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문경인 /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연구

2014. 5. 14. 17:56나의 이야기






       

제7장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문경인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연구 / 문경시 발간자료 

2012/02/2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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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Ⅱ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제7장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문경인 

 

  

제1절 일본에서 활동한 문경인, 박열1) 

 

   1. 박열의 성장과정과 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

  1) 박열의 출생과 성장

  박열은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리(현 문경시 모전동 311번지)에서 태어났다.2) 본관은 함양咸陽으로 아버지 박지수朴芝洙와 모친 정선동鄭仙洞 사이에 1녀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혁식赫植이었으나 일찍부터 열烈로 불렸고, 호적에는 준식準植이라 적혀 있다.3)

  태어난 지 몇 해 되지 않아 가족은 마성면 오천리[샘골]로 옮겼다.4) 거기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일찍이 일제가 광산촌을 만든 곳으로 알려진다. 또 1906년부터 인근 산지의 삼림과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 마을자치 활동을 펼치는 성산조합星山組合이 결성되고, 1919년 1월 권농조합으로 바뀌었다. 박열의 형 정식은 조합원이 되고, 1921~1922년 무렵 마을 구장을 맡아보았다.

  박열의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집안으로 지방 사민士民이었다. 하지만 식민지시기에 들어 자작과 소작을 겸하는 자소작농 수준으로 떨어졌다.5) 1906년 박열의 아버지가 사망할 무렵까지는 논과 밭이 각각 1,500평 정도씩 있어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 뒤로 3형제의 학비 조달과 보중채무, 가족의 병구완등으로 재산이 넘어가는 바람에, 1919년경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박열은 7세인 1908년 서당교육을 받았다. 그는 8세까지 서당에서 천자문에 이어 『동몽선습童蒙先習』‧『자치통감自治痛鑑』등을 배웠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 시행으로 그는 준식에서 이름을 열烈로 바꾸었다.6)

  열 살이 된 1911년 박열은 집에서 16㎞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이 지방 최초로 설립된 4년제 학교에 통학하거나 함창의 고모부 김필부金必夫 집에서 기숙하기도 했다. 이 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그는 민족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 같다.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한인 교사가 그동안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교육을 시킨 것을 학생 앞에서 눈물로 사과하고 한국 역사의 존엄성을 일깨워준 일은 그의 생애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했다.7)

  “일본교사는 경찰의 형사”라는 한인교사의 말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으며, 박열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공부하여 뒷날 후진을 위해 일하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박열은 농사를 지으라는 맏형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관비로 공부할 수 있는 관립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도장관의 추천을 받아야 했는데, 박열은 입학시험에 합격한 후 추천을 받아 진학하였다. 재학 중 그는 일본식 학교교육에 반발하여 각종 시국강연회나 집회에 참석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는데, 그 가운데 일본인 교사로부터 고토쿠 슈스이[辛德秋水]의 ‘대역사건大逆事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흥미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1919년 고보 3학년이던 박열은 3‧1운동을 맞아 조선독립신문을 경성전역에 배포하는 한편, 각종 만세시위에 뛰어들었다. 이윽고 그는 ‘학교에서 쓸 데 없이 날을 보낼 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고 시위운동에 투신하였다. 고향 문경에 내려온 뒤에도, 그는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를 꽂고 격문을 뿌리는 등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박열은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아래 일본에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18세 되던 1919년 10월, 박열은 마침내 서울역에서 부산을 거쳐 현해탄을 건넜다.8) 도쿄에서 그는 신문배달과 날품팔이‧우편배달부‧인력거꾼‧인삼행상 등의 노동에 종사하면서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다녔다. 동경에서 막노동하며 고학하던 박열은 1920년 2월 한 ‘오뎅’집에서 가네코후미코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2)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만남

  1903년 요코하마 태생인 가네코 후미코는 야마나시현[山梨縣] 히가시야마나시군에서 험난하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의 불화가 심했고, 아버지가 이모와 불륜을 저지르자, 어머니는 여섯 살된 그녀를 데리고 가출해 버렸다. 어머니 역시 방직공장에 다니다가 석달 뒤 다른 남자와 동거하였고, 후미코에 대한 학대도 심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호적에 오르지 못하는 무적자無籍者였으므로 소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더욱이 자신을 인신매매하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절망했다. 이때를 후미코는 “아버지는 나에게서 도망쳤으며 어머니 또한 이렇게 나를 버렸다.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슬프도록 저주했다.”고 털어 놓았다.

  1912년 가을 후미코의 어머니는 한국에 살고 있던 숙모집에 그녀를 맡기고 재가해 버렸다. 9살 나이에 충북 청주군淸州郡 부용면芙蓉面으로 옮긴 후미코는 여기서도 심한 학대를 받았다. 고리대금업을 하던 그녀의 고모부는 그녀를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추운 밤에도 밥을 주지 않은 채 문밖에서 떨도록 만들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1912년 12월부터 부강芙江심상소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여, 부강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그녀의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고 책도 많이 읽었으며, 성격이 밝아 대꾸하거나 반항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학적부에는 그녀가 5학년 수료식(1914년 3월)에서 ‘학업우수상’을, 이듬해에도 같은 상을, 또 1917년 3월 졸업식 때에는‘학업 및 품행 우수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9) 하지만 한국에서 받은 심한 학대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불안하고, 겁에 질려 있었으며, 불안정했고, “한국 생활은 나의 좋은 점을 모두 파괴하고 성장을 막았으며 왜곡시키고 성격을 삐뚤게 한 지옥이었다.”고 회고했다.

  후미코는 학대 속에서도 한인과 거리감 없이 친하게 지냈다. 하루 종일 굶주린 그녀에게 한인 아낙네들이 베풀어준 동정에, 그녀는 “조선에 머문 7년 동안 이때만큼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에 감동한 적이 없었다.”고 적을 정도였다. 숙부의 고리대금업에 착취당하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해서도 동정과 이해를 갖게 되었다. 더욱이 1919년 3‧1운동이 부용면에도 번져 연일 시위가 전개되자, 그녀는 한국인이 바라는 독립의 절박함과 일제의 학정을 몸으로 느꼈다. 이 경험이 뒷날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과의 거리감 없는 교유와 박열과의 사상적 공감을 만들었다.10)

  후미코는 1920년 4월 어머니 고향인 일본 야마나시현으로 돌아왔다. 그때 어머니는 두 번째 재혼을 해 그녀의 귀향을 꺼렸고, 심하게는 그녀를 창녀로 팔아버리려 작정했다. 결국 집을 뛰쳐나와 떠돌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나 그녀를 어머니의 남동생에게 결혼시켜 버렸다. 후미코는 이 외숙부에게 처녀성을 빼앗기고, 부정하다는 이유로 파혼까지 당했다.

  끝내 그녀는 헌 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뛰쳐나와, “고학하여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 홀로 도쿄에서 고학을 시작했다.

  도쿄에서 후미코는 신문팔이‧식모‧인쇄소 여직공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유라쿠쵸[有樂町] 스끼야바시[數崎屋橋] 근처에 있는 이와자키[岩崎] 오뎅집에서 일하며 틈틈이 세이소쿠영어학교에 다녔다. 이와자키라는 사회주의자가 경영하는 이 오뎅집은 주로 일본 지식인들과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자주 모임을 갖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원종린元鍾隣‧김약수金若水‧정우영鄭又榮 등 재일 유학생을 만났다. 1922년 2월 정우영의 하숙집에서 그가 제작한 《청년조선靑年朝鮮》 창간호의 교정본을 보게 되었다. 이 잡지에서 그녀는 박열이 쓴 시 ‘개새끼’를 보고 강한 감동을 받았다. 후미코는 정우영에게 박열과의 만남을 부탁했고, 그래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두 사람은 곧 사상 공감을 통해 1922년 5월부터 다다미방을 얻어 동거생활에 들어갔다.11)

 

  2. 박열·가네코 후미코의 반천황제(反天皇制) 투쟁

  1) 사상단체 활동

  3‧1운동의 좌절 이후 당시 동경에서 유학 중이던 한인 고학생들은 나라 잃은 울분과 민족 차별을 겪으면서도 선진문물과 신사상을 통해 점차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달李達‧김약수 등과 함께, 박열 역시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당시 이름 높은 사회주의자들과 적극 교류하였다. 박열은 주로 이와사 사쿠타로와 모찌츠키 하시라[望月柱]의 영향을 받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하면서 아나키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는 한국인의 의열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일본에서 벌어진 한인의 첫 의열투쟁은 1920년 4월 28일 서상한徐相漢의 폭탄투척 시도였다. 이어 투쟁은 1921년 2월 조선에서의 의회개설과 관리임용 등 자치제 시행을 청원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국민협회장 민원식閔元植을 처단한 양근만梁根煥 의거로 이어졌다.

  박열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 1920년 11월경 동경의 조선 청년 15~16명을 규합해 의혈단義血團을 조직했다. 이는 반년 만에 철권단鐵拳團으로 재편되고 1921년 10월경 혈권단血拳團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이 단체는 친일파 인사들이나 한국인을 모욕하는 일본인을 공격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혈권단은 또 1923년 3월 고학생을 중심으로 박살단撲殺團이란 이름을 갖고 활동하였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당시 단원은 박열을 비롯하여 김찬金燦‧정재달鄭在達‧조봉암曺奉巖 등 17명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친일 행위자에게 협박장을 보내 “3일 이내에 활동공간을 떠나라.”고 명령하고, 이를 어기거나 경찰에 알릴 경우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박열과 최규종崔奎悰은 당시 미국유학을 떠나려던 장덕수張德洙가 잠시 도쿄에 머물게 되자, 그를 두들겨 팼다가 구류처분을 받았다. 러시아 레닌 정부에서 지원한 지원금을 유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박열은 당시 도쿄의 한국인 최대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이하 ‘동우회’로 약칭)에서 김약수‧백무‧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였다. 이어 이들은 1921년 11월 29일 원종린 등 유학생들과 함께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신문은 이날 7시경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의 집에 동우회同友會와 흑도회黑濤會의 멤버 20여 명이 에스페란토어語 공부를 명분으로 내걸고 모였으나, 노동문제를 비롯해 단체결성에 관한 여러 가지를 논의했다고 보도하였다.12)

  흑도회의 간사는 박열‧정태신鄭泰信(又影)‧김약수‧정태성鄭泰成‧서상일徐相一‧원종린元鍾隣‧조봉암曺奉巖‧황석우黃錫禹 등이었다.13) 이들은 대개 유학생과 고학생, 자유노동자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14)

  박열과 후미코는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黑濤》의 발간을 맡았다. 이 신문은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7월 10일자 창간호에 이어 8월 10일자로 2회 발간되었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박열이었고, 발행소 역시 그의 주소지였다. 두 사람은 낮에는 한국인삼 행상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밤에는 편집작업을 진행했다. 《흑도》는 한 부에 정가 5전을 매겼으나, 회원과 유지에게는 대부분 무료로 배포되었다.

  박열은 당시 니가타[新潟縣] 나카스가와[中津川]댐 공사장에서 일어난 한인 노동자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단으로 파견되어 항의투쟁을 이끌었다.

  1922년 7월 29일자 《독실신문讀實新聞》에 ‘신농천信濃川에 자주 떠내려 오는 조선인의 학살사체’란 제목의 글을 읽고, 김약수‧박열‧백무白武 등은 실행 위원 20명과 일본 사회주의자 다카즈 마시미치[高進正道] 등의 도움을 받아 신농천학살사건조사회信濃川虐殺事件調査會를 조직해 진상조사에 나섰다.

  이어 조사위원들은 9월 7일 학우회學友會와 함께 도쿄 한국YMCA에서 진상 보고회를 열었다. 보고회에는 청중 1천여 명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오스기 사카에[大杉榮]‧고마키 오우미[小牧近江] 등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강사로 참석했고, 한인청중 5백여 명이 참석했다. 이런 상황에 놀란 경찰서장은 불온하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을 강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8명이 구속되었다.

  박열은 니가타[新潟]현縣의 한인노동자 학살사건의 보고와 일본으로의 폭탄반입을 위해 일주일 동안 서울에 머물며 의열단원들과 접촉했다.

  박열이 폭탄반입을 위해 김한金翰과 논의하던 즈음 당시 일본에서는 아나-부르 사상논쟁이 본격화되었으며 이로인해 흑도회는 분열 해체되었다. 김약수‧백무 등 중앙집권적 공산주의 세력은 10월 북성회北星會를, 박열‧정태성 등 직접 행동적 자유연합그룹은 12월 흑우회를 각각 결성했던 것이다.15)

  박열과 후미코는 1922년경 흑우회 사무소를 니시스가모[西巢鴨] 지대地袋 2285로 옮겼다. 두 사람은 우선《흑도》를 잇는 잡지 《후데이센징[太い鮮人]》 1호를 발행하였다. 창간에 실린 ‘발간에 즈음하여’라는 글에 간행취지가 적혀 있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고, 양심적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연대를 희망한다는 내용이다. 두 사람은 1923년 3월 이윤희李允熙‧이필현李弼鉉과 함께 이를 《현사회現社會》로 고쳐 3호(1923년 3월 15일자)와 4호(6월 20일자)를 펴냈다. 잡지 이름을 바꾼 이유는 당시 일본인들이 ‘후데이센징[太い鮮人](무례한 조선인)’이라는 표제를 너무 혐오스럽게 생각하여 광고를 실어주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흑우회는 서상일徐相一과 신영우‧홍진유‧서동성 등으로 진용을 갖추어 기관지 《민중운동民衆運動》을 펴냈다. 편집 책임은 처음에 신영우가 맡다가, 곧 홍진유에게 넘겨졌고, 5월 20일에는 김중한이 이를 맡았다.

  박열은 정부의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고, 1923년 2월 도쿄 시바우라[芝浦]에서 열린 대규모 반대시위에도 참가하였다.16)

  그는 흑우회원들과 5월 1일 도쿄 지芝공원에서 일본 노동단체 주최로 열린 메이데이 행사에서 ‘8시간 노동제 실시’와 ‘조선의 해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17) 또 일본 전선동맹戰線同盟 대표 고미평병형高尾平兵衡이 살해되자, 이들은 7월 8일 열린 사회장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를 계기로 박열은 전선동맹戰線同盟‧말살사抹殺社 등 일본의 급진단체들과 친교를 넓혀나 갔고, 공동으로 시위계획을 세웠다. 이 밖에도 흑우회는 8월 3일 간다[申田]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문제강연회를 열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서울의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와 도쿄 노동자진회勞動自進會 등 노동단체들과 연락관계를 맺는 등 대외 연대활동을 시도하였다.

  2) 불령사(不逞社) 조직과 '박열사건'

  박열은 1923년 4월 중순경 자신의 셋방[豊多摩郡 代代幡町谷 1474번지]에서 불령사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박열‧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해 홍진유洪鎭裕‧육홍균陸洪均‧한현상韓晛相‧최규종崔圭悰‧최영환崔英煥‧이필현李弼鉉‧하일河一‧서동성徐東星‧정태성‧김중한金重漢‧장상중張祥重‧김징金徴‧서상경徐相庚‧박흥곤朴興坤 등 조선인 15명과 구리하라[栗原一男]을 비롯해 아라야마[新山初代]‧노구치[野口品二]‧나가타[永田圭三郞]‧소천무[小天武] 등 일본인 6명으로 총 21명이다. 이들은 주로 박열의 숙소에 자주 왕래하는 고학생 또는 노동자로, 모두 중등학교 정도의 학력을 가진20대 청년들이다.

  자본과 권력에 직접행동으로 맞선다는 점에서 흑우회와 비슷하지만, 불령사는 어떤 규율에 따른 비밀결사 대신 자발적인 대중조직의 방향을 택한 것 같다. 이는 비밀결사가 아니라 공개조직이라는 말이다. 홍진유는 조직결성을 상담할 당시 박열이 “이러한 단체로는 비밀운동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다. 이 단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연구에 그친다.”라고 취지를 설명했다고 증언했다. 후미코 역시 “흑우회원은 비교적 세련된 아나키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나키즘과 거리가 먼 사람들을 규합해 이 주의를 선전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취지가 최초 동기였다고 밝혔다. 이에 홍진유 등 흑우회원 7~8명을 우선 규합한 후에 점차 일본인 노동자를 참가시켜 불령사를 조직했다. 정태성도 결성 당시 아나키즘 연구만이 아니라, 직접행동을 위한 실제 행동에 대해서도 논의하였으나, 직접행동은 회원 자신의 자유의지에 맡기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불령사 회원들은 5월 27일 첫 모임을 가진 뒤 매달 1차례씩 모두 4차례의 정기모임을 가졌다. 활동은 주로 국내에서 일어난 형평운동이나 파업에 후원전보를 보내고, 일본인 아나키스트 모찌츠키하시라[望月柱]의 강연을 듣는 일 등이었다.

  불령사의 회원 가입은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했으며, 탈퇴할 경우 전 회원 앞에서 의사를 밝혀야 했다. 회비징수는 필요에 따라 회원 각자에게 분담했으며, 회의내용은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처럼 창립취지나 주요활동, 내부운영 등으로 보아, 불령사는 비밀결사이기 보다는 아나키즘 사상을 대중에게 보급하고 때론 친일인사를 징계하는 대중적이며 자율적인 ‘열린 조직’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박열은 사상단체 활동과 함께, 직접적인 의열투쟁을 전개한다는 뜻을 세우고 움직였다. 우선 그 해 12월 일본선원 모리다[森田]를 통해 프랑스 등 외국에서 폭탄을 유입할 방도를 논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직접 재료를 구입해 폭탄을 제조하려는 방법도 모색했다고 전해진다.

  박열은 1922년 9월 의열단원 김한金翰과 최영환崔永煥을 서울에서 만나 폭탄 구입을 요청하였다. 이에 김한은 11월에도 서울로 찾아온 그에게 폭탄 전달을 약속하였다. 의열단은 고성능 폭탄을 만주 안동현까지 운반하였으나, 폭탄 일부가 발각되는 바람에 모두 붙들리고, 거사도 좌절되고 말았다.

  1923년 가을, 박열은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 계획을 듣고, 다시 폭탄 투척 계획을 세웠다. 그는 그해 4월 그의 명성을 듣고 도쿄로 찾아온 김중한金重漢에게 폭탄 투척 계획을 전하고 그 비용으로 1천 내지 2천 원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박열은 김중한에게 돌연 이 계획의 취소를 알렸다. 김중한이 애인 아라야마[新山初代]에게 사전에 계획을 알리자, 노출될 위험이 커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김중한은 다음날인 8월 11일 밤 불령사 정기모임 때 박열에게 칼을 빼어들며 크게 반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회원 사이에 갈등이 더욱 깊어졌고, 김중한과 홍진유를 비롯한 일부 회원의 주장에 따라 흑우회 해체를 결의하였다. 이런 내부의 사정으로 박열의 폭탄유입 계획은 자연스레 연기되었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돌연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와 함께 불령선인不逞鮮人과 아나키스트들의 폭동설과 유언비어로 군부, 자경단과 경찰은 6천여 명의 한인을 학살하였고, 6천여 명을 예비 검속 명목으로 경찰서에 강제 구금시켰다. 박열과 후미코도 9월 3일 새벽, 보호검속이란 이유로 세타가야[世田谷]경찰서에 잡혔다. 경찰은 경찰범처벌령 1조 3항인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生業없이 배회하는 자’라는 명목으로 그를 구류 29일에 처하였다.

  검찰의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입 사실이 알려졌다. 이때부터 검찰과 일본 정부는 불령사를 폭동과 천황암살을 꾀한 비밀결사체로, 그리고 폭탄유입계획을 ‘대역사건’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검찰은 10월 20일 박열과 불령사 회원 등 16명을 치안유지법 14조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혐의로 동경지재검사국東京地裁檢事局에 기소하였다. 이날은 한인 학살사건을 다룬 신문기사를 해금시킨 날로,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불령선인의 대역사건’을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검찰은 1924년 2월 15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김중한金重漢 세 사람만을 치안유지법과 폭발물취체벌칙爆發物取締罰則 위반으로 기소했다. 홍진유 등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방면된 것이다. 관동대학살에 대한 시선을 돌리려고 들추어낸‘박열사건朴烈事件’의 마무리가 이렇게 끝난 것이다.

  3) 법정투쟁과 가네코 후미코의 의문사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검찰에 기소된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각각 총 21회와 23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황태자와 정치실권자를 폭살시키려 계획했고, 이를 위해 폭탄구입을 추진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박열은 “일본 천황과 황태자를 폭탄투척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가네코 후미코 역시 그해 가을 황태자결혼식 때를 폭탄 투척의 최적기로 생각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하면 선전 쪽에 중심을 두어 메이데이 축제나 의회 개회식 같은 때에 폭탄을 던지려 했다고 진술하였다.

  박열은 1926년 1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자신을 ‘피고’로 부르지 말 것과 한국 예복의 착용, 한국어 사용, 재판장과 동일한 좌석마련 등 4가지의 조건을 요구했다.18) ‘대역사건’이란 무시무시한 죄목에 비해, 확실한 물증이나 증인을 확보하지 못한 채 박열의 진술에만 매달려야 했던 일본 법무당국은 그의 요구 중 일부를 받아들였다.

  1926년 3월 25일 열린 판결 공판 때의 박열(중앙의 흰옷)과 가네코 후미코(왼쪽 앞) 박열에 대한 첫 공판은 1926년 2월 26일 동경대심원東京大審院 법정에서 열렸다. ‘박열사건朴烈事件’이 ‘대역사건’이므로 바로 대심원에서 심리를 진행한 것이다. 이날 박열은 사전에 요구한대로 한국 예복인 사모관대를 입고 법정에 출두해 반말투로 답변해 나갔다. 초유의 법정투쟁인 것이다.

  나아가 재판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미리 작성한 문건인 「소위 재판에 대한 나의 태도」와 「나의 선언」, 그리고 「어느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일본 권력자에게 주는 글」을 낭독하며 자신의 세계관과 반천황제 투쟁의 정당성을 밝혔다. 후미코 역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한국식으로 머리를 쪽진 채 당당히 자신을 박문자朴文子라고 한국식 이름을 밝혔다. 이날 방청은 관청대표‧종교인‧신문기자 등 150명에게만 허락되었으나, 개정된 지 10분 만에 비공개 재판을 선언해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이어 2월 27일과 28일, 그리고 3월 1일의 4차 공판 역시 비공개로 열렸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한달 뒤 3월 25일 사형을 구형받은데 이어 다음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일본 당국은 4월 3일 두 사람을 무기형으로 특별 감형시킨다는 은사령을 발표했다. 박열은 은사장을 거부했다가 일단 받았으며, 후미코는 이를 받자마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고 한다.

  사형판결 이후에도 이들은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박열은 소리 높여 한국어로 재판장을 질책하였고, 후미코는 법정에서 ‘만세’를 외쳤다.19) 사형선고를 내린 마키노[抆野] 재판장까지도 이에 감동하여, “박열 부부의 죄로 말하면 일본인으로는 말로 할 수 없는 큰 죄이지만, 경우를 바꿔 생각하면 박열만 나쁘다 할 수 없다.”면서 “사람으로서 박열은 두뇌가 명석한 재자才子이니 사회적으로 유익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는 후미코 역시 “가엾은 학대의 역사로 꾸며졌으나, 천재라 할 재주를 가졌다.”면서 두 사람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소감을 밝혔다.20) 이 발언으로 재판장은 곧 사직당하고 말았다. 사형선고를 이틀 앞두고, 두 사람은 결혼신고서를 정식으로 구청에 제출했다. 1926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는 두 사람이 후세 다츠지[布遊辰治] 변호사를 통해 1926년 3월 23일자로 결혼 신고서를 제출해 그날로 수리되었다고 보도하였다.21) 부모로부터 자신의 유해인도를 거부당한 후미코는 옥중 결혼을 통해 박씨 문중에 입적해 한국 땅에 묻히게 된 것이다.

  한편 예심면소豫審免訴로 풀려난 정태성‧홍진우‧육홍균 등 동지들은 두 사람에 대한 물품 차입과 법정투쟁 지원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박열의 친형 박정식朴庭植을 도쿄로 초청하고, 북성회北星會 후신인 일월회一月會와 학우회‧삼월회三月會 등과 협의하여 여비를 보조하였다. 박열과 후미코에게 한복을 들여보낸 것도 여성 사상단체인 삼월회三月會가 맡았다. 또 한현상韓晛相과 다른 회원들은 11월 4일 박열을 방문해 각 단체에서 모집한 기부금으로 물품을 들여보냈다.

  그러던 중 동지들은 1926년 7월 23일 급작스럽게 후미코의 자살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죽음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채, 타살의 의혹 속에, 교도소 측은 그녀를 서둘러 가매장하였다. 이에 원심창‧육홍균 등 흑우회 회원 8명은 곧장 교도소로 몰려가, 매장된 후미코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또 유해를 탈취하려는 일본 경찰에 맞서 싸우다가, 육홍균이 검속되기도 하였다.22) 유골은 동지들의 노력으로 비밀리에 박열의 친형 박정식朴庭植에게 전해졌고, 무사히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옮겨 묻히게 되었다.

  또한 1926년 9월 초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괴사진 사건’이 일본 언론에 알려졌다. ‘괴사진’이란 두 사람에게 호의와 존경심을 가졌던 다테마쓰[立松] 검사와 예심판사가 박열과 환담하던 중, 마침 옆방에 온 후미코를 동석시켜 사진을 함께 찍은 것을 일컫는다. 다정한 포즈로 찍힌 이 사진을 소장하고 있던 박열은 이를 출옥하는 말살사抹殺社의 이시구로[石黑銳一郞]에게 주었고, 이것이 유출되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신문지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담당 판사는 사직하고, 이듬해 내각이 붕괴되는 등 정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제2절 중국에서 활동한 문경인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무너지면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가운데 문경인들은 중국 만주지역과 중국관내지역에서 독립군‧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 등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문경인들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개 그 이름만이라도 떠오르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산북면 대상리 출신 김희중金熙重(이명 金凞重, 1894~1932)은 1921년 1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박용만朴容萬‧이회영李會榮 등이 조직한 조선독립군사령부朝鮮獨立軍司令部에 1921년 5월 가입하여 경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1921년 8월 귀국하여 국내 곳곳에 독립단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이 회의가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같은 해 9월 서울에서 평소 독립운동의 뜻을 함께 하던 황정연黃正淵(문경시 산북면 대상리, 1891~1955)‧이춘구李春求(충북 괴산) 등과 모임을 갖고 군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임을 알렸다. 그리고 황정연을 경리부장, 이춘구를 참모장으로 하는 군사령부를 조직키로 하고 이후 사단 설치를 위한 회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그가 일제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김희중과 황정연은 1921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과 징역 1년을 각각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23)

  출옥 후 김희중은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1928년 1월 10일 중국 봉천(현 심양) 재봉조선인청년회관在奉朝鮮人靑年會館에서 열린 만주조선인대회滿洲朝鮮人大會에 재만동포퇴거문제대책안동현강구회在滿同胞退去問題對策安東縣講究會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만주지역 24개 단체대표 46명이 모여 재만동포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열린 것이다. 여기에서 김희중은 만주조선인대회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재만동포들의 생활안정과 권익보호를 위해 노력하였다.24)

  류성우 예심결정 보도기사(《동아일보》1921년 12월 25일자) 산양면 존도리 출신인 류성우柳晟佑(이명 柳秉義‧柳性佑‧李性中‧李秉義,1890~1922)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국내에서 군자금모금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0년 3월 16일(음력) 류시언柳時彦을 비롯한 몇 명과 함께 권총을 갖고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장수학張守學으로부터 2,100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원하였다.25) 또 그는 같은 해 10월(음력) 이민식李敏軾‧장응규張應奎‧안종운安鍾雲 등과 주비단籌備團에 들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채모집에 참가하였다. 류성우는 10월 20일경(음력) 서울에서 공채증서를 윤용구尹用求에게 팔고자 하였다.26) 그는 이 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2년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 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후 그는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초기에 중경에 위치한 총사령부 외에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의 제1지대(군사특파단)와 수원성 포두包頭의 제2지대, 그리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5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42년 7월 김원봉이 지도하는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편제가 확대‧개편되었다. 즉 조선의용대는 1지대로, 기존의 1‧2‧5지대를 합쳐 2지대로 각각 편성하였고, 1945년 초에 안휘성 부양阜陽에 있던 징모 6분처를 승격시켜 3지대로 편제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병사와 적 후방의 한인 청년을 포섭하는 초모공작招募工作과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 적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교란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서안에서의 중국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안휘성 임천에서는 한국광복군훈련반을 각각 설치하고 모집된 청년들을 광복군 초급간부로 양성하였다. 또한 한국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펼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인도‧버마전선에 인면印緬 전구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벌이는 한편, 미국 전략정보국(OSS; CIA 전신)과 연합하여 국내진입을 위한 요원을 육성하였다.27)

  문경출신 한국광복군으로 알려지는 인물은 모두 2명이다. 김경화金慶華(이명 金貴先, 1919~?)는 문경읍 마원리 출신으로 1939년 12월 한국전지 공작대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 4월 서안의 중앙간부훈련단 학원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다 그는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제1지대에 입대하고, 1942년 9월 중국 호남성에 제9전구장관사령부 대적 선전공작대 소교 정치지도원으로 파견되어 해방 때까지 활동하였다. 또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28)

  다음으로 영순면 포내리에서 태어난 현준석玄準錫(1924~1969)은 일본군을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으로 파견되었다가, 1944년 중국 호남성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이후 그는 1945년 1월 중국 중앙군 제4군 산하 유격대에서 대적對敵 공작활동을 펼쳤고, 같은 해 2월에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 제1분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29)

 

제3절 미주에서 활동한 문경인, 천세헌

 

  천세헌千世憲(1881~1945)은 미주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문경출신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81년 5월 15일 산양면山陽面 부암리富岩里에서 아버지 천병우千秉祐와 어머니 영월엄씨寧越嚴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그는 1885년부터 1901년까지 경북 선산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22세 때인 1902년에는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외국어학교 일어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1년 동안 근대 문물을 배우던 그는 1903년 23세의 나이로 미국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갔다.30)

  천세헌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약 3년간 혹독한 노동을 하다 1907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31)

  그는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조국의 독립운동과 한인동포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 가입하는 한편, 정인탁‧류화식 등과 대한국민회 조직을 시도하였다.32) 뿐만 아니라 그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33) 또 뉴욕 로체스터 지역 신문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한편, 《신한민보》에 글을 기고함으로써 한인동포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어 넣어 주기도 하였다.34)

  1912년 그는 뉴욕 로체스터에서 레스토랑을 개업하고, 1914년에는 식품점으로 업종을 바꿔 3개의 식품 체인점을 운영하였다.35) 1914년 그는 한인동포 사회의 최고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에 가입하고, 1916년에는 안창호安昌浩‧송종익宋鍾翊 등 8명이 민족의 인재 양성을 위해 창립한 흥사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36)또 그는 1919년 3월 17일에 설립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회장으로 선임되어 한인동포의 권익옹호와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37)

  1919년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펼쳐지고,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가졌다.38) 천세헌도 여기에 참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지와 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요구, 외교사무소의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39) 또 1921년 미국에서 워싱턴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서재필 등과 함께 뉴욕대한인공동회를 열고, 이원익과 함께 동포들로부터 특연금을 모집하여 외교선전 경비에 충당하였다.40)

  한편 천세헌은 1921년 9월 29일 대한민족대표단의41) 일원으로 중국 상해로 파견되었다.42) 이곳에서 그는 192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국민대표회 추진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43) 안창호 등과 함께 7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각 단체들의 주장을 조정하고 논의에 참가하였다.44)

  1922년 9월 13일 미국으로 귀환한 천세헌은 샌프란시스코청년회 주최로 환영식을 가졌으며, 이후 미주 중서부 지역인 시카고로 이주하여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한인동포들의 생활과 자치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45) 1933년에는 시카고에서 일본인 송강松江을 처단하여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려고 계획하기도 하였다.46) 또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미주 한인들은 중국의 난민과 재중한국인을 구제하기 위해 중국 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939년 조선의용대를 후원할 목적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로 개편되었는데,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이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47) 1940년 천세헌은 시카고에서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1942년 9월 한국인의 대동단결과 미국 군사정보부와 접촉하여 미주 한인의 대일전 참전문제를 협의하기 바란다는 서재필의 서신을 받고, 그는 미국측과 미주 한인들의 대일참전對日參戰 문제를 협의하기도 하였다.48)

  그러나 그는 해방된 조국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광복을 두 달 앞둔 1945년 6월 14일 서거하였다.천세헌 기념비(문경읍 하초리)

 

1) 본고의 특별한 각주가 없는 부분은 김명섭의 「朴烈‧金子文子의 반천황제 투쟁과 아나키즘인식」(한일민족문제연구, 2003)을 참고하였음을 밝혀둠.

2) 황용건, 항일독립투사 박열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빛, 2002, 21쪽; ‘박열 호적제적부’(충북 진천군 이월면사무소 소장).

3) 咸陽朴氏恥庵公派世譜 卷之二, 428-429쪽; 황용건, 항일독립투사 박열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빛, 2002, 21쪽.

4) 황용건, 항일독립투사 박열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빛, 2002, 22쪽.

5) 황용건, 항일독립투사 박열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빛, 2002, 23쪽; ‘박열 심문조서’(김삼웅, 박열 평전, 가람기획, 1996 참조).

6) 황용건, 항일독립투사 박열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빛, 2002, 26쪽; ‘박열 호적제적부’(충북 진천군 이월면사무소 소장); ‘박정식 증인심문조서’(김삼웅, 박열 평전,가람기획, 1996 참조).

7) 박열이 함창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한 내용은 황용건, 항일독립투사 박열 - 잃어버린역사를 찾아서-, 한빛, 2002, 33-39쪽 참조.

8) 황용건, 항일독립투사 박열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빛, 2002, 53쪽.

9) 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 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산처럼, 2003, 51쪽.

10) 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 가네코 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아나키스트-, 산처럼, 2003, 69쪽.

11) 황용건, 항일독립투사 박열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빛, 2002, 65-66쪽.

12)《동아일보》1921년 12월 7일자.

13)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162쪽.

14) 김명섭, 「黑濤會의 결성과 활동(1921~1922)」,《사학지》31집, 단국사학회, 1998 참조.

15) 김명섭, 「黑濤會의 활동과 이념(1922~1927)」,《한국근현대사연구》11집, 한국근현대사학회, 1999 참조.

16)《동아일보》1923년 2월 13일자.

17)《조선일보》1923년 5월 3일자.

18)《동아일보》1926년 1월 20일자.

19)《동아일보》1926년 4월 21일자.

20)《동아일보》1926년 3월 3일‧3월 4일자.

21)《동아일보》1926년 3월 30일자.

22)《동아일보》1926년 8월 4일자.

23) 「판결문」(1921.12.14, 경성지방법원).

24)《동아일보》1928년 1월 14일자; 국사편찬위원회 편,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3;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아세아문화사,1999, 181쪽.

25) 「판결문」(1922. 7. 25,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22. 8. 21, 대구복심법원); 「판결문」(1922. 10. 2, 고등법원);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71-27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9, 1983, 1106-1109쪽.

26) 「판결문」(1921. 12. 22,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22. 4. 13, 경성지방법원);《동아일보》1921년 12월 25일자‧1922년 3월 26일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0,1983, 1104-1119쪽.

27)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참조.한국광복군 활동지역(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28) 「이청천이 중경시 사회국에 보낸 공문」(1942년 11월 28일); 「제9전구사령부 한적 병사수용 보고 전문」(서중악, 1945); 「한국임시정부 의정원 각 당파 명부」(1940년 3월 15일);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6, 1983, 446-454쪽.

2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6, 1983, 449쪽;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16, 2006, 704쪽.

30) 「애국지사천세헌선생기념비문」(애국지사천세헌선생기념비사업회, 2001); 「천세헌의 자기소개서」(년도미상, 독립기념관 소장);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천세헌 이력서」, 도산안창호전집10, 2000, 783쪽.

31) 「천세헌의 자기소개서」(년도미상, 독립기념관 소장).

32)《신한민보》1909년 3월 31일‧5월 26일‧8월 4일자.

33)《신한민보》1909년 8월 11일‧12월 15일자‧1910년 1월 19일‧5월 18일‧5월 25일‧7월 27일‧10월 12일자.

34)《신한민보》1910년 3월 3일‧10월 12일자.

35) 「천세헌의 자기소개서」(년도미상, 독립기념관 소장);《신한민보》1916년 5월 25일‧10월 19일자.

36) 「대한인국민회 입회증서」(1914);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천세헌 이력서」, 도산안창호전집10, 2000, 783쪽. 이때 그는 한국에서 8년 전에 헤어졌던 朴紀淵과1916년 10월 6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즉 그의 부인 박기연이 그를 만나기 위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면서 1916년 중국 상해에서 차이나호륜선을 타고 9월 3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다(《신한민보》1916년 10월 5일‧19일자).

37)《신한민보》1919년 4월 12일‧1920년 7월 29일자.

38)《신한민보》1919년 4월 15일‧17일‧19일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8,1983, 816쪽; 한국근현대사학회 편,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 2007 참조.

39)《신한민보》1919년 5월 8일‧15일자.

40)《신한민보》1921년 8월 4일자;《독립신문》1921년 10월 28일자.

41) 대한민족대표단은 1921년 8월 미국에서 조직되었다(국사편찬위원회 편,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6, 1971 참조.

42)《독립신문》1921년 10월 14일자.

43)《독립신문》1922년 5월 6일자.

44)《독립신문》1922년 7월 22일자;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Ⅱ, 민족주의운동편, 原書房,1967, 295-296쪽.

45)《신한민보》1922년 9월 21일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2, 1983,1301쪽; 「천세헌의 자기소개서」(년도미상, 독립기념관 소장).

46) 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공훈록13, 1996, 610~612쪽.

4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8, 1983, 735쪽; 최기영, 「조선의용대와미주한인사회,《한국근현대사연구》11,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9 참조.

48) 「서재필이 천세헌에게 보낸 편지」(1942년 8월 31일‧9월 8일, 독립기념관 소장

 



목차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