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5장 극락정토는 각자가 마련하는 것 - 3. 깨달으면 이 세상이 곧 정토 - 유심정토

2013. 8. 17. 20:25경전 이야기

 3. 깨달으면 이 세상이 곧 정토 - 유심정토

 

 

정토니 예토니 하는 세계, 즉 국토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깨달으면 이 세상이 그대로 정토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국토는 자·타(自他)의 인연과 내·외(內外)의 인연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고 한다.

 

자·타의 인연이란 부모와 자식, 부부 등의 인간관계를 말한다. 이것은 나와 나 이외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라고 해도 좋다.

 

인간은 아무도 혼자서는 생활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업연(業緣) 관계로 얽혀 있는 이 인간에 의해 세계는 성립한다. 내·외의 인연이란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말한다.

 

인간의 생활은 산이나 강이나 초목 등 모든 대자연에 의존함과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든 천지만물과 교섭을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생활은 자타와 내외의 업연 관계로 성립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외부세계(外界)라 부르는 것도 인간의 업의 과보로서 느끼는 세계다.

 

여기서 느낀다는 것은 감각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외부세계란 감각의 내용으로서 존재한다. 보고 듣고 맛보고 접촉하는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계는 우리들의 감각으로 느끼는 세계다.

 

그런데 느끼는 것은 우리의 심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떠한 세계에 사는지를 어떠한 심신을 가지고 있는지에 달려있다.

 

이것은 동물의 세계를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늘을 날으는 새나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은 각각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인간의 세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맹인이나 농아인이 느끼는 세계는 정상인과 다르고, 어린아이의 세계는 어른과 다르다. 건강상태의 여하에 따라서는 추위와 더위의 계절도 또한 다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에 따라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통의 세계에도 여러 가지 층이 있다. 가족의 세계, 동족의 세계, 인류의 세계,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 등이 중첩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갖가지 공통의 세계에 살면서, 동시에 갖가지 특수한 세계에 산다.

 

이 공통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공보(共報)라 하고, 특수한 세계를 불공보(不共報)라 한다.

 

공보는 공통된 업의 과보라는 뜻이고, 불공보는 각 개인에 한정된 업의 과보라는 의미다.

 

따라서 국토란 공업의 과보로서 느껴지는 것이고, 인간 개개인은 불공업의 과보로 된 것이다.

 

한국인의 국토는 한국인이 다 같이 지은 업, 즉 공업에 의해 성립한 것이고, 각 개인의 신체는 그 사람 각자가 행한 업, 곧 불공업에 의해 받는다. 그러나 공업과 불공업은 분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똑같이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공업에 의한 것이고, 많은 시대 가운데 하필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개인의 불공업에 의한 것이므로 공업과 불공업은 결코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사는지는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국토는 우리의 업의 과보로서 느끼는 세계다. 업을 깨끗하게 하면 국토도 깨끗해진다.

 

산업에 의해 좋은 국토, 곧 정토가 형성되고, 악업에 의해 나쁜 국토, 곧 예토가 만들어진다. 이 국토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을 '정토의 수행'이라 하고, 그 깨끗해진 세계를 '정토'라 한다. 그러므로 정토의 수행은 열반으로 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열반이란 불교의 이상으로서, 차별과 동란을 떠난 일여적정(一如寂靜)의 경지를 말한다.

 

 

구도자 석가모니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만물은 변한다'는 것이였다. 모든 만물은 항상 움직여서 변화하며 정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는 멸한다. 이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다.

 

이어 두번째로 발견한 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였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자기, 영원불변한 자아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神)의 거부이고, 자아의 부정이다. 그렇다면 신도 없고 자아도 없는데 어떻게 만물은 존재할 수 있을까? 일체 만물의 기반이 되고 의지처가 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일체 만물의 기반이 되고 의지처가 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석가모니의 명상과 고민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발견한 것이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세번째의 진리였다.

 

생과 사, 고와 낙, 선과 악, 유와 무 등의 모든 대립을 초월한, 적멸안온한 이 열반의 경지야말로 일체 존재의 의지처가 되는 절대적 실재세계로 직관(直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분별 이전의 통일적 의식(意識)에 의해서만이 체인(體認)된다. 의식 이전의 의식, 한 마음도 생하지 않는 일념불생(一念不生)의 경지에서만 실증된다. 이러한 열반적정의 경지는 모든 분립적 의식이 생하는 원천이고, 따라서 삼라만상이 각각의 개체로서 인식되는 근원으로서, 개현(開顯)하지 않으면 안 되는 궁극적인 마음이며, 또한 평안한 낙토(樂土)이기도 하다.

 

이상의 세 가지 진리는 예로부터 삼법인(三法印)이라 불러왔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진리는 반드시 석가모니의 독자적인 사상이라 할 수 없지만, 이 열반적정의 진리는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개발한 것으로서, 특히 불교의 중요한 궁극적 진리다.

 

만일 이 열반의 경지가 현상세계를 무시하고, 또 생사고락하는 인간생활과 격리되어, 어딘가 혹은 마음 한 구석에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불교교리는 일종의 관념론으로 끝날 것이다. 관념론이란 현실을 떠난 일종의 공허한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열반의 경지는 깨달아서 얻는 궁극적인 마음이기 때문에 생각으로만 그치는 공허한 것이 아니다. 실은 유전하고 생멸하는 찰나적인 일체 현상 가운데 법신(法身)이라 불리는 그 영원한 진리가 내재해 있고, 생사고락하는 현실적인 인간생활 속에서 열반의 경지는 파악된다.

 

어느 날 제자가 스승에게 "색신(色身)은 멸하는데 어째서 법신(法身)은 견고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승은 "산 벗꽃이 피어서 비단과 같고, 골짜기 물이 가득 고여 쪽빛(藍)과 같다."라 하였다. 불멸의 법신은 산 벗꽃이 일시에 확 피어 나풀나풀 떨어지는 그 찰나 속에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깜빡거릴 틈도 없이 흘러가 물살이 빠른 여울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상 가운데 실재(實在)를, 찰나 가운데 영원을 발견하는 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다.

 

이것은 반야(般若)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견해이고, 법화(法華)의 제법실상의 사상이며, 화엄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세계관이다. 이것은 말을 바꾸면 세계의 재인식이고, 불지(佛地, 부처의 경지)의 발견이다.

 

이와 같이 유한한 것, 멸해 가는 것을, 무한한 것, 영원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눈을 불지견(佛知見)이라 한다. 이러한 불지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잡다한 현상세계는 그대로 제법실상으로서,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 즉 정토로 인식된다. 이런 이유에서 깨달으면 이 세상이 그대로 정토라 하는 것이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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