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토불교의 세계 / 제11 장 일본의 정토사상 - 2. 법연의 정토사상

2013. 9. 24. 21:57경전 이야기

 

 

 

2. 법연의 정토사상

 

                                               장휘옥 著/불교시대사  

 

정토종의 개조 법연(法然, 1133~1212)은 휘가 원공(源空)이고, 호는 법연방(法然房)이다.

 

9살 때 부친의 유언에 따라 출가하여 13살 때 비예산의 원광(源光) 문하로 들어갔으며, 이어 황원(皇圓)에게 대승계를 받고 천태를 배웠다.

 

그는 학문에 뛰어났으나 불교교리를 납득할 수 없어 18세 때 흑곡(黑谷)으로 들어가 은거하여 예공(叡空)에게 배웠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므로 24세 때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명한 스승을 찾아가 각 종파의 깊은 뜻을 참구했지만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다시 흑곡으로 돌아와 보은장(報恩藏)에서 대장경을 열람했다.

 

43세 때 드디어 중국 선도(善導)의 <관무량수경소>를 읽다가 염불의 길을 발견하고 지금까지의 의문이 구름 걷히듯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전수염불종(專修念佛宗)의 개종(開宗)이다.

 

드디어 동산길수(東山吉水)에 암자를 마련하고 사람들에게 미타본원의 염불을 설했다.

 

종래의 일본불교가 자력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설한 것에 비해, 법연은 번뇌를 끊지 못하는 범부를 위해 아미타불의 구제(他力)가 있다고 하여 오로지 염불할 것을 설했다.

 

54세 때는 천태종 현진(顯眞)의 초청으로 대원승림원에서 전수염불의 가르침을 담론했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법연에게 귀의하였으며, 그 명성은 널리 퍼졌다.

 

66세 때 법연은 전수염불의 교리를 조직화하기 위해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佛集)>을 저술하였다.

 

한편 구불교의 비난도 매우 심했는데, 1204년에는 천태종 총본산인 연력사(延曆寺)의 승려들이 천태좌주 진성(眞性)에게 전수염불의 정지를 호소했으며, 다음해에는 구불교의 8종파가 흥복사를 대표로 조정에 똑같은 호소문을 올렸다.

 

마침 이때 법연의 제자 두 명이 궁중의 궁녀와 풍기문제로 시끄럽자 이것을 염불탄압의 구실로 삼았다.

 

1207년 2월에 전수염불 정지 명령이 내리고 제자 두 명은 사형되었으며, 법연은 75세의 나이에 환속되어 토좌로 유배되었다.

 

법연은 그 해 12월에 사면은 되었지만 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섭진(攝津, 大阪府)의 승미사(勝尾寺)에 머물렀으며, 4년 후인 79세 때 겨우 수도로 돌아옴이 허락되어 귀환했으나 고령과 피로로 다음해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법연의 정토사상은 대표작 <선택본원염불집>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원신의 <왕생요집>에 근거하여 정토사상을 심화시키고, 그 위에 중국 선도의 <관무량수경소>에 의해 구칭염불의 전수염불을 확립하였다.

 

법연은 지금 말법시대에는 성도문(聖道門)은 잠시 제쳐 두고 정토문을 택해야 하며, 정토문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잡행(雜行)은 버리고 정행(正行)을 택하며, 정행 가운데서도 조업(助業)은 제껴 두고 정정(正定)의 업인 칭명을 택할 것을 설했다.

 

즉 선도의 <관무량수경소>의 영향을 받아 정토왕생의 수행으로 구칭염불 한 가지만을 택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법연은 '정토종'이라는 종파를 세우고, 소의경론으로는 정토삼부경과 세친의 <정토론>을 정하고, 사자상승(師資相承)의 혈맥으로서 보리류지(菩提流支)-담란(曇鸞)-선도(善導)-회감(懷感)-소강(少康)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정토종의 계보를 세웠다.

 

법연의 제자 가운데 행서(幸西), 변장(弁長), 융관(隆寬), 증공(證空), 장서(長西)를 오류(五流)라 부르며, 또한 친란(親鸞)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출처 : 미주현대불교
글쓴이 : 파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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