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5. 00:33ㆍ여행 이야기
영귀정 가는 길 :함양군청에서 현대식 데크형 목책길을 만들어서 쉽게 가 보실 수 있슴.
소나무와 목책길
아름드리 솔 :솔이 좋다....그냥 좋다..
수양벚나무
영귀정 앞뜰의 조형물
맥문동 : 남계천 강변의 남쪽 자연제방의 북사면 길이어서 대낮에도 어두운 편임
산수국: 꽃의 색갈은 보통 흰색~연한 남색이나 이 길섶에서는 햇볕이 부족하여 꽃이 붉은 색을 띔.
영귀정과 신축중인 부속정자 전경
실도랑
영귀정
신축중인 부속정자
영귀정 마루에서 바라본 거연정 쪽 상류 풍광 : 나무 사이 신설 교량 너머 거연정이 있슴.1시 방향에 있는 건물은 군자정 부근의 음식점 평상임
영귀정 앞마당
정자 마루에서 군자정 쪽으로 바라 본 풍광
영귀정 현판과 천장 구조
영귀정 전경
정자 마루에서 바라 본 남쪽 목책길
소나무와 목책길
나리꽃과 남계천 ; 강 건너 마을이 새들(봉전리:鳳田里)마을 임.
영귀정이 있는 마을 이름은 다곡(茶谷)마을로 예전에 차밭을 가꾸던 다소(茶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한국관측천문학의 산 역사이신 전 서울대학교 교수이신 이시우(李時雨) 박사님의 저서인
<천문학자와 붓다의 대화>라는 책에서, 저자는 "우주적 완전성과 절대성은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2000억 개 이상의 별들이 모여 있는 우리 은하계에서 별들은 세대(종족)마다 운동학적인
특성을 지니고, 또 이들 전체는 조화로운 역학적 평형을 이루고 있다.별이나 성단은 은하
중심 주위로 돌면서 다른 천체로부터 섭동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국부적으로는 항상
불안정하다. 이러한 이유로 전체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역학적 평형상태를 이루어 간다.
이 말은 별의 세계에서는 완전한 안정이나 완전한 이완 같은 완전성 또는 절대성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별들 사이에 연기 관계가 존재하는 한 준안정이나 준평형과
같은 약간의 불안정성만이 존재할 뿐이다.이러한 현상은 만유가 유전 변천하며 변화하는
과정에서는 고정된 자성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삼법인(三法印)이 성립하는 별의 연기세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중략)
***원주(原註) 여기서 삼법인은
일체개고(一切皆苦) : 만유는 유전 변천하며 변화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 연속적인 상의 변화로 고정된 상이 존재하지 못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 상의적 수수관계에 따른 고유성의 상실로 자성(自性)이 없어지는 것.
우주 만유에 적용되는 연기법은 절대적인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 진리에 대한
것이다.주체와 객체가 연기과정을 통해 초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지 결코 끝이 없는
완벽한 절대성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 중 략)
....... 그러나 무상정등각 (無上正等覺)의 뜻은 위없는 올바른 평등성의 바른 깨달음이다.
따라서 올바른 평등성의 깨침인 무상정등각은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변천해가는 연기의
올바른 이해일 뿐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고정된 법은 없다(無有定法)고 하면서
고정된 절대 진리의 존재를 부정한다 " (후 략)
우리는 유교사상의 고전인 4서3경 중에 가장 마지막에 배우는 <주역(周易)>이라는
책의 전반을 흐르는 강조점인 숱한 변화와 변천의 흐름 속에서 자성(自省)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위의<금강경>의 무유정법(無有定法)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불교 철학이 잉태된 인도와 유교 사상의 토대가 된 각 민족별 문화의 차이가
문자로 표현할 때 서로 다른 용어로 설명한 것 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영귀정(詠歸亭)의 글자의 뜻은 영원히 돌아가는 것을 공부하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또 다른 의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처럼 벼슬길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전원 생활이나 즐기자는 의미로 귀거래사를 읊는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두 정여창 선생님의 고향이 지곡(개평)으로 정여창 고택이 현존하여 있고,
인근의 남계천 너머로 개평 마을이 보이는 수동면 원평리에 일두 정여창 선생님을 배향하는 남계서원(藍溪書院)이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단순히 귀거래사를 읊조리는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의 가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단지 말씀 언(言)+길 영(永)을 합하면 읊을 영(詠)자가 되지만, 이는 겸양과 사양을 통한
가림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영원히 되돌아서 가야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이 생을 살고 있는 현생(現生)은
돌아가야 할 고향 같은 곳은 아니란 말인가? 이런 기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큰 공부를 하는
곳으로 영귀정이 선택되었슴을 알 수 있다. 남향한 군자정의 강 건너편에 다소곳하게
배치한 정자가 영귀정으로, 국도를 지나는 일반 관광객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곳에
큰 공부를 궁구하기 위한 강학용 정자를 세우신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대하여 놀라움이 앞선다.
그렇다면 군자정과 영귀정 사이를 흐르는 남계천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요단강 또는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띄우는 강이 아닌가. 그러면 군자정이 있는
너럭바위와 영귀정이 위치한 영귀대를 오가시며 공부하셨다는 일두 정여창 선생님께서는
이승과 저승 또는 현생과 내생(來生)을 넘나드시면서 사셨다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신체적 크기는 한길 밖에는 안되지만, 학문 연구와 사색에는 시공(時空)의 제약이 있을 수 없다.
학문의 깊이가 그러하니조선조 성리학사에서 한훤당 김굉필, 조광조,이언적, 이황과 함께 오현(五賢)
중의 한분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거연정(居然亭)에서 (0) | 2013.05.15 |
---|---|
[스크랩] 군자정(君子亭)에서 (0) | 2013.05.15 |
[스크랩] 동호정(東湖亭)에서 (0) | 2013.05.15 |
[스크랩] 농월정(弄月亭)에서 (0) | 2013.05.15 |
[스크랩] 돌아 오지 않는 강 (0) | 2013.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