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27. 15:31ㆍ우리 이웃의 역사
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국학을 집대성하다
모토오리 노리나가
本居宣長
1730년 출생 | |
1801년 사망 | |
국적 : 일본 대표작 : 《고사기전》 목차펼치기 모토오리 노리나가 중국식 학문 대신 일본 본연의 정신, 학문, 예술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학자였다. 그로 인해 국학이 집대성되었으나 한편으로 오늘날 국수주의의 표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일본의 국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가다노 아즈마마루, 가모노 마부치, 히라타 아쓰타네와 함께 국학의 4대 인물로 꼽힌다. 그는 막번 체제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유교를 배격하고 일본의 신도(神道)와 고전문학을 연구하여 일본인 고유의 정신을 깨우치고 중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국학(國學)은 불교와 유교가 사상계를 지배하던 풍토에 반발해 일본 고유의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움직임에서 탄생했다. 고대의 고전과 일본어의 기원 등을 연구함으로써 일본 고유의 정신을 탐색한다는 데서 시작된 순수한 학문이다. 그러나 에도 말,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제로 복고해야 한다는 존황론자들에 의해 천황 중심의 민족주의를 내포한 신도 이론으로 변질되었다. "항간에서는 '학문'이라 하면 중국에 관한 것을 의미하고 우리나라 고대에 관한 탐구는 이와 구별하여 신학(神學), 왜학(倭學), 국학(國學) 등이라고 지칭한다. 이는 중국을 위주로 하고 일본을 부수적으로 여기는 관념이니 도저히 말도 되지 않는다." 이런 노리나가의 말에는 당시의 사정이 함축되어 있다. 에도 시대에 들어 유학이 사상계를 지배하면서 중국의 사상과 풍속, 문화 등이 중시되고 일본 고유의 것은 오랑캐의 것으로 치부되었다. 노리나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유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유의 것을 물으면 모른다 하면서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자기 나라에 대해서 몰라서야 되겠는가." 이런 노리나가의 관점은 당시 국학자들의 관점을 대변한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1730년 미에 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에도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던 부유한 상인 출신이나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러나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 덕분에 교토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752년경 교토에서 한의원을 개원했다. 이 무렵 노리나가는 의사이자 주자학자였던 호리 게이잔(堀景山)에게서 유학을 배웠다. 국학에도 조예가 깊던 게이잔 아래에서 노리나가는 게이추(契沖)각주1) 의 《백인일수개관초(百人一首改觀抄)》를 접하고, 고전 연구에 눈을 떴다. 노리나가가 국학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 것은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노리나가는 28세 때 마부치의 《관사고(冠辭考)》를 읽고 깊이 감화되었고, 1763년 마부치가 마쓰자카로 여행을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부치가 묵는 여관에 찾아갔다. 마부치는 고대 시가집 《만요슈》에 담긴 순수하고 소박한 정신이 일본인의 참된 정신이라고 여기고, 그런 순수함이 중국 문화의 유입으로 타락했다고 보았다. 때문에 고전 연구를 토대로 일본 고유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리나가에게 이런 관점에서 《고사기》를 연구해 볼 것을 권했다. 단 하룻밤의 만남이었지만, 노리나가는 그를 스승으로 여길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 1764년 노리나가는 《고사기》 연구에 착수했고, 이후 35년여간 문헌을 중심으로 연구에 매진했다. 1798년 드디어 《고사기》에 대한 해설서인 《고사기전》 29권을 완성했다. 일본 고유의 신도에 섞인 불교적·유교적 관점을 배제하고,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순수한 신도 정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였다. 노리나가는 《고사기》에 등장하는 신화 속에서 일본의 뿌리와 사상의 근거를 찾고자 했다. 노리나가는 일본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모노노 아와레(物の哀れ)'를 창안했다. 이는 《겐지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착안한 것으로, 객관적인 대상인 '모노'와 주관적인 감성 '아와레'가 일치하는 곳에서 생겨나는 감정, 즉 '미(美)'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일컫는다. 《고사기》에 기록된 신화를 분석할 때도 모노노 아와레의 관점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모노노 아와레는 모리나가가 스승으로 여기는 마부치의 사상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마부치는 일본 고유의 정신이 순수하고 꾸밈없으며 남성적인 풍모를 지녔다고 여기고, 헤이안 시대 궁정 귀족의 인위적이고 여성적인 기풍을 중국 문화 때문에 변질된 상태라고 보았다. 그러나 노리나가는 헤이안 시대 궁정 문학에 내재된 세련되고 여성적인 감수성을 높이 샀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일본 문화가 지닌 독자적인 것이며, 고도화된 문학 양식이라고 평가하고, 이를 일본인의 인간성을 이해하는 기초라고 여겼다. 노리나가는 마부치와는 반대로 남성적인 풍모를 오히려 중국적인 것으로 여기고, 과도한 이성적·도덕적 틀로 세상에 잣대를 들이대는 유학자들을 비난했다. 무엇보다 일본 고대 작품은 일본인이 느낀 그대로를 표현한 것으로, 외국인(중국인)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점도 확실히 했다. 그리하여 노리나가는 《고사기》에서 신들의 행동 방식으로서의 '도(道)'는 중국 유학에서 일컫는 '도덕'이 아니라 신들의 도, 즉 '신도(神道)'로 규정했다. 그는 인간의 지혜로는 신을 헤아릴 수 없으며,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선악도 신의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유교적인 잣대를 들이대 신들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그 안에 담겨 있는 행위의 감성에 집중했던 것이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주자학을 극복하고 자국이 지닌 본연의 정신을 회복하려고 한 학자였다. 그는 외국의 것에 열광하기보다 일본과 일본인을 중시하고, 예술과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고사기전》은 '일본은 신의 나라이며, 천황은 만세일계의 혈통으로 이어졌다'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훗날 국수주의의 표상이 되었다. 이 책에서 노리나가는 '도(道)란 아마테라스 여신의 도이다. 즉 천황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으로, 이는 오직 황국(皇國, 일본)에만 전해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과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사기》를 일본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으로 표상시켰다. 때문에 훗날 존황주의, 군국주의의 모태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고사기전》을 완성한 지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노리나가 사후 그의 사상은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각주2) 등에게 계승되어 종래의 문헌적·학문적인 면을 잃고 종교적·정치적 면모가 강화되었다. · 1763년 : 마쓰자카로 여행 온 국학자 가모노 마부치를 만나 스승으로 여기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글출처일본사를 움직인 100인 도서 소개 신화의 시대부터 인간의 시대까지, 100인의 인물로 관통하는 일본사! 일본사에 한 획을 그은 100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오늘날 일본과 일본인의 정신을 이룬 역사, 문화, 사상에 대해 살펴본다. 정치가, 사무라이, 군인, 사상가, 예술가 등 폭넓게 다루었으며 그들의 행적과 사고방식을 상세히 서술하여 일본의 역사를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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