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마다 고려 우왕의 눈물이 - 제왕산

2014. 1. 4. 22:00들꽃다회

 

 

 

 

 

      

골짜기마다 고려 우왕의 눈물이... 강릉 제왕산

01.JPG

 

  공민왕은 본래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정략 결혼한 노국공주의 침소에도 가뭄에 콩나듯 들릴 정도였다.
그래도 어찌어찌하여 임신을 했으나 난산 끝에 노국공주가 숨을 거뒀다.
이때부터 공민왕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시달리게 되면서
엽기적 행각을 일삼게 된다.
용모단정한 귀족 자제들을 모아 변태적인 시중을 들게 하고
심지어는 귀족 자제들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후궁을 범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오른팔, 신돈의 첩, 반야에게 필이 꽂혔고
체통도 없이 신돈의 집을 들락날락 거리며 작업에 들어갔다.
왕이 들이대는데 '아니 되옵니다'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세상에 나온 아이가 '모니노(牟尼奴)'다.
모니노는 우왕(禑王)의 아명이다.
 
   공민왕과 찍자꿍이 잘 맞는 신돈을 주위에서 곱게 볼리 만무했다.
신돈이 간통을 했다,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
신돈의 골상이 흉인을 닮아 후환을 끼칠 것이다 등등...
가랑비에 옷 젖듯, 공민왕의 귀도 앏아져 결국 신돈의 목을 쳤다.
 
   반야의 아들 모니노는 태후의 반대에 부딪혀 세자로 삼지는 못했으나
공민왕은 '禑'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강녕부원대군에 봉했다.
 
   태후가 우를 세자로 허락하지 않자, 공민왕은 다시 후사를 걱정하였다.
급기야 귀족 자제와 자신의 비빈들을 억지로 간음케 하여 왕자를 얻으려 했고
비빈이 거부하자, 칼로 위협해가며 강제로 간음을 시켜 임신하게 했다.
천인공노할 작태를 벌였으니 후환이 없으면 섭섭할 터.
술에 취해 침전에 든 공민왕의 온 몸을 마구 찔러댄 이가 있었으니
바로 억지 간음에 동원됐던 귀족 자제였다.  
뇌수가 벽에 튀어 붙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맞은 공민왕의 나이는 45세.
고려의 등불 같은 존재였던 공민왕의 죽음은 이처럼 허무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10살의 어린 나이로 우왕이 즉위했다.
처음에는 학문 닦기에 힘썼고,

할머니 명덕태후의 가르침을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태후가 죽은 후 음주가무에 엽색 등 방탕하게 노닐면서
백성들의 신망을 잃어갔다. 여기에다 왕을 믿고 까불던 측근들이
이성계 일파로 부터 왕따 당해 유배되자, 우왕의 정치적 기반은 흔들렸다.
 
  이때부터 우왕의 생모, 반야가 신돈의 첩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우왕신씨설'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왕족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 맞다'고 이성계도 거들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꿍짝이 맞는 몇몇의 도움을 받아 어의를 벗겼다.   
강화도로, 여주로, 다시 강릉으로 유배지를 옮겨가며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유배만으로는 성이 안찼던지 이성계 일파는 강릉 인근으로 찾아가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렇게 24세 꽃다운 나이에 비운의 삶을 허무하게 마감한 우왕.
그의 서러운 눈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 강릉 제왕산이다.

 

                                다음 블로그 <살며 생각하며> 혜정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