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4. 13:28ㆍ들꽃다회
제왕산에서
茶 宗
반야님이시여.........
나의 어머니 반야님이시여.......
원나라가 쇠약한 틈을 타서 요동정벌을
꿈꾸던 아바마마와 부원군 최영장군의 꿈은 사라졌습니다.
태조 왕건 할배부터 꿈꾸어오셨던.......
그 이전의 고구려, 발해의 할배들도 늘 시도하셨던
복본(復本)의 기운도 이제는 사라져 가나 봅니다.
말머리 돌림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꿈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강화와 여주를 거쳐 이 먼 임영주의 왕산큰골에서
두어달 가량 귀양살이 해왔지만
이제는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배와 할배를 뵈올 면목이 없으니 어머니만 저만치에서 뵙고 싶습니다.
날마다 제왕산에 올라 송도 쪽을 바라보아도
싸늘한 북서풍은 온화한 동남풍으로 바뀔 기색이 없고
이제 새로 왕이 된 정창군(定昌君) 요(瑤)가 물론 잘 하겠지만
병권을 가진 이성계장군의 서슬을 견디어낼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여건을 맞아 다물(多勿)을 못 이룬 소자 모니노(牟尼奴)
어머님 조차도 뵈올 면목이 없사옵니다.
먼 훗날 여기를 찾아오는 눈 밝은자 있을까 하여
날마다 제왕산에 돌무더기를 쌓아 봅니다.
******* - 반야 ; 신돈의 애첩,
공민왕과의 사이에서 고려 제32대 우왕(禑王)이 된 모니노를 낳음.
이러한 일 때문에 이성계 일파로 부터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폐가입진(廢假立眞) 즉 가짜 왕손을 폐위시키고 진짜 왕손을 옹립한다라는
빌미를 주어 공양왕을 추대하는 사유로 발전하게 된다.
- 정창군(定昌君) 요(瑤) : 고려 제33대 공양왕(恭讓王)으로 추증됨.
우왕을 귀양보낸 이성계 일파에 의해 추대된 왕으로
실제 통치권이 없는 명목상의 마지막 고려왕
- 복본(復本) : 우리 민족의 고향을 되찾자는 한자어로, 우리말로는 다물(多勿)이라
한다. 북부여,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시대에 걸쳐서 고조선의 옛땅인
요서지방(홍산문화의 기원지), 유주(幽州: 현 북경 남서부 지방),
감주(甘州), 숙주(肅州) - 현 감숙성(甘肅省)까지........
더 나아가서는 파미르 고원(총령<蔥嶺 :파고개>)까지 또한 북으로는
고조선족의 엣 터전이였던 바이칼 호수까지 회복하려는 일련의 정치군사정책
또는 국민의식화 운동을 말한다,
원나라의 고려통치기구인 쌍성총관부의 관리인 다루가치를 대대로
역임하고 있었던 이자춘, 이성계 부자가 고려 공민왕이 반원(反元)
정책의 일환으로 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자 이씨 부자는 고려군사에게
호응하여 성문을 열고 고려군에 합류한다.
한편 몽고족의 원나라는 한족 중심의 홍건적의 발호와 장강 이남지역에서
한족(漢族) 중심의 농민반란군이 나중에 명나라 태조가 된 주원장을 중심으로
뭉쳐서 원의 세력이 약화되자 이때를 이용하여 공민왕은 다물정신을 이어받아
요동정벌에 나서나 몽고의 다루가치 시절부터 데리고 온 이성계의 사병(私兵)
들이 원정군의 주축인 관계로 이성계는 이들 장수들과 사병(私兵)들을 회유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향한다.
이러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그후 조선조에 와서 세종 제위시 김종서
장군의 육진개척, 광해군 제위시 신생 청나라와의 연합작전 등등 소규모의
또는 소극적인 북벌정책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우리 한민족의 복본운동
(다물정신) 자체를 위축시킨 우리 한민족의 국격과 영토 그리고 장래를
고려하면 지극히 불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때에 이성계는 원나라 연도(燕都 : 현 북경)에 있는 인도승려인 지공선사와
그의 제자인 나옹선사의 불살생 계율의 영향을 받아서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였다고는 하나 그가 대대로 몽고의 부족장격인 다루가치 출신 집안인
것으로 미루어 보건 데 명과 원나라의 다툼에서 원나라가 승리하여 중원대륙을
계속 지배하지나 않을까 하는 잘못된 정세판단이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고려말의 국제정치상황은 오늘날에 있어서 남북분단 상황과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과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볼 때에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 결코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 강릉의 엣 고을지인 임영지(臨瀛誌)에서는 강릉과 왕산의 백성들이 고려 우왕의 북벌정책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제왕산에 석성을 쌓았다고 하며, 나중에 이방원에게 선죽교
에서 포살된 후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손들이 포은의 영정을 모시고 와서
우왕이 두달여 동안 살았던 능경봉 동남의 왕산큰골에 사당을 짓고 포은를
기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포은선생의 사당은 당시 큰골이 호환이 잦은 깊은 산골이여서 후에 인근
마을에 사당을 새로 짓고 이전하였다.
대관령 정상 휴게소에 있는 신재생에너지전시관의 풍력발전기
눈 설거지 중.......
정상 사진
대관령 고개 마루
능경봉
선자령 일대 풍력발전소
능경봉과 새로난 영동고속도로
제왕산 정상의 고사목
제왕산 안내판과 건너편의 능경봉
제왕산 안내판
능경봉
대관령 일대에서 가장 높은 능경봉
제왕산 정상 고사목 : 해발 841m. 그런데 강릉 쪽으로 약 1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봉우리(해발 840m)가 육안상으로는 더 높게 느껴진다.
제왕촛대바위
현재 국도로 전환된 구 영동고속도로와 새로난 영동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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