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무등산 들꽃다회 5. - 둘

2013. 10. 23. 07:05들꽃다회

 

 

       광주 무등산 들꽃다회 5. - 둘  (20131019)

 

 

 

 

중봉 억새밭과 방송탑

      

 

 

 

 

장불재 통신탑

 

 

 

 

장불재에서 바라본 광주시내

 

 

 

 

장불재 저녁 풍경

 

 

 

 

장불재에서 바라본 광주시내 야경

 

 

 

 

장불재에서 바라본 광주시내 야경

 

 

 

 

장불재의 저녁하늘

 

 

 

 

 

동산인 무등산 규봉 지능선에 걸린 달

 

 

 

 

 

 

 

 

 

지공너덜을 비추고 있는 음력 9월 보름달

 

 

 

 

 

 지공너덜 가기 전에 있는 석불암 - 마애불이 있으나 산문이 잠겨 있어서

                              배례를 올리지 못하고 바로 지공너덜갱으로 향하다.

 

 

 

 

 

지공너덜 안내판

 

 

 

 

에스프레소 커피 내림

 

 

 

 

찻물 끓임

 

 

 

 

에스프레소 커피 헌다례(獻茶禮) - 초헌례

 

 

 

 

 

지공너덜에서 헌다례 - 아헌례 : 철관음차

                               종헌례  :  천량차

                                                                                                   헌다례가 끝난 후 고양이가 앉아 있었던 돌(다포 위에 있는 평평한 돌)

 

 

 

 

석실을 안내한 산고양이

 

       지공너덜에 다가가자 표지판이 보이는 지점에서 너덜 아래를 보니

   저 마치서 두개의 파아란 인광이 보인다. 처음에는 올빼미나 부엉이

 

   종류의 야행성 맹금류의 인광인 줄로만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이들 맹금류의

   야광 눈은 약간의 붉은 기운이 도는 파아란 인광인데 비하여,  이 너덜갱 아래에

 

   있는 인광은 파랗기만 한 인광이었다. 찻물을 준비하는 동안 이 두개의 인광은

   그 자리에서 꼼작도 않고 있었다. 다포를 펴고 찻잔을 진설하자 이 인광이

 

   1~2미터 정도 거리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래 사진의 산고양이였다.

   찻물을 끓이는 동안 좀 전에 고양이가 처음 앉아 있던 곳으로 가보자

 

   그곳은 돌담만 있고 지붕은 하늘로 뻥 뚫린 돌담화장실이였다.

 

 

      헌다례를 마치고 얼마쯤 시긴이 지난 후에 이 산고양이가 다포 앞에

   있는 제단처럼 놓인 약간 높은 돌위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배낭을 챙기자 이 산고양이가 규봉암으로 통하는

   샛길로 가더니 한참을 그대로 저 건너편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중불재 쪽으로  되돌아 가려고 하자 이 산고양이가

    다시 제가 있는 쪽으로 오더니 규봉암 가는 샛길 쪽으로 가서 건너편에

 

   가서 조금 전에 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후로도 이러한 산고양이의

   행동은 서너번 더 반복되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규봉암 가는 샛길 쪽으로 이 산고양이를 따라가

    보자 바로 석실의 출입문 격인 돌담이 보였다. 이 산고양이가 지공석실을

    안내해 준 것이다. 석실 구경을 마치고 나오자 산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규봉암가는 샛길로 낙석위험구간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곳을 통과하여 한참을 더 가자 규봉암의 불빛이 보이기도 전에 절에서

 

     키우는 큰개의 짓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에 있는 친구들에게 하산한다는

     문자를 보낸시간이 8시26분이니 이 시간에 규봉암에 들린다는 것은

 

     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 개짓는 소리를 들은 지점에서

     몸을 돌려서 석불사를 거쳐 장불재 쪽으로 향하였다.

 

         다시 지공너덜로 되돌아와 이 산고양이를 한참 찾아 보았으나, 돌서덜

     틈속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잠들었는지 다시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나 표범이 없는 산중에서는 산고양이가 길안내 역을 대신하여 맡는

      경우도 있구나........ 하 하 하 ........ 즐거움이 몰려온다.

 

          오늘 밤은 달과 한번 놀아 보자구나......

      광주과학기술교류협력센터의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의 생각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노박덩굴

 

 

 

좋은산 무등산 19-지공대사(指空大師) 좌선(坐禪) 수도원(修道院)

큰 바위를 지붕 삼고  
돌로 벽을 쌓고  
온돌과 부엌이 있는   
석굴이 있네. 

마당 밖은 큰 돌 작은 돌로  
울타리 담을 쌓아  
맹수의 침범을 막는  
높다란 성곽을 만들었네. 

여기가  
수많은 불제자들이  
불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지공대사의 
좌선수도원이라네. 

화장실은 사각형으로  
담을 쌓고 문도내고  
가운데에 두 발을  
딛는 돌 판자  
두 개를 나란히 놓았네. 

지나가는 사람마다 
육백년이란 세월을 보낸 
귀하고 귀한 보물인줄 모르고 
쉬어가면서도 
쓰레기 하나 치워주는 사람 없고,
이웃 암자의 스님마저 관심 없네. 

     규봉암과 석불암 사이에 지공너덜겅이 있는 곳에 지공대사가 수도 하였다는 지공대사 좌선 수도원인 석굴이 있다. 그 앞 우 방향 13보 거리에 화장실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에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도 없어지지 않고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무등산의 보물 증 가장 으뜸가는 보물이다.  

   이 수도원을 2008년 7월 5일 실측 하여 보니  
 성곽(담)은 폭 101㎝, 높이 113㎝로 통로 즉 대문을 만들었다. 이 문을 중심으로 우측 담은 232㎝, 좌측 담은 293㎝, 두께는 83㎝이며 마당의 동쪽 성곽(담)은 368㎝이었다. 

    석굴 안(방)은 가로 371㎝, 세로 246㎝, 밑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는 205㎝로 사람이 서서 활동하는데 아무 불편함이 없었고, 드나드는 통로는 135㎝로 비가 들이치지 않게 처마는 낮았다. 

    지붕이 된 거석은 가로 568㎝, 세로 493㎝, 두께 132㎝ 사면체로 몇 천 억만년이 지나도 빗물이 세거나 구멍이 날 염려가 전혀 없는 세계 최고의 지붕이다.    
지공대사의 벗이 되었던 서쪽 벽 밑에는 사자 한 마리가 배 깔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고, 동쪽 벽 밑은 약간 높은 단을 만들었다. 불상을 모신 자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외풍이 없어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한 방이다.  

    화장실(안 쪽)은 가로121㎝, 세로 137㎝, 높이(담) 78㎝ 곳에 발을 딛고 일을 보는 변기 석(돌 판자)은 변이 떨어지는 구명은 15㎝ 간격을 두고 양쪽에 나란히 세로 46㎝, 가로 46㎝인 돌과  세로 61㎝, 가로 39㎝인 돌을 놓았다. 하늘을 지붕 삼고 공기 맑은 곳에서 배설한 기분을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맛을 누가 알라?   

     지공대사가 무등산까지 오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고려 때 나옹선사란 분은 원나라에 유학하여 인도에서 온 지공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그리고 불법에 정진한다. 그러다가  지공대사와 함께 귀국한다. 국내에서 회암사를 비롯하여 전국의 사찰에서 활동한다. 나옹선사가 열반하자 지공대사는 자유로이 전국을 순회한다, 통도사를 거쳐서 송광사에 왔을 때 송광사 터가 예사가 아닌 터라 어느 분이 송광사 터를 잡았는가를 물었다.

  
    보조국사가 무등산 규봉암 의신대에 앉아서 산맥의 흘러감을 짚어 송광사 터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규봉암에 오게 된다. 
 돌은 비단을 잘라 만든 것 같고 산세는 옥을 쪼아 이룬 것 같은 규봉암의 빼어난 경관에 도취되어  하루 이틀 머물게 되는데 수많은 불자들이 대사의 불법을 듣기 위하여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규봉암 경내가 너무 좁아서 돌의 바다인 너덜겅으로 장소를 옮겨 설법을 한다. 
 불자들은 너덜겅을 의자로 삼아 앉고 대사는 너덜겅에 앉은 수많은 불자들을 위로 쳐다보면서 설법을 한다. 그래서 대사는 방이 필요하여 석굴에 좌선수도원을 만들게 되었다,     
    그 곳이 바로 지공너덜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지공대사 좌선 수도원이다.  

    출신지가 전라북도 고부이고 지공대사의 제자 인 백운 경한(白雲 景閑)은 지공대사(指空大師)가  좌선(坐禪) 수도원(修道院)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거산(居山)  

꿈같은 세월 어느 사이 육십이 지났으니  
이 고산(孤山) 한적한 석굴이 내 지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로다.  
배고프면 한 끼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며  
그저 평범한 촌부로 지내노니 나를 아는 이가 없구나?  
한 생각 일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니  
이 요체를 어찌 비유로 들어 나타낼 수 있겠는가?  
물에 비추는 달빛은 텅 비어 있어도 볼 수 있으나  
텅 빈 마음이라는 거울에 비춘 상(象)은 항상 공(空)할 뿐이로다.  

골짜기에 흐르는 물은 쪽빛으로 물들인 듯하나  
문 밖의 저 푸른 산은 사람이 그린 그림이 아니로다.  
푸른 산과 물소리는 우주 삼라만상의 실상을 나타내 주는데  
누가 있어 그것을 보고 무생(無生)을 깨닫겠는가?  

산과 물은 푸르고 또 푸르며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꽃은 만발하도다.  
이 모두가 다 줄 없는 가야금의 곡조러니  
눈 푸른 호승(胡僧:지공대사)이 한없이 바라보네.  

국화꽃과 푸른 대나무는 남의 것 아니며  
밝은 달과 시원한 바람 또한 세속의 경계가 아니로다.  
그 모든 것 다 내 집의 것이로니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와 내 마음 가는 대로 쓰도다.  
고산사 산 밑은 몸 지내기에 좋은 곳이로다.  
먹을거리 지천에 널려있고 함께 사는 이웃 또한 좋도다.  
무심한 촌 늙은이 마음에 걸리는 것 없으니  
달라는 이 있으면 집안의 불씨까지 온통 다 내어주고 마는 도다.  
바람은 창 밖 솔숲에 울부짖고 흰 눈은 산에 가득하고  
밤이 되니 푸른 등불 고요함을 비추어 주는 도다.  
질박한 옷을 입고 세상사 내려놓으니  
산에 사는 이 한가한 승 깨달음을 얻는 때로다.  

배고프면 한 끼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노니  
내 한마음 한적하노니 세간의 모든 경계 또한 한가하도다.  
옳고 그른 경계로써 나를 탓하지 말지어다.  
뜬구름 같은 중생사(事) 억지로 할 일 아니로다.  

마음속에 가진 걸림 많은 경계는 말할 것 없도다.  
피곤하면 한가로이 드러눕고 목이 마르면 차를 마실 뿐이로다.  
임제(臨濟)와 덕산(德山)은 미혹함에  
공연한 방편으로 방(棒)과 할(喝)을 썼도다.  
햇빛은 맑고 강산은 수려하며  
푸른 봄 온갖 꽃과 풀은 영롱하게 빛나노니  
무엇 때문에 새삼스레 법회를 마련하겠는가?  
온 우주의 삼라만상이 본래 있는 그대로 참인 것을  
해가 아무리 밝다 하나 밤을 밝힐 수는 없으며  
거울이 아무리 맑으나 뒷면은 비출 수 없으니  
해와 거울이 어찌 내 마음만 하겠는가?  
내 마음 있는 그대로 원만하게 항상 참 모습을 비추는 도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지 않고  
달마 대사께서 천축에서 오지 않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은 온 세상에 두루 하고  
봄바람에 온갖 꽃이 활짝 피었으리라.  

고산(孤山) 아래 자리한 사찰은 한가롭고  
거기 사는 나 또한 무심하기 그지없도다.  
돌로 쌓은 계단 무너지거나 말거나  
돌로 이은 지붕이 성성하거나 말거나 그저 내버려 둘 따름이로다.  

내 본래 산에 사는 산 사람이러니  
모습 또한 촌스럽고 말수도 적어  
누구를 만나더라도 호들갑스럽게 반기지 아니하나  
그 마음이야 밝게 빛나는 가을달이로다.   

    지공대사는 어떤 분인지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선오스님(禪悟)이란 분이 쓰신 글에 지공화상(指空和尙)은 1300년 인도(印度)에서 태어나 성장과 수학의 시기를 제외하고 생애의 대부분을 동아시아에서 활동한 고승이라 했다.  
   지공스님은 석가모니의 수제자인 가섭존자의 후계자로 소위 정통 중의 정통 스님이며 가섭불의 법통을 이은 분이시다.
  중국 원나라 시절을 보내시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오셔서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천보산 자리가 마치 스님이 머리를 깎았던 인도 나라난타 절 주변의 산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제자 나옹스님에게 이야기하여 이 절에서 주석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회암사이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흔적은 회암사지, 통도사,  신륵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기도 회암사지(檜巖寺址)의 목은 이색이 지은 「지공화상부도명병서(指空和尙浮屠銘幷序)」에 의하면, 지공은 가섭존자의 제108대(代) 법손으로, 석가모니의 부왕인 정반왕의 아우 곡반왕(斛飯王)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민지(閔漬)의 지요서와 지공이 번역한 불전을 간행하면서 이색(李穡)이 남긴 뒷글에서는 20세 때 인도 나란다대학에서 수업을 마치고 유행길에 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통도사는 유일하게 삼성각에 기존의 삼성(三聖:독성․칠성․산신)을 모시기보다는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의 세 분 대사를 모시고 있다.  
 그 만큼 통도사는 지공화상과 특별한 인연관계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통도사의 보물로 지정된 지공역(譯)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文殊舍利菩薩最上乘無生戒經)"이 현존하고 있으며, "서천지공화상위사리가사계단법회기(西天指空和尙爲舍利袈裟戒壇法會記)"를 통하여 지공스님이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법회를 주관하였다는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천성산 운흥사(雲興寺)가 원효대사 창건이후 폐사되었던 절을 그가 당시 통도사에 머물 때 꿈에 계시를 받아 다시 운흥사를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천성산운흥사사적(千聖山雲興寺事蹟)"을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  
  
     지공은 1318년 봄, 19세의 나이로 지금의 네팔 남쪽(인도 마가다국 나란다)에서 출발하여 인도의 동부를 돌아 세일론섬에 당도하였다. 그것은 나란다를 떠나기 전 율현으로부터 스리랑카의 길상산에 보명존자(普明尊者)을 찾아뵈라는 명을 받고 남하하였던 것이다.  
 그는 보명존자를 만나 득도하여 의발을 전수받았다.  

 
    이때 그곳에서 1년간을 보내고 다시 인도의 서부를 돌아 북부의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을 거쳐 1320년 티벳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스승 보명존자의 부탁에 의해서였다. 그가 지나간 이 통로는 당대(唐代)부터 개통되었고, 인도의 신비사상이 강하게 반영된 후기 밀교사상이 티벳에 전파된 중요한 통로였다.  
 이 과정에서 동쪽의 해로를 따라 미얀마와 말레이반도까지 왔던 그의 여정은 좌절을 맛보았다. 다시 인도 서부의 타르사막과 인도북부를 거쳐 북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티벳에(1320년) 도착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1세 되던 가을이었다. 티벳 서부와 놉놀을 거치고 다시 투르판을 경유하여 사천성과 운남의 변방에 이르기까지 5여년을 소요하여야만 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원(元)의 수도인 연도(燕都)에 도착하여 원의 황제 진종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가 이처럼 14세기 전반에 인도를 한 바퀴 돌아 인도 각지와 티벳, 운남을 거쳐 원의 수도였던 연도에 당도하였다는 내용들은 고려의 대문장가 이색이 지은 경기도 회암사지(檜巖寺址)의 나옹화상과 지공화상 비문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들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티벳을 떠나 3년간 촉에서 좌선하였는데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까지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대독하에서 도적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하였고, 운남에서 비를 만나 하안거를 보냈던 사실도 보이며, 대리국에서 호도를 먹으면서 다른 육식을 사양한 점으로 미뤄 지계(持戒)에도 철저하였던 고행자였음을 알게 해준다. 또한 중경로에서 다섯 차례 열었던 법회로서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은 대체로 겨울과 여름엔 여행을 피하고 봄, 가을에 교화를 위하여 이동하였다고 보여 진다. 그가 원나라의 수도 연도(燕都)에 도착한 시기는 태정(泰定)초이므로 1324년에 해당한다. 그의 나이 25세였고 봄이라 추측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공화상은 인도에서 1300년에 출생한 셈이 되는데, 이러한 계산은 그를 찾아 감화를 받았던 백운화상(白雲和尙) 경한(景閑)이 남긴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에서도 재확인되고 있다.   

   지공대사와 나옹선사, 무학대사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면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는 아(牙)씨로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서 태어났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了然) 스님에게 출가했다. 충목왕 11년 원나라 연경에 가서 인도승 지공대사를 만났을 때 "배로 왔는가? 육지로 왔는가? 아니면 신통력으로 왔는가?"라고 묻자 "신통력으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이미 도력이 높음을 나타냈다.  

   나옹은 지공대사를 스승으로 하고 무학대사를 제자로 하여 오늘날까지 3대화상으로 추앙을 받고 있고 국보 제180호인 신륵사 조사당에 나옹선사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지공대사, 무학대사의 영정이 있다. 
   나옹선사는 속세의 나이 57세에 입적하였는데 신륵사 법상에 편안히 앉은 채 조용히 열반하였다고 한다. 이곳 보제존자석종은 나옹의 부도이다.  
  
   경기 여주 봉미산 신륵사(神勒寺)에는   
지공대사의 제자인 나옹선사(懶翁禪師) 선시(禪詩) 청산혜요(靑山兮要)가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 하네.  

靑山兮要 我以無語(청산혜요 아이무어)  
蒼空兮要 我以無垢(창공혜요 아이무구)  
聊無愛而 無憎兮(요무애이 무증혜)   
如水如風 而終我(여수여풍 이종아)

청산혜요를 쓴 나옹선사는 그의 스승 지공대사를 보고 느낀 점을 읊은 것이다. 지공대사는 말수가 적고 항상 마음에 밝은 마음을 지니니 얼굴에 평화스러운 미소가 잔잔하고 남녀 간의 사랑이나 미움을 모르고 욕심 없이 자연과 함께 사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지공대사의 좌선 수도원을 볼 때마다 신라 때 혜초 스님이 생각난다. 
  혜초 스님도 중국의 물설고 낯 설은 돈황의 한 석굴에서 생활하다 열반하였다.  
  이와 같이 고승들은 석굴이나 석(石)면을 방으로 삼고 뼈를 깎는 고행을 하다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다. ‘이 좌선 수도원에 지공대사가 남겨놓은 것이 없을까?‘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같은 것. 석굴 안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지공대사를 이해하려면 혜초(蕙草) 스님에 대하여 알아보면 되리라 생각된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혜초 스님을 찾아보면 723년(성덕왕 22) 당나라 광저우[廣州]에 가서 인도의 승려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된다. 그 뒤, 그의 권유로 나신국(裸身國)을 경유하여 인도 동해안에 도착, 불교 성적(聖跡)을 순례한다. 이후 파미르고원을 넘어, 727년경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쿠차[龜玆]를 거쳐 733년 당나라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의 도량(道場)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珠實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密敎) 경전을 연구한다. 


    740년(효성왕 5)부터 이 경전의 한역에 착수하였으나 이듬해 금강지의 죽음으로 중단된다. 혜초 스님은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不空三藏) 6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서도 이름을 떨쳤으며 우타이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의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1908년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을 중국의 나옥진(羅玉振)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왕오천축국전은 고대의 동서 교섭사(交涉史)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西域) 각국의 종교와 풍속·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는 벌써 불교 유적이 많이 파괴되고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인도에 힌두교가 본격적으로 퍼지는 때로 불교의 수난시대라고 했다. 지금 불교의 고향 인도의 불교 신자는 1%도 안 되며 사원은 있으나 스님이 없는 빈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쌀)가 매일 15석이나 필요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 또한 대 ·소승(大小乘)이 구행(俱行)하고 있으나 곳에 따라 대승만 행하는 곳도 있고, 소승만 행하는 곳도 있으며, 북방에는 사원과 스님 및 신자가 많아서 절에서 공사가 있을 때는 아내와 코끼리까지 절에 시주하는 독실한 신자도 있다. 어떤 나라의 나체 생활 풍속, 가봉뇌옥(枷棒牢獄)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과 같이 사는 일처다부제, 살생하지 않는 것, 흙 솥에 밥을 짓는 것 등 여러 가지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http://gwangju.go.kr/cms/board/board/SelectBoardForm.jsp?communityKey=B0290&boardType=B&boardId=310&act=VIEW


 

 

 

 

석실 천장의 큰 암반 지붕 - 마치 문경 봉암사의 월봉토굴의 돌지붕과 비슷하다.

                    단지 지공석실의 암반천장은 수평으로 되어 있고, 월봉토굴의 암반 천장은 비스듬함.

 

 

 

   고려말의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원나라로 유학가서 지공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통 선종(禪宗)을 공부하고, 스승 지공선사와 함께 귀국하여 회암사 등지에서 불법을

 

펼친다.  그 후에 제자인 나옹선사가 먼저 입적(入寂)하자 전국을 유랑하며, 양산 통도사,

 

조계산 송광사 등지에서  선종을 가르친다.

 

   송광사에서 머물던 어느날 송광사의 터가 불법을 크게 융성할 길지임을 보고서,

 

"어느 분께서 처음으로 이 송광사 터를 잡으신 것인가?" 하고 물어 본다.

 

지눌 보조국사가 무등산 규봉암 의신대에 앉아서 산맥의 흐름을 되짚어 송광사 터를

 

잡았다라는 대답을 듣고 발걸음을 광주 무등산으로 향한다.

 

 

     무등산 규봉암의 빼어난 경관이 마음에 흡족하던 지공선사는 여기서 오래동안

 

머물고자 하였으나, 선사의 명성을 듣고서 설법을 듣고자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규봉암 경내가 협소하여 불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어, 너덜갱으로

 

설법 장소를 옮겨가게 된다. 신자들은 자연 그대로인 너덜겅을 의자로 삼아 앉고

 

지공선사는 조금 너른 바위에 앉아서 위의 신도들을 쳐다보며 명설법(名說法)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발 아래 광대무변하게 펼쳐지는 한빛고을을 내려다 보면서

 

선사의 설법을 듣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 보아도 이름 그대로인 산상설법(山上

 

說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도들이 더욱 몰려들자 지공선사는 너덜겅 한편에

 

있는 자연 석실(石室)에 거쳐를 마련하고, 이곳을 좌선수도원(座禪修道院)으로

 

삼았다.  그 이후로 이 규봉암 근처에 있는 너덜겅을 지공너덜겅으로, 석실은

 

지공대사 좌선수도원으로 불리워 지게 된다.

 

 

 

 

석실 내부에 있는 북방식 구들 - 갱(坑)의 유적 처럼 보임.  

 

 

 

  불교사전

      

        指空(지공)

    (?~1363) 인도 스님. 제납박타(提納薄陀, Dhyānabhadra). 선현(禪賢)이라 번역. 호는 지공. 가섭존자(迦葉尊者)로부터 108대. 인도 마갈타국 만왕(滿王)의 제3 왕자. 8세에 나란타사 율현(律賢)에게 출가함. 19세에 남 인도 능가국 길상산 보명(普明)에게 참배하여 의발을 전해 받고, 서역을 떠나 중국에 이르다. 1328년(고려 충숙왕 15)에 우리나라에 와서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예배. 7월에 연복정(延福亭)에서 계를 설하고, 곧바로 연도(燕都)에 돌아가 법원사를 짓고 머물다가, 지정 2년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입적. 1368년에 다비(茶毘). 대사도(大司徒) 달예(達叡)가 유골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오자, 1372년(공민왕 21) 그 부도를 양주 회암사에 세우다. 『우슬니사비좌야다라니(于瑟抳沙毘左野陀羅尼)』 이외의 2부를 번역.

 

 

지공선사의 행적과 영향 / 북경 세계역사

作者简介】贺圣达,云南省社会科学院教授。昆明65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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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谈起古代东方国家之间的文化交往,尤其是印中之间的文化交往,指空是大有功的人物。在14世纪的数十年中,他都同中国有着不解之缘,后来又去朝鲜半岛,在高丽王朝复兴了禅教。因此,在中印文化交流史上和东方文化交流史上,应给予指空一定的地位。本文拟对指空在中国的行迹、思想和影响,作一个虽然是初步的却尽可能是较为全面的探讨。
  一、指空--一个很值得研究的人物
  在古代东方国家之间,有着频繁而密切的文化交往。这些国家的宗教、文化人士,有的不仅往来于两国之间,而且在更多的国家间,传播着文化和友谊。在古代印度、斯里兰卡、中国和高丽(今朝鲜和韩国)的文化交流史上,至少有过两位杰出的文化使者在这几个国家都留下他们的足迹,对传播佛教文化作出了贡献。这两位文化使者,就是8 世纪时的新罗人慧超(704-?)和13-14 世纪的印度高僧指空( 1289 -1363)。慧超西去印度、斯里兰卡学佛,后在中国50余年,从事著述和佛经翻译,留下《经历五天竺国传》等著作,其事迹已为人们熟悉,载入史册。指空东来,在中国数十年,在云南时还主持了扩建狮子山正续寺,晚年在高丽宏扬佛法,复兴了禅教。正如季羡林先生所指出的,"指空是一个很值得研究的人物",指空来华传教"这一件事也是一个很值得探讨的问题"。(注:季羡林:《中印文化交流史》,新华出版社1992年版,第122页。)
  但是,翻检国内出版的大型辞书,如综合型辞书中的《中国大百科全书》、《辞海》,专门学科型的辞书如《宗教辞典》、《佛教文化辞典》、朱杰勤先生主编的《中外关系史辞典》都找不到指空的名字。国内出版的各种宗教史和中外关系史著作,包括解放前出版的方豪颇有影响的《中西关系史》等著作,都没有指空的一席之地。最近出版的由白寿彝先生主编的20卷本《中国通史》的元史部分(第十三、十四卷),也没有提到指空。倒是我们的邻国韩国,鉴于指空在韩国佛教史上的地位,在指空研究方面有较多的研究,出版了各种成果。在东邻日本,该国学者忽滑谷快天在1930年出版的《韩国禅教史》中,就以较多的篇幅论及指空。我国台湾佛学者编的《佛光大辞典》对指空也有简略的介绍。
  当然,中国学者对指空并非没有研究。早在1979年,陈高华先生就在《南亚研究》上发表了《元代来华印度僧人指空事迹》,1986年出版的何耀华教授的《武定夙氏本末笺证》也涉及指空事迹。近两年来,中国学者开始对指空作较为深入的研究。祁庆福教授、杨学政研究员和何耀华研究员先后在《云南社会科学》上发表了他们的研究成果。
  尽管如此,由于日、韩学者主要研究指空在韩国而中国学者对指空研究起步较晚,有许多问题,都有待于深入研究。笔者认为,仅涉及指空在中国的主要问题,至少有七个需要深入研究:一是指空来华时间;二是指空来华路线;三是指空单独来华还是与北印度高僧摩诃班达特一起来华;四是指空在中国的时间及行年事迹;五是关于指空的佛教思想;六是中国人对指空形象的描述;七是指空在武定主持扩建狮子山正续寺。在这七个问题中,关于指空主持扩建正续寺事迹,经祁庆福、杨学政、何耀华几位先生的研究,可以说已弄清。其余六个问题都有待于深入探讨。
  研究必须从可靠的史料着手。与指空直接有关的史料较为缺乏。但经过多年的挖掘,已渐趋丰富。本文引用的,主要有五种,均出于指空在世时或圆寂后20年间,可以说是价值较高的第一手资料。这五种资料按时间顺序分别为:
  1.元代武定路儒学教授昆明杨兴贤:《狮山建正续寺碑记》(文内简称《正续寺碑》),撰于元仁帝延祐七年,即1320年。
  2.元人撰《澹居稿》卷一中的《指空禅师偈序》一文,约作于元文宗至顺年间,即1330-1332年间。
  3.《文殊师利菩萨无生戒经序》(简称《无生戒经序》),由元明间的危素(《明史·儒林传》中有传)作于元顺帝至正十五年(癸己),即1355年。
  4.高丽李穑(1328-1396)撰《西天提纳薄陀尊者浮图铭并序》(简称《浮图铭》),作于高丽王朝宣光八年,即1378年(指空圆寂后15年)。
  5.《庚申外史》,中国元末明初权衡著,北京大学南亚研究所编《中国载籍中南亚史料汇编》辑录,也涉及指空事迹。
  韩、日两国学者著作中也有不少涉及指空在中国。其中日本学者忽滑谷快天的《韩国禅教史》,引用高丽李穑《桧岩寺薄陀尊者指空浮图碑》(简称《浮图碑》)、闵渍《指空禅要录序》, 李齐贤(1288 -1367)的《送大禅师湖公之定慧寺》等文。
  上述诸文引用较多,为节省篇幅,在文内出现均只出篇目或篇目简称。  (후략)

 

 

석실 내부의 제단 또는  돌선반.

 

 

 

 

석실 출입구에서 동남쪽으로 본 원경 - 맑은 날은 여기에서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고 함.

 

 

 

 

석실 앞마당의 고목나무

 

 

 

 

 석실(지공석실 또는 보조석실) 앞마당에 있는 고목나무

                     -  어두운 밤이라서 잘 알 수는 없으나 열매나 잎으로 보아 아그배나 야광나무 종류인 듯.........

                         이런 흔들린 사진이 찍히는 줄 미리 알았다면,  열매나 잎을 줏어서 올 걸.........

 

 

 

 

 

달을 구름 속에 숨어서 숨박꼭질을 하고...........

 

 

 

 

 

무등산 동쪽에 있는 마을의 불빛

 

 

 

 

 

계사년 음력 9월 보름달

 

 

 

 

 

참취 꽃

 

 

 

 

 

개밀(일명 들밀) - 맥 위에 털이 있으며, 짧은 까락이 있거나 혹은 없음. 3~5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