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나라 고려에 유교의 정치학을 펼친 재상 최승로 ‘대기만성’도 ‘준비된 자’의 것이다 / 매일경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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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나라 고려에 유교의 정치학을 펼친 재상 최승로 ‘대기만성’도 ‘준비된 자’의 것이다


입력 : 2017.03.08 09:55:23





    고려 성종 재위 시 조선의 ‘정도전’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최승로이다. 그는 성종 때 <시무 28조 時務 28條>를 올려 이를 토대로 고려의 정치, 행정, 군사, 문화, 지방조직, 법률, 종교, 제도의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 ‘국가로서의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명재상이다. 최승로가 돋보이는 것은 이 같은 업적과 함께 30년 가까이 정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가 56세에 성종을 만나 이상을 펼친, ‘노력하는 집념’이다.

  •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고려의 정도전’

       왕조에서 ‘성종 成宗’이라는 ‘묘호 廟號’는 보통 ‘법과 제도’를 완비한 군왕에게 붙이는 것이 관례이다. 묘호는 뒤에 ‘조 祖’, ‘종 宗’을 붙이는데 대개 조는 왕조를 열거나 탁월한 전공을 세운 왕에게, 반면에 학문과 덕이 뛰어난 왕에게는 종을 붙인다. 조선 시대 성종은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해 사후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다. 물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와 같은 구분이 명확치는 않았다. ‘시호 諡號’는 살았을 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붙이는 칭호이다.

       태조 왕건만이 묘호에 ‘조’를 사용한 고려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981년부터 997년까지 재위한 6대 성종도 법과 제도, 중앙 및 지방 행정조직을 완성, 이후 국가의 통치 기틀을 마련했기에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다. 조선의 <경국대전> 시작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의 건국 이념과 철학의 뼈대를 세웠지만 태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이름은 조선에서 ‘금기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편찬을 시작한 <경국대전>은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완성되어 조선의 통치 기준이 되었다.   

       고려 성종에게도 ‘정도전’의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최승로이다. 그는 성종 때 <시무 28조 時務 28條> (지금은 22조항만 남아있다)를 올려 이를 토대로 고려의 정치, 행정, 군사, 문화, 지방조직, 법률, 종교, 제도의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 ‘국가로서의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명재상이다. 이 글은 재상으로서 업적에만 집중해 최승로의 위대함을 논하려 하진 않는다. 우리가 최승로에게 주목할 점은 그의 학문적 성취나 재상으로서의 성공적인 역할도 있지만 만만치 않은 인생 역정도 있다. 범 귀족 가문이라 할 수 있는 신라의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학문의 성취를 보였음에도 그는 20대부터 40대 말까지, 인생의 황금기에 이렇다 할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

       태조, 정종, 혜종, 광종, 경종 등 5명 군왕의 통치시절 최승로는 한창 관리로서 활약해야 할 시기에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가 타고난 재주와 능력에 비해 홀대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승로는 이 같은 불편한 현실에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실력을 길렀다. 그리고 50세가 훨씬 넘어 드디어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 성종을 만나 이상과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변방과 한직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최승로의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고려는 단단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최승로가 불교의 국가인 고려에 유교의 통치이념과 가치를 전파하고 실천한 개혁 재상이란 점이다. 더구나 그는 불교와는 출생부터 인연이 있었지만 사사로운 정리를 떠나 오직 공공의 이익, 즉 국가와 백성을 우선한 정책을 펼쳤다. 이는 불교가 국교인 고려에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대목이다. 물론 그는 불교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불교 의식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노력 동원이 모두 백성의 몫과 수고로 돌아가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처럼 최승로는 국가의 안녕와 백성의 평안, 단 두 가지 기준으로만 정치와 종교에 접근하고 이를 활용해 성종을 현군으로 만들었으며 고려시대 최고의 평화시대를 열었다. 대기만성, 공평무사 그리고 준비된 재상 최승로. 그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렵고 고단한 처지에도 포기하지 않는 정신, 관리로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공적인 이익을 추구한 태도이다.

    ▶유학파에 밀려 실력 펼칠 기회를 잃다

       최승로는 927년 신라 경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후삼국 체제는 무너지고 있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정국과 통일론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견휜의 후백제가 고려에 대항했지만 이미 세는 왕건에게 기울고 있었다. 신라는 명목뿐인 국가였다. 최승로의 집안은 비록 진골, 성골은 아니었지만 신라 6두품으로 범 귀족 가문에 속했다. 특히 그의 증조부신라의 석학인 최치원으로 학문으로는 대대로 손꼽히는 가문이었다.

       최승로의 아버지는 원보 벼슬을 하던 최은함이다. 최은함은 오래 후사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중생사의 관음보살에게 치성으로 기도를 올려 최승로를 낳았다고 한다. 최승로는 태어나자마자 큰 난리를 겪었다. 후백제의 견휜이 경주로 쳐들어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던 경애왕을 잡아 자살을 강요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최은함은 아기 최승로를 강보에 싸 안고 중생사를 찾았다. “이 난리에 둘이 같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 아기를 맡기고 훗날 다시 찾으러 오겠습니다. 부디 아이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올린 뒤 아기를 관음보살상 대좌 밑에 숨겼다고 한다. 보름 뒤 후백제군이 물러나자 중생사를 찾은 최은함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기는 여전히 강보에 싸여있었는데 얼굴색이 화사하고 입에서는 젖 냄새가 났다고 한다. 후일 최승로를 일컬어 ‘관음보살이 점지하고 관음보살이 젖을 먹여 키운 아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 이 일화 때문이다. 이처럼 최승로는 출생부터 불교와 큰 인연이 있었다.

       최승로의 집안인 경주 최 씨 가문은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할 때 여러 귀족, 관리들과 같이 개성으로 갔다. 최승로는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했고 학문적 성취가 무척 빨랐다고 한다. 특히 12세 때는 태조 왕건 앞에서 <논어>를 유창하게 읽어 왕건이 무척 귀여워하며 곡식 20석을 특별 하사하고 원봉성의 학생으로 특채해 영재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당시 통일신라 이후 이른바 ‘도당파 渡唐波’ 유학생 출신들이 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최승로의 증조부인 최치원 역시 당나라 유학파였다. 하지만 최승로는 유학을 가지 않고 오로지 국내에서 공부를 했다. 이른바 ‘국내파’인 셈이다. 훗날 이 점이 최승로가 30, 40대의 왕성한 활동기에 정치적, 행정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승로는 끝내 경주 최 씨, 6두품 출신이라는 가문의 배경과 함께 당대 최고의 학문, 바른 말을 하는 용기 있는 관리로서 그 이름을 떨쳤다.

       태조 왕건 이후 최승로는 혜종, 정종, 광종을 모셨다. 하지만 최승로가 자신의 경륜과 학문을 펼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특히 개혁 군주 광종은 후주 출신인 쌍기를 비롯해 이른바 중국 출신 관료와 중국 유학파, 과거 제도로 등용된 신진 세력을 중용했다. 광종의 이 같은 정책으로 인해 최승로와 같은 신라나 후백제 출신 귀족 가문은 승진이나 직책, 정치의 중심부 진출 등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최승로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공부에 더 매진하고 관리로서의 소양을 길렀다. 그렇게 20여 년, 드디어 최승로에게 기회가 왔다. 바로 성종의 등극이다.

    ▶56세에 성종을 만나 이상을 펼치다

       981년, 성종이 경종의 뒤를 이었다. 사실 성종은 적통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경종 소생의 왕자가 있었지만 경종이 재위 6년 만에 서거할 때 왕자는 불과 2살의 아기였다. 해서 왕실과 대신들은 왕권 확립을 위해 경종의 사촌인 성종을 왕으로 추대했다. 당시 고려 왕실은 지방 호족과의 혼맥으로 연합세력을 구축했다. 성종은 경종의 후원 세력인 서경인맥보다는 광종의 외가인 충주 호족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성종 즉위 초, 국왕에 대한 왕실과 지방 호족의 지원이 미미했다. 하지만 성종은 현군이 될 자질이 충분한 국왕이었다. 왕위에 오른 성종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중앙 부서의 5급 이상의 관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정치와 행정에 관한 제도 개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정책, 즉 현안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밀봉하여 국왕에게 직접 올려라.”

       광종은 주로 인적 청산을 통해 지방 호족을 평정해 나갔지만 성종은 제도적인 개혁을 통해 고려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최승로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982년 당시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으로 인사와 행정직을 맡고 있던 최승로는 이른바 <오조치적평 五祖治積評>을 먼저 올리고 곧이어 고려의 모든 제도의 개선방안 <시무 28조>를 올렸다.

       <오조치적평>은 대단히 위험한 상소였다. 오조 즉, 성종의 선대인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의 본받아야 할 치적과 고쳐야 할 개선점을 함께 기술한 것이 바로 이 상소문이었다. 현재의 권력인 국왕에게 선대 왕의 단점을 지적한다는 것은 사실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최승로는 이 상소에서 특히 고려의 개혁군주였던 광종에 대해 날선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지방 호족 세력을 제거하고 중앙집권과 왕권을 강화한 광종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쌍기를 비롯한 중국파의 등용으로 편향된 정책과 학문이 퍼졌다고 지적했다.

       “광종의 정치는 깨끗하고 공평하였다. 하지만 쌍기를 지나치게 우대하면서 실력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벼슬에 올랐다. 즉 중국의 선진문물을 존중했으나 중국의 선진 제도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중국의 선비는 예우했으나 어진 인재는 등용치 못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신라 6두품 출신으로 최치원의 후손과 유학자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최승로로서는 광종의 지나친 중국파 우대와 국내파 무시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이 같은 최승로의 비판을 성종은 받아들였다. 아무리 언로를 개방하고 귀를 열어 신하의 소리를 듣겠다고 선언한 성종이지만, 자신의 롤모델이자 왕위에 오르는데 큰 힘이 되어준 후원 호족이 광종 계열이기에 직접적으로 광종을 비판한 최승로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성종은 신하의 열정과 충성심이 자신의 불쾌함보다는 우선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승로는 바로 <시무 28조>를 올렸다. 현재 ‘22조’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시무 28조>는 한마디로 고려의 정치, 행정, 군사, 지방조직, 제도, 문화, 법치 등의 모든 제도를 개선할 시책은 물론 군주의 책무와 도리, 그리고 신하의 충성은 물론 군주와 신하의 관계까지 기술한 ‘국가 통치’의 ‘이념서이자 행동강령’이 망라된 집합체였다. 성종은 이 상소를 받고 대단히 기뻐하며 최승로를 정치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이때가 982년으로 최승로의 나이 이미 56세 때이다. 실로 대기만성이다.

    ▶‘군주와 신권’ ‘협치와 견제’ 통한 왕도정치

       최승로<시무 28조> 내용은 정치, 사회, 국방, 문화, 종교 등을 모두 아우르고 있었지만 크게 3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왕조 시대 국왕은 몸소 모범을 보이면서 바른 정치를 행할 것을 강조한 왕도정치 부분, 국력은 물론 백성들의 힘과 재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던 불교 행사의 축소, 그리고 중앙 및 지방 제도의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목적은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이었다. 이 중에서 최승로가 가장 강조한 것은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였다. 최승로는 “군주는 예 禮로서 신하를 대하고 신하는 충 忠으로 군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신간의 예를 통한 화합과 상호 견제’ 즉 유교사상에 입각한 군주와 신하의 자리매김을 시도했다.

    또한 군주는 군주답게, 대신은 대신답게, 지방관은 지방관다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성종에게 간언했다. 즉 ‘군주가 백성들을 상대로 일일이 밥 한그릇씩 주는 것은 큰 정치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한두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정치보다는 모든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제도 개선을 통한 큰 정책을 주문했다. 백성을 찾아 일일이 보살피는 것은 군주가 해서는, 또 할 수도 없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 지방관과 관리들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군주가 교만하지 않고 신하들을 예로서 대하면 그 어떤 신하가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을 다하고 군주와 백성을 위한 계책과 방편을 마련하지 않겠는가”라는 물으면서 유교적 문치주의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시무 28조>에 기록한다.

       물론 최승로는 정치의 주체로서 군주의 위치를 인정했다. 하지만 올바른 정치를 펴기 위해서는 군주 혼자만이 아닌 신권과의 협의가 필요하며 이는 어느 한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지 않는 평행적 관계에서 가장 큰 효과를 낸다고 본 것이다. 이 같은 최승로의 사상은 훗날 조선 왕조 초기 왕도정치의 통치 이념에 매우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했다. 최승로는 한마디로 유교에 의한 문치주의 통치를 고려의 통치 이념으로 주장한 것이다.

       최승로가 군주론 이외에 중점을 둔 부분은 불교였다. 그는 결론적으로 불교의 각종 폐단을 지적하고 그의 대안으로 유교의 확산을 주장했다. 최승로 자체가 불교와 인연이 깊었지만 최승로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로지 고려, 왕실, 백성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그는 고려를 다스리는 근본 정치사상으로서 유교를 제안했다.

    당시 불교는 종교 자체보다 불교 행사에 소요되는 수많은 자금 조달에서 많은 부작용을 노출했다. 연등회, 팔관회는 물론이고 금과 은으로 불상을 제조했으며, 각종 불교 제의를 위해 돈을 쏟아붓자 백성들이 빈부을 떠나 비판하던 터였다. 이런 최승로의 종교적 신념은 현실을 바탕으로 했다. 최승로는 불교의 내세관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교는 몸을 닦는데 필요하고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근본이다. 신라 말기에 불경과 불상 그리고 불사를 일으키는데 모든 국력과 백성의 노력이 소모되었다. 이는 신라의 멸망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특히 왕실이 과도한 불사를 자주 일으켰는데 이에 소요되는 모든 돈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 민심을 얻는 것이 불교에 제를 올리고 복을 기원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또한 “불교의 요결은 내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다스리는데 중점을 둔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현재의 임무이며 현재는 내생보다 더 가까운 현실이다. 그렇다면 가깝고, 시급한 것보다 먼 내세를 먼저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라고 불교 자체가 아닌 불교 제의에 소모되는 국력을 우려했다. 그러면서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군주와 일반 백성이 불교를 대하는 것은 차이가 있어야 한다. 백성들이야 불교 제의를 크게 일으켜도 자신의 재물을 쓰는 것이지만 군주가 불교 제의에 몰두하면 국가와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다”라며 불교를 대하는 군주와 왕실에 대한 경계도 빼놓지 않았다. 이 결과 연등회, 팔관회 등 대규모 행사들이 취소되었다.

    ▶백성의 인간다운 삶 꿈꾸다

       최승로의 또 하나의 업적은 중앙 및 지방 조직의 개편이었다. 고려는 지방 호족의 권한이 강한 나라였다. 중앙정부의 명령이나 제도 역시 각 지방에서는 호족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되곤 했다. 최승로는 중국식 관제를 도입해 행정기구로 중앙에 2성6부를 두었고 군사기구로는 2군6위 제도를 완비했다. 지방 조직 개편은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그 수령으로 성종이 임명한 목사를 직접 파견해 왕권의 지엄함과 일사불란한 행정명령 체계를 정비했다. 또한 중앙에 국자감을, 지방에는 학교를 지었고 곳곳에 경학박사를 파견해 국가 백년대계인 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유교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펴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밖에 최승로는 왕을 경호하는 병사의 수를 줄여 경비를 절약했고 궁중에 있는 승려 역시 내보냈다. 또한 사치를 조장하는 큰 저택을 짓는 일을 줄이고 복식 등의 제복을 통일해 신분제도를 정착시키기도 했다. 또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더라도 복식과 예법은 고려식으로 할 것으로 주장했고 중국과의 사무역도 금지시켰다. 이처럼 최승로의 정책은 국가로서 고려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물론 노비, 양민, 귀족의 신분제도를 엄격히 하고, 문벌귀족에 대한 예우를 강조한 면도 있다. 그러나 최승로는 군주와 귀족은 물론이고 일반 서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도 소홀함이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최승로의 ‘국가 개혁안’이 칭찬받는 포인트이다. 최승로가 목표한 고려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최승로가 신봉한 유교, 즉 공자의 사회발전론에서 찾을 수 있다. 공자는 백성들의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는 사회를 가장 기초적인 사회로 보았다. 그리고 다음은 모든 백성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은주 시대, 특히 주나라의 문왕이나 주공이 다스리던 사회, 즉 ‘요순시대’의 구현이며 유가의 최종 목표인 ‘대동사회 大同社會’이다.

       이 중에서 최승로는 고려가 군신간의 예의가 있고 가족이 화목하고, 신분이 공고하면서도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즉 공자가 말한 두 번째 사회인 ‘소강사회 小康社會’를 이룩하고자 했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예와 법으로 다스려지는 사회다. 이런 최승로의 노력에 성종은 화답했다. 5년 동안 최승로는 고려와 성종 그리고 백성을 위해 진심전력을 다했다. 988년 성종은 최승로를 종1품 문화수시중에 임명하고 청하후에 식읍 700호를 하사하며 고려의 뼈대를 완성한 노고를 치하했다. 이때 최승로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최승로는 이듬해 989년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했지만 성종은 듣지 않았다. 최승로는 989년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성종은 매우 슬퍼했다. 성종은 최승로에게 포 1000필, 면 300석, 쌀 500석, 보리 300석, 유향 100냥, 뇌원차 200각, 대차 10근 등을 하사하고 태사로 추증했다. 후에 최승로는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처세학 | 준비하라. 이곳이 아니면 다른 곳에서라도 기회는 온다

       아이돌 그룹의 칼군무를 보면 그들의 연습생 시절이 상상된다. 몇 년을 기약 없이 연습만하며 데뷔하는 꿈을 꾸는 그들에게 좌절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라고. 마찬가지다. 직장생활 역시 온갖 풍파를 겪게 된다. 그야말로 줄 잘 서서 해마다 승진 척척하고 이른바 꽃보직을 연신 맡으며 ‘꽃길’ 같은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력과 성실함에 비해 터무니없는 자리를 전전하며 몇 번씩 양복 주머니의 사표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직장생활이다.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기회는 온다. 물론 그 기회는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엄격하게 구분하면 ‘온 기회를 잡는 것’일 수 있다. 야구에서 대타로 나가 홈런을 치거나, 축구에서 종료 10분 전 투입되어 결승골을 넣는 경우도 있다. 홈런을 치거나, 골을 넣은 선수를 단순히 기회가 와서, 운이 좋아서라고 치부하는 것은 그들의 숨어있는 노력과 준비를 폄하하는 것이다. 감독은 평소에도 그를 보고, 듣는 것이다. 그래서 확신이 들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오늘, 비록 직책과 직무에서 홀대받고 있더라도 ‘준비된 자’라면 언젠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시간이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짧은 등판의 시간을 강한 임팩트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변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직책과 직무에서 소외되어 있더라도 회사나 부서의 전략적인 움직임에 예민하고 주의를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대양을 주름잡는 미국의 항모모함 선단을 보자. 10만t을 상회하는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이지스 순양함과 구축함, 호위함, 보급선, 상륙함, 정보함 그리고 핵잠수함까지 10여 척 이상이 같이 움직인다. 물론 중심은 항공모함이지만 선단을 이루는 작은 배에 승선해 있다하더라도 움직임은 항공모함과 같이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항공모함을 주시하라는 뜻이다. 비록 항공모함이 눈에서 안 보이는 곳에서 내가 탄 배가 작전을 수행해도 그것은 항공모함의 큰 움직임 속에 있는 것이다. 회사는 학교처럼 장기자랑 시간이 있어 누구에게나 돌아가면서 자신의 개인기를 내보이는 곳이 아니다. 마이크를 탐내는 래퍼의 사이퍼 배틀처럼, 달려들어야 하는 곳이다. 준비하자. 몇 년이 걸려도 허송세월이라고 하지 말자. 지금 있는 곳에서 승부를 못 보더라도 그동안 쌓아놓은 실력으로 다른 곳에서 당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준비된 자, 그에게만 대기만성이라는 여유로운 단어도 소용되는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69호 (17.03.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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