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下吹笙 / 단원 김홍도

2013. 8. 29. 07:12美學 이야기

 

 

단원 김홍도의 송하취생도, 종이에 담채, 109 x 55 센티미터, 고려대학교



소나무 아래에서 한 소년이 생황(笙簧)을 불고 있다.

양쪽으로 머리를 말아 올린 중국 소년의 모습이다.

기운 찬 소나무와 악기를 연주하는 소년의 모습이 뚜렷이 부각되어 있고,

화가의 붓질에는 힘이 넘친다.

단원 김홍도의 역작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다.


단원(檀園)은 새삼 설명이 필요 없는 조선 후기의 대화가다.

‘소나무 아래에서 생황(笙簧)을 부는 그림’이라는 뜻의 이 작품은

김홍도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소나무의 굵고 힘차게 뻗은 기상과 화려하게 휘고 굽은 가지에서

생황의 가락을 타고 이제 막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려하는 소년을 읽을 수 있다.


그림 우측에 당나라 시인 '나업(羅鄴)'의 '제생(題笙)‘ 구절이 적혀있다.

생황의 오묘함을 노래한 시로 이 그림의 화제(畵題)다.

또한 이 시로써 생황을 부는 소년이 주나라 영왕의 태자 왕자 ’진(晋)‘인 것을 알 수 있다.


생황은 고대로부터 쓰인 동양의 전통 악기이다.

열네 개 또는 열일곱 개의 대나무 관을 표주박처럼 생긴 소리통에 박고 옆으로 난 구멍을 불면

통 안의 울림판(황엽)이 대나무 관의 길이에 따라 맑고 굵은 소리를 동시에 낸다.

생황은 입으로 부는 악기 중 유일하게 화음을 만드는 악기여서

옛적의 문인과 풍류객들이 즐기는 악기라 했다.


생황



생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황엽(簧葉, 쇠붙이로 된 울림판)인데,

조선 후기 학자 홍대용은 '황엽은 매미의 날개처럼 가볍고 얇다‘고 하였다.

‘금엽(金葉)’이라고도 하였고 우리말로 '혀'라고도 했다한다.


황엽의 제조법은 매우 까다로웠던 모양인데,

이 이유로 생황 제작이 수월치 않아 중국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었다. 매우 고가였으리라...

세종조에 학자들이 건의하여 황엽제조법을 중국에서 배워오도록 하였다.

예전 중국의 한 지방에는 ‘고려에서는 금, 은이 적게 나고 구리가 많이 나므로

생황의 황엽은 반드시 고려의 구리로 만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도 생황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황엽 위로 열댓 개의 관을 조절해가면서 화음을 만들어내니

그 소리가 마치 파이프 오르간이나 아코디언 같이 황홀하다고 한다.

옛적에는 가히 신선의 악기라 했을 만하다.



나업의 시가 적힌 송하취생도의 부분도 (가지의 휨이 예술이다)



나업은 8세기 경의 당나라 시인이다.

그는 ‘제생(題笙)’에서 생황의 오묘함과 이 악기에 얽힌 전설을 노래했다.


筠管參差排鳳翅   균관삼차배봉시

月堂淒切勝龍吟   월당처절승룡음


最宜輕動纖纖玉   최의경동섬섬옥

醉送當觀灩灩金   취송당관염염금


緱嶺獨能征妙曲   구령독능정묘곡

嬴台相共吹清音   영대상공취청음


好將宮征陪歌扇   호장궁정배가선

莫遣新聲鄭衛侵   막견신성정위침


봉의 날개같이 들쭉날쭉 대나무관

용의 울음보다 처절하게 월당을 울리네


섬섬옥수 가벼운 움직임이라니

취하여 드리는 넘실대는 술잔을 보시리


구령에서 홀로 묘한 곡조를 잘하였고

영대에서 함께 맑은 소리 불었다지


궁징의 음조로 부채노래 짝하기 좋으니

낯선 소리로 어지러운 정위음악 만들지 마시길



단원은 이 시의 첫 연을 그림에 적었다.

구령(緱嶺)은 ‘왕자 진’이 생황을 불다 신선이 되어 날아간 고개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단원은 바로 그 순간을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소년은 이미 신선의 깃털인 우의(羽衣)를 입고 있다.


영대(嬴台)는 춘추시대 진목공이 딸 능옥을 위해 지어준 누대의 이름이다.

능옥이 남편 소사와 함께 이곳에서 생황과 퉁소를 합주하면 공작과 봉황이 모여들었다한다.

능옥과 소사는 새를 타고 하늘로 올라 신선이 되었다.

후대에 당나라에 와서 일하던 신라인의 딸 설요가 이 전설을 듣고 산에 들어가

노래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이 영대에 전해진다.


 



그림 속의 소년은 구령에서 노니는 왕자 진이다. 우의(羽衣)를 입고 술병을 메고 있다.

왕자 진은 BC 500년 대의 중국 주나라 영왕의 태자였으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산수에만 뜻이 있었다.

산수를 노닐던 그는 열다섯에 도사를 만나 생황을 배웠고

그 다음해 7월 7일 부모님께 작별을 고하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

이때 왕자 진은 생황을 연주하며 눈같이 흰 학을 타고 날아갔다고 한다.


왕자진이 노닌 구령은 중국 하남성의 숭산(崇山)에 있는 한 고개이다.

숭산은 중국 5악의 하나로 천년 뒤 달마대사가 선종을 창시한 소림사가 있는 유명한 산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왕자진의 사당 앞, 산에 뜬 달이 밝으면,

사람들이 종종 생황 부는 소리를 듣는다네...'라고 읊었다.

구령의 왕자 진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나

구령에 달 뜬 밤이면 음악이 울려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어디선 가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리면 '구령의 생황 연주'라 한다.


왕자(王子) '진(晋)'은 후세 사람들 입에서 고유명사로 화해 '왕자진'으로 불리었고

나중에 '왕'은 성으로 '자진'은 이름처럼 되어 '왕 자진'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왕 자진'으로부터 '왕'씨가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2,5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제나 지금이나 소나무와 음악, 술 같은 것은

도가적 풍류의 주요한 도구들이다.


생황 소리 울려가며 소나무 아래에 앉아 술 한잔 나누는 것이

이제는 우리의 풍류도 되어있음을 알고 있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고연희의 ‘그림, 문학에 취하다’에서 많은 부분 발췌하고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와 제 생각을 가미해 정리한 글임을 밝힙니다.)


(2012. 5. 3)

 

 

다음카페 <정다운 무관심>  에코 님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