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문화로의 회귀 - 檀君神話, 風流道, 巫俗의 세속화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2019. 8. 17. 10:07우리 역사 바로알기


단군문화로의 회귀| 민족문화논총

樂民(장달수) | 조회 68 |추천 0 | 2019.05.24. 10:14





단군문화로의 회귀
-檀君神話, 風流道, 巫俗의 세속화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권상우 *
<목 차>
Ⅰ.한국인에게 주체성은 존재하는가?
Ⅱ.한국문화심리의 원형:단군신화
Ⅲ.단군문화의 창조적 계승:풍류도
Ⅳ.단군문화의 왜곡:무속의 세속화
Ⅴ.단군신화로 돌아가자


<국문초록>
한국사는 외래문화의 수용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우리가 주체성을 지
니고 외래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하지만 한국사
에서 보면 외래문화를 맹목적으로 수용하였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이
러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단군신화의 심리체계를 살펴보았다.그리
고 단군신화에서의 민족성이 주체적으로 외래사상을 수용한 사례를 풍류도를
중심으로 논의하였다.풍류도의 원류는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에 근거한 것이
다.풍류문화에는 주체적으로 외래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주체성과 포용성을
지니고 있었다.그러나 이런 풍류문화가 왜곡되면서 노예의 문화로 전락하게
된 원인을 무속적 문화심리와 관련해 논의하였다.무속신앙의 어떠한 문화체
계가 외래문화를 수용하지 못하게 하였는지 살펴보고,그런 후에 한국문화가
주체적으로 외래사상을 수용하기 위해 단군의 문화체계로 회귀해야 함을 논의
하였다.


*계명대학교 교양교육대학.
4民族文化論叢(第55輯)


주제어 :민족 주체성,단군신화,풍류도,무속신앙,회귀


I.한국인에게 주체성은 존재하는가?
한국사는 외래문화의 수용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 를 재론하지 않더라도 한국사에서 유행하는 대부분 사상
은 외래에서 유입되었다.삼국시대에는 중국에서 사상과 문화가 유입
되었고,근대이후에는 서구에서 유입되어지고 있다.이러한 문화 수용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어느 민족도 자신의 고유한 사상만
을 고집스럽게 집착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불가능하다.중국도 인도불
교를 수용한 적이 있으며,서양도 동양문화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한국이 외래사상을 수입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평가할 필
요는 없다.그렇다면,문제는 외래문화를 얼마만큼 주체적으로 수용하
는가에 있다.하지만 한국의 외래문화의 수용과정은 그리 긍정적인 평
가를 받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신채호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석가가 들
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공자가 들어오면 조
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
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아!이것이 조선의 특
색이냐 노예의 특색이다.나는 조선의 도덕가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
려 한다.1)
신채호선생의 위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조선은 외래사상이 유
입된 이후에는 문화주체가 될 수 없었음을 비판하고 있다.인간은 스스
1)신채호 저,이만렬 주석, 주석 조선상고사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198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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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의 반성을 통해 자아를 인식할 때 주체성을 지닐 수 있다.하지만 조
선은 언젠가부터 타자와 자신을 혼돈하면서 민족의 주체성을 상실하였
다.그래서 신채호선생은 주의와 도덕은 있지만 주체는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도덕의 조선’,‘주의의 조선’이 되었다고 비판한다.이러한
민족 주체 의식의 결핍은 단순한 인식론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
니라 현실적으로 자유가 없는 노예 상태와 같음을 의미한다.그래서 우
리민족에게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외래문화는 늘 주인 행세를 하였다면,
우리는 그 외래문화를 추종하는 노예와 같았다.우리가 수용했으면서
도 말이다.이러한 노예의 역사에서 정신적 자유는 있을 수 없다.만약
우리 민족에게 자유가 없다면,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신채호선생이 주장한 바와 같이 한국인이 자유를 논하기 위해
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이러한 자기인식이 확
립될 때에 비로소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으며,신채호선
생이 말한 바와 같은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주체성을 지니고 외래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우리는 이를 위해서는 한국역사에서 어떠한 역사적 요
인에 인해 신채호선생이 비판한 바와 같은 ‘도덕의 조선’,‘주의의 조
선’이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한국 문화의 주체성을 어떻게 회
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이러한 물음에 풀기 위
해서 신채호선생의 설명을 참고해 볼 수 있다.
신채호선생은 그 유명한 <朝鮮歷史上一天年來第一大事件>에서
신라 진흥대왕은 유.불 양교를 수용하면서도 화랑도에 유.불.도 삼교
의 교지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고 하면서,화랑을 各敎의 위에 두었다.
최치원도 또한 孺,佛양교에 출입하는 동시에 화랑도의 대요를 섭렵
하면서,화랑의 지위를 유교나 불교보다 상위에 두었다.이러한 郞家
는 고려 중엽까지 그 맥을 잘 유지하다가 妙淸의 西京戰役의 역사적
대사건을 계기로 國風派가 유학파에게 밀리면서,조선의 역사는 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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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보수적,종속적 사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고 본다.2) 그는 묘청 서
경 전역이전에는 주체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수용하였지만,김부식이
유교사상을 부각시킨 이후에는 고유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본
다.그래서 우리는 한국문화의 주체성 상실의 문제를 묘청 이전과 이후
로 나누어 논의해 볼 수 있다.
신채호선생은 한국문화의 주체성 문제를 역사의 관점에서 논의하였
다.하지만 발표자는 한국인의 문화심리의 관점에서 접근해 볼 것을 제
안한다.인간의 심리는 선험적이고 생물학적인 요소로 구성될 수도 있
지만,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진다.그래서 인간의 심리는
환경의 영향을 배제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한국인은 추석명절에는
송편을 먹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원인 때문에
아니라 역사-문화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한국인의 의식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를 지니기도 하지만 한국인이
라는 문화적 유전자를 지니고 있기도 한다.동일한 개념과 사태라도 해
석자의 문화심리의 영향으로 인해 다양한 해석과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다양한 해석의 차이성은 각 민족의 문화심리의 차이에 기인한다
고 볼 수 있다.한국인의 문화심리에 주체성이 결여되었다면,결국 외
래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게 된다.그래서 우리가 외래문화를
어떻게 수용했는가는 한국의 문화심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신채호선생이 지적한 ‘주의의 조선’인가 아니면 ‘조선의 주의’인가는
한국인의 문화심리가 능동적인가 아니면 피동적인가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그래서 논문에서는 한국문화를 묘청 사건 이전과 이후의 문화체
계로 구분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그리고 전자의 문화를 ‘풍류적 문화
체계’로,후자를 ‘무속적 문화체계’로 설정하고 논의해 볼 수 있다.그
러나 두 문화체계는 모두 단군신화에 근원을 두고 있다.그래서 단군문
화가 왜 풍류적 문화로 전개되며,무속적 문화체계로 전개되었는지에
2)신채호, 丹齋申采浩全集 ,「朝鮮史硏究草」,<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
一大事件>,丹齋申采浩先生紀念社業會,1979,형설출판사.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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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문에서는 우선적으로는 단군신화의 심리체계를 논의해 보고자 한
다.일반적으로 신화는 민족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문화의 원형을
담고 있다.그래서 논문에서는 우선적으로 한민족의 원형인 단군신화
를 살펴보고자 한다.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이지만 그 의미는
그 시대에만 제한되지 않고 한국인의 심층의식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
다.그래서 단군신화의 분석을 통해 한국인의 고유한 주체인식이 있는
지,있다면 어떠한 주체의식인지를 논의해 보고자한다.
그 다음에는 단군신화에서의 민족성이 주체적으로 외래사상을 수용
한 사례를 풍류도에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풍류도는 단군신화에 근원
을 두면서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정신이다.최치원 또한 풍류
도 또는 현묘지도를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주체로서 언급하고 있다.그
래서 풍류도에서는 외래문화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수용하는지를 논의
해 보고자 한다.그러나 한국사에서 볼 때,한국문화에는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외래문화의 노예가 된 역사도 분명히 존
재한다.그렇다면,왜 이러한 노예의 역사가 되었는지에 관해서도 논의
해 볼 필요가 있다.그래서 논문에서는 이런 문화를 무속적 문화심리에
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그런 후에 한국문화가 주체적으로 외래사상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II.한국문화심리의 원형:단군신화
단군문화에서 외래문화를 수용한 주체성을 읽어낼 수 있을까?단군
신화는 韓민족의 원형이다.문화적 원형은 인간의 감각과 지각 그리고
행위를 결정짓는 문화심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문화심리는 역사
적인 과정에서 변할 수 있지만 그 원형은 변하지 않는다.그래서 한국
문화심리의 원형은 단군신화에서 찾아져야 한다.그래서 한민족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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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문화 수용 태도 또한 단군신화에서 찾아져야 한다.물론 단군신화에
서는 외래문화 수용에 관한 직접적인 사실은 찾아 볼 수 없다.하지만
특히 단군신화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주체적인가 아니면 피동
적인가를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단군신화를 이야기로 이해한다면,그 스토리의 주인공은 단
군임인 이의의 여지가 없다.실제로 단군상은 특정 인물의 특징을 설명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화를 단지 특정한 시대의 역사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옛날부터 민간에 전승되어지면서 시대에 따라 가공되어진
이야기로 이해한다면,단군신화에서의 단군상은 몇 천 년의 한민족이
염원과 이상을 담고 있는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그래서 과거 한국인
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군 존재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단군신화는 기독교 창세기와 반고의 신화의 천상계와 지상계가 분
리되어진 형태의 신화와는 달리,하늘과 땅이 결합되어진 형태의 신화
이다.단군신화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면서 인간
세상에 살고 싶어 지상계로 내려온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이에 관해
서는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의 뜻을 두고 인간세계를 탐하고자
하여(數意天下,貪求人世)홍익인간을 실현하기 위해서 3천명을 데리
고 신단수로 내려왔음에서 알 수 있다.이 구절을 통해 단군신화에서는
초월적인 신보다는 현실을 지향하는 신관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그리고 지상계를 상징하는 곰과 호랑이는 같은 동굴에 기거하며 사
람되기를 원하였다(願化爲人)고 기록하고 있다.지상계의 곰과 호랑이
는 환웅이 천상에서 내려온 것과는 반대로 질적인 변화를 통해서 인간
의 지위에 올라가고자 함을 바라고 있다.이와 같이 신이 아래로 내려
오려 하고,지상계의 동물이 올려 가려는 양자의 바람은 인간이라는 접
점에서 만나게 된다고 본다.이와 같이 천상계와 지상계는 각자의 위치
에서 소통을 지향한다.즉,이러한 양극단이 만나 융합되어지는데,이
단군문화로의 회귀 9
때 단군이 탄생한다.그래서 단군의 인간상은 상이한 존재가 하나로 융
합되어짐을 인간상을 강조하고 있다.
위와 같은 단군의 인간상은 최치원의 「낙랑비서문」의 ‘接化群生’에
서도 나타난다.즉 외물에 접하여 감화시킨다는 것은 외물과의 소통 또
는 융합되어진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단군신화에서 환웅이 인간
세를 탐하고 곰이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할 때 이때 바람은 환웅이
나 곰의 바람이 아니라 한민족의 염원이며,한국인의 문화심리라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이 한국인의 문화심리에는 소통을 지향하는 특징이 자
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단군신화의 소통은 ‘한’(韓,桓)사상과 분리될 수 없어 보인
다.이 때 ‘한’은 ‘크다’.‘높다’,‘전체로서의 하나’라는 의미를 내포하
고 있다.그래서 ‘한’은 하나(일)이며,그 하나는 바로 창조적 조화의 결
과물이다.여기서 창조적 조화는 결코 고유성을 부정한 방식의 통합이
아니라 양자의 고유성을 지니면서 융합되어진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한은 절대수의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융합의 의미를 지닌다.그러나 이러한 통일체에서는 각자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즉 소통하지만 고유성을 인정하고,고유성을 지니면서도
이질적인 존재와 소통해 융합함을 의미한다.그래서 단군신화에서 창
조적 조화(융합)의 신화라는 점에서 ‘한’신화라고 할 수 있다.3)
단군신화에서 창조적 소통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
로 자기됨을 의미한다.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사람이 되기 위
해서 자발적으로 동굴 안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생활하였다는 사
실에서 알 수 있다.곰은 이러한 생활을 통해 웅녀가 될 수 있었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해 동굴 밖으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다른 민족
신화에서는 대부분 인간은 자연 사물과 함께 신에 의해서 창조되어졌
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웅녀는 진화과정이나 신에 의해 창조되어
진 존재는 아니다.물론 하늘에 도움을 청하기는 하지만,그 의사선택
3)한국철학회, 한국철학사(상권) ,동명사,1987,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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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곰의 자발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4) 이와 같이 단군신화에서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질적인 변화를 추구함을 강조하고 있다.이러한 과
정은 정신적 자각을 의미한다.단군신화는 다른 신화가 육체적 생명을
창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신적 자각을 강조하고 있다.주체성이 자
발적으로 스스로가 됨을 의미한다면 단군신화에서 웅녀의 상은 분명히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그리고 단군신화에서의 주체성은 결
코 고립적인 형태가 아니라 바로 타인과 소통을 추구하는 소통주체성
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주체적인 인간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역경을 수반하지 않
을 수 없다.단군신화에서 천상계를 영성으로 지상계를 육체로 상징한
다면,영성은 타인과의 소통을 추구하는 성향이라고 한다면,육체는 오
히려 이러한 소통을 방애하고 자신에 집착하는 성향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영성이 소통을 추구하지만 육체의 이기적인 성향으로 인해 성
공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단군신화에서는 육체의 고립성을 극복하고
소통을 나아간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를 곰과 호랑이를 통해 드러내
고 있다.곰은 이러한 질적인 변화에 성공하지만 호랑이는 실패한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서 곰이 웅녀가 되는 과정을 보면,곰의 자발적인 선
택일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곰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환웅과 결합하여,즉 천상계와 소통하여 단군
을 탄생시키게 된다.그러나 단군신화에서 주인공은 곰이 아니라 곰과
환웅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단군이다.단군신화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단군을 통해 간접적으로나
마 알 수 있다.단군에게는 지상계와 천상계의 소통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단군신화가 한민족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면,한민족이 타인
과의 바람직한 소통을 추구하려는 염원을 단군신화에 투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단군신화에서 곰부족과 호랑이부족,
4)한자경, 한국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2008,30쪽.
단군문화로의 회귀 11
그리고 천상계로 설명된다.곰과 범을 숭상하던 부족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상계인 한반도 요동지방에서 거주하던 천상계가 곰과 범을
숭상하던 부족이 거주하는 곳에서 이주해 오게 되자 곰부족은 기존의
폐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그들과 결합할 수 있었다면,호랑이 부족은
결국 천상계의 부족과 융합되지 못하게 되어 멸망한 것으로 해석된
다.5)단군신화가 호랑이와 곰이 쑥과 마늘을 먹었던 동굴은 바로 죽음
이나 고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동굴은 곰이 죽고 웅녀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할 수도 있고,그 변화의 어려움을 동굴로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단군신화에서의 삶의 지향성은 바로 자신의
옛 모습을 버리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이
러한 이중탄생을 무속신앙에서는 자신의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고 자유
로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남으로 나타난다.단군신화에서의 웅녀와 같
이 폐쇄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자아로 재탄생하기 위한 과정
에서의 인내력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단군신화에서의 천신강림사상은 초월적인 존재를 숭배하기 보다는
현실지향적인 인생관을 말해주고 있다.일반적으로 신화는 신이 세계
만물을 창조하고 그 안에 다시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그
러나 단군신화에서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을 탐내고 지상계
의 동물들이 인간으로 변하고 싶다고 한다.이는 초월적인 천상계나 동
물계와 다른 현실지향적인 인생관을 반영한다.이러한 인간세계의 긍
정은 현실에서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그래서 단군신화에서는
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인간세계가 주인공이 된다.그래서 한국인
에게는 내세나 천당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 이 현실세계를 가장 중시하
였다.
환웅이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있으며,그리고 이는 바로
현실적인 삶을 긍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삶을 중시하는 단
5)권상우,「다문화시대의 단군연구」, 민족문화논총 ,영남대 민족문화연구
소.2012.참고.
12民族文化論叢(第55輯)
군문화는 다른 자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실제로 한국사에서 외래사
상을 수용한 목적은 종교적이나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와 민족 발전이라는 홍익인간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즉,종교와 철학 자체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 종교가
한국사회라는 맥락상에서 수용하였다.
한국인의 현실지향적인 삶을 중시하는 태도는 무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무속에서는 “무엇보다도 삶이나 생명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
식을 강조한다.살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것에 대한 싸움의 정신이 투철
할 때 살풀이는 삶의 자리를 튼튼히 보장해 준다.”6)이러한 점은 한국
인은 현실을 벗어나 내세에서 구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생활
에서 일상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삶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인식을 하
고자 함에서도 알 수 있다.무교에서 죽은 사람을 위한 굿의 목적도 결
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세에 남아있는 사람에게 재앙을
피하고 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에 있음을 통해서 무속은 현실적이고 인
간중심임을 알 수 있다.불교와 유교 모두가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서
유입되어졌다.초기 기독교도 또한 일제강점기 시대에 국권회복을 위
해서 수용되어졌으며,인문종교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인다.이
러한 의미 모두가 한국의 문화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서 삶의 가치는 바로 弘益人間,濟世理化에 두고
있다.단군신화에서 추구하는 정치이상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두고 있다.홍익인간의 정치이념은 단군신화가 형이상학적인 존
재의 물음이 아니라 바로 탁월한 정치신화를 가지고 있는 개국신화임
을 알게 해 준다.홍익인간은 일반서민들을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
게 해 주는가하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특징을 지닌 이념이다.이러한
홍익인간,제세이화의 정치이념은 단군신화에서 제시한 인간관을 전제
로 한다.그래서 홍익인간은 모든 존재가 각자 대립해 투쟁하는 폐쇄적
6)강현두, 한국의 대중문화 ,나남신서 43,도서출판 나남,1987,225쪽.
단군문화로의 회귀 13
인 사회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존재가 서로 융합해야 한다
는 정치이념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군신화에서 단군의 탄생과정에서 인간
존재는 천상계와 지상계의 융합되어진 형태로 탄생되었음을 알 수 있
다.그래서 단군신화에서는 인간존재의 본질은 다른 존재와 소통을 통
해 융합되어야 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이러한 융합은 인간
이 신에 의해 피동적으로 만들어진다거나 자연으로부터 저절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드는 주체의식에 의해 가능
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이러한 주체의식에 근거해서 타인
과 소통하고 융합하는 정치이상으로 홍익인간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I.단군문화의 창조적 계승:풍류도
신채호는 단군문화의 전승과정을 한국인의 역사이며 문화라고 주장
하면서,이러한 문화를 낭가(郎家)사상이라고 주장한다.신채가 조선
상고사 ?총론에서의 조선고대사는 “심적 활동의 상태”이라 하면서 고
조선의 단군문화가 부족국가와 삼국시대로 성장발전하게 된다.고조선
이후 부족국가가 등장하면서도 단군문화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부족국가시대의 민족제전 (영고.동맹.무천,소도 등)에서 단군문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의 위서 ,「동이지」에 보면 부여의 ‘영고’,고구려의 ‘동맹’,예
의 ‘무천’등의 제천의식은 봄,가을에 제사를 드리되 음주가무로서 종
교의례를 거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부족국가에서 제례는 집단의
염원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여 신의 강림을 염원하면서,신을 영접하
고,신에게 소원을 말하며 몇 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떡을 해먹고
술 마시며 노래와 춤으로 진행되었다.일반인들의 광란적인 춤과 끊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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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부른 노래는 제사장의 흥으로 인해 더욱 고조되면서 황홀경(엑시
타스)의 상태로 몰입시키는 역할을 한다.이러한 과정을 통해 강신체
험을 하게 된다.당시의 종교의례는 오늘날 무교의 종교의례에서 찾아
볼 수 있다.이러한 종교의례에서 춤과 노래를 통해 귀신과 하나로 융
합하는 강신체험을 하게 된다.이러한 의례를 문화적으로 체계화한 것
이 바로 ‘풍류’라 한다.이러한 문화체계는 현대 한국인에게 여전히
존재한다.7)
부족국가에서는 풍류를 통해서 신과 인간의 하나가 되고,인간과 인
간 사이의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하나의 영감으로 휩싸이게 된다.풍류
가 행해지는 영감 속에서 인간은 모든 대립을 극복하고 불안을 해소하
면서 강렬한 연대의식을 강화하게 된다.부족국가에서의 제전을 행하
는 목적 또한 단군신화에서 천신강림사상의 목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즉 부족국가에서도 단군이 환웅과 웅녀의 융합에서 이루어지듯이,신
과 인간의 이상적인 융합을 제례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이러한 종
교적 목적은 음주가무의 활동으로 달성된다.종교에서 음주가무는 그
7)한국에 온 유학생들에게 한류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설문조사를 한 적
이 있다.이 질문에 ‘역동적이면서 창의적인 기법’이라고 한 중국유학생들
이 가장 많았고,다음으로 ‘춤과 노래를 즐기는 생활태도’라고 한 유학생
들이 많았다.그들의 견해를 통해 한류가 발전할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한류의 주체들이 창의적이고,춤과 노래를 통해서 풍류를 즐기는 기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1).이것은 결코 한류의 주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
니라,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2000여 년 전 중국의 역사서인 < 삼국지 ,
「동이지」)>의 기록과도 일맥상통한 내용이다.<동이지>에는 우리 민족
을 춤추고 노래를 즐기는 민족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런 중국유학생과 동
이지의 기록은 비록 시간과 사회적 배경은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평
가는 동일한 내용이다.지금도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봄,가을에
명산대천을 찾아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고 끼가 넘치는 민족이라 할 수 있
다.이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오랫동안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중국동포들
도 우리의 노래와 춤을 잊지 않고 가무를 즐기며 미국 또는 유럽에서 대단
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는 동포들도 많다.(권상우,「한류의 정체성과 풍
류정신」, 동서철학연구 (43집),동서철학연구회,2007,340쪽.
단군문화로의 회귀 15
어떤 방법보다도 유용하게 신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
전히 해소해 준다.부족국가 제례에서의 음주가무 활동은 단군신화의
기록에는 빠져 있지만 한민족의 생활방식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
며,그 목적은 방탕한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과 융합을 도모하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풍류도는 고대 한국인의 모든 문화와 정신을 의미한다.풍류도는 한
민족이 외래 사상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삶을 지배하던 신앙이었으며,
적어도 한국의 고대사회에서는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외래사상을 수용한 주체적 능력이 되었다.이러한 문화적 토대
는 중국문화에 예속되지 않고 韓문화의 맥을 이어 갈 수 있게 한 동력
이었다.신채호 선생은 이러한 풍류도를 이념으로 해서 등장한 집단을
화랑으로 본다.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랑은 일시 신라 발흥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후세에 한(漢)문화가
발호하여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과 풍속,학술을 지배하
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하려는 판에,송도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서언이
아주 연멸하여 비록 직접적으로 그 감화를 받은 사람은 없지만,그래도 간
접으로 화랑의 유풍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자는
화랑이다.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하면 골을 빼
고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한가지인 우책이다.8)
신채호 선생은 조선을 조선되게 하는 민족의 얼을 화랑으로 보고 있
다.여기에서 말한 화랑은 인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韓민족의 정체
성로서의 화랑도 또는 풍류도를 말하고 있다.9)‘풍류’라는 용어는 삼
국사기 ?「진흥왕조」에 화랑제도의 설치에 관한 기록에도 보인다.하지
만 이 풍류가 외래문화의 수용에 관한 논의는 최치원의 「낙랑비서문」
에서 처음 볼 수 있다.최치원은 풍류도와 외래사상을 융합시키고자 한
다.최치원은 단군신화에서 강조되어진 소통의 문화심리를 ‘풍류’로 이
8)신채호 저,이만열 주석, 조선상고사 하,제8편,형설출판사,1983,321
9)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연세대학교,1997,44쪽.
16民族文化論叢(第55輯)
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최치원의 낙랑비서문 에서 풍류를 현
묘지도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실로 유불
도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많은 사람을 접하여 교화한다.예를 들어,들어오
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며,무위에
처하여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이며,여러 악을 짓지 않
고 여러 가지 선을 봉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10)
위와 같이 최치원이 언급한 풍류지도 또는 현묘지도는 단군신화의
정신이며 외래문화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주체
로서 언급되어지고 있다.현모지도는 원융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외
래의 여러 사상적・종교적 요소가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상호 갈등과 대
립을 일으키지 않는 점이야말로 풍류사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그는
풍류를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보다도 독특한 성격을 지닌 이상적인 모
델로 설명하면서,현묘지도로 표현하고 있다.즉,하나이면서 여럿일
수 있고,여럿이면서도 하나인 상태는 비논리적인 사유이지만 현실성
을 가지는 오묘하다는 의미에서 현묘지도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풍류는 바로 외래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소지와 그 가능성을
확인해 주는 우리의 고유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11)이와 같이 최치원
은 고유사상인 풍류를 유교,불교,도교의 상이한 외래문화를 융합할
수 있는 주체의식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인다.12)
10) 삼국사기 권4,진흥왕 37년(576)조 “國有玄妙之道,曰風流,設敎之源,備
詳仙史,實乃包含三敎,接化群生,且如入則孝於家,出則忠於國,魯司寇
之旨也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周柱史之宗也,諸惡莫作,諸善奉行,竺
乾太子之化也
11)고운국제교류사업회 편찬(2010), 고운 최치원의 철학.종교사상 ,도서출
판 문사철,42쪽.
12)신채호는 김춘추,최치원,김부식을 사대모화의 화신으로 비판하였다.(신
채호, 조선상고사 ; 단재 신채호 전집 (개정판 상권,형설출판사,1995,
73쪽)신채호 자신도 화랑,풍류는 모두 단군문화에서 전개되어진 문화임
단군문화로의 회귀 17
풍류사상을 실천한 조직이 바로 화랑이다.화랑의 활동 가운데 현묘
지도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원광법사가 화랑 귀산(貴山)과 취항(箒項)에
게 전해준 세속오계를 들 수 있다.세속오계에는 유교와 불교적 항목이
병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고유 신앙과 불교,유교,도교의
융합되어진 흔적은 화랑의 일상생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삼국유사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760년 경덕왕 19년 4월 경자 초하루에 두 개의 해가 함께 나타났다.열
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자,일관이 인연이 있는 승려를 초청하여 악귀를
쫓고 부처를 공양하는 산화공덕을 행하면 두 개의 해가 나타난 변괴를 물
리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뢰었다.....이 때 월명사가 천백시의 남쪽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왕이 사람을 시켜 월명사를 불러와 단을 펼치고 기도를
드릴 글을 짓게 하였다.그러자 월명사가 “신승은 단지 국선의 무리에 속
해 있어 겨우 향가만을 이해하고 있을 뿐 산화공덕을 위한 불경을 읽는 것
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13)
위의 인용문에서 승려와 화랑의 구분 자체가 모호해 보인다.당시
화랑집단에서는 승려가 화랑을 지도했다고 한다.또한 화랑 김유신의
무리를 世人이 ‘龍華香徒’라고 불렀다고 하고,화랑 竹旨郞의 탄생설
화에 미륵이 등장하였다고 하며,진지왕 때에 흥륜사의 승려 眞慈가
항상 堂主미륵상 앞에 나아가 大聖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기원했다는 미륵 仙化의 이야기 등은 화랑도와 미륵신앙
과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 준다.
그리고 화랑과 유교의 관계를 알 수 있다.최치원은 <大崇福寺碑
文>에서 金膺廉이 “처음 玉鹿에서 이름을 날리고 한편으로 玄風을
振作시켰다고”예찬하였다.여기서 ‘玄風’이란 화랑으로서의 활동을
을 강조하고 있다.하지만 신채호가 보기에 최치원이 풍류도에 근거해서
외래문화(유불도)를 수용하는 태도가 한민족의 혈종주의문화를 훼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13) 삼국유사 ,권5감통.
18民族文化論叢(第55輯)
말하며,‘玉鹿’이란 유교를 가르치던 교수직을 가리킨다.김응렴은 漢
文學과 유학에 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랑으로도 활동하였다고 한
다.신라시대 화랑 중에는 김응렴과 같이 유교와 무교적인 성향을 모두
지니고 있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화랑사상에서 도교의 영향을 받은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화랑의
대장을 칭하는 ‘國仙’이나 풍류를 설명하고 있는 ‘玄妙之道’는 모두 도
가.도교의 개념이다.화랑에서 仙의 의미가 비록 도교와 같지는 않지
만,화랑과 도교의 신선사상은 모두 무속적 요소의 매개에 의해 쉽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그리고 도가의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는 소유유의 정신이 화랑의 ‘유오’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이
와 같이 화랑사상에는 도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이 단군신화가 지니고 있는 개방적인 문화는 분명히 주의 깊
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한국문화가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융합할 수 있을 때 신채호가 강조한 ‘한국의 유교’,‘한국의 불교’,‘한
국의 도교’가 될 수 있다.그래서 이능화는 단군을 고조선의 개국시조
이자 동이족의 군장으로 이해한다.그리고 그 단군을 숭배한 신교는 유
불도가 수입되기 전에 고유종교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며,그 이후에는
외래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문화적 기반의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이와 같이 통일신라시기에는 단군문화에 근거해 외래문화
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였을 최치원의 풍류사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최치원의 「낙랑비서문」에서의 ‘接化群生’의미 또한 반드시 고찰해
보아야 한다.‘접화군생’은 모든 생명과 접촉하면 이들을 감화시킨다는
의미이다.이 접화군생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정신에서 유래
한 것으로 보인다.위에서 언급한 최치원의 ‘實內包含三敎接化群生’
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최치원이 삼교를 포섭한 목적은 바로 ‘접
화군생’에 있음을 알 수 있다.그가 말한 유교의 忠孝論,도교에서의
自然無爲論,불교의 善惡論은 삼교의 정수이다.최치원이 이러한 삼교
의 정수를 함께 논하거나 원광법사가 세속오계에서 유교와 불교의 덕
단군문화로의 회귀 19
목을 함께 논하고 있다.우리가 철학이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논한다면
상이한 종교덕목이 함께 논해질 수는 없다.그러나 우리가 현실적인 목
적을 해결을 목적으로 한다면,모든 종교에서 필요한 덕목을 뽑아내어
사용할 수 있다.그래서 최치원이 말한 삼교나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는
접화군생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그래서 삼국시대에 중국
으로부터 유불도 삼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종교적 목적이기 보다는 현
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 더욱 중요하였다.그래서 풍류도
의 이데올로기적 조직화는 논리적인 체계화이기 보다는 실천적이고 현
실적이며 정치적인 면으로 기울었다고 본다.14)신라시대 풍류정신의
현실지향적인 태도는 바로 단군신화의 ‘홍익인간.제세이화’를 계승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화랑도에서는 심미적 의식을 매우 중시했다.단재 신채호 선
생의 글 중에서 “미모의 화랑을 취했다”에서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신라국기에서 말하기를 ‘귀인의 자
제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서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
라 이름 하였다.”15)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랑에게서 외형적인 아름다
움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화랑은 외형적인 멋뿐만 아니라
내면적이 멋도 중요시하였다.이런 내면적인 멋은 종교행위를 통해서
신과 사람이 융합될 수 있는 상태를 내면의 즐거움(황홀감)에 빠진 상
태라고 말한다.현실생활에서 멋에는 서로 호흡이 맞는다는 뜻에서 조
화와 어울림의 개념이 들어 있다.주어진 환경에 조화되지 않을 때 사
람들이 ‘멎적어 한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그래서 화랑이 추구한
조화는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간의 조화로운 상태를 미적 의식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단군문화가 외래 사상이 유입하면서 대한 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사
상이 바로 풍류도와 화랑도이기 때문이다.한민족은 풍류도를 통해
14)김영두, 한국정치사상사 ,한국문화사대계 II,36-40쪽.
15) 삼국사기 .「신라본기」
20民族文化論叢(第55輯)
“원시무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삼교를 받아 들여 무교의 기복적 신앙을
도의에 의한 인격적 가치의 세계로 승화시키고 신령과의 만남의 수단
인 음주가무의 종교의례를 인생과 예술과 자연으로 융합하였다.”16)이
런 풍류정신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수행을 해야 한다.교육 방법
으로 도의로써 몸을 닦고(相磨道義),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기며(相
悅歌樂),명산대천을 찾아 노니는 것(游娛山水)이다.도의로써 몸을 닦
는 것은 바로 군생을 교화시키는 것(인생)이며,기악으로서 군생을 교
화시키는 것은 풍류를 터득하기 위한 것이며(예술),명산대천을 찾아다
니는 목적은 신령과의 교제를 위한 것(자연)이었다.이러한 방법으로
풍류정신을 지닌 사람을 화랑이라 한다.이런 풍류도는 바로 융합적 주
체,이를 실현하기 위한 예술문화 그리고 정치제도가 어울러져 있는 문
화체계로 볼 수 있다.그래서 이러한 풍류도는 자신의 문화체계에 근거
하면서도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실현하고자 하였다.이러
한 풍류정신은 신라의 중심사상으로써 삼국통일을 가능하게 한 동인으
로 언급되어진다.범부 김정설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신라미술특색은?또 기타 종종문화의 특색은?도대체 어디서 어
째서 유래한 것인가 이것을 먼저 알기 쉽게 규정한다면 물론 신라의 국민
성에서 또는 그 시대성에서 혹은 그 풍토성에서 혹은 그 시대의 사회적 성
격에서 이러한 윤곽을 그리기로 할터이다.그러나 이것은 그저 눈을 그리
기는 했어도 그 동자를 빠트린 것이다.그러면 그 동자는 바로 뭣이란 말인
가?이것이 곧 이상에 약술한바 그 시대의 중심문화란 그것이다.그리고 그
시대(신라)의 중심문화는 곧 신라고유의 종교사상인 풍류도란 것이다.(풍
류도의 정신은 물론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에도 연원을 같이한 동류
의 신앙이 있었지만 이건 추후로 하고)그러면 풍류도란 도대체 어찌된 것
인가?17)
김범부는 신라의 다양한 문화현상 즉,정치,제도,문학,예술,음악
16)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23권,「풍류」,628쪽.
17)김범부,「풍류정신과 신라문화」, 한국사상 3,1960,372쪽
단군문화로의 회귀 21
등의 다양한 문화들은 유물로 통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이러
한 신라의 모든 문화에서 관통하고 있는 신라의 중견사상은 무엇인가
에 대해 범부는 풍류도로 보고 있다.그래서 신라 화랑정신은 단순한
역사적인 토대에 기초해야 하지만 그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사상
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범부는 이러한 중견사상을 풍류로 보고
있다.
IV.단군신화의 왜곡:무속의 세속화
신채호 선생은 풍류문화가 고려 중엽까지 전승되어졌지만 그 이후
에는 외래문화에 밀려나 자취를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한다.그리고 그
는 그 이유를 김부식이 유교문화를 한국의 주류문화로 삼았던 사건에
서 찾는다.한국사의 전개과정을 들어다 보면,신채호선생의 주장은 상
당히 설득력이 있다.김부식이 한국의 역사를 중국사관으로 기술하면
서 풍류문화는 주변부 문화로 전락하게 되면서,풍류문화는 더 이상 주
류사상이 되지 못했다.풍류문화가 더 이상 주류문화가 되지 못한 이유
는 김부식의 중화주의 역사관을 수용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한
국인의 문화심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여기서 한국인의 또 다른 문화
심리에 주목해 보자.우리는 이를 위해 무속신앙을 살펴볼 필요가 있
다.일제강점기 일부 학자들은 한국의 정체성을 무속신앙에서 찾아져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최남선은 ‘不咸文化論’에서 한국문화의 원형으
로서 무속을 들고 있으며,18)유동식 또한 “한국문화의 地核은 무교이
다”고 보고 있다.풍류문화가 한국역사에서 사라지면서,한국인의 문화
심리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종교가 바로 무속이다.그리고 이러
한 무속은 종속성을 특징으로 한다.무속의 종속성이 한국인의 문화심
18)최남선, 육당 최남선전집 ,2권,서울 현암사,1971참고
22民族文化論叢(第55輯)
리에 영향을 미치면서 외래문화를 맹목적으로 수용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그러면 무속신앙이 어떻게 한국인의 심리에 자리 잡게 되었
는가?이를 위해서는 우선 단군문화와 무속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신화에서 고조선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한다.이
시기는 정치와 문화가 분리되지 않는 제정일치 사회로 알려져 있다.그
래서 단군은 바로 군주이자 제사장의 신분으로 천신과 인간을 잇는 역
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단군신화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역사적인 사
실에 부합한다.그리고 당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례는 국가차원에
서 시행되었고,군주가 바로 제사장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그
리고 그 제례방식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음주가무의 방식 이었으
며,제례목적은 천신강림을 통한 홍익인간의 실현에 있었다고 볼 수 있
다.이러한 제례는 부족국가 시기의 영고,동맹,무천 등으로 그리고 풍
류문화로 계승되어졌다.실제로 신라시대 화랑 이전에 원화는 국가제
례를 주도하는 제사장이다.19)진흥왕은 이 제사장을 여자에서 남자로
바꾼 것이 바로 화랑제의 실시가 된다.그리고 당시의 국가제례는 부족
국가의 방식에 근거해서 시행하였다.
고대사회의 제례방식은 무교의 굿에서 찾아 볼 수 있다.이는 조선
시대에는 이북지방의 무사를 단골로 불렀다고 하는 등에서도 알 수 있
다.이 명칭에서 단군문화와 무속과의 연관성을 알 수 있다.그러나 단
군문화와 무속의 근본적인 차이는 부족 차원의 제례이었는가 아니면
사적인 차원에서의 제례인가에 있다.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군문
화에서 제례는 분명히 부족 또는 국가 차원에서 공적인 목적을 위한
종교제례이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외래문화를 수용하였지만,국가
의 종교제례는 전통적인 방식에 의해 거행되었다.하지만 고려 이후에
19)정운룡,「신라 화랑제 성립의 정치사적 의의」, 화랑문화의 신연구 ,경상
북도,1995,137쪽.
단군문화로의 회귀 23
는 전통적인 방식의 국가제례가 사라지고 유교 중심의 전례가 시행되
었다.하지만 전통적인 국가제례는 민간의 사적인 종교의례로 정착하
면서 한국인의 문화심리에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속의 종교의례는 부족국가의 종교의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다만 그 종교전례의 목적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즉,
부족국가와 신라시대의 무속의 종교의례는 국가의 이익과 발전을 위함
에 목적을 두었다면,무속신앙은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그래서 무속의 문화체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속신앙 또한 신 자체의 숭배에 목적을 두기 보다는 ‘현재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인간의 삶에 초점을 두고 있다.무교에서 죽은 사람을 위
한 굿의 목적도 결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세에 남아있는
사람에게 재앙을 피하고 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에 있음을 통해서 무속
은 현실적이고 인간중심임을 알 수 있다.무속은 삶에 있어서 저해하는
요소가 생길 때 살이 끼었다고 한다.이런 살을 풀어서 그것을 물리쳐
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삶을 저해하는 것들에 충분한 인식이 필요하
다.그러므로 무속에서는 “무엇보다도 삶이나 생명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강조한다.살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것에 대한 싸움의 정신이 투
철할 때 살풀이는 삶의 자리를 튼튼히 보장해 준다.”20)이러한 점은 한
국인은 현실을 벗어나 내세에서 구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생
활에서 일상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삶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인식을
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이러한 무속도 단군신화와 같이 현실지향적인
태도를 취한다.하지만 단군신화나 부족국가에서 종교의례의 목적을
결코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문제를 다룬다.
무속에서의 인간은 삶의 존재,즉 현세지향적인 존재이다.무속에서
는 죽음을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그들의 모든 가
치의 기반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사람의 입장에 놓여 있다.그래서 무
속의 교리는 모두가 살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이며,이 욕구를 ‘祈福’이
20)강현두, 한국의 대중문화 ,나남신서43,도서출판 나남,1987,225쪽.
24民族文化論叢(第55輯)
라 할 수 있다.무례의식의 모든 절차는 궁극적으로 많은 복을 얻고,삶
을 여유롭게 하고,그 삶을 파괴하고 복을 잃게 할 가능성이 있는 위협
과 재앙을 막자는 목적이 그들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교에서는 한을 풀기 위한 굿을 하는 가운데 절정에 이르면
신과 무당과 신도가 혼연일체의 상태에 빠지게 해 준다.모든 것이 뒤
죽박죽인 상태로 혼연일체가 되어 섞이게 된다.이런 무질서의 상태는
굿하는 현장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그래서 무교는 한 마디로 난장
판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정도로 비일상적인 구조,즉,무구조적,반구
조적 상태를 가지게 된다.그래서 무속의 가치체계는 앞에서도 이미 언
급한 바와 같이 이성적 차원에서의 논리적 사고나 합리성만으로는 쉽
게 파악될 수 없다.무속의 대표적인 의례인 굿에서 알 수 있듯이,무속
에서는 비논리적인 귀신의 세계와 의지를 당연히 인정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 또한 그들의 도움에 의해서 해결하고자 한다.그래서 현
생의 살아있는 사람들의 행위 자체가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귀
신의 세계에서 의지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진다.무속에서 이 세계는
‘믿음’과 ‘체험’의 체계를 통해서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이상,현실
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고 있지는 않다.이와 같이 인간이
신과 만나서 융합되어져야 한다는 점은 단군신화와 유사해 보이지만,
무속신앙이 전적으로 신에 의지하는 것과는 달리 단군신화에서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을 강조한다는 점이 다르다.
무교의 종교의례에서는 무당이 춤과 노래를 통해 몰입의 단계에 이
르러 脫我의 상태에 놓여야 신령이 빙의해 귀신과 하나가 됨을 이루는
것이다.물론 무당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성대한 제상을 차려냄으로써
신도들의 종교심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신령을 만나고 신도들의 종교심
을 고양시키는 방법은 바로 즉흥적인 음악과 강렬한 춤을 가장 애용한
다.이런 춤과 음악을 통해 무당은 자신만이 아니라 신도들을 몰입의
상태로 몰아넣는다.실제로 우리 민족은 몰입에 익숙한 민족이다.그래
서 우리 문화에는 한번 무엇이 좋다고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또한 술
단군문화로의 회귀 25
을 마셨다 하면 2,3차 마시면서 취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셔서 너
도 잊어버리고 나도 잊어버리는 忘我境상태까지 가야만 술을 마셨다
고 말한다.이런 몰입성은 개인뿐만 아니라 종종 집단적으로 몰입하기
도 한다.이러한 몰입성은 자칫하면 극단으로 치우쳐 버리는 경향을 가
지게 된다.무속은 바로 이런 파격과 몰입을 통해서 신도들을 재앙에서
복으로 창출하게 한다.이와 같이 무속에서는 자아를 해체하지만 단군
신화에서는 오히려 상호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단군신화와 무속과 같은 형태의 문화체계임을
언급한다.그러나 같은 형태의 문화체계이지만,무속에서는 개인의 주
체성을 해체하면서 인간의 주재능력을 약화시킨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
다고 본다.무속은 풍류와 같은 전통정신을 대체하면서 한국인의 의식
과 행위를 지배하고 있다.이러한 문화심리체계는 외래문화를 무비판
적이며 충동적인 태도로 외래문화를 수용하게 하였다.이러한 심층심
리는 전통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에도 서구의 문화를 무비판적
으로 수용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그러면서 외래문화까지도 자신
에 포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유동식은 또한 한국문화의 심층
의식으로서 무속을 들고 있다.그는 무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한국문화의 地核은 무교이다.외래문명을 받아들이기 전에 한국에는 억
압 없이 무교가 노출되어 있던 때가 있었다.이것이 바탕이 되어 외래문명
들을 받아들이고 문화지층을 형성하게 했다.그러나 한편 지각은 차츰 무
교를 억압하기 시작했다.이조 오백년 사이의 유교와 근대화의 물결을 몰
고 온 서구문명이 오늘날 지표를 형성하자 무교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하
여졌다.뜨거운 원초기의 무교에 접촉했던 불교는 그 속에 적지 아니 용해
되어 상당부분이 동질화되기도 했다.그러나 무교는 겹겹이 쌓이는 지각의
봉쇄와 중압에 못 이기어 지하로 물러나고 한국문화의 표면으로부터 사라
져 가고 있다.
하지만 무교는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다.민중문화의 저변을 흐르면서
地核을 형성하고 있다.한국문화의 심층에서 여전히 그 에너지를 발휘하고
있다.우리들의 행동양식을 결정할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적지 않게 지배하
26民族文化論叢(第55輯)
고 있는 것이다.21)
유동식교수는 무교에 대한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한국전
통사회에서의 외래문화를 수용한 문화주체가 바로 무교라는 점을 지적
하고 있다.조선시대에 유교철학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근대에는 서구
문화로부터 탄압을 받기는 했지만 현대 한국인들의 가치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한국인들은 무속적 문화심리체계로
인해 집단이기주의,배타성 물질만능주의 등의 태도에 물들어져 있다
고 본다.이러한 무속문화의 심리체계는 외래사상의 원래 정신을 왜곡
시켰다.불교가 한국에 유입되면서 기복적인 불교로 발전시켰다.그리
고 조선의 성리학의 전개 과정을 보면 무속적 문화심리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즉 조선성리학의 배타성,종속성,형식성 같은 양상
은 결코 성리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의 문화심리가 유학의 탈
을 쓰고 나타난 양상일 뿐이다.차인석교수 또한 무교의 한국자본주의
의 원동력은 결코 서구의 건전한 프로테스턴트 윤리가 아니라 쾌락적
이기주의라 단정하고,그 토양은 무속적 기복신앙이라고 분석하였다.
우리의 경우 6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됨과 동시에 산
업화를 통하여 빠른 경제성장을 하였다.그러나 시민사회에서 요구하
는 자아의식은 성숙되지 않았고 오히려 쾌락주의에 젖은 이기심이 경
제행위의 동기가 되어 버렸다.이것이 기생하는 토양은 또 수천 년 묵
은 기복신앙적 의식구조였다.한국의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턴트 윤리가
아니라 무속신앙적 의식구조와 행위였다.이 무속적 신앙의식은 다른
종교에도 다 스며 있다.심지어 근대에 들어온 기독교에도 스며져 있
다.이것은 일종의 종교 본래의 성스러운 것에의 귀의가 아니라 물신숭
배인 것이다.이 물신숭배는 현대 자본주의의 소비지향과 강한 친화력
을 지니고 있다.22)
21)차인석,「탈전통의 문화 ;그 방향에 대한 철학적 성찰」,한국철학회편, 문
화철학 ,철학과 현실사,1995,14쪽.
단군문화로의 회귀 27
‘무속적’이라는 용어는 아직 덜 근대화되어 합리성이 부족하다는 의
미를 암시하고 있다.그래서 그는 “탐욕에 의한 경제 동기는 주문자 방
식의 제조업에는 유리하지만 고도의 경제행위는 불가능하다.무속적
신앙은 노동 없이도,또 정당한 대가 없이도 잡신의 은총으로,또 나의
기도로 복이 온다고 믿기 때문에 고도의 생산성에 요청되는 합리적 조
직과 관리를 할 수 없다.”23)라고 하였다.이와 같이 그는 무교는 단지
욕망에 근거한 이기주의적 토대에 근거하면서 합리성과 도덕성을 결핍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한국의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무속에서 찾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한국문화가 단군문화 이후에 외래문화를 무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도덕의 조선,주의의 조선이 되어 버린 직접적
인 문화적 동인은 바로 무속신앙에 의해 형성되어진 문화심리에 있음
을 알 수 있었다.
V.단군문화로 돌아가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인의 주체성의 결여는 무속신앙과 밀
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논의하였다.그래서 한국인이 주체적으로 외래
문화를 수용하기 보다는 맹목적으로 수용하고,수용 이후에 그 외래사
상에 몰입하면서 사상의 종속성 식민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민족은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우선
무속의 문화심리 자체를 개조하지 않을 수 없다.더욱이 우리의 문화심
리에 대한 반성 없이 외래문화를 맹목적으로 수용할 경우에는 외래문
화의 우수성까지도 훼손시킬 수 있다.그래서 우리는 무속의 문화심리
를 반성해 보고,단군문화와 풍류문화에서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22)위의 책,14쪽.
23)같은 책,같은 곳.
28民族文化論叢(第55輯)
중요하다.
오늘날 한국인의 문화심리는 무속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물론 단군문화.유교,불교,서양문화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적극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하였
으며,세계문화의 집결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우리는 이러한 개방
성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신채호선생이 한국인의 외래문화 수용
에 대해 비판하기는 했지만 외래 문화를 수용하는 사실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그리고 이러한 외래문화의 수용은 단군문화의 다양성과
융합성이라는 문화심리에도 부합된다.그래서 외국문화를 수용하기 이
전에 한국인,한국사회 나아가 인류의 문제가 무엇이며,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상과 문화를 고려하는 등 주체적으로 수
용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태도 없이 맹목적
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한다면,그 외래사상은 공허한 이론적 담론에 불
과하거나 외래문화의 본질 자체도 왜곡시켜 버릴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무속신앙의 문화체계를 비판적으로 접근했다고 했어
무속신앙의 문화심리 전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수많은 학자들이 지
적한 바와 같이 무속적인 문화 심리는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다.현재
의 우리 모습 전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한국문화심리에 내재해 있는
이기심.종속성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이를 위
해서는 우리는 단군신화로 되돌아가 한국인의 문화심리를 반성해 보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앞에서 언급한 바와 무속신앙과 단군신화는 동일
한 뿌리에서 나온 문화체계이다.현대 한국인의 문화심리에서 필요한
요소는 단군신화에서의 홍익인간과 타문화와 소통하고 융합할 수 있는
영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다.이를 위해서 홍익인간의 덕목을 각자의 삶
의 원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24)이와 같을 때
한국인의 문화심리가 더욱 건전해 질 수 있다.건전한 문화심리에서 외
24)정용환,「한국인의 정체성과 홍익인간의 이념」, 단군학연구 (제6호),단군
학회,2002,146쪽 참고.
단군문화로의 회귀 29
래문화를 수용할 때 ‘조선의 공자’.‘조선의 석가’.‘조선의 플라톤’,‘조
선의 기독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0民族文化論叢(第55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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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2013년 11월 25일 투고 완료되어
2013년 12월 20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3년 12월 20일까지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 회의에서
게재・결정된 것임.
32民族文化論叢(第55輯)
<中文摘要>
檀君文化的回歸-對于韓國文化心理的批判的接近
權相佑
韓國史是外來文化的受容史. 韓民族不能否定具有主體性受容外來
文化.但是從韓國史來看,不能否定盲目地受容了外來文化的事實.爲
了糾明這種歷史的事實,要試圖論議檀君神話的文化心理體系.而且
要論議把風流道看作是檀君神話的文化心理主體地受容外來文化的事
例.風流道的原流在于檀君神話的弘益人間.風流文化具有主體地受
容外來思想的主體性和包容性.但是,這種風流文化轉落于奴隸文化
的原因和巫俗的文化心理有關係.所以,論了巫俗信仰的任何的文化
體系不能受容外來文化.然後,爲了韓國文化主體地受容外來思想,要
回歸于檀君文化體系.
關鍵詞:民族主體性,檀君文化,風流道,巫俗信仰,回歸

 



                                                           단군문화로의 회귀

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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