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8장 인도의 정토사상 - 3. 무착의 정토사상/4. 세친의 정토사상

2013. 8. 27. 14:26경전 이야기

 3. 무착의 정토사상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용수에 이어 인도에서 정토사상에 관해 설명한 논서는 <섭대승론(攝大乘論)>이다.

 

이 책은 무착(無着, Asanga, 310~390년경)의 주된 저술로서, 유가유식(瑜伽唯識)의 입장에서 쓴 일종의 대승불교 개론서다. 현재 산스크리트본은 산일되어 없지만 무착의 저술이라는 점에는 의심이 없다.


<섭대승론>에서는 극락에 태어나고 싶다고 원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은 '별시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한다.

 

 

 

4. 세친의 정토사상

 

 

무착에 이어 정토사상을 조직적으로 설한 사람은 그의 동생인 유가유식 철학의 시조 세친(世親, 舊譯은 天親, Vasubandahu, 320~400년경)이다.

 

그는 처음에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학자였지만 후에는 형 무착의 권유로 대승에 전향하여 유가유식 사상의 대성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인간의 생존을 마음 속의 관념의 표상이라보는 설을 주장하여 불교사상에 일대전환을 가져온 대학자다.

 

그의 주된 저술로는 <아비달마구사론><유식삼십송><유식이십론><섭대승론석><십지경론><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無量壽經優婆提舍願生偈)>(일반적으로 <정토론> <왕생론>이라 함) 등이 있으며, 특히 <무량수경>에 주석을 붙여 정토사상을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정리한 것이 마지막의 <정토론>이다.

 

<정토론>은 보리류지(菩提流支)가 번역한 것이 있으며, 현재 산스크리트본과 티벳역은 산일되어 없지만, 이 책이 세친의 저술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 정토교의 개조인 법연은 <정토론>을 정토종의 소의논서로 삼아 정토삼부경인 <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과 함께 정토종의 삼경 일론 이라 하여 정토삼부경 다음 가는 중요한 책으로 간주하였다.

 

<정토론>에서 사용한 정토경전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무량수경>의 한역 가운데 강승개 번역(252년)으로 간주되는 <무량수경>을 불타발타라와 보운이 421년에 공동 번역한 것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세친의 시대 (320~400년)에 인도에서는 이미 48원 계통의 후기 <무량수경>이 유포되어 있었을 것이므로 세친도 이 후기 <무량수경>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이론(異論)이 많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세친의 <정토론>은 인도에서 정토사상을 조직적으로 해명한 유일한 논서로서, 후세에 특히 ·한국·中國·일본의 정토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친의 정토사상은 무착의 <섭대승론>을 주석해서 만든 <섭대승론석>에서 '별시의'설을 부연·해석하고 있으므로 이 점에서 형무착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정토론>에서 유가유식 사상가의 입장에서 정토사상을 고찰한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섭대승론석>에서와는 달리 오히려 정토사상을 적극적으로 고취하고 있다.

 

<정토론>은 한역으로 24행 96구절의 게송과 3,000자 정도의 산문으로 된 한 권의 작은 책이다. 산문은 게송에 대한 세친 자신의 주석인데, 주석은 게송 전체를 인용하고 있지만 서술 의도는 상당히 다르다.

 

산문이 게송의 주석이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세친의 다른 저술, 예를 들면 <유식삼십송>이나<삼성론게>등의 형태에서 볼 때, <정토론>의 게송과 산문은 원래는 각각 다른 본으로 유포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게송은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일심으로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안락국(安樂國)에 태어날 것을 원하는 원생(願生)의 뜻을 표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일심으로 모든 시방의 무애광여래께 귀명하여, 안락국에 태어나기를 원하옵니다.

 

이와 같은 예는 수많은 세친의 저술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정토론>은 세친 자신의 종교적 귀추를 분명히 한 논사라 불린다.

 

게송의 대부분은 소위 3엄(嚴) 29종(種)이라는 정토의 장엄을 설한다.

 

'3엄'은 불국토장엄과 불(佛)장엄과 보살장엄을 말한다.

 

게송에서는 각각의 장엄 명칭을 사용하지 않지만, 산문부분에서는 3엄 29종 장엄의 명칭을 밝히고 있다.

 

불국토장엄에는 17종류가 있는데, ①장엄청정(淸淨) 공덕성취, ②장엄무량(無量) 공덕성취, ③장엄성(性) 공덕성취, ④장엄형상(刑相) 공덕성취, ⑤장엄종종사(種種事) 공덕성취, ⑥장엄묘색(妙色) 공덕성취, ⑦장엄촉(觸) 공덕성취, ⑧장엄삼종(三種) 공덕성취, ⑨장엄우9雨) 공덕성취, ⑩장엄광명(光明) 공덕성취, ⑪장엄묘성(妙聲) 공덕성취, ⑫장엄주(主) 공덕성취, ⑬장엄권속(眷屬) 공덕성취, ⑭장엄수용(受用) 공덕성취, ⑮장엄무제난(無諸難) 공덕성취, (16)장엄대의문(大義門) 공덕성취, (17)장엄일체소구만족(一切所求滿足) 공덕성취다.

 

불장엄에는 여덟 종류가 있는데, ①장엄좌(座) 공덕성취, ②장엄신업(身業) 공덕성취, ③장엄구업(口業) 공덕성취, ④장엄심업(心業) 공덕성취, ⑤장엄대중(大衆) 공덕성취, ⑥장엄상수(上首) 공덕성취, ⑦장엄주(主) 공덕성취, ⑧장엄불허작주지(不虛作住持) 공덕성취다.

 

보살장엄에는 네 종류가 있는데 명칭이 없었으나, 후대에 붙여진 이름을 들면 ① 장엄부동이지(不動而至) 공덕성취, ②장엄일념변지(一念遍至) 공덕성취, ③장엄무상공양(無相供養) 공덕성취, ④장엄시법여래(示法如來) 공덕성취다.

 

3엄 29종 장엄 가운데, 처음의 불국토장엄 공덕은 중생이 극락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원생심(願生心)에 응해서 정토의 모습을 설하고, 불장엄 공덕은 정토왕생이 부처님의 원심(願心)에 의해 가능함을 나타내며, 마지막의 보살장엄은 정토에 왕생한 보살의 원심(願心)은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 태어나 중생구제하기를 원하고 있다.

 

산문부분에서는 게송의 의미를 하나하나 해석하고 있는데,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실천방법으로서 ①예배문(禮拜門), ②찬탄문(讚歎門), ③작원문(作願門), ④관찰문(觀察門), ⑤회향문(廻向門)의 오념문(五念門)을 설한다.

 

이것은 <정토론>의 가장 중요한 골자다. 제1의 예배문이란 문자 그대로 아미타불을 예배함을 말한다.

 

<정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엇이 예배인가? 신업(身業)으로써 아미타·여래·응공·정변지를 예배하는 것이니, 저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래·응공·정변지는 여래십호의 처음 3호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아미타불의 별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행위(業)를 세 가지로 나누어 신(身)·구(口)·의(意) 삼업으로 분류한다.

 

손이나 발 등 신체로 행하는 것을 신업이라 하고,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거나 독경하는 것을 구업, 신업이나 구업이 나타내는 것을 마음 속에 생각하거나 원하는 등의 마음 작용을 의업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예배할 때는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원생(願生)의 마음으로(意業), 입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서(口業), 몸으로 예배하는 것(身業)이 보통이다.

 

예배문도 삼업 중에서 신업에 의한 예배, 즉 몸으로써 아미타불을 예배하는 행위를 말하기는 하지만, 위의 예배문에서 '저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라 하므로, 일심으로 모든 시방의 무애광여래께 귀명하여 안락국에 태어나고자 하는 뜻, 다시 말하면 그 서원이 신업으로 나타난 것이 예배다.

 

<정토론>의 제2 찬탄문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 찬탄인가? 구업(口業)으로써 찬탄한다.

 

저 여래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어서, 저 여래의 광명지상(光明智相)과 같이 하고, 저 명의(名義)처럼 여실히 상응(相應)을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찬탄문은 학자들에 따라 두 가지 번역이 있다. 그것은 '상응'을 명사로 번역하느냐, 동사로 번역하느냐의 차이다.

 

명사로 번역하면 위의 내용처럼 '저 명의처럼 여실히 상응을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로 해석하고, 동사로 번역하면 '저 명의처럼 여실히 수행하여 상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가 된다.

 

그런데 이 '상응'과 똑 같은 용법을 사용한 문맥이 제3 작원문과 제4 관찰문에서도 나온다.

 

즉 작원문에서 '여실히 사마타를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의 사마타와 관찰문에서 '여실히 비바사나를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의 비바사나가 모두 명사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므로 찬탄문도 '여실히 상응을 수행하고자 원하기 때문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찬탄문은 무애광여래의 이름을 부르고 찬탄하는 구업을 말하는데, 이것은 상응을 수행하기 위해서라 한다.

 

상응이란 요가(yoga) 즉 유가(瑜伽, 止觀)를 말하며, 제3 작원문과 제4 관찰문의 준비로서 아미타불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작원(作願)인가? 마음 속으로 항상 원을 세우고 일심으로 오로지 필경에는 안락국토에 왕생하기를 염(念)해서 여실히 사마타를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앞의 2문(門)이 각각 신업과 구업임이 명기되어 있지만, 작원문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의업(意業)에 해당된다는 것은 산문부분을 보면 분명하다.

 

작원문이란 일심으로 전념에서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사마타의 행을 닦는 것이라 한다.

 

사마타(Samatha)란 '지(止)'라 번역하며, 마음이 적정(寂淨)한 상태로서 어떠한 것에도 혼란되는 일이 없이 한곳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일심으로 전념해서 서방정토에 왕생하려는 것에 마음을 고정하여(止)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사마타로서, 세친은 사마타를 이루는 것을 작원이라 하였다.

 

이것은 다음의 관찰문을 성립시키기 위해 꼭 필요하다.

 

불교의 수행에서 지관은 매우 중요하다.

 

지관(止觀)의 '지'가 사마타다. '관(觀)'은 예를 들면, 아미타불과 정토를 마음 속에 실재 모습처럼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인데, 이러한 관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울이 참모습을 비추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평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들 마음도 아미타불과 그 정토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잡념이 없이 고요하고 맑아야 한다.

 

이것을 적정삼매(寂淨三昧)라 하는데, 이 적정삼매가 되는 것이 사마타다.

 

작원문에서 사마타를 이룬다는 것은 '일심으로 정토에 왕생하고 싶다'고 하는 원심이 순화되어 적정삼매가 되는 것을 말한다.

 

제4 관찰문은 사마타에 의해 명경처럼 맑아진 마음에 정토를 똑바로 떠올리는 것이다.

 

<정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관찰인가? 지혜로써 관찰하고 정념(正念)으로 그것을 관(觀)하여 여실히 비바사나(毘婆泗那)를 수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불국토의 장엄 공덕을 관찰하고, 둘째로는 아미타불의 장엄 공덕을 관찰하며, 셋째로는 모든 보살들의 공덕 장엄을 관찰한다.

 

관찰문에 대한 서술이 <정토론>의 게송과 산문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비바사나(vipasyana)는 지관(止觀)의 관(觀)을 말한다.

 

관은 '지혜로써 관찰한다'고 하듯이 지혜로써 관념(觀念)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지혜를 성립시키는 것이 '지'이고 이 '지'로 만들어진 지혜로 관념하는 것이 '관'이다.

 

다시 말하면, 작원문에서의 사마타의 수행, 즉 '지'에 의해 적정삼매가 된 마음 위에 전개되는 지혜의 작용으로, 정토와 아미타불과 모든 보살의 장엄 공덕을 관찰하는 것이 관찰문이다.

 

관찰문은 마음의 작용 중에서도 지혜(智)의 작용이기 때문에, 산문부분에서는 이것을 지업(智業)이라 하였다.

 

불교에서는 초인적인 경계를 파악하는 지혜는 지(止)에서 나오며, 이 지로서 관(觀)할 때 비로소 인간적인 상태를 초월한 부처의 경계를 완성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가 신통자재하다는 것은 묘술이나 마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지관에 의해 성립된 예지(叡智)로서, 범부 이상의 차원의 경지를 완성했다는 의미다.

 

제4의 관찰문은 이와 같이 지관을 통해 아미타불과 그 정토와 보살들을 관찰하는 것인데, <정토론>에서는 다시 "이와 같이 보살이 사마타와 비바사나의 광략(光略)을 수행하면 유연심을 성취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광(光)이란 아미타불과 그 정토와 보살들의 장엄을 하나하나 상세히 아는 것이고, 약(略)은 모든 장엄을 종합해서 아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이 정토의 모습을 관하면 유연심이 생긴다고 했는데, 유연심이란 관찰한 정토와 부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찰문에서는 정토의 참다운 모습을 관찰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완전한 신앙을 성립하는 것이다.

 

제5 회향문에 대해 세친은 관찰문을 지업(智業)이라 한 것에 반해, 방편지업(方便智業)이라 하였다.

 

방편이란 일반적으로 수단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일체 대중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노력이나 이익을 베푸는 방법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정토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 회향인가?

 

일체의 고뇌 중생을 버리지 않기를 마음 속에 항상 원을 세우고, 회향을 첫째로 삼아 대비심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예배와 찬탄과 작원과 관찰의 네 가지 수행으로 얻은 정토왕생의 공덕은 물론 자신의 왕생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삼지 말고 일체 대중을 위해 베풀라는 것이 회향문을 설정한 의의다.

 

이것은 한마디로 대승정신인 '일체 대중과 함께'라는 보리심의 구체화다.

 

세친은 회향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 종류의 보리문상위법(菩提門相違法)을 여의고 그 대신 세 종류의 수순보리문법(隨順菩提門法)을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세 종류의 수순보리문법은 세 종류의 보리문상위법에 반대되는 것인데, 첫째는 자신을 위해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 무염청정심(無染淸淨心)이고, 둘째는 일체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주는 안청정심(安淸淨心)이며, 셋째는 일체중생이 대보리를 얻게 하고, 중생을 섭취해서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하는 낙청정심(樂淸淨心)이다.

 

보살이 이 세 가지 마음을 일으키면 보리심에 따르는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무량수경>의 삼배왕생의 삼배는 모두 다 보리심을 내어 그 공덕으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세친도 회향문에서 정토에 왕생하는 자는 보리심을 닦는 데 철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친의 오념문의 중심부분은 제3 작원문과 제4 관찰문이며, 그 중심은 사마타(止)와 비바사나(觀)를 닦아 왕생의 업으로 삼는 것에 있다.

 

이 사마타와 비바사나의 수행이 바로 유가행(瑜伽行)이므로, 오념문의 체계는 유가유식 사상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고 추정한다.

 

전체적으로 세친이 설하는 정토는 여래의 내식(內識)에서 변해 나타난 것으로서 청정하고 자재로운 유식지(唯識智)를 체(體)로 삼는다고 하기 때문에 매우 유심론적으고 형이상학적이지만, 용수의 현생불퇴(現生不退)의 설보다는 훨씬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세친의 오념문의 수행방법은 후대의 염불왕생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지만, 그 업을 보리심으로 순화시킨 점은 그 후의 <무량수경>해석에 하나의 궤도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산문부분에서는 왕생의 과보로서 근문(近門)·대회중문(大會衆門)·택문(宅門)·옥문(屋門)·원림유회지문(園林遊戱地門)의 오과(五果門)문을 설하고, 보살은 오과문에 이르기 위한 수행인 오념문을 닦아 자리·이타하여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설한다.

 

'별시의(別時意)'란 부처님이 게으른 중생을 수행에 전념시키기 위하여 실제로는 먼 미래의 별시(別時)에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즉시(卽時)에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결국 부처님의 방편유인의 설법임을 말한다.

 

이것은 <섭대승론>이 유식철학의 입장에서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그 후 유가행파의 일관된 견해가 되었다.


이 '별시의'설로 인해 후세에는 정토사상 전체를 방편설로 보거나 혹은 일부만을 방편설로 간주하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는데, 어느 것이든 정토사상을 비판하고 멸시한 것이었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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