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 집주 문경사

2014. 5. 14. 20:12나의 이야기






       

7.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집주 문경사 / 개인발간 향토자료 

2012/08/08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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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集註                         

  문     경     사  

 

 

7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차      례                         

  해 설
  번 역
      경상우도(慶尙右道)
         문경현
         상주목(尙州牧)
      경상좌도(慶尙左道)
         예천군


  [해 설]

  이 지리지는 전래돼 온 신후식씨의 가장본(家藏本)으로 표지로부터 앞의 함경도 부분이 없어져 책이름도 알 수 없는 필사본 팔도의 지리지이다.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한성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의 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경상우도란 왕성에서 볼 때 경상도 지역의 우측이란 뜻이고 좌우도 67고을이 수록되고 경상우도의 첫머리에 문경현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가 1407년(태종7년) 9월에 군사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좌우도로 나눌 때 낙동강의 동쪽을 경상좌도, 서쪽을 경상우도라고 했다가 다시 합쳤다. 1519년(중종14년) 6월 13일에도 경상도가 지방이 크고 사무가 번거롭다고 좌우도에 감사를 두었다가 11월 3일에 환원했다.

  임진왜란으로 경상도 지방의 길이 막히자 1592년(선조25년) 8월 7일 다시 좌우도로 나누어 좌도 감영은 경주에, 우도 감영은 상주에 두었다가 1593년(선조26년) 10월 6일 다시 합하여 감영을 성주의 팔거(八 :현재 칠곡)에 두었다. 1595년(선조28년) 2월 4일에 다시 분도가 되었다가 1596년(선조29년)에 합쳐졌다.

  이 지리지의 내용 연대는 경상우도로 분도된 것을 보면 1596년 이후가 되며 칠곡부(柒谷府)의 기록에서 인조 때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장계를 올려 부로 승격한 기록에 의해 이 필사본의 수록내용은 인조 때로 볼 수 있다.

  또한 용연의 기록에서“근래에 참의(參議) 조찬한(趙纘韓)이 세운 정자가 용연의 서쪽에 있고 봉생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조찬한은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 본관은 한양이며, 양정(揚定)의 아들이다. 1572년에 태어나 163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606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참의를 지낸 것이 인조반정 전후이고 근래에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인조 때를 뒷받침하며 필사연대는 효종조인 1650년대로 추정한다.

  수록 항목 구분은 하지 않았으나 건치연혁, 형승, 산천, 역원, 인물 등으로 항목 수가 간략하나 같은 시점 전국의 내용을 수록된다는 점에 뜻이 있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경상우도의 문경현과 상주목, 경상좌도의 예천군에 수록되어 있다.

경상도

-

  우도    -  문경현

-

   문경 마성 호계 점촌 가은 농암

 

 

           └  상주목

-

   영순 산양 산북

 

 좌도     -  예천군

   동로

 

  [번 역]

경상우도 문경현(慶尙右道 聞慶縣)
 

   본래는 신라의 관문현(冠文縣)이고, 별호는 문희(聞喜), 관산(冠山)이다.
   속현으로 가은현〔본현에서 41리다〕이 있다.

  [형승(形勝)]
   연애잔도(緣崖棧道) : “벼랑에 의지하여 사다리 길을 만들었다”
   
함관촉도(函關蜀道)
 : “방비의 시설이 함곡관(函谷關) 같이 정하고 가기 힘들기는 촉나라 길처럼 험하다.”
   
주흘산(主屹山) : 현의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1)
으로 중간에 옛 어류성이 있다. 삼면이 절벽이고 초곡에서부터 산이 감싼 가운데 작은 길이 하나 있고, 그 안은 넓고 물이 마르지 않는다.
   
조령(鳥嶺)
 :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과의 경계로 산 정상 위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방어한 석축이 있다.
   
이화현(伊火峴)
 : 서쪽 18리, 연풍 경계로 연풍 가는 곧은 길이다.
   
계립령(鷄立嶺)
 : 북쪽 28리에 있는데 속칭 지릅산(麻骨山)으로 신라 때의 옛길이다.
   
관혜산(冠兮山)
 : 남쪽 4리에 있다.
   
소둔산(所屯山)
 : 남쪽 15리에 있다.
   
봉명산(鳳鳴山)
 : 동쪽 8리에 있다.
   
희양산(曦陽山)
 : 가은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옛 성이 있는데 3면이 석벽이다.
   
재목산(梓木山)
 : 가은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장산(獐山)
 : 호계 폐현의 북쪽 1리에 있다.
   
관갑천(串岬遷)
 : 토천(兎遷)이라고도 하며 석벽을 파서 돌을 쌓고 사다리 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나 된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이르니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곳으로 길을 열어 갈 수가 있었음으로 토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북쪽의 단봉(斷峯)에 돌로 쌓은 성터가 있는데 옛날에 지키던 곳으로 세상에서 부르기를 고모성이라 한다.
   
용추(龍湫) : 새재 아래 동화원(桐華院)의 서북쪽 1리에 폭포가 있는데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세상에 전하기를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

    어변갑(魚變甲)의 시

용이 꿈틀거려 소용돌이 헤치가도
잠긴 하늘에는 밝은 달이 새롭다.
개인 날 우뢰치고 흰 무지개 뻗치니
황홀타 누가 그 신비를 알리

 

   소야천(所耶川) : 남쪽 6리에 있고 남쪽으로 흘러 가은천과 합친다.
   
가은천(加恩川)
 : 근원의 하나는 속리산이고 하나는 희양산인데 합쳐서 동쪽으로 흘러 용연에 들어간다.
   
용연(龍淵)
 : 남쪽으로 22리, 즉 토천의 상류로 근래 참의(參議) 조찬한(趙纘韓)이 세운 정자가 용연 서쪽에 있고 봉생(鳳笙)이라 한다.
   
견탄(犬灘) : 호계 서쪽 5리로 용연의 하류이다. 근처에 옛 원(院)이 있었는데 지금은 참(站)2)
이 되었다. 도내 행인이 서울을 갈 때 모든 사람이 모여서 숙박했다.
   
조천(潮泉) : 조천은 둘이 있다. 하나는 현의 남쪽 소둔산에 있는 것으로 물이 바위 구멍으로부터  줄 같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솟아 넘치어 번져 가서 멎는 것이 마치 밀물 썰물이 오가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현의 남쪽 5리 정곡리에 있는 것으로 흙 구멍에서 매일 세 번 뿜어 넘쳐 동구로 흘러 소야천으로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물미리〔水推〕라고 부른다. 정곡 조천의 서남쪽 바위 위에 비홍정 옛터가 있는데 가장 맑고 그윽하다.

   경운루(慶雲樓) : 객관 동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됐다.

    함부림(咸傅霖)의 시

눈이 다 녹아 시내 소리 가늘고
연기 사라지니 나무 그림자인가.
누각은 높아서 살갗에 소름 돋고
집은 오래서 기와 위 이끼로다.
밝은 햇살은 산에 기대 조용하고
맑은 바람은 땅 흔들며 불어온다.
난간에 의지하여 상념에 잠겼으니
일에 당하여 헤아릴 바 모르네.

 

   유곡역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유곡도 찰방이 있다.
   
요성역(耳卯 城驛)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3)

    이규보(李奎報)의 시

유곡의 하루 밤을 술 취해 자고나서
요성길 한나절에 말 멍에 풀어 쉰다.
돌아온 완적(阮籍)
4)
은 휘파람만 오래 불고
쓸쓸한 상여(相如)는 벼슬에 싫증났네.
역 아전들 송영(送迎)은 언제쯤 끝이나고
사신들의 내왕은 어느 때 멎으려나
나 같은 한가로운 길손은 다행이다
와도 번거롭히잖고 가는 것 마음대로니

      
    김군수(金君綏)의 시

지난해 단풍 물들 무렵
초헌 타고 남쪽으로 갔더니
올해는 버들 누를 무렵
깃발 돌이어 북극(北極:임금)에 조회 드린다.
만물의 변화는 덧없고
계절은 쉬지 않고 변해도
시냇물이 내 마음 같이
맑고 맑아 한 빛이다.

 

   조령원(鳥嶺院) : 새재 등줄기 동쪽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 계립령에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됐다.
   
회연원(回淵院)
 : 용연의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됐다.
   
불정원(佛井院)
 : 유곡 북쪽 8리에 있다.
   
동화원(桐華院) 
: 현의 서북쪽 15리 새재 아래에 있고, 돌로 담을 쌓았는데 지금은 못쓰게 됐다.
   
견탄원(犬灘院)
 : 견탄의 북쪽 언덕에 있었고, 권양촌(權陽村:近)의 기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화봉원(華封院)
 : 현의 남쪽 4리로 세상에서는 초곡원(草谷院)이라 한다.
   
청화산(靑華山) : 현의 서쪽 70리에 있고 당장(唐將)5) 이여송(李如松)이 이 산에 와서 동쪽으로 뻗은 연엽산(蓮葉山)의 기이한 관경이 많음을 보고 기뻐했다. 명사(明師)가 그 아래 유명한 터가 있다고 했는데 즉 우복동(牛腹洞)이다.6)

   
아자개(阿慈介) : 가은현 사람인데 농사로 자활하다가 뒤에 집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네 아들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견훤(甄萱)은 곧 그 중의 한 아들이다.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견훤을 수풀에 눕혀 두고 점심을 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일설(一說)에는“견훤의 어머니가 몸매와 용모가 단정하였는데 매일 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나이가 와서 잠자리를 같이하고 가는 것을 바늘에 꿰어 그 옷에 찔러 놓고 날이 밝자 그 실을 찾으니 북쪽 담 밑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찔려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베어 견훤을 낳았다”고 하였다.

 

상  주  목(尙州牧)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사불(沙弗)이라고도 한다〕신라 첨해왕이 빼앗아 주를 삼았다. 법흥왕이 상주(上州)로 고쳐 군주를 두었고, 진흥왕이 상락군(上洛郡)을 삼았다. 신문왕이 다시 주를 설치하고 경덕왕이 상주(尙州)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사벌주를 삼았다.

   고려 초에 다시 상주로 고쳤고, 뒤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고쳤다. 983년(성종2년)에 상주목으로 고치고 뒤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귀덕군(歸德軍)이라 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이 절도사를 폐지하고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했다. 뒤에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치고 1018년(현종9년)에 상주목이 되니 8목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조는 그대로 따르고 세종 때 관찰사(觀察使)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없애고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목사로 우도병마절도부사(右道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없애고 진으로 만들었다.

   속현(屬縣) : 산양
   
폐현(廢縣)
 : 영순
   
사불산(四佛山)
 : 산양현 북쪽에 있고 상주에서 거리가 99리이다. 동쪽으로는 죽령과 닿고 남쪽은 화장(華藏)이 가깝고 대승사(大乘寺)가 있다.
   
백련사(白蓮社), 미륵암(彌勒庵)
 : 모두 사불산에 있다.
   
봉수(烽燧) 6처 : 산양

 

경상좌도 예천군(慶尙左道 醴泉郡)
 

   본래 신라의 수주군(水酒郡)인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했다. 고려 초에 보주(甫州)로 고치고 안동에 속했으나 뒤에 기양(基陽)으로 고치어 현령을 두었다. 초토사(招討使) 최광의(崔光義)가 동경의 적을 맞아 군의 경내에서 크게 이겨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했다.

   조선조 때 여러 군현을 개명할 때 보주군으로 하고, 1416년에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했다.

   작성산(鵲城山) : 북쪽 75리에 있다.

 

1) 도성이나 각 고을을 진호하는 주산.
2) 군사상 긴급한 사항에 대비하여 파발을 둔 곳.
3) 요성역을 옲은 시가 유곡역 뒤에 있으나 잘못이라 바로잡음.
4) 진나라 사람으로 휘파람을 잘 불어 유명하다.
5) 명나라 장군인데 잘못 기록했다.
6) 원문의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보아 뒤에 추가로 기록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