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신(三美神) / 루벤스 - 제민일보 기사

2013. 8. 28. 11:57美學 이야기

 

 

 

      

화려한 바로크 미술의 거장, 관능미를 그리다
[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29. 루벤스의 <삼미신>
  등록 : 2012년 07월 09일 (월) 18:18:24 | 승인 : 2012년 07월 09일 (월) 18:26:32
최종수정 : 2012년 07월 09일 (월) 18:23:19
전은자 webmaster@jemin.com  

바로크, 허세부리고 지나치게 과장돼 있다는 부정적인 의미 재평가된 용어
풍만한 두 부인의 신체는 루벤스의 이상형이어서 부인 모델로 누드화 그려

유럽의 바로크 미술

 

 

    그리스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면서 화가마다 하나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서양미술은 크게 그리스 신화의 미술과 기독교 미술로 말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바로크 미술은 종교화나 신화를 그려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바로크 회화의 특징은 형태와 동세(動勢)의 풍성한 느낌을 강화시킨 것이다. 바로크 시대는 카라바조, 드 라투르의 암영주의(tenebrism)작업과 함께 시작되었다.

 

 

   '바로크'란 원래 건축 양식을 가리키던 말로서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적 건축 양식과 어긋난다고 비난하며 비하한데서 유래된 말이었다. 즉 '허세를 부리고 지나치게 과장돼 있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19세기 독일의 미술사가들에 의해 재평가 된 후 부정적인 의미가 제거되었고, 오늘날에는 1600년경에서 1750년 사이의 예술적 경향을 통칭하는 미술 양식으로 정립되었다.

 

   바로크 시대는 1600년경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종교 개혁을 반대한 이후 그 승리를 자랑하기 위해 사치스러운 성당을 짓거나 예술작품을 통해 신도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예술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바로크 미술은 종교개혁 이후 실추된 가톨릭교회의 영광과 권위를 되찾기 위한 정치적 선전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바로크 미술은 로마에서 출발하여 프랑스로 퍼져나갔는데 당시 프랑스는 절대군주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미술가들은 로마에서 미술공부를 하는 것을 즐겼다. 이들은 이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로마에서 배운 실력을 자국의 문화와 전통에 융합시켰다. 바로크 미술은 구교(가톨릭)냐 개신교냐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구교 국가인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궁정적 취향으로, 개신교 국가인 플랑드르(현 북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 지역)와 네덜란드에서는 시민적 취향으로 나타났다. 더 세분하면 같은 궁정 취향의 미술이라고 해도 이탈리아에서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분위기를 띠는데 반해 프랑스에서는 근엄하고 절도 있는 고전주의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식민지에서 착취해 온 막대한 재화가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있는 정교한 가구들과 미술품, 정원을 꾸미는데 쓰여 졌다.

 

   한편 개신교 국가인 플랑드르에서는 부르주아 취향의 미술이 꽃 피워 루벤스, 렘브란트와 같은 거장들이 배출되었다. 플랑드르 개신교 교회는 미술의 주요 고객이었지만 아무런 통제를 가하지 않았으며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자유도시가 발달하여 부르주아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고, 회화도 이에 따라 부르주아적인 취향으로 흘러갔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풍속화,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등 실내 장식용 그림이 유행하였다.

 

   네덜란드가 스페인 통치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플랑드르는 1714년까지 계속해서 스페인의 왕권에 의존했기 때문에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 경향은 왕족과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의 취향을 반영하였다.

 

   미술사학자 노성두는 바로크 미술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명제를 '감동(movere), 즐거움(delectare), 가르침(docere)'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가들은 종교적인 주제와 역동적인 구성, 휘황찬란한 빛과 색채의 사용을 통해서 신도들을 계몽하였다. 반면 북유럽 바로크 미술은 표현이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과 달리 훨씬 모호하고 은유적이었다. 이것은 현실과 밀착돼 그렸던 북유럽 미술과는 다른 경향이었다.

 

 

플랑드르 출신, 유럽의 거장 루벤스

 

   피터 폴 루벤스(Peter Poul Rubens, 1577~1640)는 북유럽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로 불린다. 루벤스는 1600년 23세에 로마에 왔다. 로마, 제노바, 만토바를 돌며 8년 동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걸작과 카라밧치오, 카랏치의 명작들을 연구하고 이탈리아 전통을 흡수하였다.

 

    1608년 루벤스는 고향 안토와프로 돌아와 당시 네덜란드와는 달리 독립을 얻지 못한 플랑드르 스페인 총독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이어서 총독의 고문을 지내고, 대사가 되었다. 그는 외교적인 일로 영국·프랑스·스페인의 왕실에 출입하게 되면서 수많은 작품 제작 의뢰를 받았고 조수들과 함께 방대한 양의 그림을 그렸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첫 번째로 그린 그림은 대형 제단화 <십자가를 세움>이라는 작품이다. 예수를 못 박는 사람들은 매우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반대로 예수는 하늘을 우러르며 차분한 모습으로 순응하고 있는 형상이다. 이 그림에는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의 억세고 완강한 육체와 티치아노의 선명한 색채와 대담한 구도, 그리고 카라밧치오의 극적인 빛이 스며들어 있다. 이런 느낌은 이전의 북유럽 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웅대한 것이었다.

 

   루벤스는 일개 플랑드르 지역의 화가가 아니라 영국·프랑스·스페인의 궁정을 위한 유럽의 궁정화가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한 영국대사는 루벤스를 가리켜 "화가들의 왕자이며, 왕자들의 화가"라고 칭찬하였다. 그는 다재다능하여 후원자로부터 '그림 그리는 재주는 그의 재능 중에 가장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루벤스는 조수들이 그린 작품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생기를 찾는다고 확신했고, 그 확신은 사실이 되었다. 도제(徒弟)식 그림 방식으로 하루에 한 점을 완성했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흠잡을 때가 없었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인 야콥 요르단스, 프란스 스네이테르스, 반 다이크도 솜씨가 좋았다. 루벤스는 일생동안 약 2,000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의 명성은 사후에도 계속돼 17세기 후반 파리의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루벤스주의자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후 낭만주의 대가인 들라크루아도 활력이 넘치는 루벤스의 회화기법의 영향을 받아들여 광선에 따른 색채의 변화를 강조하는 화풍을 취하였다. 그의 화풍은 19세기 인상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 루벤스, <삼미신>, 119x99cm, 유채, 1620~1624년  

 

 

 

루벤스의 삼미신(三美神)

 

   루벤스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뚱뚱하고 관능적인 것이 특징이다. 손에 과일을 들고 있는 라파엘로의 <삼미신>과는 차이가 난다. 루벤스는 첫 번째 부인이 죽자 16살의 소녀와 재혼하였다. 두 부인 모두 풍만한 신체, 금발의 머리, 윤기 나는 피부를 지녔는데, 루벤스는 그의 부인들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사실 루벤스는 피부 표현에 매우 능란하여, '아름다운 누드가 많다'는 것에 판매의 주안점을 두었다. 루벤스는 어떤 주제라도 여인을 그릴 때 둥글고 육중한 육체를 동적으로 그리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 라파엘로, <삼미신>  
 

    <삼미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카리스(Charis)'로 불렸다. 이 세 여신은 제우스와 에우리노메의 딸들이다. 그녀들은 주로 비너스나 메르쿠리우스(머큐리), 아폴론 등을 추종했으며 신과 인간들에게 기쁨, 아름다움, 축제의 환희를 전달하였다. 이 삼미신은 라파엘로도 그렸는데 원래 삼미신은 15세기 로마에서 발견된 헬레니즘 양식의 군상조각이다. 이 <삼미신>은 아름다운 누드화로서, 서로 사랑스럽게 포옹함으로써 주고, 받고, 답례하는 자비(慈悲)의 순환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이 세 명의 여신은 아글라이아(Aglaia: 광휘), 에우프로쉬네(Euphrosyne: 쾌활), 탈리아(Thalia: 꽃)이다. 원래의 삼미신 군상은 원무(圓舞)를 모티브로 하면서 결속과 애정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서로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원형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루벤스의 <삼미신>은 둥글게 서 있는 누드의 모습이 아니라 두 명의 여신은 정면으로, 한 명의 여신은 측면으로 선 상태에서 몸을 틀고 꽃바구니를 받쳐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숲 속 길은 눈부신 누드와 꽃으로 환하다. 가운데 여신의 누드는 유독 피부색이 하얗게 강조되었다. 풍만하고 관능적인 몸매가 꿈틀대듯 생동감을 전해준다.

 

   루벤스가 그릇을 이고 있는 <삼미신>을 달리 해석하게 된 것은 남부 독일 출신인 상아 조각가 게오르크 페텔에게서 3개의 상아 조각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조각 중에 삼미신을 표현한 조각상이 있었는데 머리 위로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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