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의 정신사적 접근-단군신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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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의 정신사적 접근-단군신화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樂民(장달수) | 조회 21 |추천 0 | 2019.07.08. 15:34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권상우*

<목 차>
Ⅰ. 화랑의 새로운 접근: 단군신화
Ⅱ. 화랑의 기원: 단군신화
Ⅲ. 화랑의 이념: 풍류와 삼교의 융합
Ⅳ. ‘접화군생’의 구현방법
Ⅴ. 화랑의 현대적 의의


<국문초록>

  논문에서는 화랑문화를 단군신화에서 재해석하였다. 화랑도는 한국의 고유사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 연구에서는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랑에 대해 정신사적 접근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근원적인 경험과 사유는 단군신화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단군신화의 상징체계는 화랑도에도 투영되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단군신화에서 화랑에 접근해 보았다.
우선, 화랑의 기원을 단군신화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논하였다. 화랑도는 화랑도 제정 이전의 원화제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원화제가 한국의 고유한 신앙에만 기반을 두었다면, 화랑도고유한 신앙체제와 삼교 (유교. 불교. 도교)가 융합되어진 제도이자 사상임을 논하였다.
그 다음, 화랑도의 정신과 단군신화의 관계성을 논하였다. 최치원비서문에서는 풍류를 화랑의 정신으로 이해한다. 풍류도의 기원은 단군신화의 한사상과 홍익인간과 연결된다. 이뿐만 아니라 풍류도의 포용성 ‘접화군생’은 단군신화의 한사유와 지향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풍류도는 외래 사상을 한국적인 상황에서 해석한 문화주체임을 밝혔다.


* 계명대학교 교양교육대학 조교수


4 民族文化論叢(第61輯)


   마지막으로 화랑도의 수련방식에서 풍류도와 삼교가 어떻게 융합되는지를 논의하였다. 화랑도의 수련방식에는 명산대천을 거닐면서 수련하는 방법과 음악과 춤을 수련하는 방법 그리고 도덕을 연마하는 수련 방식이 있다. 앞의 두 수련방식은 풍류적인 수련방식이라면 도덕 연마는 외래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화랑은 이 두 유형을 통합하면서 수련하였음을 논하였다.


주제어 : 화랑. 단군신화. 소도. 풍류. 접화군생. 세속오계



Ⅰ. 화랑의 새로운 접근: 단군신화

   화랑도는 신라의 문화사와 정치사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유한 사상을 밝힐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 이해되면서, 이에 관한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화랑도 연구는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학자의 편향적인 연구 결과를 맹목적으로 수용하거나 또는 미개사회에 대한 현지조사에서 얻어진 연구 성과를 화랑도에 적응하면서 황당한 결론을 도출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화랑제 성립 관련 사료를 시대 상황과 관련지으면서 그 성격과 활동을 규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
구에서는 화랑 관련 내용의 일부분을 규명할 수 있었을 뿐 화랑의 전면모를 드러내기는 부족한 감이 있다.

   기존의 화랑 연구에서 화랑을 왜곡할 수 있었거나 부분적인 연구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화랑 관련 자료가 부족함에
기인한다. 그렇다고 화랑에 관한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에 단편적이지
만 현존한다. 하지만 그 자료만으로는 화랑의 실체를 규명할 수는 없
다. 화랑이 한민족의 고유사상과 신라문화를 해명하는데 중요한 역사
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면, 이에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5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 방법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실증주의적 역사학자는 역사적 사실을 현존하는 자료에 근거해 규
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이 아무런 전
제 없이 묘사될 수는 없다. 역사학자 카아(E.H.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그는 역사적 사실은 객관적으로 해
석될 수 없으며 역사가가 처한 현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그 의미
를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역사가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과 현대와의 대화를 통해
서만 그 의미와 가치를 규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화랑도에 관
한 연구는 과거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역사가가 처한 현실에 대한 인식
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화랑도가 현대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어디에서 찾을 것
인가? 이에 대해 신채호는 "화랑은 일시 신라 발흥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후세에 漢문화가 발호하여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
의 인심. 풍속, 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하려는 판에, 또
이를 반항. 배척하여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자는 화랑이다"1) 라고
하면서 화랑은 외래문화가 유입되기 이전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역사적 존재로 보았다. 그래서 화랑은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정
체성을 규명하는데 있어 중요한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화랑이 한민족과 다른 민족 집단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면, 이러한 내용은 단군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단군신화는 비록
신화이긴 하지만 한국인의 정서와 사유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현대 한
국의 국정 이념이기도 하다.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신화를 현대의 객관
적인 역사 서술에 있어서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역사학에서 배제한
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이 신화나 역사적인 형식을 지닌다는 것은 신화
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1) 단재신채호전집 간행위원회 편(1982),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상권), 형
설출판사, pp.225
6 民族文化論叢(第61輯)


얼이며 한국문화의 정수임을 상기한다면, 화랑은 단군문화가 역사에
반영되어진 사실로 이해될 수 있다. 정인보는 역사 연구가 단지 역사적
사실에만 천착하게 되면 그 이념과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고 비판하면
서, 한국인의 정신, 이념에서 역사적인 사실에 접근해야 하며, 한국인
의 정신(얼)은 단군신화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인의 정신
(얼)은 시대에 따라 동일하게 드러났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러한 단군신
화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정신이 신라라는 시. 공간에서 어떻게 재해석
되고 있는가를 화랑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군신화가 한국인이 내면
적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면, 화랑은 단군신화의 역사적 사실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화랑도를 단군신화의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하다면, 단
군신화는 더 이상 황당한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
명할 수 있고, 화랑도의 실체와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자료
가 될 수 있다.
화랑의 기원을 단군과 관련해 언급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료는 부족
한 면이 있긴 하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군고기, 규원사화
에 기록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정인보도 화랑의 근원을 단군신화에서
찾고 있다. 이들 사료를 통해 단군신화의 상징적인 의미는 부족국가를
지나서 신라의 화랑에도 투영되어 있음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삼국
사기에는 단군을 ‘仙史’와 연결해서 논의하고 있으며, 이를 단재 선생
은 “선인왕검은 곧 단군이시니 조의선인의 시조라. 화랑이란 이름도
그 처음에는 화랑이라 아니 하고, 다만 선인이라 한 고로, 화랑연원사
를 곧 선사라 함이며, 삼국유사 화랑기에도 진흥대왕이 즉위하고 신선
을 많이 숭상하여 화랑창설을 곧 神仙崇尙이라 하였도다.2)”라고 하였
다. 그는 진흥왕이 화랑도를 제정하면서 풍월도를 부활하고 신선을 숭
상하였는데 그 숭배의 대상이 바로 단군임을 논하고 있다. 그래서 화랑
도를 단군신화와 관련해 접근해 볼 수 있다.
논문에서는 기존의 실증주의적 연구방법에서 탈피하여 화랑을 민족


2) 위의 책, p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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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단군신화에서 상
징하는 한국인의 이념을 중심으로 화랑도의 기원과 정신을 논의해 볼
수 있다. 즉, 단군신화의 정체적인 사유구조와 홍익인간의 이념에 근
거해 화랑도를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논문에서는 화랑도의 기원을 삼한시대의 소도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소도는 단군신화와 화랑도를 연결할 수 있는 중요
한 종교의례이다. 소도와 관련된 역사 자료를 보면 환웅을 숭배하는 등
의 단군신화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부족을 통합할
수 있는 신앙체제를 위해서 소도의 종교의례를 일부 계승하였다. 그래
서 소도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화랑의 기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화랑도는 전통의 고유사상과 외래사상이 결합되어진 사상체
계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화랑의 이념을 풍류라고 주
장하지만, 진흥왕은 풍류를 단순하게 답습하지 않고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화랑도를 제정하였다. 즉, 화랑도 이전
의 풍류도를 그 당시에 중국에서 유입되어진 삼교(유불도)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화랑도에서 고유한 전통인 풍류사상에
근거하면서 어떻게 삼교를 융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
고 마지막으로는 화랑도의 세속오계 또한 전통문화와 외래문화가 결합
되어진 수련 방법임을 논해보고자 한다.


Ⅱ. 화랑도의 기원: 단군신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화랑의 기원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
는 현존하지 않는다. 최치원이 낙랑비서문 에서 인용한 仙史나 일
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참고했다는 古記나 그 이외에도 단
군기, 신지비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들 자료는 아쉽게도 현존하
지는 않는다. 하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그 밖의 관련 문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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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화랑도의 제정에 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진흥왕 37년 봄에 비로소 원화를 받들었다. 이에 앞서 군신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음을 염려하여 사람들을 모아 무리지어 놀게 하고, 그 행실을
본 이후에 발탁하여 등용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선정하였
으나, 한 사람은 남모이고 또 한 사람은 준정이었다. 무리를 300여 명 모았
는데, 그 이후 남모와 준정 두 사람이 미모를 뽐내며 서로 시기하였다. 그
결과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
고서는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그 사건으로 준정이 죽임을 당하
고, 무리들은 화랑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취하
여 장식을 하고,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다.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
어 서로 도의로써 수련하고, 서로 가악으로 즐기며, 산수에 돌아다니며 노
니니 멀다 하여 가 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 됨됨이의
옳고 그름을 알아 그 중 훌륭한 인물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3)
제24대 진흥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인데, 또는 심맥종이라고도
한다. 梁나라의 대동(大同) 6년 庚申(540)에 즉위하였다. 伯父법흥왕의 뜻
을 흠모하여 일념으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불사(佛寺)를 일으키고 사람들
을 제도하여 승려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천성이 風味하고 神仙을 매우 숭상하여 민가의 낭자 중
에서 아름답고 예쁜 자를 택하여 받들어 원화로 삼았다. 이것은 무리를 모
아서 인물을 뽑고 그들에게 효도와 우애, 그리고 충성과 신의를 가르치려
함이었으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大要이기도 하였다. 이에 남모랑과 교
정랑의 두 원화를 뽑았는데, 모여든 무리가 3,4백 명이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하였다.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많이 마시게 하고, 취하게 되자
몰래 北川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서 죽였다.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
을 알지 못해서 슬프게 울다가 헤어졌다. 그 음모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노
래를 지어 동네아이들을 꾀어 거리에서 부르게 하였다. 남모의 무리들이
노래를 듣고, 그 시체를 북천 중에서 찾아내고 곧 교정랑을 죽였다. 이에
대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시켰다.
여러 해 뒤에 왕은 또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風月道를 먼저 해
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명령을 내려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명칭을) 고쳐서 花郞이라고 하였다. 처음 설원랑을 받들어
國仙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이 때문에 溟洲에 비를


3) 삼국사기권4, 진흥왕 37년(576)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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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웠다.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고쳐 선행을 하게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온순하게 하니, 五常, 六藝, 三師, 六正이 왕의 시
대에 널리 행해졌다. 4)
화랑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 37년에
설립되었다. 진흥왕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국가를 진작시키기 위해
화랑도를 제정하였다. 그래서 화랑도는 국가 제도적인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진흥원 37년( 576년)보다 이전인 진흥왕 23년에 화랑의 존재가
확인된다. 사다함은 귀족의 후예로 풍채가 뛰어났고 뜻과 기개가 곧았
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화랑으로 추대되었으며, 화랑의 신분으로서
가야정벌 전쟁에서 副將으로 참여해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5)
사다함은 화랑이 제도로 정립되기 이전에 일반인에 의해 화랑으로 추
대되어졌다. 그래서 진흥왕이 화랑제도를 제정하기 이전에 이미 민간
단체의 형태로 화랑의 존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진흥왕이 화랑
도를 제정할 무렵 신선을 숭배하였으며,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 풍월
도를 부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풍월도와 신선은 당시 화랑도
와 밀접한 관련 있음은 기존 연구에서도 이미 제기되었다. 풍월도에 대
해서는 다음 장에서 풍류도와 관련해 다루기로 하고 이 장에서는 화랑
의 기원에 관한 논의에만 국한해서 다루고자 한다.
화랑도 제정 이전의 화랑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그 실체를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화랑의 기원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는 일본 연구자인 三品彰英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의 화랑 연구
는 “화랑의 기원 문제를 인류학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면서 화랑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된다. 그는 후한서에 근거해 화랑의 기원을 논
하였다. 그는 화랑의 기원을 세계 민족의 원시사회의 성인식에 찾으면
서, 화랑은 남방 민족의 남자집회와 유사하다고 보면서 한민족의 문화
가 남방문화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화랑의 조직을 남자집회로 간주하


4) 삼국유사 권3, 塔象4, 彌勒先花未尸郞眞慈師
5)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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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 기능을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고, 화랑을 군사적인 국가봉사단체
로 규정하였다.”6) 그러나 그는 한민족의 문화를 남방문화와 연결시키
면서 화랑이 지니고 있는 한민족 문화를 부정하고자 하는 식민사학이
내재되어 있다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그가 화랑의 기원을 삼한시대의
소도와 관련해 논의한 것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단군고기에 소도에는 미혼자제가 天指花라는 꽃을 머리에 꼽고 독
서하고 활쏘기를 하였는데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구
절이 있다. 7)이는 소도와 화랑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삼국
지. 동이전 에 따르면 이 소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매년 언제나 오월에 파종을 하는 과정이 끝나게 되면 귀신(땅님과 하느
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제식이 있게 된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노래
를 부르고 춤을 추고 술 마시는 것이 밤과 낮으로 쉬지 않고 계속된다. 그
때 추는 춤은 수십 명이 같이 일어나서 서로를 따라가는 식으로 펼쳐지는
데, 땅을 같이 확 내디디면서 밟고 발의 동작이 서로 주고받는 형태로 응답
하게 된다. 그리고 마디마디를 끊어 연주하는 음악이 뒤따르는데 그 전체
적 모습이 중국의 민간 나무방울춤과 유사하다. 시월에 농사짓는 것이 다
끝나고 나면 또 위에서 설명한 것과 동일한 제식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땅
님과 하느님에 대한 매우 깊은 신앙심이 있어서, 나라의 읍마다 제각기 하
느님(天神)을 예배드리는 것을 주관하는 사제 한사람을 뽑게 되는데 이 사
람을 ‘天君’이라 부른다. 이 별읍을 ‘소도’라고 이름하였다. 그 別邑에는
솟대(大木)를 세워놓고 그 위에 방울과 북을 걸어 놓았는데, 이로써 땅님과
하느님을 예배한다. 피해 망명해온 사람들이 별읍에 들어오게 되면 그 망
명해 온 사람들은 돌려보내지 않는다. 그 별읍의 사람들은 특수한 단체의
식을 가지고 살면서 매우 호전적이다. 그 소도를 만들어 놓은 뜻은 불교의
단체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 두 단체가 좋고 나쁜 것을 행하는 바
의 가치관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8)
6) 三品彰英저, 이원호 역(1995), 신라화랑의 연구, 집문당, pp.17-25 참고
7) 단군고기. 단군세기 . 庚寅元年, 帝命五加擇十二名山之最勝處, 設國
仙蘇塗, 多環植檀樹, 擇最多樹, 封爲桓雄像, 而祭之名雄像
8) 삼국지. 동이전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11
위의 기록은 소도의 제천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도는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위의 기록에서 큰 나무는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에 내려오니, 여기를 신시라고 이른다”라는 기록에서의 ‘신단수’를 의
미한다. 큰 나무 아래에서 천신을 맞이하는 장면은 한민족 고유의 토속
신앙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능화는 조선무속고에서 “단군왕
검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령이자 신격의 사람이라고 하고, 옛날에는
巫가 제천하고 신령을 섬겨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서술하였다, 그
리고 백제의 소도,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등이 단군신교의 유풍
여속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9) 이를 통해 단군신화의 상징적인 의
미가 삼한시대의 제천의식에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서
는 단군고기에 좀 더 상세한 기록이 있다.
단군고기에서는 큰 나무는 환웅을 상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환
웅은 단군신화에 따르면, 환인의 아들이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으로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열어 교화를 담당한 지배자이자
제사장이다. 환웅의 존재는 천상계와 지상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
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환웅의 숭배는 소도에서 천신숭배로 나타난
다. 방울과 북은 노래와 춤으로 거행되는 제처의식의 악기로 사용되었
다. 그래서 삼한시대의 소도는 단군신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공간
으로 이해된다.
위에서와 같이 삼한시대 소도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화랑의 기원으
로 볼 수 있다. 이는 신채호가 화랑의 기원에 대해서 “화랑은 본래 소
두제단의 무사 곧 그 때에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조의를
입어 조의선인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 하였다고
본다.”10)라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주장에 따르면, 화랑은
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賦其
立蘇塗之義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9) 이능화(1927), 조선무속고 계명19호, pp.1
10) 신채호(1979), 丹齋申采浩全集, 朝鮮史硏究草, <朝鮮歷史上一千年
12 民族文化論叢(第61輯)
단지 신라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에서도 유사한 집단
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 또한 소도는 신라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에 전 지역에 존재했다고 하였다. 11) 여기서 소도는 바로 원시부족
사회에 각 지역의 산악신앙과 관련이 있으며, 나아가 단군신화와의 관
련이 있다.
후한서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한시대에서는 군장이 있고,
또한 작은 지역에 別邑이 있었다. 여기서 ‘별읍’은 바로 군장 즉 제사
장이 거주한 신성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제사장은 농경행사가 시작하
거나 수확할 무렵에 촌락 구성원들이 음주가무를 하면서 제사를 지낸
다. 박승길은 제사장은 단순한 신내림을 받은 巫와 구별되며, 사회조직
의 일원으로서 제사 의식을 거행할 때 집단 활동을 인도하는 전문가의
일을 수행한다고 본다.12) 그리고 제사장은 특별한 종교적 훈련을 통해
서 신비스러운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일반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
다. 그래서 소도는, 제사장이 환웅과 같은 능력을 체득하기 위해 수련
하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이 소도에는 제사장만이 아니라 일부 청년들
도 종교적인 수련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환웅
이 그러한 것처럼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이상을 갖춘 신적인
능력을 체득하고자 수련하였다.13) 그래서 이러한 능력은 분명히 일상
적인 삶과는 다른 종교적인 수련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이 소도를
‘별읍’으로 칭하고 있다. 그래서 이 별읍에서는 세상적인 삶에서 벗어
나 환웅처럼 하늘과 땅이 만날 수 있는 종교성과 만물을 이롭게 할 수
있는 홍익인간의 정신을 배양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소도의 기능은 앞
來第一大事件>, 丹齋申采浩先生紀念社業會, pp.232
11) 이춘희 편 (2005), 최문창후전집, 지증대사숙조지탑비명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pp.170. 신운용(2013), 최치원 사상의 종착점과 풍류의 발
현 , 선도문화 14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pp.189
재인용.
12) 김정배(1978), 소도의 정치사적 의미 , 역사학보(79집), 역사학회, pp.14
13) 박승길(1989), 한문화속에서 나타난 화랑문화의 의의 , 화랑문화의 재조
명, 신라문화선양회, pp152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13
에서 언급한 신채호가 화랑을 소도제단을 지키던 선비라고 한 것과 일
맥상통한다.
삼한의 지역적인 특성은 산과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유
민들이 산과 계곡 사이에 흩어져 육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촌락공
동체에서 제사장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으며, 이러한 종교적인 능력은 환웅과 같은 능력일 수도 있
다. 그래서 박승길은 “현실에서 환인은 천군이 되라는 신적인 계시를
통해 그 존재가 해석되고 설명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을 이
상적인 인간상으로 생각한 촌락공동체 사회에서는 하늘에 대한 제사가
개인들을 공동체와의 연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의례로서의 비중을 갖지
않을 수 없다”14)라고 하면서 제사장을 환웅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
3세기에 육촌 중에 하나였던 斯羅國이 여러 부족을 통합해 고대국
가로 나아가면서 ‘신라’라는 국명을 지었는데,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新’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짐을 의미한다면, ‘羅’는
사방을 망라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15) 이와 같이 신라
라는 국명은 여러 부족 국가를 결합시켜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체제의 통합은 필
수적이었다. 그래서 신라는 왕도와 지방에 소재한 소도집단의 조직을
중앙의 천신에 대한 제사조직으로 흡수 통합할 필요가 있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신라인들은 6부의 할아버지들이 다 하늘로부터 신라
강역의 여러 산꼭대기로 강림하였다16)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당시 각
부족에서 동일한 천신숭배와 산악숭배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일한 신앙체제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는데 도움이 되
었고, 국가에서 종교제례를 하는 조직이 구성되어진다.17) 이 종교조직
14) 박승길, 위의 책, pp154
15) 삼국사기, 卷4, 新羅本紀, 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16) 삼국유사, 朴赫居世王朝
17) 신운용(2013), 최치원 사상의 종착점과 풍류의 발현 , 선도문화 14권,
14 民族文化論叢(第61輯)
에서는 천신에 대한 종교의례가 거행되었다. 조흥윤은 신라시대의 제
례에도 고대 천제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시조제, 풍백제, 우사제,
기우제, 명산대천제, 농제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제례는 모두 제천
의식과 관련이 있으며, 그 중에서 “풍백제, 우사제의 경우도 풍백, 우
사, 운사 등은 단군신화에서 환웅을 모시고 있던 것을 헤아려야 할 것
이라고”18)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제천의식은 환웅에게 제사지내는
것과 유사한 종교적 의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제천의식은 원화제와 관련이 있다. 신라에서는 진흥왕이 화
랑도를 제정하기 전에 여성을 선발하여 ‘國仙’이라고 호칭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 신라는 여성의 지위와 권한이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여성이 제사장이었음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신라 南
解王(4-24)이 자신의 親妹인 阿老로 하여금 시조묘의 제사를 주관하도
록 하였다.19) 남해왕의 왕호가 ‘次次雄’이라고 하는데, ‘次次雄’의 왕
호는 巫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래서 남해왕의 왕호는 신라가 국가로
발전하면서 통치자와 제사장의 역할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남
해왕이 최고 통치권자의 지위를 차지한 후 제사 권한을 여성인 아노에
게 맡겼다. 이때 아노가 바로 원화로 계승되었다. 이능화는 삼한시대의
소도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始祖祭에서는 이를 주관하는 주재자
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초기의 주재자가 여성 아노였다는 점에서 미루
어 보아 소도제의 주재자 역시 여성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
고 하였다. 원화는 삼국유사기록에서와 같이 단지 외모가 뛰어난 일
반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제사장일 수 있다. 이도학도
“원화제도에 대한 신라의 왕조와 지방에 소재한 소도집단의 제의조직
을 중앙의 천신, 혹은 시조신에 대한 제사조직으로 흡수 통합하는 과정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연구원, pp.193
18) 조흥윤(1989), 화랑의 종교문화 . 화랑문화의 신연구, 화랑문화의 재조
명,신라문화선양회, pp.281
19) 삼국사기, 권32 제사조
20) 이능화, 이재곤 역(1991),  한국무속고, 동문사, pp.78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15
에서 그 같은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정된 조직이 아닐까 한다고
본다.”21) 하지만 이러한 원화제도가 부족 간의 단합과 연대를 추구하
고자 거행되었지만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으로 나가자 진흥왕이 이 두
집단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선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대체
하면서 화랑제를 제정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진흥왕이 원화 제도 폐지한 이유를 두 집단 간의
갈등 때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진흥왕은 이러한 이유뿐만 아니
라 고유 신앙이 중국에서 유입된 유교와 불교에 의해 점차 그 입지가
위축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사상적 전환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진흥왕은 고유 신앙을 시대 조류에 맞게 재해석하
는 과정에서 화랑도를 제정하게 되었다. 화랑도가 제정되면서 무속적
인 제사장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는 집단으로 전
환하였다.
Ⅲ. 화랑의 이념: 풍류도와 삼교의 융합
앞 장에서 화랑제의 전환은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단순한 전환만이
아니라 사상의 변화를 의미함을 논하였다. 신라 소지왕은 대내적으로
는 국가의 사상적인 통일을 이루었고, 대외적으로는 백제와 고구려와
대등한 국가임을 알리기 위해 天地神을 숭배하는 신궁을 지으면서22)
신라가 한민족의 정체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자 하
였다. 그러나 신궁 건립 이후 40년 간 고유 신앙은 중국에서 유입되어
진 불교. 유교간의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법흥왕은 이차
21) 이도학(1990), 신라화랑도의 기원과 전개과정 , 정신문화연구13-1,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pp.15
22) 최광석(1983), 신라 신궁 설치에 대한 신고찰 , 한국사연구(43), 한국사
연구회 pp.75-77
16 民族文化論叢(第61輯)
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였다. 그의 뒤를 잇은 진흥왕도 불심이
돈독하여 자신의 자식 이름까지도 전륜성왕 사상에 입각해 지울 정도
로 불신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의 주류
사상이었던 고유한 사상, 즉 풍월도를 복원시키면서 고유 신앙과 불교
모두 포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화랑도는 고유 신앙과 삼교가 결합되
어진 형태의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최치원의 낙랑비서문에서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최치원의 낙랑비서문 은 삼국사기에 화랑도 제정과 관련된 기록
과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낙랑은 신라의 유명한 화랑이다. 최치원은
낙랑을 기리기 위한 비문을 지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현묘지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실로 유불
도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많은 사람을 접하여 교화한다. 예를 들어, 들어오
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며, 무위에
처하여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이며, 여러 악을 짓지 않
고 여러 가지 선을 봉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23)
최치원에서 고유사상으로 풍류를 언급하면서, 이 풍류의 출처가 仙
史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진흥왕도 천성이 멋스럽고, 神仙을
크게 숭상하고, 풍월도를 먼저 일으키고자 하였다. 일부 연구자는 선
사에서 仙는 중국 도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신선이며, 도덕경의
玄妙之道로 풍류를 표현하였다는 이유로 선사를 도가. 도교 계열의
역사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치원은 불교의 사상을 언급하면서도
‘현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기도 하였다.24)
23) 삼국사기, 권4, 진흥왕 37년(576)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
寇之旨也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24) 이춘희 편 (2005), 崔文昌候全集, 眞監和尙碑銘, 心法玄之又玄名不
可名說無可說…終類係風影難行補, pp.24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17
그래서 최치원은 언어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사상을 가리켜 ‘현묘’라
고 하였다. 그래서 선사가 도가류의 역사서은 아니다.
그러면 선사는 과연 어떤 역사서인가? 삼국사기에는 평양을 선비
단군의 고향(仙人王儉之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선사’는 단군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한국의 고유사상에 관한 역사서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채호는 선가의 핵심사상을 선비도로 보았고, 이 선비도에
관해서 김형효는 “한국의 선비도는 경천애인ㆍ홍익인간의 진리관을
섬기면서 학문을 통하여 진리를 생활화하고…나라가 무력침략을 당하
면 생사를 가벼이 하며 속무(俗務)와 세정(世情)에 구애받지 아니하는
고로 전쟁에 나아가 용감하고, 늘 하늘의 빛을 두려워하는 청천백일(靑
天白日)의 제천영혼(祭天靈魂)을 지님에서 빛냈다”25) 라고 하면서, 선
비도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최치원이 말한 선사는 선비
도이며 풍류도의 역사이며, 그 기원은 단군이다.
최치원의 낙락비서문 에서는 선사의 핵심이념을 풍류로 본다. 풍류
는 진흥왕이 국가를 진작시키기 위해 부활시킨 풍월도와 같다. 풍월도
는 현존 역사서에서 자주 보인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風月
主’, ‘風月道’ 등과 유사한 용어들이 자주 보인다. 그리고 삼국유사
에서는 검군을 풍월주로 기록하면서 "그 풍류를 수행하였다"26)라고 기
록하고 있고, 또한 미시랑을 소개하면서 “그의 풍류가 세상에 빛나 거
의 7년이나 되더라”27)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풍월을 최치원은
낙랑비서문 에서 풍류로 표현한다. 그래서 풍류는 화랑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용어이다. 최치원이 언급한 바와 같이 풍류의 출처가 선사에
있고 그 ‘仙’은 단군과 연결된다. 그래서 안호상은 ‘풍월’은 이두어로
‘배달’의 의미를 지니고, 그 배달의 의미는 단군왕검(밝달. 배달)과 같
기 때문에 풍월도는 ‘배달길’이라고 주장한다.28) 이와 같이 풍류도와
25) 金炯孝(1985), 韓國思想散考, 일지사, pp.199
26) 삼국사기, 권48. 열전. 검군
27) 삼국사기, 권48. 열전. 미시랑
28) 안호상(1985), 환웅과 단군과 화랑, 사림원, pp.180-181
18 民族文化論叢(第61輯)
단군신화는 연관성이 있다면, 풍류도에서 단군신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다.
최치원은 풍류가 유교. 불교, 도가를 포섭할 수 있다는 의미를 현묘
의 도로 표현하였다. 그는 풍류가 특정한 대상이나 개념으로 정리될 수
없음을 ‘현묘’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김형효는 “현모지도는 바로 형이
상학적 하나의 원리를 지향하는 묘합의 정신이다. 최치원이 풍류를 현
모의 도라고 표현한 것은 그 사상이 심오함을 말한다.29) 이러한 현묘한
도는 단군신화의 사유체계인 ‘한’과 일맥상통한다. 단군신화에서의 한
은 천지인이 결합되어진 형태를 말한다. 즉 하나가 셋이며, 셋이 하나
인 사유체계이다. 이 사유는 바로 논리적이거나 개념적인 사유로는 이
해될 수 없다. 이때 한은 수량적인 개념으로써 하나를 나타낸다. 그러
나 여기서 하나는 절대수의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
하는 통일체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하나는 바로 화엄경의 “一卽多, 多
卽一”의 사유방식과 유사하다.30) 이러한 한사상은 각 문화가 각자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도 어우러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풍류사상의 특징
은 외래의 문화와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상호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풍류는 외래문화를 융합할 수 있는 소지와 그 가능성을 확인해 주는
우리의 고유사상으로 이해할 수 될 수 있다. 31)이와 같이 최치원은 고
유사상인 풍류에 근거해 유교, 불교, 도교의 상이한 외래문화를 융합할
수 있는 주체의식으로 파악하고 있다.32) 그래서 최영성은 고유사상과
29) 한국철학회 편(1987), 한국철학사, 동명사, pp.20
30) 권상우 (2013), 단군문화의 회귀 , 민족문화논총(55), 영남대학교 민족문
화연구소. pp.14
31) 고운국제교류사업회 편찬(2010), 고운 최치원의 철학. 종교사상, 도서출
판 문사철, pp42
32) 신채호는 김춘추, 최치원, 김부식을 사대모화의 화신으로 비판하였다. (신
채호(1995),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 전집(개정판 상권, 형설출판사,
pp.73) 신채호 자신도 화랑, 풍류는 모두 단군문화에서 전개되어진 문화임
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신채호가 보기에 최치원이 풍류도에 근거해서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19
외래사상의 관계에 대해서 고유사상을 體로 하고 외래사상을 用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바로 풍류를 주체로 하고 이 주체가 드
러남을 삼교로 본다는 의미이다. 이는 외래 사상이 유입되어져 표면적
으로는 지배사상인 된 것처럼 보이지만 기층에서는 이러한 풍류 문화
에 의해서 작동되어지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하였지만, 이때 불교는 결국 풍류의 겉모습에 불과할 뿐, 그 이
면에는 풍류의 도가 잠재해 있다.
풍류도가 구체적인 내용 없이 삼교를 포함한다고 한다면, 이는 삼교
를 단순히 수용하거나 취합한 그 무엇에 불과하다. 그래서 풍류가 삼교
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내용과 지향점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최치원은 삼교를 아우를 수 있는 주체로 ‘接化群生’을 들고 있다. 낙
랑비서문 에서의 ‘接化群生’ 에 대한 다양하게 해석하였다. “중생을
교화한다”33). “군생을 접촉하여 감화(변화시킨다)”34) 이러한 해석에서
도 알 수 있듯이, ‘접화군생’은 대중의 현실적인 삶과 관련이 있다. 민
영환의 “ ‘接化群生’이란 의미 속에서, 풍류도는 그 기원에 있어 곧바
로 국조단군의 홍익ㆍ이화라는 인간 살림살이의 이념 및 그 신화적 세
계관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고유한 전통사상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이
다”35)라는 해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풍류가 내세나 초월적인
세계보다는 현실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는 단군신화의 홍익인간과 관련
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단군신화에서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면서 인간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하면서 지상계로 내려온다. 단군신화에서 천신강
림사상은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의 뜻을 두고 인간세계를 탐하고자 하
외래문화(유불도)를 수용하는 태도가 한민족의 혈종주의문화를 훼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33) 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pp94
34) 최영성(2009), 고운최치원의 동인의식 , 고운 최치원의 철학. 종교사상,
문사철, pp42
35) 민영현(2011), 풍류도와 고운 최치원의 동인의식 , 선도문화10, pp.80
20 民族文化論叢(第61輯)
여(數意天下, 貪求人世) 홍익인간을 실현하기 위해서 3천명을 데리고
신단수로 내려왔음에서 알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단군신화에서는 초월
적인 신보다는 현실을 지향하는 신관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상계에서
존재(곰 호랑이)는 같은 동굴에 기거하며 사람 되기를 원하였다(願化爲
人)고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현세 중심주의 사상은 신라의 미륵신앙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미륵신앙은 실제로 화랑을 불교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진지왕 때에 이르러 흥륜사에 진자라는 승려가 있었다. 항상 법당의 주
존불인 미륵상 앞에 나아가 “ 우리 미극대성께서 현화하여 화랑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제가 항상 그 훌륭한 얼굴을 직접 가까이에서
뵈며,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받들어 모실 수 있게 되기를 바라옵나이다. 라
고 자신의 바램을 맹서하여 기원하였다....이에 미호를 가마에 태워 왕궁으
로 들어가 왕을 알현하였다. 왕이 미시를 공경하고 아끼어 국선으로 받들
었다. 미시는 아랫사람들을 화목하게 하고 예의와 덕행으로 사람들을 교화
하는 것이 보통과 달라 풍류가 세상에 빛났다. 36)
위에서 미시랑의 등장은 고유 신앙체계에 근거한 원화를 외래 사상
체계를 수용하여 새롭게 구성하였음을 말한다. 중국에서 유입된 불교
는 현세적 이익을 강조하는 무교사상과 습합하기 위해 미륵하생 신앙
으로 발전하였다. 미륵불은 하생 보살로서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신단
수에 내려오는 것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화랑도를 창설하면
서부터 의도적으로 불교사상을 화랑정신 속에 주입시키면서,37)열반정
토를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현세적 가치관과 미륵사상은 국가를 지상으
로 삼는 호국불교로 전개된다. 이러한 국가지상주의는 개인의 종교적
구원이나 극락왕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국가를 위해 희생하
면서 불국 정토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왕이 죽어서까지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본다. 불신자
36) 삼국유사, 권 3
37) 한국철학회 편(1987), 한국철학사, 동명사, pp.145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21
또한 성불이 되기보다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 화랑이 되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군주와 백성 모두가 국가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충의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동
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호국 불교 이면에는 현세적 가치관
이 반영되어 있다.
화랑도의 현실주의적인 태도는 유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치원
은 <大崇福寺碑文>에서 金膺廉이 “처음 玉鹿에서 이름을 날리고 한
편으로 玄風을 振作시켰다고” 예찬하였다. 여기서 ‘玄風’이란 풍류를
말하며, ‘玉鹿’이란 유교 교육을 담당하던 국학의 교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최치원의 평가와 같이 그는 유교적인 소양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화랑도의 발전에 이바지하다. 이는 유학은 중국에서와 같
이 유학 그 자체의 의미로 이해되기 보다는 화랑도의 발전이나 현풍의
발전을 위해 사상적 도구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최치원은 풍류의 현세
적 가치를 ‘접화군생’으로 표현하였다.
위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교와 불교는 모두 화랑으로 귀속
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겉은 미륵불이지만 내용은 바로 풍류도이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풍류사상의 현실지향적인 가치를 불교와 유교에
투영하고 있다. 이를 최치원은 현묘지도가 바로 3교를 포섭하였다고
표현하였다. 불교의 충효론, 도교에서의 자연무위론, 불교의 선악론은
풍류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그래서 유학, 불교, 도교는 각
기 종교적 목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호 간에 대립하고 충돌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교는 풍류의 실현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지니면서 삼교
는 서로 결합되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상세
하게 논의하겠지만, 원광의 세속오계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랑도는 풍류도를 근간으로 하여 유. 불.
도의 3교를 융합하여 나온 사상체계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긍정적
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 지닌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라
가 중국으로부터 유불도 삼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종교적 목적이기 보
22 民族文化論叢(第61輯)
다는 정치적 목적에 두었기 때문에 종교성보다도 현실성을 더욱 강조
하였다. 그래서 화랑도는 논리적인 체계화이기 보다는 실천적이고 현
실적이며 정치적인 면으로 기울었다고 평가된다.38)그래서 학문적 사상
적으로는 심화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화랑도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보다 우위에 처할 수 있었던 동인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유. 불.
도의 혼입으로 뚜렷한 국가이념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에 대한
신라의 우위를 드러내기 위해 고유 사상인 풍류를 중심으로 3교를 포
섭할 수 있는 사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
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화랑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Ⅵ. ‘접화군생’의 구현방법
위에서 화랑도의 이념이 풍류정신과 삼교의 융합에 있으며, 이러한
사유체계는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음을 논하였다. 화랑도의 ‘접화군생’
을 구현하는 방안은 그들의 수련 과정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래서 화랑도의 수련 방법을 통해 최치원의 ‘接化群生’의 의미와 ‘包含
三敎’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흥왕이 화랑도를 제정한 목적은 인재
등용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처음에 군신들이 인재를 알지 못해 근
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무리지어 놀게 하고 그들의 행실을 보고 이
를 등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니 "그 무리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잘 이끌
었으며, 五常과 三師六正이 널리 왕의 시대에 행해졌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의 인재등용은 특이한 환경을 강조한다. 청년들
38) 김영두(1979), 한국정치사상사 , 한국문화사대계 Ⅱ: 정치경제사상사(상),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편), p.36-40,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23
을 놀게 하면서 인재를 선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다는 것은 전통신
앙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장면은 부족연맹체의 “남녀가 모여 함께 노
래 부르면 즐긴다”는 풍속과 연결해서 보는 것이 더욱 선명하고 고대
민족을 이해하는데 더욱 친근감을 준다.39)이와 유사한 내용을 화랑의
수련 방식 즉, ‘遊娛山水’, ‘歌樂相悅’서 찾아볼 수 있다.
화랑도의 수련 과정은 당시 신라의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없는 상황
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신라의 공식적인 교육기관은 신문왕 때 국
학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라의 화랑제
는 민간의 화랑 무리 중에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제도이다. 그래서
국가가 화랑의 무리를 장악하여 조직하거나 규제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운영되도록 두었다. 사조직으로 종적으로나 횡적으로 연계가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도의와 기개는 다르지 않았다.40) 그들은 동일
한 세계관을 갖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몇 해 동안 함께 수련을 하기도
하였다. 최치원은 이러한 학습의 근원(說敎之原)은 선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면서, 풍류도가 교육의 근본임을 강조한다. 그들의 수련
방법 중에 ‘遊娛山水’, ‘歌樂相悅’은 분명히 전통 고유의 수련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풍류에 근거해 삼교의 수행 방법을 수용했다.. 화
랑도의 수련 방법에서와 같이 한국의 고유한 수련 사상이 결합되면서,
삼교는 더 이상 외래사상이 아니라 한국사상으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화랑도는 어떠한 사상적 토대에서 삼교의 수행법을 수용
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화랑은 공동체의식에 근거해 수련하였다. 그들의 수련방법인
‘道義相磨’, ‘遊娛山水’, 歌樂相悅’에서의 ‘相’의 의미가 혼자서 학습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상호 영향을 받으면서 수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한 사람의 화랑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 함께 전국 방방
39) 김충렬(1995), 신라의 조화정신과 삼교회통 , 화랑문화의 신연구,한국향
토사연구 전국협의회 편, 1995 pp.218
40) 김충열(1995), 위의 책, pp. 222
24 民族文化論叢(第61輯)
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종교적 체험과 도덕성을 함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무리는 삼국사기 동이전 에 ‘群聚’와 같은 장면을 연
상시키게 한다. 이병도는 화랑도, 원화도에서 ‘徒’의 개념이 두레조직
과 통한다고 주장하였다.41) 그리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전에
“마한 사라들은 서로 모두 徒라고 부른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전통 풍속은 공동적 의식을 강조한다. 이러한 고유 풍속에서 무
리의 풍속이 화랑도의 교육에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이 화랑의 이념에
는 현세에서의 공동체의 조화를 중시한다. 그래서 화랑도의 ‘道義相
磨’는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를 위한 도덕성 함양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가악상열’은 공동체 안에서 단결력을 강화하고 심미적 감성을 도모하
며, ‘유오산수’는 공동체의 발전과 구성원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자
연과 교감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이 화랑도는 공동체의 가치를 무엇보
다도 중시하였다. 화랑은 이러한 수련방식을 통해 애국심을 배양하고
임전무퇴의 정신을 지닐 수 있었다. 이는 화랑이 내세나 초월적인 세계
를 중시하지 않고 현실에서의 삶을 중시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화랑은 도덕성 함양을 위해 ‘도의상마’를 강조한다. 화랑도가 제정되
기 이전에 제천 행사에서는 신에 순종하는 행위를 강조하였지만 인간
의 행위, 공동체의 발전과 관련된 윤리체계는 부족했다. 하지만 삼교
사상이 유입되면서 개인이 주변 사람들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공
동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교육 방법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최치원이 <난랑비서문>에서 언급되어진 유가의 충효, 노자의 자연무
위, 그리고 불교의 교화를 수용하였다. 이런 道의 구체적인 덕목이 바
로 최치원 이전에 활동한 원광법사가 귀산에게 베푼 세속오계이다. 세
속오계는 순수한 철학이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세속에서 가능한 계
율이다. 즉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며, 효로써 부모를 섬기며 믿음으로
친구를 사귀며,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말고, 살생에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광은 중국에 유학하면서 유학과 불교에 깊은 조예를
41)이병도(1973), 한국고대사회와 그 문화(서문문고 11), 서문당, pp.20-43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25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불도 삼교 중에서 특정한 종교에 치우치 않고
신라의 특수한 환경에서 화랑이 필요한 덕목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학계에서는 세속오계가 불교의 연원에 기인하느냐 아니면 유교의
연원을 두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원광의 세속오계는
유교적인 연원도 불교적인 연원에 두고 있지 않다. 원광법사가 승려이
긴 하지만 그가 중시한 것은 바로 신라의 특수한 상황이다. 특히 삼국
의 전쟁 상황에서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는 덕목은 유교나 불교의 계
율이 아니라 임전무퇴이다. 이는 원광이 불교의 교리보다도 국가적 상
황을 더욱 중시하였다. 이러한 호국정신은 원광법사만이 아니라 신라
불교의 특성이기도 하다. 신라불교에서는 국가가 높은 위치에 있으며,
불교는 호국을 위한, 즉 군민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보았다.42) 이는 바
로 한국의 고유문화인 현실주의적인 태도와 연결된다. 원광의 세속오
계에서는 불교의 성스러운 교리는 약해지고 반대로 호국 정신이 강화
되었고, 화랑은 세속오계를 준수하면서 삼국통일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원광의 세속오계는 신라의 고유사상인 풍류와 삼교
가 융합된 형태의 계율이다.
화랑의 수련방식의 특징은 ‘유오산수’와 ‘가악상열’에서 찾을 수 있
다. 화랑은 노래와 춤을 통해 풍류정신을 배양하였다. 화랑이 노래로써
일반인에게서 존경을 받았다는 자료는 신라의 역사와 문학에서도 볼
수 있다. 화랑은 이런 수련과정에서 검술이나 여러 기예를 익혔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음악과 시가(詩歌)이다. 이는 당시의 신라 문
화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인다. 삼국유사에 “신라 사람들이 향가를
숭상한지 오래되었다... 이 때문에 때로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일
이 한번만이 아니다.”43)라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인은 노래
와 춤으로 천지와 귀신과의 접촉하였다. 이는 처용이 춤과 노래로 귀신
을 감동시키고 물러나게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42) 김충렬,
43) 삼국유사 卷5, 月明師兜率歌
26 民族文化論叢(第61輯)
화랑은 고유 행사로서의 가악에 이미 익숙하였고, 국가의 입장에서
도 이러한 가무를 통해 화랑 조직을 결속시키고자 하였다. 실제로 가무
는 너와 나의 간격을 좁히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기예라고 볼 수 있다.
부족연맹체에서는 음주가무를 통해 신과 인간을 연결시키고 사회 구성
원을 하나로 결집시키고자 하였다. 낙랑비서문 의 玄妙도 음주가무
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단군신화의 ‘한’사상은 음악과 춤이
중요한 방법이 된다. 화랑은 이러한 고유 신앙의 방식에 근거해서 그들
의 결속력을 다지고 국가를 위해서 충성할 수 있는 기개를 배양했다고
볼 수 있다. 화랑이 전시에 임전무퇴 계율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광분적인 행위를 하게 된 것은 외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화랑의 자발
적인 태도에 기인한다. 이는 그들의 죽음이 국가를 흥하게 하는데 기여
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며, 이는 자기희생을 자기의 것만으로
보지 않는 상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화랑은 가락상열과
유오산수를 통해서 타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공동체 발전을 갈구하
였다.
화랑집단의 수련 가운데에는 산천을 찾아 노닐면서 먼 곳까지 찾아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遊娛’는 단지 자
연의 경관을 감상하는 목적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도의를 배양하기 위
해서 행해졌다. 일반적으로 화랑 무리는 숲속이나 자연의 경치가 좋을
곳을 찾았는데, 그곳 대부분 고유 신앙에서 행하던 숭배의 지역이다.
이 지역은 대부분 산악지역이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태백산에 강
림하였음에서 알 수 있듯이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역으로 천신에
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러나 불교가 고유 신앙과 융합되는 과정에
서 많은 산악들이 부처 보살의 住處가 되었다 따라서 화랑집단의 遊
娛山水는 무교에 근거를 둔 성지순례의 의미만이 아니라 巫와 佛이 융
합되어진 수련 방법이다. 화랑이 전통적 수련 방법에 유학을 수용하면
서 명산대천만이 아니라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도의를 쌓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는 김응렴의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27
낭의 이름은 응렴이며, 나이 18세에 국선이 되었다. 20세에 헌왕대왕은
낭을 불러 궁전에서 찬지를 베풀고 물었다.” 낭은 국선이 되어 사방에 돌
아다녔으니 무슨 이상한 일을 본적이 있는가? 낭이 아뢰길 신은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 자이면서 겸
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자가 그 첫째이고, 세력이 있고 부자이면서 검소한
자가 그 둘째요, 본래 귀하고 세력이 있으면서도 그 위세를 보이지 않는 자
가 그 셋째이옵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44)
김응렴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민심을 살피면서 선행을 쌓는
모습을 담고 있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화랑은 이론 위주의 교육이 아
니라 보고 들으면서 배우는 교육임을 알 수 있다. 김응렴이 견학을 통
해 배우 세 가지 미행은 윗사람의 겸손, 부자의 검약, 특권층이 일반인
에게 낮추는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유오산수를 통해
화랑으로써 도덕적 덕목을 쌓고자 하였다. 이는 전통적 수련 방식에 유
교적 덕목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최치원이 화랑의 수련방식을 통해 포섭삼교의 의미를 구체
적으로 논의해 보았다. 화랑의 수련방식은 전통적인 놀이에 근거하면
서 삼교의 道義를 포섭하였다. 이런 방법을 통해 놀이와 도덕교육이
융합되어진 화랑의 수련방식이 창출될 수 있었다. 화랑의 수련방식에
는 놀이 활동과 같은 私的인 활동을 통해서 개인의 자아증진, 공동체
의식의 강화, 국가의 충성 등과 같은 도덕성을 증진할 수 있었다. 그래
서 화랑도의 수련방식은 신라 고유의 풍류사상에 근거하면서 삼교를
포섭한 형태의 수련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한국적인 교육모델로 평가될
수 있다.
44) 삼국유사, 권2, 48, 경문대왕
28 民族文化論叢(第61輯)
Ⅴ. 화랑의 현대적 의의
위에서 화랑에 대한 단군신화의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화랑의 기원,
이념 그리고 수련 방법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화랑도는 한국의 고유한
사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 연구에서는 사료의 부족으로 인
해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화랑에 대해 문
화사적인 접근이 필요로 한다. 논문에서는 단군신화의 관점에서 화랑
도에 접근해 보았다. 단군신화는 한국인의 정서와 사유체계를 담고 있
는 상징체계이다. 단군신화의 상징적인 의미가 화랑도에 일부 투영되
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
었다.
먼저 화랑도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단군신화와의 관련성을 논하였다.
화랑도는 화랑 이전의 원화제와는 구별해야 한다. 원화제가 한국의 고
유한 신앙체제에만 기반을 두고 있다면, 화랑도는 한국의 고유한 신앙
체제의 기반 위에서 삼교 (유교. 불교. 도교)를 포용한 사상체계임을 밝
혔다.
그 다음, 화랑도의 정신과 단군신화의 관계성을 논하였다. 화랑도의
정신을 풍류도와 삼교의 융합으로 이해하였다. 풍류도의 정신인 포용
성과 ‘접화군생’의 연원이 단군신화에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풍류도가 외래 사상을 수용해 한국적인 철학을 형성하게 된 문화주체
임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화랑도의 수련방식에서 풍류도와 삼교가 어떻게 융합되
어 있는지를 논의하였다. 화랑도의 수련방식에는 명산대천을 거닐면서
수련하는 방법과 음악과 춤을 수련하는 방법 그리고 도덕을 연마하는
수련 방식이 있다. 앞의 두 수련방식은 풍류적인 수련방식이라면 도덕
연마는 외래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화랑은 이 두 유형을 통합하면서 수
련하였음을 논하였다.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29
우리는 위의 논의를 통해 화랑도는 고유 사상만을 계승하거나 외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고유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삼교 사상을 수용해 형성한 사상이자 제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화랑정신에는 한민족의 정신세계일 뿐만 아니라 세계로 열려져 있는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화랑정신은 통일신라가 안정기에 접어
들게 되었고 화랑의 진취적인 정신이 발휘되지 못하면서 놀이문화와
방탕함에 빠져들게 되었고, 고려 중엽부터 외래문화에 밀리면서 그 사
상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고 풍류도가 한국인의 심성 속에서
살아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한 풍속은 우리의 잠재의식에 숨어 있
으면서 의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범부는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풍류도란 것은 어떤 집단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요, 어떤 명확한
경전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정신이 우리의 혈맥가운데 흘러 왔
을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의미로는 우리 민족이 수난과 실패의 역
사를 겪어 오면서도 오늘날까지 이만한 정신을 유지해 온 것은 풍류도정신
이 우리의 혈맥 가운데 흐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45)
김범부가 말한 것과 같이 풍류도는 현대인들에게 분명한 조직의 형
태나 경전을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풍류도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화랑도에 대한 문화사적인
접근을 통해 그 정신을 인식하고 고유사상과 외래사상과의 관계성을
정립함으로써 한국의 고유한 철학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45) 김범부(1981), 「국민윤리특강」, 화랑외사, 이문출판사, pp.232-233
30 民族文化論叢(第61輯)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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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2015년 11월 15일 투고 완료되어
2015년 12월 15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5년 12월 17일까지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 회의에서
게재 결정된 것임.
32 民族文化論叢(第61輯)
<Abstract>
Spiritual History Approach of Hwa-rang
-Focusing on the Dangun Legend
Kwon, Sang-woo
This study attempted to reinterpret the Hwa-rang from the perspective of
the Dangun Legend. The Hwa-rang code is recognized as a unique idea of
Korea. However, its essence has not been define due to the lack of specimens.
That is why this study attempted to approach the Hwa-rang cod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Dangun Legend. The Dangun Legend is a myth that
symbolically expresses the emotions and thoughts of Koreans. Therefore, the
symbolic meaning of the Dangun Legend may have partially been reflected in
the Hwa-rang code. Hence, this study discussed the following contents.
First, while tracking the origin of the Hwa-rang code, its correlation with
the Dangun Legend was discussed. It was stated that the Hwa-rang code
should be differentiated from Won-hwa prior to Hwa-rang. It was revealed
that if Won-hwa was based on a unique religious system of Korea, then the
Hwa-rang code was a system of ideas that included the Three Teachings
(Confucianism, Buddhism, Taoism) based on the unique religious system of
Korea.
Afterwards, the relationship of the spirit of the Hwa-rang code and the
Dangun Legend was discussed. The spirit of the Hwa-rang code was
understood as the integration of Poong-ryu-do and the Three Teachings.
Poong-ryu-do was discussed within the relationship of the Dangun Legend, and
화랑의 정신사적 접근: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33
that its spirit included inclusiveness and jeob-hwa-gun-saeng. It was further
discussed that such spirit of poong-ryu-do can include foreign ideas.
Lastly, it was discussed how poong-ryu-do and the Three Teachings were
integrated in the training method of the Hwa-rang code. It was explained that
the training method of the Hwa-rang code included traveling the great
mountains and rivers of the country to train, learning music and dance, and
training in ethics and morals. While the first two training methods were on
the appreciation of the arts, training in ethics was based on foreign ideas. It
was discussed that the Hwa-rang combined the two types for training.
Key Words: Poong-ryu-do. Dangun Legend. Hwa-rang. Jeob-hwa-gun-sa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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