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의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2020. 6. 26. 00:30율려 이야기

김종서의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 계면조 삼수대엽(參數大葉)

김종서의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이칸서 2019. 1. 24.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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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의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삭풍 [朔風] 겨울철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a north wind of winter a piercing wind Boreas

단어장 저장 완료1.a north wind of winter

 

 

두만강 유역과 압록강 유역은 여진족의 출몰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여진족은 만주 지방에 뿌리를 둔 부족으로 흔히 그들을 ‘야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려 때는 금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후에는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한 나라였습니다.

만주 동부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그들은 조선의 북쪽 국경 지역을 끊임없이 침범해 우리 백성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두만강을 넘어와 재물을 빼앗는 것은 예사였고 사람의 목숨을 해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경원부 지역을 괴롭히던 우디거 부족이 회령 지역에 거주하던 오도리 부족을 습격해 와 그 추장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북방 개척에 착수하기 시작했습니다.

1443년 12월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했습니다. 김종서는 대호 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무예가 뛰어난 문관 출신의 장군이었습니다.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내쫓고 우리 영토를 개척하라. 다시는 그들이 발을 못 붙이도록 하라.”

“소신이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 육진을 설치하겠나이다.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김종서는 두만강 일대를 평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생각보다 수가 엄청 많았고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김종서는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병사들과 함께 밤 늦도록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순간 화살 하나가 날아와 김종서의 앞에 놓인 술통을 깨뜨렸습니다. 병사들은 우왕좌왕했습니다. 김종서만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소동은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병사들은 너무도 태연한 김종서의 태도에 깜짝 놀랐습니다. 김종서는 껄껄 웃었습니다.

“야만족의 소행으로 나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든든한 우리 군사들이 옆에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장수인 내가 우왕좌왕한다면 군사들이 어떻게 나를 믿고 따르겠는가?”

1434년에는 회령부와 경원부를, 1437년에는 경흥부, 1440년에는 종성부, 온성부를, 1449년에는 부령부를 차례로 육진을 설치했습니다. 육진이 구축되기까지는 무려 15년 간이나 걸렸습니다.

사실상 이곳은 조선 왕조 건설의 모태가 되었고 첫발을 떼었던 ‘흥왕의 땅’이었습니다. 조선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조종의 옛땅이었던, 버려서는 안되는 지역이었습니다.

만주땅은 옛고구려 땅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발해가 망한 뒤로는 여진족들의 본거지가 되어 그들 천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언젠가는 꼭 찾아야할 땅이었습니다.

해가 서산을 막 넘어갔습니다. 삭풍이 매섭게 불어왔습니다. 산마루 위로 둥실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김종서는 변방 성루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평원을 바라보았습니다. 장군은 긴 칼을 짚고 서서 저 드넓은 눈 덮인 만주땅을 향해 긴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유명한 「변새가」시조 한 수를 읊었습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이순신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밝은 달은 눈 속에 찬데 만리 국경에 큰 칼을 짚고 서서 긴 휘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여진족을 호령하던 기개가 넘치는 우국충정의 노래였습니다.

김종서가 개척한 육진에는 조선의 남도 백성들이 이주해 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세종의 북방정책은 영토 확장의 의미뿐만 아니라 민본 정책의 한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세종은 농토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에게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그들에게는 부역과 세금을 감면해주었습니다. 첫해에는 흉년이 들었고, 겨울에는 큰 눈이 내려 가축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

이주한 백성들이 낯선 땅에 들어와 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남쪽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얼마간 지나자 여진족의 침입은 잠잠해졌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김종서는 임금께 장계를 올렸습니다.

두만강 쪽에 있던 여진족들이 만주 땅 건주의로 들어가 명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언제 그들이 남쪽으로 와 노략질을 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참에 그들의 근거지인 만주의 남쪽땅을 쳐서 그곳을 아예 우리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굽어 살피시옵소서.

“상감 마마, 건주위는 명나라가 남만주의 여진족들을 다스리기 위해 만주땅에 설치한 곳이옵니다.”

세종은 말 많은 신하들이 또 어떤 이유를 내세우려는지 지레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되옵니다. 그곳을 친다는 것은 곧 명나라를 치는 것과 같사옵니다.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것이옵니다.”

황희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여진족들은 우리 국경을 끊임없이 넘어와 노략질했고 백성들을 예사로 죽였습니다. 이런 야만적인 행패가 다시는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오랑캐를 쳐서 이 땅에 발을 못붙이게 한다는데 명나라인들 무슨 명목으로 우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몇몇 대신들은 찬성을 했으나 집현전 학사들과 선비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했습니다.

“전하, 이는 명에 거스르는 일이옵니다. 아니될 말이옵니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김종서에게 일단 한양으로 돌아오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그곳에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일은 뒷날로 미루도록 하라.”

어명이 지엄하니 김종서도 어쩌는 수가 없었습니다.

김종서는 백두산 정상에다 조선의 깃발을 꽂았습니다. 옛 고구려 땅인 끝없이 펼쳐진 옛 우리 땅인 드넓은 만주 평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두만강 가에다 말을 깨끗이 씻겼습니다.

“아, 옛고구려 땅을 되찾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모함하고 시기만 하는 선비들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김종서는 끝내 만주 정벌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김종서는 시조 한 수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냐

어떻다 인각화상을 누구 먼저 하리오

김종서는 입으로만 떠드는 문약한 사람들을 썩은 선비라고 질타했습니다. 육진을 개척하고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는 승리자의 호기가 넘치는 노래입니다. 인각화상은 인각은 기린각의 준말로 한무제가 기린을 잡았을 때 지은 누각이었습니다. 선제가 공신 11명을 그려 거기에 걸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공이 큰 자신들의 화상이 기린각에 당연히 먼저 걸릴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는 당당한 시조입니다.

두만강 건너 저 우리 조상의 땅인 만주땅을 되찾고자 했는데 조선 문신들이 극구 반대를 해 숙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김종서는 이렇게라도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육진 개척으로 압록강의 사군과 함께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의 국경선이 만들어졌습니다.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후일의 어린 단종을 부탁했습니다. 김종서의 권력이 커지자 야심 많은 수양 대군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수양 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했습니다.

대권에 가장 장애가 되는 인물은 물론 김종서였습니다.

김종서는 [계유정란]의 첫 타켓이 되었습니다.

1453년 10월 10일 단종 1년 달빛이 희미한 초저녁이었습니다. 수양은 무사, 유숙· 양정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을 찾았습니다.

“좌의정 대감을 뵈러 왔네.”

김종서의 아들 승규가 집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김종서가 서둘러 방안에서 나왔습니다.

“대군께서 저녁 무렵 어인 일이시오?”

“긴한 말이 있어 왔소이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오, 여기서 잠깐 얘기를 나누시지요.”

김종서의 집은 그의 아들 김승규가 무장한 채로 윤광은, 신사면 등 무사 30여명이 함께 지키고 있었습니다. 섬뜩했으나 수양대군은 태연한 척했습니다.

“길을 가다 사모뿔을 잃어버렸소이다. 좌상댁이 여기라 빌리고자 들어온 길이외다.”

김종서는 내심 의아했으나 아들 승규에게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승규가 사모뿔을 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유숙․양정이 김종서의 뒤통수를 철퇴로 내리쳤습니다. 순간 승규는 몸을 날려 아버지를 온몸으로 껴안았습니다. 아들 승규가 정통으로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숨이 붙어있는 김종서를 다시 내리쳤습니다. 김종서는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얼마 후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인 차 이흥상을 보냈습니다. 아들집에서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던 김종서를 찾아내 칼로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백두산 호랑이는 갔습니다.

실록은 김종서의 죽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종서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상처를 싸맨 뒤 여자 복장으로 변장하고 가마에 올라 입궐을 시도했다. 하지만 돈의문,서소문,숭례문 세문이 모두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숨었다. 얼마 후 문지기에게서 보고를 받은 수양대군이 양정과 이흥상을 급파해 김종서를 죽였다.

수양 대군은 단종에게 아뢰었습니다.

“김종서가 모반하여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계할 틈이 없었나이다.”

“숙부, 날 살려주시오.”

“염려마십시오. 전하. 신이 무사하시도록 조처하겠다옵니다.”

수양대군은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이하 여러 신하들을 불렀습니다. 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이 연달아 살해당했습니다. 안평대군과 정분은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습니다. 한명회의 살생부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죽어나갔습니다.

계유정란에 직접 가담하거나 방관했던 신숙주, 정인지, 권남, 한명회, 양정 등 43명을 정난공신으로 봉했습니다.

수양대군이 잔치를 베풀고 논공을 할 때 철퇴를 면한 조신들 틈에 좌찬성 허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신들은 모두들 흥겨워 웃고 있는데 그만이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추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대신들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효수하자고 하자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분이 무슨 죄가 있소이까. 나는 그분들이 죄가 없다 것을 다 알고 있소이다.”

수양대군은 대노했습니다.

“그래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더냐. 죽고 싶더냐?”

“대신들이 다 죽었는데 허익이 살아있음은 뜻밖이외다. 어찌 술과 고기를 입에 넣을 수 있으리오.”

수양대군은 그를 거제도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역시 그도 나중에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사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수양대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허익이 살아있었더라면 육신이 칠신이 될 뻔하였구나.”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공양왕 12년, 1390-단종 1년, 1453). 호는 절재, 본관은 순천입니다.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사간원 우정언을 거쳐 세종 16년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 여진족을 평정하고 육진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했습니다.『고려사』를 개찬하고『고려사절요』를 감수했습니다. 단종 1년 수양대군에 의해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략이 뛰어나고 강직해서 대호라는 별명을 얻었으며『제승방략』이라는 병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김종서는 영조 22년(1746)에야 복관되어 충절의 이름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계룡산 동학사의 숙모전에는 계유정란 때 죽은 이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김종서의 묘는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에 있습니다. 당시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어 시신 전부를 거두지 못하고 다리 한쪽만 이 곳에 묻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생가지는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 있습니다. 의당초등학교 건립시 이 유허지를 확보하여 1927년 개교 이후 학생들의 교육장으로 관리해오고 있습니다.

역적과 충신의 잣대가 어디에 있고 명분과 실리의 잣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참으로 지혜로운 삶이 필요한 때입니다.

찾아가는 길

동학사 숙모전

충청남도 기념물 제 18호.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1로 462.

숙모전은 억울하게 죽은 단종과 사육신,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김종서 등 신라, 고려, 조선의 충절인 280여 위를 배향하고 있는 사우이다.

- 석야 신웅순의 서재

[출처] 김종서의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작성자 석야

 

 

 

 

<야연사준도>. 북방 개척 중 관아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 중앙의 술항아리에 꽂혀 모두 놀라워하고 있는데 김종서는 "간사한 자가 나를 시험하려 한 것"이라며 태연히 연회를 즐겼다는 일화를 묘사한 그림. 누각 안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김종서다. /  사진출처 : namu.wiki/w/김종서 나무위키 

 

 

* 시조창 남창지름시조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 남계 박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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