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4. 22:25ㆍ들꽃다회
구비문화탐구(5)
고려시대, 강릉은 流配地였나?
- 강릉의 지명유래로 본 고려우왕(禑王) -
비운의 국왕. 고려 제32대왕 우왕(禑王).
그는 강릉에 유배와서 죽는다. 고려왕조의 패망이 멀지 않은 시점의 일이다. 고려시대 강릉은 유배지였나?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 고려 태조(Dynasty=왕건)는 강릉의 김순식(후일 왕순식)의 도움이 없었다면 고려건국에는 상당한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왕조가 성립된 뒤 칭송되고 왕비가 출현하고 높은 벼슬을 하던 땅이 그 왕조가 멸망할 시기에는 정권을 찬탈한 무리에 의하여 유배지로 변하게 된다. 죄를 진 범부나 탐관오리가 아닌 그것도 일국의 국왕으로 유배되어 참살당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속에서....
역사기록은 이성계에 의하여 최영이 실각하자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된 후에 驪興郡(지금의 여주)으로 이치(移置)되었다가 공양왕 1년(1389년)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로 강릉으로 옮겨져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후 복권도 없이 왕조가 패망하고 뒤를 이은 왕조는 역성혁명으로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기에 패자는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간혹,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야사나 지명설화에서 잔형(殘形)을 유추한다.
나라가 생기면 백성이 있고 나라가 망해도 백성은 있다. 그 백성들은 군주와 관계없이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기원한다. 군주가 바뀌어도 또 다른 군주를 중심으로 나라를 부흥시킨다. 주군이 누구인가는 상관없이. 경포의 파도를 보라. 뒷파도가 앞물결을 집어 삼킨다는 도도한 진리를 어찌 거스리오.
우선, 우왕의 아버지 공민왕에 대하여 알아본다. 태자시절 강릉대군에 봉해지며 11세의 어린나이에 원나라에 가서 숙위하면서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21세때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오랜기간 원의 볼모생활에서 절치부심하던중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자 과감한 개혁정책을 편다.
북진을 강행하며 100여년 지속된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폐지하고 친원파인 원나라 제2황후인 기황후 형제(기철일파)일파를 숙청하며,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토지를 돌려주고 노비를 해방시키는등 왕권의 정립과 치국의 내실, 영토회복을 이룬 영명한 군주였으나 황후인 노국대장공주가 산고(産苦)로 죽자 실의에 빠져 국정을 신돈(辛旽=법명;편조)에게 일임하고 불사에 전념한다.
노국대장공주의 사망으로 익비한씨를 왕후로 맞아들이나 죽은 노국공주에 대한 사랑이 가슴속의 애환으로 남아 익비와는 침실을 함께 쓰지 않고 방관하며, 명문가 미소년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침소에서도 이들과 어울리며 방탕하게 생활하게 된다.
이때, 자제위 소속 홍륜(洪倫)이 익비를 범하여(야사에서는 和姦으로 봄)잉태시킨 사실을 환관 최만생(崔萬生)이 알려오자 홍륜과 최만생을 죽여 소문을 은폐코자 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에 의해 살해된다.
일국의 태자가 타국에서 볼모생활을 하면서 정신적, 육체적인 어려움이 클 때 함께했고, 친원세력이 득실대던 궁궐내에서 오직 노국대장공주의 도움으로 정치적 결단을 했던, 부부이면서 정치적 동지인 황후의 죽음이 후일 엄청난 사건으로 전개된 것이라고 볼 때 공민왕은 순수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사료된다.
노국대장공주에게서 후사가 없었으며 정치적 동지며 자문역이였던 신돈의 사가에서 반야(般若)라는 여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게 되는데 그의 이름이 ‘모니노(牟尼奴)’였다.
1371년 비로서 궁에 들어와 1373년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대군으로 봉하니 그가 후일 고려 제 32대 우왕이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은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에 의하여 왕위를 찬탈당하니 후일 이성계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며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이라는 명분으로 우왕과 아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세우고 <고려사>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의 반역전(叛逆傳)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폐위된 우왕은 1389년 11월에 강릉으로 유배되어 같은해 12월에 서균형(徐均衡)에 피살되기까지 강릉에서의 생활은 2개월이다.
그러나 不事二君의 충정어린 강릉민심은 수많은 전설과 지명유래로 우왕을 기리고 있으므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구전을 소개한다.
옛날, 강릉에서 서북쪽으로 통하는 길은 옥천동에서 회산, 제비, 구정,새재(왕산), 왕산, 목계, 송현, 고단, 임계로 이어지며 각 지역마다 원(院)이 설치되어 있다. 이지역 일대의 지명유래를 분석하면 우왕은 유배지는 왕산면 왕산리 큰골로 유추된다.
왕위를 찬탈당한 슬픔과 아버지 공민왕의 비명횡사의 슬픔, 아들 창과 황후와의 별리에 대한 아픔을 억누르며 혹여 충신들이나 고려사직을 생각하는 누군가가 찾아오지 않으려나 하여 옛길을 오르내렸으리라.
현재의 지명 ‘왕산’은 ‘王山’으로 “왕이 살고있는 고을”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王’이 ‘旺’으로 변경되어 현재 지명변경을 추진중이다. 우선 강릉과 가장 가까운 구정면에 소재한 우왕관련 지명으로 ‘왕고개(王峴)’는 “우왕이 유배지에서 복권의 소식을 기다리며 이고개를 울며 넘나들었다”전설과 “굴산사 승려들의 도움을 받고자 이곳에 머물며 넘나들던 고개”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지명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다.
‘장안재’는 “우왕이 이곳에 행궁을 짓고 머물렀으며 지금도 기와와 토기류가 출토된다”고 한다. ‘장안리’는 장안재 아랫마을로 “우왕이 기거함으로 서울 장안과 같다”고 붙혀진 지명이다.
왕산면의 우왕과 관련된 전설로 왕산리 ‘큰골’은 “골이 깊고 큰 어른(왕)이 살았다”는 유래가 전해지며 왕산리의 주산인 ‘제왕산(帝王山)’과 정상부위의 ‘산성(제왕산성)’은 “왕을 추모해 단(壇)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이곳을 근거지로 살면서 후일을 도모했으며 정상부위의 산성을 쌓았다”는 전설과 제왕산성의 잔해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유배기간이 단 2개월인데도 많은 지명들이 우왕을 기려 남아있다.
더욱 우왕과의 연관관계를 정확히 하는 것은 1389년 우왕이 참살당하고 3년뒤 1392년 끝까지 고려를 지킬려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피살당한다.
1934년 후손들은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에 있는 포은선생의 영정을 가져와 우왕이 기거했던 왕산면 왕산리 큰골에 사당을 짖고 영정을 모셨고 춘추로 제례를 봉행했다.
1970년 왕산리에서 저동의 전충사와 제비리 화동서원내 충정사 두곳으로 영정이 이안(移安)된다. 최초 사당 건립 당시 왕산리 큰골은 호환의 우려가 있을 정도의 깊은 산골이였으나 고려의 충신은 불사이군의 충정이 있었기에 우왕의 마지막까지 살았고 죽임을 당했던 곳에 선생의 사당을 짖는 것은 고려를 잊지못함의 발로인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이 세상을 등지고 살았고, 정성아리랑의 발상지인 거칠현동 역시 가까운 거리에 있기도 한 연유이다.(왕산, 대기, 여랑, 거칠현동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임영지의 기록을 살펴보자.
고려 공양왕 원년(1389)에 辛禑를 강릉에 유배하고 왕산촌에 구금하니 산의 이름이 이로 인해 불리게 되었다. 신우는 고려 부신(賦臣) 신돈(辛旽)의 아들이다. 신돈은 처음에는 중으로서 현릉(玄陵)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 세도가 쟁쟁하게 되었는데, 현릉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자 그가 데리고 있던 계집종 반야(般若)를 바쳐 아들 모니노(牟尼奴)를 낳으니 이가 곧 신우였으며 대립(代立)하는데 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신우는 최영이 장차 요동정벌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성계가 도총(都摠)이 되어 위화도회군을 하여 신우를 내치고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우니 이가 곧 공양왕(恭讓王)이다. 신우는 이로 인하여 오래지 않아 법으로 다스려 졌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신우는 다른 사람의 아들이지 반야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신우는 그 여종과 이곳[왕산]에서 생계를 잃고 떠돌아 다녔다고 하며, 늘 울면서 말하기를 왕씨는 겨드랑이 밑에 한조각의 용비늘이 있다고 하였다. 신우도 역시 그것이 있었다고 하며 왕씨가 분명하나 지금 전해오는 그 말이 확실치 않아 옳고 그름을 분간하여 믿기는 어렵다하였다. 《增修臨瀛誌》
우왕이 1375년 왕위에 즉위하였다가 1388년 무진(戊辰) 5월에 강화로 유배되었다. 그뒤 9월에 여흥군으로 천배(遷配)되었다가 뒤에 강릉에 유배와서 명주군 왕산면 왕산촌(현 왕산리)에 갇혀 있었기에 왕이 살았다하여 왕산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臨瀛誌》
참고로, 조선시대 정조의 총애로 세도정치를 구사하며 도승지, 대사헌, 이조참의, 대제학을 지낸 홍국영(풍산 홍씨)도 강릉으로 추방되어 실의에 잠겨 살았으며 정조의 부름을 다시 받지 못하자 울분으로 34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 곳이 노암동 노가니골이며 거주지와 바닷가를 오가며 생활했다고 회자되고 있음을 부언한다. 따라서, 강릉은 최대 권력자가 유배 온 곳이기도 하다.
다음 블로그 <순상재> 홍순석 님의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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