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집주 문경사

2014. 5. 14. 20:13나의 이야기






       

6.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집주 문경사 / 개인발간 향토자료 

2012/08/0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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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삼국사기지리지고려사지리지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부 록

  

 

 

 集註                         

  문     경     사  

 

 

6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차      례                         

  해 설
  번 역
      문경현
  건치 연혁(建置沿革)
  속현(屬縣)
  관원(官員)
  군명(郡名)
  성씨(姓氏)
  형승(形勝)
  산천(山川)
  토산(土産)
  봉수(烽燧)
  누정(樓亭)
  학교(學校)
  역원(驛院)
  불우(佛宇)
  사묘(祠廟)
  고적(古跡)
  명환(名宦)
  인물(人物)
  효자(孝子)
  열녀(烈女)
  제영(題詠)
     상주목(尙州牧)
     예천군(醴泉郡)


[해 설]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을 중종의 증수 명령에 따라 이행(李荇), 윤은보(尹殷輔), 신공제(申公濟), 홍언필(洪彦弼), 이사균(李思鈞) 등이 1531년(중종 26년)에 완성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55권 25책이다.

  동국여지승람은 1455년(세조1년) 양성지(梁誠之)가 세종실록지리지의 미비점을 보충하여 1476년(성종7년)에 완성되었으나 노사신(盧思愼)에게 우리나라 문사(文士)의 시문(詩文)을 합쳐 싣도록 명령하여 1478년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을 합쳐서 1차로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고쳐 베끼고 남송(南宋)의 축목(祝穆)이 편찬한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체제를 참고하여 1481년(성종12년) 50권으로 편찬되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동국여지승람을 1485년(성종16년) 김종직(金宗直)이 시문 정리와 인물 등에 대한 교정과 고적, 성씨, 봉수 등의 편목(編目)을 신설하여 1차 수정하고, 1487년(성종18년) 신찬동국여지승람 55권을 간행했다. 2차 수정은 1501년(연산7년)에 임사홍(任士洪), 성현(成俔)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끝내고 1524년(중종19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되어 1526년(중종21년) 이행 등이 신증 보편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찬진하고 1531년(중종26년)에 인출하였으나 임란으로 없어지고 일본 경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서거정이 1차 찬진한 편목은 연혁, 풍속, 형승(形勝), 명산, 대천, 고성(古城), 대채(大砦), 묘사(廟社), 궁실(宮室), 5부(五部), 방리(坊理), 사직(司職), 능침(陵寢), 사단(祠壇), 학교, 정문(旌門), 사찰(寺刹), 사묘(祠墓), 토산(土産), 공부(貢賦), 창고, 누대(樓臺), 원우(院宇), 관방(關防), 참역(站驛), 인물, 제영(題詠) 등 28종류로 자연지리서라기보다 인문지리서에 가깝고 고사(故事), 고전(古傳)에 치우친 역사지리서이다.

  내용은 각도의 연혁과 총론, 관원을 적은 후 관청 단위의 연혁, 관원, 군명, 성씨, 풍속, 형승, 산천, 토산, 성곽, 관방, 봉수, 누정, 학교, 역원, 교량, 위치, 불우, 사묘, 능묘, 고적, 명환, 인물, 시인의 제영 등을 기재했으며 강조된 내용은 연혁, 성씨, 산천, 역원, 고적, 인물 등으로 동국여지승람 이후에 증보된 것을 신증으로 밝혔다.

  경상도는 33~40권에 수록되어 있고 실측도와는 거리가 멀지만 각도의 지도가 처음으로 첨부된 지리지이다.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集成編)으로 지도와 함께 조선말까지 큰 영향을 끼친 지리서로 지리적인 면 외에도 정치, 경제, 역사, 행정, 군사, 사회, 민속, 예술, 인물 등 지방 사회의 모든 것을 종합한 백과전서로 여러 학문에서 필요한 자료가 수록된 중요한 고전이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문경현과 상주목, 예천군에 수록되어 있다.

 

경상도

-

 문경현

-

   문경 마성 호계 점촌 가은 농암

 

-

 상주목

-

   영순 산양 산북

 

-

 예천군

   동로

  1912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활판본으로 간행했고 1960년 동국문화사의 영인본 1969년 민족문화추진회서 한글로 번역판을 간행했다.
 

[번 역]

문 경 현(聞慶縣)

  동쪽은 상주의 경계까지 20리, 남쪽은 함창현의 경계까지 54리, 서쪽은 충청도 연풍현 경계까지 18리, 북쪽은 연풍현의 경계까지 3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77리이다.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신라의 관문현(冠文縣)인데〔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라고도 하고 관현(冠縣)이라고도
    하였다〕경덕왕이 관산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에 소속시켰다.
   고려 때에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치고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
    쳤다. 공양왕 때에 감무(監務)를 두고 조선조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속현(屬縣)
   가은현(加恩縣) : 현의 남쪽 4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가해현(加害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가선(嘉善)이라고 고치어 고령군(古寧
    郡)의 소속으로 하였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공양왕 때에 문경현에 소속하
    게 되었다.

  관원(官員)
   현감, 훈도 : 각 1인

  군명(郡名)
   관문(冠文),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 관산(冠山), 문희(聞喜), 관현(冠縣)

  성씨(姓氏)
   본현 : 최(崔)씨, 장(蔣)씨, 박(朴)씨, 송(宋)씨, 전(錢)씨, 김(金)씨〔선산〕, 박(朴)씨〔殷豊〕
   
가은
 : 전(全)씨, 윤(尹)씨, 변(邊)씨, 연(延)씨, 길(吉)씨
  
 
호계
 : 백(白)씨, 황(黃)씨, 김(金)씨, 나(羅)씨, 방(芳)씨
  
 
병곡(柄谷)
 : 방(方)씨, 신(辛)씨〔다른데서 왔다〕
  
 
견천(絹川)
 : 방(方)씨〔고곡(高谷〕, 적촌(赤村), 소산천(小山川), 마량(馬良)도 같다〕, 황(黃)씨〔다른데서 왔다〕
  
 
벌천(伐川)
 : 심(沈)씨
  
 
잉을항(仍乙項) : 고(高)씨

  형승(形勝)
  
 연애잔도(緣崖棧道) : 권근(權近)의 기문에 관갑(串岬)이 가장 험하고 “벼랑에 의지하여 사다리 길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함관촉도(函關蜀道) : 어변갑(魚變甲)의 시에방비의 시설이 “함곡관(函谷關) 같이 장하고 촉나라 길과 같아”가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산천(山川)

   주흘산(主屹山) : 현의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1)이다.
  
 
관혜산(冠兮山)
 : 현의 남쪽 4리에 있다.
  
 
희양산(曦陽山)
 : 가은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옛 성이 있어 3면이 모두 석벽인데 옛날 군사창고가 있었다.
  
 
재목산(梓木山)
 : 가은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장산(獐山)
 : 호계현의 북쪽 1리에 있다.
  
 
소둔산(所屯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봉명산(鳳鳴山) 
: 현의 동쪽 8리에 있다.
  
 
화산(華山)
 : 가은현의 서쪽, 본 현에서 67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화현(伊火峴)
 : 현의 서쪽 18리, 충청도 연풍현 경계에 있다.
  
 
계립령(鷄立嶺) 
: 속칭 겨릅산(麻骨山)이라고 하는데 방언으로 서로 비슷하다. 현의 북쪽 28리에 있는데 신라 때의 옛길이 있다.
  
 
조령(鳥嶺)
 :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는데 속칭 새재〔草岾〕라고 부른다.
  
 
관갑천(串岬遷)
 : 곧 용연의 동쪽 벼랑인데 토천(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사다리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나 된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이르니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북쪽의 깎아지른 봉우리에 돌로 쌓은 성터가 있는데 옛날에 지키던 곳이다.
  
 
소야천(所耶川)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계립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새재에서 나와 화봉원 앞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관갑에 이르러 가은천과 합친다.
  
 
가은천(加恩川)
 : 가은현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속리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양산에서 나와 함께 동쪽으로 흘러서 소야천과 합친다.
  
 
용연(龍淵) 
: 현의 남쪽 22리 가은과 소야 두 내가 합치는 곳에 있다.
  
 
견탄(犬灘) 
: 호계현 서쪽 5리에 있는데 용연의 하류이다. 나루터가 있으며, 남쪽으로 흘러서 함창현 경계로 들어간다.
  
 
조천(潮泉)
 : 조천은 둘이 있다.  하나는 현의 남쪽 소둔산에 있는 것으로 물이 바위 구멍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근원이 줄같으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솟아 넘치어 3리까지 번지어 가서 멎는     것이 마치 밀물 썰물이 오가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현의 남쪽 5리 정곡리에 있는 것으로 흙 구멍에서 매일 세 번 뿜어 넘쳐 동구로 흘러 소야천으로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물미리〔水推〕라고 부른다
  
 
용추(龍湫)
 : 새재 아래 동화원(棟華院)의 서북쪽 1리에 있다. 폭포가 있는데 4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

   어변갑(魚變甲)의 시

용이 꿈틀거려 소용돌이 헤치가도
잠긴 하늘에는 밝은 달이 새롭다.
개인 날 우레치고 흰 무지개 뻗치니
황홀타 누가 그 신비를 알리

 

   인천(寅川) : 호계현의 동북쪽에 있는데 현에서 거리가 32리이다.

  토산(土産)
   은어, 벌꿀, 석이버섯, 송이버섯, 백화사2)(白花蛇), 잣(海松子), 웅담

  봉수(烽燧)
   선암산(禪巖山) 봉수 : 호계현의 북쪽 7리에 있다. 북쪽으로 탄정산에 연락하고 동쪽으로 상주 산양현의 소산에 연락하며 남쪽으로 함창현의 성산에 연락한다.
   
탄항산(炭項山)봉수 : 현의 북쪽 31리에 있다. 남쪽으로 선암산에 연락하고 서쪽으로 충청도 연풍현의 겨릅재에 연락한다.

  누정(樓亭)
   경운루(慶雲樓) : 객관 동남쪽에 있다.

    이지강(李之剛)의 시

고을의 누각이 겹겹으로 산에 쌓여
조령 길 몇 번을 따라서 돌았던고
뜰 가로 돌아드는 시냇물이 흐느끼듯
마당에 얼룩지며 가득하게 낀 이끼로다
고기잡이 등불이 시내를 건너가고
나무꾼의 노래소리 구름 속 나오는데
많은 시흥들이 경치에 흘렸는지
붓을 들고도 감히 쓰지 못한다.

  
   함부림(咸傅霖)의 시

눈이 다 녹아 시내 소리 가늘고
연기 사라지니 나무 그림자인가
누각은 높아서 살갗에 소름 돋고
집은 오래서 기와 위 이끼로다
밝은 햇살은 산에 기대 조용하고
맑은 바람은 땅 흔들며 불어온다.
난간에 의지하여 상념에 잠겼으니
일에 당하여 헤아릴 바 모르네.

 

  학교(學校)
   향교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驛院)
   유곡역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찰방을 두었다. 유곡도에 속한 18역은 요성, 덕통, 수산, 낙양, 낙동, 구미, 쌍계, 안계, 대은, 지보, 소계, 연향, 낙원, 상림, 낙서, 장림, 낙평, 안곡이다.
   
찰방 : 1인

  [신증(新增)]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이 역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목구멍에 병이 나면 음식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음식이 통과하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이것이 우후(禹侯:유곡도 찰방)가 급히 전해오던 집을 수리하되 유곡을 먼저 한 까닭이라고 유곡에 관사가 있기는 오래 전부터이다. 처음 건립이 언제인지 모르나 겸선(兼善:홍귀달의 字)이 처음으로 서울에 왕래하면서부터 지금까지 40여년이나 처음 볼 때에 낡은 건물이었는데 지금까지 고쳐 지은 일이 없으니 그 얼마나 기울었는지 알 만하다. 큰 손님이 올 때마다 그 누추한 것을 탓하고 길손들은 이전부터 그 좁은 것을 걱정했었으며, 나도 지날 때마다 늘 그것을 한탄했었다.

  1489년(弘治3) 2년 : 성종 20년)에 우웅(禹雄) 공이 나와서 이 역로의 찰방이 되어 그 파괴되고 쇠잔한 것을 소복시키는데 빠진 계획이 없어 걷는 데는 빨리 걸을 수 있고 타는데는 말이 잘 달릴 수 있다.

  역로가 완전하게 되자 여럿에게 의논하기를“아무 역의 관사가 퇴락하고 무너졌으니 이것은 사신을 엄숙하게 대하고 길손을 편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우리보다 앞의 사람이 이미 할 수 없었고, 우리 뒷사람도 기대할 수 없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우리가 그것을 중수하여야 할 것이다. 유곡은 우리의 본 역이요, 큰 손님이 이르는 곳이며 또 남북으로 내왕하는 요충인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을 먼저 하려 한다”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재목은 가까운 산의 나무를 베어 오고 힘은 이웃 역졸에게서 얻고 잘하는 목수를 골라서 당(堂)은 옛터에 새로 세우고, 대청(大廳), 동헌(東軒)4), 서헌(西軒)이며, 나머지 그 밖의 것도 모두 옛것을 수리하였다. 백년 동안이나 허물어져 있던 것을 한 달 안에 훤하게 일신시켰으니 어떻게 그리도 빨리 힘들이지 않고 이루어졌을까?

  당시 겸선은 아버지의 상(喪)을 만나 함창에 있었는데 일찍이 일이 없어 여기를 지나면서 이른바 새로 지은 동서헌에 잠깐 쉬었다. 대마루를 쳐다보고 창에 의지하여 내다보면 마음과 눈이 탁트이는 것이 옛날과는 아주 다르다. 오래도록 배회하면서 매우 흐뭇해 하였다. 우공이 마음쓰기를 부지런히 하고 일 처리에 능숙한 것을 가만히 생각하며 마음속에 두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공이 글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이 우정(郵亭)이 있은 뒤부터 이곳에 찰방과 승(丞)이 있어서 무릇 몇 해 동안에 몇몇 사람이 갈리었는데도 능히 새로 짓지 못하였다. 그것을 새로 짓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아전과 백성에게 해독이 되게 하여 역이 오래되어 쇠잔하였으되 일찍이 그것을 일으킬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은 참으로 우공에 대하여 죄인이다.

  우공은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관리가 되었는데 성품이 민첩하고 게다가 부지런하니 선비이면서 관리이다. 그러므로 정치가 가혹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즐거이 일하는 곳에 나갔으며, 민첩하고 부지런했으므로 힘을 허비하지 않고 쉽게 일을 성취하였으니 참으로 기록할 만하다. 그러나 감사의 어둡고 밝은 것을 하등〔殿〕과 우등〔最〕을 메기는데 있어 이부(吏部)가 인물을 저울질한다면 우공의 현명함이 능히 이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랴마는 여기 한 말을 한다면 세상일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이루어 놓고서 쉬 파괴되거나 파괴되고도 수리하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다. 옛날부터 어질고 슬기로운 선비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침체한 것을 진흥시키고 황폐한 것을 보수할 때에 처음부터 오래 보존하려 하지 않아 그것을 계승하는 자가 항상 잘 지키지 못하고 황폐되어 수리하지 못하는데 이른 것이니 매우 한탄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처음 만든 사람의 마음을 가지게 한다면 세상에 어찌 헐고 무너지는 일이 있겠는가. 이에 불가불 써서 그것을 우공의 뒤를 잇는 사람에게 남기어 경계가 되게 하노라”하였다.

   요성역(요城驛)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시

유곡의 하룻밤을 술 취해 자고나서
요성길 한나절에 말 멍에 풀어 쉰다.
돌아온 완적(阮籍)
5)
은 휘파람만 오래불고
쓸쓸한 상여(相如)는 벼슬에 실증 났네.
역 아전들 송영(送迎)은 언제쯤 끝이 나고
사신들의 내왕은 어느 때 멎으려나
나 같이 한가로운 길손은 다행이다
와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가는 것 마음대로니.

 

    김군수(金君綬) 시

지난해 단풍 물들 무렵
초헌 타고 남쪽으로 갔더니
올해는 버들 누를 무렵
깃발 돌이어 북극(北極:임금)에 조회 드린다.
만물의 변화는 덧없고
계절은 쉬지 않고 변해도
시냇물이 내 마음같이
맑고 맑아 한 빛이로다.

 

   새재원(鳥嶺院) : 새재의 고개 동쪽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 겨릅재 아래에 있다.
   
관갑원(串岬院)
 : 관갑의 북쪽에 있다.
   
회연원(回淵院)
 : 용연의 위에 있다.
   
개경원(開慶院)
 : 호계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불정원(佛井院)
 : 호계현의 서쪽 8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호계현의 남쪽 본 현에서 45리에 있다.
   
동화원(棟華院)
 :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
   
견탄원(犬灘院) : 견탄의 북쪽 기슭에 있다.

   권근(權近)의 기문(記文)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서 약 100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길을 열어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에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내를 건너는데 그 내가 견탄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 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울 위에는 전에 원이 있었으나 지름은 퇴락한지 오래되어 길손이 쉴 곳이 없다. 화엄대사(華嚴大師) 진공(眞公)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다가 개탄하여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띠를 베어 거처할 집을 세웠다. 또 길손을 접대해 가면서 여러 사람을 잘 달래어 재물과 사람의 힘을 모아서 나무를 베어오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다니는 길손이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 또 그 남쪽에 누각 몇 칸을 지어서 길가는 이는 쉬어 가고 구경하는 이는 올라가 보며 지친 사람은 거기서 쉬고 더운 사람은 시원하게 하려고 몇 해 안되어 준공하였다.

  또 그의 제자들과 함께 모진 돌을 깎아서 치우고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하여 관갑의 길을 보수하였으므로 좁은 길, 위험한 사다릿길이 모두 평탄해졌다. 그리하여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아서 걸어가도 몸을 구부릴 필요가 없고, 타고 가도 마음이 떨리지 않아 다시는 떨어질 위험이 없게 되었으니 대사의 마음씀이 부지런하다 할 것이며 사람에게 이롭게 함이 크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 형님 반룡대사(盤龍大師)가 서울 오는 것을 기인하여 나에게 누각의 기문을 써 달라고 하는데 화엄대사와 반룡대사는 같이 뽑힌 이들이다.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겠음으로 삼가 주례(周禮)를 살피건대 무릇 나라의 들에는 10리길에 초막〔廬〕이 있고, 30리에 여관〔宿〕이 있었으며, 또 후세에는 10리에 장정(長亭)하나, 5리에 단정(短亭)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역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을 두어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사(公私)의 구별, 상하(上下)의 구별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역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하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평원의 기름진 땅이 있어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가끔 있었으니 하물며 깊은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임에랴 들에 있어서는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원집이 없어도 잘 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골짜기 외진 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에서 더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대사가 이 원을 일으켜 위험하고 호젓한 길에 사람을 들게 한 것은 그 공이 다른 원을 지은 데 비하여 천백 배나 더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벗이 일찍이 불법(佛法)에서는 모든 유익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길과 다리를 보수하고 원집을 짓는 것도 그 중의 한가지 일이니 그 공덕보은지설(功德報恩之說)을 나는 배우지 않아 잘 모르지마는 대사는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화봉원(華封院) : 속칭 초곡원(草谷院)인데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고려 때 유희(劉曦)의 시

벼슬에서 좌천하여 남녘으로 16역 지나
오늘 아침 비로소 경상도에 들었다.
요성 근처 두어 마장 떨어진 곳에
궁벽한 군 하나 문경이라 부른다.
변두리 새 원집은 형세가 엄숙하고
찬란한 금빛과 푸른빛이 뒤섞여서
동쪽의 작은 누각 뛰어난 경치에다
훌륭한 글들은 옛 팔영(八詠)을 압도한다.
아름답구나 이 집은 그 누가 지었는고
이름은 광문(光文)이요 성씨는 민(閔)씨로다.
나 또한 그 민공 문하의 사람이라
이 건물 창건 보고 더욱 더 공경하네.
아 이 사람이 세상에 머물면서
천하를 경영하면 별 탈이 없었을 걸
어쩌랴 하늘 위에 옥루(玉樓)를 이룩하니
6)

기러기가 하늘 지나듯 그림자도 머물지 안아
티끌 세상과는 떨어져 아들하이
다만 이 한몸이 오램을 탄식한다.

   
   이규보의 시

만가지 인연이 재처럼 찬 노거사(老居士)도
붉은 마음 있어 성인 임금 받든다.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축원하려는데
어찌하여 화봉의 이름 혼자 차지했는고
7)

     
  
불우(佛宇)

   봉암사(鳳巖寺) : 양산사(陽山寺)라고도 하는데 희양산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중〔僧〕지증(智證)8)의 비와 이몽유(李夢遊)가 비문을 지은 중〔僧〕진정(眞靜)9)의 비가 있다.
   금학사(金鶴寺) : 봉명산에 있다.
   오정사(烏井寺) : 선암산에 있다.

  사묘(祠廟)
   사직단(社稷壇)10)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주흘산사(主屹山祠) : 사전(祠典)에 실려 있기를“봄.가을에 향을 하사하여 소사(小祠)를 지낸다”고 하였다.
   성황사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壇)11)
 : 현의 북쪽에 있다.
   희양산사(曦陽山祠), 재목산사(梓木山祠), 장산사(獐山祠) : 모두 그곳에 있는 관원으로 하여금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관혜산사(冠兮山祠) : 주흘산사에서 부제(부祭)한다.

  고적(古跡)
   호계폐현(虎溪廢縣) : 현의 동남쪽 4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호측현이었으며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하였으며 조선조 태종 때에 본 현에 소속되었다.
   벌천부곡(伐川部谷)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곡(高谷)부곡, 견천(絹川)부곡, 소산천(小山川)부곡 : 호계에 있다.
   잉을항소(仍乙項所)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명환(名宦)
   고려 흥달(興達) : 927년(태조10년)에 강주12)(康州)를 순행하려고 사갈이성(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먼저 그 아들을 보내 귀순하였으므로 임금이 가상히 여겨 청주록(靑州祿)을 하사하였고, 맏아들 준달(俊達)은 진주록(珍州祿)을, 둘째 아들 웅달(雄達)은 한수곡(寒水祿)을, 셋째 아들 옥달(玉達)은 장천록(長淺祿)을 하사하였다.
  조선 허종항(許從恒), 조추(趙秋) : 세종 때에 모두 현감이 되었는데 다스린 업적이 있었다.

  인물(人物)
   신라 아자개(阿慈介) : 가은현 사람인데 농사로 자활하다가 뒤에 집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네 아들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견훤(甄萱)은 곧 그 중의 한 아들이다. 처음 견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수풀에 눕혀두고 점심을 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듣고 이상히 여겼다.

  고기(古記)에“옛날에 한 부자가 무진주13)(武珍州) 북촌(北村)에 살았다. 한 딸이 있었는데몸매와 용모가 단정하였다. 어느 날 그 아버지에게 말하기를‘매일 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나이가 와서 잠자리를 같이하고 간다’하므로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네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옷에 찔러 놓아라’하여 그대로 하였다. 날이 밝자 그 실을 찾으니 북쪽 담 밑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찔려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베어 견훤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본전(本傳)과 다르니 아마 믿을 만한 것이 못될 것이다”하였다.

  효자(孝子)
   조선 조형(趙珩) : 벼슬이 사재부정14)(司宰副正)에 이르렀고 어머니를 위하여 시묘하면서 피눈물을 흘려 슬피 울기를 3년동안 하였으며,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세종 때에 그 일이 위에 알려져 특별히 1품을 가자(加資)15)하고 정문을 세웠다.

  열녀(烈女)
  
조선
   최씨(崔氏) : 사직(司直) 안귀손(安貴孫)의 아내이다. 가은현에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치운(致雲)이 시와 글씨를 가르쳤다. 남편이 죽으니 제문(祭文)에

봉황이 함께 날 때 즐겨 노래 부렀는데
봉(鳳)이 돌아오잖아 황(凰)이 홀로 운다.
하늘에도 물어봐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
하늘같고 바다같이 넓은 한(恨)이 끝이없다.

    
  
제영(題詠)

   분단명협리(奔湍鳴峽裏) : 최수(崔脩)의 시에

북쪽을 바라보니 산천이 막혀 있고
남쪽으로 와서는 세월만 흘러간다.
달리는 여울은 골짜기를 늘 울리고
눈 쌓인 벼랑아래 그늘이 뒤덮었다.
충성된 철조만은 마음에 가득하나
화사한 얼굴엔 백발만 늘어난다.
이름 얻는 길에서 무엇을 이뤘던고
부질없이 벼슬 싫탄 노래만 읊었노라.

    
   동밀청운합(洞密晴雲合) : 고려 청포(鄭包)의 시에

동구는 그윽하여 구름 가운데 맑고
높은 누각에 달이 비치니 더욱 좋다.

 

   산기혼여무(山氣昏如霧) : 김구경(金久경)의 시에

산 속 아지랑이 안개같이 아득하고
시냇물은 이끼처럼 푸르구나.

     
   팔영(八詠) 서거정(徐居正)의 시

 주흘(主屹)의 영사(靈祠)
험한 산은 하늘 끝에 닿았고
깎아지른 벼랑은 구름 속에 들어있다.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비록 그 자취 없으나
구름을 일으킴에는 스스로 공이 있다.

관갑(串岬)의 사다리길(棧道)
구불기는 양의 창자 같은 길이
구불구불 새 나는 것 같이 기이 하도다.
봉우리 하나되어 모두 빼어났으니
그런 데로 말 가기가 더디구나.

창밖의 오동나무(窓外 梧桐)
솔솔 부는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데
이지러진 달이 성긴 가지에 걸렸구나.
갑자기 내리는 한밤중 비에
고향 생각을 어이하리

뜰 앞에 버드나무(庭前楊柳)
영남의 그 많은 나그네들
꺾어 주어 이제는 남은 것이 없으련만
의연한 봄바람에 떨치니
긴 가지는 짐짓 여전하구나.

푸른 절벽의 단풍(蒼壁 楓丹)
붉은 잎이 푸른 절벽을 장식하니
강산이 아주 딴판이로구나.
내가 온 때가 마침 늦가을
이렇듯 좋은 경치 일찍이 본적이 없네.

그늘진 벼랑에 흰눈(陰崖白雪)
겨울이 깊어 얼음이 골짜기에 가득해도
봄이 오면 물이 시내를 이룬다.
자연의 모습은 때를 따라 달라지는데
인정은 늙어가며 어지러워지련다.

오정사 종루(烏井鐘樓)
나그네길 시름으로 잠 못 이루는데
외로운 베갯머리엔 달빛만 비쳐온다.
어디가 한산사
16)
이냐
드문드문 울리는 종소리 한밤중에 들려온다.
 

용담폭포(龍潭瀑布)
옥같은 무지개 높다랗게 드리웠는데
흰 눈은 산뜻한 맑음을 뿌려준다.
날고 자맥질하는 술법을 묻지 말고
변화의 신통을 알아야 하리.

 

 

상  주  목(尙州牧)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사불(沙弗이라고도 한다〕첨해왕 빼앗아 주를 삼았다. 법흥왕이 상주(上州)로 고쳐 군주를 두었고, 진흥왕이 상락군(上洛郡)을 삼았다. 신문왕이 다시 주를 설치하고 경덕왕이 상주(尙州)로 고쳤고, 혜공왕이 다시 사벌주를 삼았다.

   고려 초에 다시 상주로 고쳤고, 뒤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고쳤다. 983년(성종2년)에 상주목으로 고치고 뒤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귀덕군(歸德軍)이라 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이 절도사를 폐지하고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했다. 뒤에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치고, 1018년(현종9년)에 상주목으로 정하니 8목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조는 그대로 따르고 세종 때 관찰사(觀察使)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없애고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목사로 우도병마절도부사(右道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없애고 진으로 만들었다.

  속현(屬縣)
   산양현 : 본래 신라 근품현(近品縣)〔달리 근암(近岩)이라고도 하였다〕인데 경덕왕이 가유(嘉猷)로 고치고 예천군에 소속이 되었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 때에 상주목에 예속하였는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명종이 없애고 전대로 소속시켰으며 주 북쪽 63리에 있다.

  진관(鎭管)
   현 5 : 문경

  성씨(姓氏)
   산양 : 유(庾)씨, 신(申)씨, 채(蔡)씨, 방(芳)씨
   영순 : 태(太)씨
   무림(茂林) : 손(孫)씨, 김(金)씨, 심(沈)씨 모두 속성(續姓)이다.

  산천
   사불산(四佛山) : 산양현 북쪽에 있는데 주(州)와의 거리가 99리이다.

  고려 중 진정(眞靜)의 유산기(遊山記)에

  산양현 북쪽에 산이 있는데 동쪽으로 죽령이 연하고 남쪽으로 화장(華藏)을 끌어당기었으니 이산의 이름은 사불이며, 혹은 공덕(功德)이라고도 한다. 산에 사방 10자쯤 되는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을 새기어 별봉(別峯)에 안치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이 그 산에 순행하여 구경하고 그 옆에 절을 창건하였는데 이름을 대승이라 하였다.

  산의 곤방에 절이 있는데 이름은 백련사(白蓮社)이다. 뜰 좌우에 미면정(米  井)이 있고, 또 의상(義湘)이 설법하던 대(臺)가 있고 종려나무 삿갓과 주석지팡이가 있다. 1242년(고려 고종 29년)에 최자(崔滋)가 상주목사로 와서 찾아보니 옛 궁전에 원효(元曉), 의상(義湘)의 진용(眞容)이 있고 삿갓과 지팡이도 아직 탈이 없었다.

  문밖 50보쯤 되는 곳에 높이가 3자나 되는 돌 하나가 있는데 서로 전하기를 금호석(禁虎石)이라고 한다. 20보쯤 되는 곳에 샘이 있어 바위틈에서 졸졸 솟아 나오고 소나무, 가래나무가 울밀하고 아래에 반석이 있어 30명은 앉을만하니 이름이 냉천정(冷泉亭)이다.

  최공이 이에 법조(法曹) 왕공(王公)에게 명하여 역사를 통독하고 새롭게 하여 불우(佛宇), 조당(祖堂), 승료(僧寮), 객실(客室)로부터 허백루(虛白樓)에 이르고 또 냉천정 아래에 누교(樓橋)를 만들어서 이름을 신청교(新淸橋)라 하고 조계산인(曹溪山人) 탁연(卓然)에 명하여 써서 부치게 하였다. 만덕산(萬德山) 백련사가 호남에 있고, 공덕산은 강동(江東)에 있어 동백련(東白蓮)이라고 불러서 구별하였다.

   대조현(大鳥峴) : 산양현 북쪽에 있는데 상주에서 88리다.
   낙동강(洛東江) : 주 동쪽 36리에 있다. 문경의 용연(龍淵)과 군위의 병천(幷川) 여러 물이 주의 동북쪽에 이르러 용궁의 하풍진에 합하여 남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어 선산부 경계로 들어간다.

  봉수(烽燧)
   산양현 소산(所山)봉수 : 산양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문경 호계현 선암산(禪岩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궁현 용비산에 응한다.

  역원(驛院)
   반암원(班巖院) : 산양현 서쪽에 있는데 주까지 57리이다.

  불우(佛宇)
   미륵암(彌勒庵) : 사불산에 있다.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에

  대원(大院)의 고개가 지맥이 갈리어 동남쪽으로 둘러 갈라져 보주(甫州:현재 예천), 산양 두 고을 경계에 이르러 불룩하게 높이 일어났는데 산꼭대기에 큰 돌이 있고 뿌리가 떠서 서 있는데 사면에 모두 부처를 새겼으니 그 때문에 사불산이라 이름하였다. 온 나라의 부처를 신봉하는 자들이 가장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봉우리는 법왕이고, 그 남쪽 돌에 또 미륵보살의 얼굴을 새기고 옆에 작은 절을 지었는데 미륵암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창건한 것이고 암자 북쪽에 묘한 봉우리가 있어 멀리 사불을 향하여 우뚝서 있는데 신라왕이 사불을 바라보고 예를 한곳이라 한다. 세대가 멀어서 집이 무너져 풀숲이 되어 버렸다.

  전 판사(判事) 백진(白瑨)공이 대대로 영해에 살아오는데 계해년 봄에 왜구를 피하여 어머니를 엎고 자빠지며 미끄러지며 간신히 걸어서 두어 고을을 거쳐 이산 아래로 왔다. 이듬해 어머니가 병으로 죽으매 상사를 영위하고 복을 추원(追願)하여 있는 힘을 다하였다. 하루는 울며 중에게 말하기를“내가 부모를 위하여 정려(精廬)를 영건하고 명복을 빌어 조금이라도 망극한 슬픔을 펴려하는데 상처가 커서 아픈 것이 깊으므로 더욱 애통하다”하였다. 중이 말하기를“새 절을 창립하는 것은 나라에서 정한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산에 미륵암이 있는데 신라 때 옛 터가 오래 폐하여 부흥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일으켜서 새롭게 하지 않는가”하였다.

  공이 눈물을 거두고 말하기를“좋다”하고 곧 가서 살펴보니 샘과 구릉이 맑고 깊으며 지경과 땅이 서원하고 깨끗하고 미륵보살의 상이 완연하고 남은 터가 그대로 있었다. 마음에 맞는지라 곧 즐겁게 나가서 거칠고 가린 것을 베어내고 돌과 흙을 밀어버리고 집을 세워 이중처마를 부치니 당도 있고 부엌도 있고 반질반질하고 또 간단하여 붉은 마루대와 푸른 연목이 높고 크게 빛나고 아름다워 볼만 한데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벽에 게시하고자 하나 아직 못하였다.

  이때에 내가 일을 말하다가 성대(省臺)에 거슬려서 영해에 귀양와 있었다. 백공이 이미 고향에 돌아와서 두 번이나 청하므로 내가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그 말을 써서 기록한다“슬프다. 세상 풍속이 부모를 섬김에 있어 겨우 상사와 장사를 영위할 뿐인데 백공은 능히 예제(禮制)를 다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왜구를 피하여 떠돌아다닌 나머지 절을 창건하고 불경을 인출(印出)하여 유구 무궁한 복리와 신종(愼終) 추원(追遠)17)의 효도를 도모하니 남보다 한 등수가 높다 하겠다”하였다.

  고적(古跡)
   영순폐현(永順廢縣) : 상주의 북면 임하촌(林下村)이다. 고려 때 임하촌의 태(太)씨 성을 가진 사람이 도적을 잡은 공이 있으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승격하여 현을 만들어서 그대로 붙였다. 주 북쪽 35리에 있다.
   무림부곡(茂林部曲) : 주 북쪽 30리에 있다. 예전 무흥촌(茂興村)이다.
   양보부곡(陽寶部曲) : 산양현에 있다.

 

예  천  군(醴泉郡)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했다.

   고려 초에 보주(甫州)로 고쳤고, 현종 때에 안동부에 예속시켰으며, 1172년(명종2년)에는 태자의 태(胎)를 이 고을에 장치(藏置)하고 기양(基陽)으로 고쳐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 신종 때 남도초토사(南道招討使) 최광의(崔光義)가 동경의 적을 맞아 이 고을에서 싸워서 크게 이겨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했다.

   조선조 때는 1413년(태종13년) 통례에 따라 보주군(甫州郡)으로 고쳤고, 1416년(태종16년)에는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했다.

  성씨(姓氏)
   우니곡(亏니谷) : 태(太)
   동로(冬老) : 김(金)씨, 임(林)씨, 모두 속성(續姓)이다.

  산천
   작성산(鵲城山) : 군의 북쪽 75리에 있다.

  고적(古跡)
   안인폐현(安仁廢縣) :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본래 난산현(蘭山縣)인 것을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보주의 영현으로 하였다”고 하나 지금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다.
   동로평소(冬老坪所) : 군의 북쪽 53리에 있다.
   작성(鵲城) : 둘레가 610자이다. 지금은 폐성이고 서쪽에 성문이 있는데 높이가 11자, 넓이가 12자인데 삼면(三面)은 모두 암석이다.

 

1) 도성이나 각 고을을 진호하는 주산
2) 몸의 색깔이 하얀 뱀
3) 명나라 효종(孝宗)때 연호
4) 지방 관아에서 수령들이 공무를 보던 대청
5) 진나라 사람으로 휘파람을 잘 불어 유명하다
6) 하늘나라 서울인 백옥경(白玉京)에 옥으로 건축한 정자의 상량문을 지으려고 옥황상제가 불러 갔다는 뜻
7) 화(華)라는 땅의 장관을 봉인(封人)이라고 했는데 화봉인(華封人)이 요(堯) 임금에게 수(壽). 부(富). 다남(多男)을 축수하듯 모든 백성들이 우리 임금에게 화봉인 같이 축수하는데 어째서 이 원(院)만 그 이름을 혼자 차지했는가?
8) 지증(智證)의 잘못된 기록임
9) 정진(靜眞)의 잘못된 기록임
10) 사직(社稷)은 토지 신과 곡식의 신. 즉 국가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
11) 각 고을의 북쪽에 단을 쌓아 후사(後嗣)가 끊어진 혼령을 제사지냈다.
12) 신라 9주의 하나. 995(고려 성종 14년)에 진주(晉州)로 고쳤다.
13) 백제 때와 신라 신문왕 때 광주(光州)를 부르던 이름
14) 조선 때 궁중에서 쓰던 생선 고기 소금 연료 등을 맡아보던 관청인 사재감(司宰監)의 종3품의 품계를 가진 부책임자
15) 정 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品階)를 올리는 것
16) 당나라 張繼의 시에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즉 고소성 밖의 한산사에서 밤중에 치는 종소리가 나그네가 탄 배까지 들린다고 읊었는데 고소성도 한산사도 아닌데 어디서 그런 종소리가 들리는가 하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