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 / 동서고전 200선 해제 [반덕진]

2019. 12. 12. 17:38우리 역사 바로알기



동서고전 200선 해제 [반덕진]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


 

한국사상의 원류

   한국사상의 원류가 되는 고대사상으로서는 상고시대의 원시신앙 과 단군신화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 민족의 윤리관·가치관의 형성과 구체적인 생활양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애니미즘·토테미즘·샤머니즘 등의 우리 원시신앙은 고대 부족국가 확립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당시 씨족사회의 생활윤리규범을 제공하였고,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공동체 의식과 전통문화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원시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천인합일의 통일적 세계관과 홍익인간이라는 인본주의가 그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한민족은 고대에 형성된 우리 고유사상을 기반으로 유··3교와 서양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켜왔으나, 여기서는 불교 와 유교 를 중심으로 우리 사상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불교의 전래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경으로,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한창 발전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사회는 이미 씨족공동체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초부족적인 상태로 변해, 씨족사회의 무속신앙이나 조상숭배 사상만으로 새로운 고대 국가의 사회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따라서 불교라는 고등종교가 전래됨으로써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게 하여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불교의 전래는 종교로서의 교리나 의식만이 아닌, 음악·미술·건축·의학 등의 문화의 전파까지 수반하는 것으로, 중국뿐 아니라 인도나 중앙 아시아의 문화도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고대 문화를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불교가 삼국에서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372), 백제 침류왕 1(384), 신라 법흥왕 14(527)이다. 고구려에서 초기에 받아들인 불교는 중국에서 노장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려 했던 격의불교였다. 예를 들면 불교의 공을 노장사상의 무로 해석하려 했다. 그 뒤 문자왕 때에 이르러 불교 교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중관계의 삼론종이 주류를 이루었다. 영류왕 때 일본에 간 혜관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는 중국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주로 율종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백제의 겸익성왕 때 인도에 직접 가 소승불교의 논과 계율 관계의 경전을 가지고 와, 그중 율부를 번역백제 율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에서는 이외에 열반종·삼론종·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했다.

신라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까지 문화수준이 가장 낮고, 고대국가의 성장도 늦었지만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고대국가의 체계를 정비하고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왕실과 밀착되어 상호이용의 관계를 가지고 국가적 후원 속에 확장되었다. 신라의 초기불교는 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의 승려 혜량 진평왕 때 망명하여 최초의 국통이 되었다. 그뒤 원광은 중국에 유학해 불교를 널리 섭렵하고 돌아와서 세속오계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유학 이해는 조예가 깊어 세속오계 속에 반영되고 있다. 이는 당시 삼국통일을 앞두고 신라사회가 요청하던 사회적 질서·윤리를 불교의 권위를 빌어 제시한 것이다. 그 다음 자장 대국통으로서 신라불교의 제도적 발전과 국가의 사상적 통일에 기여했다.

 

통일신라

   삼국통일을 전후해 신라불교는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경전을 수입하고 교설을 소개하는 데 그친 이전의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독자적인 교학 발전단계로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체로서 그것을 실현한 후보다 넓은 세계관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삼국통일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의 높은 교학 수준을 널리 섭취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있었다.

 

1.원효

   한편 그 당시 인도와 중국 등 동아시아의 불교계는 대립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1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 즉 석가 입적 후 1000년 인도 대승불교 철학에 발생한 공·유 의 대립, #2(출세간의 진리(세간의 진리)의 차별 문제였다. 여기서 공 空이란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는데, 중관학파는 공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유식학파는 공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대립하였다. 이 두 학파의 대립을 인도에서 해결하지 못하자 이 과제가 중국과 한국의 불교계에 넘어왔는데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원효다. 원효대승기신론소에서 대립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일심 一心을 바탕으로 한 화쟁사상으로 화합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한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는 일심이문론인데, 이 두 가지 문이란 진여문(중관학파)과 생멸문(유식학파)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대립한 듯 보이지만 일심(중생의 마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기 때문에 둘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이론에 입각해 세속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원리를 제시하고, 나아가 불교의 실천운동에 힘썼다. 그는 당시 신라불교가 주로 왕실이나 귀족 지배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일반민중과 유리되는 모순을 통찰해, 초탈한 행동으로 정토 사상을 통한 불교의 대중화에 전력하였다. 원효의 사상은 당시의 중국에 수출되어 법장·징관 등에 영향을 주어 중국 화엄학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2.의상

   그와 동시대의 인물인 의상은 원효와는 달리 유학해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을 배웠다. 그때 화엄일승법계도를 짓고, 신라로 돌아와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실천적인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며, 원효의 경우와 같은 방대한 불교사상 체계나, 혹은 지엄의 문하에서 비길 만한 학문적 업적은 없다. 그는 법장의 이론적 태도와 구별되게 실천수행에 주력하여, 지엄의상에게는 의지, 법장에게는 문지의 호를 주었던 것이다. 의상의 이러한 경향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신라 화엄학의 특징을 이룬다.

   의상과 그의 제자들의 실천 중시 경향은 신라 화엄학의 이론적 발전에 한계가 되어, 새로 대두된 선종의 공격을 받게 되는 나말여초에 이르러서는, 균여로 하여금 다시 지엄이나 법장 등의 중국 화엄학을 재발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의상이 뒤를 이어 화엄종을 하나의 종파로서 크게 발전시켰다. 이는 원효가 제자를 양성하지 않아, 고려대에 와서 의천에 의해 추앙되기 전까지 그의 사상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화엄종은 신라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종파일 뿐만 아니라 이후 줄곧 교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3.원측

   화엄학과 더불어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은 유식학이다. 원측은 어려서 당에 가서 유식이론을 배우다가 후에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자, 그에게서 호법 계통의 새로운 유식이론을 배우고, 유식학의 주요경전의 주석에 힘썼다. 현장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규기와 토론을 벌일 때면 몰려든 스님들로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측은 법상종의 정통을 자처하던 규기와 그의 제자 혜소 등에 의해 이단시되어 배척당했다. 따라서 원측의 유식학은 중국에서는 계승되지 않고 신라에 전해져, 원측의 제자 도증이 귀국하면서 태현·경흥 등의 유식학자가 배출되었다.

 

선종의 전래

   신라 하대로 들어오면서 불교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성립된 것이다. 원래 선종이 들어온 것은 통일 이전부터였다. 즉 달마시대를 제1조로 삼는 중국 선종이 6조 이후 남,북종으로 갈라지기 전에 4조 도신의 선이 신라의 승려 법랑에 의해 전해졌으며, 이어 북종선이 신행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나 선종이 신라에서 크게 유행해 종파로 성립된 것은 821, 남종선의 법을 도의가 귀국하면서 전한 때부터이다. 그후 계속해 홍척, 혜철, 무염, 도윤, 현욱, 범일 등 당에 유학했던 선승의 귀국과 더불어, 마조 문하의 여러 선풍이 각각 전래되면서 국내 각처에 선종 사찰이 세워져 선종 거점을 이룬 것이 이른바 구산선파이다. 통일 후의 신라불교는 화엄학과 유식학을 중심으로 교학면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고대국가의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있었을 때 그 지배체제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종은 교종의 기성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유방식을 극복케 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대두는 당시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세적인 지성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선승들은 대개 육두품 출신으로 지방호족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사원을 중심으로 거대한 장원을 형성하였다. 특히 나말여초의 선승들은 대부분 왕건에게 후삼국통일의 이념을 제시하고 나아가 왕건과 지방호족을 연결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학의 전래

   한국에 유학이 전래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위만조선의 성립과 한사군의 설치를 계기로 해서 한자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으니, 이때 한문문화의 핵심인 유교사상도 함께 전래된 것으로 추측한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해나감에 따라 행정문서 및 외교문서 작성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고,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한문에 능통한 유학자들을 관료로 채용했다.

 

삼국시대

   고구려에는 태학이라는 국가교육기관에서 유학자를 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태학박사 이문진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에도 박사 고흥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유학사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정도의 집단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늦게 유학을 신라에서는 불교로 사상통일을 이루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유교적인 덕목이 상당히 강조되었는데, 원광의 세속오계에 보이는 충효에 대한 강조와 임신 서기석에 보이는 충도에 대한 연마, 그리고 진흥왕 순수비에 보이는 자신의 내적 수양을 통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라는 구절 등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신라에 본격적으로 유학이 채용된 것은 신문왕 2(682) 국학이 설치되면서부터인데, 아찬 이하의 한정된 관직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골품제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닌, 학문에 기준을 둔 관리가 일부에서나마 탄생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당시의 유학자로서는 강수설총이 있었는데 모두 문장에 뛰어났고, 유교적인 의리를 강조한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설총(화왕계)를 지어 군주의 도덕적 수양과 신하의 군주에 대한 참된 충성을 설파하여 당시의 유학이 전제왕권의 확립에 직접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유학자들은 모두 육두품 출신이라는 계급적 특성을 지니는데, 당시의 진골귀족들이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던 불교사상에 대해 충효라는 사회적 윤리규범을 내세워 왕권과 결합,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신라의 유학사상은 왕권과 육두품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기구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다. 원성왕 4(788),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채용된 국학 출신의 유학자들은 인 仁이라는 보편적 원리를 근거로 한 국왕의 자애와 신하의 충성이 조화된 유교적 전체주의를 신라하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상정하고 지방호족의 할거에 따른 혼란을 충효라는 윤리의 확보에 의해 수습하려 하였다. 반진골, 반호족적인 입장에서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경향은 최치원, 김운경, 김가기 같은 도당 유학자들에게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당의 빈공과에 합격한 후 중국의 역사책에도 이름이 오를 정도로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자부심과 유학자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그들은 시부책을 올리는 등 유교적인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호족세력의 발흥으로 말미암은 왕권 약화, 골품제의 한계 등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고려시대

 

, 교의 대립발전

   신라하대 선종이 새로 성립되면서 시작된 59의 사상적 대립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게다가 화엄종 내에서도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선종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과 연결된 채 심한 분열상을 나타냈다. 고려 광종은 불교계 혁신을 위해, 당시 불교계를 교종과 선종으로 양립시키고, 교종은 화엄종 중심으로, 선종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법안종을 중심으로 통일하려 했다. 균여를 통해 화엄종단을 통합케 하고, 화엄종의 교리를 재정리하게 했다. 균여는 중국의 초기 화엄학을 재검토해, 중국의 지엄, 법장, 신라의 의상의 저서에 대해 주석을 썼다. 균여는 당시 교종의 2대 주류인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을 융회하는, 이른바 성상융회 사상을 폈다.

 

천태종

   광종은 법안종을 후원함과 더불어 중국 천태종에도 유의해, 제관은 중국에 들어가 <천태사교의>를 지어 침체되었던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고, 의통중국 천태종의 제13가 되었다. 이처럼 광종 때의 교선통합 천태종과 법안종이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서 추구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개혁정치는 다시 보수세력에 의해 무산되고, 법안종이나 천태종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지 못했다. 다만 그 융합사상은 뒤에 의천의 천태종 개창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100년 뒤 왕자 출신 의천은 불교계에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는 보수적인 귀족불교를 법상종이 융성하여 화엄종과 양립하였고, 따라서 선종은 제3종단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때 화엄종과 천태종측에서 등장한 의천은 법상종을 통합하고, 나아가 선종까지도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교관겸수 敎觀兼修와 지관 止觀을 중시한 그의 교선통합은 교리적 발전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농후하여, 그가 죽자 천태종은 곧 쇠퇴하고 선종은 다시 독립하였으며, 화엄종은 균여파와 의천파로 분열되었다.

 

조계종

  이후 얼마 안되어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고려 불교계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선종의 부흥(조계종의 성립) 과 신앙결사운동의 전개로 요약된다. 지금까지 왕실의 보호를 받던 교종세력은 무신정권에 반발하였고, 이로 인해 무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 대신 의천 이후 침체해 있던 선종세력이 최씨정권과 제휴함으로써 새로이 대두하였다. 이는 신라 말에 선종이 호족들에게 환영받았던 사실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계종의 세력을 크게 떨친 승려는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지눌의 사상은 돈오점수 敦悟漸修와 정혜쌍수 定慧雙修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돈오),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하며(후 점수), 이 수행에 있어서는 정, 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정혜쌍수)는 것이다. 지눌의 이러한 사상은 중국 화엄종에서 방계로 취급되는 이통현의 화엄학, 역시 중국 화엄에서 선교통합을 주장한 종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결국 선종을 위주로 교종과 조화를 시도한 것이다.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 라고 하여 교와 선이 본래 둘이 아닌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섭한 천태종보다는 교리적으로 한층 발전한 것이었다.

 

신앙결사운동

  지눌은 이러한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피폐된 당시 불교계에 대한 혁신을 도모하여 신앙결사로서 수선사를 조직하였고, 뒤를 이어 진각국사 혜심과 원감국사 충지에 의해 조계종은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지눌의 심성론은 수선사가 주로 지방의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후기에 지방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앙결사운동은 천태종 내에서도 일어났으니, 요세에 의해 조직된 백련사가 그것이다. 수선사와 함께 무신집권기의 가장 대표적 결사라 할 수 있는 백련사도 역시 불교계의 혁신과 기층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수선사가 기층민보다 지방의 지식인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였음에 비하여, 백련사는 정토관에 보다 충실하여 기층사회의 교화에 전념하였다.

 

불교의 타락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의 혁신적 기운은 몽고간섭기에 와서 단절되었다. 최씨정권과 밀착해 있던 수선사는 몽고의 억압을 받아 위축되었고, 백련사는 고려왕실 및 원황실의 원찰인 묘련사로 변질되었으며, 이에 대신해서 균여파 화엄종과 법상종, 그리고 <삼국유사>일연이 이끄는 선종 가지산파가 부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고려왕실과 원의 후원을 받으며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고리대나 양주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승려는 세속화되어 혼란한 고려사회를 더이상 이끌 수 있는 정신적 역할을 못하자, 이것이 곧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유불 교체의 요인이 되었다.

 

유학의 발전

   고려시대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성종이 유학자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 숭유정책을 실시하였으니 유교는 정치의 사상체계로 확립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는 이국의 본이요, 불교는 수신의 본이다 라고 한 최승로의 말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지배층인 귀족이 문신들로 구성되고 문치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숭문의 풍조는 더하였다.

   유학이 크게 융성한 고려 문종, 해동공자인 최충 9제학당을 세웠고, 이를 모델로 하여 11개의 사학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학의 융성은 상대적으로 관학의 쇠퇴를 가져와 숙종 때부터는 관학의 진흥책이 도모되었다. 고려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함으로써 신라의 종교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이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가 성립하였으니 확실히 하나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유학자들은 과거준비에만 급급하여 유학의 이론이나 사상면에서의 폭넓은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훈고학, 사장학에 치중한 고려의 유학은 중기 이후 귀족취향의 보수적인 경향으로 떨어지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성리학의 전래

   유학이 불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부흥되는 것은 고려의 귀족사회의 모순이 첨예화되는 13세기 후반부터이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는 신흥 사대부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이념을 모색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들어온 성리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성리학은 송의 주자가 완성한 것으로 한, 당시대의 훈고학적 유학 대신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신유학이다. 고려는 이미 심성화된 선종의 융성으로 성리학 수용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어 그것을 용이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이 소개한 후, 백이정이 원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 박충좌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 길재, 권근, 정도전 등이 발전시켰다. 이들 주자학자들은 자신이 처한 계급적 위치에 따라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 귀족관료 출신의 온건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한 향리 출신의 급진파로 나누어진다. 온건파는 토지개혁을 점진적으로 행할 것을 주장하고 불교비판에서도 불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승려와 사찰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급진파는 즉각적인 토지개혁을 통한 민생안정을 주장하고, 불교에 대해서도 사상 자체의 이론적 비판을 통해 불교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결국 고려왕조에 대한 계속적인 충성과 역성혁명에 의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고 정몽주의 피살과 조선의 개국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시대

 

억불정책과 산중불교

   조선시대에 들어 불교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 일종의 자기 보호책으로서 호불론을 전개하여, 유불일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조선초기의 기화배불론에 대해 호교론을 펴고, 종교적 갈등을 모나지 않게 해소해 공존을 추구하려는 융화적 경향을 뚜렷이 나타냈다. 그는 , , 3교의 일치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후 명종 때, 문정 왕후의 후원을 받은 보우선과 교가 하나임을 강조하고, 불교와 유교가 하나에서 유래했다는 융합론을 폈다. 그는 유교의 공자, 순자 및 노자 등 일체의 사상을 불교의 화엄일리 속에 융합시키고, 다시 여기에 선의 요소를 가미해, 교선일체에서 더 나아가 교선일체를 주장했다. 그후 휴정과 유정이 등장하여 불교사상을 진작시키고, 승병을 모집해 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휴정, , 3교가 각각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다 같다고 하였다. 기화(현정론)에서, 유교가 불교를 비난한 내용을 조목조목 들어 해명하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 데 반해, 휴정은 거기서 더 나아가 전혀 상대를 비판함이 없이 일체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사상은 (선가귀감)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화된 유교 고려말 중소 지주계급 출신 사대부들이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주자학1392년 이성계,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혁론자들이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곧 중세적인 조선 봉건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절대이념이 되었다. 조선초의 주자학은 고려 귀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현실적인 폐해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이 허구라고 비판함으로써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허물고, 주자학에 입각한 중세적 세계관의 확립이라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연구된다. 반면 역성혁명을 반대한 일부는 지방의 중소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으니 이들이 사림파.

 

사림파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부터다. 이 시기에 오면서 훈구관료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언관직에 기용하였다.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으로 연결되는 이들은 훈척세력의 비리를 맹렬히 공격 하였는데,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파들이 반감을 폭발시켜 사화를 일으킨다. 네 번에 걸친 사화로 그때마다 사람들은 큰 화를 입었지만,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잠재적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대에는 결국 정계의 주류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주리파와 주기파의 대립발전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과 주기론의 두 계통으로 발달하였다. 주리론 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 의 입장에서 (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유사)와 기 (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유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근본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 업적에서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의 주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하였다. 그의 저서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10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일본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일원론 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화담집)을 지은 서경덕은 독자적으로 중국의 기철학을 수용하여 기일원론에 입각한 독특한 기철학 을 완성했다. 주기론은 (성학집요)저자 이이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기의 변화, 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론에 있어서도 본연의 성보다 기질의 성을 더욱 중요시하였으며, 정치, 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 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후 영남과 기호의 두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다.

 

예학의 발달

   조선유학이 예학 중심의 교조적 주자학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718세기에 이르면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는 동시에, 통치능력의 상실에 따른 지배계급의 압박과 수탈이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봉건사회 자체의 해체 위기에 처하여 지배계급의 유학자들은 주자학적 명분을 더욱 강화하고 신분질서를 엄격히 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

   조선후기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동은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교조화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있어왔는데 윤휴와 박세당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주자학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유교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비판적인 동향은 양명학의 도입으로 가속화되었다. 양명학은 명의 왕양명이 일으킨 주관적 실천적인 유학체계로, 주기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조선의 사회변동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제는 이를 학문적 체계화하였다.

 

실학운동

   지배계급의 정통 주자학이 끝까지 명분론과 주리론을 고집하는 동안 사상계의 일각에서는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학문 경향이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데 이를 실학 이라고 부른다. 실학을 담당한 계층은 양반계층 내부의 계급분화와 일부 벌족의 대토지소유로 말미암아 몰락한 양반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지배계급에 속했지만 현실생활은 일반민중들과 다를 바 없어 당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수탈상을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고, 현실정치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관료로 진출하지 못한, 혹은 불우한 관료생활로 끝맺은 자신의 처지를 통하여 봉건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주자학적인 명분론의 강화로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도저히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문연구의 방향을 관제, 병제, 토지, 기술 등의 현실문제로 전환하고, 이러한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동안 지엽적인 지식들을 백과전서식으로 탐구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자연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학문대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실학자들은 학문 방법에 있어서도 중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주자학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경험적, 실증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근대성을 띠게 된다. 실학자들의 철학사상은 시대와 대변계급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현실의 변혁과 개인이 욕망을 긍정하는 주기적인 경향과 경험론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다.

 

1.경세치용학파

   실학사상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이에까지 소급되지만, 본격적인 실학사상은 유형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초기의 실학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걸쳐 발전했는데, 흔히 경세치용학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이익에서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된 사상으로, 당시의 사회적 모순이 토지의 과점에 있다고 보고 토지개혁 문제에 주력하였으며, 당시의 소농민계층을 대변한 양심적인 관료의 사상으로 후에 일부의 제자들은 그들이 지향한 농촌사회의 이념으로 천주교를 도입하기도 한다.

 

2.이용후생학파

  18세기 중반에 일기 시작한 중기 실학은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중국을 다녀오고,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북학파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은 대개 서울 출신의 학자들로 당시 현저한 발전을 보였던 상업과 수공업을 중시하고, 도시빈민의 생활상을 동정하여 이들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적 사상을 전개했다. 그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해 중국에 들어온 서구과학을 과감히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고, 그들 자신이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또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반제도를 철폐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초기와 중기와 실학사상은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는데, 그는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개혁안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청의 고증학을 이용한 유가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수사학(유학)의 입장을 확립함으로써, 기존의 주자학에 대체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을 제시했다.

 

3.실사구시학파

   19세기 초반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학파가 바로 실사구시학파 이다. 이 학파는 경서 및 금석, 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여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 실증성과 해석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묘하게도 김정희와 가까웠던 중인계급 학자들에 의해 후일 개화사상과 연결된다. 김정희와 더불어 초, 중기 실학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당시 사회를 충실히 반영하는 철학체계를 구성한 학자는 최한기다.

   그는 실학가 개화사상의 가교자로 평가되는데, 서구의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외국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윤리적인 면에서도 유교를 옹호하여 전형적인 동도서기론을 폈다. 최한기경험적인 인식론과 자연과학적인 학문관, 유교적인 윤리관, 정치개혁론 등이 모두 융해되는 방대한 기일원론의 철학체계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학에 막을 내린다. 그의 기철학은 저서 (기학)에 담겨 있다. 이들 실학사상들은 교조적 주자학을 타파하고, 학문의 중심을 윤리, 도덕으로부터 정치, 경제, 자연에 대한 현실문제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지배계급의 부패, 무능과 더불어 토지제도, 신분제도 등의 봉건사회 자체에 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한 이상적인 농촌사회의 건설, 신분제도 철폐 및 과학기술의 수용 등 여러 가지 이상적인 방안을 내놓았으나,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과 제국주의의 침탈로 말미암아 근대적 사상으로까지는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됨에 따라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하게 되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뒤 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 운동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적인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에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근대이후

 

불교자체 정화노력

   그후 한국불교는 일제의 통치를 당해, 백용성, 박한영, 한용운 등이 나타나 불교 유신을 제창했다. 백용성은 전통적인 한국 선종의 특색을 다시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제시하고자 하여 대각교 운동 을 벌였다. 박한영한국의 전통적 선관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는 한편, 과학과 서구문물이 밀려오던 당시의 상황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불교를 제시하려 했다. 한용운철저한 유신을 주장하여,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에 정신문명의 원천으로서 불교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이회광이 친일불교운동의 일환으로 일본 조동종과 합종할 것을 추진한 데 대해, 한국불교의 전통은 임제종이라고 선포하여 조동종과 합종할 수 없다는 운동을 이끌었다. 국권이 상실되면서 한국불교교단은 일본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는 기구가 마련되지 않았다. 1941년 봄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아 종단의 이른을 조계종으로 결정하고, 1946년에는 기존의 명진학교를 동국대학교로 개칭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그후 효봉, 청담, 성철 등 큰스님들의 구조적 신앙자세는 198010,27법난에도 꿋꿋하게 한국불교를 지켜나갔고, 1990년 불교방송(BBS)의 개국과 더불어 불교발전의 기틀을 마련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불교계는 돈오점수(깨달은 후 계속 닦음)와 돈오돈수(단번에 깨우쳐 단번에 닦아 마침)의 해묵은 이론적 대립문제, 중생구제보다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세속적인 교권 확대에 집착하는 일부 집단의 반종교적 행위문제, 타종교와의 융합을 통해 모든 인류가 화합하여 참된 인간을 완성하려는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문제 등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유학

   국권침탈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절인 유학자들을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격하시켜 한국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의 합의에 따라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고, 1964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 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대학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 - 동서고전 200선 해제 [반덕진]

2019.11.22

cafe.daum.net/logvilla/Qilq/68   위도통나무별장 010-8709-5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