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

2013. 8. 29. 09:26美學 이야기

 

 

 

 

 

 

김홍도 [金弘道, 1745 ~ ?]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의 글이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다

    김홍도는 1745년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아버지는 김석무(金錫武)이다. 증조할아버지가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나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 집안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림과 아무 연관 없는 집에서 태어난 중인 소년이 당대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뛰어난 문인화가이자 명문사대부인 강세황에게 어떤 연유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홍도는 “젖니를 갈 때부터”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강세황은 마흔 살 무렵으로 벼슬 없이 경기도 안산에 있는 처가에 살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김홍도가 안산 출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스무 살 무렵 이미 당대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김홍도는 스무 살 이전에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되어 있었던 듯하다. 1765년 영조가 71세가 되어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망팔(望八)에 이른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고 이를 위해 병풍을 만들었는데,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한 김홍도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로 임금의 큰 잔치 그림을 홀로 그렸다는 것은 당대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773년 스물아홉의 김홍도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의 그림 인생에 중요한 인연을 또 한 사람 만난다. 뒷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은 당시 김홍도의 솜씨가 썩 마음에 들었다. 뒷날 “김홍도는 그림에 공교로운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이다. 30년 전에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무릇 화사(畵事)에 속한 일은 김홍도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는 글을 남긴 바 있듯이 이후 정조는 김홍도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후원자가 된다. 

 

    영조의 초상화를 그린 김홍도는 그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 사포서(司圃署)의 감목관(監牧官)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마침 두 달 뒤 스승 강세황이 사포서의 별제로 발령을 받아 사제지간이 함께 근무했다. 이때의 일에 대해 강세황은 이렇게 회상했다.

“일찍이 군과 더불어 사포서의 동료가 되었을 때, 매번 일이 있으면 군이 나의 노쇠함을 딱하게 여겨 바로 힘든 일을 대신했으니, 이는 내가 더욱 잊을 수 없는 바이다.”

삼십 대에 김홍도는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는 말이 전할 만큼 그림으로 높은 이름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 가운데서도 풍속화는 인물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각 장면의 극적인 구성이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하는 백성들이다.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들거나 집을 짓는 장인들, 밭을 갈고 꼴을 베는 사람, 물을 긷고 빨래하는 사람, 장사하는 상인들의 모습 등 서민들의 정서와 삶에 밀착된 그림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현감의 자리에 오르기도

   김홍도는 서른일곱 살이던 178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그 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 벼슬을 받았다. 그에 대해 강세황은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벼슬살이를 하고 돌아온 40대의 김홍도는 화조화, 기록화 등을 주로 그렸다. 178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 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렸고, 그 이듬해 사신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 갔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모시며 현륭원을 건설할 때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의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해, 조선 후기 불화의 명작 중 하나를 남기기도 했다. 입체감을 나타내는 음영을 넣어 독특하게 표현한 이 불화들은 기존의 화풍을 뛰어넘어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791년,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해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만 3년 뒤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파직됐다. 백성들 중매를 해주던 인간적 관리였으나 행정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현감 자리를 내주고 평민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자유롭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전념해 산수, 화조, 인물화 등에서 명작들을 쏟아냈다. 50대에 이른 김홍도의 그림들은 보다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대담한 생략과 거침없는 붓길이 대가다운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시기의 대표작들은 [해산선학도], [마산청앵도], [세마도] 들이다.

 

 

아름다운 풍채가 신선 같았다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낭만적인 예술가였지 생활력 있는 가장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하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김홍도는 매우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 가운데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증언도 있고,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도 즐겨 꽃 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거문고 한두 곡을 연주하며 스스로 즐겼고, 즉석에서 한시를 남길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갖고 있었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가 전하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예순두살이던 1806년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현재 300점 정도의 작품이 전한다.

  

 

 

관련링크 : 단원 김홍도의 주요 작품 보기

 

 

 

 

                                                                       다음지식  미드사랑 님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