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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에서 평민까지… 풍류도의 힘으로 신라 발전·통일 기여한 화랑들
홍성식기자
등록일 2019.08.29 20:05
게재일 2019.08.30
풍류도(風流道)
신라의 청년들을 찾아서 ⑨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무열왕릉. 신라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왕릉이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풍류도’를 중심 이데올로기(또는 복합적 신앙체계)로 학습해 활동한 화랑들은 6~7세기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풍류도가 가진 어떤 힘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삼국사기’와 ‘화랑세기’ 등 고문헌은 “화랑 가운데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도 여기서 생겼다. 무열왕(武烈王·김춘추)과 경문왕(景文王)도 화랑 출신이었다. 신라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는 화랑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사다함과 김유신처럼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제사를 받들거나, 향가(鄕歌)를 짓는 등 예술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뤄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족사상학회가 발행한 정경환과 이정화의 논문 ‘풍류도의 내용과 의미에 관한 연구’는 풍류도가 “우리 민족의 뿌리 사상”이며, “단군사상을 기원으로 하여 이를 보다 체계화하고 현실화한 우리의 고유한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덧붙여 풍류도의 성격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성 △조상에 대한 신성사상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원대한 생명주의와 평화적 원융사상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무애(自由無碍)의 길 추구 등 4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이 논문에선 풍류도가 신라사회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고, 나아가 한민족의 핵심적 전통사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까지 드러난다. 아래 간략하게 요약한다.
“풍류도는 우리의 시조 사상인 홍익인간을 기초로 당시 어떤 사상보다 인간을 본위로 하는 심오한 사상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대자연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인간을 넘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원융하고 자연스러운 사상의 발로다. 상생과 조화론에 근거한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도 풍류도의 특징이다. 풍류도의 근저에는 적극적 평화에의 염원이 스며있다. 덧붙여 풍류도 사상은 조화주의를 지향한다. 갈등과 긴장을 거부하고, 화해와 융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풍류도 특징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상생·조화론에 근거한 평화주의 표방
*풍류도 사상
조화주의를 지향하며
갈등·긴장을 거부하고
화해·융합을 강조한다
◆ 풍류도와 벗하여 탄생한 화랑들은…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제3권 ‘신라의 체제 정비와 영토 확장’은 “인간을 본위로 하는 심오한 사상성”을 가진 풍류도를 교육 시스템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인 화랑의 탄생과 구성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독특한 청소년 조직으로서 국가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화랑도의 기원은 삼한사회의 연령집단에서 찾을 수 있는데, 화랑도의 군사 훈련과 산천 순례 활동 등이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판단된다. 화랑도 창설의 목적은 당시의 시대적 과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군사 인력을 비롯한 다양한 인재의 양성과 확보에 있었다…(중략)
화랑도의 구성원은 대부분 15~18세까지의 청소년들인데, 화랑과 낭도의 신분이 서로 일치하지는 않았다. 화랑집단의 중심인물인 화랑(국선·풍월주)은 낭도의 추대를 받아 선출되었으며, 진골 귀족 출신이었다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중략)
화랑도는 진골 귀족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왕경 안의 여러 신분·계층을 포괄한 조직체로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갈등과 알력을 어느 정도 완화·조절해 사회통합에도 이바지했다고 판단된다.”
신라의 화랑들은 ‘유교·불교·도교를 망라한 넓은 차원의 이념 체계’라 할 수 있는 풍류도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다고 다수의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논문 ‘풍류도의 내용과 의미에 관한 연구’ 역시 “원융하고 자연스러운 사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풍류도의 사상적 해석 범위가 좁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추정과 논지가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느껴진다면 화랑을 포함한 당대 청년들이 지향할 바를 구체화시킨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세속오계’는 화랑들이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기여하는 방법을 명문화한 행동지침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화랑도 교육에서는 물론이고 그것이 퍼져나가 사회생활 일반에서 요구된 기본 정신 전반은 대체로 ‘세속오계’로 말끔히 정리되었다.
‘세속오계’는 진평왕대의 승려 원광(圓光)이 중국 유학을 끝낸 후 돌아와 청도의 한 사찰에 머물 때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몸 닦기를 희망하는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라는 두 젊은이가 찾아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도리를 요구하자 이에 응답해서 주었던 내용이다.”
◆ 신라사회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된 ‘세속오계’
대부분의 독자가 알고 있겠지만, ‘세속오계’의 주요 내용은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다. 여기엔 당시 신라의 지배층이 젊은이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요약돼 담겼다. 이 책에 따르면 ‘세속오계’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물론, 신라사회 일반에서 지켜야 할 덕목으로 빠르게 확산됐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속오계’를 화랑도 구성원들만의 실천 덕목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에 의하면 “화랑도 조직을 거친 성원들의 철저한 실천적 행위를 통해 (세속오계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진 탓으로 그렇게 인식되었을 따름”이라는 것.
사실 화랑이 지켜야 할 덕목이 ‘세속오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 중 기본’으로 ‘세속오계’를 받들어야 했고, 동시에 당대의 신라가 요구하는 다른 여러 덕목도 체화(體化)했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측한다. 그처럼 기억하고 준수해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 화랑과 낭도들의 삶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을 듯하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화랑 집단의 융성기는 진흥왕(재위 540~576)에서 문무왕(재위 661~681)에 이르는 1세기 사이였다. 화랑 제도는 신라 말기까지 이어졌고, 그 기간 화랑의 숫자도 200여 명에 이른다.
김태준의 논문 ‘화랑도와 풍류정신’은 “화랑은 선택받은 젊은이의 집단이었고, 나라에 크게 쓰이도록 훈련받은 청년들의 무리(낭도)였다”며 화랑과 낭도가 중점적으로 교육 받은 게 어떤 것일지 추정하고 있다. “화랑과 그 무리는 영예에 걸맞은 교과로 훈련받았다”는 전제를 달고서다.
이 논문은 3가지를 지목한다. △도의(道義)로 서로 연마한다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긴다 △산천을 찾아 노닌다는 게 바로 그것. 이는 ‘삼국사기’가 풍류의 도(道)를 설명하는 방식과도 맥이 닿아 있다. 보다 상세하게 알아보자.
무열왕릉에 있는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 현재 비의 몸돌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았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풍류도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김태준은 화랑도와 풍류의 제1정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결국 화랑의 도의, 곧 풍류의 핵심은 공자가 가르친 충효의 정신과 노자가 가르친 무위와 말없음의 정신, 아울러 석가가 가르친 선을 받들어 행하는 정신을 두루 갖추어 가진 것”이라고. 이어서 이런 부연을 내놓는다.
“‘도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연마하는 것이며, 이야말로 화랑도·풍류도의 첫 번째 덕목이요, 가르침을 베푼 목표였다.”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김’을 ‘도의’와 쌍벽을 이루는 화랑의 정신 교과였다고 쓰고 있는 ‘화랑도와 풍류정신’. 여기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이어진다. 화랑들이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노래와 춤만을 즐겼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
“화랑의 풍류에서는 노래와 춤을 서로 즐겼다고 했지만, 상고로부터 제천의식과 국중대회(나라가 주관하는 대규모 제천행사)에서 연일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는 것은 즐기기보다 먼저 하늘에 제사하고 신과 일체를 이루는 신내림의 체험을 중시한 것이다. 그 풍속은 무속에서 보이듯이 노래와 춤으로 신에게 제사 드리고, 이를 통해 신과 인간이 하나로 일체를 이루는 체험이었을 것이다.”
신라 당대의 화랑과 낭도들은 노래와 춤이라는 형식을 통해 ‘신내림’을 체험하면서 스스로가 풍류의 주체가 되는 경험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춤과 노래란 일반적인 유흥이 아니라, 신령한 것들과 교감하는 방식이었던 게 아닐까?
화랑의 마지막 교과로 김태준이 제시하는 건 ‘산천을 찾아 노닒’이다. 이 역시 단순히 좋은 경치를 즐기며 희희낙락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랑들에게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일종의 수련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화랑도와 풍류정신’도 이를 감안한 듯 아래와 같이 덧붙이고 있다.
“국토 순례는 화랑과 풍류도의 실천교과였다. 명산대천의 산신을 숭상하는 신앙적 순례이며, 자연사상과 국토사상의 수련이며, 말할 것도 없이 신체 수련의 노닒이기도 했다. 자연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신비감을 동시에 가져다줌으로써 원시적인 토속신앙이 발생·발전하는 곳이다.”
신라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로 바뀌는 과정에서 화랑들은 작지 않은 몫을 해냈다. 이들 화랑의 실천·지도 이념이었던 풍류도를 연구하는 것은 신라의 권력 이동과 사회 변화 과정을 탐색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임이 분명해 보인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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