 이미 다년간 떨어져

忽見雲林畫裏傳(홀견운림화리전)    홀연히 운림의 그림을 보았다고 전하네.

二老風流遼鶴語(이로풍류료학어)    두 어른의 풍류는 요학(遼鶴)의 시()이니

悠然展卷對江天(유연전권대강천)    유연하게 그려진 그림으로 강과 하늘을 마주하네.

吳興錢雲(오흥전운)                      오흥에서 전운

 

* 遼鶴 (요학) : () 나라 때 신선술을 닦아 학으로 변해서 고향인 요동(遼東) 에 돌아왔다는

                     정령위(丁令威) 가리킨다 . 전설에 따르면 일천년만에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간혹 화학삼천세(化鶴三千歲)’라는 표현 등으로 시구에 등장하기도 한다.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 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는데, 그 뒤 천년이 지난 뒤에 학이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 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야 새야 정령위야! 집 떠난 지

                     천년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냐!’ 라고 하였다 .

* 悠然(유연) : 유연하다 유유하다 성질이 침착하고 여유가 있다

  


[느낀 점]

 

   이 그림은 갈필로 그려진 예찬의 작품인데, 당시 몽고족에 의해 중원이 침략을 당해  한족(漢族) 사대부들이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고 있던 시기 이 작품은 이러한 애환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어 지금도 중국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https://blog.naver.com/kalsanja/220474148928






예찬 / 예찬(1301-1374)은 원대(元代)의 산수화가| 書畵 자료

寶靜齋 | 조회 30 |추천 0 | 2004.08.25. 22:53


예찬
   예찬(1301-1374)은 원대(元代)의 산수화가로,
자는 원진(元鎭), 호는 운림(雲林)이며 강소성(江蘇省) 무석(無錫) 출신이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으나 학문과 예술에 뜻을 두어 젊은 시절에는 책과 골동품과 서화를 사 모았다.
그러다 그 재산을 모두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목욕을 하는 등 심한 결벽증을 보였는데, 그림에서도 간결한 구도에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빈 정자와 강가의 모습이 주를 이룬다.
붓을 씀에 있어서도 물기 없는 마른 붓질을 더함으로써 담백하고 스산한 분위기의 산수화를 특징으로 한다.


예찬 / 예찬(1301-1374)은 원대(元代)의 산수화가 2004.08.25

cafe.daum.net/seoyeins/7gFw/78   서예인모임  






예찬 용슬재도| 서예

청천 | 조회 30 |추천 0 | 2018.11.14. 10:23



풍경이 아니다, 깨질 듯 청량하고 고요한 마음이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11-17 18:54:57
  •  |  본지 20면

   


       

    용슬재도 容膝齋圖 - 중국 원나라 말의 화가 예찬(1301~1374)이 그린 '용슬재도'. 고요하고 성긴 형상에서 청량한,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화면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다.
    원근조차 없다.
    시선은 사라지고 텅 빈 마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담박하고 꾸밈없는 예찬의 그림은 원대 문인화에 나타난
    '정신의 풍경'의 극한지점이다.


       우리는 모종의 경계의 끝, 혹은 그 너머 미지의 영역에 들어 선 것이다.

    우리의 미의식을 순식간에 뒤흔드는 황량한 들녘 한가운데 우리는 던져졌다. 여기에서 도대체 형상이란 무엇이고, 본다는 것은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예찬(倪瓚, 1301~1374)의 '용슬재도(容膝齋圖)', 이 적막한 공간을 방황하는 일은 스산하고 당혹스럽다. 이곳은 산수화의 구경(究竟)인가, 폐허인가?

    원나라 말, 예찬은 물의 지방 강소성의 무석(無錫)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잣집 자제는 다른 것에 도무지 취미가 없었다. 오직 독서와 시 짓기, 서화만을 좋아할 뿐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죽고 자신이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그는 집 안의 '청비각(淸閟閣)'에 전국 시인 묵객을 초빙하여 시와 그림으로 교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전 재산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홀연히 가족을 데리고 방랑길을 떠난다.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홍건적의 난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을 즈음이다. 소주(蘇州) 태호 근처,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떠도는 20여 년, 궁핍하고 외로운 방랑의 시작이었다.


    ■고요한 적막감으로 가득 찬 그림

       오랜 방랑이 그를 늙고 지치게 만들었을 때, 그는 지인의 부탁으로 한 풍경을 그렸다. 몇 획 마른 선만이 아슬아슬하게 유(有)와 무(無) 사이를 흐르고 있을 뿐 화제(畵題)도 없는 풍경이었다. 뒷날 지인이 그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하니 글을 한 편 써 넣어달라고 다시 찾아왔을 때 이 풍경은 비로소 '용슬재도'가 되었다. 그 다른 사람은 고향 무석의 용슬재 주인이었던 것이다. 예찬은 그림의 글에 죽기 전에 고향에 가서 용슬재에 올라 이 그림을 다시 볼 수 있기 바란다고 써놓고 있다. 스산한 물가에는 송나라 선승 천동정각의 선시 한 편이 떠도는 듯.


    몽환의 허공 꽃, 육십칠 년에

    흰 새 날아가고 물안개 걷히니

    가을물이 하늘에 닿았네.

       예찬은 황량한 자신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아내는 죽고, 자식들은 흩어지고,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정처 없는 방랑, 그 끝인 죽음의 그림자를 자기 그림에서 언뜻 보았던 것일까? 들뢰즈의 말처럼 진정한 예술가란 그들에게 말없는 죽음의 표지를 달아주는 그 무언가를 본 사람이던가?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예찬은 고향의 친척집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그의 소망대로 고향에서 '용슬재도'를 다시 보았을까? 예찬이 죽은 뒤 강남의 사대부들 사이에는 예찬의 그림을 한 점쯤 소장했는가 아닌가로 인품의 청탁을 가늠했다고들 한다.

    고요한 적막감으로 가득 찬 '용슬재도'는 셀 수 있을 정도로 툭툭 찍은 약간의 미점을 빼면 모두 마르고 담담한 붓으로 그려졌다. 전경과 후경을 나누는, 화면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강의 수면에는 붓이 거의 닿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다. 산과 강과 나무, 인적이 없는 정자, 그뿐이다. 화려한 색채도, 세련된 기교도, 힘이 넘치는 용필도 보이지 않는다. 붓은 아무 욕심이 없는 듯 메마르고, 형상들은 고요하고 성기어서 청량하고 소쇄(瀟灑)한 공기로 쓸쓸하게 차 있는 듯하다.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는" 그 마음

       

    송하독좌도 松下獨坐圖 - 위대한 화가 예찬과 왕몽이 합작으로 그린 '송하독좌도'.
       구체적인 계절은 여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럼에도 분명 용슬재의 기운은 만추(晩秋)의 기운이다. 가을의 금기(金氣), 맑은 쇳소리, 그러나 울리지 않고 고여 있는 울림, 건드리면 쩡하고 금이 갈 듯한 적막의 소리를 듣는다. 텅 빈 강, 저 속에 서면 침묵의 소리로 귀가 먹먹할 것만 같지 않은가. 전경의 메마른 나무들이 그 적막에 머리를 잠그고 있다.

    형체들은 극도로 간소화되고 화면은 여백으로 충만하다. 동시대 화가 왕몽(王蒙)과는 서로 대극을 이룬다. 왕몽이 '빽빽함(密)'의 극치라면 예찬은 '성김(疎)'의 극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경외했다. '송하독좌도'는 두 위대한 화가의 역사적인 만남의 현장이다. 예찬의 그림에 왕몽이 세부의 점과 획을 더했다. 왕몽의 복잡함과 비교한다면, 예찬의 화면은 너무나 소략하고 필획은 '일필초초(逸筆草草; 한두 번 붓질로 대략 그림)'하여 소박하고 졸렬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기교는 졸렬해 보인다(大巧若拙)"는 노자의 말을 상기해 두어야 할 것이다.

    왜 당신 그림은 사물과 닮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예찬은 대답하곤 했다. "내 가슴속에 있는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는 기운(胸中逸氣)을 드러내려 했을 뿐이다." 속기를 싫어한 예찬은 자주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가는 그가 병적인 결벽증을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결벽증의 예찬은 물이 가진 정화력을 믿었던 것일까? 혹시 그는 자신의 부유한 재산과 어지러운 시대에 대하여 지식인으로서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하여 목욕하듯이, 자신의 허물을 정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강과 호수를 떠돈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다.

    화면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다. 여기는 원근법도 없는 절대공간이다. 모든 시선은 사라지고 정자가 하나 있을 뿐이다. 장자는 마음을 '신령한 누각(靈臺)'에 비유한 적이 있다. 시선은 사라지고 시선을 거둔 텅 빈 마음 하나가 거기 고요히 놓여 있을 뿐이다. 형상과 시선의 분별이 사라지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만들어내는 적막감! 킴바라 세이고는 어찌하지 못하는 적막에 다다라야만 비로소 그 예술은 구경역(究竟域)에 다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예찬의 적막은 이 구경의 적막이다.


    ■"예찬의 그림만은 배울 수 없다"

       이 구경의 적막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 있다. 전경의 나무들 가운데 고사해버린 작은 나무 한 그루! 예찬의 그림에서는 늘 전경의 나무들이 그림의 표정을 이룬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 가끔 큰 나무 옆에 고사한 듯 보이는 마른 나무가 등장하곤 하지만, 이 그림에서처럼 완전히 고사한 나무는 없었다. 그는 화제를 쓰기 위해 '용슬재도'를 다시 보면서 자신도 전율하며 이 나무를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말없는 죽음의 표지를 달아주는 그 무언가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을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자 조용히 고향을 떠올렸을 것이다.

       
    명의 왕세정은 "송의 그림은 모사하기 쉽고, 원의 그림은 모사하기 어렵다. 그래도 원의 그림은 배울 수 있지만, 오직 예찬의 그림만은 배울 수 없다"고 하였다. 동기창(董其昌)은 예찬의 그림을 '고담천연(古淡天然; 예스럽고 담박하며 꾸밈이 없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러한 예술의 풍격을 '평담(平淡)'이라고 한다. 북송의 시인 매요신은 한 시에서 "시를 짓는 데는 고금이 따로 없이/ 오직 평담하게 짓는 것이 어렵다"라고 하였다. 무미한 평담은 우리 시선을 내면의 의식으로 바꾸어 형상 너머 아득히 정신의 풍경을 연다. '용슬재도'의 이 메마른 평담은 원대 문인화에 나타난 '정신의 풍경'의 한 극한 지점이다.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2> 예찬 '용슬재도': 극한의 적막을...

    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511..    국제신문

    cafe.daum.net/1004353/SmSZ/46   헬기동우회








    원대 미술 元代美術| 중국 미술사

    은시 | 조회 61 |추천 0 | 2016.04.17. 06:19


    원대 미술 元代美術

       몽골인의 왕조를 원元이라고 칭한 것은 세조(쿠빌라이) 연간인 지원 8년(至元, 1271)이지만, 태조(칭기즈칸)의 즉위가 1206년이고 1215년에는 수도 북경北京을 함락시켰으며 1234년에 금金을 멸하였기 때문에 원대(元代)의 상한은 적어도 1230년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1348년에 마지막 칸의 가혹한 학정에 대한 중국인의 불만은 광범위한 폭동으로 이어졌다. 20년동안 반란군과 군벌 사이에 피폐해진 국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거듭되었고, 몽골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국가를 통제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1368년 칸이 북경을 통해 북쪽으로 도주하자 짧고도 불명예스러운 몽골의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원왕조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단명했고 불명예스러웠으나, 미술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불확실한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고찰하였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전 양식을 부활하려는 그들의 복고적인 태도는 장식미술 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여러 고전 양식 중에서 이민족인 요遼금金의 지배 아래서 반쯤은 화석화되어 보존되어 오던 당唐 양식을 선호하였다. 원왕조는 이 밖에 몇 가지 점에서 혁신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즉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전통들을 부활시켰으며, 몽골의 지배에 의해서 자신은 독립적인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문인들 사이에 침투되어 조정에 소속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지식인들 사이를 갈라놓은 구분이 생긴 것이다. 그 구분은 20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회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왕조는 미술과 공예에서 많은 혁신을 이루었는데, 장식미술에서는 송宋의 우아미에 대한 반동으로 대담하면서도 찬란한 미술 경향을 보였다. 변화의 몇몇은 몽골 정복자들과 몽골인들이 휩쓸고 지나간 중국 땅에 봉건영주와 지주로 세워진 위구르인, 탕구트인, 돌궐인과 같은 비중국인 즉 색목인(色目人)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몽골인들은 정복당한 모든 종족의 미술가와 장인들에게 자신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제적으로 요구하였으며, 이들을 군사조직과 비슷하게 편성하였다. 미술가와 장인 중에는 중앙아시아인, 페르시아인, 심지어 유럽인들도 있었지만, 미술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중국 미술이었다.


       건축: 쿠빌라이가 세운 칸바릭Khanbalik의 원래의 건물지는 왼편 부분이 매우 조금 남아 있다. 현재의 북경은 본래 1421년 명明의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세운 것이며, 이후 명과 청淸에 의해 계속 건설된 것이다. 북경은 시 안에 시가 있고 다시 그 안에 시가 있게끔 구성된 구조이다. 즉 15마일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의 내부에 주위가 60.5마일인 황제시皇帝市있고 그 중심부에는 황제궁인 자금시紫金市가 있는 구조이다. 몽골 민족 고유의 가옥은 몽골어로 ‘게루’라 하고 궁려(穹廬)라고 쓰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버드나무 판으로 엮은 다각형의 골조를 억새로 덮은 것이기 때문에 매우 큰 가옥을 지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중국계 건축을 많이 수용하였다.


       원대의 중국계 건축은 금과 남송 두 지역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대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지방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 시대의 것으로 남아 있는 건축물은 산서성山西省 남부의 영제현永濟縣 영락진永樂鎭의 도교 사원인 〈영락궁永樂宮〉이다. 북경 성안의 〈호국사護國寺〉는 거의 폐허에 가깝지만 비문과 현재의 상태를 통해서 당시 거대한 사찰의 규모를 알 수 있다. 불탑*의 전대와 같이 남쪽에는 층이 있는 층탑, 북쪽에는 꼭대기가 뾰족한 첨탑이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팔각 전탑(塼塔)보다도 육각 전탑이 더 많아지고, 그 규모는 작아진다.


       조금 다른 형태의 예는 하북성河北省 순덕順德의 천녕사天寧寺 밖에 서 있는 〈허조선사명공탑虛照禪師明公塔〉으로 세 개의 육각첨(六角檐) 위에 복발*(覆鉢) 모양을 얹어서 상륜*(霜輪)을 세운 것인데, 다첨형 전탑과 라마탑의 복합형인 셈이다. 원대에 처음 나타나는 티베트계 라마탑은 북경의 묘응사妙應寺(일명 백탑사白塔寺, 1381)에 있는 백탑이다. 라마탑은 북경 호국사와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 〈승상보탑勝像寶塔〉 등이 있다. 거기에 설치된 문 건축을 받침으로 하고 그 위에 라마탑을 얹은 것을 과가탑(過街塔)이라 부르는데, 북경의 북쪽 관문인 거용관居庸關 안에 있는 백석(白石)으로 된 문건축이다.


    회화: 원대는 오대(五代)와 함께 중국 회화사상의 전환기로 복고적인 태도를 지니고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였다. 화원이 성했던 송대(宋代)와는 달리 원대에는 화원을 두지 않고 정부 기관인 공작서(工作署)에 화공을 배속하였다. 여기에 해당하는 화가로는 손군택孫君澤(순 쥔쩌) 등이 있다. 그 밖의 원체화가로는 전선錢選(치앤 쉬엔, 1235~1301 이후) 등이 있다. 전선은 온건한 방법을 취하면서도 혁신적인 면이 주목된다. 그의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는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가 거위를 바라보는 매력적인 두루마리* 그림인데, 고졸한 당양식으로 그린 그의 선택과 주제 그 자체는, 약점을 보이는 송문화에 대한 반동과 이후 문인 화가들의 중요 영역이 된 과거 미술에 대한 창조적인 재해석의 시작으로 조명된다.


       원대 문인화*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은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를 지내며 원의 왕실에 봉직했던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이다. 조맹부는 송의 정통 양식을 뛰어넘어,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동거파*董巨派의 강남 양식의 시문학과 필법재발견하였다. 그의 이러한 역할은 원사대가*를 비롯한 현재까지의 거의 모든 문인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문인 산수화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또한 담담한 학자적 기지로서 당대(唐代) 산수화*의 예스러우면서도 고졸한 산수화 양식과 동원의 광막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조화시킨 점이 주목된다. 조맹부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은 반세기후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1269~1454), 예찬倪讚(니 짠, 1301~1374), 오진吳鎭(우 즈언), 왕몽王蒙(우앙 멍)원사대가(元四大家)에 의해 그 완성을 보았다.


       황공망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품인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3년의 세월 끝에 1350년에 완성된 것으로, 여유롭고도 꾸밈없는 기법으로 다루어져서 고전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정신을 포착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 같은 고결한 단순성은 예찬에 의해 한층 더 발현되는데, 먹을 금같이 아꼈던 그의 그림에 흐르는 정적은 텅빈 듯한 화면 속에 얼마나 많은 풍부한 내용들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왕몽은 고뇌에 뒤틀린 듯한 선과 다양한 준을 사용하여 화면을 빽빽이 연결된 직물 표면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외에 원대에는 묵죽*이 특히 애호되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우아한 줄기와 칼끝과 같이 날카로운 잎은 붓으로 그리기에 좋은 주제였던 대나무 그림은 가장 어려운 예술인 서예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육조(六朝)시대부터 그려진 묵죽화는 원대에 이르러 특히 예찬조맹부와 같은 위대한 문인 화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또한 문동의 화법을 배웠으며 아마추어 식물학자이자 화가로서 일생동안 묵죽의 연구에 매진하였던 이간李衎(리칸, 약 1260~1310)도 주목된다. 그의 저작인 《죽보상록竹譜詳錄》은 대나무에 관한 저술을 한 후대의 작가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간이 이룩해 놓은 것보다 더욱 자연스럽고 유려한 묵죽화가로는 오진이 있다. 그는 묵죽에서 주목되는 것은 간결한 필획으로 그림과 서예의 미묘한 조화를 이루어 낸 점이라고 설파했다.


    도자기: 원대는 도자기에 있어서 혁신과 기술적 실험의 시대로서 유약 아래에 붉은 색이나 청색의 안료를 칠하는 새로운 기법이 생겨났고, 유약 밑에 부조*로 표현하는 옛 기법이 다시 부활되었다. 자주요*(磁州窯)와 균주요*(鈞州窯)를 제외한 나머지 북방요들은 요와 금, 그리고 몽골의 침입아래 거의 소멸되었고, 이에 따라 도자산업의 중심지는 중부와 남부로 옮겨졌다. 절강성浙江省의 용천*龍泉과 여수麗水에 위치한 가마들에서는 대규모로 자기가 생산되었다. 그리고 몽골이 이룬 대제국의 영항권 아래 근동으로의 도자기 수출이 증가되었다. 원대에 속하는 도자기 형태들로는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접시들, 배 모양의 병들, 근동의 기형인 물병과 플라스크, 사발, 굽이 달린 컵 등이 있다. 장식 문양으로는 근동의 첨정 홍예문, 중국의 용, 연화, 소용돌이 모양의 국화, 잎으로 연결된 좁은 띠가 있으며, 이 중의 몇몇 문양은 이미 남송의 제주요(齊州窯)에서 나타난 바 있다.


    <월간미술자료>

    원대 미술 元代美術 2016.04.17

    cafe.daum.net/rpschoo/OJF5/62   교사, 강의실, 교과서가 없는 3무(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