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그림만 보면 50점 / 인터파크 도서 광고

2013. 8. 29. 07:57美學 이야기

 

 

       

옛 그림, 그림만 보면 50점
옛 그림을 볼 때 그림만 본다구요?

포의풍류도를 보는 또 다른 방법


 ↑ 김홍도 <포의풍류도>


    옛 그림을 볼 때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화폭 속 그림만 보는가. 그렇다면 그건 반쪽 감상에 불과하다. 여백의 미가 강조되는 동양의 그림엔 비어있는 공간이 있다.그 곳엔 준수한 필체의 글귀가 쓰여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제발(題跋)’이라는 그 글까지 다 읽어야 비로소 그림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김홍도의 50대 이후 걸작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를 보자.  

    사방관을 쓴 훤칠한 풍모의 선비가 당비파를 켜면서 정좌해 있다. 그 단아함이 영락없이 명리를 초탈한 문인의 초상이다. 주변에 물건들이 동무하듯 그를 둘러싸고 있다. 쌓아 올린 책과 다발로 묶여진 두루마리와 붓, 중국제로 보이는 귀가 둘 달린 자기, 악기인 생황, 술병…그리고 검무에 쓰이는 듯한 칼까지. 그 은일 자적한 분위기는 화면 왼편의 두 줄 글귀를 읽으면 더욱 분명해진다. 

‘흙벽에 종이창 내고 이 몸 다할 때까지 벼슬길에 물러 나 시나 읊조리며 살리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씨름도> <우물가> <타작> 등 서민들의 일상을 해학 넘치게 표현했던 30대 시절의 김홍도 풍속화와는 확연히 다른 포의풍류도. 이는 벼슬살이에서 물러난 후 삶을 관조하는 김홍도의 자전적 초상으로 해석된다. 그렇다. 화원으로서 누리기 힘든 관직생활을 해 본 김홍도의 인생관은 이렇듯 양반 지향적으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김홍도는 당대 최고 감식가이자 문인 화가였던 스승 강세황으로부터 ’금세의 신필’이라는 칭송까지 극찬을 들었다.
그의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밥 먹을 겨를 까지 없었던 사람이다. 화원화가로서는 최고 영광인 어진화사까지 참여했다. 또 화원으로는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인 종 6품 연풍 현감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도 시대 정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인가.
화원은 ‘환쟁이’라 해서 오로지 손재주만 있는 기술자로 얕보는 시대를 그는 살았다. 중인으로 분류되는 화원은 화원일 수 밖에 없었다. 양반들은 그들의 그림이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없는 기술에 불과하다고 비아냥댔다. 

    오죽했으면 문인 화가들이 자신이 전문 화원화가처럼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선비화가 관아재 조영석이 대표적이다. 과거에 급제한 진사였던 조영석은 인물화에 뛰어났다. 스스로도 “산수는 겸재가 낫지만 인물화는 내가 한수 위”라고 자부했던 이였다. 이런 재주를 높이 산 임금은 선왕인 세조의 영정을 모사해 그리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어명조차 거부할 정도로 양반으로서의 자존심이 셌던 것이다. 

 

 

 



↑ 원, 오진 <동정어은도(洞庭漁隱圖)>
 여벽이 한껏 강조되고 화면 위 여백에 제발이 제법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제가 천한 신하이지만 환쟁이 무리와 자리를 같이해 양반의 신분을 더럽힐 수가 있겠습니까”.
어진은 화원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양반은 그조차 천한 화원의 것이라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18세기 이후 역관, 의관, 서리 등 중인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부를 거머쥔 중인들은 양반 흉내를 냈다. 서화완상 문화도 그 중 하나였다. 벼슬을 멀리하고 도시에서 은자처럼 금기서화, 즉 거문고와 바둑, 서화에 빠져 사는 생활은 조선 초 중기까지만 해도 종친이나 재력 있는 양반에게나 가능했던 고급한 문화였다. 돈이 있으면 누구나 중국제 골동품과 서화를 사서 완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벼슬조차 뿌리치고 서화에 빠져 사는 양반들도 있었다. <포의풍류도>는 그런 양반들의 사치한, 그러나 고아해 보이는 서화 완상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인의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어 양반의 삶을 살아가려는 김홍도의 의식 세계까지도. 그리고 ‘흙벽에 종이창 내고 이 몸 다할 때 까지 벼슬길에 물러 나 시나 읊조리며 살리라’는 제발은 그런 세계관의 변모에 대한 대외적 천명인 것이다.

 

 


제발, 그림의 맛을 살리고 숨은 이야기까지



 


북송 이당 <만학송풍도(萬壑松風圖)>


   이렇듯 화폭에 곁들여진 제발은 그림의 묘미를 살리고, 그림의 탄생 배경을 알리고, 화가의 세계관과 철학까지도 알려준다. 그렇다면 제발은 무엇 인가. 제발은 동양의 회화가 갖는 독특한 특성이다. 문인화에서 제발(題跋) 문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시서화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인 문인화는 무엇보다 사의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제발은 서화 등에 쓰는 제사와 발문을 가리킨다. 엄격히 화폭의 앞쪽에 쓰는 글을 제(題), 제사(題辭), 혹은 뒤에 쓰는 글을 발(跋), 또는 발문(跋文)으로 구분하지만, 통칭 제발이라고 한다.

    제발은 화가가 제목 정도만 간단히 쓰기도 하고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설명이나 당시의 기분 등을 적는다. 혹은 감상자가 그림에 대한 감상과 평을 쓰기도 한다. 즉 제발을 쓰는 사람은 화가와 감상자로 크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제발 문화가 생긴 것은 중국의 원나라 이후다.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화가들은 그림 속에 자신의 이름이나 그린 날짜 등 간단한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행여 그림을 해칠까도 나무나 돌 사이에 눈에 띄지 않게 표시했다. 유명한 북송 범관(范寬)의 <계산행려도>가 대표적인 예다. 범관이 붓으로 쓴 서명은 나무 숲 속에 숨어 있듯 있다. 같은 북송대 화가 이당(李唐)의 <만학송풍도>에세도 이당의 제작연도와 서명은 멀리 봉우리 속에 숨은 듯 적혀 있을 뿐이다.  

 

 



문인화와 제발 

    제발 문화가 원나라 때부터 본격화된 것은 문인화가 이때부터 태동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제발은 갈수록 그림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고, 명청대에는 제발이 천자 이상 되는 긴 작품도 있고 화면 안에서도 상당한 공간을 차지했다. 또 작품을 소장한 사람들이 제발을 해 소장가가 바뀔 때마다 제발이 더해졌다. 객이 주인을 쫓는 형국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인화가 여백의 미를 중시한 것도 제발 문화 활성화에 일조했다. 북송대를 특징짓는 거비파 산수의 경우 화면 중앙에, 그것도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거대한 산이 차지하고 있어 제발 따위가 끼어들어갈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남송과 원나라에 이르면서 여백이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나 글귀를 써넣는 것은 얼마나 맞춤한 일인가. 이 때문에 그림을 배우는 사람은 글씨부터 배워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서예의 글씨는 점과 획 등 그 자체가 형식미와 율동감을 가진다. 글씨체에 대한 비유 조차 ‘늘어진 이슬’ ‘바람에 날리는 명주실’‘ 하늘을 치는 번개’ ‘풀숲으로 사라지는 놀란 뱀’처럼 시적이기 그지없다. 그러다보니 제발은 글씨 그 자체 만으로도 그림의 감동을 증폭시키는 반주이자 화음이었다.  

    제발은 두는 위치와 구성도 중요하다. 어디에 놓는가에 따라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하고, 그림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제발을 중시하는 작가들은 미리 제발의 위치를 고려해 그 자리를 남겨둔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제발의 맛은 그림에 시적인 맛, 즉 시의(詩意)를 더해준다는 것이다. 화가가  그림으로 다 표현하지 못한 화의를 글로 추가 설명하거나 시적 감흥을 표현할 수 있고, 혹은 그림을 감상하는 자들이 그 느낌을 휘갈기는 것이다. 때론 그림을 그린 배경을 설명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난초 그림에 숨은 할아버지 손주 사랑


 


↑ <만학송풍도>의 이당의 서명
<皇宗宣和甲辰 春河陽李唐筆(휘종 선화 연간, 갑신년 봄, 하양의 이당이 그림)>이라고 새겨져 있다. 
서명은 가장 멀리 있는 바위산에 보일 듯 말듯 쓰여 있다.

 

 



↑ 조희룡 <묵란> 

 

 

 


미술관은 제발에 대한 한글서비스를 하라.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묵란>이다. 화폭의 문란은 여느 문인화가들의 묵란처럼 간일하다. 선비의 고결한 이상을 담은 듯 보인다. 그런데 그림에 곁들여진 제발을 본다면 당신은 빙그레 웃고 말 것이다.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애정이 봄볕처럼 따뜻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난초가 잡초처럼 흔하다. 미친 듯 함부로 그려낸 것이 네 벽을 가득 채웠다. 우습게도 어린 손자가 겨우 말을 배울 나이에 벌써 붓을 거꾸로 잡고 봄바람을 그리려 한다. 텅 비어 광활한 세계, 맑은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 경지를 늙은 눈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내 못할 게 무엇인가.” 
손주가 붓을 쥐고 낙서하는 모양새를 기특해 죽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내리 사랑은 그 붓 장난도 바람을 그리려 하는 것이라고 자랑하게 만든다. 
  
    또한 그 표현은 얼마나 시 적인가. 하지만 손주의 재롱에 기뻐하다가 문득 자신의 노쇠함을 떠올리는 노년의 쓸쓸함까지 풍겨난다. 난초 그림에 곁들인 제발은 어느 봄날, 마루에서 손주와 할아버지의 따뜻한 한 나절을 떠올리게 한다.

    화가가 아니라 그림을 감상한 자가 쓴 제발도 있다. 겸재의 실경산수화풍을 계승한 그림으로, 여기세 그 시기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화법을 접목한 것으로 평가되는 강희언의 <인왕산도>. 여기에 강세황은 이렇게 또 호평을 써놓았다.

    “우리 산천의 실제 모습을 그린 작품은 매번 지도와 비슷해서 너무 무미건조한 점이 걱정이었는데, 이 그림은 이미 충분히 사실적이면서 또한 화가의 법식을 잃지 않았다.” 

 

 

 



↑ 김홍도 <마상청앵도>

 

 


   감상자의 제발이 덧붙여지면서 그림의 진가는 더욱 올라가게 되고 사람들의 그림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게 된다. 수 년 전, 서울의 간송미술관의 정기 전시를 구경갔다가 반가운 그림을 만났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다.

    <마상청앵도>는 어느 날 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그림이다. 그 그림이 눈 앞에 잔상으로 떠오르며 다는 고서화를 공부하고 싶다는 맹렬한 욕구를 느꼈다. 나를 고서화의 세계로 이끈 것이 마상청앵도 인 것이다. 

    마상청앵도는 고서화는 고리타분하다는 이전의 생각을 확 가시게 한 그림이었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의 장면을 순간 포착한 듯 생생했다. 말을 타고 산길을 가는 선비가 홀연히 들려오는 꾀꼬리 한 쌍의 소리에 이끌려 말을 멈추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는 장면이다. 무엇이 바삐 가는 선비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을까. 어느 날의 추억일까. 삶의 무상함일까. 그렇게 조선시대 선비는 살아서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림은 탁월했다. 버드나무를 오른쪽으로 바짝 밀어붙여 여백의 미를 한껏 살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인공인 선비를 화면의 정중앙에 세웠다. 말과 말을 이끄는 동자, 그리고 주변의 풀섶을 제외하곤 배경을 과감히 생략했다. 그래서 화면에선 산길의 적막함과 그 적막을 가르는 꾀고리 울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 때, 나는 화면 왼쪽 위 제발을 읽지 못했다. 읽을 줄 몰랐다. 한자였기 때문이다. 간송미술관에서도 제발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었다. 뒤늦게 알게 된 제발의 내용은 그림의 시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어여쁜 여인이 꽃 아래에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나 佳人花底簧千舌
운치 있는 선비가 술상 위에다가 밀감 한 쌍을 올려놓았나 韻士樽前柑一雙
어지럽다 황금빛 베틀 북이여, 수양버들 물가를 오고가더니 歷亂金梭楊柳崖
비안개 자욱하게 이끌어다가 봄 강에 고운 깁을 짜고있구나 惹烟和雨織春江


    버들가지 사이를 베틀 북처럼 부지런히 오가는 꾀꼬리가 안개와 비를 엮어 봄강을 수놓는다는 이 싯귀를 보고서야 하는 비로소 이 선비가 봄날 가는 실비를 맞있음을 알았고, 그 실비에 그의 시심 조차 젖고 있음을 알았다. 문제는 제발이 해독이 쉽지 않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미술관은 우리 옛 그림을 전시할 때 화폭 속 제발도 우리 말로 번역해 소개해 주기를......
그것은 한국의 옛 미술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미술관의 의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