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1. 02:08ㆍ차 이야기
2) 굴곡의 역사와 함께한 한국의 차문화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전반인 신라 선덕여와(632~646) 당시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당시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한 승려가 차 종자를 가져와 경남 하동군의 쌍계사(雙鷄寺) 인근에 심었다는 것이 차와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8세기 중엽인 경덕왕 당시에, 다구(茶具)를 가지고 다니면서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남산의 미륵세존에게 차를 올려온 승려 충담(忠談)이 경덕왕으로부터 왕사로 책봉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수로왕의 비인 허왕후가 천축(天竺)에서 차를 들여왔다는 내용이 있다. 즉 허왕후가 인도의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현재 창원 의림사의 뒤편 배월산에 심고 죽로차(竹露茶)라 칭했다는 설이다. 실제 인도 아샘지방에서 자생하는 잎이 큰 차나무 종자가 김해를 비롯한 옛 가야의 주요 영토에서 발견되고 있어, 42년에 세운 가락국(가야)에 대한 해명과 함께 한국 차의 기원에 대한 의문도 함께 풀어지리라 여겨진다.
본격적으로 차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간 김대렴(金大廉)이 828년(흥덕왕 3) 차 종자를 들여온 이후의 일이다. 당시는 중국에 차가 융성한 시기이자 장보고(張保皐)가 활발한 해상무역을 하던 때로서, 차 역시 본격적인 교역대상으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들여온 종자는 왕명에 따라 지리산에 심어졌고, 따라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호남, 영남 지방은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었다. 특히 신라의 차는 화랑도(花郞道)와 결합되어 성행했는데, 화랑들은 명승산천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양하는 가운데 차를 통해 선도(仙道)를 닦았다. 이러한 기록은 후대의 고려 문인들이 기록한 여러 저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곡(李穀)의 『동류기(東流記)』라는 기행문에는 신라 화랑들이 사용했던 다구(茶具)들이 동해 바닷가의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적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강릉대도호부 신증(江陵大都護府 新增)」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문구를 살펴볼 수 있다.
「한송정」
부 동쪽 15리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 돌아궁이, 돌절구가 있는데, 곧 술랑선인(述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다.
「한송정(寒松亭)」
在府東十五里東 臨大海蒼松鬱 然亭畔有茶泉石竈石臼 仙徒所遊處
재부동십오리동 림대해창송울 연정반유다천석조석구 선도소유처
또한 중국에 가서 차를 최초로 배워온 원광법사(圓光法師:555~638)를 비롯하여 원효(元曉), 의상(義湘), 원술(元述), 설총(薛聰), 무염(無染), 진감(眞鑑) 등 통일신라시대의 고승들과 차생활에 얽힌 고사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대의 승려와 화랑들은 음다(飮茶)를 심신을 수련하는 중요한 방편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은 물론 왕실, 귀족 등의 지배층에 차가 널리 유행하였다. 따라서 차는 주과(酒菓)와 더불어 궁중의 핵심적 음식이 되었고, 연등회, 팔관회 등의 국가제전이나 왕자, 왕비등의 책봉에는 진다의식(進茶儀式)이 필수적 과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차는 중요한 예물로서 대외교류 시에 사신들에게 내리는 하례품의 하나였고, 나라에서 신하와 노인들에게 차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궁중에서는 다방(茶房)이라는 관부를 두어 차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고, 민간에는 차를 재배, 제조하여 사찰에 공급하는 다촌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개성을 방문한 뒤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궁중의 진다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잔치를 할 때는 우선 정원에 차를 달여 놓고, 연꽃모양을 한 다관(茶罐:주전자)에 차를 담아서 들고 손님 앞으로 천천히 가서 권한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와서는 차가 불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에 따라 차문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즉, 명나라의 장수 양호(楊鎬)가 선조(宣祖:1552~1608)에게 조선에서는 왜 차를 마시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나라 습속에는 본래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답하였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서(禮書)『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 이재(李縡:1678~1746)가 “차는 본래 중국에서 사용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례(家禮)』의 절차에 나와 있는 설다, 점다와 같은 글귀는 모두 빼버렸다” 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문화와 깊이 연계된 차를 배척시킴으로써 조선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러한 정책기조와 달리, 고려시대에 왕실에서 사용된 ‘진다의식’은 조선시대부터 ‘다례(茶禮)’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여전히 행해졌으며, 왕실의 대소사에 다례를 행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1405년 (태종 5)에는 다방도목를 제정하는 등 이조의 내시부에서 차의 공급과 외국사신의 접대를 맡았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선비들의 각종 예서 등에는 헌다예절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예학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에 다도를 멀리할 수 없었던 이중적 수용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중기의 차문화는 이처럼 이중적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가운데 다소 침체기에 놓여있었으며, 승려들과 일부 선비들을 중심으로 한 지식층에서는 여전히 수양 및 사유의 매개물로서 깊은 사랑을 받아왔다.
곧 이 시기에 차문화와 관련한 주요인물로는 휴정(休靜:서산), 유정(維政: 사명), 부휴(浮休) 등의 승려를 비롯하여, 김시습(金時習), 서경덕(徐敬德), 신중호, 이율곡, 이목등의 문인을 들 수 있다.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다시 차가 성행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대흥사의 혜장, 초의, 범해등의 다승(茶僧)과, 정약용, 김정희, 이상적등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다풍과 차관련 문학작품들이 활기를 띠면서 차문화의 일대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초의선사는 『동다송』을 짓고 차를 재배하는 등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정비함으로써 우리나라 다도를 일컬을 때 손꼽히는 인물이 되고 있다. ‘다도’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 역시 이 무렵의 일이다.
근대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은 물론, 식민지배의 일환으로 한국차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된 바 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커피, 화학음료 등의 유입으로 차에 대한 관심이 극히 미미했던 1950년대까지, 차는 일부계층의 기호품에 불과하였고 서민들과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이후 차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져 일상에서 누구나 차을 선택하여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 다음 카페 <선다향> 인연법(泥蓮華> 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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