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실수를 발견할 걸까? / 평양성 고구려 성벽돌 각자(刻字) 해석 外

2019. 3. 25. 20:47글씨쓰기


수정중입니다......


추사의 실수를 발견한 걸까?

조회 수 1856 2009.02.19

 <경고>

졸고는 좀 길고, 역사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에게는 무지 재미없을 수 있슴다~~~

그럼 시작하겠슴다~~~




이한철 <추사초상> 기름종이에 채색 35.0 x 51.0 cm (간송미술관 소장)


   추사 김정희(1786 ~ 185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아니, 몇단어, 몇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박학하고 다재다능했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책을 많이 읽었다. 우선 이상적(1804 ~ 1865), 역매 오경석(1831 ~ 1879)과 같이 중국을 오가는 '역관 제자'들은 중국에서 발행된 엄청난 양의 책을 추사에게 실어 날랐다. 추사는 그 고마움의 표시로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선물했다.  

추사가 남긴 학문적 성과는 많지만, 그중 금석학의 성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청 나라 고증학풍의 영향을 받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등 수많은 비석을 발굴했고,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완당척독(阮堂尺牘)> 같은 연구서도 내놓은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였다.

   청나라 학자 유희해(劉喜海)는 추사에게 얻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비석 탁본을 고증해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이라는 책에 실었다. 일부 고증은 추사의 도움을 받았을 정도로, 추사의 금석학은 중국에서도 인정했다. 물론 추사의 금석학은 중국 학자들의 인정 여부를 떠나 독보적 경지에 올라 있었다.

금석학은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글을 해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으로 중국 송나라 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예가들이 선인들의 서체를 모방하기 위해 탁본을 하였던 것인데,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글을 해석하면서 고고학적인 유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금석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추사 역시 중국 학자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처음에는 선인들의 서체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에서 수많은 탁본을 들여와 공부하다, 우리나라 산천에 있는 비문들의 세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비문을 해석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금석학자의 길을 걸었다.

   금석학자로서의 추사가 남긴 성과에는, 진흥왕 순수비 말고도 '평양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에 대한 해석과 고증이 있다.



<고구려 성벽 각자 탁본> (오경석 탁본. 거부기 소장)  
 
   한문은 '기유(축)년 삼월입일 자차하향 동십이리 물성(구, 하)소형 배?(수)백두 비절의'
번역은 '기유(己酉)년 (혹은 기축(己丑)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성(구, 혹은 하)소형(物省小兄) 배?(수)백두가 지휘감독하여 쌓다'이다.


이 탁본의 글자는, 추사 김정희가 1829년, 그의 나이 44세때 발견한 평양성벽 돌에 새겨진 고구려 시대의 글자이다. 돌에 새겨진 글자 중 '소형(小兄)'이 고구려의 관직이기 때문에, 추사는 이 글자들이 고구려시대 글자임을 안 것이다.

추사는 당시 홍수로 평양성이 무너졌을 때, 성벽을 살피다가 이 돌을 발견했다. 발견지점은 평양성 외성(外城) 오탄(烏灘) 부근이다.

   추사가 이렇게 정확한 발굴 지점을 기록한 것은, 역사학에서 유물의 발굴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니라 '도굴 유물' 중에는 정확한 발굴지점이 알려지지 않아 고고학적 혹은 역사학적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발굴지점이 밝혀지지 않은 도굴품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물이 아니라 옛물건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닌 골동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추사는 이 돌의 출토지가 '외성'의 오탄 부근이라고 밝혔고, 그 덕분에 유물로서의 역사적 가치는 분명해졌다. 외성의 건축연대를 입증할 '결정적 단서'가 되면서, 외성이 내성(內城)보다 나중에 건축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줬기 때문이다.




<성석편(城石片 고구려 성벽 돌) > 가로 36cm 세로 18cm 두께 9cm 보물 642호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성석편(城石片)'으로 불리는 이 고구려 성벽 돌은, 오세창의 기록에 의하면 1855년에 오경석의 소장품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로를 거쳐 오경석 소장품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오경석은 그의 스승인 우선 이상적(1804 ~ 1865)과 함께 추사의 제자였고, 추사가 오경석에 보낸 편지 중에 '자네가 자꾸 양보하라고 하는 돌화살촉은 이미 나의 손을 떠나 없으니, 내 말을 믿어주기 바란다.'라는 내용이 있는 걸로 봐서, 오경석은 추사의 수집품을 꾸준하게 구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평양성벽 돌도 추사를 통해 소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돌이 깨진 것은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에게 전해졌을 때다.

   근래에 내가 소용돌이 치는 정계에 헤매느라 집을 떠나 멀리 피해 다니는 일이 잦았는데, 이때 집사람이 조심없이 다루어 이 돌을 떨어트린 까닭에 둘째 줄의 삼월입일 네 글자가 부서지고 일자는 반쪽만 남앗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이승연 저 <위창 오세창> 도서출판 이회 발행 97 ~ 98쪽

그러니까, 오세창이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을 때, 집안이 풍지박산되어 이사를 다닐 때 깨진 것이다. 그리고 이 깨진 성벽 돌은 뒷날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이 되었다.




<고구려 성벽 각자 탁본> (오세창 탁본. 개인 소장)


   오세창은 이 성벽 돌에 대해 "추사 김정희가 일찍이 이 탁본을 중국에 있는 유희해에게 보냈더니, 유희해는 '소형(小兄) 두 글자는 고구려의 고적임에 의심이 없으며, 기축(449년)은 따라서 장수왕 때에 해당한다'하고서 그는 곧 이를 <해동금석원>에 수록하였는 바, 그것은 그 책의 첫번쩨 수록 탁본석이 되었다."라고 위의 책에서 밝혔다.




<해동금석원> '고구려 고성 석각' 부분


   유희해<해동금석원>에는  성벽 돌의 글자를 '기축년 삼월 이십일일 자차하향 동십이리 물성소형' 이라고 해석했다.  그 다음 부분은 배?(수)백두 비절의'일 것이다.

미술사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완당평전>에서 "연경의 유희해에게 보내 함께 고증했는데 흐릿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 글씨를 고구려 장수왕 때인 기유년(469년)이라고  해석하였다. 훗날 평양성벽 각자(刻字)에서 병술(丙戌, 446년)이라 새겨진 것이 나옴으로써 기유는 기축(己丑, 449)으로 정정되었지만 완당의 금석에 대한 열정이 어떠했는 알 만하다."라고 서술했다.

그런데, 유홍준 교수가 청장으로 재직했던 문화재청의 공식 해석은 추사와 다르다.  

<이 성석에 각자된 글자는 7행 27자인데, 첫행은 연대를 표시한 간지(干支)가 있고, 둘째 행은 깨어져 나가 없어지고, 다만 끝자인 '일(日)'자의 하단부만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둘째 행은 전후 글씨의 배정으로 보아 '월일(月日)'이 각자되어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 없어진 부분의 탑본(榻本)이 있어 위의 사실이 증명되는데(황수영 黃壽永 소장), 그에 따르면 글자가 다른 행에 비하여 적으며, 자수(字數)가 5자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성석의 명문(銘文)은 첫행이 3자, 둘째 행 5자, 세째·네째·다섯째·여섯째 행은 각각 4자, 일곱째 행은 3자로 총 27자이다.

이 성석의 현재 상태는 간지와 본문 사이의 '월일'이 각자된 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크게 두 조각이 났으며, 전체 아홉 조각으로 균열되어 있는 것을 석고(石膏)로 고착시켜 놓았다. 내용은 '기유년(己酉年) 5월 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쪽 동쪽을 향하여 12리(里) 구간을 물성소형 배□백두(物省小兄 俳□百頭)가 구축한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 사진에서 보이는 돌의 오른쪽 시작 부분이 논란의 대상인데, 유홍준 교수에 의하면 추사는 시작 부분을 처음에는 '기유(己酉)'로 읽었다가 나중에 기축(己丑)으로 정정했고, 유희해도 이를 받아들여 <해동금석원>에 '기축'으로 실었다. 물론 모두 장수왕 때의 기축년(449)으로 보았다.

물론 다음 줄의 날자가 3월인지 5월인지도 논란이지만, 평양성 외성의 건축연도를 밝힐 수 있는 간지의 해석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만약 기축이라면 장수왕 37년(449) 혹은 평원왕 11년(569)가 되고, 기유년이라면 장수왕 57년(469) 혹은 평원왕 31년(589)가 된다.'라며 또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즉 평양 외성 건축시기가 장수왕 때가 아니라 평원왕 때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 나온 이 시기의 고구려의 천도는, 제20대 왕인 장수왕(長壽王) 재위 15년인 427년의 평양 천도가 있고, 평원왕 28년인 586년의 장안성 천도가 있다. 양원왕 8년인 552년부터 장안성의 축성 공사를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장안성 공사가 42년 걸렸다는 기록도 있다.




오경석 탁본에 쓰여있는 해석인데 장수왕 때의 기축년이라고 했다. 중국학자의 글로 추정된다.



오른쪽 도장이 오경석 도장이다. 왼쪽 글도 중국 학자의 글로 추정되는데, 역시 장수왕 때의 기축년이라고 했다.




오경석 탁본에 있는 글로, 유연정(= 유희해)의 <해동금석원> 해석을 인용했다.



   위의 이미지들은 추사의 제자 오경석의 탁본을 본 중국학자들의 해석으로, 간지는 기축년이고 장수왕 36년이라고 했다...

그러나 학문은 다수결이 아니다... 그리고, 추사도 실수를 하거나 학문적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추사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평양성이 아니라 대성산성 아래에 있는 안학궁이었다.... 그리고 양원왕 8년인 552년부터 평원왕에 걸쳐 42년 동안 축성 공사를 한 장안성이 지금의 평양성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추사는 장수왕의 천도가 안학궁과 대성산성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지금의 평양성으로 천도했을 것이라고 단정했고, 성벽 돌에 쓰여있는 간지의 연도를 자신의 단정에 맞춰서 해석한 것이다.

이런 추사의 실수 혹은 오류가 바로 금석학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금석문은 내용이 매우 압축되어져있기 때문에, 단편적이고 부분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금석문만으로 역사적 사실을 유추해서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금석문에서 발견한 자료는, 시대와 사회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역사책이나 문헌자료와 비교 검토한 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연도 추정에 대해 4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기록인 '양원왕 8년인 552년에 축성을 시작했다'는 기록과, <평양속지>에 나오는 "본성사십이년필역 (성의 역사를 마치는데 42년이 걸렸다)는 기록 참고하면, 기축년이 아니라 기유년(589년)이다. 외성은 내성과 중성의 건축이 끝난 다음에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자의 해석은 ''기유년 삼월 이십일일 자차하향동십이리 물성소형배?(수)백두 비절의' 즉 '기유(己酉 589)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아래로 동쪽을 향해 12리를 물성소형(物省小兄) 배?(수)백두가 지휘감독하여 쌓다' 이다.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를 밝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수왕 때 천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기에 단정했던 해석도 이렇게 틀릴 수가 있다.

고구려 성벽 돌의 연도 해석에 대한 추사는 실수 혹은 오류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러나 추사는 이런 실수 혹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소형(小兄)'이라는 글자가 고구려의 관직임을 파악하고 돌에 새겨진 글자가 고구려 시대의 글자임을 알았으니, 금석학에 대한 그의 실력은 매우 탁월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뱀의 다리 : 고구려 성벽 돌에 대한 추사의 간지 연도 해석이 틀렸다는 학계의 논문이나 역사학자의 글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는 비전문가로서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 


  
              




댓글 '9'

빠리 걸

2009.02.19 13:03:08

역사학자들은 재밌어 할 글이구만요 ....ㅜ.ㅜ

(참, 코베이에서 낙찰 받으신 거 묶음배송될 수 있도록 신속한 입금해달라고 문자가 왔던디요.)

거부기

2009.02.19 13:28:53

코베이에는 입금했슴다.. 고맙심다~~
글고, 역사학자들은 아마추어 글에 관심을 안둡니다요~~~ ^&^

미갱이

2009.02.20 11:24:02

와아...근데 거부기 오빠가 혼자서...자료를 뒤지다가...고구려 성벽 돌에 대한 추사의 간지 연도 해석이 틀렸다는 사실을 찾아냈다는 검니까? 소설 간송 전형필 쓰려고 자료 뒤지다가 말임니다...와아..

테리

2009.02.20 11:54:50

거부기님의 저 끝없는 탐구심은 어데서 나오는 걸까요?
재미도 있을뿐더러 그 좋은 기운도 전해지니 좋습니다.
그리고 프로들은 너무 바빠서 깊게 탐구할 시간과 여력이 없을지도 몰라요.

거부기

2009.02.20 12:47:50

흠흠... 근까요~~~   간송이 문화재를 모으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 분이 위창 오세창 선생임다....  글고, 위창 오세창은 부친인 역매 오경석의 영향 아래 컸슴다...  글고, 오경석은 추사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고요~~~  그래서 간송이 모은 작품 중 가장 많은 작품이 추사의 작품임다.....  
따라서 간송이 추사의 작품을 왜 그렇게 많이 모았는지가 이해되려면, 추사 -> 오경석 -> 오세창 -> 간송의 관계를 알아야 하는데... 마침 저에게 오경석의 탁본이 있어, 한번 정리해본 검다~~~~   
근디, 돌이 깨지기 전의 탁본은 국내에 한장 밖에 없는데 일반 공개는 안되었고, 암튼  이 탁본이 두번째 발견임다~~~~  
암튼 거부기는 별걸 다 모았는데요...ㅎㅎ....  근디, 거부기 그런거 한 점 구하면 열심히 연구해보는 체질이기 때문에, 고구려사를 공부하다가 추사가 실수한 걸 알아낸검다.....  ^&^
아무튼, 간송 때도 좀 써먹고...  <그림으로 보는 근대> 혹은 <그림을 보면 역사가 보인다>라는 책에서 좀 더 뽀대있게 써보려고 함다~~~    현재 예약된 책이 3권임다~~~~  그래서 거부기가 쬐끔 바쁨다~~~~  ^&^  

미갱이

2009.02.20 21:41:37

와아~미갱이 입 쩌억~자랑 할 만 하네요~와아~

김샘

2009.02.22 16:11:52


거부기님, 잘 읽었습니다. 연구도 열정도 대단하십니다.

김샘

2009.02.23 15:56:11


참고로 제가 쓴 책 "건축은 예술인가"에 인용한 평양성 글씨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천오백 년 전 평양성을 쌓은 돌 하나에 공사 시기, 공사 책임자 등 축성 공사와 관련된 사항을 새겨 놓은 평양성 명문석(銘文石)은 1913년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대동강에 면한 내성(內城) 동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글자는 모두 팔 행 스물세 자이며, 이 중 병술년(丙戌年)은 내성 축조를 시작한 연대, 즉 서기 평원왕 8년(566)에 비정(比定)된다. 평양성을 쌓은 고구려인의 벼슬과 이름이 적혀 있다. “병술년 2월에 한성하 후부의 소형(벼슬 이름) 문달이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쌓아 갔다(丙戌 二月中 漢城下 後阝 小兄文達 節自此 西北行 □之)” - 국립중앙박물관,『북녘의 문화유산』삼인, 2006

 

첨부

거부기

2009.02.23 16:47:57

<건축은 예술인가>  '이름' 단원에 소개하셨지요....  ^&^  암튼, 대단한 고구려 사람들인데요....  선생님께서 소개하신 돌 외에 외성에서 발견된 또 다른 돌은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요건 제가 위의 글을 보충해서 블로그에 자세히 쓸 때 소개했는데요...



그리고 거의 비슷한 곳에서 발견되어 현재 평양의 조선력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또 다른 성벽 돌(위의 사진 왼쪽 돌)에는 "자차하향서십이리" 라고 쓰여있다는 학계의 보고가 있으니, '여기서부터 아래로 서쪽을 향해 12리'라는 의미다.



따라서 이 두 돌에 새겨져 있는 글자를 통해서, 당시 성을 쌓으면서 같은 지점에서 동서로 나누어 공사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금석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생생한 역사의 발견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
첨부


추사의 실수를 발견한 걸까?


www.sunjooschool.com/schoolyard_freeboard/23175    김선주학교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 사학연구(史學硏究)

樂民(장달수) | 조회 101 |추천 0 | 2018.09.30. 09:26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첨부파일 평양성_출토_고구려_刻字城石의_판독_및_위치_재검토.pdf



기 경 량
(가천대학교)




머리말
Ⅰ. 평양성 출토 刻字城石의 판독과 해석
Ⅱ. 각자성석의 위치 추적
맺음말




●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奇庚良, 2017『高句麗王都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제3장 2절「후기 평양성 長安城의 조영」의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임.
● 투고일: 2017. 5. 28. ● 심사일: 2017. 5. 30. ● 게재확정일: 2017. 6. 6.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72


주제어:평양성, 장안성, 각자성석, 오탄, 한사정


요약
장안성은 고구려 후기의 도성이다. 최근 고대 도성사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는 점과 연동하여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장안성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는 평양에서 출토된
고구려 시기의 刻字城石으로, 지금까지 5개가 출토되었다.
평양성 각자성석 연구에는 아직 미진한 부분이 존재한다. 판독에 있
어서도 학자들 간 견해가 갈리는 부분이 있고, 특히 출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게 나뉘어 사실상 정설이라고 할 것이 없다. 각자성석의 출
토지에 대한 논란이 혼란스럽게 전개되는 이유는 각자성석에 대한 조선
시대 문헌 기록에 보이는 정보의 비일관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합리적
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논란이 분분하였던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1석
의 발견 위치에 대해 새로운 안을 제시하였다. 『해동금석원』에 전하는
김정희의 글과 『삼한금석록』의 오경석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탄에
서 각자성석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석과 제3석은 外城남쪽의
한사정에서 출토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오탄에서 출토되었다는 각자
성석은 제1석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제1석의 발견지가 오탄 부근이 틀
림없다면, 제1석에 새겨진 축성 내용은 中城남쪽 성벽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5석의 출토지 위치에 대해서는 1978년 북한의 최희림이 저술한
『고구려 평양성』의 오류가 현재까지 답습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구
글 어스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이를 교정한 위치를 제시하였다.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73


머리말
長安城은 552년(양원왕 8)에 축조를 명하고, 586년(평원왕 28)에 이도
가 이루어진 고구려의 후기 평양성이다. 장안성 축조는 고대의 계획 도시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최근 크게 주목받고 있다. 관련된 문헌 기록은 매우
소략하지만 장안성을 축조할 당시 새긴 刻字城石이 성벽에서 여러 개 발
견되어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해당 금석문에 대한 정확한 판독과
분석은 장안성 연구의 기초 작업으로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
족함이 없을 것이다.
평양성 각자성석의 명문 판독은 이미 여러 차례 이루어진 바 있다. 그
러나 일부 글자들의 경우 여전히 판독 상에 이견이 존재하며, 명문에 등장
하는 용어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
다. 이에 기존의 판독안들을 대조하여 각자성석의 명문을 재검토하였다.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연구에서 학자들 간 크게 의견이 갈리고 있는
중요한 주제로 각자성석의 위치 문제를 들 수 있다. 각자성석에는 축성 거
리가 새겨져 있는 만큼 각자성석들의 본래 위치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파
악은 장안성 축조의 과정과 실상을 구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사안이다.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여러 안들이 어
지럽게 제시되었을 뿐 아직 정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는 각자성석의 출토지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조선 시대 문헌 기록들이 일
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이에 관련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
여 정보 간의 모순을 제거하고, 실상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고자 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장안성의 각자성석은 모두 5개이고, 실물이 전하는
것은 3개이다. 尹游의 平壤續誌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평양 북성에서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74
“본성은 42년 만에 역을 마쳤다(本城四十二年畢役)”고 새겨진 돌이 나왔
다고도 하는데,1) 이것까지 포함하면 평양에서는 모두 6개의 각자성석이
나온 셈이 된다. 다만 ‘평양속지 각석’의 경우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
다. 명문 내용이 다른 각자성석들과 크게 이질적이어서 고구려 때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당대의 각자성석이 분명하다고
판단되는 제1석~제5석의 각자성석만을 분석 대상으로 한다.
현재 실물과 탁본이 존재하는 각자성석은 제2석․제4석․제5석뿐이
다. 제2석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제4석은 평양의 중
앙역사박물관에, 제5석은 평양 인민대학습당 북서쪽 귀퉁이 성벽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평양속지 각석’을 비롯해 제1석과 제3석은 문헌상으로
내용이 전할 뿐 실물이나 탁본을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
으로 감안하여 작업을 수행하였고, 논란이 있는 글자들의 경우 탁본 및
사진 자료를 제시한 후 유사한 글자들과 대조하는 방식을 취하여 판독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Ⅰ. 평양성 출토 刻字城石의 판독과 해석
1.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1석
제1석의 존재는 淸의 고증학자인 劉喜海가 輯錄하고 劉承幹이 重校한
海東金石苑에 소개되어 있다. 劉喜海는 김정희와 교류하며 이 자료를
입수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여기 실려 있는 김정희의 글에 따르면 제1석은
1) 平壤續志 卷1, 城池, “舊城底有石刻曰本城四十二年畢役古人之不計功力而以堅
築爲事者可見矣.”.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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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년(丙戌年)에 발견된 것으로, 64년이 지난 1829년 당시에는 이미 사
라져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2) 또한 이 각자성석의 높이는 9寸,
너비는 4尺3寸이며 행마다 2자씩 12행이 隸書로 새겨져 있었다고 설명
하였다. 김정희가 제시한 독문은 다음과 같다.
①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1석 판독문
12 11 10 9 8 7 6 5 4 3 2 1
造侔夫兄里十西始八月年己①
作利若相小一向役日卄五

[酉] ②
∙판독: 己丑[酉]年五月卄八日始役西向十一里小兄相夫若侔利造作
∙해석: 기축[유]년 5월 28일 役事를 시작한다. 서쪽 방향으로 11리는 小兄3)
相夫와 若侔利가 짓는다.
해동금석원․평양지4)․삼한금석록 등에서는 각자성석의 시
작 부분에 등장하는 간지를 ‘기축년’이라고 판독하고 이 성석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각자성석
은 장수왕대의 평양성과는 무관하며 후대에 축조를 시작한 장안성과 관
련된 것이다.
田中俊明은 제2석과 제3석의 사례를 통해 제1석의 1-② ‘丑’을 ‘酉’의
오독으로 추정하였다.5) 또한 민덕식은 제2석과 제3석의 사례를 보았을
때 제1석의 2-② 역시 ‘五’가 아니라 ‘三’의 오독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
2) 海東金石苑 卷1, 高句麗古城石刻, “此刻出於丙戌今六十四年不可復覓.”.
3) 小兄: 고구려의 관등으로 周書에 따르면 13관등 중 네 번째로 언급되며, 翰苑
所引高麗記에 따르면 14관등 중 10등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명 ‘失支’라고 한다.
4) 평양지는 1590년 윤두수가 만든 것이 있고, 1837년과 1855년에 기존 평양지를
증보하여 간행한 작자 미상의 평양지가 있는데, 이 평양지는 후자이다.
5)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史學硏究會,
119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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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6) 이처럼 ‘기축년’을 기유년으로 고쳐 읽는 것은 타당하지만, ‘5월’이
아니라 ‘3월’일 것이라 보는 것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에
제1․2․3석 공히 간지를 ‘기축년’으로 읽은 것은 제2석과 제3석이 발견
된 해가 마침 기축년이었기 때문에 이를 각자성석 명문 내용과 연결하여
神異한 일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과 일의 경우
는 사정이 다르다. 제1석에 새겨진 축성이 시작된 날짜는 ‘28일’이다. 제2
석․제3석의 ‘21일’과 차이가 있다. 따라서 제1석의 5월을 3월로 고쳐 파
악하는 것은 비록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相夫若侔利’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보기도 하고, ‘상부’를 따로 분리
하여 직명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相夫’를 ‘上部’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
만,7) 고구려 사람들이 ‘上部’를 굳이 ‘相夫’로 표기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당시의 인명 표기 방식이 대개 ‘부명+관등+인명’의 순서로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면 관등인 小兄다음에 위치한 ‘상부약모리’는 인명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만 한 사람의 이름으로 볼 것인가 ‘상부’와 ‘약모리’ 두 사
람의 이름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마침 고구려의 인명 중에는
‘상부’의 사례가 있는데, 고구려의 제14대 왕인 봉상왕의 이름이 바로 ‘相
夫’이다. 또한 봉상왕 때 國相이었던 ‘倉助利’나 魏書․梁書․資治
通鑑 등에 등장하는 미천왕의 이름인 ‘乙弗利’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인명에서는 끝에 ‘利’라는 어미가 붙는 경우가 흔하였다. 고구려
인명은 2자나 3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부약모리’는 ‘상부’와 ‘약모
리’ 두 사람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민덕식은 실물이나 탁본이 전해지는 다른 각자성석의 행수가 5~8행
인 것에 비해 이 각자성석의 행수만 12행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혹시 김
정희가 橅本을 만들 때 1행에 2자씩 일정하게 배치하여 임의로 글자를
6) 閔德植, 1993, 高句麗의 平壤城刻字城石에 관한 硏究, 韓國上古史學報 13, 96쪽.
7) 위의 논문, 106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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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열한 것이 아닌지 의문을 표하였다.8) 해동금석원에는 돌의 높이와
너비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는데, 함께 실려 있는 제2석은 높이 7寸, 너비
1尺1寸4分9)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높이 9寸, 너비 4尺3寸인
제1석은 가로가 지나치게 길어 형태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독
문을 제공한 김정희 자신조차도 실물이 이미 사라졌다고 밝힌 상황이므
로, 모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2.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2석
제2석은 해동금석원과 평양지․삼한금석록에 기록이 전하는
데, 해동금석원은 발견 장소가 평양 외성의 烏灘아래라고 하였고,10)
평양지와삼한금석록은 九疊城이라고 전하고 있다.11) 구첩성은 기자
가 성을 9겹으로 만들어 홍수를 막았다는 전승에서 비롯된 평양 외성의
별명이다. 평양지에 따르면 발견 시기는 1829년(순조 29)으로, 홍수로
성벽이 무너지면서 2개의 각자성석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것이
곧 제2석과 제3석이다.
삼한금석록에는 1855년(咸豊乙卯年) 오경석이 북경에 가다가 평
8) 위의 논문, 96쪽.
9) 조선 시대 사용된 주척을 참고하여 1척=약 20.8cm로 계산해 보면 제1석은 세로
18.72cm, 가로 89.44cm가 되고, 제2석은 세로 14.56cm, 가로 23.71cm가 된다. 제2석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이 유물
의 크기는 세로 19.5cm, 가로 36.0cm이다. 단 이 유물은 조각이 난 상태로 상자 안에
석고로 고정되어 있는 형태로 보관되고 있기 때문에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수치는
성돌의 본래 크기가 아니라 성돌을 보관하는 상자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여하튼 제2석의 경우 세로와 가로의 비율이 약 2 : 3 정도이고, 실물이 확보되어 있는
제4석과 제5석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데 반해 제1석은 세로와 가로의 비율이
1 : 5에 이르기 때문에 해동금석원의 수치가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10) 海東金石苑 卷1, 高句麗古城石刻, “又得一石於外城烏灘下.”.
11) 三韓金石錄, “純廟己丑大漲九疊城潰決而出二誌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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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에 들러 각자성석의 실물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12) 제2석은
이후 어느 때인가 오경석이 소유하게 되었고, 아들 오세창에게 전해졌으
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파손되었다. 일부 조각은 분실되고 나머지 11개 조
각은 석고로 고정시킨 형태로 1965년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소장
하고 있다. 사라진 부분은 2행 전체인데, 마지막 글자인 ‘日’의 왼쪽 하단
자획만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림1】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2석의 탁본
출처: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1992韓國書蹟,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p.9.
하지만 다행히도 2행을 포함한 원형 상태에서 뜬 탁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원래의 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원형 탁본을 자세히 보면 성석에
조각이 난 흔적들이 확인되므로, 해당 탁본을 뜰 당시 제2석은 이미 파손
된 상태였다고 이해된다. 파손이 되는 과정에서 2행에 해당하는 조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미 파손되어 조각이 난 상태에서 보관을 하다가
해당 부분을 분실하였던 것이다.
12) 三韓金石錄, “此刻今在平壤府治西十里烏灘江涯余於咸豊乙卯作燕臺之行路
出箕城謁殷師墓歷覽井田故址因沿江而至閑似亭訪得此刻于故城潰決處蓋高句
麗築城時所刻也.”.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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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2석은 편편한 자연석에 글자를 새겼고 석재
는 수성암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도록에서는 서체가 전반적으로
北朝楷書의 분위기가 강하다고 설명하고 있는데,13) 실제로 북위 때 금석
문과 글씨가 유사하다.
②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2석 판독문
7 6 5 4 3 2 1
作俳物東自[三] 己①
節湏苟十此月酉②
百小二下卄年③
矣頭兄里向一④
日⑤
∙판독 : 己酉14)年[三]月廿一日自此下向東十二里物苟小兄俳湏百頭作節矣
∙해석 : 기유년15) [3월] 21일 여기서부터 동쪽 방향 12리는 物苟16)의 소형 俳
湏와 百頭17)가 만드는 것을 통제한다.18)
13)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1992, 韓國書蹟,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9쪽.
14) 丑(해동금석원, 삼한금석록), 酉(正上秀雄, 최순희, 田中俊明, 鬼頭淸明, 민덕식)
15) 기유년: 해동금석원․평양지․삼한금석록 등에서는 이를 ‘기축년’이라고
판독하고 이 성석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던 시기의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성석은 장수왕대의 평양성이 아니라 양원왕대에 축조를 시작한 후기 평양성인
장안성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기유년은 평원왕 31년인 589년으로 볼 수 있다.
16) ‘物苟’: ‘小兄’이라는 관등 앞에 나오므로 지역명이나 소속 집단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7) 百頭: 인명의 일부로 보기도 하지만 역을 수행하는 집단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직명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뒤의 제3석의 해석 부분을
참조할 것.
18) 만드는 것을 통제한다: ‘作節’이라는 표현은 신라 남산신성비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남산신성비에서는 ‘작절’이 문장의 앞부분에 나와 ‘지을 적에’ 정도로 해석이 되는
데, 여기서는 문장 끝에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기 곤란하다. ‘節’은 ‘감독하
다, 통제하다’ 정도로 해석해야 하므로 남산신성비의 그것과 같은 용어라 하더라도
용법은 다르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80
1-②: 酉
1-②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北魏于景墓誌 隋高昌國墓塼
해동금석원이나 삼한금석록 등에서는 ‘丑’으로 읽었으나, 井上
秀雄이 ‘酉’로 읽은 이래 다른 대부분의 판독에서도 모두 ‘酉’로 읽고 있
다. 실제로 자형상 ‘酉’가 분명하다. 해동금석원이나 삼한금석록에서
는 제1석․제2석․제3석의 간지를 공히 ‘己丑年’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제2석의 간지가 ‘己酉年’이 분명하므로, 실물이
현전하지 않는 제1석과 제3석 역시 간지가 ‘己酉年’일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게 되었다.
2-①: [三]
三五
2-①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소장탁본
北魏元懷墓志
北齊
泰山經石峪
北齊
泰山經石峪
唐顏真卿
多寶塔碑
2행의 ① 글자의 경우 해동금석원에서는 원래 ‘五’로 보았다가 ‘三’
으로 수정하였고, 평양지․삼한금석록 등 이후 판독자들은 대체로
‘三’으로 보고 있다. 조각이 분실된 부분이라 탁본에 의지하여 판독을 할
수밖에 없는데 글자가 뭉개져 판단이 어렵다. 그런데 ‘五’로 볼 경우 두
번째 획으로 볼 수 있는 세로획이 매우 가늘고 희미하므로 이는 자흔으로
보기 어렵다. 흠집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한 제2석과 함께 발견된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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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석의 경우 해당 부분이 3월 21일로 판독되었는데, 두 각자성석은 문장
구조와 역사를 시작한 날짜까지 동일하기 때문에 제2석 역시 해당 글자
를 ‘三’으로 판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5-②: 苟
苟省
5-②
이화여자대
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東晉王羲
之東方朔
畵贊
唐顔眞卿
爭坐位稿
東晉王羲
之喪亂得
示二謝帖
隋智永
真草千字

5-②의 경우 해동금석원에서는 ‘省’으로 판독하였으나, 평양지․
삼한금석록에서는 ‘苟’로 판독하였다. 이후 대부분의 판독자들이 ‘苟’
로 판독하고 있다. 해동금석원에서 ‘省’으로 판독했던 것은 초서로 쓴
‘省’의 자형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句’ 부분의 오른
쪽으로 돌아 내려오는 자획이 명확히 보이기 때문에 ‘省’은 성립하기 어
렵다. ‘苟’로 판독하는 것이 타당하다. 해동금석원에서 이 글자를 ‘省’
으로 판독한 것에 근거하여 ‘物省’이라는 관청의 이름을 상정한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19) 하지만 잘못된 판독에 근거한 것이므로 성립할 수 없다.
6-①: 俳

6-①
이화여자대
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北魏元珍
墓誌
北魏元徽
墓誌
隋智永眞
草千字文
唐顔眞卿
東方朔畵贊

19) 鮎貝房之進, 1934, 高句麗城壁石刻文, 雜攷 6 上編, 372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182

6-②
이화여자대
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北魏
孫遼浮圖
銘記
飛鳥
船首王後墓

唐歐陽詢
皇甫誕碑
6-④
6-①은 평양지에서 ‘徘’로 판독하고, 그 외에는 모두 ‘俳’로 판독하
고 있다. 하지만 두 글자는 상통하는 같은 자이다. 형태만으로 보자면 탁
본 상으로는 ‘彳’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좌상변에 난 흠집 때문이다.
‘俳’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6-②: 湏
6-②는 해동금석원에서 미상자로 보았으나, 평양지․삼한금석
록에서는 ‘湏’로 판독하였다. 이후 朝鮮金石總覽에서는 ‘須’로 판독하
였는데, 두 글자는 상통하는 같은 자이다. 일반적으로 ‘須’를 ‘湏’의 형태
로 쓰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글자가 뭉개져 있지만 좌변의 경우 하단에
서 오른쪽으로 꺾이는 형태가 명확하게 보여 ‘氵’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우변은 6-④ ‘頭’의 우변을 참고하여 ‘頁’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 하단의
‘八’ 형태 중 왼쪽의 획이 잘 안 보이는데, 이곳은 돌이 마멸된 부분이므
로 획이 지워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7-①: 作
7-①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탁본
北魏元彦墓

東晋王羲之
蘭亭敍
唐杜牧張好好
詩卷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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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①은 해동금석원에서 미상자로 보았는데, 평양지에서는 ‘腓’,
삼한금석록에서는 ‘作’으로 판독하였다. 자형상 ‘作’으로 보는 것이 타
당하다. 뒤의 글자인 ‘節’과 함께 ‘作節’이라는 단어를 형성한다는 점도
‘作’으로 판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3.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3석
제3석은 평양지와 삼한금석록에서 1829년에 제2석과 함께 발견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는 소재를 알 수 없으며 판독문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삼한금석록에서는 ‘높이 1尺5寸, 너비 1尺7寸’이며 6행
으로 정서되어 있다고 하였으며, 글자 크기는 ‘1寸3分許’라고 하였다.
③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3석 판독문
6 5 4 3 2 1
節位內向卄己①
矣使中[卩] ▨[西] 一丑[酉] ②
尒百下[十] 日年③
丈頭二自三④
作上里此月⑤
下⑥
∙판독: 己丑[酉]年三月廿一日自此下向▨[西]下[十]二里內中[卩]百頭上位使
尒丈作節矣
∙해석: 기축[유]년20) 3월 21일 여기서부터 ▨[서쪽]21) 방향으로 ‘下2리’[12리]
는 ‘內中’[內卩]의 百頭와 上位使尒丈이 만드는 것을 통제한다.
20) 기축년: 제1석․제2석과 마찬가지로 평원왕 31년인 589년 기유년으로 보아야 한다.
21) ▨[서쪽]: 이 글자에 대해 평양지에서는 ‘東’으로 소개하였고, 삼한금석록에서는
‘口’로 소개하였다. 제3석은 제2석과 문장 형식이 거의 동일하고 같은 자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므로, 제2석의 방향과 반대인 ‘西’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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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석은 제2석과 함께 출토되었고 문장 구조도 거의 동일하다. 이를
통해 제2석과 제3석이 기능상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새겨져 있는 날짜 역시 3월 21일로 제2석과 동일하므로 제3
석의 간지 역시 ‘기축년’이 아니라 ‘기유년’일 것으로 여겨진다.
판독되지 않은 3-② ▨ 글자에 대해 제2석의 경우 해당 위치의 글자가
‘東’이므로 제3석의 경우는 반대 방향인 ‘西’일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일
반적이다.22) 또 그 다음에 ‘下二里’라고 하였는데, 다른 각자성석들의 내용
을 참고했을 때 ‘十二里’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되었다.23) 제2석과 제3석
은 같은 위치에 나란히 배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기준으로 각각
동서 방향으로 진행되는 축성 작업의 시작점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한편 제2석과 제3석에 등장하는 “自此下向○十二里”라는 구절을 “自
此下向○十二里”으로 끊어 읽는 해석도 존재한다. 예컨대 제2석의 “自此
下向東十二里”의 경우 ‘이곳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동쪽 12리’로 해
석하고, 제3석의 “自此下向▨[西]下[十]二里”의 경우 ‘이곳으로부터 아래
로 내려가는 서쪽 12리’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에 제2석과 제3석이 출토
된 곳은 외성 통과선에서 가장 높은 분기점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하였다.24) 그러나 각자성석이 발견된 한사정 부근은 이 일대에서 딱히 높
은 지대라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성립하기 어렵다. ‘自此下’는
그냥 ‘여기(이 아래)서부터’의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內中’은 제4석의 ‘下後卩’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듯이, ‘部‘’의 약자로
널리 쓰였던 ‘卩’를 ‘中’으로 잘못 판독했을 가능성이 높다.25) ‘上位使’는
翰苑에 소개된 고구려 관등 중 9등인 上位使者를 의미한다. 이는 다른
22)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4쪽.
23) 閔德植, 1993 앞의 논문, 99쪽.
24) 심정보, 2005, 高句麗長安城建造時期에 대한 問題點Ⅰ·Ⅱ , 북방사논총 6, 376쪽.
25)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4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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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석들에서 축성을 담당한 이들의 관등이 10등인 小兄인 점과 다른 점이
다. 제3석에서도 제2석과 마찬가지로 百頭가 등장하는데 문제는 문장에
서의 위치이다.
제2석: 소속? + 관등 + 인명 + 百頭 (物苟 + 小兄 + 俳湏 + 百頭)
제3석: 부명 + 百頭 + 관등 + 인명 (‘內中’[內卩] + 百頭 + 上位使 + 尒丈)
백두는 제2석에서는 인명 뒤에 자리하였는데, 제3석에서는 소속 부와
관등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위치에 일관성이 없다. 제3석의 백두를 인명
으로 본다면 관등이 없는 인명이 되며, 제2석에 등장하는 백두와 동일인
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제2석과 제3석은 담당하는 공
사 구간이 달랐고, 각 공사 구간의 길이도 매우 길었다. 백두라는 한 인물
이 두 공사 구간을 중복하여 담당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백두를 인명
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면 직명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제2석과 제3석에서 백두의 위
치가 일관성 없이 다른 위치에 삽입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정식 관직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정식 관직이라면 정해져 있는 인명 표기 방식을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문헌 기록이나 금석문에서 백두의 또 다른
용례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시대에 10戶에 統主1인, 50호에 頭目
1인, 100호에 摠牌1인을 두어 남녀노소를 호적에 올리고 민을 통제하였
던 대민 통제 방식이 있어 참고가 된다. 앞서 언급한 두목과 총패는 조선
초 도성 수축과 관련한 기록에 많이 등장한다.
Q-1. 도성수축도감이 계하기를, “여러 도의 軍丁속에서 갑사 별패․시위
패․수군․진군․수성군․익정군․첨발․봉족 및 잡색군을 제외하
고서 성을 쌓게 되는데, ……각도의 관찰사가 도내의 수륙 방어의 긴
급하고 긴급하지 않은 것을 작량하고 호구의 많고 적은 것을 점검하
여 뽑아 보내되, 40일 안에 축성을 마치면 바로 돌려보내 줄 것이나,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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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게 쌓지 아니한 경우는 감독과 제조와 수령 및 총패와 두목
에 모두 중죄를 더하고, 만일 고쳐 쌓은 뒤에 기울어 무너지면 처음
에 쌓는 것을 맡았던 이들을 시켜 다시 쌓도록 하소서.”26)
세종실록13권, 세종 3년(1421) 10월 29일 무오 6번째 기사
Q-2. 도성을 수축하는 역사에 총패와 두목이 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
망해 돌아간 자가 있으므로, 태상왕이 병조와 승정원에 이르기를,
“도망한 군사는 장 1백대를 친다는 것은 이미 명령이 내렸다. 그러나
그 두목과 총패가 그 군인을 거느리고 도망한 것은 보통 군사의 예로
써 논죄할 수는 없다. 가령 적이 임박하여 대응할 적에 두목과 총패가
또한 오늘과 같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한다면,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는 것이다. 이 무리들은 마땅히 군법으로 바로잡아 뒷사람들에게 징
계해야 한다.”27)
세종실록15권, 세종 4년(1422) 2월 30일 정사 3번째 기사
Q-3. 성문도감이 계하기를, “함길도 북청부에서 쌓은 도성(성벽)이 무너져
내렸으니, 청컨대 당초의 북청 감역관과 두목·총패에게 명령하여 기
한 안에 서울에 와서 수축하게 하소서.”하였다.28)
세종실록25권, 세종 6년(1424) 8월 5일 정미 3번째 기사
이를 보면 도성 축조 및 사후 관리에 있어서 감역관뿐 아니라 총패와
두목이 책임자로서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조선 시대 역역 동원 단위를
26) 世宗實錄 13卷, 世宗3年10月29日戊午, “都城修築都監啓諸道軍丁內除甲士別
牌侍衛牌水軍鎭軍守城軍翼正軍簽發奉足及雜色軍以築之……諸道觀察使酌道內
水陸防禦緊慢戶口多寡點送四十日內畢築者隨卽放遣其有不堅築者監督提調守
令及摠牌頭目竝加重罪若改築後傾頹則令初築各官築之.”.
27) 世宗實錄 15卷, 世宗4年2月30日丁巳, “築城之役摠牌頭目有率管下逃還者
太上王謂兵曹承政院曰逃軍決杖一百已下旨矣然其頭目摠牌率其軍人而逃者不
可以凡軍例論假使臨敵應變而頭目摠牌又如今日之率逃則國家安危係矣此輩宜
正軍法以懲後來.”.
28) 世宗實錄 25卷, 世宗6年8月5日丁未, “城門都監啓咸吉道北靑府所築都城頹落
請令當初北靑監役官及頭目摠牌及時來京修築.”.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187
이끄는 책임자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그렇다고 정식으로 관직을 받은 자
들은 아니었다. 평양성 각자성석에 등장하는 백두가 조선 시대 축성 기사
에 보이는 ‘총패․두목’과 완전히 동일한 존재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만,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백두는 그 의미로 보았을 때 100명 단위의 인력을 관리하는 자들이었
으리라 짐작된다.29) 12리에 걸친 긴 공사 구간을 100명만으로 축성하였
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백두는 여러 명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2
석은 ‘物苟의 소형 俳湏’가 감역관이 되어 그 지역 ‘백두들’과 축성을 맡
았다는 의미이고, 제3석은 ‘內部의 백두들’과 감역관인 ‘상위사자 尒丈’
이 축성을 맡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內部는 고구려 왕도
에 속한 지역이므로 이를 감안하여 내부의 백두들을 통제하였던 감역관
은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백두들을 감독하였던 제10등 소형보다 한 단계
높은 제9등 상위사자를 배정하였을 수도 있다.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에 보이는 ‘백두’는 아직 다른 사례가 전혀 확인
된 바 없다. 차후 새로운 자료가 출현할 때까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
에 두며 실체를 탐색해 나갈 필요가 있다.
4.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
제4석은 1913년 당시 평양 경제리에서 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
동강에 면한 내성의 동벽을 허무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평양의 중
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명문이 비교적 선명한 편이라 판독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29) 鬼頭淸明, 1984, 高句麗の國家形成と東アジア,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1, 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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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2006,북녘의 문화유산, 80쪽.
④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 판독문
8 7 6 5 4 3 2 1
[徏] 西節兄後漢二丙①
之北自文卩城月戌②
行此達小下中③
∙판독: 丙戌二月中漢城下後卩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徏]之
∙해석: 병술년 2월 중에 한성에 있는 후부의 小兄文達이 통제하여 여기서부
터 서북쪽으로 진행하여 [오른]다.
7-③: 行

7-③
서울대학교 규장
각 소장 탁본
北齊泰山經石峪
隋智永真草千
字文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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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③ 글자의 경우 대부분의 판독자들이 ‘行’으로 판독하고는 있으나,
글자의 형태를 보면 우변 하단의 세로획이 두 개여서 마치 ‘元’과 비슷한
자형이라는 점에서 의문을 주기도 한다. 이처럼 이상한 획이 보이는 이유
는 해당 지점이 파손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림 3】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의 출토 당시 모습
출처: 朝鮮總督府, 1915, 朝鮮古蹟圖譜 2, 110쪽.
1915년 간행된 朝鮮古蹟圖譜에는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의
출토 직후의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의 좌상단
을 보면 글자가 있어야 할 부분이 크게 깨져 나간 상태이다. 성벽을 허무
는 공사 중 출토된 만큼 그 과정에서 파손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평양
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각자성석은 해당 부분이 복원된 상태인
데,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깨져나간 부분의 경계선 부분에 ‘行’이 위치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사진 상으로는 ‘行’의 아랫부분에 해당하는
세로획 2개가 간신히 확인된다. 그렇다면 해당 글자에 사선으로 나 있는
자국은 글자의 획이 아니라 돌이 깨진 부분을 맞추어 붙이는 과정에서
남게 된 흠집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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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많은 판독문에서 1-③의 위치에 ‘十’이 있는 것으로 판독하고 있
다. 해당 부분은 돌이 깨져 나가 자획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이
각자성석은 전반적으로 1행 3자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2행의 첫 자가
‘二’이기 때문에 1행의 세 번째 자리에 ‘十’이 있어서 ‘12월’이라는 문구
가 만들어진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하지만 12월은 한겨울이라 공사 기간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
다. 얼어붙은 강을 이용해 석재를 수월하게 옮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
으나, 역시 추위가 문제이다. 다른 각자성석에 새겨진 축성 시기가 3월이
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명문 역시 12월보다는 2월에 새긴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관련해 고구려의 축성 관계 기록은 봄과 가을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2월이 두드러지게 많다는 점을 지적
한 연구도 있었다.30)
이 각자성석이 1행 3자를 기본 형태로 취했다고는 하지만, 마지막 7행
의 경우는 2자이기 때문에, 1행 역시 반드시 3행일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각 행 마지막 글자의 위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며 사선으
로 내려오는 형태로 맞추어지고 있다는 점도 제1행이 원래 2글자였을 가
능성을 시사한다.
주목되는 것은 ‘漢城下後部이다. 隋書에서는 고구려의 三京으로 평
양성․국내성․한성이 언급되고 있는데,31) 이 각자성석에 등장하는 한
성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북한 학계에서는 한성의 위치를 황해도 신
원군 아양리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32) 장수산성 아래 위치한 아양리 일
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도시구획 흔적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해석상 ‘한성
30) 채희국, 1985, 고구려력사연구-고구려건국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 성곽, 김일성
종합대학출판사(1991, 백산자료원, 210쪽.).
31) 隋書 東夷列傳, 高句麗“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其國中呼爲三京.”.
32) 최승택, 1991, 장수산성의 축조년대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 1991-3, 14~18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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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하후부’, 혹은 ‘한성 아래의 후부’로 볼 수 있겠는데, ‘下後部’를 하나
의 행정구역 단위로 보기는 어색하므로 ‘한성 아래의 후부’, 즉 ‘한성에
있는 후부’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8-①: [徏]
漢後行
8-①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탁본
3-① 4-① 7-③
8-①은 淺見倫太郞가 ‘涉’으로 판독한 이래 대부분의 판독자가 이를
따르고 있지만, 글자의 상단이 깨져 나간 상태이므로 확실한 판독은 어렵
다. 하단의 ‘少’ 형태는 분명해 보이지만, 좌변의 ‘氵’은 단정할 수 없다.
3-① ‘漢’의 자형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이 각자성석의 글자에서는 ‘氵’이
아래로 내려왔다가 오른쪽 위로 꺾이는 형태로 표현되지만, 이 글자의 좌
변은 그러한 모습이 아니다. 그보다는 ‘彳’의 하단부 형태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徏’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徏’은 ‘陟’과 같은 자이다. 마
침 이 각자성석의 축성 구간은 내성의 북쪽이자 북성의 남벽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형상 산지이기 때문에 ‘오른다’는 의미와 부합한다.
초기에 해당 글자를 ‘涉’으로 판독하는 과정에서 淺見倫太郞등은 小
兄文達이 대동강을 건너오면서 글을 새겼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는
물론 받아들이기 힘든 의견이다. 보다 합리성을 갖춘 해석은 田中俊明이
제시한 ‘간섭하다’의 의미이다.33) 그러나 ‘간섭하다’는 의미는 자신의 일
33)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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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닌 타인의 일에 참견한다는 뉘앙스가 강하여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각자성석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 더구나 6-①의 ‘節’이라는
글자가 앞에 존재하므로 소형 문달이 이 공역의 감독을 ‘통제한다’는 내
용은 이미 드러난 상태이다. 다시 ‘간섭하다’는 의미를 넣어 서술어를 중
복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徏]으로 판독한다.
5.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5석
제5석은 1964년 평양시 중구역 남문동의 정해문이 있던 자리의 남쪽
150m 지점에서 내성의 서남쪽 모서리의 밑에서 3번째 단에 박혀 있는 것
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원래 자리에서 약간 이동하여 1984년에 개관한 인
민대학습당 북서쪽 성벽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명문이 새
겨진 돌의 요철이 상당히 심한 편이다.
【그림4】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5석의 탁본
출처: 고려대학교박물관, 2005, 한국 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 통천문화사, 289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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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5석 판독문
5 4 3 2 1
尺▨[六] 此兄卦①
治里東加婁②
群盖③
四廻自切④
▨[百] 上小⑤
∙판독: 卦婁盖切小兄加群自此東廻上▨[六]里四▨[百]尺治
∙해석: 卦婁盖切의 小兄加群은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돌아 위로 ▨[6]里4▨
[백]尺을 맡는다.
제5석은 다른 각자성석들과 달리 간지가 존재하지 않아 성벽의 축조
시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처
음 등장하는 ‘卦婁’를 계루부와 연결시키는 견해가 있지만 日本書紀
天武天皇11년조(683년)에 ‘下部助有卦婁毛切’이라는 고구려 인물이 등
장하는 바, 인명에서도 卦婁의 사례가 보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
적이 있다.34) 그런데 卦婁가 인명으로 쓰인 사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각자성석에서는 小兄加群이라는 ‘관등 + 인명’의 조합이 확인되므로, 관
등이 보이지 않는 “卦婁盖切”을 인명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小兄加群
의 출신지나 소속 집단 정도로 보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고구려 후기에 조성된 명문에서 이미 소멸된 ‘계루부’와 같은 단위
정치체로서의 부명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廻上▨里’의 경우 里앞에 글자가 있다고 보는 이와 없다고 보는 이
로 나뉜다. 문맥상으로는 숫자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맞지만, 탁본
이나 사진 상으로는 글자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34) 徐永大, 1992, 平壤城石刻, 譯註韓國古代金石文Ⅰ,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15~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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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최희림은 ‘里’ 앞의 글자가 ‘六’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이는 제5
석과 제4석의 발견 지점 거리를 고구려 척으로 환산한 것이다. 그는 두
각자성석 사이의 거리를 약 2.1km로 측정하고 고구려의 1자 길이인 약
35cm를 적용하여 고구려 척도로 6리 4자가 두 성석의 거리라고 파악하였
다.35) 반면 田中俊明은 보이지 않는 글자를 억지로 넣을 필요는 없다고
하며 ‘里四尺’을 ‘1리 4척’의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경우 제3석
에서 보이는 ‘2리’와 비슷한 축성 거리가 된다는 것이다.36)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짧은 거리이기 때문에 수용하기 곤란하다.
최희림식 계산법에 따르면 고구려의 1리 거리는 약 350m이며, 이를
따르지 않고 일반적인 23cm 漢尺을 기준으로 1리(1,800척)를 계산하더라
도 약 414m에 불과하다. 이 각자성석에서는 ‘동쪽으로 돌아 위로’ 향한
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최소한 성벽이 내성의 동남쪽 모서리를 지난 부분
까지를 축성 구역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는데, 제5석 발견 지점에서 내성
의 동남쪽 모서리인 대동강변까지의 축성 구간은 1km 가량이다. 이에 비
하면 ‘1리’는 지나치게 짧은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제3석의 축성
구역 길이 역시 2리가 아니라 12리로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里’
라는 글자 앞에는 또 다른 글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
이다.
‘4척’이라는 판독에도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거대한 축성을 기획하
면서 굳이 4척이라는 작은 단위로 구간을 나누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
렵다. 제5석의 명문은 1행이 5자이고, 2행과 3행은 4자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4행과 5행은 각각 2자씩인데, 5행은 마지막 행이니 글자 수가
2자인 것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4행이 ‘里四’ 두 글자뿐이라는 것은 전체
배열상으로 보아도 어색하다. 글자의 위치를 보아도 里의 앞과 四의 뒤에
35) 최희림, 1978, 고구려 평양성,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20쪽.
36)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6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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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글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따라서 4행은 본래 ‘[六]里
四[百]’의 4글자가 아니었을까 추독하여 본다. 제5석에서 제4석까지의 실
제 거리를 고구려척으로 환산해 보면 대략 이 정도 수치가 나오기 때문이
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척은 일반적으로 약 35.6cm였던 것으로 파
악된다.37) 그렇다면 고구려에서 1리는 몇 척이었는지가 문제인데, 필자
는 최희림이 제시한 바와 같이 1리=1,000척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제5석
의 축성 구간 길이를 6리 400척으로 파악하는 것의 실증적 검토는 지면
관계상 별고에서 상세히 다룰 것을 약속한다.
Ⅱ. 각자성석의 위치 추적
실물이나 석문이 남아 있는 6개의 각자성석 중 ‘평양속지 각석’의 경
우는 북성에서 출토되었다는 전승 외에 딱히 다른 정보가 없으며, 석문
내용을 보아도 고구려 때의 인명이나 관등과 같은 요소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 때의 것이 맞는지 불확실한 것은 물론, 실물이 존재하였
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다소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제1석~제5석은 모두 성벽 축조를 시작한 날짜를 제시하고 있으나,
‘평양속지 각석’은 성의 축조가 완료된 후 전체 공사 기간을 제시하고 있
다는 점에서도 다른 각석들과 이질적이다. 성을 만드는 데 42년이 걸렸다
는 내용으로 보아 장안성 전체의 공사 기간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고,38) 대체로 이를 수용하고 있는 분위기이지
37) 兪泰勇, 2001, 高句麗尺에 대한 文獻史料와 考古學的遺物의 再檢討, 高句麗硏
究 11,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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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평양성 각자성석 제4석과 제5석의 발견 지점
출처: 朝鮮總督府, 1929高句麗時代之遺蹟圖版上冊(古蹟調査特別報告第5冊), 地圖
第5의 부분; 구글 위성지도, 평양(2016).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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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성격이 불분명한 자료를 연구에 활용하는 데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반면 제1석과 제3석의 경우는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명문 내용
이 고구려 당대의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만큼 활용에 문제가 없다.
상기한 각자성석 중 근대에 들어와 발견된 제4석과 제5석은 출토 지점
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상세하게 확보되어 있다. 제4석은 1913년 당시 평
양 경제리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古
蹟調査特別報告 제5책에 실린 지도에 그 정확한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바로 지금의 옥류교 북쪽에 위치한 옥류관 부근이다.
제5석은 1964년 내성의 서남 모서리에서 최희림에 의해 발견되었는
데, 그의 보고에 따르면 발견 지점은 정해문이 있던 자리에서 남쪽 150m
떨어진 곳이라 하였다.39) 지금은 원래 발견 위치에서 옮겨져 동쪽으로
150m 떨어진 인민대학습당 서북쪽 광장의 귀퉁이에 신축한 성벽에 있다
고 한다.40) 그런데 최근까지 각자성석의 위치를 표기한 각 연구자들의 지
도를 보면 5석의 위치 표기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내성의 서남
쪽 모서리는 ‘ㄴ’형태로 두 번 꺾이는 형태인데, 제5석이 발견된 정해문
남쪽 150m 지점은 그중 첫 번째 ‘ㄴ’ 모서리에 해당한다. 여기서 다시
150m 동쪽으로 이동한 곳이 현재 제5석이 옮겨져 전시되고 있는 곳으로,
인민대학습당의 서북쪽이다.
그러나 기존에 연구자들이 제시한 지도들에서는 예외 없이 두 번째
‘ㄴ’ 모서리를 제5석의 발견 지점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곳의 실제 위치는
38) 정찬영, 1966, 평양성에 대하여 , 고고민속 1966-2, 14쪽;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8쪽.
39) 최희림, 1978, 앞의 책, 15~16쪽.
40) 閔德植, 1992, 高句麗의 平壤城의 築城過程에 관한 硏究, 國史館論叢 39, 35쪽
의 田中俊明의 서신 재인용. 현재 평양성 각자성석 제5석은 시멘트 틀에 유리로
막아 보호하고 있다(여호규, 2005, 평양성 , 증보판 평양일대 고구려유적, 고구
려연구재단, 71쪽.).
41) 최희림이 제시한 지도에는 각자성석이 1~4석까지만 표기되어 있다. 어떤 이유에
서인지는 북한 학자들은 제3석의 존재를 누락시키고 있다. 때문에 북한에서는 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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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림 제시(1978) 田中俊明제시(1985)
심정보 제시(2005) 민덕식 제시(2010)
【그림 6】평양성 각자성석 발견 지점에 대한 기존 연구자들의 표시41)
출처: 최희림, 1978,고구려 평양성,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5쪽;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
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68-4, 128쪽; 심정보, 2005, 高句麗長安城建造時
期에 대한 問題點Ⅰ·Ⅱ , 북방사논총 6, 374쪽; 閔德植, 2010, 都城의 築造過程에 대
한 檢討-高句麗平壤城(長安城)과 漢陽都城의 축조를 중심으로- , 향토서울 7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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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대학습당의 남쪽 90~100m 지점이므로 각자성석의 위치에 대한 서
술과는 맞지 않는다. 1978년 출간된 최희림의 고구려 평양성에 실린 지
도에서의 오류를 수십 년간 검증 없이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주의를 요하는 바이다.
발견 위치가 불분명한 것은 제1석~제3석인데 이중 제2석과 제3석은
해동금석원과 삼한금석록에 원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실
려 있어 참고가 된다.
R-1. 돌 하나를 외성 오탄 아래에서 구하였다.42)
해동금석원
R-2. 이 석각은 지금 평양부 치소 서쪽 10리 오탄 강변에 있다. 내가 함풍
을묘년에 연행길을 가게 되었다. 箕城[평양성]으로 나가 殷師[기자]의
묘에 배알하고 井田의 옛터를 두루 다니며 구경하였다. 강가를 따라
한사정에 이르렀는데, 이 석각을 옛 성의 무너진 곳에서 찾아보았
다. 대략 고구려가 성을 쌓을 때 새긴 것이다.43)
삼한금석록
해동금석원에서 전하는 김정희의 말에 따르면 각자성석이 발견된
곳은 ‘외성의 오탄’이다. 삼한금석록에서는 ‘오탄’ 외에 ‘한사정’이라는
또 다른 정보가 추가된다. 기존의 연구들을 보면 대개 오경석이 실물을
확인했다고 한 ‘한사정’을 근거로 제2석과 제3석을 외성 가장 남쪽에 자
리하고 있는 한사정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석을 제3석이라 표기하고, 제5석을 제4석이라 표기한다.
42) 海東金石苑 卷1, 高句麗古城石刻, “得一石於外城烏灘下.”.
43) 三韓金石錄, “此刻今在平壤府治西十里烏灘江涯余於咸豊乙卯作燕臺之行路
出箕城謁殷師墓歷覽井田故址因沿江而至閑似亭訪得此刻于故城潰決處蓋高句
麗築城時所刻也.”.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00
한사정은 외성의 남문인 거피문 바로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지금
의 행정 구역 상으로는 평천구역 해운2동에 해당한다.44) 문제의 오탄은
한사정으로부터 약 3km 가량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있다. 오탄
은 대동강의 양각도 위쪽에 형성된 여울을 말한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의 전승이 남아 있다. 일본군이 낮 썰물 때 까마귀들이 이곳을 걸어 다니
는 것을 보고 평양성을 공격하려고 밤에 몰래 건너오다가 세찬 밀물로
몰살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까마귀가 왜적을 유인해 전멸시킨 곳
이라 하여 까마귀여울, 즉 오탄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오탄과 접하고 있는
이 일대 외성 지역의 지명을 오탄동이라 하였다고 한다.45) 현재의 평양시
지도를 확인해 보면 이 일대 행정구역명은 중구역 오탄동으로, 강변에 형
성된 길에는 오탄강안거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한사정과 오탄은 매우 거리가 떨어져 있으므로 같은 장소로 보기 어
렵다. 최희림은 오탄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 정약용이 저술한 大東水經
패수조에 실려 있는 “이암 아래 양각도가 있다”46)는 구절을 이용하였다.
그는 이암은 양각도 가운데 있는 큰 바위로 지금까지 위치에 변함이 없다
고 하고, 제2석은 양각도 위쪽 여울인 오탄에서도 아래쪽인 외성 성벽 유
지에서 발견된 것이라 하였다. 그 위치는 구체적으로 지금의 철교 아래
약 1km 떨어진 지점 부근이라 지목하였다.47)
이러한 논증 과정은 의도가 불분명하여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
이 있다. 아마도 오탄의 위치를 소양각도를 기준으로 상정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과거 양각도는 지금과 달리 두 개의 섬이었고, 상류에 있는 것을
대양각도, 하류의 것을 소양각도라고 하였다.48) 이암은 본래 두 양각도
44) 평화문제연구소, 2005, 조선향토대백과, 한사정터 조.
45) 평화문제연구소, 2005, 조선향토대백과, 까마귀여울 조.
46) 大東水經 其3, 浿水3, “淵之傍有貍巖下有羊角嶼.”.
47) 최희림, 1967, 평양성을 쌓은 년대와 규모 , 고고민속 1967–2, 30~31쪽.
48) 朝鮮總督府, 1929 앞의 책의 지도에서는 소양각도를 이암도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1
【그림 7】오탄과 한사정의 위치(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평양도-19세기)
사이를 가르는 물 위에 있던 바위 이름이다. 따라서 “이암 아래 양각도가
있다”는 말은 소양각도에 부합하는 서술이다. 지금은 두 섬이 합쳐져 하
나의 섬이 되었고, 이암은 물 위가 아니라 섬 가운데에 놓인 바위가 되었
다. 최희림은 양각도가 본래 두 개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① 오탄은 양각
도 위의 여울이라고 한다-② (소)양각도는 이암 아래에 있다-③ 따라서 각
석이 발견되었다는 오탄은 이암 부근이다’의 논리를 펼치고 싶었던 것으
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은 성립할 수 없다. 오탄의 위치가 대양각도 위쪽
이라는 것은 조선 시대부터 있던 오탄이라는 지명을 계승한 현재의 행정
구역 명으로도 알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제작된 평양성 병풍도 등에서도
명확하게 확인이 되기 때문이다.49) 최희림이 다소 무리를 해가며 위와 같
소양각도는 이암도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02
은 논증을 시도하였던 것은 결국 각자성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한사정
과 오탄이라는 두 장소의 불일치성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오경석의 글을 보면 기자묘 참배 후 정전의 옛터를 두루 다니며 구경
하고, 강가를 따라 한사정으로 갔다고 한다. 조선 후기 평양 지역의 유람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문헌들을 보면 유사한 내용이 있어 당시 오경석의
동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S-1. 이윽고 주작과 함구 두 문으로 나섰다. 대략 성은 내성과 외성이 있는데
각 한 성에 한 문씩이다. 외성 나가는 길에 井田의 옛터를 찾았다. ……
밭가에 箕子宮의 옛터가 있다. ……九疇壇에서 다시 10리를 앞으로 나아
가면 들이 끝나고 강물이 돌아가는데, 車門으로 나갔다. 이곳은 井田이
있을 때 수레가 다니는 길이었기에 길 입구에 문을 세우고 車門이라고
하였다. 정자 하나가 있어 초연히 강에 임하여 있다. ……편액을 閒似亭
이라 하였다.50) 계산기정 1권 출성, 계해년(1803) 11월 1일
S-2. 맑음. 평양에 머물렀다. 기자묘에 가서 참배하고, 東門으로 해서 井田의
옛 자리를 관람하고 이어 한사정으로 갔다. 정자는 외성 남쪽에 있는데,
바로 마을 秀才들이 업을 익히는 곳이었다.51)
부연일기 왕환일기 , 무자년(1828) 4월 23일 임진.
49) 서울대학교 소장 평양 병풍도를 이용해 양각도, 오탄, 이암 등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 평양도를 이용한 지적은 田中俊明에 의해 이미 이루어
진 바 있다(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0쪽.).
50) 薊山紀程 1卷出城, 癸亥年11月1日, “遂由朱雀含毬兩門出, 蓋城有內外, 而各一
城一門也, 路出外城, 訪井田舊址, ……田畔有箕子宮舊基, ……自九疇壇又前進十
里, 野盡而江廻, 從車門出, 此井田時, 車道所由, 立門於路口, 號曰車門, 有一亭超然
臨江, ……扁曰閒似亭.”.
51) 赴燕日記 往還日記, 戊子年4月23日壬辰, “晴, 留平壤, 往箕子庙瞻拜, 由東門
觀井田舊跡, 仍往閑似亭, 亭在外城南, 卽村秀肄業之所也.”.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3
오경석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箕子井田관람 루트를 밟아 마지막 코스
인 한사정에 이르게 되었고, 이 부근의 성벽이 무너진 곳에서 각자성석을
실견하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제2석과 제3석이 같은 곳에 나
란히 있었을 것이라 보고 있는데, 타당한 추정이다. 제2석과 제3석의 명
문은 날짜가 동일하고 문장 구성도 거의 같아, 하나의 세트로 제작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제2석은 동쪽으로 12리를 쌓는다 하였는데, 제3석은 ▨쪽으로 ‘下2
里’를 쌓는다고 하였다. 제3석의 판독문은 앞선 판독에서도 언급하였듯
이 ‘서쪽 12리’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한사정 부근의 어느
지점인가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각각 12리씩, 총 24리의 성벽 구간이
존재해야 한다. 이는 굉장히 긴 구간이기 때문에 평양성 전 구간에서도
한사정 부근 외에 이를 만족시키는 장소는 찾기 어렵다. 이에 田中俊明은
제2석에서 “동쪽으로 12리”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이상, 남북으로 성벽이
펼쳐져 있는 오탄 부근에서 이들 각자성석이 발견되었다고 보기는 힘들
다고 지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제 각자성석이 출토된 것은 한사정 부근
이라 지목하였던 것이다.52)
각자성석 제2석과 제3석이 출토된 곳이 한사정 부근이 틀림없다면,
오탄에서 각석이 출토되었다는 내용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단순한
오류라고 보기에는 매우 명확하게 지명이 제시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정희나 오경석이 아무런 이유 없이 오탄이라는 출토지 정보를 언
급하였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田中俊明역시 이 문제점을 인식하였
다. 이에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양각도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갈라지는 대동
강의 물줄기 중 외성 쪽을 ‘오탄강’이라고 불렀고, 그 하류인 한사정 부근
을 가리켜 “外城烏灘下”나 “烏灘江涯” 같은 표현을 썼던 것은 아닐까 하
52) 田中俊明, 1985 앞의 논문, 120~121쪽.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04
는 추측을 제시하였다.53)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 뿐 조선
사람들이 ‘오탄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용례
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탄을 제2석과 제3석이 아닌 다른 각자성석의 출토지로 보
면 어떨까. 이에 주목되는 것이 제1석이다. 해동금석원에 실린 제1석에
대한 김정희의 기록은 이 각자성석이 64년 전인 병술년(1766년)에 출토되
었고, 지금은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는 것뿐이다. 오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 또 다른 각자성석(제2석)과는 구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않은 제1석의 형태에 대한 묘사 등을 보았을 때 김정희 본인도 제1석의
실물이나 탁본을 보지는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정희도 누군가의 말
이나 글을 통해 이 각자성석의 존재를 파악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 전
달 과정에서 복수로 존재하는 각자성석의 출토지에 대한 정보가 뒤섞이
는 일이 발생하였을 수 있다.
김정희가 해동금석원에 실린 발문을 쓴 시기는 1829년 기축년으
로, 제2석과 제3석이 함께 출토된 바로 그 해이다. 그럼에도 그는 제1석
과 더불어 ‘又得一石’ 운운하며 제2석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함께 출토
된 제3석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 오경석
은 삼한금석록에서 ‘高句麗故城刻字二種’이라는 항목 아래 제2석과
제3석만을 언급하고 있어, 제1석을 누락시키고 있다. 실제로 당시는 3개
의 각자성석이 출토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나, 김정희와 오경석 모두 각자
성석이 2개인 것으로 오인한 상태에서 각각 다른 조합으로 소개하고 다
루었다. 이를 보면 당시 각자성석에 대한 정보의 착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오경석은 그 자신이 직접 한사정 부근에서 각자성석을 실견하였
53) 위의 논문, 121쪽.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5
음에도 “이 석각은 지금 평양부 치소 서쪽 10리 오탄 강변에 있다.”고 서
술하였다. 이는 평양 지역의 지리에 밝지 못한 그가 각자성석 출토지에
대한 다른 계열의 정보(실제로는 제1석에 대한)를 접하고 별 생각 없이
제2석과 제3석에 대한 정보와 결합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서울 출신
인 오경석이 평양 지리에 어두웠다는 것은 ‘서쪽 10리’라는 표현을 통해
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한사정이든 오탄이든 평양부 치소에서는 모두 남쪽
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탄은 평양부 치소에서 동남쪽에 자리하
고 있다. 당시 평양을 소재로 만들어진 병풍 그림이나 지도를 보면 평양
지역을 좌우로 길게 눕혀 오른쪽은 북쪽, 왼쪽은 남쪽이 되도록 그린 경
우가 많다. 이러한 병풍 그림이나 지도를 통해 평양 지역을 인식하였다면
한사정이 있는 평양의 남쪽 끝을 서쪽이라고 오인할 가능성이 있다.
제1석의 내용을 보면 ‘서쪽으로 11리’ 구간을 축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탄 부근에서 이러한 내용에 부합하는 성벽은 동서 방향으로 곧게
뻗어 있는 중성의 남벽뿐이다. 그렇다면 제1석의 구체적인 출토지는 중
성 남벽의 동쪽 끝이 외성의 동벽과 만나는 부분이라고 짐작할 수 있
다.54) 즉, 조선시대에 발견된 3개의 각자성석 중 제1석은 오탄에서, 제2석
과 제3석은 한사정에서 각각 출토된 것이다. 다만 어떠한 경위에서인지
발견 지점에 대한 정보의 착종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지금까지도 각자성
석의 출토 위치에 대한 인식에 혼선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54) 이에 따르면 제1석의 축성 구간은 중성의 남벽이 된다. 중성의 남벽이 축조된 시기
에 대해서는 연구자 간 이견이 있다. 고구려 때로 보는 견해와 고려 초로 보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는데, 필자는 고구려 때 축조된 것으로 파악한다. 지면 관계상
이에 대한 내용은 별고를 통해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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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장안성의 전체 복원도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7
맺음말
장안성은 최근 도성사 연구가 활기를 띠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고구려 후기의 도성으로서, 장안성 연구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평
양성 출토 각자성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성석 명문과 출토 위치
에 대한 이해에는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이에 본 연구는 각자성
석들의 명문을 다시 판독하는 한편 정확한 출토 위치를 추적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판독에 있어서는 설득력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논란이 있는 글
자들의 탁본 및 사진 자료와 비교 대상인 글자들을 함께 제시하였다. 그
결과 나름대로 근거를 갖춘 판독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특히 제4석 8행
의 첫 번째 글자를 [徏]으로 판독한 것과 제5석 4행에서 ‘里四’ 앞 뒤에
각각 [六]과 [百]이라는 글자가 있었으리라 추독한 것은 필자의 새로운 안
이다. 이중 제5석 4행의 추독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실제 축성 구간에 대
한 실증적인 검토가 필요한데, 이는 지면 관계상 별고에서 상세히 다루고
자 한다.
제1석과 제5석의 위치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보를 제시할 수 있었다.
각자성석의 위치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조선시대 문헌 기
록에서 ‘오탄’과 ‘한사정’이라는 상이한 출토지 정보가 뒤섞여 나타난 점
이다. 사안의 중요성에 비하여 이 문제에 주목한 연구자가 많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분석 결과 오탄은 제1석의 출토지, 한사정은 제2
석과 제3석의 출토지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제5석출토지의 경우는 1978년북한의최희림이저술한고구려 평양성
에 실린 지도에서 나타난 오류가 현재까지 답습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사학연구 제126호(2017. 6)
208
이는 현지답사가 사실상 불가능한 분단 상황의 특수성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정치한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위성사진에 기반한 구글 어스 등의 도구 활용이 가능한
만큼 보다 적극적으로 북한의 지리 정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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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Abstract
Deciphering the Goguryeo Inscription Stones
excavated in Pyongyang Fortress and reconsidering
the Locations
Ki, Kyoung-ryang
Jangan Fortress is a castle in the late Goguryeo. In connection to the
vitalization of studies of the history of ancient castles, it attracts
researchers’ attention. The most basic materials in studies of Jangan
Fortress are the inscription stones excavated in Pyongyang during the
Goguryeo period, and till now, five stones have been excavated.
Research on the inscription stones of Pyongyang Fortress is still
insufficient. There are divided opinions among the scholars in deciphering
them, and especially, their opinions were divided very much, concerning the
excavated area, so virtually, there is no established theory about them. The
reason why disputes over the area where the inscription stones were
excavated are developed confusingly is the inconsistency of information that is
seen in the literature record on inscription stones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work on analyzing this reasonably.
This study made a new proposal about the location where Inscription
Stone No. 1 excavated in Pyongyang Fortress, was found, over which there
have been divergent disputes till now. According to Kim Jeong-hee’s writing
in Haedonggeumseogwon and Oh Gyeong-seok’s in Samhangeumseongnok,
inscription stones were excavated in Otan. However, it is clear that Stones 2
평양성 출토 고구려 刻字城石의 판독 및 위치 재검토
213
and 3 were excavated in Hansajeong Pavilion in the south of the outer castle.
Therefore, it is understood that the inscription stone alleged to have been
excavated from Otan was Stone 1. In addition, if it is certain that the site
where Stone 1 was discovered is near Otan, the content of the fortification
inscribed in Stone 1 is concerned with the wall in the south of the middle
castle.
Concerning the location of the area where Stone 5 was excavated, it was
found that errors in Goguryeo Pyongyang Fortress written by Choi Hee-rim
of North Korea in 1978 are followed till now. This study presented the
location that corrected this, using a tool like Google Earth.
Keywords:Pyongyang Fortress, Jangan Fortress, Inscription stones,
Otan, Hansa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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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9-09 18:56

高句麗 泰川 籠吾里山城 磨崖石刻에 대한 檢討(16차 학술발표) _2001_민덕식
 글쓴이 : 관리자 (202.♡.113.28)
조회 : 9,270  
   민덕식.hwp (46.6K) [63] DATE : 2008-09-09 18:56:23



高句麗 泰川 籠吾里山城 磨崖石刻에 대한 檢討
 
    1. 발견 경위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의 농오리산성 서술 부분에 성 안의 천연 바위에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으나 마멸되어 불명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마애석각은 이 때에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후 1957년 가을 태천 고급중학교에서 향토사 연구를 목적으로 본 농오리산성을 조사하던 중에 자연 암벽에서 글자를 확인하고 신의주 역사박물관에 보고하였으며, 이에 신의주 역사박물관에서 1958년 8월에 본 각자성석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2. 현황
平安北道 泰川郡 龍詳里에 위치한 籠吾里山城은 피난덕산맥의 한 줄기가 용상리에 이르러 가파롭게 솟아 오른 해발 392.7m의 山城山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은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천방천에 와 닿은 한 끝 부분에 해당되며, 泰川邑의 山城驛에서 1.5km 북쪽에 위치한다. 서남쪽 2.5km에는 大寧江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남쪽으로는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대령강의 지류인 천방천(옛 南江)이 흐른다. 대령강과 천방천을 끼고 꽤 넓은 태천벌이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는 험한 산줄기와 연결되고 있다. 본 마애석각은 남문지 안에서 동북 100m 지점에 있는 큰 현무암 바위 돌에 새겨져 있다. 석각면 상부가 마치 碑蓋를 씌운 것 같아서 비바람을 가리우도록 되어 있다. 특히 석각 면이 북향이기 때문에 비바람을 적게 받아 지금까지 보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3. 판독
석각은 바위 면을 70×50cm 크기로 다듬은 다음 글자를 새겼다. 글자는 1행 7자, 2행 8자, 3행 7자로 모두 3행 22자이다. 한 행의 길이는 57∼60cm 정도이다.
현재 판독에는 큰 어려움이 없으며 모두 완벽하게 판독할 수 있어 異見이 없다.



  4. 서체
 마애석각의 서체는 隸書에서 楷書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서체라고 말할 수 있다. 글자는 行間이 정연하지 못한 감을 주는데, 이는 자연 암벽을 정교하게 다듬지 않고 쓴 현상에서 나타난 것으로 天然의 素朴性이 두드러져 보인다. 字劃이나 字形으로 볼 때 古隸와 八分의 筆劃이 섞여 있고 運筆이 부드럽다. 글자의 大小와 약간 흩어진 章法과 筆劃의 탄력성은 古拙함을 더욱 보여주고 있다. 乙, 婁, 百 등의 字形에서 볼 수 있듯이 표현이 풍부한 점으로 보아 절제된 속에 기교가 함축된 筆意를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상당한 수준의 筆力과 眼目을 갖춘 소유자의 작품으로 보아야 하겠다.
 본 마애석각은 고구려 금석문의 石文 중에서 中原高句麗碑 보다는 楷書의 기본 획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중원고구려비의 建碑年代는 주지하다시피 여러 說들이 있으나, 이 중에서 文咨王代說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이며, 대략 5C 말 정도로 보면 어떨까 싶다. 또 평양성 각자성석 중 연대가 가장 이른 각자성석 4인 丙戌銘(566) 것이 본 석각보다 楷書의 기본 획이 많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점은 본 석각의 각자 연대가 평양성 각자성석 보다는 빠르다는 점을 말해 준다. 즉, 본 석각의 乙亥年이 5C 말에서 566년 사이에 있는 干支 주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본 마애석각의 각자년대인 乙亥年에 대한 여러 학설 중에서 陽原王 11년(555)으로 보는 설이 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5. 特徵
본 마애석각을 우리 나라 축성관련 금석문과 비교하는 작업도 필요한 것 같다. 즉, 지금 까지 삼국시대의 築城關聯金石文으로는 본 마애석각을 제외하고는 같은 고구려의 平壤城刻字城石 5개및 신라의 551년에 세운 明活城碑 2개와 591년에 세운 南山新城碑 9개가 전부로서 이들 삼국시대의 축성관련 금석문의 연대는 모두 6세기 후반이라는 공통점을 보인다. 본 마애석각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본 마애석각은 평양성 각자성석보다 문장 표현이 정연하고 세련되었다는 점이다.
① 己丑(酉의 誤)年五月(三의 誤)月二十八日始役西向十一里小兄相夫若 利造作(각자성석 1)
② 己酉年[三]月二十一日自此下向東十二里物苟小兄俳須百頭作節矣(각자성석 2)
③ 己丑(酉의 誤)年三月二十一日自此下向[十]二里內部百頭上位使 丈作節矣(각자성석 3)
④ 丙戌二月中漢城下後部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涉之(각자성석 4)
⑤ 卦婁蓋切小兄加群自此東廻上里四尺治(각자성석 5)
이상의 평양성 각자성석에는 5를 제외하고는 농오리산성 마애석각과 같이 처음에 축성한 干支와 月日을 표기하였다. 또 尺度의 단위는 농오리산성 마애석각과는 달리 동일하게 里를 단위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인명의 표기에서는 농오리산성 마애석각에는 부명, 관등명, 인명순으로 되어 있으나, 평양성 각자성석에는 1은 관등명, 부명, 인명, 2는 출신지명, 관등명, 인명, 직명, 3에는 부명, 직명, 관등명, 인명, 4에는 부명, 관등명, 인명, 5에는 부명, 직명, 관등명, 인명순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평양성 각자성석에는 표기에 통일성이 없다. 평양성 각자성석 내의 監役官의 관등은 小兄이 4명이고, 1명만이 上位使者였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평양성 각자성석에는 造作, 作節矣, 節∼涉之, 治라는 표현을 하였다. 여기서 造作은 성벽을 쌓았다는 말로 役夫들을 지휘 감독하여 맡은 구간의 성벽을 쌓았다는 뜻이다. 作節矣의 作節도 맡은 구간의 성벽 쌓는 것을 지휘 감독했다는 뜻이고, 矣는 어조사이다. 節∼涉之의 뜻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역시 役夫들을 지휘 감독하여 맡은 구간의 성벽을 쌓았다는 의미인 것 같다. 之는 어조사이다. 治는 농오리산성 마애석각과 같이 役夫들을 지휘 감독하여 맡은 구간의 성벽을 쌓았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이처럼 각자성석에는 吏讀로 표기하는 등 표기에 복잡성을 보이고 있으나, 농오리산성 마애석각의 문장은 이들 보다 매우 세련된 면을 보이고 있다. 
둘째로 본 마애석각의 刻字目的에는 축성에 따른 기념적인 요소도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축성관련 금석문을 남긴 목적은 주로 성벽을 쌓을 때 정해진 법칙에 맞게 쌓지 않고 부실하게 쌓은 데 대한 책임을 지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문제는 본 마애석각의 刻字目的을 이해하는데도 참고가 되므로, 간단하게 서술하여 놓을 필요가 있다. 이는 남산신성비의「南山新城作節如法以作後三年崩破者罪敎事爲聞敎令誓事之」(남산신성을 법대로 만들 때에 지은 뒤 3년에 허물어지면 罪주실 일을 듣게 하시고 맹서하게 하는 일이다.)라는 내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이 誓事 부분은 성곽의 축조에 따른 세부 사항을 규정한 築城法에 준하여 쌓은 후 만일 부실 공사로 인하여 3년 안에 성벽이 붕괴되는 일이 발생하면 해당 부분의 성벽 축성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죄를 줄 것이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내용을 축성을 시작할 때 국왕에서 서약토록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한 축성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확실하게는 알 수 없으나 몇 가지 점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基礎部分, 體城部分, 體城에 딸린 構造物의 축조 부분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기초 부분을 잘 하는 것은 성벽의 堅固度와 관련되기 때문에 축성에서는 우선 고려해야될 사항이다. 기초도 성벽이 돌아가는 지형에 따라 여러 工法들이 적용되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基礎가 마련되면 다음으로는 體城을 쌓는 일을 하게 된다. 이 때에 우선 중요한 것은 성돌의 규격을 정하는 문제이다. 성돌에는 성벽의 겉면에 쌓는 面石(남산신성비)과 속에 쌓는 小石(남산신성비)이 있다. 이들의 크기는 성벽의 견고도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설정하여 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小石이란 積心石으로 夾築 城壁에는 속채움에, 片築 城壁일 때는 뒤채움에 사용되는 성돌을 말한다. 성벽의 견고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심석을 쌓는 방법에 달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일 土砂와 작은 雜石들로 채움을 한다던가, 단순히 토사로 적당히 채움을 할 경우에 빗물이 성벽의 적심부로 스며든다던가, 성벽이 겨울에 얼었다가 봄에 풀리면 성벽이 쉽사리 붕괴되는 경우가 많다. 片築의 경우는 특히 심하다. 이 때문에 우리 나라 고대 성곽에서 겉으로는 편축으로 쌓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실제 발굴을 해 보면 內外夾築으로 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뿌리가 긴 적심석으로 면석의 뿌리를 누르고, 그 틈새를 작은 돌들로 다져 메우거나 진흙으로 다져 견치하게 쌓으면 비록 후에 면석이 빠져나가더라도 성벽이 잘 지탱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이처럼 적심부의 상태가 축성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번에는 基礎 못지 않게 積心部를 쌓는 工法도 築城上에서 매우 중요하다면,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석성에서 적심부를 쌓는 방법에는 대략 두 가지 방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兩壁 안쪽의 속채움을 주로 흙과 잡석을 사용하여 하는 공법이다. 즉, 羅通山城의 서벽에는 먼저 산언덕을 편편하게 다듬은 다음 2∼5층의 基石을 쌓고, 그 위에 손질이 잘 된 석재를 쌓아 양쪽 面石으로 삼은 다음, 그 중간에 흙과 碎石(사춤돌)으로 속채움을 하였다. 또 集安의 關馬墻防墻·老邊墻防墻 도 兩壁을 석축으로 쌓고, 내부는 진흙에 잔돌, 자갈을 섞어 속채움을 하였다고 하였다. 또 遼寧省 新賓縣 下夾河鄕 太子城村의 太子城 서벽 남단과 서단에도 흙과 碎石으로 뒤채움하였다. 平山의 太白山城에도 적심석과 적심석 사이에 진흙을 다져 넣었다. 또 평양성 외성의 경우 적심부를 넙적 넙적 한 돌로 마치 구들 놓듯이 반듯하게 깔고 그 사이에 조약돌과 약간의 진흙을 섞어서 번갈아 겹겹이 쌓아 올렸다. 端川의 加應山城은 밑바닥에서 1m 높이까지는 돌과 흙을 섞어서 쌓고, 그 다음 1.5m 정도는 흙을 쌓았으며, 다시 위에는 돌과 흙을 섞어 쌓았다. 이러한 공법은 신라로 전파되어 신라의 明活城에서도 확인되었다. 명활성의 北壁의 경우에는 兩壁의 사이를 割石과 모래가 섞인 진흙으로 쌓았으며, 체성의 面石 사이는 수평를 조정하고, 틈 사이를 메우기 위해서 틈 사이에 할석편을 넣고 진흙으로 메움 질을 하였다. 이러한 土石混築工法은 토성의 적심부에도 응용되었다. 둘째는 적심부를 순수하게 돌로서 구축하는 경우이다. 평양성의 경우는 면석의 뿌리를 길게 하여 뾰족한 부분이 적심석에 의하여 2∼4합으로 물리게 함으로써 성벽을 견고하게 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았다. 또 길죽길죽한 돌로 서로 맞물려 누르고 그 사이에 공간이 없이 조약돌을 다져 넣어서, 면석이 적심석에서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어긋나게 누르는 힘에 의하여 서로 연결시키며 성벽이 앞으로 밀려나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와 같은 공법은 平壤城 뿐만 아니라 三年山城, 溫達山城, 南山城(忠州山城)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石城에서 일반적으로 응용되었다. 고구려 성곽에서는 면석 사이 안쪽이 삼각형의 틈이 생기므로 여기에 맞도록 가공한 돌을 梭形石(북꼴돌)이라고 하는데, 이를 菱形石(마름모꼴돌)이라고도 부르며, 대충 가공하였고 길이는 30∼45cm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능형석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계속 쓰였다. 또 체성을 쌓을 때 성벽의 기울기는 성벽이 돌아가는 지형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圭形法과 垂直法등 성벽의 기울기도 문제가 된다. 이와 아울러 根石(뿌리돌)도 지형에 따라 간격과 높이가 달라지기 때문에 축성법에 언급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축성 공사에서 체성이 완료되면 체성의 상부를 마무리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는 빗물이 성벽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아야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三年山城의 경우는 성벽의 상부에 구들장과 같은 얇을 板石들을 고르게 깔고, 그 위에다 다시 두껍게 진흙으로 덮어 빗물이 성벽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였다고 주민들은 증언하고 있으며, 근래에 주민들이 이들 판석들을 구들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마구 파헤쳐 버렸다고 한다. 明活城 북벽 內壁의 상부가 흑색 점토로 1m 정도 두께로 두껍게 피복되어 있었다는 것과, 集安市 凉水鄕 海關村의 老邊墻防墻도 수평을 이룬 석벽 위 부분을 진흙으로 덮었다는 것도 이와 유사한 공법인 것 같다. 또 女墻이나 성문을 비롯한 성벽에 딸린 구조물들을 쌓는 방식에 대하여도 언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기초부분과 체성의 축조문제이고, 부수적으로는 성 안쪽에서 배수로를 겸한 內環道와 같은 소소한 문제까지도 고려되어야 했을 것이다. 
 한편 큰 현무암 바위 돌에 새겨진 본 마애석각은 석각면 상부가 마치 碑蓋를 씌운 것 같고, 石刻面을 70×50cm 크기로 다듬은 후에 글자를 새기는 등 주의를 기울였다. 또 글씨도 상당한 수준의 筆力과 美意識을 갖춘 사람의 작품으로, 전반적으로 평양성 각자성석의 書者들보다는 수준이 높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보면 본 마애석각에는 築城을 기념하려는 목적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셋째로 본 마애석각은 形態上으로 축성관련 금석문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발견된 마애석각이라는 점이다.
우리 나라 축성관련 금석문은 평양성 각자성석을 비롯한 刻字城石과 남산신성비를 위시한 築城碑로 크게 구별되고 있는데 반해 본 석각은 磨崖石刻이다. 축성관련 금석문 중에서 마애석각은 현재로서는 이 것이 유일한 예이다.
넷째로 본 마애석각은 고구려 성곽의 編年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삼국시대 성곽 중에서 築造年代가 밝혀진 성곽은 매우 적으며, 이런 성곽들도 후에 여러 차례 수축 과정을 거친 것이 많기 때문에 편년으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본 농오리산성은 마애석각으로 어느 정도 축조 연대가 밝혀졌고, 나아가 후대에 이렇다할 수축이 없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이에 따라 본 성안에서 출토된 兜(투구)를 비롯한 長刀, 鐵  등 출토 유물의 편년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다섯째로 본 마애석각은 고구려 書藝史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본 마애석각은 運筆이 부드럽고 글자의 大小와 약간 흩어진 章法과 筆劃의 탄력성은 古拙함을 보여주며, 표현이 풍부한 점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6. 歷史地理的 性格
본 마애석각의 성격을 살피기 위해서는 歷史地理的 측면의 검토도 필요하다. 본 농오리산성의 교통로를 살펴보면 남쪽으로는 대령강 줄기를 따라 博川, 安州, 平壤으로도 통하며, 서북쪽으로는 龜城, 朔州를 지나 압록강에 닿았다. 즉, 평양에서 안주 혹은 价川을 거쳐 평안북도 중부를 지나 압록강에 이르자면 농오리산성을 지나야 하였다. 한편 서북쪽으로도 구성을 거쳐 압록강 하류의 義州와도 연결되었는데, 이곳 압록강 하류에서 遼東城으로 통하였다. 고구려시대에 요동성에서 이곳 압록강 하류로 통하던 통로는 크게 두 갈래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요동성에서 白岩城, 烏骨城(鳳凰山城)을 거쳐 이곳 압록강 하구로 내려오는 길인데, 이 길이 요동에서 평양으로 내려오는 가장 지름길이었다. 즉, 요동성에서 백암성을 거쳐 지금의 本溪方面으로 나아가, 산맥을 넘어  河 유역으로 내려가 압록강 하류에 이르는 길이다. 또 다른 통로는 오골성을 거치지 않고, 요동성에서 安市城, 岫岩地域을 거쳐 압록강 하구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압록강 하구로부터 평양성에 이르는 길을 좀더 부연한다면 고구려 때에 遼東地方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면 契亡山城(걸망산성)에 닿았다. 여기서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남으로 동림, 선천, 곽산, 안주, 평양으로 가는 평지 길인 西路와 동쪽으로 천마, 구성, 태천, 영변, 개천, 순천, 평양으로 통하는 산길이 포함된 東路가 있었다. 고려 때에 거란군이 침입할 때도 顯宗 6년(1015) 경우에는 압록강을 건너 걸망산성(興化鎭城)을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서쪽의 평지 길과 동쪽의 산길을 따라 남침하였고, 顯宗 9년의 침입 때에도 걸망산성에서 고려군에게 대 타격을 받은 후 걸망산성의 동쪽 천마, 구성, 태천 등 산 길을 택하여 침입하였던 것이 참고가 되겠다. 즉, 농오리산성 지역은 요동지방에서 압록강을 건너온 후에 도성인 평양성으로 오는 東路에 해당되었다. 이처럼 농오리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중요한 교통로 상에 위치한 요새였으며, 이곳에 이러한 마애석각이 존재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다.



高句麗 泰川 籠吾里山城 磨崖石刻에 대한 檢討(16차 학술발표) _2001_민덕식


www.palhae.org/gnubrd4/bbs/board.php?bo_table=pds2&wr_id=43    고구려발해학회


  *** 참고 자료 :  고구려 천리장성의 비밀 2009.01.04

                        blog.daum.net/saenal990/18160478   새날 새날이 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