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화가, 루 페테르 파울 루벤스

2013. 8. 28. 11:48美學 이야기

 

 

 

    누군가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가를 뽑아 보라면 아마도 사람들마다 의견이 갈릴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미술가를 선정하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한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다. 1577년 태어난 그는 1640년 유명을 달리하는데, 일생 부와 명성을 쥔 명실상부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 제일의 화가라 할 수 있다.

 


↑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46세 자화상>,1623년

 

   루벤스는 위대한 미술가 명단에도 당당히 이름을 내밀 정도로 재능 넘치는 작가였지만, 그의 이름은 비즈니스적으로 성공한 미술가 명단 속에서 더 환하게 빛을 발할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루벤스는 이미 미술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현세의 부와 명예를 호화롭게 누렸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상업주의 미술의 작동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예견한다. 연예인만큼 유명해지고 싶은 미술가, 일상과 예술을 아우르는 다재다능한 아티스트를 말하라면 우리는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을 연상한다. 그러나 루벤스의 경우도 이러한 평가가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할 수 있다. 아마도 루벤스는 좋은 작가가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유명해지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발상을 바꾼 최초의 근대적 작가였을 것이다.

 

   그는 파티와 이벤트를 여는 것도 작품 활동만큼이나 중요시했다. 그의 작업실은 언제나 당시 상류층이 모이는 사교의 장이 되곤 했다. 물론 파티는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을 홍보하는 장으로 이어졌다. 그는 일필휘지의 필력을 선보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비서에게 시를 불러 주거나 편지를 받아 적게 하고, 동시에 조수들에게 작업 지시를 내리는 등 1인3역의 정열적인 일처리 능력으로 방문객들을 감동시키곤 했다.

   그는 화가면서도 자기 매체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섬유, 건축, 파티 인테리어 등 자기의 재능이 발휘될 만한 장이라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참여했다. 특히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던 판화뿐 아니라 책의 표지 디자인 같은 일급 화가가 맡아서 하기에는 다소 허접해 보이는 일거리조차도 서슴없이 받아 처리했다. 판화나 책 디자인을 통해 자기의 이름을 세상 방방곡곡에 알릴 수 있다는 것을 루벤스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앤디 워홀의 뒤를 이어 네오 팝아트의 세계를 펼치는 제프 쿤스는 한때 이탈리아의 포르노 여배우 치치올리나와 연분을 뿌리며 결혼해 세인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화젯거리도 그의 작품 가격을 올리는 데 적지 않은 일조를 했을 것이다. 한편 피카소도 80세의 나이에 35살의 여성과 결혼해서 자신의 건재함을 색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이렇게 스캔들을 이용한 마케팅의 원형도 루벤스의 생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루벤스는 1626년에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이 흑사병으로 사망하자 4년 만에 재혼을 하게 된다. 새 신부의 나이는 고작 열 여섯이었고, 이때 루벤스의 나이는 이미 쉰 셋이었다. 새 부인은 나이만 어린 것이 아니라 ‘북유럽의 비너스’라고 까지 불리우는 절세미인이었다. 루벤스는 이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생의 마지막 10년간 제작된 그림 속에 사랑스런 신부를 수도 없이 그려 넣는다. 특히 자신의 사랑스런 어린 부인을 누드화로 남기기까지 했다. 화면 밖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다소곳하면서도 당당하다.

 


↑ 루벤스, <모피를 두른 헬레나 푸르망>,1630년대

 

   열 여섯의 나이로 루벤스에게 시집 온 그녀는 이후 10년 동안 루벤스와 살면서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낳는다. 마지막 아이는 루벤스가 죽은 후에 태어났다. 사후 루벤스는 부인과 자식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이뿐만이 아니다. 역대 화가들 중 부동산에 대한 열망에 관한 한 루벤스의 배포를 앞지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는 20대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고 1608년 고향인 벨기에 북부의 제2도시 앤트워프로 돌아온다. 당시 예술의 본고장이었던 이탈리아 땅에서 명망을 얻은 신예 작가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주변의 왕공귀족들은 앞 다투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는 이러한 물밀듯 쇄도하는 주문을 멋진 작품으로 화답했다.

 

   초창기의 수입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는 단 2년 만에 지금 봐도 엄청나 보이는 이탈리아풍 대저택을 앤트워프 한복판에 짓게 된다. 건축비로 무려 2만 4,000길더가 소요된 이 저택은 그의 작업실 겸 오피스로 적극 활용된다. 한편 루벤스는 곧이어 투자 목적으로 앤트워프 시내에 집을 한 채 더 사기도 한다. 게다가 새 신부를 맞아들인 노년의 루벤스는 시내 외곽에 있는 고성과 주변의 땅을 사들인다. 투자 목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분주했던 여생을 조용히 마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거래 가격을 보면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무려 9만 길더에 달했는데, 현재로 환산하면 거의 100억 원대 수준이다. 하지만 그가 사들인 땅 주변의 광활한 평야와 성의 규모를 보면 납득이 간다. 스텐 성과 주변의 땅을 사들인 루벤스는 스스로를 ‘스텐 경’이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그의 여유로운 노후는 말년의 풍경화에 잘 담겨 있다.

 

   루벤스는 모든 면에서 웬만한 왕공귀족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사실 그는 기사 작위도 가지고 있었다. 루벤스는 기사 작위를 하나도 아니라 두 개나 받았다. 당시 플랑드르를 지배하던 알버트 공작의 외교 특사로 스페인과 영국에 파견돼 활동하면서 두 국가에서 각각 기사의 작위를 수여받은 것이다. 지금도 영국의 미술관에서는 루벤스의 이름 뒤에 항상 경이라는 작위를 함께 사용한다.

 

   한편 소득 면에서도 루벤스는 당시 왕공귀족에 뒤지지 않았다. 당시 군소 귀족들의 대략적인 연수입은 6,000~1만 4,000길더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팔아서 연간 3만 길더 이상의 소득을 올린다. 이밖에도 루벤스는 골동품 거래를 통해 상당한 부수입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1626년에는 자신의 컬렉션을 일괄적으로 10만 길더에 영국의 버킹엄 공작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