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虛舟) 이징(李澄)의 작품세계Ⅱ- 묵죽도,영모도,
묵 란 (墨蘭)
이 작품은 17세기 초의 묵란도 양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화첩에는 9점의 산수와 1점의 화훼 그림이 수록되어 있으며 화풍은 전체적으로 고식을 띄고 있다. 산수는 17세기 화풍을 잘 반영해주고 있어 이 묵란도가 허주 이징의 작품임이 불분명한 가운데도 17세기 작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 하단에 간략하고 거친 터치로 지면을 표현했고 그 위로 대각선으로 뻗어나간 난엽은 변각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로 가시나무가 뻗어나가고 있다. 뒤틀린 난잎들은 묵의 농도를 달리해 변화를 주고 있다. 꽃대는 엷은 담묵으로 짧게 표현하였다. 고도로 세련됨을 보여준다.
묵란(墨蘭)
고죽(枯竹)
순죽(筍竹)
이징, <난죽병蘭竹屛>, 1635년, 비단에 수묵 각 116.0x41.8cm, 개인
남아있는 것 중 제작 연대가 확인되는 그의 작품은 1635년《난죽병(蘭竹屛)》과 1643년 63세에 그린《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 2점뿐 이다. 전자는 조광조의 8수의 제시가 적힌 윤언직의 <난죽병>이 임진왜란때 유실되자 7수를 기억해내고 이를 이징에 의뢰해 다시 그리게 한 것인데 현재는 2폭은 없어지고 시 5수에 그림을 그린 5폭과 발문 한 폭 등 6폭만 전한다. 학고재에서 1992년 2월 개최한 「조선후기 그림과 글씨」에는《난초와 대나무(6곡병)》이란 명칭으로 소개됐다.
죽조도(竹鳥圖)
영모도에서는 절파풍의 강조된 묵법을 토대로 간일하게 도안화되었으면서도 서정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소,말,기러기,원앙,등을 많이 그리고 이분야의 한국적 화풍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징의 영모 대련
90세 이상 장수해 많은 작품을 남긴 이름난 화가로 스페인 출신 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중국의 치바이스齊白石(1863-1957)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6년 서울대 미학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을 역임한 장발(張勃, 1901-2001), 초상화의 대가 채용신(1850-1941), 치바이스의 제자 김영기(1911-2003) 그리고․ 장우성(1912-2005) 화백 등이 손꼽힌다. 이들은 노익장을 과시하듯 식지 않는 예술적 정렬로 말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지속했다.
2011년, 금년은 문인화가 김시(金禔, 1524-1593)와 더불어 앞선 시대와 다른 새로운 화풍으로 조선 중기화단을 연 이경윤(李慶胤, 1545-1611) 타계 400주년이며, 그의 화업을 이은 아들 허주 이징(虛舟 李澄, 1581-1674이후)의 탄생 430주기가 된다. 조선 중기화단에서 활발한 활동과 차지하는 위상을 증명하듯 이징의 산수와 영모 분야에서 그는 부친에 뒤지지 않을 뿐 더러 오히려 능가하는 면도 있다.
학계에서는 그의 생애와 그림세계에 대한 조명도 이루어졌다.(金智惠,「虛舟 李澄의 生涯와 山水畵 硏究」,『美術史學硏究』207호, 1995.9 ;「虛舟 李澄의 水墨翎毛畵」;『미술사연구』11호, 1997.12) 이들 연구를 통해 그는 63세에도 막내를 낳는 등 5남 4녀를 두었고 아직 단정키는 힘드나 94세 이상 장수했으며, 90세를 넘기고도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징의 현존 그림에는 후관도 없지 않으나 관지(款識)가 선명한 점이 부친의 경우와 크게 구별된다. 이는 그가 종친가의 후예이지만 다섯 형제 중 서자(庶子)로 태어나 주로 중인(中人)들 몫인 도화서 화원으로 봉직한 직업화가인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화원으로서의 활동은 선조때부터 시작해 광해군에 이어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어전에 불려나가 여러 차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어릴 때 말을 즐겨 그리는 등 그림을 즐긴 인조는 이 일로 인해 하찮은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을 들으며 정치를 소홀히 했다고 책망받는 단초를 제공했다.
오늘날 전하진 않으나 문헌에 의할 때《김시습 초상》《태조 어진(御眞)》 개수 등의 초상화 제작과 조선초기의 석경(石敬) 화첩 등 여러 선배화가의 그림 복구에도 참여했다. 직업화가로써 산수 , 영모, 초상, 묵죽 등 다방면의 장르에 두루 능통했으며, 선조 때인 20대 중반에 이미 명성[本國第一手]을 얻은 화가였다. 그에게 붙은 양공(良工), 국공(國工)이란 칭호가 시사하듯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간과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화첩서 산락된 영모 소품 [이원복] - 개인화랑 기획전 출품작들
오늘날 이름과 장소가 바뀐 곳도 있으나, 1980년대 초부터 서울의 동산방東山房 ․ 공창화랑孔昌畵廊․ 대림화랑大林畵廊 ․ 부산의 진화랑珍畵廊 등 개인화랑에서 조선시대 그림을 중심으로 기획한 전시는 우리 옛 그림에 대한 관심고조 및 새 자료 발굴 등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에 기여도가 적지 않다.
아직 경매가 활성화되기 이전이어서 이들 전시는 회화사를 전공자들에겐 작품을 실사實査하기 좋은 기회였다. 또, 학계와의 공조共助로 출품작품 선정과 도판 해설이 추진된 점도 주목된다. 이를 통해 알려진 이징의 동물 그림 몇 점은 당시 간행된 도록에도 실렸다.
<자웅쌍화도雌雄雙和圖>(4폭), 종이에 수묵 각 32.0x29.0cm, 개인
먼저 1992년 대림화랑에서 개최된 ‘조선시대회화전’에 <자웅상화도雌雄相和圖>란 작품명으로 출품된 일련 4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작품 제목이 시사하듯 애정을 과시하듯 둘이 밀착해 유영하는 원앙․ 함께 목을 축이며 하늘 보는 금계金鷄․ 갈대숲에서 얼굴을 마주한 기러기 노안蘆雁․ 버들 아래 그늘 아래 해오라기白鷺 등 물가를 배경으로 암수 짝을 이룬 새들의 정겨운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중 한 폭에 등장한 조류는 까투리와 장끼로도 보이지만 목 뒤 줄무늬 등 같은 주제 그림들과 비교할 때 꿩 아닌 금계로 사료되는데, 수묵만이 아닌 채색을 사용했다면 보다 선명할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은 조선중기 화단에 크게 풍미한 사계영모화四季翎毛畵 계열로, 간송미술관 소장 및 여타의 화첩이 그러하듯 4점만이 아닌 8폭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기법이나 필치 등도 기존에 알려진 양식화된 이징의 영모에 가까운 그림이다. 다만 화면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 있는 주문방인 ‘이징李澄’은 흔치 않은 도장인데, 찍힌 위치도 그러하지만 해오라기 그림에는 같은 도장이 둘씩이나 있어 화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 후대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 절파계浙派系 소경 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에 등장하는 인물이 그러하듯 주인공 새들은 적당한 크기로 산수배경과 동가同價를 이룬 구성이다. 수묵 위주이되 다소 거친 필치로 용묵用墨의 묘妙와 담청淡靑의 바림을 하여 공간감과 화면의 깊이를 더한다.
이들 네 폭은 활달하고 분방한 필치의 수묵화조화로 이름을 얻은 명明 궁정화가 임량林良(15세기초-말)과 통하는 국제성을 반영하면서, 나아가 성리학 중심인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조촐하며 담백한 미감과 정서를 십분 반영한다.
공개 당시 ‘유현한 산수 경관과 함께 자연의 이치와 화합을 표상하는 듯’ 그리고 이 시대 즐겨 그린 사계영모화가 그러하듯 ‘우주적 조화와 질서를 통해 참된 즐거움을 누리며 삶을 윤택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정서와 낭만’을 드러낸 ‘가작佳作’(洪善杓, 동 전시도록,pp.116-117 도판해설)으로 제시되었다.
<물소水牛>, (3폭 중 1점), 비단에 수묵, <매화나무에 깃든 까치梅鵲>(3폭 중 2점),
각 24.0x17.5cm, 개인 비단에 수묵, 각 24.0x17.5cm, 개인
두 번째는, 2007년 공화랑에서 개최된 ‘9인의 명가비장품전名家秘藏品展’에 출품된 <물소水牛>와 두 절지영모折枝翎毛 <매화나무에 깃든 까치梅鵲> 등 소품 3점으로 동일필치를 통해 한 화가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비교적 낯익은 ‘자함子涵’과 ‘허주이징虛舟李澄’ 두 주문방인은 그림 크기에 비해 다소 큰데 이들 또한 화가 자신이 아닌 후대에 찍은 도장들로 사료된다.
김식, <한가롭게 누운 늙은 소老牛閑臥>, 개인. 이징, <나무 아래 잠든 소樹下牛眠>,
모시에 수묵 28.5x18.0cm, 간송미술관.
이들은 여러 점으로 구성된 화첩에서 산락된 것으로 <물소>의 경우 김식金埴(1579-1662)의 작품과도 매우 유사한 화풍이다. 이징의 동일 소재와 친연성이 감지되며, 양식이나 구도에서 시대성이 드러난다. 화면의 오염과 다소 거친 필치, 짙은 먹색으로 까치와 소가 취한 자세를 표현한 것은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화조>, 종이에 수묵, 각 28.7x25.5cm, 개인소장
원으로 구획한 공간 내에 그린 두 <화조>는 2000년 대림화랑의 ‘조선시대 좋은 그림전 - 회화명품에 대한 단상’ 기획전시에 전칭으로 출품되었다. 이처럼 사각의 방형 ․ 원 ․ 부채꼴 형태 등으로 화면을 구획한 그림은 흔히 백납병에서 살필 수 있으며 병풍 외에 화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화면 상태가 양호하며, 재질은 종이가 아닌 베[苧本]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산수화첩』안에도 원형으로 구획해 그린 <산수도>가 있다. 새 그림 중 나뭇가지에 등장시킨 절지영모折枝翎毛이거나, 산수를 배경으로 한 소경영모小景翎毛 두 양식 중 후자에 속한 그림이다.
주인공인 새가 취한 자세뿐 아니라 배경에 등장한 나무며 초화류草花類 그리고 산수 요소에서도 계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화면 내 관지款識가 없어 작가를 단정하긴 힘드나 각기 화면 좌우에 무게 중심을 둔 대칭구도로 한 마리씩 바위에 앉은 새를 잎이 가늘고 긴 풀에 들국화와 패랭이石竹를 함께 그렸다.
차분하고 깔끔한 화면 구성, 친숙한 식물 소재 표현, 바위 묘사에서 중기 양식이 잘 드러난다. 동 전시에는 조속趙涑(1595-1688)의 작품과 유사한 소품 <매작梅鵲> 한 점도 이징 전칭으로 출품되었다.
노우한와 (老牛閑臥)
수하우면(樹下牛眠)
방학도(訪鶴圖)
방학도(訪鶴圖) 세부
이징, <오리를 잡는 흰 매白鷹搏鴨>, 종이에 수묵 102.5x61.9cm, 개인
이징의 현존하는 영모화 중에는 대작의 범주에 드는 개인소장 작품 <오리를 잡는 흰 매白鷹搏鴨>가 있다. 이 작품은 독립된 그림으로 1973년 ‘한국미술 2천년전’에 출품되었는데, 화면 좌측 하단에 있는 ‘박창훈가진장(朴昌薰家珍藏)’의 인장이 있어 원 소장가를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족자 배면에는 별지에 써 붙인 오세창의 첨簽[李虛舟白鷹搏鴨圖幀]과 일제강점기 조선미술관 주최로 열린 ‘조선명보전람회’(1938년)에 출품한 사실을 쓴 묵서가 있다. 이 그림은 이후 몇 차례 개인화랑 전시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화면 왼쪽 상단에는 솥 도장 ‘허주’ 와 ‘이징자함李澄子涵’의 주문방인이 있는데. 이처럼 이름과 자를 함께 새긴 것은 다른데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와 동일 주제로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미공개회화 특별전’에 <호취豪鷲>란 명칭으로 출품된 작품이 있어 좋은 비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