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4. 23:18ㆍ들꽃다회
♧공민왕(고려31대왕):1330년 ~ 1374년 9월 21일, 재위 : 1351년 ~ 1374년
공민왕(恭愍王, 1330년 ~ 1374년 9월 21일, 재위 :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호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 시호는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으로 공민왕은 약칭이다. 충숙왕의 차남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Bayan Temür, 伯顔 帖木兒)이다.
즉위 초반에는 무신 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선언하였으며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대장공주의 사후 개혁의지를 상실하였다. 한때 신돈 등을 등용하여 권문세족과 부패 관료와 외척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등의 개혁정책을 폈으나, 신돈과 의사 충돌로 제거하였다.
이후 남색과 술, 향락에 탐닉하던 중 1374년 홍륜, 최만생에 의해 시해당했다. 영특하고 다재다능했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는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들 무니노(우왕)가 신돈의 시비인 반야의 소생이라는 점 때문에 정통성 논란이 나타날 것을 예견, 이미 죽은 궁인 한씨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사후 이성계일파에 의해 우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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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31대 국왕 | |
본명 | 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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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351년 ~ 1374년 |
왕후 | 노국대장공주 |
부왕 | 충숙왕 |
모후 | 공원왕후 |
이전 왕 | 충목왕 |
다음 왕 | 우왕 |
왕조 | 고려 |
시호 |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
출생
공민왕 왕전은 1330년 고려 충숙왕과 고려 출신 공원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나라 황실 출신은 아니었지만 그는 곧 원나라 조정의 압력에 의해서 몽골에 입조하게 된다. 1341년(충혜왕 2) 원나라에 건너갔다.
1344년(충목왕 원년)에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에 봉해졌고, 1349년(충정왕 1년)에 원나라의 황족인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원나라 입조와 귀국
당시 형 충혜왕에게는 아들 충목왕과 충정왕 그리고 천민 출신 은천옹주 소생 석기 왕자가 있었다. 석기는 충혜왕 사후 은천옹주가 폐출되면서 처형되었고, 충목왕은 서자 1명이 있었고, 충정왕은 후사가 없어 그는 야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충정왕의 어머니 희비 윤씨가 국정을 농단하자, 이 사실을 고려의 관료들이 원나라에 알려왔다. 1351년 원나라 황제는 칙서를 내려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부원대군은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귀국(1351년 12월)하여 국왕이 되었다(1352년). 공민왕은 즉위 초 전왕 충정왕을 유배하였다가 사사하였다.
무신 독재 혁파
즉위한 지 두 달 뒤인 이듬해 2월부터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2월 초하루에는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1352년 8월 공민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날의 임금들이 일심전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친히 국정을 담당함으로써 견문을 넓혔고 하부의 실정 또한 살필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임금이 친히 나라를 맡기에 걸맞은 시기이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판결송사에 관하여 5일에 한 번씩 반드시 계를 올리도록 하라.
공민왕의 이 명령은 곧 왕의 친정체제 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무신정권 이후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원나라의 복속체제 아래에서 겨우 서무를 결재하는 권리만 되찾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각 부서의 중요 안건을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작업은, 무신정권 이후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정치토론장인 서연을 재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공민왕은 8월의 서연에서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과 전답 및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기탄 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권력에 기생하던 성사달 등 부패한 고급관리들이 대거 하옥되었다. 또한 상장군 진보문의 아내 송씨의 간통사건을 적발하는 등, 부정을 일으킨 자들을 색출하여 하옥함으로써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풍기를 단속하였다.
반원 개혁
그러나 그해 9월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천기, 최하상, 장승량 등과 힘을 합쳐 대신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한달 뒤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였다. 이로써 조일신은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진하였으며, 판군부 감찰을 겸하며 공신 칭호까지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 측근인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였다. 이어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적 정권 수립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 원나라는 피지배층 한족의 반란인 홍건적의 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354년 음력 7월부터 1356년까지 원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최영, 이방실, 안우, 김용, 정세운, 유탁(柳濯) 등은 병력 2천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었다. 파병군은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라 불렸다. 파병 후 귀국한 장군들이 원나라의 몰락을 상세히 보고하여,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어주었다.
1356년(공민왕 5) 음력 4월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의 기황후(奇皇后)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등과 권겸, 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 이를 병신정변(丙申政變)이라 한다. 또한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당시의 칭제(稱制)로 환원하였으며,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도 폐지하였다.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柳仁雨)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공격을 명령했다.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던 이성계와 그의 부친 이자춘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 부자(父子)와,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 등이 고려 정계에 등장했다.
같은 해 공민왕은 인당, 최영을 파견하여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8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며, 파사부 등 3참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 최초의 요동 정벌로 평가된다
왜구, 홍건적의 침입
1358년(공민왕 7)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吾乂浦)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쳤다.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부터 1360년(공민왕 9) 음력 2월까지,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 이방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물러갔다.
1361년(공민왕 10) 음력 11월부터 1362년 음력 1월까지 반성, 관선생, 사류, 파두반이 이끄는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여,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곧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압록강 너머로 패주하였다.
홍건적은 몽골에 반대하는 한족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홍건적 침입의 영향으로 고려의 반원 개혁은 부분 차질을 빚었으며,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때 관제를 개혁 이전으로 되돌리기도 하였다.
1362년 김용의 음모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가 주살되고 만다. 같은 해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는 쌍성총관부의 잔당인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에 침공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암살 기도와 여진족 정벌
이후 원나라에서는 고분고분하지 않는 그를 폐출하고 덕흥군 등을 추대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1363년초 그는 왜구 토벌을 계획하였으나 일시 중단하였다.
1363년 음력 3월, 김용이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과 내응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자 덕흥군은 1364년 음력 1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섬멸되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장군이 되었던 최유는 고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364년 음력 1월,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金三善), 김삼개(金三介)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또한 같은 달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朴伯也大)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다. 같은 해 음력 5월에는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개혁의 실패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 왕비의 사후 그는 술과 색으로 시름을 달랬고, 미소년들을 왕궁으로 출입시키기도 했다.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辛旽)을 등용하였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된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록하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使)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다.
신돈의 등용과 제거
수상직과 감찰서와 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1366년)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또한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결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들은 곧 신돈의 정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다.
1366년 음력 10월 김유(金庾)가 1백 척의 규모의 토벌군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패전했다. 당시 제주도는 삼별초의 항쟁에 진압된 뒤 몽골의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으며, 다수의 몽골인들이 주둔하여 친원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후 약 10여 년 넘게 제주도는 고려 조정에 반발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명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1월과 11월, 이성계와 지용수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하였고, 요동의 고려인을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371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서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그해 음력 9월 동녕부를 다시 공격하였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제거 이후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하게 된다.
죽음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날로 변태적인 성격으로 변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1372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이 곳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1374년 음력 7월부터 8월,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최영이 314척의 함대와 병력 25,600여 명을 이끌고 난을 진압하고, 제주도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같은 해 9월에 공민왕이 홍윤(洪倫), 최만생(崔萬生) 등 자제위(子弟衛) 소속의 미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하여, 그들과 동성애를 즐겼다는 주장이 있다.
홍윤은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益妃)와 간통하였는데, 이를 최만생이 은밀히 공민왕에게 보고하였다.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겠다"고 말했다. 최만생은 자신까지 죽게될까 두려워 홍윤에게 사실을 고해바쳤다.
결국 공민왕은 홍윤, 권진, 홍관, 한안, 최선, 최만생에 의해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에 시해당했다. 향년 44세였다.
암살 이후
홍윤과 최만생 등은 공민왕을 칼로 수차례 난자하여 시해했다. 그 후, 칼질을 한 자들이 “밖에서 적이 들어왔다.” 라고 부르짖었는데, 가까이서 호위하던 위사들은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고,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 또한 변고를 들었음에도 궁으로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오직 내시 이강달만이 진실을 알았는데, 그 또한 이를 비밀에 부쳤다.
다음날,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이인임, 경복흥, 안사기 등을 소집해 사태 수습을 논의했다. 이인임은 처음에는 승려인 신조를 의심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던 도중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그를 집중적으로 추궁하였으며, 이윽고 사태의 진상이 드러났다. 홍륜 등 일파는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삼족을 멸하는 극형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권문세족의 친원 보수 정치가 전개되었다. 우왕은 공식적으로는 궁녀 한씨의 소생이었으나 실은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신돈이 실제로 아버지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 왕조에서는 이를 사실로 내세워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데도 고려의 왕권을 찬탈하여 고려 왕조의 맥이 끊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능묘
공민왕의 능은 현릉(玄陵)이며, 노국대장공주(인덕왕후)의 능인 정릉(正陵)은 그 옆에 나란히 있다.
미술과 서예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작품성은 뛰어났고 실물을 거의 완벽하게 묘사하여 당대에도 화제가 되었는데, 인물 묘사도는 섬세하였다는 평이 있다. 작품에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국립현대미술관), 《이양도(二羊圖)》, 《노국대장공주진(眞)》, 《염제신상(象[1])》, 《손홍량(孫洪亮)상(象)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달마절로도강도》,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다.
서예작으로는 경북 봉화군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과 청량사 유리보전의 현판, 안동 영호루 현판 등이 있다. 이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중일 때 직접 써주었다고 한다.
가계
- 부왕 : 충숙왕
- 모후 : 공원왕후 홍씨(恭元王后 洪氏, 1298년~1380년) - 남양 홍규의 딸.
- 형 : 충혜왕
- 비 : 인덕왕후(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1365년) - 원 위왕의 딸.
- 후궁 : 혜비 이씨(惠妃 李氏,?~1408년) - 경주 이제현의 딸. 공민왕 사후 여승이 되었다.
- 후궁 : 익비 한씨(益妃 韓氏,생몰년 미상) - 덕풍군 의(德豊君 義)의 딸.
- 후궁 : 신비 염씨(愼妃 廉氏,생몰년 미상) - 서흥 염제신의 딸. 혜비와 같이 공민왕 사후 여승이 되었다.
- 후궁 : 정비 안씨(定妃 安氏,?~1428년) - 죽성 안극인의 딸. 우왕의 비인 현비(賢妃)의 고모이다. 공민왕의 사후 왕실의 어른이 되었다.
- 후궁 : 궁인 한씨(宮人 韓氏,생몰년 미상) - 공민왕보다 앞서 사망.
- 후궁 : 시비 반야(般若,생몰년 미상) - 신돈의 시비.
- 차남 : 우왕(禑王, 본명은 무니노, 1365년~1389년, 재위: 1374년~1388년) - 고려 제 32대 왕
고려 최후의 개혁군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재위 후반의 엽색 행각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1357년(공민왕 6) 문무백관에게 최초로 갓을 쓰도록 명하였다.[2]
신돈의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껴 신돈 일파를 제거하면서 아들 무니노의 생모가 신돈의 시비 반야(般若)라는 점 때문에 혈통문제가 발생할 것을 예상, 1374년 9월에 아들 아들 무니노의 존재를 알리고, 아들 무니노의 생모는 궁인 한씨라고 공표하고, 한씨의 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한다.[3]
그러나 뒤에 시비 반야는 자신이 우왕의 생모라고 주장했다가 이인임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1330년(충숙왕 17)∼1374년(공민왕 23). 고려 제31대 왕.
개설
재위 1351년∼1374년. 이름은 전(顓). 초명은 기(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아버지인 충숙왕(忠肅王)과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비(妃)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 밖에 혜비 이씨(惠妃李氏)·익비 한씨(益妃韓氏)·정비 안씨(定妃安氏)·신비 염씨(愼妃廉氏)가 있다.
생애와 활동사항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고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했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는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봉해졌다.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이하였다. 1351년 원나라가 외척의 전횡과 국정문란의 책임을 물어 충정왕(忠定王)을 폐위시키자, 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14세기 후반, 원명교체(元明交替)라는 대륙정세를 이용해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배원정책(排元政策)을 펴 몽고의 잔재를 일소하고 실지(失地)의 회복을 위해 북진정책을 실시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약화시킨 친원권문세족(親元權門勢族)을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재정립하기 위해 일곱 차례에 걸친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1352년에는 변발(辮髮)·호복(胡服)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다. 1356년 몽고의 연호(年號)·관제(官制)를 폐지해 문종(文宗)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 일파(奇轍一派)를 숙청하였다. 또한 100년간이나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여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합동으로 요동(遼東)에 남아 있던 원나라의 잔여세력을 공략하였다. 2년 뒤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하고 국위를 떨쳤다. 내정에 있어서는 1352년 폐단이 많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 1363년 찬성사김용(金鏞)의 반란, 1364년 덕흥군(德興君) 옹립하려고 했던 부원파(附元派)최유(崔濡)의 반란 등으로 국력이 소모되기도 하였다.더구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국사를 모두 신돈(辛旽)에게 맡기고 불사(佛事)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 하였으므로 그를 수원으로 귀양 보낸 뒤 사사(賜死)하였다.
1372년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였고, 1373년 반야(般若)와의 사이에서 나은 모니노(牟尼奴: 훗날의 우왕)에게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 홍륜(洪倫)이 익비를 범해 임신시키자 그것을 은폐할 목적으로 홍륜과 밀고자인 환관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고 시도하였지만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작품활동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현전하는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가 있으며, 이밖에도 노국대장공주진(魯國大長公主眞)·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등의 작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상훈과 추모
능은 현릉(玄陵)으로 경기도 개성군 중서면에 있다.
호 이재(怡齋)·익당(益堂). 이름 전(顓). 초명 기(祺). 몽골식 이름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충숙왕의 둘째아들이다.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공민왕 1) 변발(辮髮) ·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1356년 몽골 연호 ·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은 첨의부로 통합되었고,이부와예부도 전리사로 통합되었고 병부는 군부사, 호부는 판도사, 형부는 전법사, 공부는 폐지되었죠. 그리고 중추원은 밀직사, 어사대는 감찰사, 도병마사는 도병의사사, 한림원은 문한서 이뿐아니라 왕실용어도 격하되죠. 대표적인 게 폐하와 태자가 전하와 세자로 바뀌었고 왕 칭호에 조나 종을 붙이지 말고 왕을 붙이도록 하였죠.이는 한마디로 고려는 원의 신하이며 관제도 많이 필요하지 않은 별볼일 없는 국가란 거죠.그리고 원은 정동행성이란 기구를 만들어 일본정벌에 필요한 물자를 고려에서 대게했죠.
이러던 것이 공민왕 때 바뀌게 되죠.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겠단 거였죠.먼저 변발과 호복 등 몽고풍을 폐지하고 정동행성을 폐지했으며 저민변전도감을 세워 친원파들의 부당하게 모은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죠.그리고 없어지거나 페지된 기구들을 다시 세움니다.
그리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영토도 넒혔죠.
물론 이러한 개혁을 공민왕만 시도한건 아닙니다. 충렬왕이나 충선왕도 이런한 개혁정치를 시도했죠.하지만 당시 고려왕들은 원나라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여야 왕이되었는데 이 공주들이 그야말로 스파이죠. 조심스럽게 개혁정치를 한다거나 머라도 좀할려고 하면 원나라에 일러바쳐 원나라로 귀향을 보내버리죠.
공민왕이 개혁정치에 성공한 건 당시 왕비였던 노국공주의 도움도 컸죠. 몽고인이었지만 남편인 공민왕을 도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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