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 11:49ㆍ들꽃다회
대웅보전 마당 석축 아래에 있는 수곽
- 수곽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은 물이 흔하거나,
스님 등 대중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웅보전 앞마당에 있는 쌍사자석등(현대작)
대웅보전 동쪽 추녀 석가래를 받히고 있는 청용목조각
- 반야용선의 용을 조각하여 불법 수호와 당우의 화재 예방을 기원하다.
ㅂ
서산의 산이내와 풍경
추녀끝 네귀퉁이에 풍경을 매다는 것은 풍어(風魚)들이
잠잘 때에도 눈을 감지 않는 것 처럼 열심히 정진하라는 의미와 함께
금속성 풍경소리가 처마밑 다포구조에 새들을 깃들지 못하게 하는 실용적인
목적도 겸한다.
서쪽 기둥 추녀 아래에 조각되어 있는 목조백호상
- 수염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다.
상당히 굵고 길게 표현된 것은 보는이의 착시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대웅보전의 석가보니불
- 부처님의 눈을 정면에서 보면 매우 가늘고 옆으로 길게 보인다.
업드려 예불하면서 올려다 보면 원륭정대한 느낌을 주도록 조성한다.
불단 뒤 우물천장부에 있는 용조각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단청이 빛이 바랜 대들보와 결구구조, 내공포들이 신심(信心)을 더하여 준다.
팔작지붕 겹처마 형태의 불단 위의 닷집이 정교하게 조성되어 있다.
사진 좌측 아래는 우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상.
익어가는 배롱나무 열매, 어린 후박나무?, 그리고 남산 풍경
새팥과 송악 (일명 담장나무,큰잎담장나무)
수곽과 맥문동 - 天圓地方이 한몸에 있다(天地同根).
역시 불이문을 개창하신 원효스님께서 주석하시던 절 답게
작은 석물에도 不二門을 새겨 넣었다.
산이내들
절마당에 핀 석산(속명:꽃무릇) - 거의 끝물이다.
대웅보전 동쪽켠의 관음전
명부전 주불이신 석가모니불 - 상당히 고불(古佛)의 상호를 가지셨다.
후불탱의 주불은 석가모니불,좌우협시는 가섭과 아난존자
불교식 재판관님들 - 목조 16나한상
명부전의 빗살창 - 심판받으로 온 혼백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가
촘촘하게 짰다.
대웅보전 후원의 배롱나무 - 저 산이내에 가려진 부분에 울금바위
- 원효방, 백제부흥군의 복신굴과 부흥군이 베를 짜던 곳이라고
민간에 구전되어온 베틀굴 등 3개 굴이 있다.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저항지인 주류성은
1. 충남 연기군 전의면 당산성
2. 전북 부안군 상서면 위금암산성
3. 전북 정읍시 두승산성
4.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
등 여러가지설이 있으나, 주류성은 특정지명이 아니라
백제부흥군의 지도부가 있는 일반명사라는 주장도 있음을
고려하여야 한다.
울금바위 부근에는 약 4킬로미터의 우금산성이 있어서
백제저항군의 저항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이를 뒷받침하는 민간 구전설화 중에서 복신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백제왕자 풍(豊)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자
승려 도침이 이를 극구 반대하다가 오히려 복신에게
죽임을 당한 곳이 울금바위에 있는 복신굴이라고
전하여 지며,이를 간파한 풍이 복신을 죽인 곳도 복신굴이라고
전한다. 이렇게 하여 내부분란과 당나라에 귀순한 백제왕자 부여융
흑치상치와 사타상여 등의 내분에 의하여 4년여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은 막을 내린다.
오늘 저는 보았다. 저 하찮은 며느리밑씻개와 바보여뀌들도 가을비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울금바위도 그 이름처럼 울음을 우는 바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산이내가
울음바우를 가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백제부흥군 병사들의 저 통곡소리가 들리는가..............
이로서 파미르고원에서부터 이동하여 홍산문화를 일으키고
고조선문화를 흡수동화하였던 예맥족의 후예들이 세운
부여대제국 - 대륙부여(북부여,동부여, 부여)과 반도부여
(백제) 그리고 열도부여(왜)로 구성된 즉 대륙,반도와 열도에
걸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분국(分國) 형태로 운영되었고,
21개의 담로를 가졌던 부여해상대제국의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슴을.........
이로서 열도부여였던 왜가 부여의 지배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독립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저 울음바우는 지금도 눈물을 그치지 못한다.......
그 누가 있어 저 바위를 울음바우라 불렀는가??
개암홍매 - 마당을 돋우면서 수세가 많이 약해졌다.
수령 400여년이라고 하나, 당시에 제가 땅을 파고 심은 것이
아니여서 잘 알 수가 없다.
고개숙인 차꽃 - 뭣이당가?? 부끄러워 하기는......
차꽃의 눈물 - 너무 반가운 님이 오셔도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는 한다.
차꽃 - 차꽃을 띄운 꽃차(花茶)도 나름 마실만 하다.
일찍 핀 차꽃 ㅡ 지난 해의 차나무 열매와 올해의 차꽃은 동시에 한나무에 달려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제가 과문한 탓인지 원전을 찾을 수 없다.
마을나무 보호수 비석 : 수령 300여년
느티나무 - 느티나무를 오래 말리지 아니하고 다탁이나 찻가구들을 만들면,
다실의 환기를 잘 시켜야 한다.
괴목(槐木)이 마르면서 내뿜는 정향성분들이 머리를 아프게 한다.
그래서 무늬가 화려한 괴목을 피하고 회화나무나 은행나무로 다탁을 만들어 썼다.
나무는 절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쭉 보아 왔겠지만.......
말이 없다..........
그러나 고요에 잠기면 나무가 말을 걸어 온다.........
이 고요에 잠기는 데 도와주는 매개물인 체(體)가 바로 차(茶)이다.
다선(茶仙)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대련(對聯) 글씨에서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라고 설파하였다.
첫련의 다반향초를 놓고서 차를 우위로 하는 분들과 향을 우위에
놓는 분들 사이에 여러가지 구구한 해석과 주석들이 붙어 왔으나,
불이문을 주창하신 원효의 발자취가 배인 능가산에 와서
구구한 설명은 피하기로 한다.
마지막 련의 수류화개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대자연의 현상을
읊픈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차마시는 사람이 차를 마시면(水流)
꽃은 마음을 연다(花開)라고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차를 마시면 소우주라는 인체 내부에서도 기혈(氣血)을 따라서
다기(茶氣)가 흐르고, 장기에서 흡수된 정갈한 찻물이 흐른다(水流).
이로 인하여 정신은 맑아지고, 새로운 창작열 또는 선정(禪定)의
희열을 느끼게 한다(花開).
그래서 묘용시 수류화개(妙用時 水流花開)이다.
대부분 훈고학적인 학문의 방편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나,
항일운동기(일제강점기의 정식명칭이 근자에 국회에서 수정결의됨)나
그 이후의 정형화된 일본식 다도를 접하고 배운 사람들은 체(體)와 용(用)을
정형화시키려 서로 구구한 설명을 하고 있다.
앞련의 다반향초(茶半香初)에서 체는 차(茶)와 향(香)이고, 용(用)은 반(半)과
초(初)이다. 이 반과 초를 놓고서 차를 반쯤 마실때 향이 시작된다느니
차례의 반은 향례에서 시작한다느니 등등의 해석을 하고 있다.
한심하다. 추사가 분명히 다음 련에서 묘용시(妙用時)라고 큰 글씨로 분명하게
써놓았는 데에도 이를 무시한 해석들이 많았다. 그때그때 천후(天候)나, 찻자리의 성격,
찻손님의 인격과 품위, 찻자리의 규모 등등에 따라서 적절하게 차와 향을 사용하라는
것이 묘용시(妙用時)의 본 뜻이다. 우리 한국다례의 특징은 정형화된 것이 없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알맞게 무한한 변용이 가능한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북방 유목민들에서 기원된 노마드 정신이다.
느티나무 고목 - 원래 절집에 들어가는 길은 저 고목들 사이로 나 있었겠지...
석산(속명:꽃무릇 經典 :敎)과 차밭(禪)
석산(속명:꽃무릇) 꽃술에 맺혀 있는 빗방울사리들
가을비에 마음의 먼지를 씻고 있는 석산(꽃무릇)
물봉선
차밭에서 드문드문 피어난 석산(石蒜 ;돌밭의 달래라는 뜻임, 속명 꽃무릇)
사대부 가를 방문하여 보면 가옥의 배치와 정원 연당 등을 조성한 것을
보면 그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가풍을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절집 텃밭에다 차나무와 꽃무릇을 함께 가꾼다면,
선교 양종(禪敎 兩宗)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이문(不二門)일
가능성이 높다. 禪과 敎의 통합운동은 그 뿌리가 깊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에서 불교 전래시에 부터 원래 나눔이란 없었다. 당나라 유학승들이
중국의 각 지방, 해로를 이용한 유학승들은 육조 혜능대사님이 주석하시던
광동성이나 복건성 또는 절강성의 천태산 국청사 등 유학당시에 은사님을
따라 남종선, 천태종 등으로 불법을 구하는 방편을 달리 하였고, 육로나 당진~
산동반도 신라방의 중부해로를 이용하던 스님들은 당시 교통의 불편으로
북종선 위주로 구법의 방편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요동반도를 통하여 육로로 구법여행을 떠난 스님들은 서역을 거쳐
천축(오늘날의 인도)까지 구법활동을 하였으며, 당시 당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았던 오늘날의 몽골,청해성,감숙성,운남성 일대에서 공부한 스님들은
몽고족의 라마교나 티베트 장족의 서장불교인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구도의 방편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불교분파를 통합하고자 하신 분이 원효대사이며,
그의 저서 <판비량론(判比量論)>을 통하여 불이문(不二門)을 강조함으로서
구법 방편의 갈래는 체(體)가 아닌 용(用)일 뿐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원효대사의 위대함이 오늘날에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슴을 산이내에 가려진 울금바위의 원효방을 쳐다보면서
저 차밭 속의 꽃무릇(正名 :석산 石蒜)이 말을 전하여 준다.
차나무는 선불교 조사이신 달마대사의 눈꺼풀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운
것이라는 불교설화가 있다. 찻잎의 카페인이 잠을 쫒고 정신을 맑게하는
효능이 있다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화화한 것으로 보인다.
꽃무릇은 인편상의 뿌리줄기(근경 根莖)에서 녹말을 얻어 풀을 쑤어
경전의 제본이나 불화의 배접용으로 사용하면 좀이 쓸지 아니하고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방부제 역활을 겸하여 한다.
차밭에 꽃무릇을 심은 연유를 풀어가는 것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몫이 된다.
당시의 당나라 유학승 중에서 귀국하지 아니하고 중국에 남아 불법을
크게 떨치시던 고승은 신라 성덕왕(聖德王)의 셋째 아들로
검남종(劍南宗 : 검남은 사천성 城都의 옛이름)을 창시하신 정중 무상
(淨衆 無相 684~762)대사, 구화산에서 불법을 펴신
신라왕자 출신의 지장 김교각(地藏 金敎覺 696~762) 대사, 그리고
왕오천축국전을 지으신 헤초(慧初 704~787) 스님 등이 대표적이고,
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국사적조비문에 따르면 혜각(慧覺)
스님이 중국에서 크게 불법을 폈다고 전하나, <속고승전> 등에 짤막하게
단 두줄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쑥부장이 무리 - 변이종 , 경생엽이 상당히 가늘고 길다.
관상용, 줄기에서 돋아난 경생엽은 약용.
개울가의 물봉선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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