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10. 21:43ㆍ美學 이야기
중국 원대(元代) 예찬(倪瓚)의 육군자도(六君子圖) 그림과 글씨의 내용 해독
2015. 9. 7. 13:41
https://blog.naver.com/kalsanja/220474148928
중국 상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국 원대(元代) 예찬(倪瓚) 의 그림입니다.
중국 산수화의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이 그림은 역대 수많은 감상자들과 화론가들이 중국 산수화 최고의 명작으로 제시하는 그림 중 하나의 작품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일품(逸品)’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육군자도(六君子圖)」는 1345년 친구인 노산보(盧山甫)가 그려달라는 요청에 따라 배위에서 그린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찬(倪瓚) 의 이 그림에는 원래 별도의 제목이 없었으나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황공망(黃公望 )이 쓴 제화시(題畵詩)에 ‘육군자(六君子)'라는 말이 들어있어 「육군자도(六君子圖)」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육군자(六君子)라고 하면 고대의 덕이 높은 여섯 성왕을 지칭하여 흔히 하우(夏禹), 성탕(成湯), 주(周)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성왕(成王), 주공(周公)을 이르는데, 여기서 말하는 육군자란 그림에 나오는 여섯 그루 나무를 가리키니 곧, 소나무(松) · 잣나무(柏) · 느릅나무(楡) · 회화나무(槐) · 녹나무(楠) · 장목(樟木) 여섯 나무인데 모두 지면이 평탄하지 않고 굴곡진 곳(陂陀) 에서 산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화시의 원문과 해석]
盧山甫每見,輒求作畫 。
노산보가 매일 만나며 그림을 그려 주기를 청하더니
至正五年四月八日,泊舟弓河之上,而山甫篝燈出此紙,苦徵畫 。
지정 5 년 4월 8 일 정박해 있는 궁하(弓河) 의 배 위에서 등을 달고 이 종이를 내놓아 힘써 그림을 이루었다 .
時已憊甚,只得勉以應之。
당시 이미 매우 고단하였는데, 부득이 권하며 격려하여 응하였다.
大癡老師見之,必大笑也。 倪瓚
대치(황공망) 노 스승이 본다면 반드시 크게 웃을 것이다. 예찬
* 篝燈 (구등) : 바람을 막기 위하여 불어리를 들씌운 등.
* 只得 (지득) : ① 부득이 ② 할 수 없이 ③ 부득불
遠望雲山隔秋水(원망운산격추수) 멀리 바라보니 구름 낀 산과 가을 산이 떨어져 있고
近看古木擁陂陀(근간고목옹피타) 가까이 보니 고목(古木)은 비탈진 둑에 끼어있네.
居然相對六君子(거연상대륙군자) 뜻밖에 육군자(六君子)를 마주하니
正直特立無偏頗(정직특립무편파) 바르고 곧으며 뛰어나게 서 있는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네.
大癡贊 雲林畵 대치가 짓고 운림이 그렸다.
* 陂陀(피타) : 뜻① 평탄치 못하다 ② 험하다 ③ 순조롭지 못하다
* 居然(거연) : ① 뜻밖에 ② 생각 밖에 ③ 의외로
* 大癡(대치) : 황공망(黃公望 , 1269년~1354년) 은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자(字)는 자구(子久),
대치도인(大癡道人) 이라는 호(號) 를 갖고 있었다. 후대인들에 의해 오진·예찬(倪瓚 )·
왕몽(王蒙) 과 더불어 원4대가로 일컬어지며, 그중 가장 연장자이다.
江頭碧樹動秋風(강두벽수동추풍) 강기슭 푸른 나무는 가을바람에 움직이고
江上靑山接遠空(강상청산접원공) 강 위 푸른 산은 먼 하늘과 붙었네.
若向波心添釣艇(약향파심첨조정) 만약 물결 중심에 낚시배를 보태고자 한다면
還須画我作漁翁(환수화아작어옹) 틀림없이 그림에 나는 고기잡는 늙은이를 그려야겠네.
朽木居士(후목거사) 후목거사
* 江頭 (강두) : 강가의 나루 근처. ① 강기슭 ② 강가 .
* 波心 (파심) : 물결의 중심. 또는 물결의 한가운데
天風赽雲林(천풍결운림) 하늘에 바람은 운림(雲林)으로 달려가는데
衆樹動秋色(중수동추색) 나무숲은 가을빛으로 움직이네.
仙人招下來(선인초하래) 신선이 아래로 오라고 부르니
空山倚晴碧(공산의청벽) 빈산은 푸른 하늘에 의지하네.
澂江趙覲(징강조근) 진강 조근
* 晴碧(청벽) : ① 맑고 푸르다 ② 갠 날의 푸른 하늘
黃公別去已多年(황공별거이다년) 황공과 이미 다년간 떨어져
忽見雲林畫裏傳(홀견운림화리전) 홀연히 운림의 그림을 보았다고 전하네.
二老風流遼鶴語(이로풍류료학어) 두 어른의 풍류는 요학(遼鶴)의 시(詩)이니
悠然展卷對江天(유연전권대강천) 유연하게 그려진 그림으로 강과 하늘을 마주하네.
吳興錢雲(오흥전운) 오흥에서 전운
* 遼鶴 (요학) : 한 (漢) 나라 때 신선술을 닦아 학으로 변해서 고향인 요동(遼東) 에 돌아왔다는
정령위(丁令威) 를 가리킨다 . 전설에 따르면 일천년만에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간혹 ‘화학삼천세(化鶴三千歲)’라는 표현 등으로 시구에 등장하기도 한다.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 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는데, 그 뒤 천년이 지난 뒤에 학이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 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야 새야 정령위야! 집 떠난 지
천년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냐!’ 라고 하였다 .
* 悠然(유연) : ① 유연하다 ② 유유하다 ③ 성질이 침착하고 여유가 있다
[느낀 점]
이 그림은 갈필로 그려진 예찬의 작품인데, 당시 몽고족에 의해 중원이 침략을 당해 한족(漢族) 사대부들이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고 있던 시기 이 작품은 이러한 애환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어 지금도 중국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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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찬 / 예찬(1301-1374)은 원대(元代)의 산수화가 書畵 자료
예찬 |
예찬 / 예찬(1301-1374)은 원대(元代)의 산수화가 200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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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찬 용슬재도 서예
풍경이 아니다, 깨질 듯 청량하고 고요한 마음이다
화면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다. 원근조차 없다. 시선은 사라지고 텅 빈 마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담박하고 꾸밈없는 예찬의 그림은 원대 문인화에 나타난 '정신의 풍경'의 극한지점이다. 우리는 모종의 경계의 끝, 혹은 그 너머 미지의 영역에 들어 선 것이다. 우리의 미의식을 순식간에 뒤흔드는 황량한 들녘 한가운데 우리는 던져졌다. 여기에서 도대체 형상이란 무엇이고, 본다는 것은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예찬(倪瓚, 1301~1374)의 '용슬재도(容膝齋圖)', 이 적막한 공간을 방황하는 일은 스산하고 당혹스럽다. 이곳은 산수화의 구경(究竟)인가, 폐허인가? 원나라 말, 예찬은 물의 지방 강소성의 무석(無錫)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부잣집 자제는 다른 것에 도무지 취미가 없었다. 오직 독서와 시 짓기, 서화만을 좋아할 뿐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죽고 자신이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그는 집 안의 '청비각(淸閟閣)'에 전국 시인 묵객을 초빙하여 시와 그림으로 교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전 재산을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홀연히 가족을 데리고 방랑길을 떠난다.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홍건적의 난이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있을 즈음이다. 소주(蘇州) 태호 근처, 물 위에 배를 띄우고 떠도는 20여 년, 궁핍하고 외로운 방랑의 시작이었다. ■고요한 적막감으로 가득 찬 그림 오랜 방랑이 그를 늙고 지치게 만들었을 때, 그는 지인의 부탁으로 한 풍경을 그렸다. 몇 획 마른 선만이 아슬아슬하게 유(有)와 무(無) 사이를 흐르고 있을 뿐 화제(畵題)도 없는 풍경이었다. 뒷날 지인이 그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하니 글을 한 편 써 넣어달라고 다시 찾아왔을 때 이 풍경은 비로소 '용슬재도'가 되었다. 그 다른 사람은 고향 무석의 용슬재 주인이었던 것이다. 예찬은 그림의 글에 죽기 전에 고향에 가서 용슬재에 올라 이 그림을 다시 볼 수 있기 바란다고 써놓고 있다. 스산한 물가에는 송나라 선승 천동정각의 선시 한 편이 떠도는 듯. 몽환의 허공 꽃, 육십칠 년에 흰 새 날아가고 물안개 걷히니 가을물이 하늘에 닿았네. 예찬은 황량한 자신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아내는 죽고, 자식들은 흩어지고,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정처 없는 방랑, 그 끝인 죽음의 그림자를 자기 그림에서 언뜻 보았던 것일까? 들뢰즈의 말처럼 진정한 예술가란 그들에게 말없는 죽음의 표지를 달아주는 그 무언가를 본 사람이던가?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예찬은 고향의 친척집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그의 소망대로 고향에서 '용슬재도'를 다시 보았을까? 예찬이 죽은 뒤 강남의 사대부들 사이에는 예찬의 그림을 한 점쯤 소장했는가 아닌가로 인품의 청탁을 가늠했다고들 한다. 고요한 적막감으로 가득 찬 '용슬재도'는 셀 수 있을 정도로 툭툭 찍은 약간의 미점을 빼면 모두 마르고 담담한 붓으로 그려졌다. 전경과 후경을 나누는, 화면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강의 수면에는 붓이 거의 닿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다. 산과 강과 나무, 인적이 없는 정자, 그뿐이다. 화려한 색채도, 세련된 기교도, 힘이 넘치는 용필도 보이지 않는다. 붓은 아무 욕심이 없는 듯 메마르고, 형상들은 고요하고 성기어서 청량하고 소쇄(瀟灑)한 공기로 쓸쓸하게 차 있는 듯하다.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는" 그 마음 구체적인 계절은 여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럼에도 분명 용슬재의 기운은 만추(晩秋)의 기운이다. 가을의 금기(金氣), 맑은 쇳소리, 그러나 울리지 않고 고여 있는 울림, 건드리면 쩡하고 금이 갈 듯한 적막의 소리를 듣는다. 텅 빈 강, 저 속에 서면 침묵의 소리로 귀가 먹먹할 것만 같지 않은가. 전경의 메마른 나무들이 그 적막에 머리를 잠그고 있다. 형체들은 극도로 간소화되고 화면은 여백으로 충만하다. 동시대 화가 왕몽(王蒙)과는 서로 대극을 이룬다. 왕몽이 '빽빽함(密)'의 극치라면 예찬은 '성김(疎)'의 극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경외했다. '송하독좌도'는 두 위대한 화가의 역사적인 만남의 현장이다. 예찬의 그림에 왕몽이 세부의 점과 획을 더했다. 왕몽의 복잡함과 비교한다면, 예찬의 화면은 너무나 소략하고 필획은 '일필초초(逸筆草草; 한두 번 붓질로 대략 그림)'하여 소박하고 졸렬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기교는 졸렬해 보인다(大巧若拙)"는 노자의 말을 상기해 두어야 할 것이다. 왜 당신 그림은 사물과 닮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예찬은 대답하곤 했다. "내 가슴속에 있는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는 기운(胸中逸氣)을 드러내려 했을 뿐이다." 속기를 싫어한 예찬은 자주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가는 그가 병적인 결벽증을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결벽증의 예찬은 물이 가진 정화력을 믿었던 것일까? 혹시 그는 자신의 부유한 재산과 어지러운 시대에 대하여 지식인으로서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하여 목욕하듯이, 자신의 허물을 정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강과 호수를 떠돈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다. 화면에는 바람도 인적도 없다. 여기는 원근법도 없는 절대공간이다. 모든 시선은 사라지고 정자가 하나 있을 뿐이다. 장자는 마음을 '신령한 누각(靈臺)'에 비유한 적이 있다. 시선은 사라지고 시선을 거둔 텅 빈 마음 하나가 거기 고요히 놓여 있을 뿐이다. 형상과 시선의 분별이 사라지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만들어내는 적막감! 킴바라 세이고는 어찌하지 못하는 적막에 다다라야만 비로소 그 예술은 구경역(究竟域)에 다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예찬의 적막은 이 구경의 적막이다. ■"예찬의 그림만은 배울 수 없다" 이 구경의 적막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 있다. 전경의 나무들 가운데 고사해버린 작은 나무 한 그루! 예찬의 그림에서는 늘 전경의 나무들이 그림의 표정을 이룬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 가끔 큰 나무 옆에 고사한 듯 보이는 마른 나무가 등장하곤 하지만, 이 그림에서처럼 완전히 고사한 나무는 없었다. 그는 화제를 쓰기 위해 '용슬재도'를 다시 보면서 자신도 전율하며 이 나무를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말없는 죽음의 표지를 달아주는 그 무언가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을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자 조용히 고향을 떠올렸을 것이다. 명의 왕세정은 "송의 그림은 모사하기 쉽고, 원의 그림은 모사하기 어렵다. 그래도 원의 그림은 배울 수 있지만, 오직 예찬의 그림만은 배울 수 없다"고 하였다. 동기창(董其昌)은 예찬의 그림을 '고담천연(古淡天然; 예스럽고 담박하며 꾸밈이 없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러한 예술의 풍격을 '평담(平淡)'이라고 한다. 북송의 시인 매요신은 한 시에서 "시를 짓는 데는 고금이 따로 없이/ 오직 평담하게 짓는 것이 어렵다"라고 하였다. 무미한 평담은 우리 시선을 내면의 의식으로 바꾸어 형상 너머 아득히 정신의 풍경을 연다. '용슬재도'의 이 메마른 평담은 원대 문인화에 나타난 '정신의 풍경'의 한 극한 지점이다. |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32> 예찬 '용슬재도': 극한의 적막을...
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511..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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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 미술 元代美術 중국 미술사
원대 미술 元代美術 몽골인의 왕조를 원元이라고 칭한 것은 세조(쿠빌라이) 연간인 지원 8년(至元, 1271)이지만, 태조(칭기즈칸)의 즉위가 1206년이고 1215년에는 수도 북경北京을 함락시켰으며 1234년에 금金을 멸하였기 때문에 원대(元代)의 상한은 적어도 1230년대로 올라간다. 그리고 1348년에 마지막 칸의 가혹한 학정에 대한 중국인의 불만은 광범위한 폭동으로 이어졌다. 20년동안 반란군과 군벌 사이에 피폐해진 국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거듭되었고, 몽골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국가를 통제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1368년 칸이 북경을 통해 북쪽으로 도주하자 짧고도 불명예스러운 몽골의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월간미술자료> |
원대 미술 元代美術 2016.04.17
cafe.daum.net/rpschoo/OJF5/62 교사, 강의실, 교과서가 없는 3무(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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