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1910년대 문경인의 민족운동 /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2014. 5. 14. 17:02나의 이야기






       

제4장 1910년대 문경인의 민족운동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연구 / 문경시 발간자료 

2012/02/2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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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Ⅱ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제4장 1910년대 문경인의 민족운동 

 

  

제1절 일제의 식민정책과 문경

 

  1. 일제의 지방행정 장악과 문경의 변화

 

  1910년 한국 강점에 성공한 일제는 식민지 정책 수행에 용이하도록 행정기구를 개편하였다. 대한제국의 13도都 11부府 317군郡 체계와 일제 통감부의 이사청理事廳‧재무서財務署를 통합해 총독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식민지 체제로 행정기구를 개편하였다. 이와 더불어 1914년 촌락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마을단위’의 지방행정 조직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사회에서 동리洞里는 개별농가의 한계를 상호 보완하는 공동조직이자 이를 운영해 가는 자치기구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자치기구는 대체로 지역 명망가층의 주도 하에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동리의 자치운영은 물론 자치운영을 주도하는 지역 명망가층을 무력화시키고 지방을 장악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1914년의 ‘군면동리통폐합’, 1917년의 ‘면제’ 실시와 같은 잇따른 조치는 이러한 목표와 깊은 관계 아래 나왔다. 특히 ‘군면동리통폐합’ 조치는 기존의 자치적 지역운영 구조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일제는 1914년 3월 1일부터 군단위의 통폐합을 실시해 종래 317개 군이었던 것을 220개 군으로 통폐합하였다.

 

  그리고 1914년 4월 1일부터는 면과 리 단위를 통폐합하여 종래 4,322개 면을 2,522개 면으로 줄였다. 또한 ‘마을’(자연촌락) 단위의 리里는 평균 4~5개 마을을 1개리로 묶었다. 이에 따라 종래의 농촌공동체는 급속하게 해체될 뿐만 아니라 군청과 면사무소를 유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는 등 혼란이 닥쳤다.

 

  문경군 또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대한제국기 문경군은 읍내면邑內面(8개 리동)‧신북면身北面(16개 리동)‧동로면東魯面(18개 리동)‧화장면化庄面(14개 리동)‧산북면山北面(39개리동)‧산동면山東面(27개 리동)‧신남면身南面(10개 리동)‧가동면加東面(9개리동)‧가북면加北面(18개 리동)‧가현면加縣面(10개 리동)‧가서면加西面(22개 리동)‧가남면加南面(7개 리동)‧신동면身東面(10개 리동)‧호현면戶縣面(11개 리동)‧호서남면戶西南面(14개 리동)‧영순면永順面(22개 리동)‧산남면山南面(23개 리동)‧산서면山西面(15개 리동)‧초곡면草谷面(7개 리동)으로 총 19개면 300개 동리였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군면동리통폐합’ 조치에 의해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문경은 11개면 129개 동리로 바뀌었다. 면의 숫자는 19개면에서 문경면聞慶面(10개리)‧마성면麻城面(8개 동리)‧가은면加恩面(12개리)‧농암면籠巖面(13개리)‧호계면虎溪面(12개리)‧산양면山陽面(15개리)‧영순면永順面(11개리)‧산북면山北面(21개리)‧동로면東魯面(9개리)‧신북면身北面(8개리)‧호서남면戶西南面(10개리)의 11개면으로 줄어들었으며, 300개 리동이었던 마을은 129개 리동으로 줄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읍내면과 초곡면, 신북‧신남‧신동면의 일부는 문경면으로, 신남면과 신동면‧호서남면의 일부는 마성면으로, 가동면‧가현면‧가북면의 일부는 가은면에 편입되었다. 가서면과 가남면‧가현면의 일부는 농암면으로, 호현면과 산서면‧산북면의 일부는 호계면으로, 산동면과 산남면‧화장면‧용궁군 신읍면‧영순면‧산서면의 일부는 산양면에 속하게 되었다. 또 문경군 영순면과 용궁군 서면‧함창군 동면 일부는 영순면으로, 산북면과 화장면의 일부는 산북면으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동로면과 영주군 상리면의 일부는 동로면으로, 신북면의 일부는 신북면으로, 호서남면과 영순면‧함창군 북면의 일부는 호서남면에 소속되었다.

 

  예천군‧영주군‧상주군의 일부가 문경군에 통폐합되고 기존의 생활터전이 뒤섞이면서 전통의 공동체적‧자치제적 요소는 점차 소멸되고 식민지 지방행정 체제로 변화되어 갔다.

 

[표-1] 1912년 문경군의 행정명칭1)

* 19面 300洞里 / 군소재지: 邑內面 中上里  

면 명

동리수

동 리 명

邑內面

8

上里, 中上里, 中里, 下里, 校村, 堯城里, 池谷里, 馬院里

身北面

16

廣院里, 鳳鳴洞, 古堯里, 唐浦里, 花枝里, 花溪里, 巴八里, 靈山洞, 龍淵里, 葛坪里, 葛山里, 平川里, 中坪里, 觀音里, 沙店里, 腦巖里

東魯面

18

外生達里, 內生達里, 泗坪里, 仁坂里, 老隱里, 赤城里, 平地里, 場基里, 水坪里, 磵谷里, 石坪里, 松坪里, 石項里, 磨光里, 水眞溪里, 伐川里, 沙店里, 諸谷洞

化庄面

14

加佐目洞, 蘇野里, 揷峴里, 蒼邱里, 內化里, 伊川里, 月沙里, 加佐谷洞, 上渭里, 下渭里, 池內里, 墨松里, 鍾谷里, 水閒里

山北面

39

月峴里, 馬場里, 石達里, 鳳上里, 鳳下里, 新基洞, 道治洞, 大鳥洞, 金龍洞, 沙村, 九巖里, 蒼田里, 田頭里, 蘇野里, 梨上里, 梨下里, 于邑里, 五山里, 浦村, 磻溪里, 梨亭里, 藥山洞, 幕谷里, 大上里, 大下里, 書中里, 白石洞, 新坪里, 廣川里, 龍湖里, 伊谷里, 回上里, 回下里, 槐花洞, 虎巖洞, 松林里, 種谷里, 知保里, 知上里

山東面

27

新浦里, 大浦里, 蓮花洞, 蓮沼洞, 蓮坪里, 良保里, 松川里, 松本洞, 愚洞, 鹿門洞, 甘谷里, 錦川里, 松山洞, 熊倉里, 新驛里, 縣下里, 上杜里, 下杜里, 兄川里, 京外里, 富巖里, 蜂底里, 果上里, 果下里, 斗溪洞, 店村, 箕山洞

身南面

10

牛於里, 華山里, 大谷里, 茅谷里, 鼎洞, 石橋洞, 九郞里, 上乃里, 下乃里, 汗谷洞

加東面

9

旺陵里, 都呑里, 武陵洞, 鵲泉里, 鵞湖里, 觀山里, 大鳥洞, 葛田里, 猪音里

加北面

18

下槐里, 新坪里, 上槐里, 都台里, 院北里, 瓦也里, 柿硯里, 完章里, 下大里, 中大里,上大里, 蜂巖洞, 五峯店村, 五峯里, 新店村, 大谷店村, 柴木店村, 官坪里

加縣面

10

城底里, 城踰里, 新基洞, 廣灘里, 上前谷里, 下前谷里, 玉山洞, 加大里, 泯池里, 水曳里

加西面

22

加項里, 場基里, 馬巖里, 連川里, 宮基里, 古毛里, 鍾谷里, 籠上里, 大井洞, 內下里, 內中里, 內上里, 葛洞, 栗下里, 栗上里, 樓洞, 靑華洞, 光亭里, 西嶺里, 松上里, 松中里, 松下里

加南面

7

大峴里, 沙幕里, 所古之里, 仙溪洞, 南谷里, 立巖洞, 池洞

身東面

10

井谷里, 金谷里, 梧洞, 外於里, 內於里, 甕店里, 泉洞, 新院里, 釘峴里, 石峴里

戶縣面

11

臺峯里, 犬灘里, 舟坪里, 加攝里, 鰲岩里, 戶界洞, 牛老里, 新永里, 蓮驛洞, 九下洞, 九上洞

戶西南面

14

佛井里, 馬本里, 酒幕洞, 衙洞, 大寺洞, 新里, 孔坪洞, 辰谷里, 茅田里, 新基洞, 牛池洞, 興德里, 倉里, 機堤里

永順面

22

芸川里, 興洞, 芮洞, 達山里, 店村, 串新里, 下車里, 沙斤里, 蟻谷洞, 柿洞, 金龍上洞, 金龍下洞, 浦上里, 浦下里, 茂林洞, 法洞, 道村, 白浦里, 儉浦里, 上栗里, 下栗里, 古皮洞

山南面

23

盤巖里, 盤谷里, 秋山洞, 新基里, 薪田里, 德巖里, 玉山洞, 池洞, 松竹里, 平地洞, 直上里, 直下里, 基洞, 辰井里, 碑石洞, 存下里, 存中里, 存上里, 秋巖里, 鳳溪里, 鳳巖里, 佛巖里, 松內洞

山西面

15

三谷里, 瓦也里, 富城里, 下仙里, 上仙里, 幕谷里, 加道里, 金沙洞, 蘭芝里, 酒泉里,塔上洞, 鳳亭里, 下鳳里, 上鳳里, 九上里

草谷面

7

毛項里, 陳安里, 各西洞, 要光里, 下草洞, 上草洞, 東華院里

 

[표-2] 1914년 문경군의 행정명칭2)

* 面數11, 里洞數129 / 군소재지: 문경면 상리 / 면소재지▲

면  명

행 정 구 역

비 고

(10)

上 里

聞慶郡 邑內面 中上里 上里 中里 各 一部

 

下 里

聞慶郡 邑內面 下里 中里 校村 各 一部

校村里

聞慶郡 邑內面 校村 上里 各 一部

 

堯城里

聞慶郡 邑內面 堯城里 池谷里 身北面 廣院里 各 一部

 

池谷里

聞慶郡 邑內面 池谷里 一部

 

馬院里

聞慶郡 邑內面 馬院里 身東面 井谷里 身南面 牛於里 一部

 

陣安里

聞慶郡 草谷面 毛項里 陣安里

 

各西里

聞慶郡 草谷面 各西洞 要光院里 下草洞 一部

 

下草里

聞慶郡 草谷面 下草洞 一部

 

上草里

聞慶郡 草谷面 上草洞 東華院里

 

(8)

南湖里

聞慶郡 身南面 華山里 大谷里 牛於里 茅谷里 各 一部

 

茅谷里

聞慶郡 身南面 茅谷里 一部

 

鼎 洞

聞慶郡 身南面 鼎洞

 

下乃里

聞慶郡 身南面 石橋洞 九郞里 下乃里 加東面 旺陵里

 

上乃里

聞慶郡 身南面 上乃里 汗谷洞

 

外於里

聞慶郡 身東面 金谷里 外於里 內於里 瓮店里 梧洞 一部

 

梧泉里

聞慶郡 身東南 泉洞 梧洞 一部

 

新峴里

聞慶郡 身東面 新院里 石峴里 釘峴里 戶西南面 佛井里 一部

(12)

旺陵里

聞慶郡 加東面 都谷里 旺陵里 一部

葛田里

聞慶郡 加東面 猪音里 葛田里 阿介里

 

鵲泉里

聞慶郡 加東面 鵲泉里 武陵洞 觀山里 一部

 

城底里

聞慶郡 加縣面 城底里 玉山洞 加東面 觀山里 一部

城踰里

聞慶郡 加縣面 城踰里 新基洞

 

前谷里

聞慶郡 加縣面 下前谷里 上前谷里 廣灘里

 

水曳里

聞慶郡 加縣面 水曳里

 

下槐里

聞慶郡 加北面 下孤里 新坪里 一部

 

上槐里

聞慶郡 加北面 上孤里 都台里 院北里 新坪里 各 一部

 

院北里

聞慶郡 加北面 瓦也里 院北里 一部

 

竹門里

聞慶郡 加北面 下大里 中大里 上大里

 

完章里

聞慶郡 加北面 完章里 杮硯里 官坪里 蜂巖洞

 

(13)

三松里

聞慶郡 加西面 松上里 松中里 松下里

 

內西里

聞慶郡 加西面 光亭里 內上里 樓洞 西嶺里

 

華山里

聞慶郡 加西面 靑華洞 內下里 內中里

 

栗籔里

聞慶郡 加西面 栗上里 栗下里

 

鍾谷里

聞慶郡 加西面 鍾谷里 大井里

連川里

聞慶郡 加西面 連川里 馬巖里 一部

 

宮基里

聞慶郡 加西面 古毛里 宮基里 馬巖里 一部

 

籠岩里

聞慶郡 加西面 加項里 場基里

 

葛洞里

聞慶郡 加西面 葛洞 籠上里 一部

 

沙峴里

聞慶郡 加南面 大峴里 沙幕里 所古之里 加西面 籠上里 一部

 

仙谷里

聞慶郡 加南面 仙溪洞 南谷里 立巖洞 一部

 

池洞里

聞慶郡 加南面 池洞 立巖洞 一部

 

泯池里

聞慶郡 加縣面 加大里 泯池里

 

(12)

犬灘里

聞慶郡 戶縣面 台峰里 犬灘里

 

鱉巖里

聞慶郡 戶縣面 鱉巖里 舟坪里 一部

虎溪里

聞慶郡 戶縣面 戶界洞 加攝里 神永里

 

牛老里

聞慶郡 戶縣面 牛老里 蓮驛洞

 

幕谷里

聞慶郡 戶縣面 九下里, 山西面 幕谷里 上鳳里 一部

 

龜山里

聞慶郡 戶縣面 九上里, 山西面 九上里

 

加道里

聞慶郡 山西面 加道里 一部

 

仙岩里

聞慶郡 山西面 上仙里 下仙里

 

芝泉里

聞慶郡 山西面 酒泉里 蘭芝里 加道里 一部

 

富谷里

聞慶郡 山西面 三谷里 瓦也里 富城里

 

鳳亭里

聞慶郡 山西面 鳳亭里 塔上里 下鳳里 山北面 書中里 山南面 秋巖里 各 一部

 

鳳捿里

聞慶郡 山西面 上鳳里 下鳳里 山南面 盤巖里 各 一部

 

(15)

縣 里

聞慶郡 山東面 縣里 新驛里 烽底里 一部

 

富岩里

聞慶郡 山東面 富巖里 京外里 烽底里 兄川里 各 一部

 

兄川里

聞慶郡 山東面 上杜里 兄川里 甘谷里 化庄面 下渭里 各 一部

 

渭滿里

聞慶郡 山東面 下杜里, 化庄面 上渭里 下渭里 龍宮郡 新邑面 松川里 各 一部

 

愚本里

聞慶郡 山東面 松本里 愚洞 甘谷里 良保里 各 一部

 

果谷里

聞慶郡 山東面 果下里 斗溪里 店村 果上里 愚洞 烽底里 各 一部

 

鹿門里

聞慶郡 山東面 鹿門洞 箕山洞 錦川里 松山洞 大浦里 蓮花洞 一部

 

蓮沼里

聞慶郡 山東面 新浦里 蓮花洞 蓮沼洞 果上里 各 一部

 

松竹里

聞慶郡 山南面 德巖里 松內里 池洞 玉山洞 松竹里 直上里 碑石洞 各 一部

 

薪田里

聞慶郡 山南面 薪田里 新基里

 

平地里

聞慶郡 山南面 平地里 直下里 直上里 松竹里 永順面 蟻谷里 各 一部

 

佛巖里

聞慶郡 山南面 佛巖里 鳳巖里 鳳溪里 山東面 蓮沼洞 各 一部

存道里

聞慶郡 山南面 存上里 存中里 存下里 鳳溪里 碑石洞 秋巖里 各 一部

 

辰井里

聞慶郡 山南面 基洞 秋山洞 辰井里, 秋巖里, 山西面 下鳳里 各 一部

 

盤谷里

聞慶郡 山南面 盤谷里 白洞 盤巖里, 辰井里 各 一部

 

(11)

達池里

龍宮郡 西面 達地洞 大栗里 三仁里 舊邑面 茂村里 各 一部

 

旺泰里

龍宮郡 西面 旺泰里 亭子洞 各 一部

 

五龍里

龍宮郡 西面 五龍里 粉土里 舊邑面 茂村里 一部

 

錦林里

龍宮郡 西面 錦陽里 茂林里 亭子里 三仁里 聞慶郡 永順面 茂林里 各 一部
法洞里

 

梨木里

龍宮郡 西面 梨木里 聞慶郡 永順面 白浦里 黔浦里 一部

 

末應里

龍宮郡 西面 末應里 聞慶郡 永順面 古皮里 黔浦里 一部

咸昌郡 東面 末應里

 

栗谷里

龍宮郡 西面 聞慶郡 永順面 道淵里 一部, 上栗里 下栗里

咸昌郡 東面 錢村里 栗谷里

 

沙斤里

聞慶郡 永順面 沙斤里 蟻谷里 茂林里 一部

 

浦內里

聞慶郡 永順面 浦上里 浦下里

 

金龍里

聞慶郡 永順面 金龍洞

 

蟻谷里

聞慶郡 永順面 杮洞 道村 蟻谷里 各 一部

(21)

書中里

聞慶郡 山北面 書中里 山西面 塔上里 各 一部 熊倉里

 

大上里

聞慶郡 山北面 知上里 知保里 大上里 書中里 大下里 各 一部

 

大下里

聞慶郡 山北面 幕谷里 廣川里 新坪里 大下里 一部

梨谷里

聞慶郡 山北面 梨上里 梨下里 月峴里 梨亭里

 

千谷里

聞慶郡 山北面 大鳥洞 于邑洞 道致洞

 

石鳳里

聞慶郡 山北面 鳳上里 鳳下里 石達里

 

金龍里

聞慶郡 山北面 五山洞 金龍洞 馬場里 新基洞

 

巨山里

聞慶郡 山北面 浦村 磻溪里 沙村

 

田頭里

聞慶郡 山北面 田頭里 蒼田里 龜巖里

 

虎巖里

聞慶郡 山北面 虎巖洞 一部

 

種谷里

聞慶郡 山北面 昭野里 一部 種谷里 化庄面 種谷里

 

藥石里

聞慶郡 山北面 白石洞 槐花洞 藥山洞 龍湖里

 

昭野里

聞慶郡 化庄面 昭野里 山北面 昭野里 一部

 

月川里

聞慶郡 化庄面 伊川里 沙月里

 

池內里

聞慶郡 化庄面 池內里 一部

 

黑松里

聞慶郡 化庄面 黑松里 池內里 一部

 

加谷里

聞慶郡 化庄面 加佐谷洞 山北面 回上里 各 一部

 

回龍里

聞慶郡 化庄面 揷峴里 山北面 回下里 伊谷里 回上里 一部

 

內化里

聞慶郡 化庄面 內化里

 

舊邱里

聞慶郡 化庄面 舊邱里

 

加佐里

聞慶郡 化庄面 加佐目洞 山北面 虎巖洞 一部

 

(9)

磨光里

聞慶郡 東魯面 磨光里 一部

 

仁谷里

聞慶郡 東魯面 仁板里 諸谷里 磨光里, 石坪里 各 一部

 

水坪里

聞慶郡 東魯面 水坪里 石坪里 一部 化庄面 水閑里

 

赤城里

聞慶郡 東魯面 赤城里 場基里 老隱里 各 一部

魯隱里

聞慶郡 東魯面 泗坪里 平地里 老陰里 赤城里 場基里 各 一部

 

磵松里

聞慶郡 東魯面 磵谷里 松坪里

 

生達里

聞慶郡 東魯面 沙店里 外生達里 內生達里

 

鳴田里

聞慶郡 東魯面 鳴田里 伐川里

 

石項里

聞慶郡 東魯面 水眞溪里 石項里 赤城里 一部 榮川郡 上里面 越境洞

 

(8)

古堯里

聞慶郡 身北面 鳳鳴里 古堯里 廣院里 巴八里 各 一部

 

八靈里

聞慶郡 身北面 靈山里 巴八里 一部

 

平川里

聞慶郡 身北面 平川里 花溪里 一部

 

龍淵里

聞慶郡 身北面 龍淵里 花溪里 一洞

 

觀音里

聞慶郡 身北面 觀音里 沙店里 腦巖里 一部

 

中坪里

聞慶郡 身北面 中坪里

 

唐浦里

聞慶郡 身北面 唐浦里 花枝里 花溪里 一部

葛坪里

聞慶郡 身北面 葛坪里 葛山里 腦巖里 一部

 

西

(10)

茅田里

聞慶郡 戶西南面 茅田里 一部 咸昌郡 北面 海谷里

 

牛池里

聞慶郡 戶西南面 手池里 興德里 倉里 各 一部

 

倉 里

聞慶郡 戶西南面 倉里 一部

 

新機里

聞慶郡 戶西南面 新基洞 機堤里 新里 戶縣面 舟坪里 各 一部

 

佛井里

聞慶郡 戶西南面 佛井里 一部

 

孔坪里

聞慶郡 戶西南面 長谷里 孔坪洞 茅田里 各 一部

 

幽谷里

聞慶郡 戶西南面 酒幕洞 大寺洞 馬本里 衙洞 孔坪洞 一部

興德里

聞慶郡 戶西南面 興德里 永順面 芮洞 芸川里 興洞 一部

 

店村里

聞慶郡 永順面 店村 達山里 一部

 

永新里

聞慶郡 永順面 下車里 串新里 咸昌郡 北面 德通里 一部

 

 

  이와 더불어 1917년 6월 총독부 제령(제1호)에 따라 ‘조선면제’가 실시되면서 각 면에는 독자적인 사업능력과 권한이 부여되고, 유급직원이 배치되었다. 또 리里에는 구장區長을 두어 면사무소를 보조하게 하였다.

 

  여기에다 면장‧면서기를 일제에 호의적인 인물로 배치하여 지방통치 체제를 완벽하게 장악해 나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1910년대 일제의 무단정치 아래 실시된 헌병경찰제에 따라 문경에는 함창헌병분대咸昌憲兵分隊遣 소속 문경헌병분견소가 설치되었다. 이 분견소는 1913년 4월 1일에 이르러 폐지되고, 문경군내 분견소 1개소(농암)와 출장소 4개소(산북‧동로‧농암‧신북)가 설치되었다. 그 후 1915년 2월 1등 도로 개통과 동시에 호서남면에 헌병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3‧1만세운동의 영향으로 지방 경찰행정을 보다 확고하게 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1919년 8월 19일 칙령 제386호, 조선총독부지방관 관제 개정에 따라 헌병분견소를 폐지하고 경찰서를 설치하였다. 이때 문경군에는 농암‧유곡‧산북‧동로‧신북 5개소에 주재소가 설치되었으며, 서장署長을 비롯해 55명의 정원이 배치되었다.3)

 

 

  2. 일제의 농업정책과 변화하는 문경

 

  1910년 한국 강점에 성공한 일제는 정치‧행정은 물론 산업‧경제를 장악하고자 했다. 이 가운데 농업정책은 당시 인구의 80%가 농업을 생계수단으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중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농업부문에서 일제가 가장 먼저 실시한 정책은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하고 본격적인 토지수탈 작업에 돌입했다. 그 결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지주를 앞세워 전국 토지의 59.6%를 침탈하고, 102만 정보町步의 미간지와 13만 7,200여 정보의 농경지를 약탈하였다. 그 과정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국내 최대의 지주가 되었으며, 한국농민을 수탈하는 기구로 자리 잡았다.

 

  일제는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더불어 품종개량사업을 강행했다. 일본 국내에 필요한 쌀‧면화‧양잠의 품종을 개량하고, 이들 품목을 증산해 저렴한 가격으로 수탈하기 위해서였다. 쌀은 일본인의 식량을 위해, 면화와 고치는 일본의 공업원료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곧‘삼백三白의 수탈’이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효율적인 수탈과 농민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농업단체’를 조직하였다. 일제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지주회와 면작조합‧양잠조합의 설립이었다.

 

  문경군은 1910년대까지만 해도 면화와 양잠의 생산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미미한 지역이었으므로, 경상북도의 전 지역에 조합이 설립된 1918년 무렵에 가서야 조합이 설립되었을 것 같다. 면작조합의 경우 경북에서는 1913년부터 면작조합이 설립되고, 1915년에는 안동을 비롯한 도내 주요지역 15개 군에 설립되었지만, 문경군은 이때까지도 조합이 설립되지 않았다.4)

 

  1917년 12월 문경군의 총 호수는 14,197호, 인구는 79,499명이다. 이 가운데 한국인 호수는 14,114호, 인구는 79,292명이었다. 문경 인구의 0.1%에 해당하는 201명의 일본인은 81호의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인 6명이 두 가정을 꾸리고 문경에 둥지를 틀었다.

 

  한인 농가는 12,611호였다. 이는 전체 호수의 89%에 해당한다. 나머지 11%는 공업(427호), 상업 및 교통업(430호), 공업과 자유업(170호), 기타(248호) 직종이었다. 이와 달리 문경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주요 직업은 공무와 자유업이 38호로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으로 상업‧교통업 종사자가 15호, 공업종사가 14호였다. 농업에 종사하는 일본인은 2호에 불과했다.5) 문경에 진출했던 중국인 2호는 상업‧교통업에 종사하였다. 문경 사람들에게 있어서 농업은 삶의 전부였으며, 곧 일제의 농업정책은 이들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표-3] 1917년 문경군의 호수 및 직업구조6)

구 분

전체호수

농업

어업
제염업

공업

상업‧
교통업

공무‧
자유업

기타

무직자

14,197

12,613

2

441

447

208

260

226

한국인

14,114

12,611

2

427

430

170

248

226

일본인

81

2

-

14

15

38

12

-

중국인

2

-

-

-

2

-

-

-


  그렇다면 1917년 문경 사람들의 농업 경영형태는 어떠했을까? [표-4]는 1917년 문경의 농업 경영형태를 알려준다. 1917년 문경의 농가호수는 11,981호로 이들 농가를 경영형태별로 구분해보면, 지주 224호(1.9%),자작농 1,719호(14.4%), 자소작농이 6,715호(56.1%), 소작농이 3,323호(27.7%)이다. 지주의 비율은 전국‧경북보다 낮고, 자작농의 비율은 전국의 평균보다는 낮으나 경북의 평균치와는 비슷한 수준이다. 그에 비해 자소작농의 비율은 높고, 소작농의 비율은 낮다. 1910년대 문경의 농업경영구조는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7)

[표-4] 농업자수 및 경영형태8)

전업겸업 각 농가호수

지주‧자작‧소작‧자작 겸 소작 각 농가호수

전 업

겸 업

지 주

자 작

자소작

소 작

9,989

1,992

11,981

224
(1.9%)

1,719
(14.4%)

6,715
(56.1%)

3,323
(27.7%)

  [표-5]는 1917년 문경군의 경지면적과 자소작지의 규모에 대한 자료이다. 1917년 문경군의 경지면적은 논이 6,981정町, 밭이 7,937.2정으로 총 14,918.2정이다. 같은 시기 경상북도의 군별 평균 농지면적 16,900정과 비교했을 때, 문경군의 경지면적은 경북의 평균치에 미치지 못한다. 전답 비율면에서는 논이 46.8%, 밭이 53.2%로 전답의 비율이 비슷하였다. 이와 더불어 문경군은 토지의 소작지율이 매우 높다는 특징을 보인다. 논의 경우 약 60%, 밭의 경우 53%가 소작지이다.

[표-5] 1917년 문경군의 경지면적9)

구 분

경 지 면 적(町)

자 작 지(町)

소 작 지(町)

문 경

14,918.2

6,981.0
(46.8%)

7,937.2
(53.2%)

2,800.4
(40.1%)

2,754.0
(34.7%)

4,180.6
(59.9%)

4,183.2
(52.7%)

경 북

389,505.3
(100%)

187,547.1
(48.2%)

201,958.2
(51.8%)

83,396.3
(44.5%)

104.936.7
(52.0%)

104,150.8
(55.5%)

97,021.5
(48.0%)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문경은 소작에 의존하고 있는 순수한 소작농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적다는 특징과 자작지보다는 소작지의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다는 특징이 있다.10)

 

 

제2절 문경인의 독립운동자금 모집운동

 

  1. 국내 민족운동의 전개양상과 특성

  1910년대 독립운동은 대한제국의 멸망이라는 새로운 현실적 조건 위에서 모색되고 있었다. 한말의 의병항쟁은 국내를 무대로 전개되다가, 1910년을 전후하여 근거지를 만주 및 연해주로 옮겨 나갔다. 계몽운동은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등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에 직면하면서 좌우로 분화되었고,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 좌파인사들은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을 추진해 갔다.11)

 

  이 무렵 연해주에 건설된 한흥동‧13도의군‧성명회‧권업회, 서간도에 세워진 경학사와 부민단‧신흥강습소, 북간도의 간민회 등은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중 13도의군의 결성에서 보이듯이 의병과 계몽운동의 합류는 독립운동의 발전적 현상으로 주목된다. 즉 전통적 보수를 대변하던 의병항쟁과 근대적 진보를 대변하던 계몽운동이 독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각각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이념과 방략을 주고받으며, 망국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독립군으로 합류하였던 것이다.

 

  한편 독립운동의 공간이 해외로 확대되면서 1910년대 독립운동은 국제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과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러시아혁명은 한국 독립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1911년 중국에서 봉건왕조를 타도하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그 소식은 국내외 한인사회에 급속히 퍼져 갔다. 신규식과 조성환은 신해혁명에 직접 참가하면서 미주에 있는 안창호에게 정기적으로 혁명의 진행 상황을 알렸으며, 박은식과 신채호도 합류함에 따라 1912년 동제사가 첫 독립운동단체로 조직되었다. 전통질서를 부정한 신해혁명의 영향은 전제군주론을 크게 후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공화주의 혁명사상이 성장하게 되는 기반을 이루었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독립의군부(1913)나 민단조합(1913)과 같은 복벽적 조직보다는 광복회(1915)와 같은 공화주의적 혁명단체가 발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은 독립운동계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연해주와 서북간도 일대에서 독립군기지를 개척하던 독립운동세력은 러일전쟁 10주년을 기하여 제2의 러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한 역량을 모아가고 있었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이동휘가 주도한 대한광복군정부는 그와 같은 독립군 통수부로서 광범한 해외의 동포사회를 기반으로 세워질 수 있었다. 또 미주에서는 박용만을 중심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이 결성되기도 했다. 그런데 대한광복군정부의 계획이 실행되기 직전에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일제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가담하면서 러시아와 중국이 일제의 외교적 압력에 굴복하여 한국 독립운동세력을 탄압했던 것이다. 따라서 권업회‧간민회‧대전학교 등이 해체되었고, 아울러 대한광복군정부의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의 경우, 특히 망국인으로 타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던 처지였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에 의해 좌우되는 민족적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해외 독립운동세력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데, 김동삼의 백서농장을 통한 군사력 양성, 북경‧상해에 걸친 이상설‧박은식 등의 신한혁명당이 그것이다. 신한혁명당은 대한광복군정부가 해체되고 중국 관내로 활동근거지를 옮긴 이상설과 박은식 등 북경과 상해지역 독립운동가들이 1915년에 결성한 단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서 일제는 연합국에 가담하여 중국 내 독일군 조차지를 공격‧점령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발호하고 있었다. 신한혁명당의 인사들은 그러한 일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한‧중‧독연합의 항일전선을 구상하는 한편 광무황제의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망명계획이 발각되고(이른바 ‘보안법위반사건’), 이상설이 타계하면서 신한혁명당의 계획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러시아혁명은 한국 독립운동조직이 재건‧추진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미주에서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국민회의 조직 확대가 추진되었고, 상해에서는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면서 독립운동세력을 통할하는 기구를 만들자고 제창하였다. 이렇듯 3‧1운동 후 국내외 각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정부조직이 수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동단결선언의 영향이 컸다. 이렇게 한국민족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해외 독립운동체제를 정비‧발전시켜 나갔다.

 

  해외에서 독립군기지가 개척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의병과 계몽운동 계열의 인사들에 의해 독립운동이 추진되어 갔다. 일제의 직접적 식민지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국내독립운동의 조직적 특징은 비밀결사의 형태로 나타났다. 의병계열의 독립의군부와 민단조합‧광복단(1913)과 계몽주의 계열의 조선국권회복단(1913)‧기성볼단(1915)‧조선산직장려계(1915)‧조선국민회(1915)‧대동상점(1915) 등이 조직되었고, 광복회와 같이 의병계열과 계몽주의 계열이 통합한 혁명조직도 결성되었다. 평양에서 결성된 조선국민회는 박용만과 연결되어 미주의 대조선국민군단의 국내지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군자금 수합과 무기구입 등의 활동을 벌인 독립군적 조직이었다. 광복회는 의병계열의 광복단(풍기)과 계몽주의 계열의 조선국권회복단‧대동상점 등의 조직을 통합하여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된 단체로서 국내에 100여 곳의 거점을 확보하고 무력에 의한 독립달성을 목표로 삼은 혁명적 조직이었다.

 

  한편 의병계열에서는 1910년을 전후하여 주력부대가 해외로 옮겨 간 이후에도 산발적이긴 하지만 3‧1운동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의병항쟁은 3‧1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격렬한 투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반면 계몽주의 계열에서는 식민지체제 내에서 사립학교를 통하여 민족교육을 실현해 갔다. 그리하여 3‧1운동 때 사립학교가 거점이 될 수 있었고, 이곳에서 성장한 학생들이 3‧1운동의 전위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1919년 3‧1운동은 1910년대 독립운동의 결실로 맺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3‧1운동과 더불어 임시정부와 수많은 독립군조직의 탄생은 1910년대 독립운동체제가 정비된 기반 위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2. 민단조합의 결성과 활동

 

  1) 민단조합의 결성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충격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적당한 표현이다. 뜻을 가진 사람들은 나라 밖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길러 나라를 되찾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독립에 뜻을 둔 많은 사람들은 만주로 망명하였다.

 

  한편 나라 안에 남은 인물들은 몇 갈래 길을 택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하거나 아니면 만주지역 독립군 기지건설에 들어갈 자금을 마련하여 지원하는 사업 또는 드문드문 일제 통치기관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나라 밖으로 망명한 인물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야 하는 반면, 나라 안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은 일제의 감시와 추적을 따돌려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경에서는 민단조합民團組合‧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라 불리는 비밀 조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독립의군부가 호남과 충남 등 서남부지역의 복벽주의적 유림단체라면, 민단조합은 충북과 경북 등 동남부지역의 유림단체였다. 민단조합은 문경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 이남 낙동강 연변의 의병출신 인사들이 조직한 의병결사였다. 이들은 국내의병 세력과 연결하여 자금을 모아 의병항쟁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아예 의병항쟁을 다시 일으킬 목적을 갖고 있었다.

 

  민단조합의 결성은 이동하李東下가 주도하였다. 이동하(1856.10~1919.6, 본명 淨來, 본관 광주)는 1896년 1월 이강년이 창의한 문경의진에 종사從事로 참여하였고, 1907년 이강년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참모參謀와 군자장軍資將으로 의병활동을 펼쳤다. 1908년 이강년이 붙들리고 의진이 무너지자 1911년 12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4년 고향으로 돌아온 이동하는 의병동지들을 규합하여 민단조합을 결성하였다. 여기에 이강년의 조카 이식재李湜宰, 군자장軍資長을 지낸 최욱영崔旭永, 그리고 이은영李殷榮‧김낙문金洛文‧이세영李世永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강년의진에서 활약하던 옛 동지였다. 즉 민단조합은 이강년 아래 있던 의병세력을 기반으로 결성되었다.12)

 

  2) 민단조합의 조직과 구성원

  1914년 9월에 결성된 민단조합은 의병세력을 조직 기반으로 하고, 이동하는 충청남도, 이은영은 충청북도, 이세영은 경상북도를 담당하는 민단조합장을 맡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였던 양반유생들이다. 여기에 김낙문‧이식재‧최욱영이 이들과 뜻을 함께 하였다.

  이은영은 문경출신으로 13도창의소 총대장이었던 이인영李麟榮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1913년에는 임병찬林炳瓚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대한독립의군부의 조직이 일제 경찰에 노출되어 관련자들이 체포되자, 그는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 1914년 이동하가 민단조합을 조직하자, 그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표-6] 민단조합을 주도한 사람들

성 명

생 몰

출신지
(본관)

이 력

주 요 활 동

김 낙 문
金洛文

1872
~1942

문경
(풍산)

자 春達
호 慕竹
김순흠의 子

◦ 이강년의진 참가
◦ 1913년 독립의군부 참여
◦ 1915년 민단조합 참여

이 동 하
李東下
(李淨來)

1856
~1919

문경
(광주)

 

◦ 이강년의진 참모, 군자장
◦ 1912년 만주망명
◦ 1914년 민단조합 결성
◦ 1916년 피체, 1918년 징역 1

  년
◦ 1919년 6월 석방

이 세 영
李世永

1869
~1951

충남
아산

자 佐顯

◦ 이강년 의진 참가
◦ 독립의군부, 민단조합

이 식 재
李湜宰

 

문경

이강년의
조카

◦ 이강년의진 참가
◦ 민단조합 참가

이 은 영
李殷榮

1868
~1921

문경

이인영의 弟

◦ 독립의군부 참여
◦ 민단조합 충북도지회장
◦ 1916년 피체

최 욱 영
崔旭永
(權泰俊)

1854
~1919

문경

자 松山
호 淸溪

◦ 이강년 의진 군자장
◦ 1913년 군자금 모집
◦ 1914년 민단조합참여


  이세영(1869.5~1951, 본관 德水, 자 佐顯)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 1895년부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7월 이강년의진에 참가하여 감군장監軍將이 되었으며, 10월에는 의병 90명을 거느리고 좌군장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이강년이 붙들리자 귀향하여 애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하여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세우고 1909년 대한독립의군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 조직이 드러나자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만주에서 그는 이동하를 만나게 되었다. 이세영이 민단조합에 가입하게 된 것은 만주에서 만난 이동하와의 인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낙문(1872.6.18~1942.8.5, 본관 풍산, 자 春達, 호 慕竹)은 1908년 단식하여 순국한 김순흠金舜欽의 넷째 아들이다. 김순흠이 안동에서 예천군 감천면으로 옮겨 살 때, 김낙문이 태어났다. 김낙문은 이강년이 전기의병에 이어 1907년에 다시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의진에 참가하였다.

  그는 단양‧충주‧청주전투에서 연이어 패하고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서 나라를 잃고 한해가 지난 1911년, 그는 이동하에게 의병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1913년 임병찬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에 가담하였으며, 1915년에는 민단조합 결성에 참여하였다.13)

  이식재는 이강년의 생질甥姪로 의병봉기를 준비하고 있던 최욱영을 비롯한 그의 부하 강병수姜秉秀 등과 합의하고 제천군堤川郡 근북면사무소近北面事務所를 습격하여 100원을 확보하였다. 그 뒤 충북‧경북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김낙문의 권유로 민단조합에 참여하였다.

  최욱영(1854.10~1919.8, 자 松山, 호 淸溪)은 문경출신 의병장으로 1907년 원주의 민긍호와 신림神林 안강리安康里에서 창의하였다. 그 후 제천‧단양‧영월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횡성에서 총상을 입기도 했다. 최욱영이 이강년의진에 참여한 것은 1907년 8월이다. 그는 이강년의진에 참가하여 군자장이 되었으며, 1908년 청풍 적성전투에서 이강년이 붙잡히자 고향으로 돌아와 권태준權泰俊으로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 1913년 2월 광무황제의 밀서를 받고 동지와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펼쳤으며, 1914년 11월에 민단조합에 참여하였다.

  3) 민단조합의 활동

  민단조합의 활동무대는 소백산맥 남쪽 낙동강 주변의 지역, 곧 안동‧예천‧문경‧상주일대였다. 이들의 활동목표는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동지를 모으고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민단조합은 1910년대 의병계열의 인사들이 모여 조직한 광복단(풍기)이나 대한독립의군부(호남지역)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먼저 대한독립의군부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동하는 민단조합을 조직하고 1915년 이후 서울에서 이은영‧이무영李戊榮(이은영의 實弟)‧이종황李鍾晃‧권영직權寧直 등과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조달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권영직을 경상남도 밀양으로 파견하여 박인근朴仁根‧김강년金康年‧류영봉柳永奉을 경성(이하 서울)으로 데리고 왔다. 서울로 온 박인근은 의군부義軍府 정위正尉, 김강년은 의군부 참위參尉, 류영봉은 의군부 참령參令에 임명되었다. 사령장을 받고 군자금 제공을 약속한 이들은 밀양으로 돌아와 자금을 마련하여 서울로 향하는 도중 성환역에서 붙잡혔다. 이때 이들이 받은 직명은 대한독립의군부의 관제였다.

  대한독립의군부는 1913년 1월 호남지역에서 조직되기 시작하여 1914년에는 거의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다. 그리고 독립의군부 활동의 방향과 방법을 제시한 「관견管見」을 격문으로 전국에 뿌렸는데, 민단조합에서도 이 관견을 활용하던 것으로 보아 독립의군부와의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낙문의 경우는 대한독립의군부나 광복단에 모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대한독립의군부에 직접 가담하였으며14), 광복단(풍기)과 조선국권회복단(대구)이 결합하여 1915년에 출범한 광복회에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1916년 10월 광복회의 채기중蔡基中이 영월 중석광산을 공격한 거사에도 김낙문이 관련되었다고 전해진다. 강원도 영월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석광산이 있었는데, 그 운영자금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함창 출신 채기중을 비롯한 10여 명의 광복회원이 광부로 위장하여 잠입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이동하의 경우에도 이강년의진에 참여한 바 있는 의성의 권병칠, 예천의 조용필15), 의성의 김성추 등과 만주로 갔는데, 이들은 모두 광복회원이었다.

  이와 같이 의병세력을 기반으로 조직된 민단조합은 광복단이나 대한독립의군부와 연계되어 독립군과 군자금 모집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민단조합은 1918년 일제 경찰 정보망에 그 조직이 드러났다. 그래서 이동하를 비롯한 김낙문‧이은영‧이식재‧이세영‧최욱영 등이 붙들리고, 민단조합도 해체되었다.

  민단조합의 활동과 독립운동 방략에서 주목되는 점은 일제강점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든 국내에서 의병세력을 모아 독자적인 무력투쟁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이 꿈꾸는 정치체제는 봉건왕조의 전제군주제를 회복하려는 복벽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공화주의로 나아가고 있었고, 복벽운동은 대중적 기반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단조합은 척사유림의 의병항쟁 노선을 계승한 마지막 단체가 되었다.

 

  3. 광복회와 문경인

  광복회는 독립군 기지건설이라는 대명제 아래 1915년 조직된 비밀결사이다.16) 그 선행조직은 풍기豊基에서 조직된 광복단光復團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었다. 광복단은 1913년 소백산 바로 밑, 풍기에 모인 의병출신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채기중蔡基中‧전원식全元植‧정성산鄭星山‧양제안梁濟安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는데, 이곳은 『정감록鄭鑑錄』에 십승지지十勝之地(전쟁이나 재해가 없는 10곳) 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영향으로 의병항쟁에서 쓰라린 패배의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이‘독립운동’이라는 열망을 가슴에 품고 은둔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음력 정월 보름 대구 대명동 안일암에서 결성된 계몽운동단체로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홍주일洪宙一‧박상진朴尙鎭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대다수가 계몽주의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경상도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조직의 목표는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서상일의 태궁상점太弓商店이나 윤상태의 향산상점香山商店 등을 거점으로 삼고 자금을 조달하였다.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강경 세력이 결합을 모색하고 나섰다. 그 결실이 1915년 7월 대구 달성공원 회합에서 이루어졌으니, 광복회의 성립이었다. 여기에는 채기중과 박상진의 역할이 주효했다. 또 영주의 대동상점도 이에 합류하여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17) 그 결과 광복회는 국내에 100여 곳의 거점을 확보하고 무력에 의한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운 혁명적인 조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18) 이들은 국외, 특히 만주지역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곳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김좌진金佐鎭을 부사령으로 파견하기도 했다.19)

  박상진의 상덕태상회와 대동상점은 그 대표적인 거점이었다. 풍기광복단이 의병계열 인물에 의해 풍기를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의 조그마한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면, 광복회는 계몽운동계열의 인사와 합쳐지면서 국내만이 아니라 만주지역을 포함하는, 즉 국내외에 걸친 대규모의 조직으로 확장된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이념이나 사상적인 합류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화주의 성격을 가진 이 조직에는 양반과 평민출신이, 그리고 전통 한학과 신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독립운동의 근대국가이념을 널리 퍼트려 나갔다. 광복회는 친일부호를 공격하여 자금을 확보하고, 그 과정에서 협조하지 않는 친일분자를 처단하였다.

  광복회는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문경에서 광복회에 참여한 인물로는 강병수姜秉秀(1884~1921, 호 信菴, 이명 姜順必)가 있다. 그는 이강년의진에 종사從事로 참여하여 이강년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인물로 전한다. 1911년 이동하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을 재기하고자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1914년에는 이식재 등과 함께 제천군堤川郡 근북면사무소近北面事務所를 습격하여 100원을 확보하였다.

  강병수는 1913년 채기중이 주도하여 결성한 광복단에 참여하였으며,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하여 조직한 광복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광복회에 참여한 강병수는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서 채기중‧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와 함께 1917년 11월 칠곡漆谷의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였다. 이때 광복회의 처단 고시문을 붙임으로써 그 이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광복회 조직이 일제 경찰에 드러났고, 그는 1918년 붙잡혔으며, 1921년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20)

 

  4. 조선민족대동단과 문경인

  민단조합이 무너지고 나서, 1910년대 군자금 지원활동으로 주목되는 인물은 박노창朴魯昌‧정인옥鄭寅玉‧김병태金秉泰 등이다. 이들의 활동은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하 대동단)을 이끌었던 신덕영申德永과 정남용의 관계 속에서 펼쳐졌다.

  대동단大同團은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비밀결사의 형태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조선민족의 정신통일과 실력양성을 표방하며,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하였다. 이들은 국권피탈 후 만주 망명생활을 통하여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3‧1운동의 대중화 과정에서 이 단체를 결성하였다. 대동단은 황족‧유림‧종교‧교육‧상공‧노동‧청년‧군인‧부인‧지역‧구역 등 사회 각층의 인사를 한데 모아 민족역량을 결집함으로서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포부를 가졌다.

  그러나 이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다. 이들은 서울의 본부 이외에 전라도 일대에 지부를 설치하는데 그쳤다. 이들은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추대하였다. 그러나 의친왕의 상해 망명을 추진하다 발각됨으로써 조직은 무너지고 말았다.21)

  문경출신 박노창의 대동단 가입은 정남용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정남용鄭南用(이명 鄭必成‧洪宇植)은 강원도 고성高城 사람이다. 고성의 건봉사乾鳳寺 승려 출신인 그는 1914년 이후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徽文義塾과 중앙불교포교당中央佛敎布敎堂에서 수학하였으며, 3‧1독립운동 직후 조직된 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5월 대동단의 최익환이 붙잡힌 뒤 그 후임으로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대동단에서 발행한 「선언서宣言書」와 「임시규칙臨時規則」 등 각종 문서의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 대동단은 사회 각층 중 진신縉紳‧유림儒林‧상공商工‧청년靑年 등 4개 단團을 중심으로 단원 포섭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청년단의 조직을 정남용이 주관하였다.

  박노창이 정남용과 접촉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인 5월경이다.22) 그는 정남용에게 대동단 결성의 취지를 듣고, 그와 함께 뜻을 펴기로 결정하고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박노창은 각종 선전물을 인쇄‧배포하여 대동단의 활동을 알리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이건호의 집에 영동활판소라는 비밀인쇄소를 차려놓고 정남용‧권헌복‧이근고‧김용 등과 함께 《대동신보》를 발행하였다. 또 대동단 규칙 등 각종 문서를 인쇄 배포하는데 힘썼다. 그 후 정남용의 지시를 받고 독립군과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펴기 위하여 《대동신보》와 「대동단규칙」을 가지고 부산에 살고 있는 구상서를 만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활동상이 드러나 일제 경찰에게 잡혔으며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23)

  한편 정인옥(1875.12.8~1950.1.24)의 대동단 활동은 신덕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신덕영申德永은 1914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귀국 후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정인옥이 신덕영과 접촉한 것을 1919년 7월(음력)이다. 정인옥은 1919년 7월 신덕영으로부터 권총 2자루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받아 상주尙州‧충주忠州‧봉화奉化등을 중심으로 활동을 폈다. 그는 1,500여 원의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펴다가 붙잡히고, 1922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제령7호 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24)

  정인옥과 함께 군자금 활동을 벌인 문경사람으로 김병태(1875.7.29~1968.10.29)가 있다. 그는 안동 오미마을 풍산김씨의 후손으로 1875년 문경에서 태어나 1900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1919년 정인옥과 함께 조선독립에 관한 유고문諭告文과 군자금 수령증을 작성하는 등 군자금 지원활동을 펴다가 잡혀 징역 10월 옥고를 치렀다.25)

 

제3절 3·1만세운동의 전개 

 

  1. 31운동의 발발과 지방 확산

 

   1) 3·1운동의 발발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은 1910년 일제강점기에 들면서도 결코 위축되지 않고 이어졌다. 국내 의병항쟁은 규모가 작아졌지만 중소도시를 파고들거나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이 되었고, 계몽운동도 도시를 중심으로 확산해 나가거나 만주지역 독립군 기지건설에 뛰어들어 눈에 띌 만큼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국제적인 상황 변화, 즉 전쟁이 일어날 터이고, 그럴 경우에 그 틈을 이용하여 우리가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정하고 기다리던 국제정세 변화는 나라를 잃은 뒤 4년 만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나타났다.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은 갑자기 발빠른 변화를 보였다. 이상설이 연해주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했고, 1915년에 상해 중심의 인물들과 결합하여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1917년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어 새로운 정부수립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26)더구나 1918년 1월에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 독립운동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있을 마무리 방침으로 제시된 것인데, 민족의 장래를 민족 자신의 결정에 맡긴다는 것이 골자였다.27)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기는 1918년 11월이었다.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던 모든 이들이 여기에 시선을 집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국외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은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전쟁 마무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다는 소식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을 위한 기회라는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단순히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의 주장을 펴나가는 일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일본 대표들이 “한국인들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고 허위 선전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본의 주장보다 더 큰 목소리가 필요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에 몸담고 있던 인물들은 모두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자 했다. 중국에서는 신규식이 이끄는 동제사同濟社와 여기에서 성장한 여운형呂運亨이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썼다.28) 신규식의 지도를 받은 여운형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김규식을 대표로 선임하여 파리에 파견한 것이 그 대표적인 일이다.29)

 

  이런 움직임이 결코 중국 본토지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해주 동포나 일본 유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 유학생들은 2월 8일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을 선언한 ‘2‧8운동’을 일으키고, 일본에 ‘혈전’을 선언하고 나섰다.30) 이 무렵 중국지역 인사들은 일본 유학생들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연계를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동포사회도 대표 파견을 결정하였다.31) 그러나 미국 정부가 협조하지 않음에 따라 성공하지 못했다.32) 이들 국내외 활동은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의 의사를 큰 함성으로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3‧1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3‧1운동은 1910년에 나라를 잃은 뒤, 독립의 기회를 엿보면서 힘을 길러가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이 일으킨 것으로 정리된다. 그것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이라는 상황을 독립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헤아릴 수 있다.

 

  초기의 3‧1운동 계획은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일제가 한국 강점 직후 독립운동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에 대해 강제해산 조치를 단행했기 때문에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세력으로는 사실상 종교계와 학생밖에 없었던 셈이다.

 

  이들 국내 조직과 국외지역 독립운동자와 유학생의 구국 에너지가 한 군데로 어울려 펼쳐진 항쟁이 바로 3‧1운동이었다.

 

  천도교측의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1919년 1월 중순경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3대 원칙을 수립하였다.33) 대중화와 일원화 원칙은 전 민족이 하나의 체계로 민족운동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발전양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더구나 서로 다른 종교단체가 민족문제 해결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민족적 양심으로 뭉친 것이다. 종교가 다르면 부정해 버리는 요즈음 일부 종교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택한 비폭력 원칙은 3‧1운동 추진 세력들의 계몽주의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적절한 무력수단을 갖추지도 못한 한계 때문에 취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운동이 비폭력적으로 진행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은 민족대표들이 가진 한계였다.

 

  기독교측의 시위계획은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상해에서 파견된 신한청년당원 선우혁의 활약이 연결고리로 작용하였다.34)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한편 국내와 일본‧만주‧노령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결하였던 것이다. 선우혁은 1919년 1월말에서 2월 초순경 사이에 평안도로 들어와 이승훈‧양전백 등 옛 신민회 동지들을 만났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마무리와 이에 따른 국제회의 소식을 전하면서 독립운동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영향이 평양과 정주, 선천 일원의 교회와 기독교 계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다.35) 일본 유학생의 2‧8독립운동은 국내 천도교 인사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1918년 말 유학생들은 최팔용을 비롯한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36)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송계백을 국내로 파견하여 현상윤과 최린 등을 접촉하게 하였다.37) 송계백은 그들이 준비하고 있던 독립선언과 투쟁방향을 알렸던 것이다. 그리고서 1919년 2월 8일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조선학생들이 모여 조선의 독립과 일본과의 혈전을 선언하고 나섰다.38)이후 국내 천도교 인사들은 다시 김윤식‧한규설 등 대한제국시기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에게 사람을 보내 동참을 요구했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한편 학생들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강기덕‧김원벽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39)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고 「독립선언서」의 기초 등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은 2월초에 들어 대통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조국독립이라는 명제 아래 교단과 종파의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할 것에 동의하였다.40)

 

  이들은 거사 날짜를 3월 1일로 잡았다. 앞서 1월 22일에 붕어한 광무황제의 장례일이 3월 3일로 잡혀 있었는데, 여기에 참례할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서울로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규모의 시위를 벌이고자 했는데, 국장일 앞날인 3월 2일이 일요일이었다. 그래서 이 날을 피하자는 기독교측의 요구에 따라 다시 하루를 앞당겨 3월 1일로 거사날짜를 잡았다.41) 그들은 이외에도 구체적인 활동 방침을 확정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각종 문서의 기초와 인쇄 담당, 일본 정부 및 강화회의에 참가한 여러 나라 대표들에게 보낼 통고문과 청원서의 송부 방법, 불교계의 동참 등이 그 내용이었다.42)

 

  이들은 합의에 따라 독립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힌 한용운의 노력으로 불교계와의 연합도 성사시켰다.43) 또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학생들과도 연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학생대표들은 회의를 열고 두 가지 활동전략을 수립하였다. 하나는 연합시위에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편에 따라 학생의 독자적 시위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의 대연합이 결성되었다.44)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준비되어 갔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에서 준비하기로 하여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었다. 초고를 받은 최린은 이를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에 보여 동의를 얻었다. 「독립선언서」는 인류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 한민족의 독립이 당연하다는 점과 강력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한 것으로, 1910년대 독립운동의 이론과 논리가 정리되었다.45) 완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월 27일경 21,000여 장 인쇄되었다.46) 「독립선언서」가 인쇄되고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자 각 종단은 민족대표를 선임하였고, 선임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대표로 선임된 33인은 천도교측 손병희 외 14명, 기독교측 이승훈 외 15명, 불교측 한용운 외 1명이었다.47)

 

  2월 28일 저녁 손병희 집에서 열린 마지막 모임에서 대표들은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했던 것을 바꾸어 바로 이웃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이 시민들 앞에서 체포될 경우에 폭력 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48) 이들의 행위는 뒷날 엇갈리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한편 파고다공원에서는 대표들을 기다리다가 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주도해 나갔다.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뒤늦게 독립선언 장소가 변경된 사실을 알고 독자적인 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2) 3·1운동의 국내외 확산과 일제의 탄압

  (1) 3·1운동의 지방 확산

  3‧1운동은 3월 중순까지 국내만이 아니라 국외지역 동포사회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국내의 경우는 전파되는 경로에 몇 가지 특성을 보였다. 첫째, 교통망에 따라 확산된 점이다. 철도 교통망을 따라 그 주변의 대도시로 퍼져 나갔고, 대도시의 장날에 시위가 크게 일어난 뒤, 다시 중소 도시의 장날을 따라 퍼져 나갔다. 둘째, 시위준비 세력이 전국 주요도시에 연락망을 정하고 이에 따라 선언서를 발송한 것이 하나의 경로였다. 서울에서 발송된 선언서가 지방의 유지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에 의해 지방마다 시위가 준비되었다. 셋째, 각 지방에서 광무황제의 장례에 봉도단으로 참여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간 인물에 의해 시위가 확산된 것이 또 하나의 경로였다. 국장에 참여한 인물들이 현장에서 갖게 된 태극기와 선언서만이 아니라 시위현장의 열기를 그대로 지방에 전달하였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들 지방 도시에서 서울과 같은 날 만세시위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조직을 통하여 사전에 조직화 작업이 이루어졌고,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는 등 준비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3월 1일 시작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3월 중순경에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파급되었는데, 3월 20일경부터 4월 10일경까지 절정에 달하였고 5월말까지 계속되었다.49)

  (2) 3·1운동의 국외 확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국내에서 시작된 3‧1운동의 여파는 국외에까지 파급되어 만주‧연해주‧미주 등 한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만주지역에서는 서간도과 북간도 등에서 한인들이 만세시위를 펼쳤다. 서간도 최초의 만세시위는 3월 12일 부민단이 주축이 되어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와 통화현 금두복락金斗伏洛에서 수백 명의 동포들이 독립축하회를 개최하고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다.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정오, 1만여 명의 한인들이 용정 북쪽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 모여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가졌다. 또 훈춘지방의 만세시위는 3월 20일에 있었다.

  노령 연해주의 한인사회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한인 집단거주지인 신한촌에 대형 태극기를 게양한 한인들은 대오를 지어 만세행진을 가졌고, 일본 총영사관 앞을 행진하면서 열띤 만세시위를 벌였다. 우스리스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도 만세시위가 펼쳐졌다.50)

  미주지역에서는 3월 1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미주‧멕시코‧하와이 거류동포 전체회의를 열어 독립을 다짐하는 12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재미교포들은 서재필의 주선으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한인들이 필라델피아에 집결하여 한인자유대회를 열어 우리 민족의 독립선언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전 세계에 널리 선포하고 악대를 선두로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를 행진하였다.51)

  한편 3‧1운동에서 선언문은 조선을 독립국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렇다면 그 국가를 운영해나갈 정부조직체가 필요했고, 그 때문에 정부 수립이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그 결과 국내외에서 8~9개의 정부가 선언되었고, 그것이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즉 3‧1운동으로 나타난 민족의 당면과제인 정부가 수립되고, 그것도 전제군주국이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 최초의 민주공화국이었다.

  (3) 일제의 탄압

  만세시위가 삽시간에 전국으로 파급되자, 당황한 일제는 즉각 병력을 증강 배치하고 무력진압에 나섰다. 당시 한국에 주둔하던 정규군은 완전 무장한 2개 사단으로 23,000여 명이나 되었다. 만세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4월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강시켜 무력탄압에 나섰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조선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바로 진압명령과 발포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일제의 야만적 탄압이 저질러졌다. 특히 4월 들어서는 경고조차 없이 실탄을 사용하라는 지침이 내려져 더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52)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만세시위에 참가한 우리 민중의 피해상황은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피체 46,948명이었다. 또 교회당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호가 불탔다고 한다. 반면에 일제측 자료에는 1919년 3월 1일부터 1년 동안 피살 7,645명, 부상 45,562명, 피체 49,811명이며, 가옥 724호, 교회 59동, 학교 3동이 불탔다고 한다.53) 일제측 기록은 축소된 것이므로 실제 피해가 그것보다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제의 야만적 탄압에 분개한 군중들은 경찰주재소나 헌병주재소, 식민지 통치기구인 군청‧면사무소‧우편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지도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비폭력을 넘어서서 격렬한 저항을 벌인 원인에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동안 줄기차게 전개된 독립운동으로 민중의 역량이 성숙되어간 점과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의 분노가 아울러 작용한 것이다.

  (4) 3·1운동의 역사적 의미

  3‧1운동은 ‘독립운동의 호수’, ‘독립운동의 분수령’이라 불릴 만큼 우리의 민족사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3‧1운동은 한민족의 주체적인 독립 쟁취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대부분의 민중들도 시위과정에서 독립 쟁취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둘째, 세계 언론이 이를 보도함으로써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세계인에게 알리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셋째, 3‧1운동은 종교계와 학생‧노동자‧농민들의 참여로 독립운동의 참여계층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1920년대 이후 농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사회운동‧여성운동 등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넷째, 국민들의 정치인식이 근대화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3‧1운동 때 민중들이 시위과정에서 민주공화정 추구라는 광장에 합류하였다. 다섯째, 3‧1운동의 결실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니, 다음 순서는 그 독립국을 운영해 나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여섯째, 3‧1운동은 이후 만주와 노령 연해주 일대에서 무려 40여 개의 독립군 단체들이 편성되고 정비되어 국내진입작전을 개시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54)

  다음으로 3‧1운동이 가지는 세계사적 의의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끼쳤다.55) 3‧1운동 소식을 들은 중국의 지식인과 학생들이 두 달 뒤인 5월 4일에 3‧1운동을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으로 평가하고 궐기하였다. 둘째, 1919년 4월 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주도 아래 전개된 비폭력‧비협조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셋째, 1919년 여름에 일어난 베트남의 독립운동, 필리핀 마닐라 대학생과 이집트 카이로 대학생들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3‧1운동이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약소국가의 독립운동에 충격을 크게 주었음은 다시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3) 경북지역의 3·1운동

  경상북도의 만세운동은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시작하여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동 시위까지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시위가 시작된 시기는 서울과 평양보다 일주일 늦고, 마치는 시기는 전국적인 경향과 비슷하다.

  경상북도 지역으로 3‧1운동의 영향이 파급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대구에 파견된 인물이 봉기를 촉구한 경우, 다른 하나는 서울에 올라가 광무황제의 장례에 참여하였다가 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인물들이 시위를 계획하거나 진행시켜간 경우이다.

  앞의 경우는 대구 시위가 대표적이다. 당시 경상남‧북도의 연락책임을 맡은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은 2월 26일 「독립선언서」 600장을 받아, 그 중 200장을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을 통하여 대구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대구에서도 만세시위를 결심하고 같은 교회 장로인 김태련‧김영서 등과 의논하여 3월 3일 서문 밖 장날을 기하여 시위를 일으키자고 약속하였다. 그리고는 동지를 규합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먼저 예수교계와 계성학교 학생들을 권유하여 참여시키고,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 전신)와 신명여학교(신명여자고등학교 전신) 학생들과 제휴하였으며, 대구성경학교에 강습 중인 50여 명의 예수교 신자들 중 20여 명과도 연락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준비과정이 길어지면서 예정보다 늦은 3월 8일 오후 3시경, 김태련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이만집의 만세선창으로 시작되었다. 대구의 만세시위는 학생을 선두로 하는 시위대가 시내로 돌진하여 시위군중의 수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56)

  3월 8일과 10일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경북의 여러 지역으로 시위를 파급시켰다. 즉 11일에 의성군 비안과 포항 및 칠곡에서 시위를 계획하는 모임이 열렸고, 다음 날인 12일에 세 곳에서 동시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57) 비안을 비롯한 이들 세 곳의 시위는 현재의 행정구역상 경북지역(대구 제외)에서 일어난 첫 시위였던 셈이다.

  두 번째 길은 서울에서 국장에 참여했거나 우연히 시위를 구경한 뒤에 그 소식을 전하면서 시작된 경우다. 안동지역이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유림이나 문중에서 국장에 사람을 보내 참례케 하였는데, 이들이 「독립선언서」나 태극기를 들고 돌아와 시위를 일으켰던 것이다. 안동의 예안시위나 임동시위가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의성 비안의 경우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러 간 인물이 그곳의 시위 상황을 보고서 감동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 시위를 일으키게 만든 경우다. 물론 여기에는 대구시위 현장에 참가했다가 돌아와 시위를 촉발시킨 점도 함께 섞여 있다.

  경상북도의 만세시위에서 비교적 격렬한 시위를 보인 곳은 안동‧의성‧영덕‧성주지방이었다. 시위대가 주재소와 같은 일제 식민통치기관에 몰려가서 이를 파괴하는 등 시위의 양상이 자못 격렬하였다. 그리하여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사망자가 발생한 곳은 안동(30명)‧영덕(8명)‧성주(2명)‧의성(1명) 등이었다.

  먼저 의성군은 3월 12일부터 4월 3일까지 21회의 시위가 있었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대부분 예수교인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또 그것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일의 도리원 장터 시위에서는 시위 군중들이 1,00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을 제지하는 경찰에 맞서 주재소에 쳐들어가 유리창과 문을 부수다가 총격을 받았다. 이 와중에서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에 의성경찰서로 가서 구금되어 있는 동지들을 구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들의 무력진압에 밀리면서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시위 군중들도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다음 안동시위는 3월 13일부터 27일까지 15일 동안 11개 지역에서 14회에 걸쳐 일어났다. 이곳은 척사유림의 지역 전통을 바탕으로 그 어느 곳보다 격렬한 투쟁을 펼쳤다. 시위 군중의 공격 대상은 일제의 통치기관이었으며, 그것을 파괴하고 축출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시위 주도세력은 유림세력과 농민이었지만 초기 발발단계에서는 예수교인들의 역할도 컸다. 안동의 만세시위는 21일 각 면으로 확산되었다가, 23일 안동면 장날 거군적인 시위를 벌였는데 이날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안동시위가 이처럼 격렬했기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또 그로 인하여 10여 일 동안 집중적으로 일어난 뒤에는 더 이상 그것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잃었다.

  3월 18일, 19일 이틀에 걸쳐 일어난 영덕의 만세시위는 영해면‧창수면‧병곡면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3개면 주재소와 병곡면사무소 등을 완전히 파괴하는 시위 양상을 보였다. 이곳은 예로부터 동학 농민운동인 ‘이필제난’이 일어난 곳일 뿐 아니라 신돌석 의병장의 활동 근거지이기도 했던 곳으로 항일 저항 기질이 드센 지역적 특성을 들고 있다. 이 같은 격렬한 시위로 말미암아 8명의 사망자와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58)

[표-7] 경북지역 만세시위 발생 현황

지 역

시위 발생 일자

사망자수

비 고

대 구

3‧8/3‧10/3‧30

 

 대구‧경북지역 첫 시위

영 일

(포항)

3‧11(?)/3‧12/3‧22

 

 

의 성

3‧12/3‧13/3‧15/3‧16/3‧17/3‧18/3‧19/3‧20/3‧25/4‧3

1

 

칠 곡

3‧12/4‧9

 

 

안 동

3‧13/3‧17/3‧18/3‧21/3‧23/3‧24/3‧27

30

 

경 주

3‧15

 

 

영 덕

3‧18/3‧19/3‧21/4‧4

8

 

봉 화

3‧18/4‧5

 

 

청 도

3‧18/4‧11/4‧12/4‧20/5‧7

 

 마지막 시위 ; 매전면 구촌동에서 밀

 양군 상동면 매화리 주민들이 만세시

 위(5‧7)

영 주

3‧20/4‧4/4‧9/4‧11

 

 

상 주

3‧23/3‧29/4‧8/4‧9

 

 

김 천

3‧24/4‧3/4‧4/4‧6

 

 

영 양

3‧24/3‧25

 

 

청 송

3‧25/3‧26/3‧27

 

 

군 위

3‧25

 

 

성 주

3‧27/4‧2/4‧3/4‧6

2

 

예 천

3‧28/4‧2/4‧6/4‧12

 

 

고 령

3‧29/4‧6/4‧8

 

 

선 산

4‧3/4‧8/4‧12

 

 

영 천

4‧6/4‧12/4‧13/4‧27

 

 

문 경

(3‧20/3‧25)4‧10/4‧13/4‧15

 

 

달 성

4‧15/4‧26/4‧28

 

 


  성주군의 만세시위는 4월 2일 성주면 장날에 일어난 시위가 가장 격렬하였다. 이날은 유림과 예수교인들이 연계하여 시위를 일으켰다. 이날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부르짖은 만세함성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에 일제 경찰이 위축되자, 대구에서 수비병 15명이 급파되기도 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의 총격으로 시위대 2명이 죽고 7명이 부상을 당했고, 피가 어지럽게 널려있는 현장이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시위로부터 시작한 경북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방보다 늦게 일어났지만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시위까지 두 달 간 계속되어 전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시위를 이끌어간 주도세력은 대개 기독교지도자와 유림세력이었는데, 서울과 달리 천도교의 활동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직접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는 격렬한 양상을 나타내어 타협적인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경상북도의 3‧1운동에 대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기록에 의하면 집회 횟수는 93회, 참가 인원수는 63,678명, 사망자는 1,206명, 부상자는 3,276명, 체포된 자는 5,073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2. 문경지방 3·1운동의 전개와 일제의 탄압

  1) 문경지방 3·1운동의 전개

  (1) 산양장터 시위기도

  문경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시도된 곳은 산양장터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탐지한 일제 경찰에 의해 주동자가 붙잡히고, 결국 거사는 성사되지 못했다.59) 정확히는 누가 주동을 했는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다만, 4월 10일 장날을 기해60) 용궁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산양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일으키려 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당시 산양에는 학교가 없어서,61) 산양 학생들은 2㎞ 정도 거리에 있는 예천 용궁공립보통학교에 다니게 되었다.62)

  산양만세운동 시도의 발원지는 예천 용궁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일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용궁만세운동을 일으키면서 산양에서도 동시 다발적으로 함께 시위를 이끌어가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궁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은 정진완鄭鎭琬(예천 풍양 우망)‧이구성李九成(예천 용궁무이리)‧김칠종金七鍾(예천 용궁 읍부리) 등 세 사람인데, 정진완‧이구성은 당시 4학년이었고, 김칠종은 이미 2년 전인 1917년 3월 24일에 졸업한 졸업생이었다. 이들 중 정진완이 먼저 4월 8일 용궁공립보통학교 기숙사에서 이구성‧김칠종에게 만세운동을 제의하여 시작되었으며, 각자 인원 동원을 위해 구역을 나누어 맡았다. 이때 정진완은 용궁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12일 용궁소재지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을하였다.63)

 

졸업횟수
(졸업생수)

졸업년월일

졸업생성명

주 소

산양면 학생수
(명)

산양면
거주비율(%)

4회(17명)

1916.3.24

柳時河 

산양 존도

1

 

5회(15명)

 

 

 

 

 

1917.3.24

 

 

 

 

 

蔡鴻郁

산양 현리

6

 

 

 

 

 

 

金在德

산양 불암

 

徐南奎

산양 불암

 

蔡鴻朝

산양 현리

 

李壽萬

산양 신전

 

高允桔

산양 신전

 

 6회(11명)

 

1918.3.24

 

李相起

산양 불암

 

3

 

蔡鴻智

산양 현리

 

李慶鳳

산양 신전

 

7회( 8명)

1919.3.21

 

 

0

 

8회(14명)

1920.3.24

鄭聖基

산양 불암

4

 

蔡利鎭

산양 우본

 

安鍾德

산양 불암

 

嚴柱琦

산양 위만

 

9회( 5명)

1921.3.24

千秉翊

산양 부암

1

 

10회(18명)

1922.3.24

李鍾起

산양 불암

 

3

 

金龍煥

산양 불암

 

千悳熙

산양 부암

 

11회(24명)

1923.3.25

千世憲

산양 부암

 

 

 

 

金相根

산양 불암

3

 

 

 

卞鍾泰

산양 진정

 

 

12회 (5명)

1924.3.24

 

 

0

 

합계 (112)

 

 

 

21

19%


  산양만세운동의 계획단계와 주동인물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나 근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산양만세운동과 관련 있는 단서가 용궁만세운동 판결문에 보인다. 판결문 정진완 심문조서에 “자기는 문경군 산양의 학생들에게도 이 운동을 하도록 선동했다.”고 나와 있기때문이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용궁공립보통학교에는
64) 산양 학생들이 전체 학생의 19% 정도로 약 1/5정도가 되었다. 이들 학생들로 하여금 산양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어내고자 정진완이 영향을 미쳤다는 조서 내용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내용이 없어, 누구와 어떤 연결고리를 통해 거사를 시도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산양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산양장터를 주목하게 된다. 먼저 산양은 지리적으로 문경 영순면‧호계면‧산북면‧문경시 및 예천 용궁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으로 예천‧안동, 북으로는 충북 단양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에 물류가 활발하고 상업 활동이 발달한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다. 예로부터 시장만큼 각종 정보와 소식, 풍문과 유언비어 등이 빠르게 전달되고 다시 확대 재생산되는 곳은 없다. 일상생활과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소문을 비롯해, 국가적 대사에 대한 정보와 소식들까지 모두 시장을 통해 전달되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65) 산양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면 주변지역으로 시위의 파고를 한층 높일 수 있다는 판단도 가능하고, 이점을 시위 주동자들이 십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양만세운동에서 드러나 있지 않은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류시하柳時河이다. 그 또한 용궁공립보통학교를 1914년 3월 24일 제4회로 졸업한 산양 존도 사람으로 정진완과 내외종간이다. 그는 정진완보다 4년 앞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서 고보를 다녔고66), 후일 일본 와세다 대학을 다닌 것으로 알려진다.67) 류시하가 산양만세운동에 직접 관련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풍산류씨세보豊山柳氏世譜 권4(2007.7.12발행) 724쪽에 그에 대한 기록으로 ‘기미삼일운동가담 투옥己未三一運動加擔投獄’이 있어 가능성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68) 이로 미루어 볼 때, 정진완이 만세운동 일으킬 생각을 처음 가졌을 때, 류시하와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었을 개연성은 높다고 판단된다. 뒷날 류시하가 문경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점촌우체국장(현 문경우체국)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구성의 관사에 찾아와 선거에 대해 이야기하던 도중에 용궁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69)

  이런 몇 가지를 토대로 추정해 본다면 판결문에 나온 것처럼, 용궁만세운동을 주동하고 산양만세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정진완의 배후 인물로 류시하의 역할을 뺄 수는 없을 것 같다. 드러나지 않은 그의 행적을 밝히면 산양만세운동은 실체적 진실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설 것이라 생각된다. 산양만세운동은 용궁만세운동과 같이 사전에 모두 제지를 당해 시위가 좌절되고 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용궁은 태극기까지 제작하고 시위준비를 끝낸 12일 당일 아침에 주동자들이 붙잡혀 시위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산양은 용궁보다 먼저 시위 낌새를 눈치챈 일제 경찰들이 장을 폐쇄하고 주동자를 붙잡아가서 결국 만세운동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2) 산북 김용사(金龍寺) 지방학림70) 학생들의 만세운동

  산양장터 만세운동이 좌절된 3일 후, 산북면 운달산 자락의 산속에 위치한 김용사에서 독립투쟁의 기운이 일었다. 김용사 부설 지방학림 학생 18명이 13일 오후 3시경 수업을 마친 후, 독립시위를 위한 장도에 올랐다.71) 학생들은 태극기 4매를 몰래 감추고 일제 헌병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하리에 가서 만세를 부르기로 논의하고 산문을 나섰다. 이들이 이곡리 석문안의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 때, 김용사 주지이고 교장인 단구短軀의 혜옹慧翁스님이 조랑말을 타고 와서 느닷없이 앞을 가로 막으며 “알았다, 너희들의 뜻을 잘 알았으니 돌아가자.”고 회유반 호령반으로 윽박질러 결국 헌병주재소까지 못가고 도중에 돌아오게 되었고, 만세 함성의 포효는 산골을 진동하지 못한 채 다시 가슴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72)

  그런데 이들 학생들이 태극기까지 준비한 것을 보면 사전에 거사를 위한 준비단계가 분명 있었던 게 틀림없어 보인다. 즉흥적으로 만세시위를 일으킬 정도로 단순하고 무계획적인 학생들이 아니란 사실이 증언과 판결문을 통해 밝혀졌다. 김철‧민동선의 증언에73) 의하면, 1919년 3월 25일 김용사의 공비생公費生으로 불교중앙학림에74) 유학 중이던 전장헌錢藏憲이 구두밑창에 독립선언문 한 장을 숨겨 김용사에 와서 전해주고 다음날 급히 상경한 일이 있었다. 비록 중앙에서 조직적으로 이어지는 거사는 아닐지라도, 주변에서 시시각각으로 만세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서울의 소식과 선언서 한 장의 위력은 요요자적하던 산문을 요동치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서인지 1919년 4월 11일 오후 7시경 김용사 지방학림 기숙사에서 송인수宋仁洙‧성도환成道煥 등 2명이 만세시위를 위한 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이들이 “지금 각지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니 우리도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자.”고 학생들을 부추겨 궐기를 촉구했다. 그때 기숙사에는 최덕찰崔德察 외 십수 명이 있었고, 13일에 일제 식민통치기관인 헌병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기로 날을 잡았던 것이다.75)

  만세운동 당시 김용사 지방학림에는76) 본‧말사에서 파견된 공비생과 신교육을 갈망하던 상주‧문경‧예천 등지 불교신도 가정의 자제들을 합하여 학생 수가 80여 명에 이르렀다.77)수업 연한이 2년이었으니 1개 학년이 한 40명 쯤 되었을 것 같다.78) 이들은 30명이 일단이 되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또 경고문까지 감추어서 떠났다고 증언하니, 18명이란 기록보다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숫자가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주지 교장의79) 느닷없는 저지로 어쩔 수없이 돌아온 다음날 아침 헌병들이 들이닥쳐 학생들을 교실에 몰아넣고 문전에서 차례로 결박하여 27명을 문경헌병대로 잡아갔다.

  문경으로 가자면 새목재[鳥項嶺]를 넘어야 한다. 이들이 김용리와 석봉리 동구를 지나 가파른 산길을 넘어갈 때,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이들 행렬이 지나간 먼발치에서 그만 만세함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일본 헌병들은 ‘칙쇼우[畜生]’라고 외치며 응수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헌병대에 10여일 구치되어 호된 심문을 받은 후 24명은 가까스로 풀려나고, 송인수‧성도환‧김훈영金勳永 등 3명은 상주지청에서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받았다.80)

  (3) 신북(현 문경읍) 갈평리 만세운동

  3‧1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이 강토가 독립만세 함성으로 메아리쳐 갈 즈음, 소백산맥으로 가로막힌 문경에서 가장 험준하고 오지인 신북면(현 문경읍) 갈평리 속칭 ‘갈벌’에서, 일제의 강점에 항거하면서 독립을 쟁취하고자하는 성난 무리들의 만세함성이 울려 퍼졌다. 산북에서 김용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거사 소식이 있은 지 이틀 후인 4월 15일 저녁 8시경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갈평리 만세운동은 문경읍으로 통하는 도로를 닦기 위해 부역 나온 마을주민들 40여 명이 벌인 시위였다. 이날이 갈평장날81)인지라, 시위 군중들은 장터로 몰려가서 시위를 벌이게 되었고 장꾼들도 여기에 호응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 계속 불어나는 군중으로 만세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헌병 3명(일본헌병 1명, 한국인 헌병보조원 2명)이 달려와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들이 마침내 갈평 헌병파견대 쪽으로몰려가자, 주동자3명을 체포하고 위협 발포하여서 시위대들은 흩어졌다.82)

  갈평 만세운동도 외견상으로 볼 때 여느 산촌의 한줄기 바람처럼 일회성 시위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마을 부역꾼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면서 시위를 일으키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한 김병수金炳秀란 인물에 주목하면 시위를 보는 양상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3‧1의거가 일어났던 무렵 갈평리에서는 신작로를 닦기 위해 자주 많은 농민들이 부역에 동원되고 있었다.83) 신작로는 일제 식민통치의 도구로 필요할 뿐 농민들에게 넓은 길이 그렇게 필요할 이유가 없었다. 부역에 강제 동원 되는 일이 잦아지자 불만이 쌓이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러한 때 그들에게 독립의식과 민족정신을 불어넣어주면서 만세시위를 이끌어낸 김병수가 가진 망국의 한은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갈평 만세운동을 주동한 김병수는 경북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에서 태어나 1911년 문경군 신북면 용연리로 이사했고, 만세운동 당시는 평천리에 살았다. 그는 임진왜란 때 봉화의병장으로 순국한 안동김씨 경호景虎의 10대손이자, 보백당寶白堂 계행係行의 4세손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문을 이어온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까운 윗대 직계에서 출사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학문에 매진하는 선비로서의 나약함을 떨쳐버리고 직접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행동하기도 하는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당시 국사國事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고 울분을 달래며 삭이고 있던 중 1908년 4월에 운강 이강년李康秊 휘하의 선봉장 권용일權用佾이 왜적을 토벌하러 봉화에 왔을 때 그곳의 적정을 조사하여 알려주기도 하고, 군자금을 제공하여 의병의 군비를 도우기도 하였다.84) 이로 말미암아 500석 추수하던 가산을 모두 없앴다. 그 뒤 운강의 옥사 소식을 들었고, 나라가 망한 이듬해에 계속되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문경으로 이사하였다.85) 문경에서는 경제적으로 자작농 정도의 가세를 유지하는 살림살이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86) 그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독립의 염원으로 때를 기다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갈평시위로 일제 헌병에 체포된 사람은 김병수와 신태인申泰仁‧전중년全仲秊‧이은화李殷和 등 네 명이었다. 이들은 사전에 서로 밀의를 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중에서 김병수가 주도적으로 거사를 단행하여 시위를 이끌어 나간 듯하다. 체포된 이들은 다음날 문경헌병주재소로 이송되었다.

  신태인‧전중년‧이은화 세 명은 그 후 별도로 소환된 40여명과 함께 조사를 받은 뒤 태형 50대를 맞고 방면되었으나,87) 김병수는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88)

  (4) 문경면(현 문경읍) 만세운동

  문경읍에서도 두 차례 정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문경군내 다른 지역보다는 열흘 정도 앞선 3월 20일, 읍내에서 수천 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폈다는 기록과 3월 25일에는 전군에 걸쳐 각 면마다 산에 태극기를 달아놓고 불을 피워 수백 명씩 모여서 만세를 불렀는데, 헌병들이 쫓아다니면서 태극기를 압수하고 주모자를 검거하였다는 내용이 전부다.89)

  앞의 내용대로라면 문경읍의 만세운동은 문경에서 가장 먼저, 그것도 엄청난 규모로 일어난 시위운동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시위 방법 면에서도 봉화를 올려 각 면과 연계를 도모한 거군적인 성격을 띤 조직적인 시위로 생각된다. 그러나 시위의 규모와는 달리 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고 단편적이다. 더구나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주동인물 또한 마찬가지다.

  현지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찾기 위해 증언자를 찾기도 했다.90) 부정확 하더라도 단편적인 조각이라도 건진다는 데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전해 듣거나 기억하고 있는 증언자가 없어서 문경읍 만세운동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문경읍 만세운동을 기록한 자료인 이병헌의 『삼일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 기록들이 모두 자신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사건 현장의 기록들을 모아서 편찬한 자료인 만큼 어느 정도 사실이 부풀려진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자체가 전혀 근거 없는 사실일 순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자료는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뒤의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시기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감안한다면, 문경읍의 만세운동이 기록상에서 다소 과장된 면은 있더라도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본다. 다만 차후에라도 구체적인 자료가 찾아지면 정확한 사실 규명이 이루어지리라 본다.91)

  2) 문경지방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

  4월 10일 문경 산양장터에서 만세시위 움직임이 감지되자, 일제 경찰이 가장 먼저 취한 조취는 시장을 폐쇄하여 장이 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92)

 

일제강점기(1906~1944) 문경군내 식민통치기관 현황

기 관 명

설치(개국‧개설) 연대

기 관 명

설치(개국‧개설) 연대

문경우체국

1906.12.1

산양금융조합

1928.11.28

문경‧농암‧산북‧동로

헌병파견대93)

1910

갈평주재소

1932

문경금융조합

(문경면)

1911.10.14

점촌우체국

1933.3.11

산양주재소

1912

곡물검사소

(점촌출장소)

1936

가은주재소

1914.2.13

문경삼림조합

1936

마성주재소

1915

문경농지개량조합

1941

문경 등기소(상리)

1916

동로우체국

1944

 ※자료 : 문경시, 『사진으로 보는 문경의 근대 100년사』, 2005, 8-16쪽의 「근대문경의 연표」참조.

 

  시장은 다중이 모여 상거래를 하는 공간이지만, 각종 정보와 소식 등이 빠르게 전달되고 확대 재생산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역할 뿐 아니라, 특별히 군중을 모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원 동원이 되기 때문에 3‧1운동 때 이곳이 흔히 시위장소로 사용되었다.94) 일제는 이러한 시장 기능의 중요성을 간파한 나머지 일찍부터 식민지 경제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과 병행해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시장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일제는 이를 바탕으로 1914년 9월에 조선총독부령 제136호로‘시장규칙’을 제정‧반포했다. 이에 근거해서 모든 시장을 허가제로 하고 시장운영의 공영제를 근간으로 식민권력의 영향아래 조선의 시장을 통제하였다.95)

  일제가 산양시장을 폐쇄한 것도 ‘시장규칙’에 근거한 조치였다. 이 규칙에서는 시장을 개설하는 것도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도장관(도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또 공익상 필요할 경우 도장관은 허가 취소 또는 이전 등을 명령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시장은 일제의 식민정책과 방침에 의해 언제든지 폐쇄‧정지될 수 있었다.96) 이로써 산양뿐 아니라 한국내의 모든 시장은 그들의 통치전략의 범주 안에 있을 때만 시장의 기능을 다할 뿐이었다.

  시장을 폐쇄하여 기능을 정지시켰을 때 지역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장이 물건을 사고 파는 공간을 넘어서 일상의 중요한 생활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는 만세운동을 진압하고 또한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시장의 개시를 중지하거나 아예 폐쇄시킨 사례가 자주 나타난다. 충청남도의 경우를 보면, 만세시위를 진압할 목적으로 도내 40개소의 시장의 개시를 중지시켜 시위가 현저히 줄어, 4월 12일 이후에는 소요가 한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장의 폐쇄를 해제하고자 할 때는 시장 관계인과 그 지방 유력자가 나서서 시위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연명으로 도장관에게 제출해야 가능했다. 시장이 개시되지 않으면 당장 백성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어 지방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음으로 지방 유력자들이 나서서 하루라도 빨리 개시하기를 바라게 되었다.97) 일제는 이러한 간교한 통치책으로 식민지 백성을 옥죄며 독립만세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술책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4월 13일 김용사 지방학림학생들의 만세시위는 교장의 만류로 대하주재소까지 못 가고 중도에서 돌아왔지만 다음날 27명이 헌병대로 끌려갔다. 이들은 헌병대에 10여 일 구치되어 호된 심문을 받은 후 24명은 가까스로 풀려 나왔으나 송인수‧성도환‧김훈영 등 3명은 상주지청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98) 이들 중 송인수‧성도환이 받은 재판의 결과를 살펴보자.

 

이 름

나이

주 소

죄 명

형 량

판결처

판결일자

송인수

24

경북 문경군 산북면 김용리 김용사지방학림

보안법위반
불온언동선동

징역6월
집행유예2년

대구
복심법원

1919년
6월 3일

성도환

 

경북 문경군 산북면 김용리 410

보안법위반
불온언동선동

징역6월
집행유예2년

대구
복심법원

1919년
6월 3일

 ※ 자료 : 송인수‧성도환의 대구복심법원 판결문과 수형인명부, 재소자카드 등을 참고.

 

  이들 두 사람은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재판받기까지 달포정도의 기간 동안에 당한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반면, 재판까지는 가지 않고 헌병대에서 조사받고 풀려난 24명 중 현재까지 밝혀진 사람은 민동선‧김철‧최문석‧김경천‧장석홍 등인데, 이들은 그 후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99) 일반적으로 일제 식민통치권력이 주민의 일상으로 침투하는 경로는 면사무소(행정)‧주재소(치안과 행정원조)‧금융조합과 농회(경제)‧학교(이데올로기)‧관설단체(사회동원)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 조선총독부의 정책이 조선인의 일상에 침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동력의 하나가 바로 헌병경찰제였다. 당시 헌병경찰의 주요 정보수집대상은 주로 교육과 종교분야였다. 일제 무단통치시기에 사실상 모든 결사와 집회가 금지된 상태에서 학교와 종교단체만이 대중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주요 정보수집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100) 김용사 지방학림은 이 두 가지 모두 해당되는 곳인 만큼 일제 경찰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비록 만세시위를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또 학생들일지라도 주동자에 대한 처리는 엄중하게 다스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에 체포된 만세운동의 주동인사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처리되었다. 첫째로, 붙잡힌 만세운동자에게 갖가지 고문을 가해 주동 인물을 가려낸 뒤에, 일부는 석방하고 나머지는 검찰에 송치했다. 둘째로 검찰에 송치된 사람 중에서도 신문결과에 따라 그 중 반수 정도는 태형笞刑을 과한 뒤에 역시 석방한다. 셋째로, 여기까지 남은 사람은 검찰이 재판에 회부해서 보안법 위반죄‧소요죄‧내란죄 등의 죄목을 씌워 형을 부과했다.

  만세운동으로 형을 받은 이들의 죄목은 대부분 보안법위반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15일 갈평리 만세운동을 주동한 김병수 역시 문경헌병주재소로 이송된 뒤,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8개월 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다음해 1월 12일 만기 출소하였으나 모진 고문으로 병을 얻어 여생을 울분으로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함께 시위를 주도한 인물로 분류된 신태인‧전중년‧이은화 등은 재판까지 가지는 않고 태형 50을 받고 풀려났다.101) 사실 만세운동자들에게 가장 많이 적용되는 형이 태형이었다.

  태형은 조선인을 식민통치하는 수단이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신속‧ 강력한 고통을 주고 부족한 감옥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시행된102) 비인도적인 형벌로서, 태형은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에만 남아있던 전근대적인 행형제行刑制였다. 일제 헌병경찰은 영장 없이도 피의자를 3개월 이하의 구류나 100엔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구류 1일 또는 벌금 1엔을 태 1도로 환산하여 집행할 수 있게 했다. 일제는 만세운동에 대한 탄압에 이 태형제도를 적용하여 모든 연행자와 구속자에게 임의로 가혹한 태형을 가하여, 장독杖毒으로 석방 후에도 몇 달 혹은 몇 년을 병석에 눕게 만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불구자가 되거나 죽기도 하는 일이 속출했다.103)

  1910년 총독부령으로 경찰서장과 헌병분대장에게 주어진 태형령은 1920년 4월 1일까지 시행되었으며, 만세운동 관련자들이 대부분 이에 근거해서 처형되었다.104)

 

  3. 문경지방 3·1운동의 성격

  1) 시위주도 세력의 성격

  문경지방 만세운동 시위 주도세력은 크게 학생과 양반으로 나타난다. 4월 10일 산양장터에서의 거사 기도와 13일 산북시위는 학생들에 의해 계획되어 추진된 만세운동이고, 15일의 갈평시위는 이전 시기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그 지방 양반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경북 북부지역에서 주로 시위를 주도한 유림세력이나 기독교도들의 활동이 문경에선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산문에서 불교 지방학림 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산북 만세운동이 눈길을 끈다.

문경지방 만세운동 주도자 현황

지역

주동자

나이

신 분

주 소

시위
장소

시위
일시

수형량

판결처

비 고

산양

정진완

18세

보통학교학생

예천 풍양 우망리(용궁 읍부리 거주)

산양장터

1919.
4.10

징역1년6월
집행유예2년

상주지청대구복심

시장 폐쇄
거사 미수

산북

송인수

24세

김용사지방학림학생

문경 산북 전두리

대하리헌병파견소

1919.
4.13

징역6월
집행유예2년

상주지청대구복심

교장 만류
도중 귀환

성도환

 

문경 산북 김용리

김훈영

 

 

집행유예
1년?

 

신북(문경읍)

김병수

41세

양반

문경 신북 평천리

갈평장터

1919.
4.15

징역8월

상주지청

경찰의 위협발포

신태인

 

 

 

 

태50

 

전중년

 

 

 

 

태50

 

이은화

 

 

 

 

태50

 


  문경지방 만세운동은 경북의 다른 지역에 비해 시위의 규모나 강도, 지속성과 저항성에서 약한 편이다. 문경읍의 만세운동은 우선 제쳐두고라도,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펼친 시위는 갈평시위 한 곳이 유일하다. 이는 전 시기 의병투쟁이 휩쓸고 간 이후의 여파로 민족적 에너지가 소진되어 미처 재충전되지 못한 상태에서 맞게 된 만세운동이 충분히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가설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옆동네인 예천 용궁만세운동을 모의하면서 산양시위를 이끌어 내고자 했던 용궁보통학생들에 의해 문경지역 만세운동의 돌파구를 찾아나가게 되었다.

  먼저 산양 만세운동을 이끌어 내는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용궁공립보통학교 4학년 학생 정진완이었다. 그는 용궁만세운동을 주동한 일로 재판을 받았고, 이 일로 말미암아 졸업도 하지 못하였다.105) 그가 시위를 밀의했을 대상자로는 산양에 있는 용궁학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산양장터의 상인들과는 연계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상인들은 시장터가 생계와 직결된 장소이므로, 시장폐쇄를 감수하며 시위를 일으킨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안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3월 21일 안동 임동의 챗거리 장터 만세운동이 본보기가 되는데, 임동이 경북 북부지역 어魚‧염鹽 집산지로서 도‧소매시장이 크게 발달했던 상업 지역이었으나 임동 만세운동에서 상인들이 주도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106) 산양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거사 소식은 장사꾼을 통해 재빨리 주변지역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도해 나간 산북 만세운동을 주목한다. 산북 김용사 지방학림 만세운동은 대구‧경북에서 불교신도들이 집단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사례에 속하는 시위이다. 3월 30일 달성군(대구) 동화사 학생 십여 명이 대구부 시장에서 시위를 했고, 4월 상순에는 해인사 부속학교 학생 수명이 김천군내에 들어와 시위를 시도한 일이 있었을 뿐이다.107) 또한 의성 고운사 지방학림 출신 권이원權二元은 교사 강혜전姜惠典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3월 18일 안동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다가 지방학림이 폐교된 일도 있었다.108) 이런 사례와 비교할 때, 김용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거의 전체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거사에 참여하여 주도적으로 시위를 이끌어 나갔다는데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방학림이란 절에서 운영하는 중등과정의 학교로 주로 불교 신도 가정에서 학생들을 보내는 경우가 많지만 일반 가정에서 다니기도 했다. 절에서 기숙생활을 하고 모든 재정을 절에서 부담하는 지방학림의 교장은 당연히 주지가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지는 학교법과 사찰법[사찰령]을 모두 지켜야 하는 경영자이기도 하다. 김용사 지방학림 교장인 주지 혜옹이 만세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대하리 주재소로 떠난 학생들을 뒤쫓아 가서 설득 반 위협 반으로 학생들을 돌려 세워 만세운동을 중지시킨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제정‧반포하여 사찰의 재산관리권과 주지 임명권도 총독의 권한 하에 두어 한국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용운 등은 불교유신회에서 사찰령 폐지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나 불교계의 친일적 성격은 점점 더해갈 뿐이었다.109) 3‧1운동 무렵에 전통적 민족 종교인 불교가 구조적으로 친일화되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때에 일어난 김용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집단적 만세운동은 일제의 불교탄압에 맞서면서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의거라 아니할 수 없다.

  문경에서 마지막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15일의 갈평시위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수그러져가는 때 터졌다. 경무총감부의 발표에 의하면 “14일부터 15일까지 전도全道 각지마다 평온하게 되었고, 다만 수십 명 군중이 만세를 부른 곳이 몇 곳 있었으나 헌병 경찰관이 오는 그림자만 보면 곧 도망가게 되었다.”라고 안도하는 분위기가 감지될 정도다. 이러한 때 갈평에서는 일제 말단 식민통치기관인 헌병파견대로 시위대들이 돌진하여 일제의 지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거사를 자행하였다. 거사를 주도하여 이끌어 나간 사람은 일찍부터 일제의 침략행위를 철저히 배격하고 응징코자 노심초사하며 행동으로 실천했던 양반출신 김병수란 인물에 의해서였다.

  김병수는 봉화에서 1908년 후기의병에 군자금을 제공하여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적극적인 투쟁정신을 보여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더 이상 그곳에서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고, 문경으로 이사를 하여 때를 기다리던 중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의병항쟁에서의 참여가 항일지하운동 성격이었다면 만세운동에서는 선두에서 이끌어가는, 한층 강화된 투쟁 양상을 나타내었다고 보여진다. 의병투쟁에 참여하고 또다시 만세운동이란 거족적인 항일투쟁 대열에 앞장선 경우가 흔치 않다.110)

  문경 갈평만세운동은 유림이라는 학적‧족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산골벽촌에서 망국의 한을 민족의 독립이라는 명제로 풀어내고자 사력을 다한 지방 양반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그는 1944년 임종에 이르러서까지 맏아들에게 왜적토벌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2) 문경지방 3·1운동의 특징

  문경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은 문경‧산양‧산북‧신북 등 네 곳이며, 만세운동을 펼쳤던 기간도 3월 20일부터 4월 15일까지로 타 지역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또한 시위의 규모나 강도强度도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이고 지역 연계성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평화적인 시위 형태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일부지역에 편중하여 또한 소규모의 인원이 참여하는 만세운동이었지만, 몇 가지 특징들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일제가 ‘시장폐쇄’라는 간교한 시위탄압 방법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저지코자 했다는 점이다. 이 방법을 충청남도에서는 몇 번 시도하여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적이 있었으나, 경북에서 이렇게 개시를 중지하고 시장을 폐쇄하는 조치를 쓴 적이 없었다. 시장이 개시되지 않으면 당장 백성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지방 경제가 일시에 마비되어 많은 사람들이 생활에 위협을 받는 생존차원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간교한 탄압책으로 식민지 백성을 옥죄며 독립만세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술책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둘째, 불교 사찰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3‧1운동 무렵, 전통적 민족종교인 불교가 구조적으로 친일화 되어 만세운동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때에 불교종단의 방침과는 상반되게 김용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점은 경북에서 첫 사례로 확인된다. 김용사의 공비생으로 불교중앙학림에 유학 중이던 학생에 의해 독립선언문서도 전달되어 시위를 사전에 계획적으로 추진하였지만 주지 교장의 회유와 협박으로 만세운동을 펼치진 못했다. 하지만 불교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헌병파출소까지 가서 시위를 벌이려 산문을 출발했다는 점은 민족문제가 종교적 가치보다 상의 지향점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증거이다.

  셋째,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향반鄕班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갈평의 만세운동은 후기의병 때에 전 재산을 정리하여 의병의 군자금으로 제공한 김병수가 그 후 문경으로 도피하여 다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시위였다.

  의병투쟁에서 시작하여 만세운동까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치기란 목숨을 담보한 예사 결단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행동하는 민족적 양심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문경지방 만세운동도 타 지역과 같이 장이 열리는 시장터에서 시위를 벌이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산양이나 갈평 만세운동이 그러하였는데, 시장은 상인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어서 특별한 조직이 없더라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특히 산양은 시장이 크게 활발하여 시위를 주변으로 확산시키는 데도 더없이 유리한 이점을 갖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감지한 일제경찰의 신속한 저지로 장터에서 시위자체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 뒤 문경지방의 만세운동을 열어가는 물꼬 구실을 맡았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1) 조선총독부,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1912, 683-688쪽.

2) 越智唯七 編著,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1917, 554-558쪽.

3) 朝鮮總督府, 『慶北大鑑』中 韓國地理風俗叢書(61), 1936, 1236쪽.

4) 이윤갑, 「한국근대의 상업적 농업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36쪽.

5) 慶尙北道, 『慶尙北道統計年報』, 1918, 30-33‧47-53쪽.

6) 慶尙北道, 『慶尙北道統計年報』, 1918, 46-62쪽.

7) 1910년대 문경의 자소작농의 비율

년도

지 주

자 작 농

자 소 작 농

소 작 농

전국

경북

문경

전국

경북

문경

전국

경북

문경

전국

경북

문경

1917

2.8

2.3

1.9

19.6

13.9

14.4

40.2

50.8

56.1

37.4

32.9

27.7

※ 자료 : 慶尙北道, 『慶尙北道 統計年報』, 1918, 222-223쪽; 大邱;慶尙北道, 『慶尙北道 農務統計』,1920‧1931‧1938.

8) 慶尙北道, 『慶尙北道 統計年報』, 1918, 223쪽(백분율은 소수점 둘째자리에서 반올림한 수치임).

9) 慶尙北道, 『慶尙北道 統計年報』, 1918, 218-219쪽.

10) 본고, 「1910년대 일제의 식민정책과 문경」과 관련한 부분은 아래의 자료를 참고하였음.강윤정, 「식민지 상업적 농업의 전개와 농민층 분해-1920년대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이윤갑, 「한국근대의 상업적 농업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11)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과 이념은 장석흥, 「한국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 1998;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징—국내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삶과 민족운동』, 景仁文化社, 2005; 趙東杰, 『韓國民族主義의 發展과 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93; 趙東杰, 「한국근현대사 總說」, 『韓國近現代史의 探究』, 景仁文化社, 2003; 한시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일제강점기한국인의 삶과 민족운동』, 景仁文化社, 2005 참조.

12) 권대웅, 「일제하 항일독립운동단체 민단조합」,《한국학보》74, 일지사, 1994, 100-101쪽;이하 민단조합과 관련하여 특별한 각주가 없는 부분은 이 연구에서 가져왔음.

13) 김희곤‧강윤정, 『오미마을사람들의 민족운동』, 지식산업사, 2009, 50-55쪽.

14) 「(1918.3.11), 不穩言動者發見處分의 件」, 현대사자료 25, 조선 1, 『3‧1운동편』(1), 50쪽.

15) 趙鏞弼(1867.8.7~1946.6.13)은 예천출신으로 1907년 8월 이강년이 창의하자 召募로 참여하였다. 그 후 그는 광복회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광복회 모의장소로 제공하며 蔡基中·鄭世汝·尹昌夏 등과 함께 친일부호에게 보낼 군자금 모집의 경고문을 작성한 후 수십 통을 인쇄하여 발송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7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6) 趙東杰, 「大韓光復會의 結成과 그 先行組織」,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지식산업사, 1989.

17) 대동상점의 규모나 설립 배경 등은 梁漢緯의 『梁碧濤公濟安實記』; 慶尙北道警察部의「大東商店件」(『高等警察要史』, 1934, 264쪽), 大正 7年 刑控 第413號(「判決」 朴濟璿의‘保安法違反事件’); 權大雄의 「1910年代 慶尙道地方의 獨立運動團體 硏究」(영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61-63쪽) 참고.

18) 趙東杰, 「大韓光復會 硏究」,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89,291-302쪽.

19) 趙東杰, 「大韓光復會 硏究」,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89,283-291쪽.

20)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180‧183쪽; 권대웅, 「일제하 항일독립운동 단체민단조합」, 《한국학보》74, 1988, 105-106쪽.

2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사전』(3), 2004, 467-468쪽.

22) 박노창은 1914년 중국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이도구二道溝에서 동지들과 함께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던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23) 「판결문」(1920. 12. 7, 경성지방법원).

24)「판결문」(1922. 4. 13, 경성복심법원)‧「형사사건부」(1922. 4. 14).

25) 김희곤‧강윤정, 『오미마을사람들의 민족운동』, 지식산업사, 2009, 61쪽.

26) 趙東杰, 「臨時政府 樹立을 위한 1917년의 大同團結宣言」,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 硏究』, 지식산업사, 1989, 314-338쪽.

27)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내용 중 식민지 상태에 있던 약소민족에게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제5조와 제14조였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미국의 정책은 아니었다(프란크볼드윈, 「윌슨‧민족자결주의‧3‧1운동」,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동아일보사, 1969참조).

28) 金喜坤, 「同濟社와 상해지역 독립운동의 태동」, 『中國關內 韓國獨立運動團體硏究』,지식산업사, 1995.

29) 여운형, 『夢陽呂運亨』, 1967, 27쪽; 國會圖書館 編, 「강화회의에 있어서의 한인 독립운동자의 행동에 관해 1922년 10월19일자로 조선총독부경무국장이 외무차관에 통보한 요지」, 『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191쪽.

30) 金正明, 「在日朝鮮人留學生2‧8獨立宣言書發表の件」, 『朝鮮獨立運動』1, 국학자료원,1980, 300쪽; 田榮澤, 「東京留學生의 獨立運動」,《新天地》1권 3호, 1946, 9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6, 1983, 892-893쪽;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2, 1971, 654-657쪽.

31)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130쪽; 주요한 편, 「安昌浩豫審訊問記補遺」, 『安昌浩全書』, 샘터사, 1979, 897-898쪽; 국사편찬위원회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1971, 124쪽.

32) 國會圖書館 編, 「재미한국인 鄭翰景의 여권발급청구에 관해 1918년 12월 24일 在紐育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전보한 요지」, 『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7-8쪽.

33) 최린, 「자서전」,《한국사상》4, 1962, 164쪽; 『장효근일기』, 1918년 12월 15일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6, 1983, 863쪽.

34) 김희곤,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中國關內 韓國獨立運動團體硏究』,지식산업사, 1995, 95-96쪽.

3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6, 1983, 891-892쪽;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김형기 등 학생단)」, 『독립운동사자료집』5, 1983,69쪽.

3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2, 1971, 655쪽.37) 田榮澤, 「東京留學生의 獨立運動」,《新天地》1권 3호, 1946, 98-99쪽.

3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2, 1971, 657쪽.

3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 6, 1983, 867쪽;李炳憲 編著, 「손병희 조선 독립을 선언함」, 『3‧1운동비사』, 삼일동지회, 1966, 64쪽.

40) 李炳憲 編著, 「1919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예심에서의 최린 취조서」, 『3‧1운동비사』,삼일동지회, 1966, 589쪽; 「1919년 3월 7일 경무총감부에서의 최남선 취조서」, 『3‧1운동비사』, 삼일동지회, 1966, 659쪽.

41) 李炳憲 編著, 「1919년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의 검사의 함태영 취조서」, 『3‧1운동비사』, 삼일동지회, 1966, 64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 3‧1독립소요사건」,『독립운동사자료집』6, 1983, 874쪽.

42) 신용하, 「3‧1독립운동 발발의 경위」, 『일제강점기하의 사회와 사상』, 신원문화사, 1991,60-66쪽.

4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손병희 등 48인), 『독립운동사자료집』5, 1983,19쪽; 김법린, 「3‧1운동과 불교」,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동아일보사, 1969, 75-77쪽.

4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판결서」(손병희 등 48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83, 46-47쪽.

45) 李炳憲 編著,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예심에서의 한용운 취조서」, 『3‧1운동비사』,삼일동지회, 1966, 616-61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손병희 등 48인), 『독립운동사자료집』5, 1983, 20쪽.

46) 李炳憲 編著, 「권동진 선생 취조서」, 『3‧1운동비사』, 삼일동지회, 1966, 180쪽.

47) 최린, 「자서전」,《한국사상》4, 1962, 175쪽.

48) 李炳憲 編著, 「1919년 3월 8일 경무총감부에서의 검사의 이갑성 취조서」, 『3‧1운동비사』,삼일동지회, 1966, 294-95쪽.

49) 이정은, 「3‧1운동의 지방확산 배경과 성격」,《한국독립운동사연구》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50) 반병률, 「이동휘와 3‧1운동」, 『우송 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한국민족운동사연구』,나남출판사, 1997.5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 임정편 Ⅳ, 313쪽; 방선주, 「재미 3‧1운동총사령관 백일규의 투쟁 일생」,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탐구당, 1992.

52) 이정은, 「3‧1운동 학살만행 사례」,《역사비평》45, 역사문제연구소, 1988; 이덕주, 「3‧1운동과 제암리사건」,《한국기독교와 역사》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53)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박은식전집』상, 단국대출판부, 1975, 534-555쪽.

54)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박은식전집』상, 단국대출판부, 1975, 637쪽.

55) 최용수, 「조선 3‧1과 5‧4운동의 비교 - 중국 사료를 중심으로 하여」,《國史館論叢》49,國史編纂委員會, 1993.

5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1983, 348-349쪽; 李邦雄, 「慶北地方 三‧一獨立運動에 對한 硏究」, 계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3, 12-16쪽.57) 3월 11일에 영일군 포항면 북본동(현 포항시)에서 예수교인들과 교사들에 의해 이미 만세운동이 이미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1983, 442쪽; 이병헌, 『三‧一獨立運動秘史』, 1958, 923쪽).이와 다르게 일제기록 가운데에는 포항에서 3월 11일에 시위가 일어나려 했으나 미연에 방지되었다는 보고도 있다(金正明, 『朝鮮獨立運動』 1, 原書房(東京), 1967, 354쪽).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새로운 자료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5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1983, 426쪽.

59) 國史編纂委員會, 『日帝 侵略下 韓國 三十六年史』四, 探究堂, 1969, 338쪽;《매일신보》1919년 4월 15일자, ‘장이 못서고 말았다’; 李炳憲, 『三‧一運動秘史』, 삼일동지회, 1966,829쪽; 북경에서 발행되는《惟一日報》1919년 4월 26일자, ‘朝鮮獨立의 活動’ 란에“문경군에서는 14일(4월) 山陽市場에 約一千餘명이 만세를 大呼함에 일본 보병과 헌병이 힘을 합하여 이를 擊하여 死者 9인 重傷者 18인 逮捕된 자 6인을 내고 市場은 閉鎖하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60) 지금 산양장은 서지 않는다. 그러나 산양이 교통요지이기에, 특히 6‧70년대엔 장의 규모면이나 물동량에 있어서 주변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큰 장시를 이루었다. 당시 설장일이 2‧7일이라고 하는데 음력으로 따져 봐도 4월 10일(음력 3월 10일)은 장날이 아니다. 하지만 기록에는 모두 장날로 나온다. 신문기사 《매일신보》마저도 그날을 장날로 표기하였으니, 아마도 만세운동 당시 4월 10일을 장날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일제시기 재래시장 개시일을 보통 음력으로 설장하였으나 총독부에서는 1938년 1월 1일부터 일제히 양력으로 설장하기로 결정하고 독려하였다(《동아일보》 1937년 10월 12일자).

61) 산양공립보통학교는 1930년 8월 25일에 설립됨(문경시, 『사진으로 보는 문경의 근대100년사』, 2005, 참조).

62) 현재 용궁초등학교에 보관중인 졸업대장에 등재된 산양면 출신의 졸업생 명단은 아래와 같다. 1913년 3월 24일 제1회 졸업생으로 4명을 배출한 이후 2회에 2명, 3회에 7명까지는 산양면 출신 학생이 없고 4회부터 11회까지 산양면 학생들이 나타난다.

63) 大邱地方法院安東支廳判決文(大正 8년-1919년 4월 29일).

64) 3‧1운동 당시 보통학교 학생은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연령대로 지금의 초등학생보다 나이가 많음을 아래 표로써 확인된다.

                             <공립보통학교생도 평균연령>            (大正8년 3월말)

구 분

제1 학년

제2 학년

제3 학년

제4 학년

경 북

11.3세

13.9세

15.3세

16.3세

전국평균

11.4세

12.1세

14.1세

15.3세

- 자료 : 『朝鮮總督府統計年譜』, 大正 9년 3월 발행 참조.

65) 박은숙, 『시장의 역사』, 역사비평사, 2008, 39쪽.

66) 류시하가 ‘한성고보’를 다녔다고 하여 확인해보니 ‘한성고보’라는 학교는 없고 『京畿七十年史』에서 ‘경성고보’(현 경기고) 졸업생 명단을 찾아봐도 들어 있지 않았다.

67) 류은하(71세, 류시하와 11촌)‧柳漢永(74세, 류시하의 종손자) 증언(2008.1.16 전화통화).류시하는 1954년 문경에서 국회의원에도 출마하여 낙선한 경력이 있다.

68) 종손자 류한영씨도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는 것은 서울이 아니고 시골(필자 주-예천 용궁이나 산양)이라고 증언했다.

69) 李昇熙씨 증언(이구성의 子, 경북 경산시 정평동 태왕귀빈타운 101/505. 2009년 1월중 여러 차례 전화통화 및 면담).

70) 조선총독부로부터 불교지방학림 설립인가가 난 것은 1915년 7월 15일이다. 당시의 30본산 연합사무소의 임원 및 常置員들은 중앙학림 인가원을 제출하기에 앞서, 1915년 7월 3일 조선총독부에 지방학림학칙강령 승인안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7월 15일 승인을 받은 후 각 본사에 이를 시달하여 각 본사로 하여금 지방학림을 설립토록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학칙강령의 주요 내용은 제1조에 지방학림은 조선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할 預修를 위함을 목표로 한다. 제2조에서 수업연한은 3년으로, 학기는 3학기제로 규정하고 있으며 제5조에 입학자격을 연령 13세 이상으로, 보통학교 졸업자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규정하여(東大七十年史刊行委員會, 『東大七十年史������(1906~1976),1976, 29쪽) 중등과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김용사 지방학림은 2년 과정의 학제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71) 1918년 김용사 경내에 중등정도의 학과교수를 목표로 ‘사립김용지방학림’을 설립하여김용사 본‧말사 공동으로 경비를 부담하여 운영하다가 1928년에 교과내용을 초등과로 변경하고 말사와 절연하고 학교건물을 산북면 거산리로 이전하면서 김용사‧대승사 양 사찰과 산북면 석문안 주민이 협력하여 운영하면서 학교장은 김용사 주지가 겸직하였다. 그 후 1940년에 경상북도에 기부체납을 하여 ‘김용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盧時學, 『鄕聞錄』, 泰興印刷社, 1973, 433쪽).

72)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38-39쪽;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제3권 삼일운동사(하), 421쪽; 聞慶文化院, 『聞慶大觀』, 1986, 85쪽; 聞慶市, 『聞慶誌』(上),2002, 243쪽;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구,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1991, 178쪽; 윤보현, 『대한독립운동약사』, 대한독립운동약사간행회, 1980, 93-94쪽.

73) 1991년 3월에 崔昞植(문경 영순중학교 교감)이 당시 시위에 가담했던 생존자 중 金澈(당시 88세)의 진술과 閔東宣(당시 91세)의 서찰을 통해 증언한 사실을 정리한 글(店村聞慶文化院, 「김용사 지방학림 만세사건」,《계간 점촌‧문경문화》제13호, 1991, 4-5쪽)이있어, 이를 통해서 김용사 지방학림 만세운동의 전모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74) 불교지방학림 설립인가를 얻은 후, 1915년 10월 4일 선교양종 30대본산 연합사무소는 위원장 강대련의 명의로 조선총독부에 사립불교중앙학림 설치 인가원을 제출하여 11월 5일 자로 중앙학림 설립 인가(학제717호)를 받았다. 중앙학림은 매년 각사 즉 30대

75) 「송인수 판결문」(1919. 6. 3, 대구복심법원).

76) 3‧1운동 이후 김용사 지방학림은 입학자 수가 크게 증가하여 학교를 확장하기 위한 협의회를 개최하였다는 1921년 6월 25일자《조선일보》기사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慶尙北道 聞慶郡 山北面 金龍寺에서 學校를 設立하여 十餘星霜을 經過하도록 靑年子弟들 敎育하여 옴은 기히 報道하였거니와 今年에는 入學者數는 크게 증가하였으나 학교가 狹小하여 다 받지는 못하게 됨으로 많이 拒絶하였는데 이제보다는 크게 擴張하기 爲하여 金龍 本末兩寺間에서는 次協議를 開催하였다더라.”

77) 일제강점기 문경군내에 설립된 공립보통학교 현황

78) 김용사 지방학림의 교사진은 나중에, 동국대 초대총장을 역임한 權相老, 불교출판사 만상회를 운영한 安震湖와 일본인 西澤, 小野松藏 등 4명이었다(店村聞慶文化院,「김용사 지방학림 만세사건」,《계간 점촌‧문경문화》제13호, 1991, 4쪽).

79) 1923년 8월 31일자《조선일보》에 ‘김용사 주지 사직 권고’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내용은 “경북 문경군 김용사 주지 金慧翁씨는 주지의 직임을 가지고 있은 지 십여 년에 무슨 가업도 없으며 겸하여 본말사 승려간의 여론이 일어나서 사직권고를 하였다는데 그 이유인즉 다음과 같다더라. 一. 職權濫用의 件, 二. 本末寺 與論의 無視의 件, 三.老病으로 事○上支○이 多한 件’ 등이다.

80) 崔昞植, 「김용사 지방학림 만세사건」,《계간 점촌‧문경문화》제13호, 店村聞慶文化院,1991, 5쪽.

81) 지금 갈평장은 서지 않는다. 노인회관 촌로들에게 확인하니, 과거 설장일이 4‧9일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재래시장 개시일을 보통 음력으로 설장하였기에 음력으로 따져 봐도 4월 15일(음력 3월 15일)은 장날이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록(『獨立有功者功勳錄』 第3卷과 『聞慶大觀』)에는 15일이 갈평장날로 나온다.

82) 國家報勳處, 『獨立有功者功勳錄』 第3卷, 1987, 372-373쪽;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38-3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삼일운동사(하), 1983, 421쪽; 聞慶文化院, 『聞慶大觀』, 1986, 85쪽; 聞慶市, 『聞慶誌』(上), 2002, 243쪽; 윤보현, 『대한독립운동약사』, 대한독립운동약사간행회, 1980, 93-94쪽.

83)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구,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1991, 178-179쪽

84) 문경문화원, 「義士 金炳秀 先生」, 『내고장 전통 가꾸기』(2) 참조; 國家報勳處, 『獨立有功者功勳錄』第3卷, 1987, 372-373쪽.

85) 김계한, 「문경‧갈평의 독립만세 사건」,《계간 점촌‧문경문화》제13호, 店村聞慶文化院,1991, 6쪽.

86) 김병수의 경제적 형편에 대한 내용은 그의 손자 김정진이 2009년 1월 2일 전화로 증언함.

87) 김계한, 「문경‧갈평의 독립만세 사건」,《계간 점촌‧문경문화》제13호, 店村聞慶文化院,1991, 6쪽. 김병수가 만세운동 후 다음날 잡혀갔다는 부분은 김계한의 글 외에도 김병수 의 외손자인 신정씨가 증언하였음(“집에 왔다가 옷을 벗지 않고 서성대기에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으니 누가 날 잡으러 올 것이다.”고 말했다 함. 2009.1.2 전화).

88) 김병수의 「재소자신분카드」 ‘수형이력’란에 ‘보안법위반’, ‘징역 8월’, ‘1919년 5월 12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판결’로 기록되어 있다.

89) 李炳憲, 『三‧一運動秘史』, 삼일동지회, 1966, 829쪽.

90) 자문을 구한 분은 『문경읍지』 편찬을 맡은 정필‧김대경씨와 문경시 ‘향토사연구소장’을 역임한 고재하‧신동철씨 등이었다.

91) 문경읍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흥미있는 기사가 한 건이 있다. 1919년 3월 27일자《매일신보》에 “3월 22일 오전 11시경 문경군 문경면 각서리에서 조선인 가옥에 불이 일어나 60여 호가 전소되고 죽은 이가 2명, 중상자 2명이다. 그때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산으로 불이 옮겨 조령 국유림이 자못 위험하다. 이 큰 화재는 이번 소요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더라(경무총감부 着電).” 이 기사는 일제 경찰이 언론사에 타전한 내용으로, 이번 큰불은 문경 만세운동이 일어난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였고 또한 불길이 조령까지 확산될 정도였다니까 산상 봉화시위 여파로 말미암아 주변으로 번진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더구나 “이번 소요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강조한 부분이 오히려 만세시위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느낌마저 들기도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92)《매일신보》1919년 4월 15일자, ‘장이 못서고 말았다’; 북경에서 발행되는《惟一日報》1919년 4월 26일자, ‘조선독립의 활동’

93) 일본정부는 1910년 6월 15일 ‘軍令陸乙’ 제9호에 의거하여 한국주차헌병대를 사령부-본부-분대-분견소-파견소-출장소의 체계로 갖추었으나, 1918년에 헌병분견소는 헌병주재소, 헌병출장소는 헌병파출소로 개칭하였다(신주백, 「일제의 강점과 조선주둔 일본군」(1910~1937), 『일제식민지 지배의 구조와 성격』, 한일관계사연구논집편찬위원회, 275쪽).

94) 안동에서는 14회의 시위 중 8회가 장날 시장터에서(金元錫, 「안동의 3‧1운동」,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59쪽), 의성에서는 21회의 시위 중 4회(김희곤외, 『義城의 獨立運動史』, 의성군, 2002, 298쪽), 영덕에서는 7회의 시위 중 5회(김희곤외,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242쪽)가 시장터에 일어났다.

95) 박은숙, 『시장의 역사』, 역사비평사, 2008, 292-293쪽.

96) 박은숙, 『시장의 역사』, 역사비평사, 2008, 294-295쪽.

97)《매일신보》1919년 4월 22일자, ‘忠南의 市場停止 解除’.

98) 송인수의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의 주문내용에 보면 “송인수‧성도환 두 명은 각지에서 행하는 운동을 본받아 다중을 선동하여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함으로서…<후략>”라고 기록되어있고 김훈영의 이름이 없다. 그리고 판결문이나 수형인명부 등도 찾을 수 없었다.

99) 店村聞慶文化院, 「김용사 지방학림 만세사건」,《계간 점촌‧문경문화》제13호, 1991, 5쪽. 또 3‧1운동 이 후, 경성에 유학하는 김용사 불교학생들이 강연단을 조직하여 각 지방 순회강연을 다녔다는 신문기사가 있다. 강연단이 7월 26일 예천에 도착하여 불교 포교당에서 강연을 했는데, 연사가 김훈영이라는《동아일보》1921년 7월 31일자 신문기사가 있다. 그때, 강연 내용이 문제가 되어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은 후 다음날 방면되었다고 쓰여 있다.

100) 김민철, 「식민지 조선의 경찰과 주민」, 『일제 식민지 지배의 구조와 성격』, 한일관계사연구논집편찬위원회, 2005, 213쪽.

101) 김계한, 「문경‧갈평의 독립만세 사건」,《계간 점촌‧문경문화》제13호, 店村聞慶文化院, 1991, 6쪽.

102) 『朝鮮彙報』, 1917년 10월호, 57쪽.

103)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朴殷植全書』상권, 단국대출판부, 1976, 580-581쪽.

104)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독립운동총서』2, 1995, 166쪽.

105) 3‧1운동으로 공립보통학교의 취학 아동은 소요의 영향을 받아 예정된 입학자 수에 미달하는 지방이 적지 않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6, 1983, 825-826쪽).

106) 金元錫, 「안동의 3‧1운동」,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42-43쪽.

107) 金正明, 『三‧一獨立運動』3, 原書房, 1967, 297쪽.

108) 金乙東, 『安東版獨立史』, 명문사, 1985, 180‧231쪽.

109) 역사문제연구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웅진출판사, 1993, 159쪽.110) 의병항쟁에 참여했다가 안동 3‧1운동에 적극 활동한 사람은 宋基植‧李相東‧李東欽 등이 있다. 또 임동 3‧1운동의 李康郁과 柳東煥도 의병출신이다. 이강욱은 중기의병 때 金道谷 의진에 참가하여 군량도감으로 활약하였으며, 의진해산 후 임동 위리 골짜기로 이거하여 숨어 지내다가, 일제강점 이후 국권회복의 기회를 찾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할 목적으로 중평리로 나와 음식점을 열어 구국운동의 방책을 논의했다(金元錫,「안동의 3‧1운동」,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18-19쪽).

 


목차역사적배경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