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평양성_출토_고구려_刻字城石의_판독_및_위치_재검토.pdf
기 경 량 (가천대학교)
머리말 Ⅰ. 평양성 출토 刻字城石의 판독과 해석 Ⅱ. 각자성석의 위치 추적 맺음말
●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奇庚良, 2017『高句麗王都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제3장 2절「후기 평양성 長安城의 조영」의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임. ● 투고일: 2017. 5. 28. ● 심사일: 2017. 5. 30. ● 게재확정일: 2017. 6. 6.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72
주제어:평양성, 장안성, 각자성석, 오탄, 한사정
요약 장안성은 고구려 후기의 도성이다. 최근 고대 도성사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는 점과 연동하여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장안성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는 평양에서 출토된 고구려 시기의 刻字城石으로, 지금까지 5개가 출토되었다. 평양성 각자성석 연구에는 아직 미진한 부분이 존재한다. 판독에 있 어서도 학자들 간 견해가 갈리는 부분이 있고, 특히 출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게 나뉘어 사실상 정설이라고 할 것이 없다. 각자성석의 출 토지에 대한 논란이 혼란스럽게 전개되는 이유는 각자성석에 대한 조선 시대 문헌 기록에 보이는 정보의 비일관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합리적 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논란이 분분하였던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1석 의 발견 위치에 대해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다. 『해동금석원』에 전하는 김정희의 글과 『삼한금석록』의 오경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탄에 서 각자성석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석과 제3석은 外城남쪽의 한사정에서 출토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오탄에서 출토되었다는 각자 성석은 제1석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제1석의 발견지가 오탄 부근이 틀 림없다면, 제1석에 새겨진 축성 내용은 中城남쪽 성벽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5석의 출토지 위치에 대해서는 1978년 북한의 최희림이 저술한 『고구려 평양성』의 오류가 현재까지 답습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구 글 어스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이를 교정한 위치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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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長安城은 552년(양원왕 8)에 축조를 명하고, 586년(평원왕 28)에 이도 가 이루어진 고구려의 후기 평양성이다. 장안성 축조는 고대의 계획 도시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최근 크게 주목받고 있다. 관련된 문헌 기록은 매우 소략하지만 장안성을 축조할 당시 새긴 刻字城石이 성벽에서 여러 개 발 견되어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해당 금석문에 대한 정확한 판독과 분석은 장안성 연구의 기초 작업으로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 족함이 없을 것이다. 평양성 각자성석의 명문 판독은 이미 여러 차례 이루어진 바 있다. 그 러나 일부 글자들의 경우 여전히 판독 상에 이견이 존재하며, 명문에 등장 하는 용어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 다. 이에 기존의 판독안들을 대조하여 각자성석의 명문을 재검토하였다.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연구에서 학자들 간 크게 의견이 갈리고 있는 중요한 주제로 각자성석의 위치 문제를 들 수 있다. 각자성석에는 축성 거 리가 새겨져 있는 만큼 각자성석들의 본래 위치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파 악은 장안성 축조의 과정과 실상을 구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사안이다.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여러 안들이 어 지럽게 제시되었을 뿐 아직 정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는 각자성석의 출토지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조선 시대 문헌 기록들이 일 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이에 관련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 여 정보 간의 모순을 제거하고, 실상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장안성의 각자성석은 모두 5개이고, 실물이 전하는 것은 3개이다. 尹游의 平壤續誌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평양 북성에서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74 “본성은 42년 만에 역을 마쳤다(本城四十二年畢役)”고 새겨진 돌이 나왔 다고도 하는데,1) 이것까지 포함하면 평양에서는 모두 6개의 각자성석이 나온 셈이 된다. 다만 ‘평양속지 각석’의 경우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 다. 명문 내용이 다른 각자성석들과 크게 이질적이어서 고구려 때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당대의 각자성석이 분명하다고 판단되는 제1석~제5석의 각자성석만을 분석 대상으로 한다. 현재 실물과 탁본이 존재하는 각자성석은 제2석․제4석․제5석뿐이 다. 제2석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제4석은 평양의 중 앙역사박물관에, 제5석은 평양 인민대학습당 북서쪽 귀퉁이 성벽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평양속지 각석’을 비롯해 제1석과 제3석은 문헌상으로 내용이 전할 뿐 실물이나 탁본을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 으로 감안하여 작업을 수행하였고, 논란이 있는 글자들의 경우 탁본 및 사진 자료를 제시한 후 유사한 글자들과 대조하는 방식을 취하여 판독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Ⅰ. 평양성 출토 刻字城石의 판독과 해석 1.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1석 제1석의 존재는 淸의 고증학자인 劉喜海가 輯錄하고 劉承幹이 重校한 海東金石苑에 소개되어 있다. 劉喜海는 김정희와 교류하며 이 자료를 입수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여기 실려 있는 김정희의 글에 따르면 제1석은 1) 平壤續志 卷1, 城池, “舊城底有石刻曰本城四十二年畢役古人之不計功力而以堅 築爲事者可見矣.”.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75 1766년(丙戌年)에 발견된 것으로, 64년이 지난 1829년 당시에는 이미 사 라져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2) 또한 이 각자성석의 높이는 9寸, 너비는 4尺3寸이며 행마다 2자씩 12행이 隸書로 새겨져 있었다고 설명 하였다. 김정희가 제시한 독문은 다음과 같다. ①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1석 판독문 12 11 10 9 8 7 6 5 4 3 2 1 造侔夫兄里十西始八月年己① 作利若相小一向役日卄五 丑 [酉] ② ∙판독: 己丑[酉]年五月卄八日始役西向十一里小兄相夫若侔利造作 ∙해석: 기축[유]년 5월 28일 役事를 시작한다. 서쪽 방향으로 11리는 小兄3) 相夫와 若侔利가 짓는다. 해동금석원․평양지4)․삼한금석록 등에서는 각자성석의 시 작 부분에 등장하는 간지를 ‘기축년’이라고 판독하고 이 성석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각자성석 은 장수왕대의 평양성과는 무관하며 후대에 축조를 시작한 장안성과 관 련된 것이다. 田中俊明은 제2석과 제3석의 사례를 통해 제1석의 1-② ‘丑’을 ‘酉’의 오독으로 추정하였다.5) 또한 민덕식은 제2석과 제3석의 사례를 보았을 때 제1석의 2-② 역시 ‘五’가 아니라 ‘三’의 오독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 2) 海東金石苑 卷1, 高句麗古城石刻, “此刻出於丙戌今六十四年不可復覓.”. 3) 小兄: 고구려의 관등으로 周書에 따르면 13관등 중 네 번째로 언급되며, 翰苑 所引高麗記에 따르면 14관등 중 10등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명 ‘失支’라고 한다. 4) 평양지는 1590년 윤두수가 만든 것이 있고, 1837년과 1855년에 기존 평양지를 증보하여 간행한 작자 미상의 평양지가 있는데, 이 평양지는 후자이다. 5)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史學硏究會, 119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76 다.6) 이처럼 ‘기축년’을 기유년으로 고쳐 읽는 것은 타당하지만, ‘5월’이 아니라 ‘3월’일 것이라 보는 것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에 제1․2․3석 공히 간지를 ‘기축년’으로 읽은 것은 제2석과 제3석이 발견 된 해가 마침 기축년이었기 때문에 이를 각자성석 명문 내용과 연결하여 神異한 일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과 일의 경우 는 사정이 다르다. 제1석에 새겨진 축성이 시작된 날짜는 ‘28일’이다. 제2 석․제3석의 ‘21일’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제1석의 5월을 3월로 고쳐 파 악하는 것은 비록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相夫若侔利’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보기도 하고, ‘상부’를 따로 분리 하여 직명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相夫’를 ‘上部’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 만,7) 고구려 사람들이 ‘上部’를 굳이 ‘相夫’로 표기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당시의 인명 표기 방식이 대개 ‘부명+관등+인명’의 순서로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면 관등인 小兄다음에 위치한 ‘상부약모리’는 인명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만 한 사람의 이름으로 볼 것인가 ‘상부’와 ‘약모리’ 두 사 람의 이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마침 고구려의 인명 중에는 ‘상부’의 사례가 있는데, 고구려의 제14대 왕인 봉상왕의 이름이 바로 ‘相 夫’이다. 또한 봉상왕 때 國相이었던 ‘倉助利’나 魏書․梁書․資治 通鑑 등에 등장하는 미천왕의 이름인 ‘乙弗利’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인명에서는 끝에 ‘利’라는 어미가 붙는 경우가 흔하였다. 고구려 인명은 2자나 3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부약모리’는 ‘상부’와 ‘약모 리’ 두 사람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민덕식은 실물이나 탁본이 전해지는 다른 각자성석의 행수가 5~8행 인 것에 비해 이 각자성석의 행수만 12행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혹시 김 정희가 橅本을 만들 때 1행에 2자씩 일정하게 배치하여 임의로 글자를 6) 閔德植, 1993, 高句麗의 平壤城刻字城石에 관한 硏究, 韓國上古史學報 13, 96쪽. 7) 위의 논문, 106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77 배열한 것이 아닌지 의문을 표하였다.8) 해동금석원에는 돌의 높이와 너비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는데, 함께 실려 있는 제2석은 높이 7寸, 너비 1尺1寸4分9)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높이 9寸, 너비 4尺3寸인 제1석은 가로가 지나치게 길어 형태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독 문을 제공한 김정희 자신조차도 실물이 이미 사라졌다고 밝힌 상황이므 로, 모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2.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2석 제2석은 해동금석원과 평양지․삼한금석록에 기록이 전하는 데, 해동금석원은 발견 장소가 평양 외성의 烏灘아래라고 하였고,10) 평양지와삼한금석록은 九疊城이라고 전하고 있다.11) 구첩성은 기자 가 성을 9겹으로 만들어 홍수를 막았다는 전승에서 비롯된 평양 외성의 별명이다. 평양지에 따르면 발견 시기는 1829년(순조 29)으로, 홍수로 성벽이 무너지면서 2개의 각자성석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것이 곧 제2석과 제3석이다. 삼한금석록에는 1855년(咸豊乙卯年) 오경석이 북경에 가다가 평 8) 위의 논문, 96쪽. 9) 조선 시대 사용된 주척을 참고하여 1척=약 20.8cm로 계산해 보면 제1석은 세로 18.72cm, 가로 89.44cm가 되고, 제2석은 세로 14.56cm, 가로 23.71cm가 된다. 제2석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이 유물 의 크기는 세로 19.5cm, 가로 36.0cm이다. 단 이 유물은 조각이 난 상태로 상자 안에 석고로 고정되어 있는 형태로 보관되고 있기 때문에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수치는 성돌의 본래 크기가 아니라 성돌을 보관하는 상자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여하튼 제2석의 경우 세로와 가로의 비율이 약 2 : 3 정도이고, 실물이 확보되어 있는 제4석과 제5석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데 반해 제1석은 세로와 가로의 비율이 1 : 5에 이르기 때문에 해동금석원의 수치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10) 海東金石苑 卷1, 高句麗古城石刻, “又得一石於外城烏灘下.”. 11) 三韓金石錄, “純廟己丑大漲九疊城潰決而出二誌石.”.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78 양에 들러 각자성석의 실물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12) 제2석은 이후 어느 때인가 오경석이 소유하게 되었고, 아들 오세창에게 전해졌으 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파손되었다. 일부 조각은 분실되고 나머지 11개 조 각은 석고로 고정시킨 형태로 1965년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소장 하고 있다. 사라진 부분은 2행 전체인데, 마지막 글자인 ‘日’의 왼쪽 하단 자획만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림1】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2석의 탁본 출처: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1992韓國書蹟,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p.9. 하지만 다행히도 2행을 포함한 원형 상태에서 뜬 탁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원래의 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원형 탁본을 자세히 보면 성석에 조각이 난 흔적들이 확인되므로, 해당 탁본을 뜰 당시 제2석은 이미 파손 된 상태였다고 이해된다. 파손이 되는 과정에서 2행에 해당하는 조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미 파손되어 조각이 난 상태에서 보관을 하다가 해당 부분을 분실하였던 것이다. 12) 三韓金石錄, “此刻今在平壤府治西十里烏灘江涯余於咸豊乙卯作燕臺之行路 出箕城謁殷師墓歷覽井田故址因沿江而至閑似亭訪得此刻于故城潰決處蓋高句 麗築城時所刻也.”.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79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2석은 편편한 자연석에 글자를 새겼고 석재 는 수성암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도록에서는 서체가 전반적으로 北朝楷書의 분위기가 강하다고 설명하고 있는데,13) 실제로 북위 때 금석 문과 글씨가 유사하다. ②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2석 판독문 7 6 5 4 3 2 1 作俳物東自[三] 己① 節湏苟十此月酉② 百小二下卄年③ 矣頭兄里向一④ 日⑤ ∙판독 : 己酉14)年[三]月廿一日自此下向東十二里物苟小兄俳湏百頭作節矣 ∙해석 : 기유년15) [3월] 21일 여기서부터 동쪽 방향 12리는 物苟16)의 소형 俳 湏와 百頭17)가 만드는 것을 통제한다.18) 13)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1992, 韓國書蹟,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9쪽. 14) 丑(해동금석원, 삼한금석록), 酉(正上秀雄, 최순희, 田中俊明, 鬼頭淸明, 민덕식) 15) 기유년: 해동금석원․평양지․삼한금석록 등에서는 이를 ‘기축년’이라고 판독하고 이 성석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던 시기의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성석은 장수왕대의 평양성이 아니라 양원왕대에 축조를 시작한 후기 평양성인 장안성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기유년은 평원왕 31년인 589년으로 볼 수 있다. 16) ‘物苟’: ‘小兄’이라는 관등 앞에 나오므로 지역명이나 소속 집단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7) 百頭: 인명의 일부로 보기도 하지만 역을 수행하는 집단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직명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뒤의 제3석의 해석 부분을 참조할 것. 18) 만드는 것을 통제한다: ‘作節’이라는 표현은 신라 남산신성비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남산신성비에서는 ‘작절’이 문장의 앞부분에 나와 ‘지을 적에’ 정도로 해석이 되는 데, 여기서는 문장 끝에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기 곤란하다. ‘節’은 ‘감독하 다, 통제하다’ 정도로 해석해야 하므로 남산신성비의 그것과 같은 용어라 하더라도 용법은 다르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80 1-②: 酉 1-②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北魏于景墓誌 隋高昌國墓塼 해동금석원이나 삼한금석록 등에서는 ‘丑’으로 읽었으나, 井上 秀雄이 ‘酉’로 읽은 이래 다른 대부분의 판독에서도 모두 ‘酉’로 읽고 있 다. 실제로 자형상 ‘酉’가 분명하다. 해동금석원이나 삼한금석록에서 는 제1석․제2석․제3석의 간지를 공히 ‘己丑年’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제2석의 간지가 ‘己酉年’이 분명하므로, 실물이 현전하지 않는 제1석과 제3석 역시 간지가 ‘己酉年’일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게 되었다. 2-①: [三] 三五 2-①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소장탁본 北魏元懷墓志 北齊 泰山經石峪 北齊 泰山經石峪 唐顏真卿 多寶塔碑 2행의 ① 글자의 경우 해동금석원에서는 원래 ‘五’로 보았다가 ‘三’ 으로 수정하였고, 평양지․삼한금석록 등 이후 판독자들은 대체로 ‘三’으로 보고 있다. 조각이 분실된 부분이라 탁본에 의지하여 판독을 할 수밖에 없는데 글자가 뭉개져 판단이 어렵다. 그런데 ‘五’로 볼 경우 두 번째 획으로 볼 수 있는 세로획이 매우 가늘고 희미하므로 이는 자흔으로 보기 어렵다. 흠집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한 제2석과 함께 발견된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81 제3석의 경우 해당 부분이 3월 21일로 판독되었는데, 두 각자성석은 문장 구조와 역사를 시작한 날짜까지 동일하기 때문에 제2석 역시 해당 글자 를 ‘三’으로 판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5-②: 苟 苟省 5-② 이화여자대 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東晉王羲 之東方朔 畵贊 唐顔眞卿 爭坐位稿 東晉王羲 之喪亂得 示二謝帖 隋智永 真草千字 文 5-②의 경우 해동금석원에서는 ‘省’으로 판독하였으나, 평양지․ 삼한금석록에서는 ‘苟’로 판독하였다. 이후 대부분의 판독자들이 ‘苟’ 로 판독하고 있다. 해동금석원에서 ‘省’으로 판독했던 것은 초서로 쓴 ‘省’의 자형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句’ 부분의 오른 쪽으로 돌아 내려오는 자획이 명확히 보이기 때문에 ‘省’은 성립하기 어 렵다. ‘苟’로 판독하는 것이 타당하다. 해동금석원에서 이 글자를 ‘省’ 으로 판독한 것에 근거하여 ‘物省’이라는 관청의 이름을 상정한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19) 하지만 잘못된 판독에 근거한 것이므로 성립할 수 없다. 6-①: 俳 徘 6-① 이화여자대 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北魏元珍 墓誌 北魏元徽 墓誌 隋智永眞 草千字文 唐顔眞卿 東方朔畵贊 碑 19) 鮎貝房之進, 1934, 高句麗城壁石刻文, 雜攷 6 上編, 372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82 頭 6-② 이화여자대 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北魏 孫遼浮圖 銘記 飛鳥 船首王後墓 誌 唐歐陽詢 皇甫誕碑 6-④ 6-①은 평양지에서 ‘徘’로 판독하고, 그 외에는 모두 ‘俳’로 판독하 고 있다. 하지만 두 글자는 상통하는 같은 자이다. 형태만으로 보자면 탁 본 상으로는 ‘彳’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좌상변에 난 흠집 때문이다. ‘俳’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6-②: 湏 6-②는 해동금석원에서 미상자로 보았으나, 평양지․삼한금석 록에서는 ‘湏’로 판독하였다. 이후 朝鮮金石總覽에서는 ‘須’로 판독하 였는데, 두 글자는 상통하는 같은 자이다. 일반적으로 ‘須’를 ‘湏’의 형태 로 쓰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글자가 뭉개져 있지만 좌변의 경우 하단에 서 오른쪽으로 꺾이는 형태가 명확하게 보여 ‘氵’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우변은 6-④ ‘頭’의 우변을 참고하여 ‘頁’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 하단의 ‘八’ 형태 중 왼쪽의 획이 잘 안 보이는데, 이곳은 돌이 마멸된 부분이므 로 획이 지워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7-①: 作 7-①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北魏元彦墓 誌 東晋王羲之 蘭亭敍 唐杜牧張好好 詩卷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83 7-①은 해동금석원에서 미상자로 보았는데, 평양지에서는 ‘腓’, 삼한금석록에서는 ‘作’으로 판독하였다. 자형상 ‘作’으로 보는 것이 타 당하다. 뒤의 글자인 ‘節’과 함께 ‘作節’이라는 단어를 형성한다는 점도 ‘作’으로 판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3.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3석 제3석은 평양지와 삼한금석록에서 1829년에 제2석과 함께 발견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는 소재를 알 수 없으며 판독문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삼한금석록에서는 ‘높이 1尺5寸, 너비 1尺7寸’이며 6행 으로 정서되어 있다고 하였으며, 글자 크기는 ‘1寸3分許’라고 하였다. ③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3석 판독문 6 5 4 3 2 1 節位內向卄己① 矣使中[卩] ▨[西] 一丑[酉] ② 尒百下[十] 日年③ 丈頭二自三④ 作上里此月⑤ 下⑥ ∙판독: 己丑[酉]年三月廿一日自此下向▨[西]下[十]二里內中[卩]百頭上位使 尒丈作節矣 ∙해석: 기축[유]년20) 3월 21일 여기서부터 ▨[서쪽]21) 방향으로 ‘下2리’[12리] 는 ‘內中’[內卩]의 百頭와 上位使尒丈이 만드는 것을 통제한다. 20) 기축년: 제1석․제2석과 마찬가지로 평원왕 31년인 589년 기유년으로 보아야 한다. 21) ▨[서쪽]: 이 글자에 대해 평양지에서는 ‘東’으로 소개하였고, 삼한금석록에서는 ‘口’로 소개하였다. 제3석은 제2석과 문장 형식이 거의 동일하고 같은 자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므로, 제2석의 방향과 반대인 ‘西’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84 제3석은 제2석과 함께 출토되었고 문장 구조도 거의 동일하다. 이를 통해 제2석과 제3석이 기능상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새겨져 있는 날짜 역시 3월 21일로 제2석과 동일하므로 제3 석의 간지 역시 ‘기축년’이 아니라 ‘기유년’일 것으로 여겨진다. 판독되지 않은 3-② ▨ 글자에 대해 제2석의 경우 해당 위치의 글자가 ‘東’이므로 제3석의 경우는 반대 방향인 ‘西’일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일 반적이다.22) 또 그 다음에 ‘下二里’라고 하였는데, 다른 각자성석들의 내용 을 참고했을 때 ‘十二里’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되었다.23) 제2석과 제3석 은 같은 위치에 나란히 배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기준으로 각각 동서 방향으로 진행되는 축성 작업의 시작점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한편 제2석과 제3석에 등장하는 “自此下向○十二里”라는 구절을 “自 此下向○十二里”으로 끊어 읽는 해석도 존재한다. 예컨대 제2석의 “自此 下向東十二里”의 경우 ‘이곳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동쪽 12리’로 해 석하고, 제3석의 “自此下向▨[西]下[十]二里”의 경우 ‘이곳으로부터 아래 로 내려가는 서쪽 12리’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에 제2석과 제3석이 출토 된 곳은 외성 통과선에서 가장 높은 분기점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하였다.24) 그러나 각자성석이 발견된 한사정 부근은 이 일대에서 딱히 높 은 지대라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성립하기 어렵다. ‘自此下’는 그냥 ‘여기(이 아래)서부터’의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內中’은 제4석의 ‘下後卩’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듯이, ‘部‘’의 약자로 널리 쓰였던 ‘卩’를 ‘中’으로 잘못 판독했을 가능성이 높다.25) ‘上位使’는 翰苑에 소개된 고구려 관등 중 9등인 上位使者를 의미한다. 이는 다른 22)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4쪽. 23) 閔德植, 1993 앞의 논문, 99쪽. 24) 심정보, 2005, 高句麗長安城建造時期에 대한 問題點Ⅰ·Ⅱ , 북방사논총 6, 376쪽. 25)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4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85 각석들에서 축성을 담당한 이들의 관등이 10등인 小兄인 점과 다른 점이 다. 제3석에서도 제2석과 마찬가지로 百頭가 등장하는데 문제는 문장에 서의 위치이다. 제2석: 소속? + 관등 + 인명 + 百頭 (物苟 + 小兄 + 俳湏 + 百頭) 제3석: 부명 + 百頭 + 관등 + 인명 (‘內中’[內卩] + 百頭 + 上位使 + 尒丈) 백두는 제2석에서는 인명 뒤에 자리하였는데, 제3석에서는 소속 부와 관등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위치에 일관성이 없다. 제3석의 백두를 인명 으로 본다면 관등이 없는 인명이 되며, 제2석에 등장하는 백두와 동일인 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제2석과 제3석은 담당하는 공 사 구간이 달랐고, 각 공사 구간의 길이도 매우 길었다. 백두라는 한 인물 이 두 공사 구간을 중복하여 담당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백두를 인명 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면 직명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제2석과 제3석에서 백두의 위 치가 일관성 없이 다른 위치에 삽입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정식 관직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정식 관직이라면 정해져 있는 인명 표기 방식을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문헌 기록이나 금석문에서 백두의 또 다른 용례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시대에 10戶에 統主1인, 50호에 頭目 1인, 100호에 摠牌1인을 두어 남녀노소를 호적에 올리고 민을 통제하였 던 대민 통제 방식이 있어 참고가 된다. 앞서 언급한 두목과 총패는 조선 초 도성 수축과 관련한 기록에 많이 등장한다. Q-1. 도성수축도감이 계하기를, “여러 도의 軍丁속에서 갑사 별패․시위 패․수군․진군․수성군․익정군․첨발․봉족 및 잡색군을 제외하 고서 성을 쌓게 되는데, ……각도의 관찰사가 도내의 수륙 방어의 긴 급하고 긴급하지 않은 것을 작량하고 호구의 많고 적은 것을 점검하 여 뽑아 보내되, 40일 안에 축성을 마치면 바로 돌려보내 줄 것이나,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86 단단하게 쌓지 아니한 경우는 감독과 제조와 수령 및 총패와 두목 에 모두 중죄를 더하고, 만일 고쳐 쌓은 뒤에 기울어 무너지면 처음 에 쌓는 것을 맡았던 이들을 시켜 다시 쌓도록 하소서.”26) 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29일 무오 6번째 기사 Q-2. 도성을 수축하는 역사에 총패와 두목이 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 망해 돌아간 자가 있으므로, 태상왕이 병조와 승정원에 이르기를, “도망한 군사는 장 1백대를 친다는 것은 이미 명령이 내렸다. 그러나 그 두목과 총패가 그 군인을 거느리고 도망한 것은 보통 군사의 예로 써 논죄할 수는 없다. 가령 적이 임박하여 대응할 적에 두목과 총패가 또한 오늘과 같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한다면,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는 것이다. 이 무리들은 마땅히 군법으로 바로잡아 뒷사람들에게 징 계해야 한다.”27) 세종실록15권, 세종 4년(1422) 2월 30일 정사 3번째 기사 Q-3. 성문도감이 계하기를, “함길도 북청부에서 쌓은 도성(성벽)이 무너져 내렸으니, 청컨대 당초의 북청 감역관과 두목·총패에게 명령하여 기 한 안에 서울에 와서 수축하게 하소서.”하였다.28) 세종실록25권, 세종 6년(1424) 8월 5일 정미 3번째 기사 이를 보면 도성 축조 및 사후 관리에 있어서 감역관뿐 아니라 총패와 두목이 책임자로서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조선 시대 역역 동원 단위를 26) 世宗實錄 13卷, 世宗3年10月29日戊午, “都城修築都監啓諸道軍丁內除甲士別 牌侍衛牌水軍鎭軍守城軍翼正軍簽發奉足及雜色軍以築之……諸道觀察使酌道內 水陸防禦緊慢戶口多寡點送四十日內畢築者隨卽放遣其有不堅築者監督提調守 令及摠牌頭目竝加重罪若改築後傾頹則令初築各官築之.”. 27) 世宗實錄 15卷, 世宗4年2月30日丁巳, “築城之役摠牌頭目有率管下逃還者 太上王謂兵曹承政院曰逃軍決杖一百已下旨矣然其頭目摠牌率其軍人而逃者不 可以凡軍例論假使臨敵應變而頭目摠牌又如今日之率逃則國家安危係矣此輩宜 正軍法以懲後來.”. 28) 世宗實錄 25卷, 世宗6年8月5日丁未, “城門都監啓咸吉道北靑府所築都城頹落 請令當初北靑監役官及頭目摠牌及時來京修築.”.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87 이끄는 책임자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그렇다고 정식으로 관직을 받은 자 들은 아니었다. 평양성 각자성석에 등장하는 백두가 조선 시대 축성 기사 에 보이는 ‘총패․두목’과 완전히 동일한 존재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만,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백두는 그 의미로 보았을 때 100명 단위의 인력을 관리하는 자들이었 으리라 짐작된다.29) 12리에 걸친 긴 공사 구간을 100명만으로 축성하였 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백두는 여러 명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2 석은 ‘物苟의 소형 俳湏’가 감역관이 되어 그 지역 ‘백두들’과 축성을 맡 았다는 의미이고, 제3석은 ‘內部의 백두들’과 감역관인 ‘상위사자 尒丈’ 이 축성을 맡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內部는 고구려 왕도 에 속한 지역이므로 이를 감안하여 내부의 백두들을 통제하였던 감역관 은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백두들을 감독하였던 제10등 소형보다 한 단계 높은 제9등 상위사자를 배정하였을 수도 있다.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에 보이는 ‘백두’는 아직 다른 사례가 전혀 확인 된 바 없다. 차후 새로운 자료가 출현할 때까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 에 두며 실체를 탐색해 나갈 필요가 있다. 4.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 제4석은 1913년 당시 평양 경제리에서 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 동강에 면한 내성의 동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평양의 중 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명문이 비교적 선명한 편이라 판독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29) 鬼頭淸明, 1984, 高句麗の國家形成と東アジア,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1, 36~37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88 【그림2】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2006,북녘의 문화유산, 80쪽. ④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 판독문 8 7 6 5 4 3 2 1 [徏] 西節兄後漢二丙① 之北自文卩城月戌② 行此達小下中③ ∙판독: 丙戌二月中漢城下後卩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徏]之 ∙해석: 병술년 2월 중에 한성에 있는 후부의 小兄文達이 통제하여 여기서부 터 서북쪽으로 진행하여 [오른]다. 7-③: 行 行 7-③ 서울대학교 규장 각 소장 탁본 北齊泰山經石峪 隋智永真草千 字文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89 7-③ 글자의 경우 대부분의 판독자들이 ‘行’으로 판독하고는 있으나, 글자의 형태를 보면 우변 하단의 세로획이 두 개여서 마치 ‘元’과 비슷한 자형이라는 점에서 의문을 주기도 한다. 이처럼 이상한 획이 보이는 이유 는 해당 지점이 파손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림 3】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의 출토 당시 모습 출처: 朝鮮總督府, 1915, 朝鮮古蹟圖譜 2, 110쪽. 1915년 간행된 朝鮮古蹟圖譜에는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의 출토 직후의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의 좌상단 을 보면 글자가 있어야 할 부분이 크게 깨져 나간 상태이다. 성벽을 허무 는 공사 중 출토된 만큼 그 과정에서 파손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평양 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각자성석은 해당 부분이 복원된 상태인 데,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깨져나간 부분의 경계선 부분에 ‘行’이 위치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사진 상으로는 ‘行’의 아랫부분에 해당하는 세로획 2개가 간신히 확인된다. 그렇다면 해당 글자에 사선으로 나 있는 자국은 글자의 획이 아니라 돌이 깨진 부분을 맞추어 붙이는 과정에서 남게 된 흠집이라 볼 수 있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90 또한 많은 판독문에서 1-③의 위치에 ‘十’이 있는 것으로 판독하고 있 다. 해당 부분은 돌이 깨져 나가 자획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이 각자성석은 전반적으로 1행 3자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2행의 첫 자가 ‘二’이기 때문에 1행의 세 번째 자리에 ‘十’이 있어서 ‘12월’이라는 문구 가 만들어진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하지만 12월은 한겨울이라 공사 기간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 다. 얼어붙은 강을 이용해 석재를 수월하게 옮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 으나, 역시 추위가 문제이다. 다른 각자성석에 새겨진 축성 시기가 3월이 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명문 역시 12월보다는 2월에 새긴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관련해 고구려의 축성 관계 기록은 봄과 가을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2월이 두드러지게 많다는 점을 지적 한 연구도 있었다.30) 이 각자성석이 1행 3자를 기본 형태로 취했다고는 하지만, 마지막 7행 의 경우는 2자이기 때문에, 1행 역시 반드시 3행일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각 행 마지막 글자의 위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며 사선으 로 내려오는 형태로 맞추어지고 있다는 점도 제1행이 원래 2글자였을 가 능성을 시사한다. 주목되는 것은 ‘漢城下後部이다. 隋書에서는 고구려의 三京으로 평 양성․국내성․한성이 언급되고 있는데,31) 이 각자성석에 등장하는 한 성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북한 학계에서는 한성의 위치를 황해도 신 원군 아양리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32) 장수산성 아래 위치한 아양리 일 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구획 흔적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해석상 ‘한성 30) 채희국, 1985, 고구려력사연구-고구려건국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 성곽, 김일성 종합대학출판사(1991, 백산자료원, 210쪽.). 31) 隋書 東夷列傳, 高句麗“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其國中呼爲三京.”. 32) 최승택, 1991, 장수산성의 축조년대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1991-3, 14~18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91 의 하후부’, 혹은 ‘한성 아래의 후부’로 볼 수 있겠는데, ‘下後部’를 하나 의 행정구역 단위로 보기는 어색하므로 ‘한성 아래의 후부’, 즉 ‘한성에 있는 후부’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8-①: [徏] 漢後行 8-①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탁본 3-① 4-① 7-③ 8-①은 淺見倫太郞가 ‘涉’으로 판독한 이래 대부분의 판독자가 이를 따르고 있지만, 글자의 상단이 깨져 나간 상태이므로 확실한 판독은 어렵 다. 하단의 ‘少’ 형태는 분명해 보이지만, 좌변의 ‘氵’은 단정할 수 없다. 3-① ‘漢’의 자형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이 각자성석의 글자에서는 ‘氵’이 아래로 내려왔다가 오른쪽 위로 꺾이는 형태로 표현되지만, 이 글자의 좌 변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다. 그보다는 ‘彳’의 하단부 형태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徏’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徏’은 ‘陟’과 같은 자이다. 마 침 이 각자성석의 축성 구간은 내성의 북쪽이자 북성의 남벽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형상 산지이기 때문에 ‘오른다’는 의미와 부합한다. 초기에 해당 글자를 ‘涉’으로 판독하는 과정에서 淺見倫太郞등은 小 兄文達이 대동강을 건너오면서 글을 새겼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는 물론 받아들이기 힘든 의견이다. 보다 합리성을 갖춘 해석은 田中俊明이 제시한 ‘간섭하다’의 의미이다.33) 그러나 ‘간섭하다’는 의미는 자신의 일 33)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33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92 이 아닌 타인의 일에 참견한다는 뉘앙스가 강하여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각자성석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 더구나 6-①의 ‘節’이라는 글자가 앞에 존재하므로 소형 문달이 이 공역의 감독을 ‘통제한다’는 내 용은 이미 드러난 상태이다. 다시 ‘간섭하다’는 의미를 넣어 서술어를 중 복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徏]으로 판독한다. 5.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5석 제5석은 1964년 평양시 중구역 남문동의 정해문이 있던 자리의 남쪽 150m 지점에서 내성의 서남쪽 모서리의 밑에서 3번째 단에 박혀 있는 것 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원래 자리에서 약간 이동하여 1984년에 개관한 인 민대학습당 북서쪽 성벽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명문이 새 겨진 돌의 요철이 상당히 심한 편이다. 【그림4】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5석의 탁본 출처: 고려대학교박물관, 2005, 한국 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 통천문화사, 289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93 ⑤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5석 판독문 5 4 3 2 1 尺▨[六] 此兄卦① 治里東加婁② 群盖③ 四廻自切④ ▨[百] 上小⑤ ∙판독: 卦婁盖切小兄加群自此東廻上▨[六]里四▨[百]尺治 ∙해석: 卦婁盖切의 小兄加群은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돌아 위로 ▨[6]里4▨ [백]尺을 맡는다. 제5석은 다른 각자성석들과 달리 간지가 존재하지 않아 성벽의 축조 시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처 음 등장하는 ‘卦婁’를 계루부와 연결시키는 견해가 있지만 日本書紀 天武天皇11년조(683년)에 ‘下部助有卦婁毛切’이라는 고구려 인물이 등 장하는 바, 인명에서도 卦婁의 사례가 보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 적이 있다.34) 그런데 卦婁가 인명으로 쓰인 사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각자성석에서는 小兄加群이라는 ‘관등 + 인명’의 조합이 확인되므로, 관 등이 보이지 않는 “卦婁盖切”을 인명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小兄加群 의 출신지나 소속 집단 정도로 보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고구려 후기에 조성된 명문에서 이미 소멸된 ‘계루부’와 같은 단위 정치체로서의 부명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廻上▨里’의 경우 里앞에 글자가 있다고 보는 이와 없다고 보는 이 로 나뉜다. 문맥상으로는 숫자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맞지만, 탁본 이나 사진 상으로는 글자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34) 徐永大, 1992, 平壤城石刻, 譯註韓國古代金石文Ⅰ,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15~116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94 이에 최희림은 ‘里’ 앞의 글자가 ‘六’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이는 제5 석과 제4석의 발견 지점 거리를 고구려 척으로 환산한 것이다. 그는 두 각자성석 사이의 거리를 약 2.1km로 측정하고 고구려의 1자 길이인 약 35cm를 적용하여 고구려 척도로 6리 4자가 두 성석의 거리라고 파악하였 다.35) 반면 田中俊明은 보이지 않는 글자를 억지로 넣을 필요는 없다고 하며 ‘里四尺’을 ‘1리 4척’의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경우 제3석 에서 보이는 ‘2리’와 비슷한 축성 거리가 된다는 것이다.36)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짧은 거리이기 때문에 수용하기 곤란하다. 최희림식 계산법에 따르면 고구려의 1리 거리는 약 350m이며, 이를 따르지 않고 일반적인 23cm 漢尺을 기준으로 1리(1,800척)를 계산하더라 도 약 414m에 불과하다. 이 각자성석에서는 ‘동쪽으로 돌아 위로’ 향한 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최소한 성벽이 내성의 동남쪽 모서리를 지난 부분 까지를 축성 구역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는데, 제5석 발견 지점에서 내성 의 동남쪽 모서리인 대동강변까지의 축성 구간은 1km 가량이다. 이에 비 하면 ‘1리’는 지나치게 짧은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제3석의 축성 구역 길이 역시 2리가 아니라 12리로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里’ 라는 글자 앞에는 또 다른 글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 이다. ‘4척’이라는 판독에도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거대한 축성을 기획하 면서 굳이 4척이라는 작은 단위로 구간을 나누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 렵다. 제5석의 명문은 1행이 5자이고, 2행과 3행은 4자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4행과 5행은 각각 2자씩인데, 5행은 마지막 행이니 글자 수가 2자인 것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4행이 ‘里四’ 두 글자뿐이라는 것은 전체 배열상으로 보아도 어색하다. 글자의 위치를 보아도 里의 앞과 四의 뒤에 35) 최희림, 1978, 고구려 평양성,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20쪽. 36)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6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95 각각 글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따라서 4행은 본래 ‘[六]里 四[百]’의 4글자가 아니었을까 추독하여 본다. 제5석에서 제4석까지의 실 제 거리를 고구려척으로 환산해 보면 대략 이 정도 수치가 나오기 때문이 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척은 일반적으로 약 35.6cm였던 것으로 파 악된다.37) 그렇다면 고구려에서 1리는 몇 척이었는지가 문제인데, 필자 는 최희림이 제시한 바와 같이 1리=1,000척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제5석 의 축성 구간 길이를 6리 400척으로 파악하는 것의 실증적 검토는 지면 관계상 별고에서 상세히 다룰 것을 약속한다. Ⅱ. 각자성석의 위치 추적 실물이나 석문이 남아 있는 6개의 각자성석 중 ‘평양속지 각석’의 경 우는 북성에서 출토되었다는 전승 외에 딱히 다른 정보가 없으며, 석문 내용을 보아도 고구려 때의 인명이나 관등과 같은 요소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 때의 것이 맞는지 불확실한 것은 물론, 실물이 존재하였 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다소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제1석~제5석은 모두 성벽 축조를 시작한 날짜를 제시하고 있으나, ‘평양속지 각석’은 성의 축조가 완료된 후 전체 공사 기간을 제시하고 있 다는 점에서도 다른 각석들과 이질적이다. 성을 만드는 데 42년이 걸렸다 는 내용으로 보아 장안성 전체의 공사 기간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고,38) 대체로 이를 수용하고 있는 분위기이지 37) 兪泰勇, 2001, 高句麗尺에 대한 文獻史料와 考古學的遺物의 再檢討, 高句麗硏 究 11, 89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96 【그림 5】평양성 각자성석 제4석과 제5석의 발견 지점 출처: 朝鮮總督府, 1929高句麗時代之遺蹟圖版上冊(古蹟調査特別報告第5冊), 地圖 第5의 부분; 구글 위성지도, 평양(2016).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97 만, 성격이 불분명한 자료를 연구에 활용하는 데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반면 제1석과 제3석의 경우는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명문 내용 이 고구려 당대의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만큼 활용에 문제가 없다. 상기한 각자성석 중 근대에 들어와 발견된 제4석과 제5석은 출토 지점 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상세하게 확보되어 있다. 제4석은 1913년 당시 평 양 경제리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古 蹟調査特別報告 제5책에 실린 지도에 그 정확한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바로 지금의 옥류교 북쪽에 위치한 옥류관 부근이다. 제5석은 1964년 내성의 서남 모서리에서 최희림에 의해 발견되었는 데, 그의 보고에 따르면 발견 지점은 정해문이 있던 자리에서 남쪽 150m 떨어진 곳이라 하였다.39) 지금은 원래 발견 위치에서 옮겨져 동쪽으로 150m 떨어진 인민대학습당 서북쪽 광장의 귀퉁이에 신축한 성벽에 있다 고 한다.40) 그런데 최근까지 각자성석의 위치를 표기한 각 연구자들의 지 도를 보면 5석의 위치 표기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내성의 서남 쪽 모서리는 ‘ㄴ’형태로 두 번 꺾이는 형태인데, 제5석이 발견된 정해문 남쪽 150m 지점은 그중 첫 번째 ‘ㄴ’ 모서리에 해당한다. 여기서 다시 150m 동쪽으로 이동한 곳이 현재 제5석이 옮겨져 전시되고 있는 곳으로, 인민대학습당의 서북쪽이다. 그러나 기존에 연구자들이 제시한 지도들에서는 예외 없이 두 번째 ‘ㄴ’ 모서리를 제5석의 발견 지점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곳의 실제 위치는 38) 정찬영, 1966, 평양성에 대하여 , 고고민속 1966-2, 14쪽;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8쪽. 39) 최희림, 1978, 앞의 책, 15~16쪽. 40) 閔德植, 1992, 高句麗의 平壤城의 築城過程에 관한 硏究, 國史館論叢 39, 35쪽 의 田中俊明의 서신 재인용. 현재 평양성 각자성석 제5석은 시멘트 틀에 유리로 막아 보호하고 있다(여호규, 2005, 평양성 , 증보판 평양일대 고구려유적, 고구 려연구재단, 71쪽.). 41) 최희림이 제시한 지도에는 각자성석이 1~4석까지만 표기되어 있다. 어떤 이유에 서인지는 북한 학자들은 제3석의 존재를 누락시키고 있다. 때문에 북한에서는 제4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98 최희림 제시(1978) 田中俊明제시(1985) 심정보 제시(2005) 민덕식 제시(2010) 【그림 6】평양성 각자성석 발견 지점에 대한 기존 연구자들의 표시41) 출처: 최희림, 1978,고구려 평양성,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5쪽;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 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68-4, 128쪽; 심정보, 2005, 高句麗長安城建造時 期에 대한 問題點Ⅰ·Ⅱ , 북방사논총 6, 374쪽; 閔德植, 2010, 都城의 築造過程에 대 한 檢討-高句麗平壤城(長安城)과 漢陽都城의 축조를 중심으로- , 향토서울 75, 8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99 인민대학습당의 남쪽 90~100m 지점이므로 각자성석의 위치에 대한 서 술과는 맞지 않는다. 1978년 출간된 최희림의 고구려 평양성에 실린 지 도에서의 오류를 수십 년간 검증 없이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주의를 요하는 바이다. 발견 위치가 불분명한 것은 제1석~제3석인데 이중 제2석과 제3석은 해동금석원과 삼한금석록에 원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실 려 있어 참고가 된다. R-1. 돌 하나를 외성 오탄 아래에서 구하였다.42) 해동금석원 R-2. 이 석각은 지금 평양부 치소 서쪽 10리 오탄 강변에 있다. 내가 함풍 을묘년에 연행길을 가게 되었다. 箕城[평양성]으로 나가 殷師[기자]의 묘에 배알하고 井田의 옛터를 두루 다니며 구경하였다. 강가를 따라 한사정에 이르렀는데, 이 석각을 옛 성의 무너진 곳에서 찾아보았 다. 대략 고구려가 성을 쌓을 때 새긴 것이다.43) 삼한금석록 해동금석원에서 전하는 김정희의 말에 따르면 각자성석이 발견된 곳은 ‘외성의 오탄’이다. 삼한금석록에서는 ‘오탄’ 외에 ‘한사정’이라는 또 다른 정보가 추가된다. 기존의 연구들을 보면 대개 오경석이 실물을 확인했다고 한 ‘한사정’을 근거로 제2석과 제3석을 외성 가장 남쪽에 자 리하고 있는 한사정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석을 제3석이라 표기하고, 제5석을 제4석이라 표기한다. 42) 海東金石苑 卷1, 高句麗古城石刻, “得一石於外城烏灘下.”. 43) 三韓金石錄, “此刻今在平壤府治西十里烏灘江涯余於咸豊乙卯作燕臺之行路 出箕城謁殷師墓歷覽井田故址因沿江而至閑似亭訪得此刻于故城潰決處蓋高句 麗築城時所刻也.”.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00 한사정은 외성의 남문인 거피문 바로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지금 의 행정 구역 상으로는 평천구역 해운2동에 해당한다.44) 문제의 오탄은 한사정으로부터 약 3km 가량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있다. 오탄 은 대동강의 양각도 위쪽에 형성된 여울을 말한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의 전승이 남아 있다. 일본군이 낮 썰물 때 까마귀들이 이곳을 걸어 다니 는 것을 보고 평양성을 공격하려고 밤에 몰래 건너오다가 세찬 밀물로 몰살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까마귀가 왜적을 유인해 전멸시킨 곳 이라 하여 까마귀여울, 즉 오탄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오탄과 접하고 있는 이 일대 외성 지역의 지명을 오탄동이라 하였다고 한다.45) 현재의 평양시 지도를 확인해 보면 이 일대 행정구역명은 중구역 오탄동으로, 강변에 형 성된 길에는 오탄강안거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한사정과 오탄은 매우 거리가 떨어져 있으므로 같은 장소로 보기 어 렵다. 최희림은 오탄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 정약용이 저술한 大東水經 패수조에 실려 있는 “이암 아래 양각도가 있다”46)는 구절을 이용하였다. 그는 이암은 양각도 가운데 있는 큰 바위로 지금까지 위치에 변함이 없다 고 하고, 제2석은 양각도 위쪽 여울인 오탄에서도 아래쪽인 외성 성벽 유 지에서 발견된 것이라 하였다. 그 위치는 구체적으로 지금의 철교 아래 약 1km 떨어진 지점 부근이라 지목하였다.47) 이러한 논증 과정은 의도가 불분명하여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 이 있다. 아마도 오탄의 위치를 소양각도를 기준으로 상정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과거 양각도는 지금과 달리 두 개의 섬이었고, 상류에 있는 것을 대양각도, 하류의 것을 소양각도라고 하였다.48) 이암은 본래 두 양각도 44) 평화문제연구소, 2005, 조선향토대백과, 한사정터 조. 45) 평화문제연구소, 2005, 조선향토대백과, 까마귀여울 조. 46) 大東水經 其3, 浿水3, “淵之傍有貍巖下有羊角嶼.”. 47) 최희림, 1967, 평양성을 쌓은 년대와 규모 , 고고민속 1967–2, 30~31쪽. 48) 朝鮮總督府, 1929 앞의 책의 지도에서는 소양각도를 이암도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1 【그림 7】오탄과 한사정의 위치(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평양도-19세기) 사이를 가르는 물 위에 있던 바위 이름이다. 따라서 “이암 아래 양각도가 있다”는 말은 소양각도에 부합하는 서술이다. 지금은 두 섬이 합쳐져 하 나의 섬이 되었고, 이암은 물 위가 아니라 섬 가운데에 놓인 바위가 되었 다. 최희림은 양각도가 본래 두 개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① 오탄은 양각 도 위의 여울이라고 한다-② (소)양각도는 이암 아래에 있다-③ 따라서 각 석이 발견되었다는 오탄은 이암 부근이다’의 논리를 펼치고 싶었던 것으 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은 성립할 수 없다. 오탄의 위치가 대양각도 위쪽 이라는 것은 조선 시대부터 있던 오탄이라는 지명을 계승한 현재의 행정 구역 명으로도 알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제작된 평양성 병풍도 등에서도 명확하게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49) 최희림이 다소 무리를 해가며 위와 같 소양각도는 이암도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02 은 논증을 시도하였던 것은 결국 각자성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한사정 과 오탄이라는 두 장소의 불일치성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오경석의 글을 보면 기자묘 참배 후 정전의 옛터를 두루 다니며 구경 하고, 강가를 따라 한사정으로 갔다고 한다. 조선 후기 평양 지역의 유람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문헌들을 보면 유사한 내용이 있어 당시 오경석의 동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S-1. 이윽고 주작과 함구 두 문으로 나섰다. 대략 성은 내성과 외성이 있는데 각 한 성에 한 문씩이다. 외성 나가는 길에 井田의 옛터를 찾았다. …… 밭가에 箕子宮의 옛터가 있다. ……九疇壇에서 다시 10리를 앞으로 나아 가면 들이 끝나고 강물이 돌아가는데, 車門으로 나갔다. 이곳은 井田이 있을 때 수레가 다니는 길이었기에 길 입구에 문을 세우고 車門이라고 하였다. 정자 하나가 있어 초연히 강에 임하여 있다. ……편액을 閒似亭 이라 하였다.50) 계산기정 1권 출성, 계해년(1803) 11월 1일 S-2. 맑음. 평양에 머물렀다. 기자묘에 가서 참배하고, 東門으로 해서 井田의 옛 자리를 관람하고 이어 한사정으로 갔다. 정자는 외성 남쪽에 있는데, 바로 마을 秀才들이 업을 익히는 곳이었다.51) 부연일기 왕환일기 , 무자년(1828) 4월 23일 임진. 49) 서울대학교 소장 평양 병풍도를 이용해 양각도, 오탄, 이암 등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 평양도를 이용한 지적은 田中俊明에 의해 이미 이루어 진 바 있다(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0쪽.). 50) 薊山紀程 1卷出城, 癸亥年11月1日, “遂由朱雀含毬兩門出, 蓋城有內外, 而各一 城一門也, 路出外城, 訪井田舊址, ……田畔有箕子宮舊基, ……自九疇壇又前進十 里, 野盡而江廻, 從車門出, 此井田時, 車道所由, 立門於路口, 號曰車門, 有一亭超然 臨江, ……扁曰閒似亭.”. 51) 赴燕日記 往還日記, 戊子年4月23日壬辰, “晴, 留平壤, 往箕子庙瞻拜, 由東門 觀井田舊跡, 仍往閑似亭, 亭在外城南, 卽村秀肄業之所也.”.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3 오경석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箕子井田관람 루트를 밟아 마지막 코스 인 한사정에 이르게 되었고, 이 부근의 성벽이 무너진 곳에서 각자성석을 실견하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제2석과 제3석이 같은 곳에 나 란히 있었을 것이라 보고 있는데, 타당한 추정이다. 제2석과 제3석의 명 문은 날짜가 동일하고 문장 구성도 거의 같아, 하나의 세트로 제작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제2석은 동쪽으로 12리를 쌓는다 하였는데, 제3석은 ▨쪽으로 ‘下2 里’를 쌓는다고 하였다. 제3석의 판독문은 앞선 판독에서도 언급하였듯 이 ‘서쪽 12리’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한사정 부근의 어느 지점인가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각각 12리씩, 총 24리의 성벽 구간이 존재해야 한다. 이는 굉장히 긴 구간이기 때문에 평양성 전 구간에서도 한사정 부근 외에 이를 만족시키는 장소는 찾기 어렵다. 이에 田中俊明은 제2석에서 “동쪽으로 12리”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이상, 남북으로 성벽이 펼쳐져 있는 오탄 부근에서 이들 각자성석이 발견되었다고 보기는 힘들 다고 지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제 각자성석이 출토된 것은 한사정 부근 이라 지목하였던 것이다.52) 각자성석 제2석과 제3석이 출토된 곳이 한사정 부근이 틀림없다면, 오탄에서 각석이 출토되었다는 내용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단순한 오류라고 보기에는 매우 명확하게 지명이 제시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정희나 오경석이 아무런 이유 없이 오탄이라는 출토지 정보를 언 급하였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田中俊明역시 이 문제점을 인식하였 다. 이에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양각도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갈라지는 대동 강의 물줄기 중 외성 쪽을 ‘오탄강’이라고 불렀고, 그 하류인 한사정 부근 을 가리켜 “外城烏灘下”나 “烏灘江涯” 같은 표현을 썼던 것은 아닐까 하 52)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0~121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04 는 추측을 제시하였다.53)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 뿐 조선 사람들이 ‘오탄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용례 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탄을 제2석과 제3석이 아닌 다른 각자성석의 출토지로 보 면 어떨까. 이에 주목되는 것이 제1석이다. 해동금석원에 실린 제1석에 대한 김정희의 기록은 이 각자성석이 64년 전인 병술년(1766년)에 출토되 었고, 지금은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는 것뿐이다. 오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 또 다른 각자성석(제2석)과는 구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은 제1석의 형태에 대한 묘사 등을 보았을 때 김정희 본인도 제1석의 실물이나 탁본을 보지는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정희도 누군가의 말 이나 글을 통해 이 각자성석의 존재를 파악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 전 달 과정에서 복수로 존재하는 각자성석의 출토지에 대한 정보가 뒤섞이 는 일이 발생하였을 수 있다. 김정희가 해동금석원에 실린 발문을 쓴 시기는 1829년 기축년으 로, 제2석과 제3석이 함께 출토된 바로 그 해이다. 그럼에도 그는 제1석 과 더불어 ‘又得一石’ 운운하며 제2석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함께 출토 된 제3석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 오경석 은 삼한금석록에서 ‘高句麗故城刻字二種’이라는 항목 아래 제2석과 제3석만을 언급하고 있어, 제1석을 누락시키고 있다. 실제로 당시는 3개 의 각자성석이 출토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나, 김정희와 오경석 모두 각자 성석이 2개인 것으로 오인한 상태에서 각각 다른 조합으로 소개하고 다 루었다. 이를 보면 당시 각자성석에 대한 정보의 착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오경석은 그 자신이 직접 한사정 부근에서 각자성석을 실견하였 53) 위의 논문, 121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5 음에도 “이 석각은 지금 평양부 치소 서쪽 10리 오탄 강변에 있다.”고 서 술하였다. 이는 평양 지역의 지리에 밝지 못한 그가 각자성석 출토지에 대한 다른 계열의 정보(실제로는 제1석에 대한)를 접하고 별 생각 없이 제2석과 제3석에 대한 정보와 결합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서울 출신 인 오경석이 평양 지리에 어두웠다는 것은 ‘서쪽 10리’라는 표현을 통해 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한사정이든 오탄이든 평양부 치소에서는 모두 남쪽 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탄은 평양부 치소에서 동남쪽에 자리하 고 있다. 당시 평양을 소재로 만들어진 병풍 그림이나 지도를 보면 평양 지역을 좌우로 길게 눕혀 오른쪽은 북쪽, 왼쪽은 남쪽이 되도록 그린 경 우가 많다. 이러한 병풍 그림이나 지도를 통해 평양 지역을 인식하였다면 한사정이 있는 평양의 남쪽 끝을 서쪽이라고 오인할 가능성이 있다. 제1석의 내용을 보면 ‘서쪽으로 11리’ 구간을 축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탄 부근에서 이러한 내용에 부합하는 성벽은 동서 방향으로 곧게 뻗어 있는 중성의 남벽뿐이다. 그렇다면 제1석의 구체적인 출토지는 중 성 남벽의 동쪽 끝이 외성의 동벽과 만나는 부분이라고 짐작할 수 있 다.54) 즉, 조선시대에 발견된 3개의 각자성석 중 제1석은 오탄에서, 제2석 과 제3석은 한사정에서 각각 출토된 것이다. 다만 어떠한 경위에서인지 발견 지점에 대한 정보의 착종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지금까지도 각자성 석의 출토 위치에 대한 인식에 혼선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54) 이에 따르면 제1석의 축성 구간은 중성의 남벽이 된다. 중성의 남벽이 축조된 시기 에 대해서는 연구자 간 이견이 있다. 고구려 때로 보는 견해와 고려 초로 보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는데, 필자는 고구려 때 축조된 것으로 파악한다. 지면 관계상 이에 대한 내용은 별고를 통해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06 【그림 8】장안성의 전체 복원도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7 맺음말 장안성은 최근 도성사 연구가 활기를 띠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고구려 후기의 도성으로서, 장안성 연구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평 양성 출토 각자성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성석 명문과 출토 위치 에 대한 이해에는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이에 본 연구는 각자성 석들의 명문을 다시 판독하는 한편 정확한 출토 위치를 추적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판독에 있어서는 설득력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논란이 있는 글 자들의 탁본 및 사진 자료와 비교 대상인 글자들을 함께 제시하였다. 그 결과 나름대로 근거를 갖춘 판독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특히 제4석 8행 의 첫 번째 글자를 [徏]으로 판독한 것과 제5석 4행에서 ‘里四’ 앞 뒤에 각각 [六]과 [百]이라는 글자가 있었으리라 추독한 것은 필자의 새로운 안 이다. 이중 제5석 4행의 추독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실제 축성 구간에 대 한 실증적인 검토가 필요한데, 이는 지면 관계상 별고에서 상세히 다루고 자 한다. 제1석과 제5석의 위치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보를 제시할 수 있었다. 각자성석의 위치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조선시대 문헌 기 록에서 ‘오탄’과 ‘한사정’이라는 상이한 출토지 정보가 뒤섞여 나타난 점 이다. 사안의 중요성에 비하여 이 문제에 주목한 연구자가 많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분석 결과 오탄은 제1석의 출토지, 한사정은 제2 석과 제3석의 출토지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제5석출토지의 경우는 1978년북한의최희림이저술한고구려 평양성 에 실린 지도에서 나타난 오류가 현재까지 답습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08 이는 현지답사가 사실상 불가능한 분단 상황의 특수성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정치한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위성사진에 기반한 구글 어스 등의 도구 활용이 가능한 만큼 보다 적극적으로 북한의 지리 정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9 참고문헌 1. 사료 隋書, 世宗實錄, 平壤志, 平壤續志, 海東金石苑, 三韓金石錄, 大東水經, 薊山紀程, 赴燕日記 2. 논저 淺見倫太郞, 1914, 大同江岸發見の高句麗故城石刻, 朝鮮及滿洲 83, 朝 鮮及滿洲社 朝鮮總督府編, 1919, 朝鮮金石總覽 上(1976, 亞細亞文化社) 鮎貝房之進, 1934, 高句麗城壁石刻文, 雜攷 6 上編 葛城末治, 1935, 朝鮮金石文(1974, 東京: 國書刊行會) 葛城末治, 1935, 朝鮮金石攷, 京城: 大阪屋號書店(1978, 亞細亞文化社) 채희국, 1962, 평양성의 축성 과정에 대하여 , 고고민속 1965-3; 김정배 편, 1991, 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 2, 대륙연구소출판부, 재수록 정찬영, 1966, 평양성에 대하여 , 고고민속 1966-2 최희림, 1967, 평양성을 쌓은 년대와 규모 , 고고민속 1967–2 최희림, 1967, 고구려평양성(장안성)의성벽축조형식과시설물의배치상태 , 고고민속 1967-3 井上秀雄, 1975, 新羅金石文調査の中間報告, 東北大學文學部硏究年報 25, 東北大學文學部 최희림, 1978, 고구려 평양성,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崔淳姬, 1979, 平壤城城石考-梨大所藏品을 中心하여 , 文化財 12, 문화 재관리국 田中俊明, 1981, 高句麗の金石文-硏究の現狀と課題, 朝鮮史硏究會論 文集 18, 朝鮮史硏究會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10 鬼頭淸明, 1984, 高句麗の國家形成と東アジア,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1 許興植編, 1984, 韓國金石全文-古代, 서울亞細亞文化社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史 學硏究會 채희국, 1985, 고구려력사연구-고구려건국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 성곽,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1991, 백산자료원) 조선유적유물도감 편찬위원회, 1988, 조선유적유물도감 3 閔德植, 1989, 高句麗의 後期都城, 韓國史論 19, 國史編纂委員會 최승택, 1991, 장수산성의 축조년대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1991-3 金昌鎬, 1992, 高句麗金石文의 人名表記, 先史와 古代 3. 閔德植, 1992, 高句麗의 平壤城의 築城過程에 관한 硏究, 國史館論叢 39 徐永大, 1992, 平壤城石刻, 譯註韓國古代金石文 Ⅰ, 駕洛國史蹟開發 硏究院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1992, 韓國書蹟,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閔德植, 1993, 高句麗의 平壤城刻字城石에 관한 硏究, 韓國上古史學報 13 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 Ⅰ 兪泰勇, 2001, 高句麗尺에 대한 文獻史料와 考古學的遺物의 再檢討, 高句麗硏究 11 閔德植, 2003, 高句麗平壤城의 都市形態와 設計, 高句麗硏究 15 고려대학교박물관, 2005, 한국 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 통천문화사 여호규, 2005, 평양성 , 증보판 평양일대 고구려유적, 고구려연구재단 심정보, 2005, 高句麗長安城建造時期에대한 問題點Ⅰ·Ⅱ , 북방사논총 6 평화문제연구소, 2005, 조선향토대백과 국립중앙박물관, 2006, 북녘의 문화유산, 삼인 東潮․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박천수․이근우 역, 2008,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 동북아역사재단) 閔德植, 2010, 都城의 築造過程에 대한 檢討-高句麗平壤城(長安城)과 漢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11 陽都城의 축조를 중심으로- , 향토서울 75 李宇泰編, 2014, 韓國金石文集成 2, 한국국학진흥원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12 Abstract Deciphering the Goguryeo Inscription Stones excavated in Pyongyang Fortress and reconsidering the Locations Ki, Kyoung-ryang Jangan Fortress is a castle in the late Goguryeo. In connection to the vitalization of studies of the history of ancient castles, it attracts researchers’ attention. The most basic materials in studies of Jangan Fortress are the inscription stones excavated in Pyongyang during the Goguryeo period, and till now, five stones have been excavated. Research on the inscription stones of Pyongyang Fortress is still insufficient. There are divided opinions among the scholars in deciphering them, and especially, their opinions were divided very much, concerning the excavated area, so virtually, there is no established theory about them. The reason why disputes over the area where the inscription stones were excavated are developed confusingly is the inconsistency of information that is seen in the literature record on inscription stones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work on analyzing this reasonably. This study made a new proposal about the location where Inscription Stone No. 1 excavated in Pyongyang Fortress, was found, over which there have been divergent disputes till now. According to Kim Jeong-hee’s writing in Haedonggeumseogwon and Oh Gyeong-seok’s in Samhangeumseongnok, inscription stones were excavated in Otan. However, it is clear that Stones 2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13 and 3 were excavated in Hansajeong Pavilion in the south of the outer castle. Therefore, it is understood that the inscription stone alleged to have been excavated from Otan was Stone 1. In addition, if it is certain that the site where Stone 1 was discovered is near Otan, the content of the fortification inscribed in Stone 1 is concerned with the wall in the south of the middle castle. Concerning the location of the area where Stone 5 was excavated, it was found that errors in Goguryeo Pyongyang Fortress written by Choi Hee-rim of North Korea in 1978 are followed till now. This study presented the location that corrected this, using a tool like Google Earth. Keywords:Pyongyang Fortress, Jangan Fortress, Inscription stones, Otan, Hansa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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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코베이에서 낙찰 받으신 거 묶음배송될 수 있도록 신속한 입금해달라고 문자가 왔던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