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호 이익의 유삼각산기

2013. 5. 14. 23:50산 이야기

 

 

 

 

 

지금으로부텨 300여년전 1707년,

삼각산 산행을 하고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라는 산행기를 남긴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溺)의 흔적을 따라 삼각산을 오르기로 하고 나섰다.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는 삼각산 산행기로써

성호 이익의 시문집 성호집(星湖 集)'에 수록되어 있다. 

한국컨텐츠진흥원의 '조선시대 유산기'와 

김윤우의 '북한산 역사지리'에 실린 번역문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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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지지(地誌)를 살펴보건대, 삼각산을 일명 부아산(負兒山)이라고도 하였다.

부아산은 서울의 종산(宗山)으로서, 대개 도봉산으로부터 (그 맥이) 남쪽으로 달려와서

백운봉(白雲峯)에 이르러 비로소 우뚝 솟았다.

백운봉 남쪽에는 만경봉(萬景峯)이 있고, 동쪽에는 인수봉(仁壽峯)이 있는데,

모두 그 높이가 백운봉과 비슷하다.

그 중 인수봉이 더욱 깎아세운 듯 우뚝 솟아 있어서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하며,

바라다보면 가장 빼어난 절경이다.

실로 다른 두 산봉우리와 나란히 대치하고 있어서 삼각(三角)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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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제작 추정,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경기도 양주목,규장각 소장>의 부분 확대.

 

이익은 먼저 지지를 참고하여 삼각산의 이름과 주변 지리적 상황을 설명한다.

어린아이(인수봉)를 업은 형상을 하고 있어 부아산(負兒山)으로 불리기도 했던 삼각산,

백두대간 한북정맥의 도봉을 거쳐 백운봉에 우뚝 솟은

서울의 종산 삼각산은 세 봉우리(백운봉, 만경봉, 인수봉)로 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인수봉이 가장 빼어난 절경이라고 기록한다.

 

위 지도는 1700년대 중반에 제작된 팔도군현지도의 (한성부를 포함한)양주목지도의 일부분으로써

백두대간에서 뻗어와서 도봉산 - 삼각산 - 북한(한양의 북쪽으로 현재의 북한산지역) - 북악으로 이어지는

지세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익의 설명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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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노적봉(露積峯)이며, 노적봉 아래가 중흥동(中興洞)이다.

중흥동에는 중흥사(中興寺)가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이 취봉(鷲峯)이며, 그 줄기가 남쪽으로 돌아서 가다가 고개를 이루는데,

이 고개가 곧 석가령(釋迦領)이다.

이 석가령 동쪽을 조계(漕溪)라고 하는데, 이 곳에는 조계사(曹溪寺)가 있다. 절 경내에 폭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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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漕溪)와 조계사(曹溪寺)를 거쳐 석가봉에 오르게 된 이익은

석가령-현재의 대동문 바로 옆에 위치한 석가봉-을 중심으로 삼각산과 그 주변을 설명한다.

노적봉아래 삼각산의 중심인 중흥동에 자리잡고 있는 고찰 중흥사와

석가령밖의 조계(계곡)의 조계사와 (조계)폭포의 존재를 설명한다.

 

나는 북한산 산행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수유동, 우이동 방면은 거의 오른 적이 없어

이번 산행을 준비하며 약간 걱정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손쉽게 파악할 것으로 알았던 '조계'와 '조계사'의 존재와 위치때문에

산행준비때부터 산행을 마치고 산행기를 쓸때까지도 혼란을 격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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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령의 서쪽 줄기는 나한봉(羅漢峯)의 여러 산봉우리이고,

이 산봉우리들이 노적봉의 오른쪽 산록과 더불어

중흥동의 골짜기 입구에서 띠가 매이고 옷깃이 합쳐지듯 서로 만난다.

이곳이 바로 옛 북한산성의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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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봉에서 바라보는 삼각산 안쪽은

오른쪽 노적봉에서 내려온는 능선과 왼쪽 나한봉방향에서 내려오는 능선이

중흥동계곡에서 좌우 옷깃처럼 가지런히 만나는데

이곳이 삼국시대이래로 전략요충지인 옛 북한산성터(한수 이북의 산성)로

중흥산성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다시 설명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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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령에서 곧장 남쪽은 보현봉(普賢峯)의 여러 산봉우리가 되고,

그 맥이 점점이 뻗어 나가며 열지어 인왕산(仁王山)이 되니,

이 일대가 바로 우리나라 조종의 만세토록 공고한 터전이다.

지금 감히 다 기록하지 못한다. 

보현봉의 서쪽 줄기는 문수암(文殊菴) 산봉이 되고,

문수암의 물은 탕춘대(蕩春臺)를 경유하여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니

이것이 그 대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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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제작, <대동방여전(大東方與全圖)中  경조오부(京兆五部)>

 

대동여지도 이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방여전도'에 수록된 도성도인 '경조오부'도

 삼각산과 도성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는 지도이다.

 

종산(宗山) 삼각산의 지세가 뻗은 곳에 자리잡은 한양,

이익은 한양을 천만년 이어갈 왕조의 터전으로 염원하고...

구기계곡, 세검정, 사천(沙川, 모래내)을 거쳐 한강으로 흐르는 물길과 함께

삼각산 설명을 마친다.

 

이제 산행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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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해년(丁亥年 ; 1707, 숙종 33) 중춘(仲春) 에 북한산을 유람하러 가고자 하였는데,

따라가기를 원하는 한 사람 있어 마침내 그와 함께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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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이 삼각산 유람을 떠난 때는 1707년 봄기운이 한창인 중춘(음력 2월)이었다.

때는 북한산성이 축조되기 4년전이었다.

이름모를 동행자 한 사람과 같이...

 

내가 성호 이익의 흔적을 따라 삼각산을 오르기로 한 때는

2010년 8월 한여름 뜨거운 태양을 식혀주는 폭우가 쏟아지는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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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경자일(庚子日)에 집에서 출발하여 18일 신축일(辛丑日)에

동소문(東小門)을 경유하여 느린 걸음으로 조계동(曹溪洞)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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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경기도 안산 첨성리의 성호(星湖)라는 호숫가 근처에 있는 집을 출발하여

도중에 어디선가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익이 하룻밤 머문 곳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본디 이익 집안은 여주 이씨지만 '정릉 이씨'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지금의 서울 정동(貞洞)에서 일가의 세를 형성하였는데

그곳 어느 인척의 집에 머물렀지 않았을까?

다음날 지금은 혜화문이라 부르는 동소문을 거쳐 삼각산을 향해 나섰다.

 

  <대동방여전(大東方與全圖)中  경조오부(京兆五部)>의 부분 확대.

 

타락산(지금의 낙산)위쪽에 있는 혜화문을 나서 안암동위쪽 길을 지나

적유현(狄踰峴, 지금의 미아리고개)을 넘어 삼각산을 왼쪽으로 어깨동무하고 가다가 

수유현을 지나 조계사가 있는 조계동으로 들어섰다.

지도에는 조계사와 비슷한 화계사(花溪寺)가 표시되어 있다.

 

나는 8월 7일,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수유역에 도착하여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우이동계곡에 도착했다.

산행전에 조계사의 위치를 찾아 봤으나 알 수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이익이 조계를 거쳐 석가령을 올랐기에 석가령에 오름직한 코스를 살펴봤다.

진달래능선 좌우의 계곡인 구천계곡과 소귀천계곡 둘중의 하나로 판단하고 

계곡이 깊을 것 같은 소귀천계곡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결과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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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산(入山)에 대한 율시(律詩) 한 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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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백담 그 시절...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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