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1930.40년대 문경사회와 민족운동 /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연구

2014. 5. 14. 17:55나의 이야기






       


제6장 1930.40년대 문경사회와 민족운동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연구 / 문경시 발간자료 

2012/02/2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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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Ⅱ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제6장 1930.40년대 문경사회와 민족운동 

 

  

제1절 1930.40년대 일제의 군국정치와 문경사회 

 

    1. 전시총동원체제와 민족말살정책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1937년에는 중일전쟁, 1941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한국자원을 군수물자로, 한국인을 전쟁터나 군수공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군사력과 경찰력을 증강하고 통제기구를 더욱 강화하였다. 1936년 12월 공포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은 민족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시켰다. 또한 중일전쟁 후에는 ‘국가총동원법’(1938.5)을 적용하여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하려고 했다.1) 일제는 이러한 침략전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농업과 공업을 함께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농공병진農工竝進’을 주장하며, 군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 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독점자본은 한국의 값싼 노동력과 지하자원을 노리고 한국에 본격 진출하여 식민지 공업화를 이루어 나갔다. 이 시기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회사의 업종은 전기‧화학‧기계‧금속중심의 중화학공업과 군수공업자금과 원료를 획득하기 위한 금‧은‧철‧석탄‧알루미늄등의 광공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일제는 중국대륙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군수산업을 육성함과 동시에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했다. 황민화정책黃民化政策이라는 이름아래 한민족의 철저한 일본인화를 추구하였다. 1937년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해 1면面 1신사神社 설치를 추진하고, 각종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제창하도록 강요하였다. 1938년에는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강령 아래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명칭‧교육내용 등을 일본인 학교와 똑같이 만들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였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 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의 성姓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일본식으로 성을 바꾸지 않는 사람의 자식은 각급 학교에 입학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43년에는 다시 조선교육령을 대폭 개정하여 군사교육‧노무동원을 도입하고, 수업연한을 단축하여 학생들을 전시에 동원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 문경군에 있었던 교육기관들도 모두 일제의 조선전시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을 맞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발족되면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중국과의 전쟁에 대처하고 국가총력전에 대비하여 국민운동의 통제를 강화하고 정보선전의 필요로부터 거국일치‧진충보국盡忠報國‧견인지구堅忍持久‧내선일체 및 황국신민화라는 목표를 갖고 시작된 것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하부조직으로 행정단위인 도‧부군도府郡島‧읍면‧정동리町洞里 등의 지방연맹과 관공서‧학교‧회사‧은행‧금융조합‧공장‧상점 등의 각종 연맹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애국반을 두었다. 이 조직은 1940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 부문의 여러 운동을 통합하여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재편되었다.

  이에 따라 1940년대까지 존재했던 문경군의 관공서인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출장소‧금융조합‧군농회‧삼림조합국유지소작인조합‧문경개척회사‧면사무소 등이 모두 전시총동원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2)

 

  2. 몰락하는 문경의 농민들

  1920년대 산미증산정책을 비롯한 농민수탈정책과 금융자본독점, 지주의 수탈로 인해 조선 농민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져 생존권을 위한 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투쟁은 독립운동으로 상승‧발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새로운 농업정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1931년 조선총독 우가키[宇垣一成]는 조선 농민들의 가난은 근본적으로 농민이 게으르고 낭비가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농민 스스로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력갱생’과 ‘진흥대책’을 내세웠다. 이것이 바로 ‘농촌진흥운동’이었다. 즉 농민들이 잘살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며, 농업경영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노동강화‧근검절약‧노동절약 농업경영의 합리화를 외치며 읍면, 경찰‧학교는 물론 농회와 금융조합 등을 동원하여 농촌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1930년대 농업진흥정책과 더불어 각종 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들 단체는 농촌진흥조합‧부인회‧공려조합共勵組合‧공려청년단 등 다양한 명칭으로 조직되었다.

  일제는 농촌진흥운동의 대책으로 1932년 ‘자작농지창설유지사업自作農地創設維持事業’과 ‘조선소작조정령朝鮮小作調整令’, 1934년 ‘조선농지령朝鮮農地令’을 발표하였다. ‘자작농지창설유지사업’은 지주‧소작인관계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판단한 일제가 이를 다소 완화시키기 위해 농민들에게 자금을 빌려주어 자작농지를 구입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조선소작조정령’은 일제의 사법기관이 빈번한 소작쟁의를 조정하여 농민들의 저항을 가라앉히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조선농지령’은 ‘지주와 소작인의 협조‧융화를 내세우며, 마름의 중간 수탈금지, 재해시 소작료 감면, 소작기간 규정을 통한 소작권 보호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본질은 농민들의 불만을 무마시켜 식민지배를 원활히 하고, 특히 당시 크게 일어나고 있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막아 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실패와 더불어 1940년대 들어서 실시된 강제공출 정책은 조선의 농촌을 다시 한번 기아에 허덕이게 했다. 자가용과 종자용을 제외한 모든 쌀은 의무적으로 조선총독부에 일정한 가격으로 갖다 바쳐야 했다. 나중에는 할당제, 부락책임 공출제가 실시되었으며, 잡곡에까지 적용되어 전체 생산량의 40~60%를 전쟁용 식량으로 빼앗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농촌은 매우 궁핍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문경 농민들의 생활도 더욱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세계경제공황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여 생산가를 밑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식민지농민에겐 더욱 가혹한 현실이었다. 식민지농민 중에서도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소작농들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 문경 또한 1930년대에 들면서 이와 관련한 자료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문경군은 1920년부터 소작농이 꾸준하게 늘어갔다. 문경군 농민들의 소작지는 62%가 문경군에 거주하는 지주의 토지였다. 나머지 30%의 면적은 경북도내 지주, 8%는 도외道外 지주의 소작지였다. 이는 문경에 살고 있지 않은 외지인의 토지 면적이 38%로 전국이 31%, 경북이 34%를 점유하고 있는 것에 비해 높은 비율이다.3)

[표-1] 군내 경지면적 및 1호당 평균4)

면 명

전(町)

답(町)

계(町)

1인당(町)

1호당(町)

聞 慶

778.6

407.9

1,186.5

86

16

麻 城

1,029.9

353.2

1,383.1

1.27

23

加 恩

1,054.8

793.0

1,847.8

94

23

籠 岩

9,855

612.8

1,598.3

1.02

35

虎 溪

6,426

515.5

1,158.1

1.05

25

戶西南

5,326

750.9

1,283.5

97

18

永 順

703.9

923.0

1,616.9

1.32

31

山 陽

717.3

825.9

1,640.8

1.01

27

山 北

1,081.2

884.0

1,965.2

94

16

東 魯

788.8

569.7

1,358.5

98

19

身 北

572.8

415.6

988.4

93

94

合 計

8,985.6

7,051.5

16,117.1

11.29

3.27


[표-2] 군내 소작지면적 비율 및 부재지주‧일본인 소속 소작농의 비율5)

구분

소작농
(A)

군내소작지 면적의 비율(%)

부재지주 소속
소작농가

일본인 지주에게
소속된 한국인

군내지주
소작지

도내지주
소작지

도외지주
소작지

호 수
(B)

비 율
(B/A)

호 수
(C)

비 율
(C/A)

문경

6,025

62%

30%

8%

3,985호

66.1%

921호

15.3%

경북

76,415

66

25

9

90,785

33

29,229

10.6

전국

2,093,106

69

18

13

778,787

35

320,294

15.3


  또 면단위에 있어서도 면외面外에 거주하는 지주에게 소속된 소작농가는 11%(총 1,009호 중 112호)로 89%의 농가가 면내지주에게 소속된 농가였다.

  문경군의 지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농장 242호,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경영하는 회사농장에 소속된 농가가 22호, 일본인 개인 경영지 679호,사령지寺領地 757호, 종계지宗契地 286호, 향교지 64호, 면유지 17호, 부락유지 176호, 부재지주 3,985호였다.6) 동양척식회사나 일본인지주에게 소속된 농가는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문경군의 자작과 소작을 하는 농가는 13,387호이다. 이 가운데 자작이 2,622호, 자소작 4,740호, 소작농 6,025호이다. 이들 농가 중 약 57%가 춘궁농가春窮農家였다. 이를 계층별로 살펴보면 자작농은 30.8%, 자소작농은 43.4%, 순소작농은 78.9%가 춘궁상태였다.

  [표-3] 1930년 자작‧소작농민중 춘궁민 또는 고용노동을 하는 농가수7)

구분

春窮상태에 있는 농민호수

생활곤란으로 고용노동에종사하는 소작농민호수(소작호수에 대한 비율)

자작농

자소작농

순소작농

문경

807
(30.8%)

2,059
(43.4%)

4,753
(78.9%)

7,619
(56.9%)

4,085
(85.7%)

경북

13,477
(20.0%)

47,129
(36.1%)

84,289
(57.8%)

144,895
(42.1%)

82,193
(29.7%)

전국

92,304
(18.4%)

323,470
(37.5%)

837,511
(68.1%)

1,253,285
(48.3%)

775,106
(37.0%)


  이는 전국이나 경북의 춘궁농가 평균치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은 숫자이다. 또 소작농가중 생활 곤란으로 임금노동을 하는 농가도 약 4,085호로 전체 소작농가의 85.6%에 이르고 있다.8) 이러한 상황에서 소작권을 박탈당하는 사례도 늘어갔다.
9)

[표-4] 1930년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의 부채상황10)

구분

자 작 농
자소작농
순소작농

부 채 농 가

보통부채액
(원)

보통부채액으로환산한 부채총액(원)

최고부채액  (원)

농가수(호)

비율(%)

문경

13,387

10,174

76

59

600,266

517

경북

288,795

210,821

73

55

11,595,155

441

전국

2,247,194

1,733,797

75

65

101,112,620

420

  다음으로 문경군의 부채현황을 살펴보면 [표-4]와 같다. 문경의 자소작농과 순소작농은 65%가 부채농가로 보통 24원의 부채를 지고 있어, 타 지역에 비해 부채액은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1933년 《동아일보》에 의하면 부채는 1인당 107원으로 늘어났다. 문경의 채무자는 거의 한국인이었으며, 채권자는 일본인이 많았다. 채권기관으로는 일본인은행‧금융조합‧회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소작농이 금융조합이나 저축계를 통해서 대부를 받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보통은 금대업자(고리업자)‧지주‧시장상인들에게 차입했다.11)

  지주들은 금융조합이나 은행을 통해 저리로 융자를 받아, 다시 고액의 고리채로 농민들에게 대부를 하고 있었다. 부채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주의 부채는 토지구입비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소작농가는 농양비農糧費와 비료‧농우 및 농업자금이 대부분이었다.12) 이것은 농사개량에 필요한 자금을 소작인이 모두 떠맡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소작농은 높은 소작료와 각종 공과금‧비료 등의 부담으로 매년 적자상태를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매년 춘궁을 겪으면서 고리채는 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문경의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특히 1934년 수해로 인해 동로‧가은‧농암면 3개면 일대의 화전민 2,000여명은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다. 동로면은 호수 1,300호, 인구 7,500명으로 그 가운데 1/3은 화전민이었다. 경지면적도 답畓이 700정, 전田이 500정보 밖에 안 되는 영세한 상황이었다.13) 결국 살 길을 찾아 유리걸식하는 문경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14)

  「남南에서 북北으로 가는 고향을 등진 이민移民, 눈물로 서러히 고향을 떠나는 그들, 문경과 예안禮安서 370여명」작년의 수해와 조랭早冷으로 인하야 경북 문경군 동로‧가은‧농암 등 삼면 일대의 화전민 2,000여명은 농작물이라고는 한 알도 수확 못하고 초근과 목피로 연명하여 오다가 그것마저 다하여 조집을 삶아 먹는 등 기아의 선상에서 방황하고 있다함은 누차 보도하였거니와 이들의 구제책으로 당국에서는 삼천여원의 예산을 가지고 구제중이나 홍로점설에 지나지 못 하던 바 또 다시 이들 중에서 40호 211명 황해도黃海道 안악군安岳郡 대행면大杏面 저도리猪島里 가등농장加騰農場으로 이민을 하게 되어 지난 26일 오후 1시 40분 임시열차로 안동‧예천 양군에서 오는 이민 600명과 합하여 점촌店村역을 떠났던 바 본보 지국에서는 차중車中의 건강을 위하여 영신환 수 100갑을 나누어 주었다 한다.15)

  「문경의 궁민窮民 40호를 이주, 궁상은 차마 볼 수 없어」 경북 문경군 동노면東魯面 일대는 작년 수해로 7,000여 이재민을 내게 되어 그들은 식량결핍으로 살 길이 없어 닥쳐오는 춘궁이 더욱 생명을 위협할 것임에 벌써부터 살길을 찾아 남부여대하야 유리걸식의 길을 떠나는 사람이 부지기수며 남아 있는 그들의 참상은 목불인견과 이에 대하야 문경군청과 관계당국에서는 이런 현실의 응급구제책을 세우기에 주야로 부심 중이던 바, 요즈음 도 당국 보조금 1,300원과 일반의 동정금을 합하여 2,500여원으로 우선 좁쌀을 구입하야 연명을 시키는 한편, 뽕나무 20만 본本을 재배시켜 영구적 부업을 삼게 한다 하며 40호 가량의 이민을 모집하야 황해도로 이송하리라 한다.16)

 

 

제2절 1930년대 이후 국내민족운동의 전개양상과 특성

 

  1930년대 이후 국내 독립운동은 군국파쇼체제가 강화되고 전시수탈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대중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1920년대의 농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청년운동‧여성운동 등 대중운동을 계승‧발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해체(1928), 광주학생운동의 발발(1929),신간회 해소(1931) 등 일련의 상황 변화가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특히 조선공산당 해체 이후 전개된 당 재건운동은 대중운동을 확대,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8년 조선공산당이 해체된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당 재건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방향은 지식분자 위주의 당으로부터 농민‧노동자‧소부르주아지 등 대중에 기초하여 아래로부터 위로 전위당을 재건한다는 것이었다.

  재건방식은 농민‧노동자 등 기층민중 속으로 들어가 이들을 결집하여 혁명적 대중조직을 건설하고, 그 토대 위에서 당을 재건한다는 방침이었다. 특히, 선先 혁명적 대중조직 건설, 후後 당 재건이었다. 예컨대 혁명적 농민조합‧노동조합 등 대중조직을 먼저 건설하고, 이들을 기초로 해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는 것이었다.17)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결합되어 1930년대 전반기 전국 각지에서 혁명적 농민조합‧노동조합‧학생조직 등 대중운동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의 조직형태나 운동노선은 1920년대 대중운동과는 크게 달랐다.

  합법적 표면단체가 아닌 비밀지하조직으로 결성되었던 것이다. 운동양상도 일반적인 소작쟁의나 노동쟁의‧동맹휴학 등 종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주로 식민통치기관에 직접 대항하는 정치투쟁으로 전개되어 종래의 경제권익투쟁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로써 대중운동이 193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 대중운동 가운데 가장 치열한 투쟁양상을 보인 것이 농민운동이었다. 그것은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농촌경제도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고, 여기에 일제가 침략전쟁수행을 위해 농업수탈을 강화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회주의운동가들이 농민대중을 조직하고 빈농 출신의 활동가를 양성하면서 혁명적 농민조합을 전국 각지에 조직하였던 것이 주체적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농민운동의 주체와 노선에도 변화가 생겼다. 1920년대 소작쟁의는 소작조합이나 농민조합이 주도해 왔으나, 이 시기에는 혁명적 농민조합이 주도하였다. 운동노선도 종래의 소작료 인하 및 소작권 이동 반대 등 경제 권익투쟁에서 반제‧반일 정치투쟁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전쟁물자수탈에 저항하여 부역동원반대, 군수용 물자 강제수매 반대 등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상설 투쟁기구를 조직하거나 면사무소‧주재소‧경찰서 등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다.18)

  노동운동은 기존의 공업 중심지역과 병참기지화정책에 따라 새로 발달한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서울‧경기지역과 함경도 지방이 노동운동의 중심지였고, 신의주‧평양‧목포‧부산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도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들 지역의 공장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산업별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그것이 사회주의 운동자들의 세례를 받아 혁명적 노동조합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혁명적 노동조합이 공장과 각종 사업장에서 파업을 지도하는 등 투쟁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혁명적 노동조합의 활동은 ‘태평양노동조합사건’‧‘평양적색노동조합사건’‧‘마산적색노조사건’ 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학생운동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전개되었다. 학생운동은 조직형태나 활동상에서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각종 독서회‧반제‧반전 동맹 등의 비밀지하조직 형태의 학생운동이었다. 이는 학생들의 독자적 운동이라기보다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나 다른 부문의 사회운동과 관계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계몽운동을 위주로 하는 학생운동이었다. 학생들의 주도 아래 문자보급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야학을 설립하여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것도 학생들이었다.

  여성계의 민족협동전선으로 근우회 해산 이후 여성운동은 각 부문운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일제의 침략전쟁과 군국파쇼체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여성의 독자적인 운동기관이나 운동노선은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여성운동은 농민조합‧노동조합을 비롯하여 반제‧반전운동 의 모든 사회운동 부문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운동이 전개되었고, 기독교 여성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1944년 8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며 여운형의 주도 아래 국내에서 비밀결사 형태로 조선건국동맹이 결성되었다. ‘건국에 대비하기 위해 주체세력을 조직적으로 준비 편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조선건국동맹은 결성 이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 갔다. 아울러 중경시기의 임시정부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연결을 도모하고자 연락원을 파견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서로 실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광복 직전인 1945년에는 민족통일전선을 더욱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조선독립동맹과의 교섭을 위해 김구가 직접 연안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국무위원인 장건상을 연안으로 파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구체적 결실을 얻기 전에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각기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19)

  이렇듯 1930년대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은 대중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농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이 사회주의운동가들의 참여와 영향으로 정치투쟁, 즉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표출하여 갔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 국내 독립운동의 주체는 부르주아계급에서 기층민중으로, 이념은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화轉化되면서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의 날을 열었던 것이다. 한편 193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특징은 국어‧국사 등 국학연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민족문화말살에 대항한 국학수호운동은 독립운동의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제3절 학생운동과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사건

 

  1. 일제의 학교 병영화 정책

  1920년대까지 학생운동의 보편적인 투쟁형태는 동맹휴업이었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 해산 이후 동맹휴업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소수 정예의 비밀조직으로 일제 통치에 대항하였다. 특히 사회주의 성향을 강하게 띠었으며, 노동‧농민운동과 결합하여 운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달리 언론기관이나 종교단체가 주도하는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합법적인 운동을 전개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1940년 이후부터의 학생운동은 계몽운동‧실력양성운동의 형태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력항쟁을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일본의 패전이 예상되는 객관적인 정세의 변화였다.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전시체제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전쟁 수행을 위한 공출‧징용‧징병 등 수탈을 극대화시켜 나갔다. 이를 위해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일본인과 같은 교육방침 아래 황국신민을 길러내고자하였다.

  교육령의 개정으로 조선어는 필수과목에서 삭제되고 선택과목이 되었지만, 공립학교에서는 이마저도 대부분 제외되고 말았다. 또한 역사와 지리 과목의 중심내용은 천황숭배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1943년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군사교육‧노무동원 과목을 대폭 도입하고, 수업연한을 단축하여 학생들을 전시에 동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하여 학생들을 징병하였다. 또한 1944년에는 ‘학도군사교육 강화요강’과 ‘학도동원 비상조치요강’을 발표하여 학생들을 군사조직으로 바꾸고 근로동원태세를 정비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조치는 학교가 더 이상 학생들을 교육하는 기관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군인 양성 기관으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학교가 군사 병영으로 변하고 학생들이 강제 징병되는 상황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헛되이 죽기보다는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는 분위기가 학생들 사이에 강하게 확산되었다. 또한 국외 방송의 청취를 통해 일제의 패망을 예상한 학생들이 무력투쟁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비밀결사조직이 전국 곳곳에서 결성되었다.

  2. 대구사범학교 항일운동과 문경인

  대구사범학교(이하 대구사범)는 1929년 6월 1일 초등교원 양성기관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사범학교는 서울‧평양‧대구 등 세 곳에만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일제는 충실한 황민화皇民化 교육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들 학교를 설립하였다. 보통 사범학교는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해야만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민족문제에 대한 의식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구사범은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을 선발하여 운영하였지만, 차별 대우가 없을 수 없었다. 대구사범은 5년제로서 2종 훈도를 양성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오랑캐의 힘으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말처럼 한국인의 황민화교육을 한국인 손으로 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사범학교였다.

  일본인 교사들의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모욕적 차별이 학생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깊게 했다. 현준혁玄俊赫‧염정권廉廷權‧김영기金永騏와 같은 한국인 교사들은 민족적 자존심이 강하여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침략을 시작한 일제는 학교를 병영기지로 만들고자 하였고, 학생들에게 ‘근로보국대’란 이름을 붙여 강제 노동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차별적인 교육과 강제 노동은 자연히 학생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하나 둘씩 모여 비밀결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대구사범에는 1940년부터 비밀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문예부文藝部‧연구회硏究會‧다혁당茶革黨 등이 그것이다.20) 문예부는 1940년 11월 23일 대구사범 8‧9‧10기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11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연구회는 1941년 1월 23일 8기생을 중심으로 했으며, 회원은 14명이었다. 다혁당은 1941년 2월 15일 9기생이 중심이었으며, 18명의 회원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문예창작‧학술연구 등을 결성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한국어‧한국역사 등을 학습하여 장차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문경인으로 서진구(1921~1944)가 다혁당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다. 그는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1년 2월 15일 동교생 권쾌복‧배학보‧문홍의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 소재 류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1941년 대구에서 조직되었던 학생비밀결사단체이다.21) 대구사범학교 7회생들을 중심으로 한 1939년 7월의 대관작업장 저항사건 이후, 이 학교 학생들은 일제에 대한 감정적‧일시적 충돌이나 산발적인 저항보다는 학생들의 반일민족의식을 조직화 해 장래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비밀결사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표면상 문예활동을 표방하는 ‘문예부’와 학술연구를 표방하는 ‘연구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정기적인 회합을 가지고, 문예작품의 발표 및 감상, 여러 부문의 학술연구발표 등을 통해 민족의식‧항일정신을 고취해 나갔다. 그러나 1941년에 들어와 문예부와 연구회의 학생들이 대거 졸업하게 되자, 문예부‧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9회생 류흥수柳興洙‧문홍의文洪義‧이동우李東雨‧이주호李柱鎬‧박우준朴祐寯‧권쾌복權快福‧배학보裵鶴甫 등 16명이 2월 15일 류흥수의 하숙집에서 집회를 열고 항일비밀결사인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목표는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하고, 조국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해 결사 투쟁하는 데 두었다. 교내의 항일운동에 그치지 않고 대외적으로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사에까지 침투하기로 결의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하였고 당수 권쾌복와 부당수 배학보 밑에 총무‧문예‧연구‧예술‧운동 등의 부서를 두고 활동하였다. 실천규약으로, ① 당원은 비밀을 엄수할 것, ② 당원은 주 2회 회합하고, 간부는 주 1회 이상 회합할 것, ③ 각 부장은 책임을 지고 하급생을 지도 양성할 것, ④ 당원은 당수의 명에 절대 복종할 것, ⑤ 당원은 결당結黨한 자만에 한하고 신규가입을 인정하지 말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 단체를 결성한 학생들은 하숙집을 이용해 회합을 거듭하면서 운동상황을 보고하고, 각 부문의 확대 강화책을 협의하였다. 또,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 등을 토의하였다. 이들은 졸업 이후 전국 각지로 흩어져 교직생활을 하면서 끊임없는 인격도야와 학술연구로 조국광복의 원동력이 되며, 교직을 통해 학생들에게 장기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재학 때의 결의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제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2년여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제4절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문경인

  사회주의운동은 문경에서뿐만 아니라 타 지역으로 출향한 인사들에 의해서도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중 1930년대 조공재건운동그룹으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던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인물이 있다.

  문경출신으로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했던 인물로는 정재철이22) 있다. 1930년을 전후한 시기 국내‧외 상황과 국제혁명운동을 지도하던 코민테른의 노선이 변화함에 따라 국내 사회주의세력의 운동노선도 바뀌게 되었다. 즉 이 시기에는 조선공산당재건운동과 계급운동을 지향하는 혁명적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이란 1928년 말 세계 사회주의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던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이 ‘당’으로서의 승인을 취소당한 뒤, 이를 재건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이 전개한 운동을 말한다.

  1920년대 조선의 독립과 사회 제 모순의 해결을 위해 활동했던 사회주의 세력은 운동의 헌신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1920년대 말 일제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탄압이 유례없이 강화되어 사회주의세력이 검거되었으며, 이로 인해 지하활동뿐 아니라 대중운동에 대한 지도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세력의 또 하나의 문제는 주체적 조건, 즉 사회주의세력 내부의 한계였다. 조선공산당의 당원이 대부분 소부르조아지, 지식인으로 생산현장에 기초를 두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세력간의 분파로 유기적인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건상 지하 활동을 벌여야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 문제는 사회주의세력 내부에서도 제기되었지만, 문제의 해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국제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고 있던 코민테른의 ‘조선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일명; ‘12월 테제’)였다. 12월테제는 1930년대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의 일반적인 활동방침을 제시한 문헌이자 당재건테제였다.

  경성콤그룹도 기본적으로 12월테제에 입각하여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1939~41년 대중조직 건설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적으로 박헌영朴憲永‧김삼룡金三龍‧이관술李觀述 등이 중심이 되어 경성(서울)‧함경남북도‧경상남북도에서 활동한 조직이다. 이 시기에 일제는 내선일체를 통한 대륙병참기지의 확보를 위해 각종 전시통제기구 설치와 악법 제정을 통해 조선민중을 억압‧통제했다. 또한 민족해방운동은 전향자의 속출, 운동자들 사이의 동요와 대립의 심화, 운동의 분산성과 소그룹화 경향의 심화로 인해 어려운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단야가 1938년 12월경 국내에 들어와 이순금李順今‧이관술‧김삼룡 등과 함께 1939년 4월경에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

  노동자‧농민‧학생의 조직화를 시도했던 경성콤그룹은, 1940년 2월말경 박헌영과 이현상이 조직에 가입하면서 함경도의 장순명張順明, 경상도의 권우성權又成 등이 지도하는 각 지방조직들과 조직적인 연계를 맺고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앞으로 재건될 조선공산당의 지도 아래 ‘결정적 시기’에 도시폭동전술에 입각하여 일제를 전복한다는 방침이 서 있었다. 이때 경성콤그룹은 계급‧계층‧정파‧성별‧종교 등을 구별하지 않고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여 ‘인민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경성콤그룹은 일제하 국내운동자의 최후의 집결체이며 1945년 9월 11일에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경성콤그룹은 ‘12월테제’‧‘9월테제’‧‘행동강령’ 등 ‘국제노선’에 입각하여 “먼저 대중적인 조직을… 하고 이것을 발전시켜 조선공산당을 재건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23) 박헌영 중심의 활동가들이 사용한 경성콤그룹이란 명칭은 권영태 등의 활동을 ‘정통노선’으로 인정하여 “조직체로서는 이르지 않았지만 경성공산주의자그룹의 이름”을 ‘인계하여’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24) 경성콤그룹은 “조선의 수도인 경성을 중심으로”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25) 경성콤그룹의 이러한 운동방침은 과거 당재건운동세력, 곧 ML파의 공산주의자협의회가 대구를 중심으로, 재건성파의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가 함흥과 흥남을 중심으로 당재건운동을 조직, 전개하려 했던 것과는 다른 방침이었다.

  경성콤그룹은 조직의 지도자이면서 기관지 편집을 책임지고 있던 박헌영을 정점으로, 각 지역에 산재해 있는 활동가들을 견인하여 지역차원에서의 혁명적 대중조직의 건설에 우선적인 역량을 투입했다. 이때 각 지역간의 활동가 파견, 출판물 교환, 뉴스의 교환 등은 있었으나, 엄격히 말해 하나의 조직체계 안에 있는 지도‧피지도 관계는 아니었다. 조직문제의 측면에서 볼 때 지역 나름대로 상대적 독자성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박헌영을 중심으로 주요지도자들의 정치적 지도는 관철되고 있었다. 경상도에서 경성콤그룹의 활동은 권우성을 정점으로 하면서, 이안호李安鎬 등을 중심으로 한 창원군 상남면에서의 농민조합운동, 이기호李基鎬를 중심으로 한 부산지역의 노동조합운동, 대구에 있던 정재철의 출판준비활동 등이 있었다. 정재철은 1934년 1월 말 창신동의 음식점에서 변기학卞奇學을 만나 서로 제휴하여 활동하기로 하였으며, 12월 말 변기학의 소개로 김복금을 만났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권우성을 만나 그의 지도를 받다가 7월 하순에는 반전 격문을 살포를 계획하고 아울러 변기학에게 반전일의 의의를 설명하고 노동자에 대하여 선전할 것을 협의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부터 7월에 걸쳐 선광인쇄 직공 신후봉申後奉과 경성고무공장의 여공이자 함께 동거하던 맹계임 및 동대문 밖 공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변기학을 지도하였다. 한편 정재철과 제휴한 변기학은 손술석孫戌釋‧김만기金萬基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34년 6월 20일 그는 광성학원 부근의 채석장에서 이들을 만나 공장 내의 활동에 진력할 것, 조선의 운동은 ‘그 특수성을 고려하여 점진 완전주의를 택할 것’ 등을 협의하였다. 정재철의 운동부분은 이전에 이재유그룹에 속했던 운동자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예컨대 맹계임은 제1기 트로이카 시기 용산에서 변홍대의 하위 트로이카에 속해 경성고무공장을 중심으로, 김복금은 동대문 밖 이현상의 트로이카에 속해 조선견직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김복금은 다시 김만기‧변기학과 함께 제2기의 재건그룹에서 활동하다가 정재철의 운동에 가담하였다.26)

1) 이하 본고 일제의 문화통치와 문경사회와 관련하여 특별한 각주가 없는 부분은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술총서ⓛ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지식산업사, 2007)을 참고로 함.

2) 朝鮮總督府, 『慶北大鑑』中, 韓國地理風俗叢書(61), 1936, 1236쪽.

3)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下卷 續編, 1932, 4쪽.

4) 朝鮮總督府, 『慶北大鑑』中, 韓國地理風俗叢書(61), 1936, 658쪽.

5)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下卷 續編, 1932, 83쪽.

6)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下卷 續編, 1932, 82쪽.

7)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下卷 續編, 1932, 112‧117쪽.

8)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下卷 續編, 1932, 112‧117쪽.

9) 《동아일보》1935년 12월 22일자; 現金으로 納付시키든 地稅를 正租로 强要 불응한다고 소작권을 박탈.

10)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下卷 續編, 1932, 142-148쪽.

11) 《동아일보》1933년 10월 27일자; 「문경농가 부채 일인당 107원」 문경군의 작년 농가 부채는 총액이 163,705원이라는데 계급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지주 328,500원, 자작농 405,840원, 자작 겸 소작농 645,840원, 소작인 250,915원이라 한다. 이것을 인구별로 보면 1인당 107원이라고 한다.

12) 朝鮮總督府, 『朝鮮ノ小作慣行』下卷 續編, 144쪽.

13) 《동아일보》1935년 2월 24일자.

14) 《동아일보》1935년 2월 24일자; 《조선일보》1935년 3월 29일자; 《동아일보》1934년 12월 25일자.

15) 《조선일보》1935년 3월 29일자.

16)《동아일보》1935년 2월 24일자.

17) 김영범, 「1930년대 독립운동의 특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참조.

18) 지수걸, 『일제하 농민조합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3 참조.

19) 한시준, 「1940년대 전반기 독립운동의 특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참조.

2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3, 799-833쪽 참조. 이 자료집에 판결문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2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9, 1977; 『독립운동사자료집』13, 1977; 민족운동총서편찬위원회, 『학생운동』, 1982.

22)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440쪽. 정재철(1907~?)은 鄭載鳳‧沈仁燮‧金海喆‧富永載轍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활동하였다. 1927년 3월 문경 산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일보사 文選工 견습으로 취직했다. 1929년 5월부터 12월까지 오사카[大阪]의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했다. 이루 서울에서 인쇄소 직공으로 일하면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1937년 7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9년 3월 만기출옥한 후 경성콤그룹에 참여하여 대구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1940년 12월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1944년 8월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강원지부 조직 책임을 맡았고, 1945년 11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고, 1948년 8월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3) 「이현상피고인신문조서」, 112-113‧115-116쪽.

24) 「이현상피고인신문조서」, 13쪽.

25) 「이현상피고인신문조서」, 19쪽.

26) 김경일 지음, 『이재유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3, 234-235쪽; 『이재유, 나의 시대나의 혁명』, 푸른역사, 2006, 256-259쪽.

 

 

목차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