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종대 율관제작

2013. 8. 13. 00:44율려 이야기

 

세종대(1418~1450) 율관제작

조화된 음악을 얻으려면, 악기가 바른 성음(聲音)을 낼 수 있어야 하고, 악기가 바른 성음을 낼 수 있도록 조율되려면, 율관이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세종대왕이 아악정비에 뜻을 두고 악기제작을 명하자, 박연(朴堧, 1378~1458)은 먼저 해주의 거서(:기장)로 고설(古說)에 의거하여 황종율관을 제작했으나, 그 소리가 중국의 종(鐘)ㆍ경(磬)보다 약간 높으므로, 1427년(세종 9) 4월경 기장모양을 따라 밀납을 녹여 조금 큰 낟알을 만들어 황종 율관을 만들었다.
1낟알을 1분으로 삼고 10낟알을 1촌으로 하여, 9촌을 황종 길이로 삼고, 원경(圓經)은 3분(分) 4리(釐) 6호(毫)의 법을 취하여, 해죽(海竹)을 잘라 만들고, 밀납으로 만든 기장 낟알 1천 2백 개를 관(管) 속에 넣으니 진실로 남고 모자람이 없었으며, 중국의 종ㆍ경 및 당피리의 황종 소리와 서로 합치되었으므로, 이 관을 삼분손익하여 12율관을 만들었다.
1427년(세종 9) 5월에 박연이 바친 편경은 바로 이 율관으로 조율하여 만든 것이다. 세종은 중국에서 보내준 편경과 새로 만든 편경을 율관에 맞추어 보게 하고는, “중국의 편경이 과연 잘 조화되지 않고, 새로 만든 편경이 맞는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은 것이 이미 하나의 행운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뜻밖에 율관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해보기까지 하니, 매우 기쁘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연의 산물인 기장[黍]을 쓰지 않고, 밀납으로 기장 형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황종 율관의 양(量)을 쟀다는 점이 만족스럽지 않았으므로, 1430년(세종 12)에 박연은 또다시 자연산의 기장을 써서 율관을 제작했다. 기장을 재배하여 세 등급으로 나누어, 각각 기장 1200낟알이 들어가는 관을 만들어, 그중 중국의 황종과 합치되는 것을 택하는 방법을 썼다.

당시 박연은 ‘역대(歷代)로 율관을 만들 때 기장으로 기준을 삼았으므로 일정하지 않아, 성음의 높낮이도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인데, 오늘날 중국의 율이 오히려 참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기장이 도리어 참된 율을 얻을지 어찌 알겠사옵니까?’라며, 중국의 황종율에 맞추지 않고 독자적으로 만들 여지도 있음을 언급했지만, 바로 뒤이어 ‘율관과 도량형을 만드는 일은 천자(天子)의 일이고 제후국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중국의 황종에 합치하도록 율관을 만드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라고 아뢴 것은 황종관에서 도량형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한 문화권에서 도량형이 서로 다르면 혼란스럽게 되므로, 황종관을 독자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황종율관으로부터 도량형을 만든다는 것은 황종관을 만사(萬事)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니, 황종율은 단순한 음고(音高)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한편 대로 만든 율관은 추위와 더위에 쉽게 감응하여 볕나고 건조하면 소리가 높고, 흐리고 추우면 소리가 낮아지므로, 1430년(세종 12) 경에 기후의 영향을 덜타는 구리로 율관을 만들어 음을 맞추기도 했다.

 

출처 : 몽마르카부덴의 오름산책 & 젓대소리
글쓴이 : 몽마르카부덴 원글보기
메모 :

 

 

 

   

 영동 난계국악박물관의 12황동율관

 

blog.daum.net/cbkb21/16907321  다음 카페 <생명과 태양의 땅 충북> 자료 중에서 발췌 ......

 

 

 

 

Ⅳ. 예술 > 1. 음악 > 2) 아악의 부흥 > (2) 세종대의 율관제작과 악기제조| 한국역사

낙민 | 조회 9 |추천 0 | 2015.11.11. 12:57

(2) 세종대의 율관제작과 악기제조

 

 세종대의 아악부흥은 올바른 율관제작 및 악기제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율관제작은 음악이론의 근본이었고, 악기제조 중 편종과 편경의 제작은 아악부흥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세종 7년(1425) 경기도 南陽에서 磬石을 발견하고 해주에서 기장의 발견477)은 음악사적 관점에서 보아 획기적인 사건들이었다. 왜냐하면 기장이 올바른 율관제작에 필수적인 낱알이었고, 또 아무리 올바른 율관이 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경석이 없으면 편경의 제작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초 율관제작과 경석의 발견은 앞 시대와 구분하는 기준의 하나로 삼을 수 있다.

각주
  • 477) ≪世宗實錄≫권 59, 세종 15년 정월 을묘.

 

cafe.daum.net/jangdalsoo/ZNcD/555   장달수

 

 

 

 

[스크랩] 율관제작| ...............국악토론방

깨참 | 조회 143 |추천 0 | 2006.03.02. 21:47

출처 : http://jongmyojeryeak.culturecontent.com/index.asp

 

율관제작

   율관(律管)이란 동양에서 음을 조율하는 데 사용했던 ‘소리 관’으로, ‘pitch pipe’ 라고 보면 된다. 세종 시대 이전에는 이미 조율되어 있는 중국의 편종 · 편경 등을 구입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율관을 제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종 7년(1425) 남양에서 편경의 재료인 소리나는 돌 경석(磬石)을 발견하고, 같은 해 해주에서 율관제작에 필요한 기장 생산도 확인하여, 편경제작의 현실성과 이를 뒷받침할 율관제작의 필요성이 함께 대두된다. 즉 율관제작은 편경제작의 실현을 위한 보조장치로 요구된 것이다. 그렇다고 율관에 내재된 의미가 이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율관의 출발은 황종율관이다. 황종은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양률(陽律)과 여섯 개의 음려(陰呂) 중 첫 번째 양률의 이름으로, 가장 낮은 음이며, 기준이 된다. 율려란 중국과 우리나라의 ‘음악음’을 통칭한 것이며, 구체적으로 황종 · 대려 · 태주 · 협종 · 고선 등의 명칭이 있다. 서양에서 도 · 레 · 미 · 파 · 솔 등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황종율관에 의해 황종율이 탄생했으니, 황종율관은 율려의 척도인 것이다.

   음률과 관련된 황종척 이외에도 주척(周尺) · 포백척(布帛尺) · 영조척(營造尺) · 조례기척(造禮記尺) 등 다양한 척도가 존재했는데, 이러한 척도들은 곧 도량형(度量衡)의 기준과 관련되어 있다. 황종율관도 척도이므로 자연스럽게 도량형과 연결하니, 여기에 바로 황종율관의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도량형은 길이 · 면적 · 부피 · 무게 등을 측정하는 단위법이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후 단행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도량형의 통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그 중요성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된 각 단위 길이를 비교한 수치는 "황종척 1자 = 주척 0.66자 = 영조척 0.899자 = 조례기척 0.823자 = 포백척 1.348자"이다. 황종척은 세상살이의 표준점을 세우는 그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궁궐의 안과 밖 그 너머에서까지 통용되는 각종 단위와 상호관련성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표층적으로 조율의 기능, 심층적으로 도량형과의 관련성이란 의미론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황종율관이다. 따라서 세종대 박연을 중심으로 진행된 율관제작은 대단한 관심을 모았다.



   세종 시대 당시 참고할 만한 중국 역대의 음악관련 문헌에는 다양한 율관제작법이 언급되어 있었고, 남아있는 편종·편경의 황종음고도 각각 달라 일정한 기준을 마련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박연은 가장 고전적인 방법을 택했다. 기장 90개를 쌓아서 얻은 (한 알의 폭을 1푼(分), 열 알의 길이를 1촌(寸)으로 삼음) 9촌 길이의 황종을 구하려 한 것이다.

박연은 율관제작을 3차에 걸쳐 진행하였다. 1차는 세종 7년(1425) 해주에서 생산된 기장으로 실험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중국에서 보내온 것보다 황종음이 조금 높았던 것이다. 기장의 크기는 생육과정의 조건에 의해 차이가 나기 마련인데, 이러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차는 두 해 뒤인 세종 9년(1427)에 시도했다. 그러나 이 때에는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태종 때 명나라에서 보내온 중국 편경의 황종음에 맞춰 황종율관을 만들고, 이것을 기준으로 삼분손익(三分損益)하여 12율관을 제작했다.

삼분손익이란 고대 중국에서부터 사용되어 온 음높이 산출법으로, 삼분손일법(三分損一法)과 삼분익일법(三分益一法)을 교대로 적용하여 음을 얻는 방법이다. 삼분손일법은 글자 그대로 일정한 기준에서 1/3을 빼는 것이고, 삼분익일법은 1/3을 더하는 것이다. 1/3을 가감한 수치를 피아노 음 ‘do’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뺀 경우는 ‘sol’이 파생되고, 더한 경우 ‘한 옥타브 낮은 sol’이 나온다. 현이 짧으면 높은 음이, 반대로 길면 낮은 음이 울리는데, 특히 1/3이란 수치는 완전 5도 혹은 완전 4도 정도의 차이를 나게 한다.

삼분손익법 : 삼분손일법(1/3을 뺌) + 산분익일법(1/3을 더함)

do ------------------------> sol(완전 5도 높은 음) ; 삼분손일법 활용
do ------------------------> 한 옥타브 낮은 sol(완전 4도 낮은 음) ; 삼분익일법 활용

이러한 원리에 의거하여 기본 율관인 황종율관을 삼등분하여 1/3 만큼을 자르거나 길게 하여 12종류의 율관을 만들었다. 9촌인 황종율관을 3등분하여 그 1/3을 빼면 6촌이 남으며, 6촌 길이의 율관에서 나오는 음은 황종보다 완전 5도 높은 임종이 된다.

이번에는 6촌 길이의 임종을 3등분하여 그 1/3을 더하면 8촌 길이의 율관이 나오는데, 임종보다 4도 낮은 태주가 된다. 이러한 원리로 삼분손일과 삼분익일을 반복하게 되면 결국 12개의 율관이 산출된다. 500여 년 전 박연이 사용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고 거서(秬黍)*에 의해 표준음고를 얻는 고전적인 방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박연은 2차 율관제작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거서의 수와 길이가 황종율관의 음고에 부합하는 성공을 얻었다. 이론과 실제를 합치시킨 것이다.

박연의 율관제작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중국의 고전적인 방법을 빌어 썼다는 점에서 의혹을 살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전을 곧 우리의 고전으로 동일하게 여겼던 시대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비난할 일만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중국에서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겼던 낡은 관념에 도전하여 세상의 좌표를 새로 마련하려 노력한 박연의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을 긍정적으로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 거서 [秬黍] : [식물] 빛깔이 검은 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