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인열전] 지장법사 구화산 김교각 스님 / 정상구 님의 글

2014. 3. 11. 21:14차 이야기

 

 

 

 

 

      

韓國茶人列傳

鄭相九

신라의 육신보살 지장법사(地臧法師)

                     김 교 각(金喬覺)

 

 


1. 당으로 들어간 신라의 왕자

 

지장법사(696~794)는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 중국불교 민중 신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중생제도의 큰 뜻을 품고, 속세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지 1500년후, 신라 왕자의 몸을 빌려 태어났다. 그리하여 만리타국인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찾아 떠났으니 신라 성덕왕 7년 (서기 719년)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7년이었다.

 선청이라는 흰개 한마리를 데리고 배를 탄 후 중국 동청양현(東靑陽縣)의 첨양고을 구화산(九華山)을 찾아 고행 정진하게 되었다.

 

 

 


2. 구화산에서의 수도생활

 

구화산은 당나라때 유명한 시인 이 백(李白)이 친구들과 함께 이 산을 구경하고, 그 지세가 웅장하고 아홉마리의 용이 하늘을 향해 날으는 듯한 형상임을 보고 구자산(九子山)이라는 명칭을 구화산으로 바꿔 불렀다. 그 후로 구자산은 구화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라의 왕자 김교각이 구화산에 첫발을 디딘 것은 그의 나이 24살이되던 719년이었다.

 흰구름에 싸인 신령스러운 구화산의 봉우리를 보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정진해야 되겠다는 결심이 선 지장스님은 화성사 동쪽에 있는 골짜기 절벽 위 바위 옆에 있는 동굴 하나를 발견하였다.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가서 수행할 만한 동굴이었다. 동굴 앞에 서서 산경을 바라보니, 신령스러운 구화산 99개 봉우리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이 굴을 동암이라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식량이 부족하면, 쌀에다 관음토(觀音土)를 섞어서 흰죽을 끓여 먹거나, 도토리죽을 끓여 먹으면서, 수도에 정진했다. 그후 제갈절(諸葛節)이라는 분이 노인들과 더불어 산 구경을 하러 왔던 중에 산세가 험악하여 인적을 발견하지 못하다가 오직 지장 한사람을 보았다. 그는 돌집에서 초연하게  눈을 감고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지장을 보았다. 이그러진 솥가운데는 흰 흙에 쌀을 섞어 삶아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갈절 일행들은 크게 놀라고 감탄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힘을 모아 절을 하나 지어 주기로 하였다. 1년이 채 못되어 법당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승유(勝瑜)라는 제자가 생기게 되어, 이  제자와 제갈절을 비롯한 신도들이 산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지장 법사는 75년간 구화산에 머물면서 정진하였다.

 

 


 3. 지장법사의 생애와 사상

 

중국 불교의 4대 명산중의 하나인 구화산을 지장보살 성지로 만든 김지장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길이 없다. 오히려, 부끄럽게도  중국측의 문헌인 「송고송전(宋高僧傳)」, 「구화산지(九華山誌)」「중국불교명찰 안휘구화산(中國佛敎名刹 安徽九華山)」, 「전당문(全唐文)」,「중국불교 4대명산 구화산편」등에서 엿볼 수 있다. 당 지주 구화산 화성사 지장전(唐 池州 九華山 化城寺 地藏傳)에 의하면 지장의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임금의 자손이다.  그의 마음은 자비스러우나 얼굴은 무섭게 생겼고,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이 천년을 간다.  키는 7척 장신에 이마에는 기이한 뼈가 솟아있고, 거기에다 힘이 세서 열사람이 당해 내지를 못하였다.


" 석지장(釋地藏), 성김씨(姓金氏) 신라국왕지지속야(新羅國王之支屬也). 자심이모악(慈心而貌惡), 영오천연(潁悟天然). 칠척성구(七尺成軀), 정용기(頂聳寄), 골특고(骨特高), 재력가적십부(才力可敵十夫) "

지장법사는 그 수행에 있어서도 남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행을 했다.  신승전(神僧傳)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날 지장스님이 수행을 하고 있는 곳에 독한 벌레가 와서 몇 차례 스님을 물었지만, 추호의 동요도 없이 단정히 그대로 앉아 명상에 잠겨있었다.  그러자, 산신이 아름다운 여자의 몸으로 바꾸어 나타나 큰절을 하면서 스님에게 “어린 것들이 철이 없어 못된 짓을 했으니, 그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바라며 그 죄값으로 샘물을 나오게하여 그들의 허물을 보상케 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자, 지장이 앉아 있는 곳에서 보이는 언덕에 맑은 샘물이 흘러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동승운집(東僧雲集)에 보면 구화산중에 흐르는 차고 단 샘물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산신의 힘으로 돌틈에서 솟은 물이라고 적혀 있다.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스님의 공덕은 중국 뿐만 아니라 신라까지 전해져 왔다.  송고승전에 보면 당개원 7년(719년) 지장법사의 법력이 높다는 전언에 따라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바다를 건너 신라에서까지 구화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장법사는 나이 99세때 열반에 드셨다.  그해 음력 7월 30일 대중들을 모아놓고 간략한 가부좌를 한 채 열반에 드시었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열반하실 때, 홀연히 산이 크게 울고, 뭇새들이 모여 크게 울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장법사는 열반 하실 때, 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내 육신을 다비하지 말고, 3년이 지난 후 열어 보아라.  만일 3년이 지나도록 육신이 썩지 않으면, 그대로 개금하여라. ”라고 말하였다.  제자들은 유해를 독안에 넣어 모셔두었다.  3년이 지난 후에 항아리를 열었더니 스님은 결가부좌를 한 채 3년 전의 그대로 였으며, 얼굴빛도 살아있는 듯하였고, 피부도 유연한 그대로였으며, 항아리 속에서 향그러운 냄새가 났다.  794년 남대에 등신불을 안장하고 그 위에 육신천을 세웠으니 그는 육신보살지장이 되었다. 

중생을 제도하고, 보리를 이루려니 지옥이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으리라.


중생도진(衆生度盡) 역증보리(力證菩堤)

지옥미공(地獄未空) 서불성불(誓不成佛)


이것은 지장 보살의 위대한 서원이다.  지장보살이란 극락세계의 주인이신 아미타불을 보좌하는  보살이다.  실로 지장보살은 구화산에서 75년간 화성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중생교화에 일생을 바쳤다.

지장보살을 육신보살이라 하는데, 이면 뜻을 지니고 있을까?  육신보살은 등신불<즉신불> 금강불의 지신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 개인이 어떠한 발원을 세우고 그 발원의 성취를 위해 자신과 똑같은 불상을 만드는 것 부터 유래한 것이다.  육신보살이란 생신보살(生身菩薩)을 가리키는 말로써 부모가 낳아준 몸 그대로 보살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보통사람들은 육신의 생명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육신보살들은 길게는 천년간 육신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  현대의 과학문명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다.

이는 철저한 계율수행과 힘찬 정신력을 통하여 육신성도를 이루신 분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생애와 성덕을 지닌 스님의 사상을 표현하면 중생을 제도하고, 보리를 이루려는 일념으로 지옥이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염원사상이라 하겠다.  이와같은 위대한 사상으로 중국 민중신앙의 핵심적인 인물로 추앙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나라때의 대시인 이백은 지장스님의 성덕을 기리는 시를 지었다. 

 

석가모니 열반하니 일월이 부서져내리는데

오직 부처님 지혜로 큰 광명과 성령 내려주셨네

보살님의 대자대비한 힘 끝없는 고해에서 구해 주려니

홀로 넓고 끝없는 세상 지내며 고해를 소통시켜

중생을 구해주는 모든것은 지장보살의 덕성이네


대웅엄조일월붕락(大雄俺照日月崩落)

유불지혜대이광생사설(唯佛知慧大而光生死雪)

뇌가보자력능구무변고(賴假菩慈力能救無邊苦)

독출광겁득개횡류(獨出曠劫得開橫流)

위지장보살위당인의(爲地藏菩薩爲當仁矣)


다음은 중국의 유명한 스님 홍일법사(弘一法師)가 지장보살을 찬탄한 시 한 구절을 더 소개하여

지장보살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추앙하고자 한다.


하늘 복판 둥근달이 뭇 강물 비치니

보살의 중생제도 사방세계 두루하네

이 땅에 나투신 몸 때는 바로 왕성한 당대인데

신라에서 탄생한 왕가의 후예라네

어려서는 뛰어나게 영특하고, 힘 또한 장사라

큰 맹세 굳게 지녀 지혜 구슬 품었다네


천심일월(天心一月) 보인천강(普印千江)

보살도생(普薩度生) 편현십방(?現十方)

차토수적(此土垂迹) 분유당대(?惟唐代)

시생신라(示生新羅) 왕가화예(王家華??)

유이영오(幼而潁悟) 역적십부(力敵十夫)

피홍서개(披弘誓鎧) 재지혜주(裁智慧珠)


위의 시는 홍일법사가 지장보살을 하늘 복판에 둥실 뜬 밝은 달이 온누리를 비치는 것 처럼 지장보살의 중생제도의 성스러운 빛이 온누리를 비치는 홍덕을 읊조리는 동시에 지장법사가 신라 왕손의 후예라는 것, 뛰어난 총명함과 힘이 열 사람을 능가한다는 것과 더불어 그의 서원 또한 위대하고 크며, 그 서원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도 생심과 지혜로움이 남다르게 뛰어났다는 것을 읊고 있다.  다음으로, 구화산지에 상책된 지장보살의 제자들이 지장보살을 찬송한 글귀를 소개코자 한다.

" 지장대사의 과업을 우러러 보면 오직 관음보살(觀音普薩) 밖에 그와 비길 만한 사람이 없다.  대사의 원력(願力)은 비록 문수(文殊)보살, 보현(普賢)보살의 원력에 비길 수는 없지만 석가가 입멸하고 미륵이 내세하기 전에 우리 사바세계는 오직 대사의 원력으로써 구제되었으니 그는 중생의 자애로운 어머니이시다.  그러므로 수시로 참선하여 감응하면 아무런 보람없이 보냈다고 말할 수 없다.  대사의 대비, 신력은 시방의 제불들이 길이길이 찬동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도망쳐 나온 우둔한 나로서 어찌 한마디로 대사의 업적을 찬송할 수 있으랴. 금후 오직 대사의 심원을 자기의 심원으로 하여 괴로움 없이 살아나갈 수 있고 대신(大神)이 분신(分身)하여 진찰(塵刹)에까지 통하게 되면 지옥에 있는 많은 중생들이 모두 구제되어 부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도생 사업은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

 

 


4. 금지차(金地茶)와 지장보살의 차시의 세계

 

동양 문화의 근원은 불교와 유교 문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불교문화 속에서 차가 위치하는 부분을 무시할 수 없다.  불교정신사를 더듬어 보면, 차문화가 나오게된다.  이런 의미에서 차문화와 불교문화는 숙명적인 만남이라 하겠다.  더불어 지장보살과 차와도 끊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지장스님이 당나라로 건너 갔을 때, 신라에서 가지고 간 차가 있다.  그 차이름이 바로 <금지차(金地茶)>이다.  이 금지차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四大有山誌> 및 <청양현지(靑陽縣誌)>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4대 불교 명산이란 보현보살이 강림하였다는 아미산, 문수보살이 강림하였다는 오대산, 관음보살이 살았다는 보타산, 지장보살이 살았다는 구화산을 손꼽는다.  책에 보면, 구화산 편에 금지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데, 이 차는 신라 때 왕자인 김교각이 고종 영휘4년(서기 653년)에 가져온 차의 이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 온 김교각은 금사천(金沙泉)에서 물을 직접 길어와 금사차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금사차는 김교각이 직접 차밭을 일구고 제자들과 더불어 가꾸었으며 제자들에게 차 재배법및 차 다리는 법 등을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을 볼 때, 교각이 차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기에 신라에서 그 머나먼 길에도 불구하고 차를 가지고 갔을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지장법사의 차에 관한 시 한 수를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절이 쓸쓸하니, 너는 집 생각하는구나

절을 이별하고 구화산을 내려가려나

대난간에서 죽마타는 일이 생각나

금지에서 금사를 모으기 싫구나

생물길어 달보는 것도 그만두고

차 달이며 달 구경하는 일도 끝이 났다네

눈물을 거두고 잘 가려므나

노승은 산수의 경치를 벗하리라


空門寂寞汝思家 禮別雲房下九華

(공문적막여사가 예별운방하구화)

愛向竹欄騎竹馬 懶於金地聚金沙

(애향죽란기죽마라어금지취금사)

漆甁澗低休招月烹茗?中龍弄花

(칠병간저휴초월팽명구중룡롱화)

好玄不須頻不淚老僧相半有煙霞

(호현불수빈불루노승상반유연하)


위의 시는 그가 데리고 있던 나이어린 사미승이 집을 그리워하여 산을 내려가려는 데 이를 보내면서 지은 시인데 이 시의 이름은 "산을 내려가려는 동자를 보내며" 라는 것이다.

첫 구절의, " 절이 쓸쓸하니 너는 집 생각하는구나" 라는 구절에서 그가 절을 떠나려는 사미승의 쓸쓸한 심경을 꿰뚫어 보아 집생각을 못 잊는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동정한다는 너그러운 마음씨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인 " 절을 이별하고 구화산을 내려가려나" 하는 구절은 사미승이 절을 떠나려는 그 심정은 잘 이해하나 막상 사미승이 절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못내 아쉬워 가슴이 뭉클한 심정을 잘 읊고 있다.  다음 구절인 " 대난간에서 죽마타는 일이 생각나" 라는 구절 " 금지에서 금사를 모으기 싫구나" 하는 구절 및 " 샘물 길어 달보는 것도 그만두고?" 라는 구절과 " 차 달이며 달 구경하는 일도 끝이 났다네" 라는 구절은 떠나려는 사미승과 같이 한 일들을 생각하며 그 애절한 정겨움을 되새겨보는 구절이다.  불가에서 사람이 만나고 헤어짐은 모두 다 인간사이다.  이는 다 인간의 무상을 말함인지라 그 실상에 있어서는 " 만나는 것이 헤어짐이요, 또 떠나는 것이 만남이며 가는것이 오는것이요, 오는 것이 가는 것" 이므로 불가에서는 별로 슬퍼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인간 속세를 떠난 그도 텅빈 마음 한 가운데 슬픔이 고여있었다.  지난 일들을 올올이 생각하니, 쓸쓸함이 복 받쳐 정겨움과 더불어 눈앞에 다가와 부지중에 눈물이 흐를듯한 심경이 일어날 것임을 헤아린 스님은 사미승에게 시로서 말하기를 " 눈물을 거두고 잘 가려므나" 라고 읊조리고 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 노승은 산수 경치를 벗하리라" 즉, 너가 없는 절은 더욱 적막하겠지만, 아무 염려말고 잘 가라 나의 벗인 해와 달, 산과 바람과 구름, 물, 새와 길짐승들이 있지 않은가?  이를 모두 벗하여 한가롭고 운치있게 사려니 추호의 걱정 근심 말고, 잘 가라는 뜻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 네이버 블로그 < 炫爐의 블로그 >   마운틴 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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