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1920년대 문경지역의 민족운동 /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2014. 5. 14. 17:05나의 이야기






      

목차 Ⅱ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제5장 1920년대 문경지역의 민족운동 

 

  

제1절 일제의 문화통치와 문경사회

 

  1. 문화통치와 문경사회의 변화 

  1910년  1919년 3‧1운동으로 폭발된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는 일제가 ‘문화통치文化統治’로 선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화통치는 1910년대 추진하던 무단통치가 한계상황을 맞게 되자 일제가 선택한 일종의 유화책이었다. 일제는 그 유화책으로 관리채용과 대우에서 민족차별을 철폐하고, 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또한 교육‧산업‧교통‧경찰‧위생‧사회제도를 개선하였으며, 지방자치제로 참정권을 부여하고, 한국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육‧해군 대장으로 총독을 임명하는 정책을 폐지하는 등의 정책을 선언하였다.1)

  그러나 일제가 표면적으로 선언했던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내부적으로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무관총독을 문관으로 바꾼다는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바꾸면서 전국 경찰관서와 경찰관을 3배로 늘렸으며, 부府와 군郡마다 한 개의 경찰서, 면面마다 한 개의 주재소駐在所(오늘날의 파출소)를 설치하여 거미줄 같은 탄압망을 짜놓았다. 그에 따른 경찰비용 역시 1918년 약 800만원이었던 것이 1920년에는 약 2,400만원으로 3배로 늘었다.

  이에 따라 문경군도 경찰력이 증가되었다. 1919년 8월 19일 칙령 제386호 조선총독부지방관 관제 개정에 따라 문경에는 농암‧유곡‧산북‧동로‧신북 5개소에 주재소가 설치되고, 여기에 서장署長 이하 55명의 정원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1920년 6월 11일 경상북도 고시告示 제 67호에 따라 주재소의 위치 및 명칭을 일부 개칭하고, 마성‧가은‧산양‧호계‧영순(영순주재소는 1924년에 폐지됨) 5개소의 주재소를 더 증설하였다. 그리고 순사의 정원도 66명으로 증원하였다.2)

  또 표면적으로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치안유지법(1925)과 같은 법을 제정하여 민족운동가들을 검거‧탄압하였다. 치안유지법은 당시 고조되어 가던 반일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또한 1920년대 일제의 문화정치 영향으로《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와 같은 신문이 창간되었다. 그러나 이들 신문은 심한 검열을 받아 삭제‧압수를 당하거나 정간되는 사건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결국 언론을 허용하되 친일언론으로 길들이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결사나 집회의 조직도 친일단체를 조직하는 데 이용되었다.

  문경군에서도 1920년대 각종 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문경청년회‧가은청년회‧우리청년회‧산일청년동맹山一靑年同盟‧흘령단屹嶺團‧산오소년회山五少年會 등의 단체를 들 수 있다. 또한 일제가 언론 출판에 대한 자유를 허용하면서 1920년대 《동아일보》‧《조선일보》와 같은 신문이 창간되자 문경에도 그 지국이 설립되었다.

  한편 일제는 한국인의 교육열을 억누르기 위해 신교육령(1922)을 발표하였다. 최초의 대학기관으로서 경성제국대학(1924)이 설치되고 전체 학생 정원의 약 1/3정도를 한국인에게 할당하였다.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이 약간 강화되었지만, 한국인 학령아동의 약 18%만이 취학하는 데 그쳤다.그나마 민족교육은 제외되고 일본문화에 동화시키는 교육만이 시행되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공립학교의 교육을 받은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기여하는 측면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본래의 계획대로 지방제도를 일부 개편하고, 거기에 자문기관을 두어 지방자치에 대한 훈련을 한다고 선전했다. 이러한 지방자치제도의 실상을 보면 그 기만성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3‧1운동 후 지방제도 개편과 함께 만든 자문기관은 행정기관에 둔 부府협의회‧면面협의회‧도道평의회와 교육기관에 설치한 학교평의회 등 네 가지였다. 이 가운데 일본인이 많이 사는 부府의 협의회와 도시화 과정에서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가 많아진 전국 24개의 지정된 면面만 선거제였다. 나머지 약 2,500개 보통면의 협의회 회원은 모두 군수가 지명했다. 도평의회의 경우 회원의 2/3를 부‧면 협의회 회원이 뽑은 후보자 중에서 도지사가, 나머지 1/3도 그들의 눈으로 보아 이른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사람’을 역시 도지사가 각각 임명했다. 학교평의회는 부와 군에만 설치되었으며, 학교평의회 부회원은 선거제였으나, 군회원은 면협의회 회원이 뽑은 사람 중에서 군수가 임명했다.

  도지사나 부윤府尹‧군수가 임명하는 회원의 대부분이 친일인사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 선거제의 경우도 일본인의 당선률이 한국인보다 훨씬 높았다. 우선 선거권자가 1년에 부세府稅나 면부과금面賦課金을 5원 이상 납부한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 및 자산가와 부유한 상인만이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다. 1920년의 경우를 예로 들면 한국에 사는 일본인들은 45명 중 1명이 부‧면 협의회 회원이 되었으나, 한국인은 2,800명에 1명이, 그것도 친일인사가 그 회원이 되었다.3)

  2. 일제의 지방자치제도와 문경

  3‧1운동이라는 전면적인 저항에 직면하자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종래 헌병대장이 관장하던 지방경찰기관을 도지사에 귀속시켜 지방자치행정을 확대하겠다고 선전했다. 경찰제도에 있어서도 헌병경찰제는 폐지되었지만 경찰기구(경찰관서‧경찰관 수‧경찰비용)는 3배로 확대되었고, 1부‧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를 확립하여 지방행정 말단까지 경찰망을 확보했다. 다시 말해 헌병경찰기관이 경찰기관과 헌병으로 분리되면서, 경찰기관은 도지사가 관장하는 행정기관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단위 이하에서는 경찰서‧주재소가 군‧면행정기관과 분리되어 실질적으로 강력한 통제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와 더불어 1910년대 ‘군면동리통폐합’과 ‘면제’의 제정으로 지방제도의 골격을 마련하였던 조선총독부는 1920년 다시 제도개정을 단행하였다. 1920년 제도개정의 골자는 한마디로 면에 새로이 ‘면협의회’를 두는 것이었다. 면협의에서는 2,500여 면에, 선거에 의하건 임명에 의하건 각각 8~14명의 협의회원을 두도록 하였는데, 인원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3만여 명의 인물을 면 행정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시키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이 3만여 협의회원에 어떠한 인물들을 참여시키는가에 따라 지방지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3년 임기의 면협의회원들은 1930년 읍면제로의 제도개정 이전까지 4차에 걸쳐 선거 또는 임명되어 면의 운영에 ‘자문’이라는 형태로 참여하였다.4) 문경군 면협의회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한 언급은 어렵다.

  다만 면협의회원 협의에 대한 규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협의회원의 선거‧피선거‧피임명권의 범위가 면부과금 5원 이상을 납부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참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면부과금 5원 납부자란 대체로 4정보의 논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밭을 포함한다면 논 1.8정보, 밭 6.5정보로8.3정보정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선거‧피선거‧피임명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적어도 중소지주에 해당되는 계층이었다.5)

                         [표-1] 문경지역 자산가 분포(1929년)               (단위; 名)

구 분

1만원
이상

5만원
이상

10만원
이상

30만원
이상

50만원
이상

70만원
이상

100만원
이상

200만원
이상

문경

韓人

10

2

3

-

-

-

-

-

15

日人

3

2

1

-

-

-

-

-

6

경북

韓人

1,919

286

112

12

8

5

3

3

2,486

日人

398

98

40

8

3

3

1

1

552

 ※ 자료 :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333쪽.

  문경군도 이와 비슷한 수준에서 면협의회원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일제는 지방행정에 한국인을 회유하고 끌어들여 친일적인 한국인을 양성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인을 통제하는 이중적인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3. 경제수탈 정책의 강화와 문경의 농민들

  1) 1920년대 농업정책과 몰락하는 농민들

  일본은 1910년대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농민들이 도시에 몰려 식량조달에 큰 차질을 빚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이라는 정책을 수립했다. 토지와 농사개량을 통해 식량생산을 증대시켜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1차(1920~1925)‧제2차(1926~1934) 계획이 계속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6년 현재 쌀 생산량은 1920년보다 약 30%가 증가한 데 불과하였으나, 일본으로의 수출량은 약 8배로 증가하였다. 1932~1936년의 쌀 생산량은 평균 1,700만 석인데, 일본으로 가져간 것은 그 절반이 넘는 876만석이었다. 그 결과 한국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20년대의 약 일곱 말에서 네 말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은 1년에 17말을 소비하였다.

  한국인들은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조‧수수‧콩) 등으로충당했다. 한국 농민들은 식량사정만 나빠진 것이 아니라, 과중한 수리조합비 부담으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또한 농업구조와 유통구조까지 쌀 중심으로 개편되어 경제구조의 파행성이 심화되었다.

  결국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1920년대 이후 소작쟁의가 격화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한편, 일본은 일본 자본의 침투를 촉진시키기 위해 회사령을 철폐(1920)하여 회사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완화하였다. 이로써 일본인 자본가의 투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1930년 현재 회사자본의 62.4%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한‧일 합자가 30.8%, 그리고 한국인은 6.4%에 불과하였다.

  투자대상은 주로 상업‧공업‧운수업에 치중되었는데, 공업과 관련된 것으로는 조선수력전기회사에 의한 부전강수력개발赴戰江水力開發(1926)과 함경도 흥남에 건설된 질소비료회사 등 규모가 큰 것이었다.

  한국인이 건설한 회사로서 비교적 대규모의 것은 김성수金性洙가 세운 경성방직주식회사‧대구와 평양의 메리야스공장‧부산의 고무신공장 등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한국인 회사들은 중개상업‧고리대‧토지투기 등 비생산적인 부분에 투자하여 대자본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회사가 크게 늘어남으로써 노동자층은 확산되고 농민‧노동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밖에 일제는 목화재배를 장려하고, 누에고치 생산을 늘려 그 생산물을 헐값으로 가져갔으며, 광업생산의 80% 이상을 독점하였다. 또 연초전매제도(1921)와 교통‧체신의 관영사업을 통해 총독부 수입을 늘리고, 총독부 재정의 80%에 해당하는 액수를 각종 세금을 통해 충당하였다. 총독부는 크게 늘어난 수입으로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를 지원하고 각종 탄압기관을 운영하는 데 지출하였다.

  2) 각종 산업기구의 조직과 문경

  1920년대는 식민지 경영의 근본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탈기구가 더욱 체계화되었다. 일제는 수탈농정을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농민과 농업전반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농업지배기구를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수탈기구가 농회와 금융조합, 산업조합과 같은 각종 농업단체‧산업단체였다. 문경군에서도 이러한 단체들이 하나둘씩 조직되기 시작했다.

  문경군농회는 1926년 문경군청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농회직원임명‧예산집행‧사업시행 등 거의 모든 활동이 관 주도로 통제‧운영되는 관제조직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주요업무는 농사개량을 위한 홍보선전사업, 비료자금의 공동구입 알선, 면화‧양잠공판사업 등이었다. 즉 일제는 ‘농회’를 통해 일제의 주요 수탈품목이었던 쌀‧면화‧고치를 재배하는 농민들을 통제하였으며, 생산된 농산물은 지정공판제를 통해 싼값으로 수탈해 갔다.

  문경군의 산업조합은 점촌산업조합이 손에 잡힌다. 문경군 호서남면에 위치한 점촌산업조합은 1933년 1월에 설립되었으며, 문경군의 남부지역 5개 면을 담당하였다. 조합원은 2,670명이었고, 농가 총호수의 30%를 차지하는 거대한 조합이었다.6) 이 외에 삼림조합森林組合‧국유지소작인조합‧문경연초경작조합이 확인된다.7)

  문경군농회와 산업조합이 농업을 통한 직접지배기구였다면 금융조합은 금융수탈을 위한 기구였다. 문경군에는 4개의 금융조합이 설립되었는데, 문경금융조합‧산양금융조합‧농암금융조합‧점촌금융조합이 그것이다.8)

  문경금융조합은 1911년 9월 25일에 설립된 문경군 최초의 금융조합으로.설립당시 문경전체의 업무를 총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점차 다른 지역에 금융조합이 설립되면서 1937년에 이르면 문경면과 마성면의 2개 면을 담당하게 되었다.9)

  산양금융조합은 1928년 11월 28일 산양면 불암리佛岩里에 설립되었다. 문경금융조합이 관할하던 산양면‧산북면‧호계면‧동로면의 업무를 나누어 맡았으며, 1937년에는 조합원이 3,000여명에 이르렀다.10) 점촌금융조합은 1934년 12월 1일에 설립되었다. 원래는 예천금융조합이 관할하는 구역이었으나 1933년 2월 함창금융 점촌지소가 설립되었다. 그러다가 1934년 12월 1일에 이르러 독립하였으며, 1937년에는 조합원수가 1,633명에 달하였다.11)농암금융조합은 1932년 1월 15일 농암면 농암리에 설립되었다. 문경군 가은면과 농암면을 담당하였으며 조합원이 1,758명에 이르렀다.12)

 

[표- 2] 문경의 금융조합 (1937년)

조 합 명

설 립 일

소 재 지

조 합 원

비 고

문경금융조합

1911년 9월 25일

문경면 상 리

1,805명

 

산양금융조합

1928년 11월 28일

산양면 불암리

3,000명

 

농암금융조합

1932년 1월 15일

농암면 농암리

1,758명

 

점촌금융조합

1934년 12월 1일

호서남면 점촌

1,633명

 

 ※ 자료 : 藤澤淸次郞著, 『朝鮮金融組合と人物』, 大陸民友社發行, 1937.

 

  문경의 금융조합들은 고리채의 정리, 근로저축, 농법의 개량, 조합원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양계‧경우耕牛 등의 부업을 장려하는 등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의 대부분은 일제의 수탈정책에 맞추어 시행되었다. 금융조합의 실제적 운영권을 가진 이사理事는 거의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었고, 이는 문경도 마찬가지였다. 1937년 문경금융조합‧산양금융조합‧점촌금융조합의 이사는 일본인이었다.13)

  또한 농회의 비료자금과 공동구입 알선사업은 대부분 동척東拓‧금융조합金融組合 등을 통해 운용되었다. 그러나 금융조합의 대부자금은 주로 지주와 자작농 및 그 단체에 한하여 대출되었기 때문에, 자소작농과 소작농은 사용권에서 제외되어 고리자금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금융조합자금이 지주들의 고리대자금으로 전락한 것이다. 문경군 역시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3)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문경의 농민들

  문경군은 1917년 지주 1.9%, 자작농 14.4%, 자소작농 56.1%, 소작농이 27.7%로 자소작농이 비교적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율은 1917년 이후 1920년대를 거치면서 자소작농이 급격히 분화하였다. 즉 문경은 1920년대를 거쳐 1931년에 이르면 자소작농이 급격히 분화해, 1910년에 비해 자소작농은 23.1% 포인트 감소하고, 대신 소작농은 19.3% 포인트 증가하였다.14) 문경군은 1917년 순소작농의 비율이 27.7%로 경북도내 전체평균치에 비해 소작농의 비율이 낮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를 거치면서 무려 20% 포인트에 가까운 소작농의 증가로 인해 농민의 절반에 가까운 47%가 순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표-3] 문경군의 경영형태별 농가계층 호수의 추이15)

년도

지 주(%)

자 작 농(%)

자소작농(%)

소 작 농(%)

전국

경북

문경

전국

경북

문경

전국

경북

문경

전국

경북

문경

1917

2.8

2.3

1.9

19.6

13.9

14.4

40.2

50.8

56.1

37.4

32.9

27.7

1920

3.3

4

2

19.5

15

17

37.4

49

43

39.8

33

38

1931

3.6

3

2

17.0

18

18

29.6

30

33

48.4

49

47


  1920년대는 일제의 지주위주의 정책에 따라 전국적으로 소작지율 역시 증가하였다. 그런데 문경군의 경우는 1920년 이미 소작지율이 도내에서 최고 수준에 달했다. 논의 소작지율은 62%로 대구(75%)와 경산(69%)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으며, 밭의 경우는 58%로 대구(75%)에 이어 경산‧봉화와 함께 두 번째로 높은 지역이었다. 이렇듯 이미 1920년 최고조에 달했던 문경군의 소작지율은 1931년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현상을 보였다.
16)

[표-4] 문경군의 소작지율 변동

구 분

논 소 작 지 률

밭 소 작 지 률

1920

1931

증 감 률

1920

1931

증 감 률

문 경

62%

62%

0%

58%

57%

-1%

경 북

57%

56%

-1%

49%

52%

3%

  이는 결국 순소작농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소작지의 비율이 늘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소작농의 차지경쟁借地競爭이 심각하게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소작료는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고,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1930년대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해졌다.

  이와 더불어 문경지방은 1920년대를 거쳐 1930년에 이르면 일제의 주요 수탈품목이었던 삼백三白 즉 쌀‧면화‧고치 가운데 특히 고치생산의 증가가 현저하게 두드러졌던 지역이다. 1931년 고치를 생산하는 농가는 전체농가의 64%로 경북도내에서 가장 많았으며, 산견액도 8,479석石에 달하였다.

  이는 12,751石을 생산하는 상주군에 이어 경북도내 2위에 해당하는 생산량이다. 상주군이 전국 제1의 고치생산지역인 것을 감안한다면 문경군의 고치생산액이 전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17)

[표-5] 춘잠호 비율 및 고치생산액의 변동

지역

1924년

1931년

비 고
(1931년 중등이상 농가비)

잠호율

산견액

잠호율

산견액

문 경

52 %

2,870石

64%

8,479石

15%

경 북

24 %

37,146石

37%

97,540石

14%


  이와 같은 양잠의 성장은 문경군농회에 의해 추진되었다. 문경군농회는 조선총독부의 잠견백만석증수계획蠶絹百萬石增收計劃에 기초해 1925년부터 10개년 간 잠업장려계획을 수립하고, 양잠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양잠농가는 무려 64%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품생산은 고치가격이 급속하게 하락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고치가격은 1917년부터 1922년까지는 계속 상승하였다. 이 시기까지 양잠의 성장은 농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24년 이후 고치가격은 급격히 하락하여 1928년에 이르면 1917년도 가격의 70%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경의 고치생산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것은 양잠의 상품생산과 유통이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경군과 관련된 《동아일보》(1933년 8월29일자) 기사는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경북 문경군 농회에서는 수년 전부터 양잠의 장려를 철저히 하여 양잠가養蠶家에게 잠종蠶種을 과하게 부담시켜서 양잠 농가들은 곤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양잠가가 어느 정도 이익을 보게 된 지금에 와서는 전의 강제부담을 잊은 듯이 금년 춘잠종 배주는 어찌한 일인지 신입新入한 것도 아니주며, 더구나 현금이 아니면 절대로 주지 않아서 일반 양잠가는 뽕을 두고도 양잠을 못하게 되어 비난이 많다고 한다.

  또한 일제는 저렴한 가격으로 고치를 수탈하기 위해 고치공동판매를 실시했다. 1920년대까지는 고치의 판매가 비교적 자유로웠다. 생산자가 개인적으로 판매할 수도 있었고, 잠업조합을 통해 공동으로 판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1926년부터 대구‧서울‧평양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전부 공판을 통해 고치를 판매하도록 했다. 일제는 저렴한 원료를 공급받기 위해 무리한 양잠정책으로 증산을 도모하고 유통까지 장악하였다.

  그 결과 농민들은 잠종가蠶種價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가격으로 판매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1920년대 일제의 수탈정책과 더불어 문경군의 농민들은 점차 순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소작농들은 점차 농사지을 땅을 구해야 하는 차지경쟁借地競爭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농산물의 생산에 있어서도 자유롭게 품종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1930년대에 이르면 문경의 농민들은 더욱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대규모의 소작투쟁이나 농민운동이 문경지방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문경의 농민대중을 이끌어갈 만한 운동가들과 농민들의 역량자체가 적었음을 의미한다.

 

제2절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전개양상과 특성

 

  1920년대 일제의 이른바‘문화정치’ 아래 전개된 국내 독립운동은 민족총력항쟁이었다. 3‧1운동을 통해 성장한 광범한 민족역량이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립운동의 양적 발전도 극대화되었다.

  3‧1운동 이후 1920년 사이에 국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만도 1백여 개가 넘었으며, 전국 각처에 연통부와 교통국 등 임시정부의 국내조직이 생겨나고, 해외의 독립군 조직만도 1백여 개에 2만여 명의 독립군이 독립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은 그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여기에 국내의 농민‧노동자‧청년학생들에 의한 각 부문운동과 사회‧경제‧문화분야에서 전개된 다양한 운동까지 감안하면 명실상부한 민족총력을 경주한 독립운동의 시기였다.18)

  1920년대는 독립운동 이념과 지도노선 등도 다양하게 추구되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복벽주의가 극복되고 국민주권주의가 정착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종결과정에서 제국주의의 반인류적 과오를 반성하며 사회진화론 대신에 인도주의가 부상하였다. 인도주의는 한민족에게도 급속히 부각되면서 3‧1운동의 이념으로 집약되었고, 이어 민족운동의 논리로 확산되어 갔다.19) 나아가 사회주의‧무정부주의가 민족사회에 수용‧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이념은 정치적 지향을 달리했지만, 일차적 목표가 민족독립에 있었으므로 서로 연대할 필요가 있었다. 1920년대 국내외에서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추구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923년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그 단초였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민족통일전선운동은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민족통일전선을 제기하고 천도교세력과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6‧10만세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중국 상해에서는 안창호가 민족유일당건설을 제창하며 민족유일당운동에 앞장 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에 호응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렇게 하여 추진된 민족 유일당운동은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의 성립을 시작으로 관내로는 상해‧광동지역, 동북으로는 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정립鼎立하던 만주지방으로 전파되어 3부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민족유일당운동은 ‘이당치국以黨治國’ 논리에 의한 독립운동정당 결성운동이라는 특징을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27년 2월 국내에서 성립한 신간회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결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간회는 1920년대 전반기부터 꾸준히 추구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바탕 위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협동하여 결성한 조직으로 가장 1920년대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신간회는 농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 등을 지도하면서 국내 민족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로써 국내 독립운동의 역량은 더욱 성숙되었고, 이 같은 배경 위에서 1920년대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농민‧노동‧학생운동 등 대중운동이 대두‧발전한 것도 1920년대 독립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문제와 농민문제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었다. 임금노동자의 사회적 기반이 농촌이었고, 소작농 출신이 지배적이었으며, 양적으로도 농업노동자가 임금노동자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농민과 노동자를 분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농민운동은 3‧1운동을 계기로 활성화되어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일제시기 민족문제는 곧 농민문제이자 소작농민문제였다. 1920년대 소작쟁의는 한국농촌의 일반적 현상으로,20) 소작료 인하‧소작권 이동 반대 등 기본적으로는 소작농민의 경제권익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그 이면에는 식민지 지주제를 근간으로 식민수탈을 자행하던 일제에 대한 정치적 투쟁의 성격을 띤 독립운동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소작쟁의는 소작농민단체가 주도하였고, 여기에 사회주의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간여하고 있었다.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를 결성한 것을 전후하여 농민들은 각지에서 소작농민단체를 조직하여 소작쟁의를 일으켰다. 이어 1924년 조선노동총동맹이 창립되고, 이것이 분립하여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이 출범함으로써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운동이 전개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나아가 1920년대 후반기 산미증식계획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자 계급적 몰락이 심화된 자작농층이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농민운동의 계급적 지평은 소작농민과 자소작 농민뿐만 아니라 자작농민층으로 확대되었고, 운동양상도 소작쟁의와 함께 수리조합 반대운동‧조선농회 반대운동 등이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단위 농민운동단체도 소작조합에서 농민조합으로 확대‧개편해 가면서 일제의 농민지배와 농업수탈에 대항하였다.

  1920년대 노동운동도 노동쟁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21) 3‧1운동 직후 고조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1920년대에는 많은 대중적 노동단체가 조직되었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노동조합‧노동회‧노우회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노동단체들이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이 시기 노동단체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와 직‧간접적인 관련속에서 조직되거나, 청년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되었다. 이 가운데 노동자와 사회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1922년 10월 결성한 조선노동연맹회는 노동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3‧1운동 직후 학생운동도 왕성하게 전개되었다.22) 2‧8독립선언과 함께 3‧1운동에서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학생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고, 학생계의 의식도 성장하였다. 이와 함께 학생조직도 다양하게 탄생하였다. 교양‧계몽적 성격을 띤 학생운동 조직은 사회주의사상의 수용을 통한 민족이론의 다원화과정에서 극복되어 갔다. 학생운동은 6‧10만세운동을 통하여 주체적 역량의 성장기반을 형성하였고, 더욱 조직적인 투쟁형태와 이론을 성숙시켜 갔다. 이와 함께 학생운동조직의 양상도 중앙 본위의 조직에서 학교나 지방 단위로 변천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조직 형태도 표면단체보다는 비밀결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학생운동이 식민통치에 전면 대항하는 독립운동의 성격을 강화시켜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6‧10만세운동은 융희황제의 승하를 계기로 당시 조선공산당과 학생계‧천도교 세력들이 민족통일전선을 이루며 3‧1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2의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발각됨으로써 당초 계획대로 만세시위가 크게 번져 나가지 못하였지만, 철통같은 일제의 경계에도 학생들은 조직을 보존하여 6월 10일 융희황제 인산 당일에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6‧10만세운동은 좌우합작을 통한 만세시위운동의 추진이라고 하는 독립운동의 차원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이루는 것이었지만, 학생운동의 측면에서도 일대 전환적 의미를 지닌다. 즉 3‧1운동 시기 전위 역할을 담당했던 학생층이 6‧10만세운동에서는 독자적 주체로 성장함으로써 학생운동이 독립운동 주류의 하나로 부상되어 갔던 것이다.

 

제3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활동 

 

  1. 결성과정과 구성원의 성격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의 성격이 달라진 것처럼 비밀결사의 성격도 마찬가지였다. 3‧1운동 이전의 비밀결사라면 1907년 신민회를 비롯하여 1910년대 들어 광복회光復會‧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 등 10여 개 정도였다. 3‧1운동 이후 1919년에 생겨난 비밀결사는 약 30여개에 이르렀다. 1920년에는 50여개의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는데, 이전 시기와는 달리 전국 규모의 조직이 아니라 대체로 지방별 행동조직의 양상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1921~22년에는 10여개 정도의 비밀결사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조직의 성격은 크게 무장단체와 비무장단체로 대별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표방한 단체가 현저하게 줄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1920년대 초의 비밀결사는 폭넓은 계층의 참여를 수용하면서 독립운동의 인적 기반을 넓혀 갔다. 3‧1운동 직후에 자생적인 비밀결사가 전국적으로 생겨나고 있었던 점은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이 확산되어 갔던 시대적인 반영의 소산이기도 하였다.

  1920년대 비밀결사 가운데 문경출신 인물들이 참여한 대표적인 조직은 서로군정서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이하 의용단)이다. 이 단체의 주요한 활동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서로군정서를 지원하는 것으로 대부분 경상도출신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경북지역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또한 1910년대 경상도지역의 비밀결사의 정신을 계승한 단체이며, 1920년대 초반 이 지역에서 활동한 몇 안 되는 비밀결사조직이었다.   의용단은 1920년 9월에 결성되어 1922년 12월까지 활동한 국내비밀결사조직이다. 결성 당시의 모습은 당시 신문보도를 통해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23) 이를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은 김찬규金燦奎‧신태식申泰植‧이응수李應洙이며, 이들은 예전부터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 1920년 9월 김천에 살고 있던 이응수의 집에서 모인 이들은 김찬규의 발의로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동지를 규합하여 유력한 단체를 조직한 후 재외독립운동단체와 서로 호응하고, 국권회복에 종사하기로 결의하고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신태식은 경북단장을, 김찬규는 경남단장을, 이응수는 경북총무를 각각 맡기로 하였다. 또한 활동의 목적을 군자금 모집과 단원을 규합하는 것으로 하고 각자 활동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결성된 의용단은 활동무대를 경상도로 설정하고, 단원 규합과 군자금 모집을 추진하게 되었다.

  1920년대 당시 비밀결사의 조직이 그러하듯이 의용단도 만주지역 독립군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특히 서로군정서와 그 맥을 통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의용단의 조직은 이중적인 구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위조직으로 서로군정서가 있고, 하위조직으로 경상남북도에 지부적인 성격을 가진 조직이 편제된 것이다. 의용단의 조직체계를 살펴보면 다음의 [표-6]과 같다.

[표-6] 의용단의 국내 조직 및 구성

경 북

경 남

  ◦ 단    장 : 신태식申泰植
  ◦ 총무국장 : 이응수李應洙
  ◦ 군무총장 : 장세명張世明
  ◦ 군량총장 : 이명균李明均
  ◦ 재무총장 : 김병동金秉東
  ◦ 군무국장 : 전병표全炳豹
  ◦ 재무국장 : 서상업徐相業
   ∙ 주 임 : 엄주련嚴柱璉
   ∙ 집 사 : 장진우張進瑀
   ∙ 간 사 : 이만녕李萬寧‧김회문金會文
   ∙ 서 기 : 김용환金龍煥
  ◦ 재무국장 : 손성운孫聖雲
   ∙ 집 사 : 김환록金煥祿
   ∙ 간 사 : 김동명金東明‧한양이韓良履
   ∙ 서 기 : 류재욱柳在昱
  ◦ 경주지국장 : 허달許達

  ◦ 단    장 : 김찬규金燦奎
  ◦ 총무국장 : 김홍기金洪基
  ◦ 재무국장 : 김돈희金敦熙













 


  이 표를 통해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경북과 경남에 구성되어 있던 조직망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철저하게 서로군정서를 상위기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며, 일제의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대략적인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24) 둘째, 조직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의 활동은 순수한 군자금 모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비록 군무총장이라는 직제가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하부조직은 없었다. 이에 비해 군자금을 모으고 관리하는 재무부에는 특별히 국장을 2명으로 임명하였고, 그 하위 조직이 있었다. 셋째, 의용단은 경상남북도를 조직망으로 잡았지만, 실제로는 경북지역에 집중되었다. 이는 의용단과 연결되어 있던 서로군정서의 인적인 구성이 중요한 기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서로군정서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경북지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었고, 또한 군자금 모집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인물로 선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넷째, 경주에 지국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경주에 지국을 설치할 정도면, 이 지역에 대한 의용단의 기대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경주에 지국을 뒀을까? 이 부분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명확하지 않지만, 광복회에서 그 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주는 광복회 활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지역이다. 박상진의 집에서 의열투쟁의 기본틀이 마련되었고,25)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조직에 참여하였다. 즉,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던 광복회 경상도 회원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의용단의 활동 거점이었던 대구의 계림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던 박호진은 박상진의 친동생26)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그 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서로군정서와 의용단을 연결하는 통로는 김찬규라는 인물을 통해 단일화시켰다는 점이다. 의용단은 군자금을 모아 서로군정서를 지원한다는 확고한 목적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간선이 되었던 사람이 바로 의용단 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김찬규였다. 그는 의용단 경남단장을 맡고 있었지만, 이 역할보다는 의용단과 서로군정서를 연결시키는 교량역할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다 국내로 들어온 김찬규는 서로군정서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응수‧신태식 등과 접촉하면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의용단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의용단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거나 배후세력으로 지목받은 사람은 대략 40여 명에 이른다. 이 중 이계원(이상룡)‧노백린‧김응섭‧김시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국내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당시 의용단 사건에 연루되었던 인물 가운데 문경 출신과 이 지역에 활동하였던 사람을 정리해 보면 [표-7]과 같다.27)

[표-7] 의용단에 관계하였던 문경출신 인물 명단

번호

성 명

이명

나이

직업

본 적 및 주 소

수형

비고

1

신태식
申泰植

 

59

무직

慶北 聞慶郡 加恩面 珉池里 183

 

상동

2

한양이
韓良履

 

40

한문교사

慶北 聞慶郡 加恩面 竹門里

 

 

상동

3

장세명
張世明

 

28

농업

慶北 聞慶郡 山北面 西中里

 

 

상동

4

엄주련
嚴柱璉

 

60

농업

慶北 聞慶郡 山陽面 渭滿里

 

 

상동

5

정원영
鄭源英

 

51

한문교사

慶北 聞慶郡 西後南門 苧田里

 

 

상동

6

서상업
徐相業

 

50

농업

忠北 報恩郡 俗離面 三街里

 

 

상동

7

김규헌
金奎憲

金致方

37

농업

慶北 尙州郡 化北面 上五里

 

 


  확인 가능한 자료를 토대로 문경출신 인물들의 면면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우선 의용단 단장이었던 신태식(1864~1932)은 문경 가은출신으로 초명은 철회哲會,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도암島庵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28)

  구한말에 내부주사‧통훈대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다.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한국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그는 단양에서 대의를 품고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찾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울진‧평해‧영양‧영월‧산동‧제천‧원주‧홍천‧철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며, 이강년의진에 합류하여 소모후군장召募後軍將을 맡기도 하였다. 1908년 12월에 영평 이동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며(이후 10년형으로 감형), 1918년까지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서상업(1872~1945)은 문경 농암에서 서윤순徐胤淳과 정화제丁花齊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복초伏樵이며, 호는 벽송碧松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성記性이 출중하여 학문과 문장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29) 1907년 이강년의진에서 의병항쟁을 펼쳤는데, 당시 좌종사부에 소속되어 문경‧제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한양이(1883~1946)의 자는 여경汝敬이며, 호는 석초石樵이고, 본관은 청주淸州로, 예천 용궁에서 한태섭韓台燮30)과 장재문張在文 사이에서 태어났다.31)

  그는 1905년 이강년의진에 종사관으로 참가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였고, 원주‧단양‧제천‧문경‧재산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08년 6월 청풍 까치성전투에서 패한 후,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2년과 1940년에 문경 가은과 예천 유천에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항일사상을 고취시켰다고 전해진다.

  장진우(1866~1945)의 자는 여심汝心이며, 호는 청운淸雲이고, 본관은 울진蔚鎭으로 장영수張永秀와 류하회柳河回(하회류씨)의 장남으로 문경 영순에서 태어났다. 그는 장진성 등과 더불어 군자금과 군량미를 제공하면서 의병항쟁을 지원하였다.32)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전개되자,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고 전해진다.

  문경출신은 아니지만 김규헌(1886~1970)은 안동 서후에서 김성환金聲煥과 연안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치방致邦이며, 호는 속은俗隱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김성일金成一의 후손이다.33) 그는 호방장대한 체격으로 일찍이 안동 서후면 금계동 가산柯山 김영모金瀅模에게서 수학했으며,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안동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안동의진이 해산된 후 그는 이강년의진에 참가하여 갈평‧마고성‧제제천‧평창‧강원 일대를 누비며 의병항쟁을 펼쳤다.

  의용단의 구성원에 대한 성격은 지역적인 것과 가문적인 것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지역적인 성격으로는 첫째,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경남 그리고 경성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의용단에서 활동하였던 사람은 대략 42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출신지역은 경북‧경남‧황해‧충북‧충남‧경기 등지가 대부분이다. 본적지를 기준으로 자세히 나누어 보면, 경북이 29명(이계원‧김응섭‧이대기‧이종국‧김시현‧김용환‧김찬규‧김병동‧손영기‧전병록‧전병표‧손성운‧김회문‧장진우‧김규헌‧김재명‧한양이‧신태식‧장세명‧엄주련‧정원명‧이정희‧박호진‧김사묵‧허종‧장덕원‧양한위‧이명균‧신현식), 경남이 4명(정은상‧김돈희‧김홍석‧김홍), 황해도가 1명(노백린), 충북이 3명(이응수‧류재욱‧서상업), 충남이 1명(곽방), 경기가 4명(김동진‧이여주‧김용운‧허달)이다. 그 중에서도 경북지역 출신 인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안동‧문경‧예천 등의 경북 북부지역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안동이 6명(이계원‧김응섭‧이대기‧이종국‧김시현‧김용환), 영주가 1명(김찬규), 예천이 7명(김병동‧손영기‧전병록‧전병표‧손성문‧김회문‧장진우), 상주가 2명(김규헌‧김재명), 문경이 5명(한양이‧신태식‧장세명‧엄주련‧정원영), 청도가 1명(이정희), 경주가 1명(박호진), 선산이 2명(김사묵‧허종), 칠곡이 1명(장덕원), 대구가 1명(양한위), 김천이 2명(이명균‧신현식)이다. 이처럼 경북출신 인물들이 대규모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이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망명한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의용단에서 활동한 단원들의 출신 지역이 1910년대 비밀결사조직이었던 민단조합‧풍기광복단‧광복회의 주 활동거점이었다는 것이다. 민단조합은 문경을 중심으로, 풍기광복단은 영주를 중심으로, 광복회는 경상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의용단은 1910년대 경상도지역의 비밀결사의 맥을 그대로 계승한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문적인 성격을 의용단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정리해본 결과, 그 지역의 명문가 후손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의용단은 1920년대의 다른 비밀결사와는 다르게 대부분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한 유학자 집안의 후예들이며, 그 지역에서 여론을 이끌어 가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경제적인 능력도 함께 갖춘 사람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의병항쟁에 군자금이나 군량미를 지원한 경우도 있으며, 사재를 털어 교육기관을 운영한 경우, 재산을 정리하여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한 경우 등의 사례를 통해 그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연령면에서는 30~4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50~60대도 많은 편이다. 이것은 의용단의 성격을 극명히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의용단의 활동이 군자금 모집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연령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2. 단원 및 군자금 모집을 통해 본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활동

  의용단의 주된 활동은 독립군을 후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에 있었다. 이 같은 모습은 1920년의 비밀결사조직이 가지는 공통적인 면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선 국내 비밀결사와 독립군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중간 단계가 필요했으며, 아울러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의용단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하였다. 의용단의 단원 모집은 군자금 모집과 함께 이루어졌다. 먼저 이 조직을 결성한 김찬규와 신태식‧이응수는 그들과 인연을 맺고 있던 인사를 대상으로 단원 모집에 착수하였다. 그 내용은 「예심종결서豫審終決書」(『독립운동사자료집』10)와 《동아일보》(1922.12.22)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자료를 토대로 단원 규합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김병동은 1921년 2월경부터 1922년 4월경 사이에 김찬규‧이응수‧이만녕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2만원 모집을 계획하고 손영기를 가입시켰다.

  손영기는 1921년 2월경에 독립자금으로 13원과 벼 3석을 제공하였으며,34) 김규헌을 이응수에게 소개시킴으로써 그를 의용단 활동에 동참하게 하였다. 한양이는 1920년 4월경에 이응수의 권유에 따라 의용단에 가입하였고, 1921년 3월경에 서상업을 가입시켰다. 서상업은 가입 당시 군자금으로 40원을 제공하였다. 김동진은 1921년 1월경에 김찬규의 권유로 가입하였고, 이만녕은 1921년 6월경에 이응수‧김찬규‧김병동 등의 권유로 각각 의용단의 식구가 되었다. 특히 김동진은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주비단에서 활동하면서 군자금 모집과 전달 방식을 어느 정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였을 것이다.

  엄주련은 1921년 12월경에 이응수‧김병동 등의 권유로 군자금 모집 비용으로서 5원을 제공하고 의용단에 가입하였으며, 이명균은 1920년 9월경에 김찬규의 권유로 군자금모집에 동참하였다. 이명균은 의용단에 가입할 때 군자금 모집 비용으로 20원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진우는 1921년 3월경에 이응수의 권유로, 장세명은 1920년 12월경에 신태식‧신현식 등의 권유로, 정원영은 1921년 8월경에 이응수‧신태식의 권유에 따라 의용단 활동에 참여하였다. 김재명은 1921년 4월경에 이응수‧이만녕 등의 권유로, 신현식은 1920년 12월경에 김찬규의 권유에 따라, 정내우는 1921년 12월경에 김찬규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몸을 맡겼다. 김현동은 1921년 2월경 이응수의 권유로 의용단에 가입하였다. 이대기와 양한위‧이정희는 김찬규의 권유로 대구에서 단원으로 가입하였는데, 가입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이처럼 의용단의 단원 모집은 1920년 9월경부터 1922년 4월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었다. 즉, 결성되던 때부터 일제에 검거되기 몇 개월 전까지 단원 모집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축 인사들이 단원 모집에 주력하였던 것은 이들이 곧 군자금이자 그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1922년 12월 17일경부터 1922년 12월 30일까지 총 3차례에 걸쳐서 단원을 검거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의용단의 단원 모집은 개개인을 매개로 하는 점조직 형태를 띠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모습은 광복회의 단원 모집과 유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직이 탄로가 났을 때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와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단원은 각자 나름대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고, 어느 정도의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군자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

  의용단의 군자금 모집은 1920년 10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경북 안동‧영천‧군위‧영일‧영덕, 그리고 경남 창녕이 주된 대상지역이었다.35) 군자금 모집을 위해 사용된 물품은 서로군정서 및 임시정부 명의로 되어 있는 군자금 사령서‧경고문‧사형선고서 등이었다. 이 문건은 단원이 직접 우송한 것이 아니라 대구나 김천 등지에서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광복회가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던 방법과 같은 방식이었다. 광복회의 경우는 주로 해외에서 발송한 경우가 많았던 데 비해, 의용단은 주로 국내에서 그것을 보냈던 것이다. 이처럼 의용단이 군자금 사령서를 비롯한 경고장이나 경고문 등을 우편으로 보낸 것은 조직이 일제 경찰에 발각될 수 있는 여지를 최소화한 것이며,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태을교의 포교 방식을 빌리는 경우, ‘총명환聰明丸’이라는 환약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위장한 방법도 이용되었다. 또한 단원이 군자금을 제공할 대상을 물색하고 직접 방문하여 그것을 요구한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령서를 비롯한 문건을 우편으로 발송한 후 단원이 군자금을 수령하러 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의용단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사령서 등을 발송해서 대상자가 자진해 군자금을 제공하는 방법, 단원이 직접 대상자를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는 방법, 개별적으로 군자금을 갹출하는 방식, 약품의 판매를 가장한 방법, 그리고 당시 종교단체의 포교활동을 활용한 방식 등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여 군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단원들의 이러한 노력은 무모할 정도로 끊임없이 펼쳐졌지만,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이들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10%는 서로군정서를 지원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90%는 의용단에서 자체적으로 군자금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것이 바로 철공소를 설립‧운영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용단에서는 재산가들이 선뜻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의금액을 군자금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의용단이 계획하였던 군자금 모집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재산가들의 비협조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인 철공소를 짧은 시일에 설립하겠다는 의욕이 앞선데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즉, 개인이 부담하기에는 힘든 액수의 군자금을 적게는 1만원에서 많게는 5만원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많은 재산가들이 선뜻 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용단의 활동 이념은 광복회의 그것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인사가 결합하여 1915년에 결성한 비밀결사조직이었다. 이 단체의 구성원은 의병항쟁에 참여하였던 인사들과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던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즉, 광복회는 태생부터 달랐던 독립운동계열의 연합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공화주의적인 입장을 표명한 조직이었다.36) 이처럼 의용단은 1910년대부터 불기 시작하여, 1919년 3‧1운동을 통해 어느 정도 정리된 독립운동의 연합이라는 과제를 그대로 보여준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민단조합과 풍기광복단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과 광복회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들이 함께 모여, 1920년대 독립운동의 염원을 그대로 안고 출발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군자금 모집을 비무장적인 성격으로 추진함으로써, 광복회나 민단조합처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제4절 문경지역 청년운동단체의 태동과 문화운동

  1. 문경지역 청년운동단체의 발흥

  1910년대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이 시기의 한반도는 그야말로 공포시대였으며, 한민족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당시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을 일반적으로 ‘무단통치’라고 부르고 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펼쳐가던 시기에 한민족의 국권수호운동(의병항쟁과 계몽운동)으로 곤욕을 치렀던 일본이 선택한 통치방식이 바로 무단통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3‧1운동을 계기로 통치방식의 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들은 당근과 채찍을 이용한 유화정책, 이른바 ‘문화통치’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기만적인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일제의 문화통치는 외형상 한민족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족 내부에 갈등을 부추겨 항일투쟁을 주저앉히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제한적이지만 집회‧결사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한국사회에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가 전국적으로 청년회가 결성된 것이다. 1920년 이후 청년단체의 급속한 결성은 개인의 수양‧신교육보급‧풍속개량‧농촌개량을 논리로 하는 ‘문화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화운동론자’들이 그 운동의 실행기관으로 주로 청년회를 설정하였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청년들의 수양기관 또는 문화운동의 중심적 기관임을 표방한 청년회는 주요사업으로 개인의 수양을 위해서 지‧덕‧체의 함양을 목표로 하였고, 사회의 개조를 위해서는 문화향상‧봉건사상타파‧산업장려를 목표로 하였다. 청년회의 조직 구성은 대체로 회장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대의원격인 평의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목적 달성을 위해 덕육부‧지육부(교육부)‧문예부(학예부)‧체육부‧풍속부‧산업부(실업부) 등의 부서를 두고 활동을 진행시켰다. 청년회 결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경북지역에 서도 청년회‧구락부 등의 명칭을 가진 청년단체가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초창기 청년운동은 일제의 문화통치이념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주장하는 실력양성이라는 허구 속에 문명개화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당시 전국적으로 청년회 모습이 비슷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년회의 주도층은 ‘지방유지’와 청년지식인 등이었다. 지방유지들은 대체로 지주‧상공인‧관청의 임원 등이었다. 즉 지방유지들은 청년회의 설립과 운영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일찍 신교육을 받았던 청년지식인은 각 지역에서 야학과 문화운동을 전파시켜 농촌 청년들에게 청년으로서의 자각과 근대문화 수용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점은 청년회 활동이 모두 독립운동과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안동청년회처럼 항일 성격이 강한 청년회를 제외하면, 오히려 일제 통치에 도움을 주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즉 청년회는 고문을 두었는데, 고문에는 조선인 지주 및 조선총독부의 지방관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경지역의 경우도 청년회 활동은 사회 계몽운동이면서도 실천적인 면에서 독립운동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1920년대 청년운동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1919~1924)는 1919년 의성義城‧선산善山‧상주尙州에서 조직되기 시작한 청년단체가 1920년에 이르러 경북 거의 모든 군郡에서 생겨난 시기이다. 이 때 창립된 청년단체의 특징은 단체의 명칭을 대부분 ‘청년회靑年會’라고 이름 짓고, 그 조직에 있어서는 회장제會長制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단체의 목적은 지知‧덕德‧체體 삼육을 연마하고 조장條章하여, 어두운 청년계를 계몽하고 발전시킴으로써 그 지방의 폐습을 개량하거나 산업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두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반적으로 덕육부德育部‧지육부知育部(敎育部)‧연학부硏學部‧학예부[文藝部]‧체육부[運動部]‧풍속부[矯風部]‧친목부[社交部]‧산업부[實業部] 등의 부서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1919년 이후 1920년대 초에 창립되기 시작한 경북지역의 청년단체들은 조직부서나 목적을 통해 그들이 추구하고 있었던 이상은 대체로 민족개량적‧계몽적‧교육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제2기는 1919년에서 1920년에 경북지역에 창립된 민족개량적‧계몽적‧교육적 성격의 청년운동은 1923~1924년을 거치면서 시대적인 조류에 따라 점차 좌경화되어 사회주의적 성격이 나타난 시기이다. 이 시기 청년운동의 특징은 그 명칭의 다양화와 조직에 있어서 회장제 대신 위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연령을 제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이들 청년 단체가 그들이 표방하고자 하는 이념을 선언과 강령을 통해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운동단체의 통합이 형성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특히 계열별로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37) 그러나 이 통합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 같다.

  제3기(1927~1929)는 통일된 경북지방청년대회를 갖지 못한 경북지방의 청년운동단체는 분열과 침체를 가져오는 듯하였으나, 1925년 후반부터 청년운동의 조직적 통일을 목적으로 하여 군동맹郡同盟‧도연맹道聯盟 등의 연합체 형성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운동은 1926년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1927년에는 더욱 조직화되어가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표-8] 1920년 경북지역 청년회 현황 38)

(단위; 개)

부‧군

대구

달성

군위

의성

안동

청송

영양

영덕

영일

단체수

28

11

12

7

25

3

12

5

28

부‧군

경주

영천

경산

청도

고령

성주

칠곡

김천

선산

단체수

12

10

11

7

10

6

6

26

5

부‧군

상주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울릉

 

 

단체수

25

7

22

12

4

1

295

 

 

 ※ 자료 : 鮮于基聖, 『韓國靑年運動史』, 錦文社, 1973, 359~383쪽 참조.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323쪽 참조.

  그리하여 1군郡 1청년회라는 취지 아래 각 군의 청년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이에 대신하여 각 군에는 연맹 또는 동맹을 그리고 각 면에는 지회를 계속 창립시켰다.39) 특히 이 시기 청년단체의 특징은 1927년에 창립된 신간회新幹會의 통합운동과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지회의 설립과 좌‧우합작의 시도, 그리고 신간회의 지회로서 활동한 것처럼 보인다.40) 또한 뚜렷하지는 않지만 정치적인 성향이 보인다.

  1920년 당시 약 295개의 청년회가 경북지역에서 결성되었으며, 문경지역에는 7개 단체가 확인된다. 경북지역에서 결성되었던 청년회 현황은 위 [표-8]과 같다. 문경지역의 청년운동은 1920년 6월 20일에 결성된 문경청년회를 필두로 각 지역에 청년회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41)

 

[표-9] 문경지역 청년회 현황

명 칭

회 원 수

지 역

聞慶靑年會

68人

聞慶邑內

加恩靑年會

150人

加恩面內

우리靑年會

35人

籠岩面內

山一靑年同盟

40人

山陽面內

商山勞働會

20人

山陽面內

屹嶺團

36人

聞慶邑內

山五少年會

30人

山陽邑內


 

  2. 문경지역 청년단체의 초기 활동과 변모

  문경지역 청년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문경청년회는 1920년 6월 20일 창립된 것으로 전해진다.42) 문경청년회의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5년 3월부터이다. 그 이전까지의 활동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청년회의 초창기 모습처럼 지역 청년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데 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경청년회 창립당시 회원수는 160명 정도였는데, 상당한 규모의 조직이었을 것을 추정된다. 하지만 1920년 전반기에는 청년들의 계몽운동에 초점을 맞춘 활동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각 지역 청년회의 조직체를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회장 명단만 알려진다.

  1920년대 전반기 청년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개별 청년회의 결성과 활동이다. 그런데 문경지역의 경우는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문경청년회를 정점으로 한 문경지역 청년운동의 집중화를 도모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런 모습은 봉화지역의 청년운동과 유사하다. 봉화는 조선시대부터 안동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안동의 월경지가 많았던 곳이다. 문경도 이러한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인근지역인 상주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지역이고, 학문적 전통도 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상주 중심의 서애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적인 문화생산이 힘들었고, 행정구역의 변화도 상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지역적인 독자성이 약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문경청년회는 개별청년회보다는 지회 설립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노력의 결실이 1922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산양山陽‧산북山北‧영순永順 등 3면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문경청년회 조선청년연합회 문경지역 순회강연(《동아일보》1922년 12월 20일자) 산동지회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43)당시 산북공립학교장이었던 이상화李相華가 산동지회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는 1920년대 청년운동의 한계와 맞물리는 모습이다.

  1924년 문경청년회는 평의회를 개최하여 그동안 회장을 맡고 있었던 전병룡錢炳龍의 사표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였다.44) 그의 사표가 제출되자 문경청년회에서는 유임을 추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24년 1월 25일 문경청년회관에서 평의회를 개최하여 박시흥朴時興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한 집행부를 새롭게 구성하였다.45)

  문경청년회는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46)의 순회강연을 유치하면서 시대적 변화와 청년운동의 양상 등을 지역 청년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문경청년회는 연합회와 공동으로 1922년 12월 8일 오후 8시부터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강사로는 김철수金喆壽가 ‘진화進化의 시대’, 장명현張明炫이 ‘무엇을 구求하는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철수가 연합회건설안과 조선물산장려운동에 대한 설명회를 가지기도 하였다.47) 연합회건설안은 조선청년연합회 가입에 관한 문제로 추정되며, 조선물산장려운동은 한민족이 거족적으로 전개한 경제자립운동으로서, 국권상실 후 일제의 경제침략은 더욱 거세어 일본 자본에 의해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잠식되어 갔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각을 촉구해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근대기업을 일으켜 자주·자립경제를 수립,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경제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이 운동을 일종의 일화日貨배척운동이며, 항일민족독립운동으로 보고 탄압하였다. 그 뒤 조선물산장려회는 특별한 활동없이 명맥만 이어졌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시에 민족기업의 활동을 대변해주고 민족기업의 설립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문경청년회는 청년들의 계몽과 함께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문경청년회는 1926년 9월 5일 문경청년회관에서 창립 및 발회식을 거행하고 문경소년회를 결성하였다. 이 자리에서 임원으로 이동춘李春東‧이은명李根命‧전해성銭海成‧김말봉金末奉‧김금복金今福을, 지도자로 박진朴震‧전파銭破 등을 선출하였다.48) 소년회 결성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경청년회에서 소년회 결성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자, 문경경찰서에서 발기위원의 부모를 불러 “청년회는 불량한 분자의 집합이니 자제를 만약 그런 곳에 보낸다면 처벌하겠다.” 등으로 위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경청년회는 급하게 소년회를 조직하게 되었지만, 이후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하였다.

  문경청년회는 1920년대 전반기 문경지역의 청년운동의 주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지만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다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산동지회의 독립문제, 즉 개별 청년회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기존의 청년회 주요 세력과 충돌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문제는 문경지역 뿐만 아니라 대구에서도 민감한 사항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구청년회에서는 도산서원문제와 함께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하였고, 진상조사를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49) 산일지회는 1925년 11월초 산일청년(회)동맹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동시에 새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에 산동지회를 이끌고 있던 간부와 관리들이 모두 물러나게 되었고, 당시 회장으로 있던 이상화는 청년회의 변혁을 반대하기 위해 동맹을 불량자의 모임이라고 공언하고 조선청년총동맹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에 조선청년총동맹은 이상화에게 경고장을 발송하였는데, 이상화는 이 문건을 문경경찰서에 신고하였던 것이다. 이에 문경경찰서에서는 산일청년회의 문서를 압수하는 동시에 간부였던 채희진蔡熙鎭을 구인하고,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이었던 강훈姜壎을 상주경찰서로부터 신변을 인계받았다.50) 조선청년총동맹에서 이 문제에 대해 ① 문경聞慶 경찰警察의 무리無理와 산북공보교장山北公普校長의 ○동動에 관關한 일을 상세詳細히 조사調査키 위爲하야 집행위원執行委員 허홍제군許弘濟君을 출장出張케 할 것, ② 경북지역내慶北地域內에 잇는 각各 청년단체靑年團體로 하여금 각기各其 최선最善의 방법方法으로써 문경무산청년운동聞慶無産靑年運動의 진행進行을 적극적積極的으로 옹호擁護 후원後援케 할 것 등을 결의하고,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위원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 산일청년회는 산양면 현리에서 개별 청년운동단체로 발족할 수 있었다.51) 각 지역의 청년회가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청년회를 이끌었던 조직과 갈등을 벌였던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는데, 이는 토호적인 성격이 강한 지역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영양청년회의 갈등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영양청년회는 혁신을 주도하고자 하던 세력과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보수적인 회원 간의 갈등이 빚어졌는데, 1925년 7월 11일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혁신측 회원들이 기존 간부들의 비리를 성토하면서 발단이 되었다. 초기에 영양청년회를 맡았던 임원진들이 영양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영양군수가 임원진 구성에 깊게 관여한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보수측 회원들이 당시 신문기사를 작성한 기사와 신문사를 경찰서에 구두로 고소하였지만, 영양경찰서에서 서면고소장을 요구하여 이것을 논의하기 위해 1925년 7월 11일 임시총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싼 보수측과 혁신측의 첨예한 대립은 보수측 임원들이 총사퇴하고 임원을 다시 선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듯하였다.52)

  문경청년회에서 문경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던 또 다른 단체가 있었는데,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53) 김룡지회金龍支會가 그것이다. 김룡지회가 언제 창립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는데, 신문기사를 통해 1921년 이전에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김룡지회의 주된 활동은 조선불교청년회와 공동으로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과 노동야학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문예활동과 체육활동에 치중하였다. 즉 1920년대 청년회의 주요 사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활동이 지방학림과 노동야학을 운영한 것이다. 김룡지회는 1920년 9월 9일 동경유학생강연단東京留學生講演團와 공동으로 김룡사金龍寺 만세루萬歲褸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김장헌錢藏憲의 사회로 진행된 이 강연회는 김경홍이 ‘사회社會와 종교宗敎’, 김상철金相哲이 ‘시대적時代的 종교宗敎’란 주제로 각각 강연하였으며, 강연회를 마친 후 음악회가 개최되었다.54) 또한 경성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된 강연단과 공동으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김원상金圓祥이 ‘살기爲하야’, 박규윤朴奎潤이 ‘희망과 채찍’이란 주제로 강연하였으며, 강연회 후 음악회를 개최하였다.55) 김룡지회의 활동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교육활동으로, 지방학림과 노동야학을 운영을 꼽을 수 있다. 김룡사에는 김룡사 지방학림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는 불교계가 전국에 지방학림을 운영하는 원칙에 따라 설치된 것이다. 1915년 당시의 30본산 연합사무소의 임원 및 상치원常置員들은 1915년 7월 3일 조선총독부에 지방학림학칙강령 승인안을 제출하였으며, 7월 15일 승인을 받은 후 각 본사에 이를 시달하여 각 본사로 하여금 지방학림을 설립토록 권장하기에 이르렀다.56) 이에 따라 김룡사도 1918년 사찰 경내에 지방학림을 설립하였으며, 김룡사 본사와 말사가 공동으로 경비를 부담하여 운영되었다.57) 김룡사 지방학림은 단순한 교육적인 기능 외에도 1919년 3‧1운동 당시 이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58) 지방학림이 얼마나 성황이었는지는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1921년 당시 입학생이 증가하여 일반학생을 받을 수 없어서, 확장을 위해 고심한 흔적이 나타난다.59)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김룡지회는 노동야학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60) 노동야학을 운영하는 한편 학생들과 학부모의 단합을 위해 대운동회를 개최하였는데, 지방학림의 학생과 노동야학의 학생을 그 대상으로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61) 이 외에도 학생들의 문예를 장려하기 위한 문예회와62) 인근 주민과 함께 할 수 있는 대운동회도 개최하였다.63)

  문경청년회‧문경청년회 산일지회‧불교청년연합회 김룡지회 외에도 흘령단屹嶺團이라는 청년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1925년 9월 27일 정만숙鄭萬淑‧이현구李現球‧박남현朴南鉉‧전세화錢世華‧전병일錢柄逸‧전병국錢柄國‧윤진영尹晋榮 등의 발기로 문경교회에서 창립하였다.64) 그런데 이 단체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창립이후 어떠한 활동의 흔적도 보여주지 못하였다. 창립된 장소로 볼 때는 기독교계 청년단체일 가능성이 높지만, 발기인 면면을 보면 꼭 그렇지만 않다. 1925년 당시 청년회의 혁신을 위해 사상단체가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외곽단체가 등장하게 되는데, 단체의 명칭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문경지역 청년운동단체의 혁신에 간여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3. 문경지역 청년운동의 혁신과 대중운동

  1) 사회주의 청년회의 확산과 군(부)단위 청년연맹의 결성

  1920년대 초 경북지역의 청년단체에서는 계몽운동과 교육운동을 내용으로 하는 문화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근대문명의 수용을 통해 청년층을 자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렇지만 청년회를 주도하고 있던 지방유지층의 계급적 한계가 계몽적 활동으로 인해 청년회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이와 같이 청년회가 침체하고 있는 상황에서 1923년경에는 지역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한 대중운동단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지역의 청년단체들이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능동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청년운동의 이념적 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앞으로 청년운동의 변화를 예시하는 것이었다.

  1923년경부터 보이기 시작했던 경북지역 청년단체의 이념적 분화는 1924년 중앙에서 조선청년총동맹(이하 청총)과 신흥청년동맹이 결성되자 가속화되었다. 우선 서울청년회계에서 1924년 4월초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위원회가 청총의 결성을 선전하고 지방단체의 동향을 조사하기 위해 각도 지방 순회반을 조직하였는데, 경북에는 임봉순과 고령청년회의 유용묵 등이 파견되었다. 한편 반反서울청년회계로만 구성된 신흥청년동맹은 신흥청년사를 두어 기관지인 『신흥청년』을 발행하였다. 이즈음 경북지역청년운동에서 사회주의사상이 확산되었으며, 서울계와 화요회계를 양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25~6년 경북지역의 청년운동에서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기존의 청년단체들이 ‘혁신총회’를 통해 사회주의적 청년단체로 전환하는 것이었고, 또한 사회주의 이념 아래 새로이 청년회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두 형태는 모두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대중운동에서 청년운동의 선도성을 강조하면서 무산청년운동을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혁신총회’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이전의 문화운동 실행기관이었던 사회주의적 청년단체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즉, 기존의 청년회는 회장을 주축으로 한 간부 중심이어서 그 운영이 비민주적이며, 또 장년층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시대적 요구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여 “대중본위의 신사회건설을 기도함. 민중운동의 선구가 될 역운을 양성함. 사회혁신의 역군훈련과 양성을 기함. 무산계급청년의 단결을 기함”이라는 강령이 채택되었다.65)

  혁신의 내용을 보면 첫째, 조직체계를 회장제에서 집행위원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조직체계의 전환은 간부와 회장중심의 청년회를 민주적인 중앙집권체로 바꾸어 회원의 의사 반영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었다. 둘째, 장년층을 배제하고 명실상부한 청년층으로 청년회를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연령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셋째, 재정운영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그것은 기존의 기부금을 통한 청년회 운영에서 회비를 통한 운영을 시도함으로써 지방유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아울러 기존의 유지들이 마련했던 회관을 정리하고 자력으로 회관을 마련해 나갔다. 넷째, 부서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개편된 부서에서는 집행위원‧서무부‧교양부‧조사부‧검사위원 등을 두었다. 이와 같이 혁신총회가 가지는 의미는 사회주의 수용에 따른 청년운동에서 이념적 분화가 발생하였고, 그리고 청년운동의 이념이 사회주의로 통일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통일화 과정은 군단위 청년회연합기관의 성격을 띤 청년연맹의 결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청년연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지방에서 청년단체의 단결과 청년운동의 통일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경북지역에서 청년연맹은 1925년 8월 안동청년연맹 결성을 시작으로 하여, 1926년 무렵까지 213군 가운데 예천‧영일‧김천‧상주‧달성‧고령‧칠곡‧영양‧경주‧문경‧영덕‧영천 등 13군에서 결성되었다.66) 그러나 청년연맹은 각 군의 모든 청년단체를 아우르지 못했다. 청년연맹이 각 군에서 부분적 통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청년단체들 가운데 성격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단체들이 있음으로 인해 연합체를 구성할 수 없었던 데에 있다. 이와 같이 군(부)청년연맹은 해당 지역의 모든 청년단체를 포괄하지는 못했지만, 청년운동의 확산에는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내부에는 자파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파벌간 대립이 노정되고 있었다. 경북지역의 청년운동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은 비합법적 영역으로서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고려공청)와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청년회의 활동은 교육함양‧출판활동, 계층계급별 청년단체의 조직, 대중의 일상생활 옹호, 반종교활동‧반봉건활동 등에 중점을 두었다. 교양 함양의 목적으로는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의 지식을 보급하여 청년대중의 계급적 자각, 대중운동의 활동가를 양성, 봉건적 풍속을 타파하는 것이었다.67) 그것의 수단으로는 강연회‧토론회‧독서회‧강좌회‧소인극 등과 노동야학 확대, 문고설치 및 간이도서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강연회와 토론회는 이 시기에 제시된 청년의 사명과 임무 등에 관한 청년운동의 방침을 청년층에게 주지하고 선전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청년을 하나의 계급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에 따른 역할을 제시하는 강연도 개최하였다. 아울러 청년회내에 독서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시사문제를 토론‧연구하였다. 독서회는 일반 교양함양과 달리 전위활동가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야학과 학원을 경영하는 등의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의 야학활동은 봉건제도의 폐습과 문맹을 타파할 것과 농촌청년의 계급적 현실을 각인시켜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며, 그 범위는 이전 시기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청년단체들은 지역별청년회와 직업별청년회를 조직하고자 하였으며, 이 시기 경북지역 청년단체에서 전개한 활동은 청년운동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2) 문경청년연맹·연합회의 결성과 대중운동

  문경지역 청년단체의 혁신은 문경청년연합회의 탄생으로 시작되었다. 문경청년연합회는 1926년 1월 30일 산일청년동맹 사무소에서 문경청년회와 산일청년동맹이 제휴하여 창립되었다.68) 문경청년연합회 창립에 문경청년회‧산일청년동맹‧가은청년회加恩靑年會‧호서남청년회戶西南靑年會등 문경지역 주요 청년운동단체가 참가하였다. 창립총회에서 ① 청년운동, ② 형평운동, ③ 여성운동, ④ 운동당면문제 등에 관한 사항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집행위원에 채영식蔡永植‧김종율金鍾律‧고택림高澤林‧권명수權明秀‧권오정權五定‧이개李改‧김동원金東元‧김한봉金漢鳳‧채홍원蔡鴻遠‧박시덕朴時悳 등이 선임되었다. 또한 검사원으로 박문섭朴文燮‧김동섭 등이, 연합회관건축기성회원으로 고시호高時鎬‧장시흥張時興‧김덕수金悳洙‧조대선趙大善‧서영석徐永錫‧조명구趙命九‧신경식申敬湜‧이수한李守漢‧허담許淡‧김성학金成鶴‧김종환金鍾煥 등을 선임하였다. 이 자리에서 청년회관을 점촌역 앞에 건축하기로 하였는데, 회원이었던 최봉기崔鳳基가 회관부지 800여 평을 기부하기로 하였다.69)

  창립총회가 끝난 다음 날인 1월 31일 산일청년동맹회관에서 제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집행부를 이끌고 갈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김한봉‧이개가 서무부를, 권오정이 조직부를, 채영식이 교양부를, 고택림이 조사부를 각각 맡기로 하였으며, 이개‧권오정‧고택림이 세칙초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문경청년연합회는 1926년 10월 17일 연합회관에서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는데, 경과보고‧회계보고 후 정대림鄭垈淋 외 18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연합회의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①중앙협의회에 관한사항, ②반동운동 및 반동분자에 관한 사항, ③문경단체협의기관 설치에 관한 사항, ④경북청년운동자간친회에 관한 사항, ⑤순회강좌에 관한사항, ⑥종교문제에 관한 사항, ⑦여성운동의 관한 사항, ⑧형평운동에 관한 사항, ⑨농노운동에 관한 사항, ⑩회관문제에 관한 사항, ⑪부담금문제에 관한 사항, ⑫교양문에 관한 사항, ⑬소년운동에 관한 사항 등을 결의하였다.70) 이 결의사항에서 주목되는 것은 경북청년운동자간친회에 관한 사항과 형평운동에 관한 사항이다. 경북청년운동자간친회에 관한사항은 당시 경북지역 청년운동의 계열간의 분화와 대립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항이다. 1923년 무렵부터 경북지역의 청년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에서 사회주의를 수용하면서 나타난 성격변화는 세력이 분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서울계와 화요회계의 양대 세력간 대립된 상황은 1925년에 들어서 지역내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파쟁을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표적 파쟁은 1925년 2‧3월과 1925년 9‧10월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이와 같이 경북청년대회와 경북청년연맹 결성 움직임을 통해 지역에서 청년운동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계급적인 편향의 노정, 파벌 대립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점은 앞으로 청년운동이 극복해야 할 중대한 당면과제로 부각되었다. 형평운동에 관한 사항은 전국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형평사분사를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문경청년연합회는 형평사 본부와 협력하여 형평사 문경지부 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할 수 있었고, 1929년 11월 22일 창립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71)

  1920년대 중반기의 청년운동은 혁신총회를 거쳐 개별 청년회의 연합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연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각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문경의 경우는 외형적으로는 시대적인 흐름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강력한 연합체를 구성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또한 조직체와 결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혁신의 틀이 보이지 않는다.

 

  4. 민족통일전선운동과 문경지역 청년운동

  1) 전민족적 청년운동방침의 수용과 전개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에서 발표한 운동방침은 청년운동 대상을 이전의 무산청년에서 전민족적 청년으로 전환하는 것이었으며, 조직적으로는 군(부)청년동맹의 결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경북지역 23개 군 가운데 안동청년동맹(1927.5.15)을 시작으로 해서 19개 군에 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72)

  군(부)청년동맹으로 결성되는 과정은 ① 군 청년대회 또는 연맹임시대회를 통해 청년연맹을 해체하고 청년동맹으로 조직을 전환하는 경우, ② 각 청년단체를 해체 및 통합한 후 청년동맹을 조직하는 경우, ③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후 청년동맹을 결성하는 경우 등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①의 경우는 김천을 비롯한 예천‧안동‧영주‧상주‧영일‧영천‧고령‧칠곡 등 대부분 지역이 해당되었다. 이 지방은 경북지역내에서 청년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역량이 강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청년동맹의 결성 과정에서 사상단체를 해체하였다. ②의 경우는 경산‧경주‧군위‧청도‧문경 등의 지방에서 이루어진 형태였다. 이들 지방의 특징은 군(부)청년연맹이 조직되지 않았던 곳으로 상대적으로 청년운동이 비교적 약한 지방이었다. ③의 경우는 대구‧선산‧성주 등의 지방에서 이루어진 형태였다.

  한편 청년동맹이 결성되고 난 뒤 기존청년회는 해체 후 청년동맹의 집회 또는 지부로 개편되었으며, 청년동맹의 본부는 읍에 두었다. 지부의 설치는 기존 청년회를 지부로 재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는 담당지역을 재조정하거나 통폐합하여 지부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북지역의 군(부)단위의 청년동맹의 결성은 경북청년연맹을 조직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경북청년연맹은 1928년 1월 7~8일에 김천에서 개최된 경북기자대회 후 곧 바로 열린 ‘경북청년운동자간친회’에서 경북청년운동의 발전책에 관해 논의하던 중 전격적으로 결성되었다.73)

  경북청년연맹의 강령과 규약은 청년총동맹의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조직구성은 고려공산청년회 경북도위원회와 각 출신지역의 고려공청야체이카, 신간회 프랙션 조직원과 일치한다. 이로써 경북지역 청년운동의 조직은 조선청년총동맹-경북연맹-군(부)청년동맹-지부 또는 지회라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경북청년연맹의 결성은 경북지역 청년운동을 통일적으로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북청년연맹은 군(부)청년동맹을 지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체의 활동도 극히 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74) 따라서 경북지역 청년운동은 군(부)청년동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2) 문경청년동맹결성과 민족협동전선운동

  1920년대 중반까지 문경지역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문경청년연합회는 1928년 상순에 문경청년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청년운동단체의 통합과 운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전국적인 양상이었고, 이에 문경청년연합회도 청년운동단체 통합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문경청년동맹으로 개편하고 각 지역에 있던 지회를 지부로 명칭을 변경시켰다. 문경청년동맹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권오정이었다. 그는 조선청년총동맹의 강령서를 영주청년회로부터 받아 문경지역 청년운동단체 회원 가운데 30세 미만의 청년을 대상으로 동맹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8년 1월 25일 설립총회를 개최할 수 있었고, 그 해 2월 21일 집행위원을 결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이 들어갔다. 당시 집행위원장에 이현구李現求, 집행위원에 신봉일申奉日‧권창영權昌榮‧김성동金聖東‧박대준朴大俊‧박영돈朴永敦‧최승성崔承城‧고병국高柄國‧김시현金時鉉‧박영식朴永植 등이 집행부에 선출되었다. 설립 당시 회원수는 40명이었으며, 문경읍내‧산양면‧산북면‧호서남면 등에 지부를 성치하는 등 문경청년연합회의 활동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였다.75)

  문경청년동맹은 재만동포를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비롯하여 지역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76) 문경청년동맹의 활동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한 상주군위원회에 대한 성토 및 반대운동이다. 1927년 후반기에 경북지역의 청년운동자들은 청년단체 조직론의 새로운 방침을 수용하면서 기존의 개별단체와 청년연맹을 해체하고 중앙집권적인 군(부)청년동맹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 무렵 경북지역에서는 조선청년총동맹 조직방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상주군위원회 설치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군(부)위원회의 설치 혹은 설치 논의가 이루어진 지방은 전국적으로 경북의 상주, 함남의 영흥, 경기의 안성 등이었다. 상주군은 일찍 김천‧문경 등과 같이 서울계의 영향이 강한 곳이었다. 상주군의 대표적인 청년활동가로서는 강훈姜壎‧김억주金億周‧지경재池璟宰‧박순朴淳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강훈은 3차 조선공산당 결성에 즈음하여 조선청년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며, 서울계 신파로서 ML계였고,고려공청원으로서 상주야체이카 책임자였다. 상주의 청년운동은 1925년 10월에 청년연맹의 결성, 1927년 10월에 청년동맹이 결성되어 옥산‧내서‧연봉 등의 지부가 설치되는 등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이러한 상주군에서 경성청년회의 「성명서」의 영향으로 1928년 3월에 상주청년동맹은 청총의 군부청년동맹론에 반대하고 계급 우선주의 아래 ‘청총 군부위원회 조직론’을 제기하면서 상주청년동맹을 해체하고 조선청년총동맹 상주군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상주군위원회는 당시 확산되고 있었던 민족협동전선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헤게모니를 강조하였다. 즉,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지는 하나, 그것이 전선의 확대와 대중획득을 구실로 민족적 단 일을 잘못 해석하거나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77) 그러나 상주청년동맹의 상주군위원회로의 전환은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것은 조직 전환을 둘러싸고 경성청년회 성명서와 재조직 문제로 장시간 토론을 벌였으나, 청맹조직을 고수해야 한다는 ‘동맹현존파(ML계)’와회체의 변경을 주장하는 ‘부인파(경성청년회계)’로 양분되어 갈등을 노출시켰던 것이다.78) 결국 표결을 통해 ‘부인파’가 승리함으로써 상주군위원회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주군위원회에 대해 문경청년동맹은 상주청년동맹을 적극적으로 지지 후원하면서 상주군위원회를 박멸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79) 또한 문경청년동맹도 상주청년동맹 해체에 관한 토의 결과 해체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정리하였다.80) 경북청년연맹은 상주군위원회의 박순을 청총의 강령과 규약을 위반했다 하여 제명시켰다.81) 경북지역에서 상주군위원회가 제기한 청년운동 조직론에 동조하거나 지지를 표명하는 단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 외에도 신간회 문경지회를 설립하기 위해 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82) 문경은 의성과 더불어 경북 북부지역에서 신간회가 결성되지 않은 곳이다.

 

 

제5절 조선공산당과 문경인의 사회주의운동

  1. 사상단체의 출현과 경북북부지역 사회주의운동의 특성

  서울에서 결성된 각 사상단체는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 지역에 자신들의 분신들을 하나 둘씩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각 지역에 결성된 사상단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의 연구와 선전이라는 원칙적인 성격 외에도 중앙에서 각 사회주의 그룹이 결정한 활동방향을 현장에서 실천해 나가는 전위기관으로서 자리 매김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사회주의 그룹을 지원 사격해주는 응원군으로, 나아가 지역의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경북지역에서 결성된 사상단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정리해 보면 대략 22개 정도이며, 경북 북부지역에는 14개의 사상단체가 결성되었다. 이 가운데 문경지역에서는 1개의 사상단체가 설립되었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적은 규모이다.

  1920년대 당시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대중운동이 강성을 보였던 지역보다 비교적 일찍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1925년을 기점으로 많은 사상단체가 결성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한국 사회주의운동사에의 황금기였기 때문이다.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그리고 각종 부문운동의 연합체가 결성되면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지역에서도 많은 사상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경북 북부지역에 결성되었던 사상단체를 계열별로 나누어 보면 화요회가 5개(신흥회‧화성회‧정광단‧동우회‧일광단), 서울계가 6개(신우회‧상주독서회‧정진회‧좌우회‧상주건설자동맹‧사우회), 북풍회가 2개(정의사‧야봉동맹), 미상이 1개이다. 1920년대 조선공산당 창건과 사회주의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보였던 화요회계와 서울계의 활동이 경북 북부지역에도 그대로 유입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의 사회주의운동세력이 화요회와 서울계로 양분화 되었던 것이다. 시기별로는 1925년까지는 화요회가 안동문화권의 사상적 기반을 주도했으며, 1926년부터는 예천과 상주 등지에서 서울계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지역별로는 안동은 화요회가, 상주와 문경은 서울계가, 예천은 화요회계와 서울계가 그 지역의 사회주의 보급과 운동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표-10] 1920년대 경북 북부지역에서 활동했던 사상단체

연도

단 체 명

지역

계 열

주요 활동가

비 고

1923

신흥회

예천

화요회

황창섭‧김상기

1925, 오오회

1923

정의사

의성

북풍회

오기수‧오진문‧유상묵

 

1924

의우단

의성

 

도시춘

 

1925

화성회

안동

화요회

권오설‧김남수‧이준태

 

1925

정광단

안동

화요회

 

 

1925

동우회

예천

화요회

황창섭‧배형철‧황병운

 

1926

신우회

상주

서울계

박순‧지경재‧박연옥

 

1926

상주독서회

상주

서울계

강훈‧박동욱‧심혁

 

1926

야봉동맹

영덕

북풍회

유웅경‧한창덕‧이기석

 

1926

일광단

예천

화요회

김영희‧남병실

 

1926

정진회

예천

서울계

박창호‧권원하

 

1926

좌우회

문경

서울계

박진‧이격

 

1926

상주건설자동맹

상주

서울계

강훈‧허흥제

 

1927

사우회

예천

서울계

오오회‧정진회‧동우회‧일광단

 

 ※자료 :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관련기사.『왜정시대인물사료』(경희대학교 소장본).

  문경에는 비교적 사상단체가 늦게 조직되는데, 좌우회가 결성될 당시는 1‧2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되고 서울계가 주도하는 3차 조선공산당이 재건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였다. 그리고 인근지역인 상주와 예천이 서울계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 부류에 몸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회를 결성하기 위해 박진朴震이 노력하였는데, 그 결과 1926년 10월 17일 동아일보 점촌지국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하면서 창립되었다.

  박진을 비롯한 6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는 한편, ① 사상총동맹에 관한사항, ② 중앙협의회에 관한 사항, ③ 회원 모집에 관한 사항, ④ 종교문제에 관한 사항, ⑤ 이류異流단체에 관한 사항, ⑥ 민족주의단체에 관한 사항, ⑦ 청년운동에 관한 사항, ⑧ 노동운동에 관한 사항, ⑨ 농민운동에 관한사항, ⑩ 여성운동에 관한 사항, ⑪ 형평운동에 관한 사항, ⑫ 교양운동에 관한 사항 등을 결의하였다.83)

  당시 문경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사회주의운동가는 이현구와 신봉일이다. 이들은 대부분 책을 통하여 사회주의 이념에 공감하게 되어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 주변의 선배나 친구 등 지기들의 권유로, 자신들이 공감하여 받아들인 사회주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구체적인 실천 활동과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물론 이들이 사회주의 실천운동에 참여한 것은 이미 부분적으로 관여하고 있던 대중운동단체에서의 활동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지역에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구한말과 식민지 조선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자라면서 민족해방운동을 몸으로 실천했거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태도나 사고방식의 밑바닥에는 성리학의 영향이 아직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이 과거에 지녔던 민족주의나 유교적 사고방식의 문제점을 비판했지만, 그들 자신이 과거 사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그들은 사상적인 면에서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새롭게 태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까지 자신과 철저하게 결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양상은 여말 선초 성리학을 수용했던 신흥사대부의 그러한 심정과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

  1925년 12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자 경찰의 검거망을 피한 김재봉‧김찬‧주종건 등 3명은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여 홍남표‧이봉수‧김철수‧이준태(안동) 등 5명으로 당대회 없이 중앙간부로 구성하고 당조직을 재건하였다. 그 뒤 고려공청의 권오설‧전정관을 증보하여 7명의 중앙집행위원회로 확대하였다.84)

  1926년 7월 당시의 그 부서 및 간부를 보면 비서부 책임비서에 강달영,내무담당(비서부 차석)에 이준태, 선전부 위원으로 권오설 등이었다. 안동출신의 《시대일보》기자 류연화도 홍남표의 보증으로 조공에 가입하였다.

  신의주사건으로 인해 조선공산당이 어수선할 때 서울파는 1926년 2월에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의 창립을 추진하였다. 여기에 경북지역 출신으로 진평헌‧장적우‧고덕환‧허일‧허홍제‧박철‧남정구‧김은한 등이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모임에 문경노동조합이 참가신청을 하였지만,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위와 같은 중앙에서의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통일 및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대 등으로 집약되는 변화는 경북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1927년 8월 조선공산당 경상북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85) 위원회의 조직과 부서를 보면, 책임비서에는 홍보용, 그 위원으로 김석천이 선정되었다.

  이들의 과거 공산주의 그룹을 보면 화요회의 안상길을 제외한 홍보용‧김리용‧김석천 등은 모두 서울파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경북지역에서 두 차례 공산당 간부의 검거로 인한 공백이 서울파의 합류로 메워졌고, 서울파의 합류로 경북지역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다.

  조공 및 고려공청 경북위원회는 11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홍보용‧김리용‧강훈(상주, 서울파)‧안상길 등이 회합하여 경북공산당대회에 출석할 대표위원으로 홍보용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경북에 조직한 야체이카 및 프랙션은 [표-11]과 같다.

[표-11] 경북지역 야체이카 및 프랙션(공: p,청: y)

지역

조 직

구 성 원

y포항
y영천
y대구
y김천
y상주
y안동
p풍산
p안동
yp안동




p상주
y상주
y문경

야체이카
야체이카
야체이카

프랙션
프랙션
프랙션
프랙션





당원
야체이카
야체이카

 ◦ 책임: 정학선, ◦ 회원: 이재우, 이상갑
 ◦ 책임: 김석천, ◦ 회원: 정시명, 공갑룡
 ◦ 책임: 김리용, ◦ 회원: 장적우(장흥상), 조청룡(조병렬),                          추성해,홍보용, 황태성(황대용)
 강훈
 이지호
 이회원
 안상길
 이회승, 이운호, 류연술, 남병세, 이지호, 김경한, 안상태,  오성무, 김연한, 김기진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안동군 당원 및 고려공청원으로 활  동한 모든 인물)
 강훈
 최상돈, 강룡수, 신영철
 이현구, 신봉일
 

 ※ 자료 : 강덕상‧梶村秀樹, 『현대사자료(29)』, 106-107쪽; 판결문 등을 종합.

  조공 및 고려공청 경북위원회의 결성은 이전 시기의 파벌적 대립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각 공산주의 그룹의 통일을 의미하였다. ‘통일’을 바탕으로 경북지역에서 공산주의운동의 지도기관이 성립하였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에 따라 조선공산당 제2회 대회에서의 결정이 지역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다. 특히 조공 제2차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협동전선의 구축을 위해 경북 역의 공산주의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간회의 성립과 활동을 위해 신간회 내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조공 및 고려공청 경북위원회는 프랙션을 설치하였다. 1928년 3월 중 조선공산당 제3차대회를 개최하고, 중앙간부와 지방조직을 재편하였다. 중앙간부에 선출된 경북출신은 없으며, 조공경북위원회의 간부는 책임비서에 장적우(장홍상), 위원 이목이 선정되었고, 고려공청 책임비서에는 이목이 선정되었다. 이후 1928년 7월부터 10월까지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원이 전국에서 일제 경찰에 대거 검거되었으며, 경북지역 조공 당원 및 고려공청 회원들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검거망을 피했던 조공 및 고려공청 경북위원회원들은 1930년 ‘경북공산당 사건’으로 모두 체포되었다. 검거된 사람들을 보면 이운호‧이회승‧남병세‧이지호‧남장‧김경한‧안상태‧오성무‧김연한‧김기진(이상 안동)‧최상돈‧강룡수(이상 상주)‧이현구‧신봉일(이상 문경) 등이었으며, 이들은 대체로 조공 경북위원회 안동군 집행위원회(안동군당), 문경야체이카원, 상주 야체이카 구성원들이었다. 결국 조공 제2차대회와 제3차 대회를 통해 구성된 조공 및 고려공청 경북위원회, 각 지역 야체이카, 신간회 프랙션 등 모든 조직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경북지역에서는 사회주의운동과 대중운동의 지도부가 궤멸상태에 빠졌고, 공산주의 운동은 침체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경북위원회에서 활동한 문경인으로는 신봉일과 이현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봉일申奉日(1906~?)은 1928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그해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1930년 2월 대구지법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86)

  이현구李現求(1905~?)는 9월 문경노동조합에 참여했다. 1928년 2월 문경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검사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3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고, 4월 문경청년동맹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검거되어 1930년 2월 대구지법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87)

 

 

  제6절 문경농민조합의 결성과 농민운동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립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었다. 민족해방운동을 명확한 계급적인 차원에서 체계화하고, 이를 민족해방‧민족혁명이라는 정치적인 과제로 결합시켰으며, 이에 농민운동을 일제에 대한 정치투쟁‧민족해방운동으로 고양시켜 농민운동을 농업혁명‧토지혁명으로 확대 발전시켰던 것이다.

  1920년대 후반기에 들면서 정치투쟁으로의 전환과 대중운동의 강화가 진행되면서 노농운동단체의 분립이 이루어졌고, 농민운동의 전국조직으로 농민총동맹이 결성되면서 각 지역에서는 종래의 소작조합이 농민조합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이때에는 식민당국을 비롯한 지주층들이 농회나 지주회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소작문제에 대하여 대응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개량적인 현상을 극복하는 새로운 농민운동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소작조합을 한 단계 진전시킨 농민조합이 결성되었다. 경북지역에서 조직된 농민운동단체는 다음의 나오는 [표-12]와 같다.

[표-12] 경북지역 농민단체 및 인원수

지역

농민단체 및 인원수

대구

 옥포면소작조합(163)‧해안면소작조합(707)

영천

 영천소작조합(38)

경주

 양동농우회(165)‧대전농우회(42)

안동

 佳川農務會(25-가곡농무회?)‧풍산소작인회(4,200)‧풍산소작인회 臥龍出張所  (835)‧豊西

 農民會(207)‧豊西農友會(262)‧吉安우리農林會(76

김천

 개령농우회(50)‧농남농민조합(28)‧금릉농우동맹(100)‧풍계농회(43)

상주

 대평농민회(92)

예천

 예천농민조합(1,768)‧예천농민조합 지보지부(500)‧예천농민조합 용문지부(537)‧  예천농민조합 은풍지부(550)‧예천농민조합 개포지부(170)

영주

 농양노농회(112)‧영주농민조합(2,352)‧영주농민조합 금계지부(225)‧영주농민조  합 이산지부(385)‧들게회(96)‧용암농우회(30)

봉화

 酉谷農友會(38)‧梧麓農友會(73)‧九川農友會(57)

문경

 문경농민조합(16)

성주

 성주농우회(6)‧초전면고산동농우회(15)

선산

 長川農業組合(42)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62-63쪽.

  1920년대 중반까지 문경지역에서의 노동‧농민운동을 선도할 만한 단체는 없었다. 하지만 상주지역 노동단체의 지도를 받는 상산노동회(혹은 문경노동회)가 산양면에 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의 부호들과 농민들이 소작료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에 노동회 사무소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상주노동회에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위원이 파견되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아울러 소작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듯하다.88)

  이처럼 농민이나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는 단체가 없던 문경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바로 문경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이었다. 1926년 윤청길尹淸吉‧이현구‧양원경梁元敬 외 4‧5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문경노동조합이 결성될 수 있었다.89)

  이들은 1926년 8월 27일 문경청년회관에서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경노동조합창립대회 및 발회식을 개최하였다. 이때 황금술黃金述 외 18명이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①아등은 호상부조의 법칙에 의한 신사회 건설에 역군이 됨을 자임함, ②아등은 조선농촌의 이중착취인 사실의 근절과 계급적 평등을 기함, ③아등은 처지와 환경이 동일한 계급적 대동단결로서 아등 무산계급의 당면의 경제적 최대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90) 또한 ①조직문제에 관한 사항, ②소작권이동 및 임금노동자 문제에 관한 사항, ③교양문제에 관한 사항, ④농촌개량문제에 관한사항, ⑤소작인의 생활 및 노동자의 생활과 농촌산업조사에 관한 사항, ⑥회관설치에 관한 사항, ⑦본회 창립 기념식에 관한 사항, ⑧회명 개칭에 관한 사항, ⑨노총 및 중앙협의회 가맹에 관한 사항 등을 결의하였다.91) 특히, 노총 및 중앙협의회의 가맹에 관한 건을 협의한 것으로 보아 서울청년회계의 영향을 받는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은 1926년 9월 20일 문경청년연합회관에서 조합원 7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임시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문경경찰서에서 파견한 경찰이 입회하고 있었다. 임시총회에서 조합의 구체적인 활동을 위해, ①소작권보장에 관한 사항, ②소작료 운반에 관한 사항, ③반동분자처리에 관한 사항, ④중간 소작 및 악덕지주에 관한 사항, ⑤교양에 관한 사항 등을 결의하였다.92) 하지만 노동조합은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못하였으며, 지역의 경제적인 상황 등을 고려하여 농민조합으로 명칭과 활동 방향을 바꾸게 된다.93)

  문경농민조합은 1928년 6월경 산양면에서 70여 명의 농민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되었는데, 중앙집행위원장은 권오정權五定이었고, 그 산하에는 서무‧조사연구‧교양‧구로‧조직‧조직선전부‧검사위원장 등의 부서가 두어졌다. 창립과 동시에 문경농민조합은 ‘지주대 소작조합의 친목, 소작료의 저감(소작료 4할제 쟁취투쟁), 농업임금 인상, 하급민의 구제’ 등을 내걸었으나 별다른 활동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94)

  군단위 농민조합의 결성운동은 1920년 말에서 1930년대 초기에 걸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른바 ‘12월 테제’ 이후였다. 대중운동을 더욱 강화하고, 이에 기초한 민족해방운동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후 농민운동은 밑으로부터, 그리고 비합법적으로 ‘혁명적 농민조합’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바로 공산당재건운동과 결합되어 있었다.

 

1) 이하 본고 일제의 문화통치와 문경사회와 관련하여 특별한 각주가 없는 부분은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술총서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지식산업사, 2007); 강윤정,「식민지 상업적 농업의 전개와 농민층 분해 - 1920년대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01)을 참고로 함.

2) 朝鮮總督府, 『慶北大鑑』 中 韓國地理風俗叢書(61), 1936, 1236쪽; 이후 1925년 1월 30일 경상북도 訓令 제5호에 의하여 순사배치 정원을 47명으로 삭감했다.

3) 본고 일제의 문화통치와 관련한 부분은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2007)을 참고로 작성하였음.

4) 김익한, 「1920년대 일제의 지방지배정책과 그 성격 - 면행정제도와 모범부락정책을 중심으로-」,《한국사연구》93, 한국사연구회, 1996, 149-151쪽.

5) 김익한, 「1920년대 일제의 지방지배정책과 그 성격 - 면행정제도와 모범부락정책을 중심으로-」,《한국사연구》93, 한국사연구회, 1996, 151-152쪽.

6) 朝鮮總督府, 『慶北大鑑』中, 韓國地理風俗叢書(61), 1936, 1242쪽; 『朝鮮銀行 會社組合要錄』, 동아경제시보사, 1940, 771쪽.

7) 朝鮮總督府, 『慶北大鑑』中, 韓國地理風俗叢書(61), 1936, 1236쪽; 조선전매협회, 『조선총독부전매관서작원록』, 谷岡商店印刷所, 1941, 125쪽.

8) 조선총독부, 『慶北大鑑』中, 韓國地理風俗叢書(61), 1936, 1235쪽.

9) 藤澤淸次郞著, 『朝鮮金融組合と人物』, 大陸民友社發行, 1937, 568-569쪽.

10) 藤澤淸次郞著, 『朝鮮金融組合と人物』, 大陸民友社發行, 1937, 349-350쪽.

11) 藤澤淸次郞著, 『朝鮮金融組合と人物』, 大陸民友社發行, 1937, 238-239쪽.

12) 藤澤淸次郞著, 『朝鮮金融組合と人物』, 大陸民友社發行, 1937, 405쪽;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동아경제시보사, 1940, 760쪽.

13) 藤澤淸次郞著, 『朝鮮金融組合と人物』, 大陸民友社發行, 1937. 238-239쪽.

14) 1920~1931년의 문경군 농민구성의 변동

군 별

자 작 농

자소작농

소 작 농

문 경

1%

-10%

9%

경 북

3

-19

16

15) 慶尙北道, 『慶尙北道統計年報』, 1918, 222쪽; 大邱‧慶尙北道, 『慶尙北道農務統計』, 1920‧1931(1920‧1931년대 수치는 이윤갑, 「한국근대의 상업적 농업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203쪽에서 재인용).

16) 大邱‧慶尙北道, 『慶尙北道 農務統計』, 1920‧1931(이윤갑 「한국근대의 상업적 농업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180쪽에서 재인용).

17) 이윤갑, 「1920년대의 植民地 商業的 農業의 전개와 地主制의 확대」,《한국사연구》90,한국사연구회, 1995, 157쪽.

18) 장석흥, 「한국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 1998; 김용달,「한국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징—국내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삶과민족운동』, 景仁文化社, 2005 참조.

19) 趙東杰, 『韓國民族主義의 發展과 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93; 趙東杰, 「한국근현대사 總說」, 『韓國近現代史의 探究』, 景仁文化社, 2003; 한시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삶과 민족운동』, 景仁文化社, 2005 참조.

20) 조동걸, 『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 한길사, 1979 참조.

21) 김윤환, 『한국노동운동사』Ⅰ, 청사, 1982; 김경일, 『일제하 노동운동사』, 창작과비평사, 1992참조.

22) 정세현,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 일지사, 1975 참조.

23) 《동아일보》1922년 12월 30일자; 《매일신문》1922년 12월 20일자.

24) 慶尙北道警察部의 『高等警察要史』(1934, 209-21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자료집』10(1983, 747-751쪽), 「판결문」(대정 12년 형공 제599호), 《동아일보》‧《매일신문》등의 기록에서 그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5) 심상훈, 「대한광복회 경상도지부의 조직과 활동」, 『1910년대 안동문화권의 독립운동』(제3회 안동문화권을 독립운동사 연구 발표문), 2000.

24) 慶尙北道警察部의 『高等警察要史』(1934, 209-21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자료집』10(1983, 747-751쪽), 「판결문」(대정 12년 형공 제599호), 《동아일보》‧《매일신문》등의 기록에서 그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5) 심상훈, 「대한광복회 경상도지부의 조직과 활동」, 『1910년대 안동문화권의 독립운동』(제3회 안동문화권을 독립운동사 연구 발표문), 2000.

26) 박상진은 密陽朴氏 時奎(1861-1928)와 여강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는데, 생후 100일 만에 백부인 時龍(1851-1930)에게 입양되었다. 박호진은 박상진이 입양된 후 박시규와 여강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이다(金喜坤, 『朴尙鎭資料集』,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참조).

27)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28) 尹普鉉, 『경북판독립운동실록』, 중외출판사, 1974, 223-226쪽; 申鉉培, 「義兵抗爭 및 獨立運動資料」, 『義兵長島巖申泰植先生遺集』, 1999.

29) 尹普鉉, 『경북판독립운동실록』, 중외출판사, 1974, 182-183쪽; 「호적등본」.

30) 한태섭은 의강년의진이 처음 거의할 당시부터 의병항쟁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의 집안은 일본군의 박해를 피해 용궁 송암→동로 산달→용궁 송암→문경 가은→예천 유천 등지로 옮겨 다녔다고 한다(구자일, 「韓末 醴泉 義兵戰爭」, 《安東史學》6, 안동사학회, 2001, 91쪽).

31) 尹普鉉, 『경북판독립운동실록』, 중외출판사, 1974, 443-444쪽; 「호적등본」.

32) 구자일, 「韓末 醴泉 義兵戰爭」, 《安東史學》6, 안동사학회, 2001, 78쪽.

33) 金乙東, 『安東版獨立運動史』, 명문사, 1985; 金喜坤,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 안동시,2000, 16-17쪽.

34) 《동아일보》1922년 12월 22일자. 이 기사에는 당시 벼 3석의 시가가 현금으로 9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3원씩 3회 즉, 39원을 군자금 모집 비용으로 제공하였다고 적고 있다. 결과적으로 손영기는 135원이라는 거금을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비용으로 내어 놓았던 것이다.

35) 의용단의 군자금 모집 과정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건은 일제의 판결문과 신문기사가 유일하다, 일제의 판결문은 「豫審終決書」(『독립운동사자료집������10)과 대정 12년 刑公 제599호(대구지원), 신문은 《동아일보》(1922.12.17‧12.21‧12.23‧12.30)와 《매일신문》(1922.12.21‧12.30)에 의용단 사건이 자세히 적혀 있다. 군자금 모집에 관련한 서술은 이 기록들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부분 서술에서는 註를 생략하고자 한다.

36) 趙東杰, 「大韓光復會의 결성과 그 선행조직」,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지식산업사, 1988.

37) 민족주의 계열의 청년운동단체는 ‘慶北靑年大會’(주최: 大邱靑年會)를 安東에서 개최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운동단체는 ‘慶北地方靑年大會’(주최: 朝鮮靑年總同盟)를 尙州에서 개최하였다. 慶北靑年大會에 참가한 단체는 安東靑年會‧豊山新興靑年會‧醴泉新興靑年會‧尙州새모임‧吉東靑年會‧臥龍靑年會‧大邱我求同盟‧禮安靑年會‧大邱靑年會‧一直靑年會 등 10개 단체였다(《동아일보》1925년 2월 17일‧23일‧24일자).慶北地方靑年大會에 참가한 단체는 豊基靑年會‧金陵靑年會‧龍門靑年會‧龍宮靑年會‧倭館靑年會‧淸道靑年會‧會玉靑年會‧尙州靑年會‧迎日靑年會‧開寧靑年會‧軍威靑年會‧咸昌靑年會‧星州靑年會 등 13개 단체였다(《동아일보》1925년 3월 1일‧4일‧10일자).

38) 鮮于基聖, 『韓國靑年運動史』, 錦文社, 1973, 359-383쪽;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323쪽.

39) 1928년 1월 6일부터 7일까지 金泉靑年同盟會館에서 慶北靑年聯盟이 결성되었고, 이로써 朝鮮靑年同盟慶尙北道聯盟이 창립되어 통일적 조직으로 완성되었다.

40) 李均永은 「192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와 성격」(『한국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 1992,84쪽. 광복 49주년 및 독립기념관 개관 7주년 기념 제8회 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움 발표문). 『新幹會硏究』(여강출판사, 1993, 235-260쪽) 등 다수의 論著를 통해 新幹會支會의 결성은 각 지역의 사회단체의 지지와 혹은 직접적인 발기에 의하여 고무되거나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준 것이 청년단체이며, 신간회 지회의 前衛體로서 활동을 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신간회 지회와 각 지역의 청년운동단체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시사하고 있다.

41) 《조선일보》1926년 1월 25일자.

42) 《동아일보》1925년 3월 16일자, 지방순회기사 참조.

43) 《동아일보》1925년 3월 16일자, 지방순회기사 참조.

44) 전병룡이 언제부터 문경청년회를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21년에 그가 회장이었다는 신문기사 있는 것으로 보아 문경청년회의 창립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5) 《동아일보》1924년 1월 27일자.

46) 조선청년연합회는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청년운동단체의 연합회적 성격을 지닌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10월부터 1920년말까지 전국에서 985개의 각종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 가운데 종교유사단체가 가장 많았고, 다음이 청년단체였다.

  이들 청년회는 연설과 강연을 전개해 사회의 깊은 잠을 깨우기에 힘쓰고, 자신들의 수양에도 힘쓰는 등 애국계몽운동과 사회개혁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분산된 청년단체로는 모든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가 없어 규합이 요청되었다. 이 때 동아일보사가 청년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들 청년단체를 하나로 묶어 연합체로 만드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0년 5월 26일부터 청년회연합회의 설치를 제창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6월 서울에 한국인 유지 50여 명이 모여 청년단체의 연합을 위한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를 발기하였다. 각 지방에 창립된 청년회를 대동단결시켜 항일민족운동의 저력으로 육성하려는 취지는 크게 호응을 얻었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사전������참조).

47) 《동아일보》1922년 12월 20일자.

48) 《동아일보》1926년 9월 15일자.

49) 《동아일보》1925년 11월 26일자. 당시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大邱靑年會에서는 二十三日 午前 十一時에 同會館에서 緊急委員會를 열고, 金光, 尹聖奉 兩氏를 補缺委員으로 選擧한 끝에 安東 陶山書院 笞刑事件과 聞慶山一靑年同盟事件에 對하야 다음과 같이 決議하엿다고. ◇決議事項: 一. 陶德山書院 笞刑事件에 關한 件;人權을 蹂躪하고 生活을 威脅하며 封建制度의 惡習인 私笞刑을 敢行하는 陶山書院은 無産大衆의 怨府로 認하는 同時에 그의 廢止를 要求함. 一. 聞慶山一靑年同盟에 關한 件; 山北公普校長과 山一靑年同盟 紛糾 眞肰을 調沓發表할 일, 妄悖한 言語를 發하야 靑年運動을 沮害하는 公普校長 李相夏一派의 奸○한 行動은 一般에 暴露식히는 同時에 社會的으로 制裁를 加할 일.

50) 《조선일보》1925년 11월 23일자. 당시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경상북도문경군 산양면에 잇는 경산청년회 산동분회(慶山靑年會 山東分會-문경청년회를 경산청년회로 잘못 기록함)는 지난 10월초에 회의 이름을 산일청년동맹(山一靑年同盟)으로 변경하는 동시에 새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중심이 되고 재래의 간부이든 관리들은모다 몰려 나와섯는데 이와가튼 변동이 잇는 통에 그곳 산북공립보통학교(山北公立普通學校) 교장인 李相華도 제절로 재래로 가지고 잇든 청년회장의 자리를 내노케 된 후 청년회의 변혁에 대하야 반대와 불평을 갓고서 여러 가지로 방해를 하는 동시에 산일청년동맹을 불량자의 모임이라고 공언하며 조선청년총동맹에 대하야서도 낫분 선전을 하엿다 하야 그 동맹에서는 리상화에게 경고문을 발송하엿든 바 지난 십팔일에 문경경찰서에서는 청년회 문서를 압수하는 동시에 그 회 간부 蔡熙鎭씨를 구인하고 십구일에는 상주에 잇는 靑年總同盟 집행위원 姜壎씨를 상주경찰서를 통하야 문경서에 인치중이라는데 보통학교 교장이 경찰서와 협력하야 청년운동을 압박것하는을 일반은 크게 분개한다더라. ② 지난 십팔일에 聞慶 경찰서에서는 문경군 산양면에 잇는 山一靑年同盟에서 극소 山北공립보통학교 교장 李相華에게 경고문을 발송하엿다는 일로써 청년동맹의 문서를 압수할  아니라 간부를 인치하고 尙州에 잇는 靑總집행위원 姜壎씨를 구인한 일에 대하야 조선청년총동맹에서는 다음과 가티 결뎡하엿다 한다. ◊决議: 一. 聞慶 警察의 無理와 山北公普校長의 ○動에 關한 일을 詳細히 調査키 爲하야 執行委員 許弘濟君을 出張케할 것, 一. 慶北地域內에 잇는 各 靑年團體로 하여금 各其 最善의 方法으로써 聞慶無産靑年運動의 進行을 積極的으로 擁護 後援케할 것.

51) 《동아일보》1926년 1월 26일자.

52) 《동아일보》1925년 7월 24일자. 자세한 내용은 심상훈, 「1920년대 영양지역의 민족운동」(김희곤 외, 『영양의 독립운동사』, 2006) 참조.

53) 조선불교청년회는 1920년대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불교 청년 항일운동단체이다. 1920년 6월 韓龍雲이 중심이 되어 동국대학교 전신인 中央學林의 學僧 청년들을 모아 항일구국투쟁을 위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항일구국운동과 함께 佛敎維新會를 조직, 한용운을 중심으로 불교유신운동도 겸하여 활발히 전개한 바 있다. 이들은 30본산 주지 가운데 혁신·유신을 지지 찬성하는 세력으로 하여금 1923년 宗數院을 설립하여 ‘寺刹令’을 미끼로 횡포하는 교무원과 대결하였다. 이때 한용운은 일본불교의 한국 침투와 한국불교의 일본화를 억제하기 위한 ‘臨濟宗운동’에 힘쓰고 있었는데, 이는 1911년 이래 지속된 그의 집념이었다. 1922년 3월경 전조선청년단대회를 주최한 단체 중의 하나로 활약하였다. 그 뒤 이 단체는 ‘조선불교총동맹’으로 이어져 활동을 계속 전개하였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참조).

54) 《동아일보》1921년 7월 13일자. 당시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東京留學生講演團一行은 去 九日慶北聞慶郡山北面金龍寺萬歲褸에서 講演會를 開하얏는대 錢藏憲氏의 開會辭가 有 한 後 三人合唱과 風琴소리는 聽衆을 快樂케 하얏다 따라서 講演을55) 《동아일보》1921년 7월 26일자. 당시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京城留學生佛敎講演/ 金龍寺에서 京城에 留學하는 學生으로 組織된 講演團 一行은 去 二十一日聞慶郡 邑內에 到着하야 聞慶靑年會後援으로 同會 會長 ○柄○民 司會下에 開講한 바 金圓祥君은 「살기爲하야」란 題로 朴奎潤君은「希望와 채찍」이란 題로 金道鉉君은 「價値的 生活」이란 題로 各各 熱變을 吐하야 만흔 聽衆에게 不少한 感覺을 주엇스며 間間히 風琴소리와 合唱 又는 바이올링의 妙音 은 더욱히 會衆의 心神을 快樂케 하얏다더라.

56) 東大七十年史刊行委員會, 『東大七十年史』(1906-1976), 1976, 29쪽. 학칙강령의 주요 내용은 제1조에 지방학림은 조선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할 預修를 위함을 목표로 한다. 제2조에서 수업연한은 3년으로, 학기는 3학기제로 규정하고 있으며 제5조에 입학자격을 연령 13세 이상으로, 보통학교 졸업자 또는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규정하였다.

57) 盧時學, 『鄕聞錄』, 泰興印刷社, 1973, 433쪽.

58) 김룡사 지방학림의 만세운동에 대해서는 店村聞慶文化院, 「김용사 지방학림 만세사건」(《계간 점촌‧문경문화》13, 1991)과 이 책의 3‧1만세운동의 전개 참조.

59) 《조선일보》1921년 6월 25일자(석). 당시의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慶北 聞慶郡 山北面 金龍寺에셔 學校를 設立야 十餘星霜을 經過도록 靑年子弟를 敎育야 옴은 己히 報道얏거니와 今年에는 入學者數는 크게 增加되얏시나 學校가 狹小야 다 밧지는 못게 됨으로 만히 拒絶얏는 一般人士의 學父兄은 悶歎不己면셔 落涙를 不禁다는 이졔 보더는 크게 擴張기 爲야 金龍, 本末 兩寺間에셔는 累次協議를 開催얏다더라.

60) 《조선일보》 1921년 6월 25일자(석). 당시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慶北 聞慶郡 山北面 金龍寺에 勞働夜學을 設立한지 旣히 三個星霜을 經야 오든바 今年에는 入學者數가 크게 增加되야 大盛况中이나 講堂의 陜窄으로 設立當局者及 學父兄 諸氏는 크게 心慮中인 不遠間 敎室의 擴張을 計畫中이라더라.

61) 《동아일보》1921년 9월 30일자. 당시의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朝鮮佛敎靑年會 金龍支會機關으로 去年부터 組織된 金龍里 勞動夜學校는 今年에 三學年까지의 多數한 生徒가 有하야 着實做去하는 바 今番該 靑年會 主催로 本月十五日에 大運動會를 開催하야 多數한 賞品이 有 하얏스며 其他餘興까지 잇섯는대 觀衆은 二百餘名에 達하야 盛況을 呈하얏다더라.

62) 《조선일보》1921년 12월 11일자(석).

63) 《조선일보》1924년 9월 22일자(석). 당시의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慶北 聞慶郡 山北面 金龍寺勞動夜學校의 主催로 去番秋夕節을 機會로 秋季大運動會를 開催하얏는데 觀衆이 五百餘名에 達하얏고 來賓의 同情金도 不少하얏다더라.

64) 《동아일보》1925년 9월 27일자.

65) 《조선일보》1925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1925년 4월 14일‧8월 12일자.

66)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 1, 고려대학교 아세아연구소, 1979, 69-70쪽.

67) 李江, 「조선 청년운동의 사적 고찰(하)」, 『현대평론』(식민지시대자료총서 13), 478쪽(김일수, 「1920년대 경북지역 청년운동」에서 재인용).

68) 《동아일보》1926년 1월 26일자;《조선일보》1926년 1월 28일자. 당시의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慶北聞慶郡內에 잇는 聞慶靑年會와 山一靑年同盟이 提携하야서 郡內靑年運動의 統一을 期코자 하야 左記時日場所에서 聞慶靑年郡聯盟大會를 開催한다 하며 先進聯盟의 도음이 잇기를 바란다고. ① 時日 一月 三十 一日, ② 場所 聞慶郡 山陽面 縣里 山一靑年同盟 事務所.

69) 《조선일보》1926년 2월 15일자.

70) 《동아일보》1926년 10월 24일자.

71) 《조선일보》1929년 11월 3일자. 당시 신문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경북 聞慶에 잇는 衡平社員 팔십여명은 지난 이십구일 오후 팔시부터 동군 麻城面 南湖里 李成春씨 집에서 형평사 문경지부 설립준비위원회를 열고 본부의 李俊鎬씨 사회로 다음과 가튼 결의가 잇섯다더라. ① 聞慶支部 設立大會 期日 十一月 二十二日, ② 場所 聞慶邑內.

72) 경북지역에서 청년동맹이 결성된 지역은 대구‧김천‧안동‧선산‧상주‧문경‧예천‧영주‧봉화‧영덕‧영일‧경주‧영천‧청도‧고령‧성주‧칠곡‧군위‧영양 등 19개 군이다.

73) 《중외일보》1928년 1월 14일자.

74) 《중외일보》1928년 7월 22일자.

75) 『왜정시대인물사료』(경희대학교 소장본). 당시 문경청년동맹의 회비는 10전이었으며, 이를 토대로 회를 운영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76) 《조선일보》1928년 2월 27일자. 당시 신문에 기록된 재만동포 지원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聞慶靑年同盟 第一回 執行委員會에서는 재만 동포 옹호동맹 동정일 조직하고 지난 6일 제1회 동정일을 문경군 점촌면에서 제2회 동정일을 동군 산북면 대하리(山北面大下里)에서 뎨3 동정일를 동군 산양면 불암리에서 각각 거행한 결과 각디 유지제씨로부터 알에와 갓튼 동정이 드러왓다는데 동정자에 씨명과 금액은 다음과 갓다더라. 第 一回 店村 金十圓 李鍾鳳 金五國 崔源基 金三圓 黃一旅舘 金二圓 金在淵 趙英一女史 崔炳鶴 無名氏 姜明○ 太○○女史 ○桂淑女史 陳明花○ 李荗○ 趙貴鳳 金一圓朴文普 劉有卜 許環 申鉉强小姬女史 安洪蓮女史 潘○元 金奉敎 李在學 ○明秀 郭男壽李春澤 李命和 黃時寬 白好喆 文東㔼 金漢宗 朴根煥 金宗漢 金昌元 朴熙胤 金五十錢金八述 尹福伊 李萬永 李基昌 金寅泰 朴氷鐸 無名氏 尹漢根 朴鳳俊 鄭在龍 文炳熙 黃哲熙 金三十錢 劉晶植 金二十錢 張秉護; 第 二回 山北 金二圓 朴贊福 朴○延 金智熙 金一圓 朴○敎 金柱鉉 張師都 金○泰 金浩鎭女史 張氏 朴敬錫 金五十錢 金正珍 朴汶緖 朴明緖 金二十錢 朴泳鶴 以上; 第 三回 金一圓五十錢 崔鍾冕 金一圓 柳時源 李延大 李相起 李富成 河永浩 高道勳 山內五郞 金五十錢 無名氏.

77) 《동아일보》1928년 3월 30일자.

78) 《중외일보》1928년 8월 23일자.

79) 《중외일보》1928년 5월 28일자.

80) 《중외일보》1928년 5월 2일자.

81) 《시대일보》1928년 8월 11일자.

82) 《조선일보》1928년 2월 3일자. 당시의 신문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慶北 聞慶에서는 新幹支會를 設置코저 支會設立準備委員會를 組織한 後 各 方面으로 會員募集에 奔忙하든 中 會員 定數以上에 達하엿스며 其他 準備가 完成되어 本部의 承認지得하엿슴으로 左記와 如히 支會設立大會를 開催할 터인바 一般은 多數參席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며 當夜에는 京城本部에서 來參한 特派員의 講演도 잇슬 터이라더라. ① 時日 一九二八年 二月 五日(陰 正月 十四日), ② 場所 慶北線 店村 聞慶驛前 靑年同盟.

83) 《동아일보》1926년 10월 25일자. 一. 思想總同盟에 關한 件, 二. 中央協議會에 關한 件,三. 會友募集의 件, 四. 宗敎問題에 關한 件, 五. 異流團體의 件, 六. 民族主義 團體의 件,七. 靑年運動에 關한 件, 八. 勞働運動의 件, 九. 農民運動의 件, 十. 女性運動의 件, 十一.衡平運動의 件, 十二. 敎養運動의 件.

84)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 379-385쪽.

85) 강덕상‧梶村秀樹, 『현대사자료(29)』, 106-108쪽.

86)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255쪽; 《동아일보》1928년 12월 22일자‧1930년 9월 6일자. ① 경북 聞慶郡 店村 申奉日외 륙명의 不敬罪 暴力行爲取締規則違反 橫領 피고 사건의 예심은 종결이 되어 대구디방법원 공판에 부쳐엇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어니와 지난 십칠일 동 법원 제 이호 법정에서 金川재판장 주심 山澤검사 립회로 공판을 개뎡하얏섯는데 불경죄만은 공개금지를 하엿섯는바 사실 심문이 끗나자 립회 산택검사로부터 신봉일에게 일년 륙개월 기타 여섯명에게 각 팔개월식의 구형이 잇섯고 담임 변호사 金完燮씨의 변론이 잇섯는데 판결 언도는 오는 이십삼일이라하며 불경죄 사건의 내용은 듯은바 臺灣에서 생긴 모사건 범인에 대하야 어떤 불경 언동을 쓴 것으로 범인은 그 중 신봉일 한명뿐이라더라. ② 尙州署活動 多數靑年檢擧 문경에서도 청년을 검거 共産黨組織嫌疑로 : 尙州警察署에서는 소위 尙州共産黨이라 하야 다수 청년을 검거하야 저번에 일단락을 지은 모양이드니 지난 이일 오전 열한시경에 聞慶郡 店村에 거주하든 청년 申奉日을 또한 그 용의자로 검거하야다가 방금 엄중히 취조하는 중이라고 한다.

87)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388쪽. 기록에 따라 이현구‧李見求로 명기된 경우가 있다.

88) 《조선일보》1926년 2월 12일자.

89) 《조선일보》1926년 8월 26일자. 이 신문기사에는 ‘문경노동친목회’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문경노동조합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90) 《동아일보》1926년 9월 3일자. ① 我等은 互相扶助의 法則에 依한 新社會 建設에 役 이 됨을 自任함. ② 我等은 朝鮮農村의 里重搾取인 事賞의 根絶과 階級的 平等을 期함. ③ 我等은 處地와 環境이 同一한 階級的 大同團結로서 我等無産階級의 當面의 經濟的 最大利益을 위하야 鬪爭함.軍91) 《동아일보》1926년 9월 3일자. 가. 組織問題에 關한 件, 나. 小作權移動 及 賃金勞動者問題에 關한 件, 다. 敎養問題에 關한 件, 라. 農村改良問題에 關한 건, 마. 小作人의 生活 及 勞動者의 生活과 農村産業調査에 關한 件, 바. 會舘設置에 關한 件, 사. 會員마-크에 關한 件, 아. 本會創立 記念式에 關한 件, 자. 會員改稱에 關한 件, 차. 勞總 及中央協議會 加盟에 關한 件.

92) 《동아일보》1926년 10월 7일자. 一. 小作權保障에 關한 件, 一. 小作料 運搬에 關한 件,一. 反動分子 處置에 關한 件, 一. 中間 小作 及 惡地主에 關한 件, 一. 敎養에 關한 件.

93) 《중외일보》1928년 6월 27일자.

94) 「自大正十一年至昭和十年內地及朝鮮に於 ける社會運動等の槪況對照(一)」, 『휘보제9호, 1936. 12. 「부록」29쪽(지수걸, 『일제하 농민조합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3에서 재인용).

 



목차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