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8. 03:37ㆍ들꽃다회
개인산장 주변 소요(逍遙)
금강송을 휘감은 다래덩쿨
원래 이 개인산장터에 사시던 귀틀집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이 읽힌다.
"다래덩쿨이 높히 올라가야 산새나 산짐승들의 먹이로 남아있지........"
" 그야 그렇지요!! 영감~~"
금강송 솔방울
금강송 솔방울
이 솔방울들이 소복하게 떨어지면 주워 모아 찻물을 끓이기에 좋다.
정유성분이 많아 화력이 세다.
강릉 한송정에는 해송(곰솔)들이 많아 솔방울로 차를 끓이기 좋은 장소이다.
차를 마시며 고려의 문장가인 이곡(李穀)의 한송정가를 읊어 볼만하다.
한송정은 일명 녹두정이라고도 불렀으며, 강릉에서 동남쪽으로 시오리쯤 떨어진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다.
한송정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진흥왕(240~575)무렵, 화랑들이 국토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해 명산대천을 순례하면서 심신을 수양할 때 차를 달여 마시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동해안의 한송정.경포대.삼일포는 신라 화랑들의 대표적인 순례지였으며, 이 가운데 한송정.경포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 유적지로, 한송정의 돌샘에선 지금도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다.
화랑들이 자취를 남긴 이래, 고려 및 조선초기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한송정을 돌아보고 한결같이 이를 찬미하는 시를 남겼다. 장연우(?~1015)는 <한송정곡>을 남겼으며, 이인로(1152~1220)와 김극기(1170~1197)도 한송정을 노래했다.
이인로는 당시 화랑도가 심은 소나무를 보면서 사선의 모습을 그렸다.
여말삼은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2)은 환암스님이 12폭 병풍에 쓸 시를 부탁하자 "늙은 것을 부르면 응당 안화사 샘물로 차를 끓이겠지"안화사 샘물 한 병을 선물로 보내면서 "송악산 바위 틈에 가는 실샘은 솔뿌리에 엉킨곳서 솟아난다오"라고 하였다. 개경 송악산 안화사의 샘물은 <고려도경>에까지 기록될 정도로 유명했다.
김극기(1170~1197)도 정자는 허물어져 풀 속에 묻혔으나 이끼 덮인 차 화덕만이 당시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차 화덕은 신라화랑들이 차를 달이던 다구이다. 또한 이곡(1298~1351)은 한송정을 유람하고 그의 <동유기>에서도 한송정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였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도 한송정에 올라 시를 읊었다.
강릉은 경포대와 함께 신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사용됐던 한송정은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 연간(540~575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다.
진흥왕때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사선」으로 일컬어지는
영랑 술랑 남석행 안상 등 네 화랑이 이 무렵에 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화랑도가 제 모습을 갖추는데 크게 기여,
결국 훗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화랑들이다.
한송정과 사선에 관한 글은 고려때 학자 이인로(1152~1220년)의 파한집」
에 남아 있다. 이인로는 파한집에
까마득 옛적에 사선 노닌 곳
푸르른 소나무 우뚝 서 있네
차샘속 달만이 그때 그 시절
어렴풋 하나마 생각케 하네
또 「사선이 놀았던 한송정에는
그들을 따르던 3,000여명이
심은 소나무가 지금도
창창하여 마치 구름같다」
는 글도 남겨 놓았다.
다원서 함께한 찻자리,,, 먼저간 선고 다인들을 위하여
차회를 하고 기념 사진을 한장찍으며 추억을 새겨...
「석지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다구.
한송정 석지조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이제현(1287~1367)의
「묘련사 석지조기」에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이 석지조를 보지 못하게 될까 이 글을 남긴다.
고려때 사람 이곡(1298~1351년)도 한송정 석지조에 관한 글을 남겼다.
「...한송정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이곳 또한 사선이 놀던 곳이었는데
한송정에 유람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귀찮게 여긴
나머지 정자를 헐어 버렸다.
소나무 또한 불타버리고 오직 돌덩어리 한개에
차를 끓이는 화덕과 차그릇을 씻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놓은
석지조가 남아 있었는데 이는 사선이
차를 끓여마시던 다구라고 하였다」고 했다 .
한송정은 원래 지금 있는 자리에서 조금 올라가 북쪽으로는 경포대,
남쪽으로는 안인이 내려다 보이는 해변가 낮은 동산 꼭대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중요한 군사시설물이 있어
지금 자리에 공군측이 약식으로 정자를 만든 것이다.
한송정에 남아있는 연단석구도 화랑들이 차를 끓일때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제현이 보았던 석지조와는 전혀 다르다.
1868~1870년 강릉부사로 있으면서 한송정을
둘러보았던 윤종의가 신라선인이 이곳에서
노닐었다는 얘기를 듣고 돌에다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
석지조로 잘못 알려져 왔던 것이다.
이 연단석구에는 가로 40㎝ 세로 10㎝ 깊이 8㎝의 크기의 홈이 파져있으며
홈 주위에는「한송정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
라는 음각글자가 있지만 이 돌은 비석받침일 뿐이라고 한다.
한송정(寒松亭)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에 자리한 한송정(寒松亭)은 동해가 한눈에 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있다. 화랑의 차문화 유적으로 유명한 한송정에는 신라 때 부터 내려오는 우물과 차를 끓이는 돌부뚜막이 있어 중국과 일본의 차인들까지 한번쯤 찾아오고 싶어하는 곳이다.
경포대와 한송정은 신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다 한다. 다만 사선(四仙) 즉 영랑, 술랑, 남석행, 안상 등 네 국선의 전성기인 진흥왕(眞興王.540~575)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의 학자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그의 파한집에서
한송정
까마득한 옛적에 사선 노닌 곳
푸르른 소나무 우뚝 서 있네
차샘 속 달만이 그때 그 시절
어렴풋 하나마 생각케 하네
라고 노래해 한송정이 옛적에 사선이 놀던 곳으로 그를 따르던 무리 3천명이 심은 소나무가 지금도 창창하여 마치 구름같다고 했다. 지금 울울 창창한 소나무의 조상이 바로 옛 사선들인가?
이곡(李穀.1298~1351)이 쓴 동유기(東遊記)에는
" ...한송정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이곳 또한 사선이 놀던 곳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한송정에 유람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 이를 귀찮게 여긴 나머지 집을 헐어 버렸다.
소나무 또한 들불로 타버리고 오직 석조, 석지와 두 개의 돌우물만이 그 옆에 남아있었는데 역시 사선의 다구(茶具)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훗날 석지조의 이름만 듣고 두 돌덩이를 보지 못한 후세인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쓴다고 덧붙힌 <묘련사 석지조기>에서
...그 길로 한송정을 구경하였는데 그 위에 석지조가 있었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개 옛사람들이 차를 달여 마시던 것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돌덩이는 두 군데가 오목한데 둥근데는 불을 두는 곳이고
타원형은 그릇을 씻는 곳이다. 또 조금 크게 구멍을 내어 둥근데와 통하였으니 이는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인데 합하여 이름하기를 석지조라 하였다. 이에 인부 10명을 동원하여 처마 아래에 굴려다 놓고 손님들을 청하여 그 자리에 앉힌 다음 백설처럼 시원한 샘물을 길어다가 황금빛 움차를 달였다...고 했다.
이 돌화덕과 돌못은 어느 나라에도 유래가 없는 독특한 우리만의 차 도구이다.
비슷한 것으로 중국의 육우가 <다경>을 저술한 해인 758년에 구리나 쇠를 부어 주조한
풍로라는 다구가 있으나 석지조 보다 200년 가량 뒤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처럼 한송정은 아름다운 경치와 화랑들이 사용하던 돌화덕과 돌못이 남아있는 민족문화유산의 유서깊은 차 유적지이다
성범중의, 한시를 통한 세상 엿보기 (73)
江陵(강릉)의 鏡浦臺(경포대)와 寒松亭(한송정)은 빼어난 경관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곳에는 由緖(유서) 깊은 노래 <寒松亭(한송정)>이 전해지고 있다.
月白寒松夜(월백한송정): 한송정에는 밤 달이 밝고
波安鏡浦秋(파안경포추): 경포대에는 가을 물결이 고요하네.
哀鳴來又去(애명내우거): 슬피 울며 오락가락 하는 것은
有信一沙鷗(유신일사구): 모래펄의 신의 있는 한 마리 갈매기로다.
<高麗史(고려사)> ‘樂志(악지)’에 의하면 이 노래는 비파의 밑바닥에 적혀서 중국의 江南(강남)으로 흘러들어갔는데, 그곳 사람들이 그 가사를 해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光宗(광종)때 고려에서 張晉公(장진공, 본명 延祐, ?~1015)이 使臣(사신)으로 강남에 갔더니 강남 사람들이 그 뜻을 물었으므로 위의 시를 지어서 풀이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노래는 원래 鄕札(향찰)로 쓰인 노래, 곧 鄕歌(향가)이고, 위의 인용시는 그 漢譯詩(한역시)라고 할 것이다. 향찰로 기록된 <한송정>은 멀리 중국 강남지방까지 전파되었던 신라의 노래였다고 하겠다.
한송정 달 밝은 밤에 경포대에 물결 잔 제
有信(유신)한 白鷗(백구)는 오락가락 하건마는
어떻다 우리 王孫(왕손)은 가고 아니 오는고
이 시조는 고려 禑王(우왕) 때 江原道按廉使(강원도안렴사)로 나갔던 박신(朴信, 1362~1444)과 緣分(연분)을 맺은 강릉 妓生(기생) 紅粧(홍장)이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初中章(초중장)은 강릉에 傳承(전승)되던 <한송정>의 가사를 借用(차용)하고 있고 終章(종장)은 그리움의 대상인 박신의 尋訪(심방)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고 있다.
홍장의 시조는 강릉에서 전승되던 노래를 활용한 것으로 기존의 가사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精彩(정채) 있는 시조로 變換(변환)하여 놓았다.
<한송정 달 밝은 밤에>
【시조】- 홍장(紅粧)
한송정(寒松亭) 달 밝은 밤의 경포대(鏡浦臺)에 물껼 잔 제
유신(有信)한 백구(白鷗)는 오락가락 하것만은
엇덧타 우리의 왕손(王孫)은 가고 안이 오는이.
【어구 풀이】
<한송정(寒松亭)> : 강원도 강릉에 있는 누정
<경포대(鏡浦臺)> : 강원도 강릉에 있는 누대, 관동팔경의 하나
<물껼> : 물결
<잔 제> : 잔잔한 적에. 고요할 때.
<유신(有信)한> : 신의가 있는
<백구> : 흰 갈매기
<엇더타> : 어찌하여
<왕손(王孫)> : 임금의 후손, 여기서는 귀인을 가리킴
【현대어 풀이】
한송정 달 밝은 밤에 경포대의 물결은 잔잔하고
그 위를 미더운 갈매기가 오락가락 날고 있는데,
어찌하여 우리 임은 한 번 가고는 다시 오지 않는가?
【개관】
▶지은이 : 홍장(紅粧)
▶갈래 : 평시조. 서정시. 연모가(戀慕歌)
▶주제 :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
【감상】
고려 시대의 강릉 기생. 강릉부사 조운훌(趙云仡)이 경포(鏡浦)의 뱃놀이에서 선녀같이 꾸민 홍장으로 하여금 안렴사(按廉使) 박신(朴信)을 유혹하게 하였다는 ‘홍장고사’가 있다.
달 밝은 밤물결은 잔잔하고, 갈매기는 갔다가 다시 날아 돌아오는데, 왜 임은 가고 오지 않는가? 떠나간 뒤 돌아올 줄 모르는 임을 그리는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조이다. 백구를 미덥다고 한 것은 갔다가는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고 오지 않는 임은 미덥지 못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미덥지 못한 임이지만 잊지 못하고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초장에서는 달 밝은 밤 물결이 잔잔함을 묘사하여 정적인 분위기를 설정하고, 중장에서는 오락가락하는 갈매기를 묘사하여 동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여 서로 대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떠난 후 돌아올 줄 모르는 임을 그리는 애틋한 작자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 시조의 대의(大義)는 한송정에 달이 밝고 경포대 앞 바다 물이 잔잔한 때에 지연(地緣)이든, 인연(人緣)이든, 갈매기는 신(信)이 있어 왔다가는 날아가고, 갔다가는 또 오는데, 어찌하여 ‘사람’인 우리 왕손(王孫)은 한 번 가고는 아니 오는가 하는 뜻이다.
곧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람의 이치를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왕손’이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으나, 고려 왕손이라 가정해도 무방하겠다. 정(情)에서뿐만 아니라,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있어서 중세의 기녀(妓女)는 사회의 꽃이었다.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에 홍장(紅粧) 고사가 나온다.
장연우(張延祐)는 <한송정곡(寒松亭曲)>이라는 한시(漢詩)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月白寒松夜 波安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鷗
이는 홍장(紅粧)의 사상(詩想)과 흡사하다.
思親(사친)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조선 중종)
千里家山萬疊峯(천리가산만첩봉) 천리라 내 고향은 첩첩 봉우리 저쪽
歸心長在夢魂間(귀심장재몽혼간) 돌아가고 싶은 마음 언제나 꿈속이네.
寒松亭畔孤輪月(한송정반고윤월) 한송정 곁에는 외로운 달빛이요
鏡浦坮前一陣風(경포대전일진풍) 경포대 앞에는 한 떼의 바람
砂上白鷗恒聚散(사상백구항취산) 모래밭에 백구는 모였다 흩어지고
波頭漁艇各西東(파두어정각서동) 물결 위의 어선들은 왔다 갔다 하였네.
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 언제나 다시 임영의 길을 밟아
彩服斑衣膝下縫(채복반의슬하봉) 고운 때때옷 입고 슬하에서 옷 지을꼬.
조선 최고의 재상 황희는 이렇게 ‘경포대’를 노래했다. ‘맑디맑은 경포에는/ 초승달이 잠겨 있고/ 낙락한 한송정 솔/ 푸른 연기 서려 있다.// 땅엔 가득 노을이요/ 대엔 가득 대숲이라/ 티끌 세상 그 속에도/ 바다 신선 예 있노라.’
평소 남다른 기개와 호방함을 지녔던 황희 정승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시다. 한학자 손종섭씨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경포대’를 읊은 시객이 많았는데, 그들 대다수가 신선을 등장시켜 경포대의 아름다움을 전한 반면, 황희는 스스로가 신선임을 자청했다. 만사를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보는 천하태평의 호객임이 짤막한 시 구절에서부터 느껴진다”라고 얘기한다.
고려 말의 대학자, 길재는 말년에 자연에서 은거했다. 그는 기울어 가는 고려왕조에 환멸을 느껴 사직하고, 구미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력했다. 자연과 벗하며 청빈하게 살았던 그의 모습은 ‘뜻가는 대로’라는 짧은 시 구절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시냇가 초가집에 찾는 이는 달과 바람/ 외객은 아니 오고 산새랑 지껄인다/ 대숲에 평상 옮기어 누워서 책을 본다’라고 했다. 달을 읊고 바람을 일컬었으니, 일견 음풍농월(吟風弄月) 같으나, 그러한 시에서 으레 떠벌리게 마련인 주흥이 없다. 또한 독서하는 모습에서 그의 반듯한 학풍을 엿볼 수 있다.
산중문답(山中問答)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이백 이태백
문여하사서벽산(問余何事棲碧山) 왜 푸른 산중에 사느냐고 물어봐도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대답없이 빙그레 웃으니 마음이 한가롭다.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복숭아꽃 흐르는 물따라 묘연히 떠나가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에 있다네.
고려사악지속악조 [高麗史樂志俗樂條] 고려 속요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고려사〉 전 139권 가운데 권70~71 부분이 악지인데, 거기에 실려 있는 고려와 삼국의 속요 부분을 일컬음.
속악조는 악보를 고찰하여 속된 말로 씌어진 고려가요 24편을 실은 뒤 현금·비파 등 13종류의 악기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향악정재(鄕樂呈才)인 〈무고 舞鼓〉·〈동동〉의 절차와 유래를 첫머리에 실었다. 그리고 〈서경〉·〈대동강〉·〈벌곡조 伐谷鳥〉·〈총석정〉 등 15편의 곡명·유래·뜻을 적었다. 〈처용〉·〈사리화 沙利花〉·〈정과정〉 등 7편은 이제현(李齊賢)의 한시를, 〈한송정 寒松亭〉은 장진공(張晉公)의 한시를 각각 적었다. 또 한문으로 된 〈풍입송 風入松〉·〈한림별곡〉 등은 원문과 함께 유래를 실었다. 그러나 국한문 혼용인 경우 한글 부분은 '운운이어'(云云俚語)라고 표현했다. 고려속요를 실은 뒤 "신라·백제·고구려의 음악은 고려 때도 썼으므로 뒤에 덧붙여 기록하겠다"며 〈동경 東京〉·〈목주 木州〉 등 신라 노래 6편, 〈선운산〉·〈정읍〉등 백제 노래 5편, 〈내원성 來遠城〉·〈연양 延陽〉 등 고구려 노래 3편의 곡명·유래·뜻을 간단히 소개했다.
다구(茶具)와 다법(茶法)
제다법(製茶法)과 전다법(煎茶法)의 변천에 따라 다구도 시대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 개반 - 다관의 두껑을 열때 두껑을 놓은 자그만한 탁자 모양의 접시. * 다항 - 차(다관에 넣기 전의 건조된 잎차)항아리. * 차편 - 엮시 차를 담아서 내는 접시. * 다정 - 찻물을 이는 솥으로 차를 내는 작은 주전자보다 더 큰, 찻물을 담아 내는 주전자. * 퇴수기 - 차를 내다가 찌꺼기와 함께 물을 버리는 숙우보다 조금 큰 그릇.
<다음 지식> 랄라랄ㅇ 님의 글에서 |
텃밭의 금강송들
노박덩굴 열매 - 이 보석 장식을 디자인하신 분은??
노박덩굴 - 암수딴그루, 어린잎은 식용. 열매는 제유용, 수피는 섬유용.
신나무 시과(翅果)
참취 꽃
뱀딸기 - 가을철에는 먹이가 풍부하여 산새들도 디저트로 먹지 않은 것으로 보임.
노박덩굴 열매
노박덩굴 - 이런 덩굴성 식물들은 씨앗이나 꺽꽂이로 번식이 잘 되니
함부로 캐면 안됨.
노박덩굴 열매 - 유황 껍질 속에 담긴 루비
참취 꽃
참취 꽃
신나무 (일명 시닥나무) 열매 - 시과(翅果) : 바람에 자손이 멀리 퍼지기를 위하여
날개를 단 단풍나무과의 열매.
고광나무 열매 - 봄철에 피는 하이얀 꽃이 이렇게 후손 번식을 위하여
삭과를 맺었다.
참취 꽃 - 취나물 종류는 약한 독성이 있어서 자연산은 반드시 묵나물로 활용함.
비닐 하우스 등지에서 재배한 취나물은 자연산에 비하여 독성이 약하나
과식을 금지하시기 바람.
미국쑥부장이
가는잎기름나물
산장 마당 한구석에 가래를 심어 자란 가래나무
회잎나무
회잎나무(일명 홑잎나무) : 어린 잎은 향기가 좋은 봄나물로 이용.
향유
향유 - 유럽에서는 이 향유에서 향수의 원료를 증류 추출한다.
찬 솔바람 부는 절터에서 나투신 보살상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강릉 한송사 터 보살상(국보 124호)은 강릉 남항진동 한송사 터에서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에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반환되어 현재 국립춘천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평창 오대산 월정사 보살상, 강릉 신복사 터 보살상 등과 더불어 고려 초 강원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보살상으로, 높직한 원통형 보관(寶冠)을 쓴 것이 특징입니다.
한송사-신라 화랑의 자취가 어린 명승지
한송사는 강릉시 강동면 남항진동(하시동리)에 있던 절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공군비행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바닷가 소나무 숲속에 둘러싸인 한송사 옛터는 예로부터 인근의 경포대, 한송정과 더불어 선인들의 금강산 유람과 연이은 관동지방 탐승 여행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던 곳이어서 이곳을 다녀간 시인묵객들의 시문에 즐겨 등장하곤 합니다.
이 지역이 옛 분들의 탐승 대상이 된 것은 뛰어난 풍광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신라 사선(四仙)이라 불리는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랑(安詳郞)과 그 무리 3천 명이 노닐던 곳으로 일찍부터 신성시되었기 때문입니다. 1326년(충숙왕 13) 고려의 대문호인 안축(安軸, 1282~1348)이 쓴 「경포신정기(鏡浦新亭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글에 신라의 네 신선에 대한 전설이 전합니다.
사선은 신라 효소왕(692~702 재위) 때의 화랑들입니다. 당시 화랑 중 그 문도들이 가장 번창하여 비(碑)를 세우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관동팔경의 하나인 총석정과 삼일포, 한송정에는 사선과 관련된 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관동팔경은 화랑의 수련장이자 순례길이 되었던 경주에서 안변까지의 동해안 명승지가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관동의 팔경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듯이 첫 화랑인 설원랑 기념비가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세워진 것은 경포대와 한송정으로 대표되는 이 일대가 화랑의 순례길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음을 말합니다. 경포대와 한송정을 비롯하여 인근의 한송사는 고려시대 들어 사선의 유적지를 유람하려는 고관대작을 비롯하여 시인묵객들로 붐비곤 했습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문인들이 이곳을 탐승하고 남긴 시와 기문(記文)이 적지 않게 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고려 명종대의 시인 김극기(金克己, 1148경~1209경)가 노래한 한송사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절을 두른 구슬 같은 시내와 옥 같은 봉우리, 청량한 경계가 지금도 예 같다.
공중을 향해 바로 솟음은 솔[松]의 성질을 알겠고, 물(物)에 응해도 항상 공(空)함은 대[竹]의 마음을 보겠다.
바람소리는 자연의 풍악을 울리고, 외로운 구름은 가서 세상 장마가 된다.
사신(使臣, 원문은 使華)이 해마다 경치를 찾으니, 연하(煙霞)는 특별히 깊어라.
(출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 불우조(佛宇條)」)
고개 위 문수당은, 채색 들보가 공중에 솟았네.
조수는 묘한 소리를 울리고, 산 달은 자애 어린 빛이 흐른다.
구름은 돌다락[石樓] 가에 불어 나오고, 물은 소나무 길가를 씻는다.
앉아서 보니 숲 너머 새가 꽃을 머금고 날아오네.
(출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 제영조(題詠條)」)
옛 분들의 기록, “땅속에서 솟은 문수와 보현”
옛 기록에 한송사는 문수당(文殊堂), 문수대(文殊臺), 문수사(文殊寺)로 불렸습니다. 고려 학자 이곡(李穀, 1298~1351)의 문집인 『가정문집』권5의 「동유기」에는 한송사에 대해 이렇게 전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
비 때문에 하루를 (경포대에서) 머물다가 강성(江城)으로 나가 문수당(文殊堂)을 관람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동쪽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었으나 호종단(胡宗旦)에 의해 물속에 가라앉았고 오직 귀부(龜趺)만 남아 있었다. 한송정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이 정자 역시 사선이 노닐었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하여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도 들불에 연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석조(石竈)와 석지(石池), 두 개의 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10세기, 백대리석, 높이 56 cm, 보물 81호,
강릉 오죽헌ㆍ박물관
강릉 오죽헌ㆍ박물관에는 또 한 구의 한송사 보살상이 있는데, 이 두 구의 한송사 보살상은 위의 기록에서 전하는 문수와 보현보살상으로 추정됩니다. 오죽헌ㆍ박물관 소장 보살상은 안타깝게도 머리와 팔 한쪽이 없으나 가부좌를 풀고 한쪽 다리를 밖으로 편안하게 둔 앉은 모양이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보살상과 서로 대칭을 이루어 이 두 보살상이 삼존불의 좌우 협시보살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협시보살상이 모시던 본존불은 누구였을까요?
현재 백사장으로 뒤덮인 남항진동의 한송사 옛터에는 다행스럽게도 두 보살상을 받치던 대좌가 남아 있습니다. 몹시 손상된 모습이긴 하지만 사자와 코끼리 모습을 한 화강암 대좌인 것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법화경』과 『화엄경』, 『다라니집경』 등에 따르면 사자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앉는 대좌이며, 코끼리는 자비를 실천하는 보현보살이 앉는 대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자와 코끼리 모양 대좌는 경주 불국사에도 남아 있으며, 9세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성주 법수사 석조비로자나삼존불에도 사자와 코끼리 대좌가 있습니다. 문수와 보현보살상이 협시할 수 있는 불상은 석가와 비로자나(Vairocāna) 불상인데, 당시 화엄종과 선종에서 비로자나불을 모셨고, 밀교의 영향으로 9세기 중반부터 마하비로자나 불상을 대거 조성하기 시작하는 점 등을 감안하여 한송사 보살상의 본존은 비로자나 불상으로 추정합니다.
한송사 터에 남아 있는 사자와 코끼리 대좌
법수사 터 석조비로자나삼존불 대좌(사자와 코끼리 대좌),
통일신라 9세기, 경북대학교박물관
강원도로 옮겨진 오대산 문수신앙
보살상은 왕자시절의 석가모니 모습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기에 관을 쓰고 화려한 영락으로 장식합니다. 한송사 보살상에서 보이는 높은 원통형 보관은 고려 초 강릉 인근의 보살상에서 보이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원통고관형(圓筒高冠形) 보살상은 인도의 밀교 도상이 수용되면서 중국에 등장하는데, 밀교가 융성했던 수도 장안과 장안의 밀교 미술이 이식된 산서성 오대산 지역을 중심으로 퍼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고관형 보살상은 이후 오대와 송나라 조각으로 이어지고, 요나라 조각에서 더욱 유행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0세기 경 강원도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월정사, 신복사, 한송사(문수사) 보살상에서 원통형 보관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고려, 높이 180 cm, 보물 139호,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월정사
신복사 터 석조보살좌상, 고려, 높이 121 cm, 보물 84호,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화엄경』에 따르면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성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자장(慈藏)법사에 의해 오대산 문수신앙이 중국에서 유입되는데,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문수신앙은 주로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영험을 베푸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삼국유사』의 「대산 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서는 신문왕의 아들 보천과 효명태자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매일 차를 달여 공양하며 수도생활을 하다가 효명태자가 왕으로 추대되어 효소왕으로 등극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앞서 신라 사선들의 무리는 효소왕의 등극에 크게 영향을 미친 오대산 지역의 지지세력이자, 이 지역에 문수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통일신라 조각 전통과 지역 양식을 반영한 우아하고 귀족적인 보살상
지혜와 자비행이 구현된 입가의 미소와 너그러운 얼굴, 거스를 것 없는 둥근 어깨와 풍만한 팔다리, 단정하게 앉아 유마거사와 불이(不二)의 법문을 변설(辯舌)하는 문수의 모습이 투영된 듯한 한송사 보살상의 부드럽고 세련된 조각 수법은 통일신라 석굴암 감실상과 비교됩니다. 석굴암 감실상에서 보이는 느긋한 자세, 둥근 어깨와 유연한 신체 표현, 갸름하면서도 풍만한 얼굴 등의 통일신라 조각 전통은 시대를 넘어 한송사 보살상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석굴암 감실상, 통일신라 751년, 높이 106 cm, 국보 24호, 경북 경주시
석굴암 감실상, 통일신라 751년, 높이 106 cm, 국보 24호, 경북 경주시
강릉과 오대산 지역은 예로부터 명주라 불렸는데,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金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으로 은거하여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원성왕(785~798 재위)은 김주원에게 명주, 양양, 삼척, 울진, 평해 등을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명주군왕으로 봉해 다스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김주원의 직계후손들은 중앙 정계에도 진출하였는데, 이러한 명주지방과 왕도인 경주와의 연관성은 통일신라 조각 양식이 한송사 보살상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해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한송사 보살상은 높은 원통형 보관이나, 턱에 살이 오른 모습 등에서 월정사나 신복사 보살상처럼 이 지역 보살상의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오대산 문수신앙과 선종의 사굴산파 융성에 따른 독특한 명주지방 불교문화가 반영된 모습일 것입니다. 당시 명주지방은 김주원 세력의 막강한 후원 아래 경주 못지않은 불교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통효대사 범일(梵日, 810~889)을 굴산사 주지로 모셔와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하게 한 것도 강릉 김씨 호족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범일의 문하에서는 낭원대사 개청(開淸, 834~930)·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6) 등을 비롯한 십성(十聖)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신라 말 고려 초 이 지역에서는 굴산사를 중심으로 범일이 처음 세운 신복사를 비롯하여, 범일의 문인(門人)이었던 신의두타(信義頭陀) 스님이 머물렀던 월정사, 개청이 주지로 있었던 보현사(보현산사 지장선원) 등이 융성하였습니다. 한송사(문수사)는 9세기 말 10세기 초 보현사와 나란히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한송사 역시 이 시기 강릉 김씨 호족의 후원을 받은 사굴산파의 영향 아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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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이 진 향유
[정의]
고려 후기의 학자 이곡(李穀)[1298~1351]이 지은 기행문.
[개설]
이곡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그 뒤 본국과 원나라에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던 중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동유기」는 이때 남긴 여행기로, 그 내용은 『가정집(稼亭集)』 권5 기(記)에 실려 있다.
[내용]
「동유기」는 이곡이 1349년(충정왕 1) 가을 금강산과 속초, 강릉 등을 유람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정리한 여행기이다. 몇 월인지는 소개되어 있지 않으나 날씨 등을 고려할 때 9월경일 듯하다. 8월 14일에 개경을 출발하여 9월 21일 평해 월송정까지의 여행기록이 담겨 있다.
이 가운데 강릉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 “9월 11일에 연곡역(連谷驛)에서 잤고, 12일에는 강릉존무사(江陵存撫使)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렸으므로 그와 함께 경포대에 올라가 놀았다. 비 때문에 하루를 머물렀다. 이튿날 일찍 역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 밖에 신라의 화랑들인 사선(四仙)이 노닐던 곳이라 한 한송정(寒松亭), 등명사 일출대 등의 내용이 보인다.
[의의와 평가]
「동유기는 고려시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이곡이 남긴 글로 유람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이곡이 동유하면서 남긴 글에 실린 여행 경로는, 이후 조선시대에도 하나의 모델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 강릉 지방의 경물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돌배나무
[조은의차이야기]묘련사 석지조 茶향의 여백
묘련사 석지조
자연에서 즐기는 차 맛
목은 이색이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라고 한 그의 스승 익재 이제현은 고려후기 원나라 복속시기를 풍미한 정치가이며 문학가, 사상가였지만,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차인 중에 한 사람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용패설] 2권이 있다. 이 두 책을 합하여 [익재집]이라고 한다. 이 문집에는 우리 차문화사로 볼 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송광화상이 햇차를 보내준 은혜에 대하여 붓가는 대로 적어 장하에게 부치다]란 시도 있지만, [익재난고] 24에 실린 [묘련사 석지조]에 관심이 더 간다.
이 글은 삼장 순암법사가 천자의 분부를 받들어 금강산에 가서 불사를 하고 돌아오다 한송정을 들렸는데, 그곳에서 돌로 만든 석지조(石池 )를 보고, 유년시절 묘련사 풀속에서 본 바위덩이와 같다고 생각되어, 묘련사로 돌아와 찾아보니 그대로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묘련사’란 절은 4곳이었는데, 이 글의 묘련사는 고려 충렬왕 9년에 개성 삼현리에 있던 묘련사로 보인다.
이제현이 기록해 놓은 석지조의 형태는 2개의 네모난 돌덩이였다. 하나는 위쪽이 둥글게 움푹 파여 있어 그곳에 샘물을 담았고, 밑에는 물을 버리는 구멍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위에 파인 곳이 두 군데였는데, 하나는 둥글게 다른 하나는 타원형으로 되어 있었다. 둥글게 파인 곳 밑에는 바람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차를 끓이는 화덕 같아 보이며, 타원형인 곳은 그릇을 씻는 곳이라고 되어있다. 이것을 합하여 석지조라고 했다.
순암법사는 인부 10명을 동원하여 그것을 처마 밑에 옮겨 놓고, 손님을 초청해 백설처럼 맑은 물을 길어 황금빛 움차를 끓이면서 익재에게 그 석지조가 2백여 년 전 이인로의 쌍명 기도회에서 사용한 것 같다며 기념하는 글을 적어 줄 것을 부탁한다. 익재는, 이인로는 자신이 경험한 작은 것 모두를 시문에 남겼는데, 석지조에 관한 내용이 문집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봐서 이인로 이전 것 같다며 순암법사가 운이 좋아 석지조를 만났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을 위해 기록해 놓는다며 쓴 글이 [묘련사 석지조]이다.
묘련사 석지조는 야외용 차도구이다. 찻물을 담는 곳과 찻물을 끓이는 곳, 다기를 씻는 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다도를 하는 사람들은 야외에서 차회를 하는 것을 들차회라고 한다. 들차를 갈 때 다기를 담아가는 손잡이가 달린 나무용기도 판매되고 있지만, 가끔 행사로서 할뿐이다. 그러나, 고려의 차인들은 돌로 만든 붙박이 차도구를 풍광 좋은 곳에 가져다 놓고 그곳에 가서 자주 차를 마신 것이다.
묘련사 석지조나 한송정 연단석구 같은 야외용 차도구를 떠올리면 동적인 차생활이 연상된다. 묶은 먼지를 말끔히 씻어내고, 샘이나 계곡에서 차디찬 물을 길어오고, 숯불을 피우기 위해 풀무질을 하다 매캐한 연기에 연신 눈물을 닦아내기도 하고 산그늘 내린 바위등걸이나 시원한 정자에 털썩 주저 않아 주변 풍광을 바라보며, 차를 첫 모금 입안에 머금었을 때의 그 맛을 요즘 차맛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야외에서의 차생활은 자연과 더불어 함께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찻잔 위로 홀홀히 낙하하는 형형색색의 꽃잎, 녹음 사이로 떨어지는 산새들의 울음, 도시의 분진을 지우라는 듯 무심히 흘러가는 계곡의 물소리, 농담(濃淡) 소슬히 번지는 가을 산색,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 한 자락 깔고 앉아 마시는 차를, 앞 아파트의 휑한 뒷모습 바라보며 집에서 마시는 차나, 민속품과 담배 연기만 자욱한 전통찻집에서 마시는 차와 비교할 수 있을까.
묘련사 석지조를 생각하면, ‘나아닌 다른 사람이 그곳에서 차를 끓여 마신들 어떠랴’한 듯한 여유도 부럽고 마음도 자연을 닮을 것만 같다.
ㅡ 다음 카페 <다로경권> 효원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개인산장 마당에 있는 돌배나무
자연을 철저하게도 사랑하시다가 떠나신 님........
이 돌배나무에서 그 분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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