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사리봉안기

2019. 3. 12. 16:14美學 이야기



미륵사지 사리봉안기 | 미륵사지 사리봉안기



사리봉안기(원문)와 원문해석

 

(앞면)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竊 훔칠 경 斛 휘 곡

 

   가만히 생각하건대,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의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是以託生王宮示滅雙樹遺形八斛利益三千遂使光曜五色遶七遍神通變化不可思議

*遶 두를 요 遍 두루 편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시면서 3천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나)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繞匝.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

 

我百濟王后佐平沙乇(宅)積德女種善因於曠劫受勝報於今生撫育萬民棟梁三寶故能謹捨淨財造立伽藍以己亥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使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乇(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뒷면)

 

世世供養劫劫無盡用此善根仰資 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寶歷共天地同久上弘正法下化蒼生又願王后卽身心同水鏡照法界而恒明身若金剛等虛空而不滅七世久遠竝蒙福利凡是有心俱成佛道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歷]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번역: 동국대사학과 김상현 교수/조선일보 2009.1. 20.




 ▲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제사리 호. 


높이 13cm 어 깨 폭 7.7cm로 아담 한 크기에 전체적으로 황 금빛이 감돈다. 

뚜껑과 목, 바닥 은 연꽃 잎을, 몸체는 인동 당초 를 형상화했다. 

우아하면서도 정밀한 세공기법을 자랑하는 이 사리호는 찬란했던 백제 후기 문화를 보여주는 국보급 유물이다. 

게재된 사진의 높 이는 17cm. /문화재청 제공




 

 ▲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리장엄.

사리장엄은...



 

 

미륵사지 서탑.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겨가는 전형적인 유물이다.

 

 

 

▲ 약 1400년 전의 유물 505점이 발굴된 현장.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은으로 만든 원형 사리합(盒).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무왕(武王)

   무왕(武王)은 백제 말기 왕권을 강화한 국왕으로 평가된다.

그에 앞선 혜왕과 법왕이 즉위 이듬해 사망한 것과 달리 무왕은 41년에 이르는 재위기간 동안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빈번하게 신라를 공격하고 이를 통해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대규모 역사(役事)도 일으켰다.

서기 630년 사비궁(宮)을 중수(重修)하고 634년에는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인공 섬을 만들고, 선대인 법왕 때 착공했던 왕흥사(王興寺)도 완공했다.

 

   또 재위 후반기에는 현재의 익산지역을 중시해 왕궁평성(王宮坪城)을 건설하는 등 장차 도읍을 옮길 움직임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발굴로 익산지역에 총면적 1338만4699㎡(약 404만8870평)에 이르는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한 것도 무왕 재위 중의 일이었음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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