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다도의 문화사] 1. 신라 이전의 차문화

2014. 3. 1. 02:31차 이야기

 

 

 

 

 

    

1. 신라 이전의 차문화

  

   우리나라에는 7세기 전반에 차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신라 이전에도 차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러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현재의 산다(山茶), 동백과에 속하는 차나무는 아니지만 고래로부터 백두산에 백산차(白山茶)라는 한국 특유의 전통자가 있었으며, 이 외에 볶은 오곡을 비롯하여 오갈피, 오미자, 구기자, 열매등을 달여서 마시기도 하였다.

  특히 백사차에 대한 내용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백산차를 공차(貢茶)했다’ 는 기록이나,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아언각비(雅言覺非)」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언각비」『길림외기(吉林外記)』등에 의하면 장백산(長白山:백두산)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백산차(白山茶)라 칭해졌으며, 석남과의 식물 잎으로 바위 깨끗한 곳에 자생하므로 석남차(石南茶)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석남차’라는 이름으로 일본, 중국등에도 전해졌으며, 한때 안춘향(安春香)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였다. 백산차나무는 키가 1장(丈:약 3cm)이나 되는데다 찻잎은 마치 버들잎과 같았는 데, 약간 쓰면서도 좋은 맛을 지니고 있어 제사에 많이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가락국의 수로왕(首露王)비인 허왕후(許王后)가 지금의 인도인 천축(天竺)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심었으며, 가락왕 17대 후손이 매년 세시(歲時)에 따라 신라에 차를 바쳤다는 기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가락국에 대한 고증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 한국차의 기원문제도 함께 풀어지게 될 것이다.

 

  또한 신라, 가야와는 달리 고구려, 백제의 차문화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는 모두 4세기에 불교를 받아 들였을 뿐만 아니라 대외교류 역시 활발하였기 때문에 차문화 역시 이른 시기에 수용하였을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흔적 역시 발견되고 있다.

 

 

  중국 오나라 때 모문석(毛文錫)이 지은 『다보(茶譜)』의 역주에는 “고구려의 옛무덤에서 출토된 모양이 작고 얇은 조각의 떡차를 표본으로 간직하고 있다. 지름이 4cm 남짓한 엽전 모양이고 무게는 닷푼 가량이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차는 엽전을 닮았다고 하여 전차(錢茶)라 부르는 것으로, 시루에 찐 찻잎을 절구로 찧고 주물러 동전처럼 만든 뒤 중간에 구멍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두었다가 구워 갈아 마시는 말차(抹茶:가루차)의 일종이다.


  백제 역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백제의 궁중에서 차가 쓰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고, 백제유민과 함께 일본에 귀화한 승려 행기가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이라는 일본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영토였던 호남지방은 차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기온으로서 해안지역 및 해안과 인접한 지역에는 예로부터 소엽종 차나무들이 자생하고 있었으며, 현재도 토종 차나무의 여러 종이 전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라 무열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동탁은잔(銅托銀盞)이 왕의 찻잔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옛무덤에서 출토된 전차와 백제의 여러 흔적들은 고대 삼국의 차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많은 연구가 따라야할 것이며, 다도의 문화사를 살펴봄에 있어서는 보다 실증적 기록이 전하는 신라시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하기로 한다. 신라에 불교가 수용된 것은 고구려, 백제에 비해 150년이나 뒤늦은 544년(진흥왕 5)이었으며, 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 중반인 선덕여왕 시절에 당나라 유학승려가 가져온 차 종자를 쌍계사(雙鷄寺)근처에 심었다는 것이었다.

 

 

 

                                                     - 다음 카페 <선다향> 인연법(泥蓮華)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