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5. 18:25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한국학(韓國學)의 큰 스승 석전 박한영 스님
- 한국불교 근대화의 문을 연 석전 스님 -
- 100년 전에 치세의 근본이 소통에 있음을 역설 -
일제의 폭력과 수탈로 나라와 겨레가 신음하며 칠흑같은 어둠 속을 헤매던 그 때, 그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겨레를 빛이 보이는 미래로 이끌었던 세 분의 스님이 계셨다. 바로 만해스님과 용성스님, 그리고 석전스님이십니다.
해인사주지 이회광과 불교신문, 동국대학의 권상로같은 자들은 아예 친일의 길로 나섰고, 만공,한암,효봉 등의 스님들은 여전히 산중에서 참선수행에만 정진하고 있을 때에, 이 세분 스님은 시정(市井)에 뛰어들어, 어둠 속에서 범부중생들과 더불어 함께 씨름하며 어둠을 밝히는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세 분 스님 가운데 한 분이신 박한영(朴漢永 : 1870~1948)스님은 선암사의 금봉스님, 화엄사의 진응스님과 더불어 근세 한국불교의 3대 강백(講伯: 요즈음 말로 유명 강사 )으로 손꼽히는 어른으로서, 선사로 널리 알려진 만암스님,청담스님,운허스님,경보스님 등이 모두 이 석전스님의 제자입니다. 오늘날의 불자들이 큰스님으로 우러러 보는 백양사의 서옹스님과 성륜사의 청화스님은 만암스님의 제자이니, 석전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은 스님들이십니다.
우리나라 불교 근대화를 이끌었던 선각자이자 석학이었던 석전 스님(왼쪽 사진)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학계에도 많은 제자들을 남기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미당 서정주입니다. 이들이 근세 조선의 석학삼당(碩學三堂)으로 불릴 만큼 박학다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스승인 석전스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대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육당 최남선은 석전스님의 한시(漢詩)를 모은 <석전시초 石顚詩抄> 발문에서, “석전사(師)를 만나매, 내전이고 외전이고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위당 정인보도 <석전산인 소전 石顚山人 小傳>에서, “한영과 함께 길을 갈라치면 한국 땅 어디를 가나 그는 모르는 것이 없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 물에 가면 물 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지 화제는 고갈될 줄 몰랐다.” 고 술회했습니다.
항일학생운동으로 말미암아 서울중앙고보와 고창고보에서 퇴학당하고 방황하던 자신을 중앙불교전문학교 제자로 받아들여준 석전스님에 대해 미당 서정주는 “나의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고 부르며 평생 존경의 마음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석전 스님은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정인보, 오세창, 이동영, 이능화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며, 만암, 청담, 운허, 운성, 운기, 남곡, 경보 스님 등 출가자와 이광수,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모윤숙, 김동리, 조종현, 김영수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도 모두 석전 스님의 제자였습니다.
석전 스님은 1870년 9월14일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스님은 아홉 살 되던 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열여섯 살에 이미 서당의 학동들을 가르칠 만큼 배움이 깊었습니다.
1886년 17세에 출가해 승려로서 배워야 할 바를 익히기 시작한 스님은 1890년 장성 백양사 운문암 김환응 스님 문하에서, 그리고 1892년 당대 최고 강백으로 손꼽히던 선암사 김경운 스님에게 경학을 배우고, 건봉사와 명주사에서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구암사에서 설유처명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아 당호를 영호로 정했습니다. 이때 석전 또는 석전산인이라는 법호를 설유처명 스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법호는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지기지우로 교유하던 백파스님에게 “훗날 법손 가운데 큰 도리를 깨쳐 나라의 기둥감이 될 재목이 나올 터이니 이 호를 전하라!”고 부탁하며 전하여 준 것이었습니다.
미당 서정주는 그의 글 <질마재 신화>에서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지금도 선운사 입구에 가 보면 추사가 글을 지어 쓴 백파의 비석에는 대기대용 (大機大用)이라는 말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가 부탁한 법호 '석전 石顚'을, 백파가 생전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이 겨레의 미래영원에다 가만히 유언으로 써서 전하는 것을 알고 추사도”야! 단수 참 높구나! 하고 탄복한 것이겠지요.“
이 법호가 백파스님의 법손인 설유처명에게 전해졌다가 마침내 박한영 스님에게 전해진 것이니, 선운사 백파문중에서는 박한영 스님을, 추사가 생전에 말한 “큰 도리를 깨우쳐 나라의 기둥이 될 재목”으로 인정한 셈입니다.
석전 스님은 평생 4만 권에 가까운 도서를 구해 읽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선운사에 보존되어 있는 스님의 장서에는, 우리나라 고서를 비롯하여 중국 및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들이 있는데, 특히 중국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 담사동이 1896년에 저술하여, 1899년 일본과 중국에서 처음 출간한 <인학 仁學>을, 스님께서 1913년 번역해서 해동불보에 연재한 일은 스님의 독서량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게 하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문-안 세 후보가 모두 “국민과의 소통”을 역설하기 이전 이미 100년 전에, <인학>을 번역 연재하면서, 치세(治世)의 근본이 “인(仁)과 통(通)”이라고 역설하며 “불인(不仁)과 불통(不通)한 것은 제거해야 한다”고 하신, 스님의 천리안(千里眼)이 실로 놀랍습니다.
석전 스님은 옛어른들의 서책을 그 누구보다 많이 읽으셨지만, “옛 것이 훌륭하고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옛사람의 학문을 숭상하는 것은 오늘을 낮추는 실마리가 되며, 오늘날 뛰어나고 생명을 이롭게 해주는 말과 글이 옛 사람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 역시 잘 받들어야 함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석전 스님은, 기미년 독립만세행진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1919년 4월23일 인천 만국공원 집회에서 발족한 <한성임시정부>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만큼 항일독립정신이 강했습니다.
석전스님은 1908년부터 만해(卍海), 금파(琴巴)스님 등과 불교개혁에 나섰으며, 1910년 만해, 성월(惺月), 진응(震應), 금봉(錦峯)스님과 함께 임제종을 설립해 조선불교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당시 일제총독부가 일본의 조동종을 끌어들여 불교를 왜색화 하기 위해 진행했던 ‘불교통합정책’에 반대하며 진행했던 것입니다.
스님은 또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33년, 일본이 강요한 천장절 기념 학교행사에서 연단에 올라, “아아! 그런디, 오늘이 바로 일본천황 생일이여. 그러니 잘들 쉬여”라고 한마디 하고는 바로 내려와 학생들이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등 수시로 반일감정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석전 스님은 단행본 형식의 역서와 저술 9권을 비롯해 100여 편이 넘는 논설과 수필을 남겼습니다. 이런 스님의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방대한 독서와 글쓰기는 당대 한국불교와 겨레 현실의 어려움을 헤치고 미래로 나가기 위하여, 온 몸과 정신의 역량을 쏟아 붓는 열정과 염원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기일회(一期一會)의 한 평생을 한국 불교와 겨레 사랑으로 일관했던 석전 스님은 1945년 일흔여섯 살에 이르러 주지 매곡 스님에게 “나 여기 세상 뜨려고 왔네”라며 정읍 내장사로 자리를 옮겼고, 조선불교 초대 교정(지금 조계종의 종정)으로 추대됐음에도 한 번도 산문 밖을 나서지 않은 스님은 1948년 4월8일 세속의 나이 일흔아홉 살, 법랍 예순한 살에 내장사에서 신병 하나 없이 좌선 입정하여 육신을 벗으셨습니다.
<사진 설명: 1941년 3월 13일 유교법회 직후 찍은 기념사진. 앉아 있는 스님들 중 왼쪽에서 세번째가 석전스님이다. 석전스님 오른쪽 옆은 만공스님. 유교(遺敎)법회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이어가자는 취지에서 열린 것으로 만공스님, 한암스님, 석상스님, 서응스님, 동산스님, 청담스님, 석주스님 등 당대의 고승 30여명이 참여해 진행한 것이었다.
석전스님은 당대의 고승(高僧)으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대 지식인들이 큰스승으로 섬길 만큼, 동-서양의 학문에도 통달하셨고, 특히 우리 한겨레의 뿌리를 밝히는 한국학(韓國學)의 태두(泰斗)라고 불리었습니다. 스님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선생의 학문과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金石學)을 깊이 탐구했고, 이를 현장체험하기 위해 1924년 7월부터 제주도, 금강산, 호남지방 등의 명찰을 수차례 답사했고, 특히 한철학과 한국학의 본향인 백두산에는 일곱 번이나 올랐습니다. 스님의 백두산행에 수행한 최남선은 이 때 스님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단군고사(檀君古史)와 동명고강(東明古疆)의 한겨레 강역(疆域)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후일 최남선이 고육지책으로 일제의 <조선사 편수작업>에 참여하는 한편으로는 일제의 조선사 편수 목적에 대항하는 <불함문화론>을 쓰게 된 바탕이 바로 석전 스님의 백두산 등정 강설입니다.
다음은 스님께서 백두산에 올라 읊으신 한시(漢詩)입니다.
曉日天池浴 효일천지욕 천지에서 몸을 씻고 솟아나는 새벽해
虹霓斷復連 홍예단복연 무지개는 끊어 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光風吹瀨急 광풍취뢰급 햇살 실은 바람이 급한 여울처럼 불어오더니
蕩破西峯煙 탕파서봉연 서쪽 봉우리의 안개를 몽땅 쓸어버리는 구나.
아래는 스님께서 다산선생의 유적지를 탐사하며 남해안 일대를 답사할 때 다도해의 노을을 바라보며 읊으신 詩입니다.
多島亭亭映日斜 다도정정영일사 다도해 곳곳마다 노을 빛 쏟아지니
姻雲錯落似奇花 인운착락사기화 저문 구름 붉게 피어 한 송이 꽃처럼 지고
波光岸影隨帆轉 파광안영수범전 파도 빛과 뭍 그림자 돛배 따라 흐르니
身世蒼凉等落霞 신세창량등락하 이 내 몸 쓸쓸하여 저녁노을과 한가지네
다음은 석전 스님이 정읍 내장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제자 하나가 스님께 못 보던 과자를 드렸습니다.
“그 과자 맛이 아주 좋구나.”
“그건 오징어를 다시마로 싼 것입니다. 오징어를 드셨으니 계를 범하셨지요. 바로 그 점에 대한 법문을 듣고 싶어 스님께 드린 겁니다.”
제자의 말을 듣고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오징어를 먹인 것은 너희들이니 계를 범한 쪽은 바로 너희들이니라.”
“그래도 잡수신 분은 스님 아니십니까?”
“허허, 어른이 갓난아이에게 뜨거운 인두를 덥석 쥐어주면 과연 누구의 잘못인고, 순진무구한 갓난아이의 잘못인고, 아니면 어른의 잘못인고?”
이같이 석전 스님은 쉬운 말로 지계(持戒)의 뜻을 일깨웠습니다. 지계는 깊은 사려를 포함합니다. 사려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계율은 건물의 기초와 같습니다. 수행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계율을 지키는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몸에 두른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늙음을 허무하다고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을 깊게 모르는 입에서나 나오는 법, 한지에 먹물 번지듯 햇살이 창에 들듯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법, 밝고 따스하게 스미는 죽음의 이치를 알고 나면 늙음도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지, 죽음을 알고 나면 지혜로움만 남기에, 오히려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네!'
육당 최남선이 노년에 이른 스승 석전 스님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하는 스님의 생사관(生死觀)이 제 것이 되기를 발원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나무자성본래불)_()__()_()_
2012.09.22
blog.daum.net/kyopohsb/11859307 역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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