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설 화 > Ⅴ. 기타 전설 /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2014. 5. 14. 21:03나의 이야기






       


제2편 설 화 > Ⅴ. 기타 전설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 문경문화원 자료 

2012/06/20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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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후백제 연표사 료설 화유적과 지명문경지역의 유적문경지역의 지명그외지역 유적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제2편 설  화 > Ⅴ. 기타 전설  

  1. 신라왕실의 혈통을 이은 견훤

  2. 지렁이 아들인 견훤의 출생담

  3. 호랑이 젖을 먹은 견훤

  4. 자식에 배반당한 견훤과 그 아들 탈출이야기

  5. 견훤과 천마

  6. 견훤과 지렁이

  7. 견훤을 치는데 공을 세운 안구와 천리마

  8. 지렁이 장수

  9. 지렁이 장군과 삼태사

  10. 금하굴의 유래

  11. 사형제바위 또는 사태바위

  12. 견훤의 집안은 백제계

  13. 용마전설

  14. 왕궁평성 오층석탑전설

  15. 마의태자

  16. 용문사의 은행나무

 

Ⅴ. 기타전설

  1. 신라왕실의 혈통을 이은 견훤

  <이제가기>에 보면 이렇게 말했다. 진흥대왕의 비 남도의 시호는 백무부인이다. 그 셋째 아들 피진간 선품의 아들 각간 작진이 왕교읍리를 아내로 삼아 각간 원선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부인은 상원부인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으니 그 맛아들이 상부훤이요.(삼국유사 견훤조)

  2. 지렁이 아들인 견훤의 출생담

  또 (고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하나가 광주 북촌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용모 단정한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입해 와서 관계하곤 합니다. 하매 아버지는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하여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아 그 실이 간곳을 찾아보니 북쪽 담 밑에 있는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었다.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삼국유사 견훤조)
  이 설화에서는 견훤의 어머니가 ‘광주’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런 관계로 견훤의 출신지는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역사책에 명시되어 있는 만큼 광주 북촌은 글자 형태가 비슷한 상주 북촌의 오기라고 보겠다. 실제 아차 마을은 상주 북쪽에 잇대어 있는 동리이다. 정덕본《삼국유사》진훤조에서 ‘완산(完山)’의 ‘완(完)’을 자형이 닮은 ‘아(兒)’로 잘못 판각한 데서도 그러했을 가능성을 짙게 해준다.

  3. 호랑이 젖을 먹은 견훤

  처음에 견훤이 나서 아직 강보에 쌓여 있을 때 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모가 식사를 갔다주려하여 어린애를 수림 아래에 두니 범이 와서 젖을 먹였으므로 마을에서 듣는 이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였다.(삼국유사 견훤조)

  4. 자식에 배반 당한 견훤과 그 아들 탈출 이야기

  청태 2년(태조 18년, AD 935) 을미 춘 3월 파진찬 신덕, 영순 등은 신검을 선동하여 부왕 견훤을 붙들어 금산불우 곧 김제 금산사에 유폐하고 사람을 보내어 아우 금강을 살해하고서 신검은 대왕을 자칭하였다.(이는 삼국사기 열전의 줄거리)

  처음 견훤은 잠자리에서 멀리 궁중의 함성이 들려오자, 저건 무슨 소리인가하고 신검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대왕은 연로하시어 군국정요에 어두우므로 장차 신검이 왕위를 섭정하므로 제장이 축하하는 환성이라고 거짓을 말한후 왕을 붙들어 금산사에 이인한 다음 파달 등 장사 30인으로 지키게 하였다. 한편 금산사에 유폐된 부왕 견훤은 금산사에서 3개월이 지난 6월에는 막내아들 능예, 여자 식식복, 애첩 고비 등과 함께 설주하여 금성(나주)에 이르렀다. 사람을 보내어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였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금산사 탈주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즉 그는 후궁, 연소남여 2인, 시비고비녀, 내인능예, 남 등과 함께 수금되었는데 4월에는 술을 빚어 수졸 30인에게 마시게 하여 그들이 취해 떨어지게 하였다. 이에 소원보향예, 오담, 충질 등이 해로로 맞아 들였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태조가 기뻐하여 장군 금필, 만성 등을 시켜 수로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태조는 견훤이 도착하자 후례로써 대접하고 그가 10년 연장이므로 상주 존양쟁으로 높여 부르고 남궁 안치토록 하는 한편 양주식읍전장과 노비 40구, 마 94 등을 내렸다.(김제군사)

  5. 견훤과 천마

  높은 하늘나라에서 온 누리 - 천상천하를 도맡아 다스리는 옥황상제의 슬하에 무남독녀 외딸이 있었다. 상제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여 길렀다. 상제 부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공주는 하늘 궁전에서 고이고이 자랐다. 어느덧 공주도 꽃다운 이팔청춘 열일곱 여덟의 아리따운 처녀로 장성하였다. 언제나 화창한 하늘 나라에는 사시장춘 온갖 새가 지저귀고, 기화요초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공주의 가슴속에도 어느덧 인생의 봄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요한 그리움이 공주의 부푼 가슴속에 조수처럼 밀려왔다.
  공주는 높은 가락에서 멀고 가까운 경치를 바라보며 그곳에 벌어져 있는 산과 시내, 그리고 하늘나라 백성이 사는 마을과 저자를 두루두루 살펴보고 있었다. 늘 변함없는 산·시내·마을·저자…, 그것들은 너무나 꼭 한 모양으로 자리잡혀 있어서 달리 변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연뿐만이 아니다. 이 나라의 사람은 자라줄도 늙을 줄도 모른다. 공주는 아버지의 나이를 모른다.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고…, 언제나 그대로다. 사실 공주의 탄생과 성장은 이 나라의 하나의 기적이기도 했다. 도무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한자리에 딱 머물러 서 있는 것 같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성장하는 공주는>는 바로 슬픈 인간의 운명을 숙명적으로 타고 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골몰하여 두리번거리던 공주는 바로 다락 아래에서 아까부터 곧장 자기를 향해 오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무심코 눈길을 다락 아래로 떨어뜨렸을 때 공주는 그만 뜨거운 어떤 시선과 마주쳤다. 젊은 사나이 하나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꽤 오랫동안 그렇게 서서 공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공주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은 방앗공이 내려찧듯 두근거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 바라보았다. 열기에 찬 눈과 눈, 그 사이로 불꽃이 튈 듯이 뜨거운 마음이 말없이 오고갔다. 청년의 이름은 구호라고 불렀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사람의 눈을 피하여 몰래 만났다. 아름다운 공주와 미목이 수려한 구호 청년 사이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점점 깊어만 갔다. 이들은 그윽하고 고요한 산길을 찾아 혹은 한적한 시냇가를 찾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였다. 두 사람은 새 날이 밝으면 애오라지 서로 만날 기쁜 시간만을 고대했다. 그리고 만나면 서로 헤어지는 시간을 괴로워했다. 이들은 헤어날 길 없는 인간적인 사랑의 세계로 하루하루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옥황상제도 두 남녀의 심상치 않은 관계를 눈치채게 되었다. 인간적인 감정을 탐한 두 사람의 행위는 천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용납못할 일이었다. 옥황상제는 몹시 노하여 사랑하는 딸을 유혹한 구호를 붙잡아 들였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도 그를 이 이상 더 천상에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멀리 지상의 세계로 기약없는 귀양살이를 보내려고 하였다. 상제는 하필이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딸을 자기도 모르게 감쪽같이 유혹한 구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괘씸하였다. 상제는 백년이란 기한을 작정하고 구호에게 지상에 내려가도록 영을 내렸다. 사랑이 죄가 되어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된 구호는 물론 구호와 이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공주도 마음에 심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 한 시도 서로 헤어져서는 살 수 없었던 공주와 구호가 백년 동안을 서로 보지도 못하고 만날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주는 며칠을 두고 고민한 끝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버지 상제 앞에 나아가 눈물로써 하소연 했다.「아버님, 저희들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러하오나 아버님 저희들의 사랑은 끝 없이 깊고 더할 수 없이 깨끗합니다. 하늘과 땅에 끝날이 오는 한이 있어도 저희들의 사랑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크다면 아버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입니다. 이것만은 깊이 사죄하옵니다. 아버님, 저희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만약에 결코 용서하실 수 없다면 저도 죄인이온즉 저이와 함께 지상에 귀양 보내 주십시오. 저이에게만 죄를 주신다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처사인 줄 압니다. 저는 저이를 떨어져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백년이라니 이게 웬일입니까? 백년을 떨어져 있다니 생각만 하여도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아버님, 두 사람이 함께 갈 수가 없다면 차라리 저일랑 놔 두고 저를 벌 주십시오.」
  공주의 눈물겨운 호소에 상제는 새삼 공주가 그렇게까지 구호를 생각하고 있었던가 싶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나도 너의 생각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너의 지극한 정성에 나도 감동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질서와 법도는 나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으로 어쩌지 못하는 법이다. 허지만 네 딱한 정경을 전혀 모른 체 할 수도 없고 상제의 딸인 너를 지상에 보낸다는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죄인인 구호를 그냥 천상에 머물게 있게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여러 사람 앞에서 상제의 이름으로 공표한 사실을 다시 취소할 수는 없다. 구호의 형기를 감해 주는 도리밖에 없는 것 같다. 너는 너무 근심하지 말고 구호가 형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디리도록 해라. 너희들이 이렇게 깊이 사랑하고 있는 줄을 내 미처 몰랐구나」
  상제는 두 사람을 갈라놓게 된데 대해서 뒤늦게나마 후회하였다. 그러나 원상으로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때가 늦었던 것이다. 공주는 다만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형기만이라도 단축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 상제의 너그러운 처사가 새삼 고맙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구호가 하계(下界)로 떠나야 할 날이 왔다. 공주는 다만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닫고, 멀리 떠나는 임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였다. 생각한 끝에 공주는 하늘 보고(寶庫)를 몰래 열고 들어갔다. 눈부신 여러 가지 보배들이 가지런히 쌓이어 보관되어 있었다.
  공주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보배 상자 두 개를 꺼내어 품에 품고 나왔다. 공주는 보배 상자 두 개에 백마 한 필을 딸려서 구호에게 선사했다.「이것들은 변변치 않으나마 제가 드리는 마음의 선물입니다. 받아 주셔요. 먼 길 몸조심하시고 부디 빨리 다녀오셔요. 저는 당신이 돌아오실 날만을 기다리고 있겠어요.」더 이상은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구호도 사랑하는 공주와의 이별이 더할 수 없이 안타까웠다. 공주와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 고통에 비하면 차라리 자기 한 몸이 귀양가서 고생하는 것 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공주님, 저 때문에 너무 심려는 마십시오. 과분한 선물은 감사합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부디 몸조심하시고 평안히 계시기 바랍니다. 다녀오겠습니다.」구호도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한 없이 슬퍼하며 전송하는 공주를 뒤에 남기고 구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검음을 떼어 유배의 길에 올라 하계로 내려왔다.
  보는 것, 듣는 것, 모두가 하나같이 생소한 지상의 세계는 구호를 더 없이 고독하게 했다. 어디라 마음 부칠 데가 없었다. 구호는 정처없이 사면 팔방을 유리 방황하였다. 그러던 끝에 그의 발길은 어느덧 산 높고 물 맑은 한 곳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 문경 땅 천마산 기슭이었다(지금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유달리 아름다운 산수를 앞에 하고 넋을 잃은 사람처럼 구경다던 구호는 문득 산 속의 고요를 깨뜨리고 들려오는 난데없는 여인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가슴을 쥐어 짜는 것 같은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가늘게, 그리고 길게, 간간이 사이를 두고 들려왔다. 구호는 동정심과 호기심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소리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 - 거기에 펄썩 주저앉아 머리를 풀어 헤치고 구슬피 울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세상 사람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구호는 걸음을 주춤하고 서서 황홀한 마음으로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인은 가까이에 사람이 나타난 것도 모르고 여전히 혼자 슬피 목이 메일만큼 흐느껴 울고 있었다. 구호는 여인에게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여인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아가씨 생면부지의 사나이가 말을 거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아가씨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산 속에서 어인 일로 이렇듯 슬프게 울고 계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말씀을 해 주십시오.」
  난데없는 사나이의 출현에 깜짝 놀라는 듯했으나, 구호의 준수한 생김새와 점잖고 부드러운 말에 여인은 마음이 놓이는지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고 입을 열었다.「저는 이 아래 산기슭에 사는 아비라는 처녀이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홀로 된 아버지 한 분을 모시고 가난하나마 행복하게 살아왔는데 어젯밤 난데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아버지를 물어 갔습니다. 하늘처럼 믿고 태산같이 의지해 온 아버지를 일조에 잃고 보니 너무나 슬프고 억울하여 어쩔 줄을 몰라 이렇게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겠는데 미련한 소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감감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장차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여인은 새삼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구호는 여인의 딱한 사정 이야기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는 아비에게 호랑이의 행방(?)을 자세하게 물었다. 그리고 아비가 가리켜 준 방향으로 호랑이를 찾아 나섰다. 천상에서 온 구호는 이미 몸에 익힌 무술에 어지간히 자신하는 바가 있었다. 산속을 찾아 올라간 그는 어느 숲속에서 호랑이 굴을 찾아냈다. 굴 안에서 어젯밤 아비의 아버지를 물고 간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구호는 칼을 빼어들고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호랑이와 맞싸워 기어코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비의 아버지는 이미 호랑이의 모진 발톱 아래 목숨을 잃은 뒤였다.
  그는 방금 쓰러뜨린 호랑이를 어깨에 메고 죽은 아비의 아버지를 앞에 안고 그곳을 떠나 아비의 집으로 왔다. 아비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준 구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구호는 그 길로 아비를 도와 여인의 망부(亡父)를 위해 약례를 지내고 장사를 치렀다. 아비는 뜻밖에 구호를 만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장사까지 지낼 수 있었다. 장사를 지내고 나니 아비의 마음은 한결 놓이기는 했으나 한편 앞일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일이 다 끝나자 구호는 다시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의지를 잃은 외로운 아비는 처녀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구호의 옷자락을 붙잡고 눈물로써 만류했다.「장사님,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몸은 비록 천하오나 태산같은 은혜는 죽어 백골이 되고 티끌이 된들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한평생 장사님을 모시고 당신의 손과 발이 되겠사오니 저를 버리고 가지 마십시오」처음 한동안 굳이 사양하던 구호도 여인의 진정어린 애소에 그만 마음이 움직였다. 한편 의지할데 없는 아비의 처지를 생각하면 인정상 도저히 뿌리치고 떠날 수 없었다. 또 일시적이나마 며칠 지나는 동안에 어느덧 두 사람 사이은 정이 들어 있었다. 구호는 그만 천상의 일을 까맣게 잊고 아비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아비도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잊고 구호와 함께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꿈결같은 세월이 두 사람 사이에 흘러갔다. 그러던 어떤 날 밤에 아비가 꿈을 꾸었다.
  큰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아비의 품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찰나에 눈을 떴다. 다음날 아침 아비는 남편 구호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는 매우 기뻐했다.「당신 그것 참 좋은 꿈이요, 우리 사이에 자식이 없는 것을 아시고 하늘에서 우리에게 자식을 점지하신 것이오. 두고 보시오.」과연 구호의 말과 같이 아비는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잉태하였다. 두 부부는 하루 빨리 달이 차서 자식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기대 속에서 보냈다. 아이를 잉태한 지 아홉달이 지나고 다시 만삭이 되었으나 해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행여나 하고 다음달을 기다리고 또 다음 달을 기다려 보았으나 끝내 해산이 없었다. 이들의 기쁨은 근심으로 바뀌었다.<잉태한 열달이 훨씬 지났는데도 해산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일까?>
  <전세의 무슨 연고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나 아닌가?> 두 사람의 마음 속에는 별별 생각이 다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뚜렷한 까닭을 알아 낼 도리가 없었다. 구호의 마음에는 그제서야 무엇인가 집히는 구석이 있었다. <혹시 천상에서 있었던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동안에도 세월은 자꾸만 흘렀다. 드디어 구호가 하계에서 보내야 했던 귀양살이의 시한이 다가왔다. 다시 천상으로 돌아갈 떄가 온 것이다. 구호에게는 다시 새 근심거리가 생겼다. 지상에 머물러 있을 기한이 다한 이 마당에 아비를 지상에 남겨두고 혼자 천상으로 돌아가야 할 지 함께 천상으로 가도 괜찮을 지 아니면 천상세계에 돌아가는 일을 아주 단념하고 아비와 함께 지상에 남아서 지금처럼 살 것인지 세 갈래 길에서 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지상의 여인을 천상에 데리고 올라갈 수 있을까도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좋은 방도가 없었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별 도리가 없었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아비를 동반하고 천상세계를 향해 길을 떠났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당장 애처로운 처지에 있는 아비를 그냥 버리고 떠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나중 일이야 그때 가서 보자는 심사이었다.
  인간 세상을 떠나 푸른 하늘 바다를 지나 천상 세계에 도착했다. 형기를 마치고 기뻐 돌아올 구호를 맞기 위해 천상에서는 벌써부터 준비가 야단스러웠다. 비록 죄인이기는 하였으나 장차 이 나라 옥황상제의 사위가 될 인물이 아닌가. 그 환영 절차는 왕자의 그것을 방불하게 했다. 천악(天樂)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구호를 태운 백마가 구름 바다를 헤치고 천성(天城)의 안뜰로 서서히 들어왔다. 공주는 이 날을 위해 오랜 세월을 가슴 조이며, 괴로운 하루하루를 마치 천 날과 같이 보냈던 것이다. 기다리기에 지쳐 이제는 거의 골수에까지 병이 들 지경이었다. 아버지 옥황상제도 딸의 심중을 이해하고 그녀의 처지를 가엾이 생각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구호가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노는 즉시 결혼식을 올려서 두 사람의 한을 풀어 줄 생각으로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천성문을 열고 들어선 구호는 혼자만이 아니었다. 구호의 바로 뒤를 따라 지상의 여인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보는 순간 공주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노여움이 솟구쳤다. 그 오랜 세월의 괴로운 기다림이 이렇듯 뻔뻔스런 배신으로 보상될 줄은 천만 뜻밖이었다. 공주는 자기 눈을 의심하고 몇 번이고 눈을 씻고 보았으나 틀림없었다. 분명 구호의 뒤에는 여인의 그림자가 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공주는 기대가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를 지탱할 힘조차 잃은 듯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옥황상제의 노여움 또한 말할 수 없었다. 딸의 비통도 비통이려니와 구호의 뻔뻔스러운 태도는 도저히 용남할 수 없었다. 「이런 괘씸한 놈 같으니? 그 까짓 티끌이나 다름없는 지상의 여자 때문에 내딸을 배신하다니!… 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더러운 지상의 여자를 끌어 들이고 있담! 괘씸하고도 더러운지고!」상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구호에게 가장 엄한 형벌을 내리기로 하였다. 다시는 천상에 들어올 기회를 그에게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죽어 썪어 문들어질 지상의 여인과 함께 영원히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구호와 지상의 여인을 추방하기 위해 말이 준비되었다. 구호와 아비에게 한 마디 변명의 말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침내 한 필의 말에 실려 천성문 밖으로 쫓겨났다.
  예전에 탔던 백마와는 달리 이번에 탄 말은 하늘 바다를 헤엄쳐 가지 못하고 그만 하늘에서 곧바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말은 땅에 떨어져서 말 모양의 산이 되었다. 이것이 백마산(白馬山)이다. 구호와 아비도 아차! 하는 사이에 말 잔등에서 떨어져 뿔뿔이 땅에 떨어졌다. 이들은 천마산 동쪽에 떨어져 두 개의 바위가 되었다. 그 형상이 바구니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농암(籠岩)이라고 불렀다. 구호와 아비는 바위가 되어 영원히 지상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서로 바위가 되어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 그들의 사랑도 바위처럼 굳어 버렸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오래 된 어떤 날, 한쪽 바위, 그 옛날 아비가 변해서 된 농암 하나가 반으로 갈라지며 그 안에서 한 장사가 나타났다. 한손에는 칼을 쥐고 또 한 손에는 활을 잡고, 보기에도 씩씩한 사내 대장부였다. 끝내 해산을 못본 아비는 바위가 되고 난 지금에사 해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농암에서 태어난 장사가 바로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이었다. 그는 이 곳 백마산에서 활 쏘는 법과 칼 쓰는 법을 익히며 이 곳에 성을 쌓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타고 다닐 좋은 말이 없었다. 어떤날 농암 앞을 지나다 보니 그 앞에 말 세 필이 나와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견훤을 보자 달음박질쳐 도망가는데 빠르고 날쌔기가 보통 말이 아니었다. 천하의 준마가 분명했다. 그러나 이 말들을 잡을 도리가 없었다. 궁리한 끝에 그는 묘한 계교를 생각해냈다. 그럴듯한 허수아비를 만들어 농암 앞 풀밭에 세워 두었다. 말은 처음 한동안 허수아비를 사람으로 알고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지나면서 허수아비를 심상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와서 풀을 뜯어 먹게 되었다. 허수아비 곁에 와서 몸을 부비기까지 하게 되었다. 어떤 날 견훤은 허수아비를 치우고 자기가 허수아비 대신 가장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허수아비로 알고 견훤이 서 있는 자리에 와서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견훤은 그 중 가장 기운 세고 말쌘 말을 하나 골라 잡았다. 견훤은 기뻐하며 말 등에 올라 타고 달려 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말은 날쌔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좀 더 날쌔고 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말에게 말했다.「내 너의 달리는 속도를 시험하리라. 내가 화살을 쏠 터이니 그보다 더 빠르게 달려라. 그렇게만 한다면 너를 더욱 애중하라 것이로되, 만약 화살보다 뒤떨어질 때에는 용서없이 너의 목을 칼로 치리라」 이렇게 다짐을 두자 말은 뒷발을 구르며 힘차게 말아름을 울었다. 자신이 있다는 태도다.「그럼, 좋다」견훤은 말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활을 당겨 과녁을 겨누고 쏘았다. 쏘는 것과 동시에 말은 껑충 뛰어 올랐다. 그야말로 쏜살같이 달렸다. 목표한 지점에 왔다. 화살이 날아가는 기척이 없다. 견훤은 아마도 화살이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화를 버럭 냈다. 말에서 뛰어 내리자 그 길로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내리쳤다. 한 마디 변명도 할 겨를 없이 말의 목은 땅에 굴러 떨어졌다.
  바로 그 때다. 씨잉! 하고 화살이 소리를 내며 날아와 과녁에 딱 꽂히는 것이 아닌가! 견훤은 아차! 하고 자기 자신의 경솔을 뉘우쳤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까운 천하의 준마의 목은 땅에 떨어져 굴러 있다. 잠시의 감정을 참지 못한 자신의 경솔을 그는 뼈아프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다시 그런 말을 구하러 나섰으나 어디에서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견훤은 자신의 미련으로 하여 세상에서 보기 드문 천마(天馬)를 잃은 것을 두고 두고 후회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지금도 문경의 천마산에는 옛날 견훤의 이야기와 함께 비명에 간 하늘말의 애달픈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구호가 가지고 내려왔던 보배 상자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과연 그 보배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지금껏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6. 견훤과 지렁이

  옛날 광주 북촌 땅에 한 부자가 살았다. 그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다. 자색(姿色)이 뛰어나게 아름답고 행실이 단정했다. 어느듯 성숙한 나이에 이르렀을 무렵 그녀에게는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매일 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는 방에 살며시 들어와서 자고, 이튿날 밝기 전에 어디론지 가 버리곤 하였다. 그런데 그 사내는 언제 한 번 자기의 이름과 사는 곳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처녀는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소문이 날까 두려워 이 사실을 자기 혼자 가슴에 담아 두고 일절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주 있게 되면서 부모에게 마저 숨기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처녀로서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다. 더구나 사내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어느날 그녀는 결심 끝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버지에게 전후의 사실을 소상하게 고백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놀랐다.<도대체 어떤 놈의 장난일까? 어떻든 일은 크게 벌어졌구나. 이 일을 어떻게 한담? 귀신일까? 사람일까? 어떻든 정체를 알아 내고 볼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아버지는 딸에게 간단히 일렀다.「오늘 밤에 또 그놈이 오거들랑 실을 바늘에 꿰어 몰래 그 놈의 옷에 찔러 두어라.」
  이윽고 밤이 왔다. 캄캄한 가운데 보랏빛 차림의 사내가 스르르 처녀의 방에 들어왔다. 처녀는 아버지가 말한 대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실 꿴 바늘을 사내의 옷자락에 몰래 꽂아 두었다. 밤을 지내고 새벽이 오기 전에 사내의 그림자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날이 밝자 처녀의 아버지는 딸의 방에서 풀어져 나간 실을 따라가 보았다. 실뭉치에서 풀려 나간 실은 뜰을 지나 북쪽 담장 밑에 이르러 보이지 않았다. 담장 밑을 유심히 살펴보니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있는데 바늘은 바로 그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밤마다 처녀의 방에 찾아오던 사내는 다름 아닌 지렁이의 화산(化身)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처녀는 아이를 잉태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샘김새나 행동이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젖먹이 어린애였을 때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밥을 날라 가는 동안 젖먹이를 수풀 아래 두고 가면 어디서부터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견훤>이라고 불렀다. 장성하면서 몸집이 남달리 건장했다.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보통 사람이 따를 수 없었다. 군에 몸을 담고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변에 가서 수 자리를 지킨 일도 있었다. 그때 그는 창을 베개 삼고 적군을 기다렸다. 적을 맞아 싸우게 되면 그의 용맹은 언제나 출중했다. 공로로 무명의 병사로부터 비장으로 발탁되었다. 훤은 경복 원년(서기 892년)에 후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7. 견훤을 치는데 공을 세운 안구와 천리마

  *앞의 이야기에 이어서 계속 이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마친 다음에 안묘당에 가 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 안묘당에 안구의 위패와 천리마의 그림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그러는 안구라 굿는 거는(그러는 것은) 안구 노인이, 안 노인이 술을 잘 해였어요. 술을 잘 해였는데. 술을 잘 해서 옇고 있을 때, 그 때 견훤이 난 낼 적에 견훤이 군졸 오며는 아주 독한 술 멕여(먹여) 가주설라, 씨러서 고만에 홍몽천지가 되도록 맨들어 놓고는 이짝으로 연락을 해서 가서, 인제 습격을 하도록 했는 그 공로로써 안구, 인제 천리마래.
  그 - 어른분내들. 천리마에 대한 이야기 어 들었나? [큰 소리로] 못 들었어? [본래대로] 천리마란 말을 기러(그려) 붙여 놓고 그 휘황(허황)한 이얘기지. 거기 아직도 메를 짖고 거기 제사를 지내. 그리이, 그런 의미가 예전에도 역사란건
  좀 후진들에게 명박(명백)하게 안 넘겨주고 고마 흐지부지하게 내려갔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 그르이 우리가 몇, 2천년 전 역사, 근 천 년 가직큰(정도나 되는) 역사를 우리가, 내가 안 그르이 그르이 그래가주 안 된다 말이래. 그 정도래.

  8. 지렁이 장수

  소백산의 험준한 산맥이 남으로 푹 이어지다가 기암절벽과 함께 그 웅장함을 드러 낸 속리산 문장대에서 잠시 동쪽으로 눈을 돌리고 내려다보면 크고 작은 많은 봉우리들이 점점이 뿌려져 있고 그 봉우리들 속에 그리 크지 않은 작고 아담한, 그러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풍우에 시달리며 쳔여 년을 말없이 이 곳을 지켜온 성이 하나 있다. 그 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이 곳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곳에 자식도 없이 혼자가 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깨끗하게 차려입고 허리에는 하얀 봇짐을 짊어진 준수한 중년 서생이 찾아와 하룻밤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혼자 사는 여인이라 선뜻 허락할 수 없는 입장이나 밤은 깊었고 또 민가라고는 없는 깊은 산중이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하였는데 이 중년 서생은 또 다음 날도 찾아와 자고 가기를 청하는가 하면 매일 밤 이렇게 찾아와서는 잠을 자고는 새벽녘에는 아무 말 없이 떠나가곤 하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이 여인에게는 아이가 생기게 되었고 이 여인은 중년 서생의 이름이나마 알기를 간청하였으나 중년 서생은 도무지 한 마디의 말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 여인은 계집아이를 낳게 되었고 이 여인은 중년 서생에 대하여 스스로 정체를 밝혀 볼 수밖에 없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아이가 생겼음을 안 여인은 어느 날 꼭 중년 서생의 정체를 밝혀 보고자 언제나처럼 중년 서생이 자고 돌아갈 때에 명주실 꾸러미에 바늘을 꿰어 중년 서생이 늘 허리에 두르고 다니는 봇짐에다 꽂아 놓고 그 실을 따라가 보면 정체를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그리하여 명주실이 늘어진 길을 따라가 보니 그 실은 어느 큰 바위틈으로 들어가 있었고 그 곳에는 한 마리의 큰 지렁이가 허리띠[지렁이의 중간 부분의 흰 띠]에 바늘이 꽂힌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뒤 여인은 사내아이를 낳았고 두 남매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두 남매는 성장해 감에 따라 남다르게 엄청난 힘이 있었고 두 남매는 매일 서로의 힘이 셈을 굽히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힘 자랑을 하며 두 남매가 자라던 어느 날 늙은 어머니의 꿈 속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두 남매를 같이 키우게 되면 훗일 두 남매는 서로를 죽이려는 혈육상쟁의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꿈이긴 하지만 너무나 생시와 같았고 또 워낙 남다른지라 의심을 품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훗일의 큰 비극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마침내 큰 결단을 내렸다. 즉 둘 중 하나는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했다. 허나 어머니로서 어찌 자식을 죽일 수 있으랴! 곰곰히 생각 끝에 두 남매를 불러놓고는 시합을 하여 지는 쪽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합을 하기로 한 것은 동이틀 무렵에 누나인 여자는 문장대 맞은 편 청화산에서 치마폭으로 돌을 주어다가 성을 쌓고 아우인 남자는 한발되는 나막신을 신고 목매기 송아지[코를 뚫지 않은 송아지]를 끌고 한양엘 다녀 오기로 했다. 시합을 시켜 놓은 어머니는 마음 조이며 결과에 대하여 주목을 하고 있는데, 딸이 성문을 마지막으로 끝내자 문 밖에서 송아지 울음소리가 들리어 오더라는 것이다. 결국 이 시합은 무승부로 끝이 났고 두 번째 시합을 하기로 했는데 두 번째 시합은 뜨거운 죽을 쑤어서 먼저 먹는 쪽이 이기는 시합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아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일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는 별로 뜨겁지 않은 죽을 주고 딸에게는 아주 뜨거운 죽을 주어 결국은 딸은 약속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들은 훗일 큰 장수가 되어 나라에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승승장구 외적을 무찔렀다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장수는 싸움을 하다가 힘이 지치면 강물에 뛰어 들었다가 나오고 또 그러면 어디선지 모르게 힘이 솟아나 용맹을 떨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적장은 한창 싸움을 하다가 장수가 강물에 뛰어 들기를 기다려 장수가 물에 뛰어들자 미리 준비했던 수 십 가마의 소금을 강물에 풀어 넣어서 이 장수는 그만 죽어 버렸는데 장수의 죽은 시체는 큰 지렁이로 변하더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전설이 전하는 곳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위치한 옛 성터인데, 그 성은 성곽이 무너지고 잡초만 무성하나 망루와 일부 성곽은 아직도 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9. 지렁이 장군과 삼태사

  제보자 : 강대은,남,81. 조사장소 : 안동시 북후면 옹천동 옹천. 조사일 : 1981. 8. 2

  삼태사가 지렁이가 화해가주고 장군이 됐어. 껄깨이가(지렁이가) 장군이 됐는데 나라를 머로(먹으러) 들오는데 그르이 삼태사가 삼장군인데 삼장군인데 도저히 싸워 보이 지러이한테 안된단 말이래. 결국 이기게는 이겼는데 워예노 그면 싸워 보다가, 거기 인제 지러이는 물에 한참 드갔다(들어갔다가) 오이 심을 더 씬단 말이래. 몸 닿는 즉 물에 적서가주고 그런 몇 번 적거(겪어) 보이께네 그 짓거리 해. 그 담(다음)에는 참 그 위에다 고 디갈 시기 될 때 나(삼태사)는 싸우되 백성을 씨겼그던. “고마, 그 간수와 소금과 몽땅 모아가주설라 골 때(그때) 들어부어라.”(큰 소리로) 그래, 그 때 들어 붓부이께네, 고만 지래이가 사라진다는 구만. 그래가주고 이겼어. 그래가주 이겨가주 삼태사가 참 이겼어. 이게가주 그이인제 삼태사가 나라에서 준 벼슬이 삼태사래. 삼태사 휘자가(생각하다가) 맨 꼭대기래. 권행씨가 권씨의 꼭대기래. 그원은(원래는) 김가래. 김가에서 갈려 나왔다.

  10. 금하굴의 유래

  제보자 : 정선영,남,61. 조사장소 : 봉명초등학교 교장실. 조사일 : 1996. 5. 24

  이것은 봉명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시는 정선영선생님께서 구전되어 오는 전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 지명에는 아름다운 고사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일찍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고 하여 문경(聞慶)이라 일러왔고, 군 소재지인 점촌에서 북서쪽으로 자동차편 30여분 달리면 은혜를 베푼다는 가은읍에 이른다. 읍소재지에서 다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유서깊은 아호동(鵝湖洞 : 관명으로는 갈전2리)이라는 아담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 마을에는 옛부터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후백제 왕인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출생하였다는 금하굴의 흔적이 있으며 아자개의 이름을 따서 아개동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그러면 금하굴에 얽힌 전설을 대강 살펴보기로 한다. 신라말엽이었으리라. 아자개가 결혼하기전 견훤의 모가 아직 처녀로 있을 무렵 별당에 독거하고 있을 때 밤마다 풍채가 준수한 미모의 청년이 나타나 처녀와 동침을 하고 새벽 날이 밝기 전 홀연히 사라지기를 수 개월. 처녀는 점점 배가 불러옴에 그 어머니가 딸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캐묻자 딸이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고백하자 그 어머니가 딸에게 이르기를 그러면 내일 밤에는 그 청년이 돌아갈 때 저고리의 등에 실 꾄 바늘을 등에 꽂아 실이 풀리는대로 놓아두고 다음날 아침 실을 따라 가보니 어느 굴속으로 들어갔기에 찾아가 보니 큰 지렁이가 한 마리 있고 그 등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 후에는 청년도 다시 찾아오지 않았고 처녀는 10개월 후에 아들을 낳았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그 어머니 밭일을 할 때도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는 관계로 아이를 업고 나가 밭가에 내려놓고 일을 할 때 이상하게도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아이를 보호해 주기를 수년 모든 사람들은 보통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을 예언하더니 그가 자라 후백제왕인 견훤이다.
  일설에 의하면 견훤을 지렁이 자식이라고도 한다. 그 후 그 지렁이가 살던 굴은 아침 저녁으로 오색이 영롱하고 풍악소리가 요란하여 금하굴이라 이름하였고, 원근 각지에서 이 소문을 듣고 관광객이 매일 수십명씩 몰려옴에 이 마을 살던 부호가인 심장자가 매일 손님 접대에 곤혹을 치루자 그 집 하인을 시켜 금하굴을 매립해 버렸다. 그후로는 풍악소리도 끊어지고 심장자 집도 졸지에 망해 버렸다 한다. 이런 전설이 담겨 있는 금하굴을 다시 복원하려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봄부터 마을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발굴작업을 수 개월 계획하였으나 입구는 찾지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현재 그 위치 부근에 하은정과 민가 한 채가 있고 굴 모습을 한 입구가 현존하고 있으나 그곳이 그 때의 굴입구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6.25동란 때 동민 3~4명이 피신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동리 남쪽 산개울(일명 모리듬봉소) 산록 편편한 곳에 아자개가 살았다는 집터라고 하는 것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금하굴과 관련하여 내려오는 전설로 지금의 가은읍 갈전리 1037번지 하천상에 있는 규모가 작은 폭포 밑에 형성된 소를 민지소(명주소가 지방사투리를 따라 밍지소로, 또 변하여 민지소로 발음되었다는 말도 있음)라고 하는데 주변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그 깊이가 아주 깊어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풀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고 하며 그 속은 금하굴과 연결이 되었다고 전하여 오고 있고 견훤출생 설화와 관련이 있는 지렁이가 이 소와 금하굴을 왕래하였다 한다.

  11. 4형제바위 또는 4태바위

  4형제바위설은 지금의 갈전리 941번지 아자개가 살던 집터였다고 전하여지는 아자개집터 뒤안 언덕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북방향 마을 입구쪽으로 농경지에 200~300m 간격으로 큰 바위 4개가 있는데 세월이 변하면서 농경지가 개량되는 과정에서 2번째 바위는 묻혀 있고, 전설에 의하면 아자개의 아들이 4명이 있었는데 모두가 힘이 센 장사였다고 하며 이들 4형제가 서로의 힘을 자랑하느라고 이 바위들을 각각 한 개씩 들어서 지금 바위가 있는 장소에 옮겨 놓았다고 하는 설과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정승 이상의 훌륭한 인물 4명이 배출될 지기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 증표로 이 바위가 생겼다 하며, 그 증거로 견훤이라는 당대를 주름잡던 호걸이 출생하였으며, 아직도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큰 인물이 3명이 더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을 믿고 이곳에 정착하기 위하여 이사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참고로 4형제 바위는 지석묘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분묘인 만큼 이곳이 상당한 유서를 간직한 마을임을 알려준다.
  아차마을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수예리로 통할 수 있는 임도가 개설되어 있는데 현재 갈전리 산 167번지 자연동굴에서 남쪽방향 약 300m지점 임도 양편의 넓은 공지를 성거리라고 부르고 있으나 부근에 성이 있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성거리로 통하는 길 옆에 조그마한 옹달샘이 있는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하여 이 샘은 가은읍 갈전리 산 167번지 자연동굴에서 서쪽방향 약 50m지점에 있고 지금도 들일을 하는 농부들이 이 물을 마시고 있다. 이곳 아차마을은 견훤이 태어난 곳으로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견훤과 왕건의 잦은 전쟁이 있었으나 왕건이 신라를 침공한 견훤을 치기 위하여 싸웠던 공산전투에서 왕건의 장수였던 심숭겸이 견훤의 군사에게 전사하였는데 신숭겸의 후손인 평산신씨가 이 마을에 입주하면 질병이나 재난을 당하여 잘 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지금도 신숭겸의 후손들은 이 마을로 딸을 출가시키는 것도 꺼리고 있다고 한다.

  12. 견훤의 집안은 백제계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현지에는 견훤의 집안을 백제계로 연결짓는 전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나라가 망한 후 백제인들은 풍비박산이 되었는데 그중 힘깨나 썼던 세력가들은 일본으로 대거 몰려갔으며, 또 국내에 남아 있던 군인들은 전장에 나가지 않으려고 백성들은 신라에 붙들려 가서 노예생활을 하지 않으려고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그 가운데 경제적 기반이 있는 백제인들이 산간오지인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의 아차마을로 피난해와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 전설은 문헌상의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견훤이 백제부흥을 내세울 수 있었던 어떤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확실히 유의해볼 만하다.

  13. 용마전설

  또한 문경에는 견훤과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이곳이 그의 출생지임을 증거 해주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아차마을의 유래이기도 한 용마전설을 들 수 있다. “장군 나면 용마 나고, 용마 나면 장군 난다”는 말이 있듯이 장군과 용마는 긴밀하게 연결된 모티브다. 견훤이 마을 뒷산의 큰 바위 밑 굴에 살고 있는 난폭한 백마를 낚아채 자신의 말로 만든 후 날마다 타고 다니면서 길들여 명마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14. 왕궁평성 5층탑 전설

  견훤의 몰락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익산의 왕궁평성 5층탑 전설이다. 이 탑은 보물에서 국보(제289호)로 승격된 백제 계통의 탑이 되겠다. 전설에 의하면 후백제의 왕 견훤이 어느날 당시의 유명한 도사 도선을 만나 어떻게 하면 고려 태조를 누르고 후백제가 오래도록 번창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도선이 대답하되 완산의 지리가 마치 개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세니 지세를 이용하면 될 것이라 했다. “그럼, 어찌하면 좋소?” 하고 왕이 구체적인 방법을 물었다. 도선이 대답하기를 “웅크리고 앉아 있는 개의 꼬리를 눌러 놓으면 개가 일어서지 못할 게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 후백제의 왕 견훤은 도선대사와 상의한 끝에 개의 꼬리 부분이 되는 땅에 무거운 석탑을 쌓기로 했다. 즉 지금의 왕궁탑을 쌓게 되니 완성된지 사흘동안 완산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캄캄해졌다고 전한다. (견훤과 고려태조가 바꿔져서 전해오는 점이 특이하다.) 참고로 왕궁탑에 대해 금마지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왕궁탑은 도선(신라말기 유명한 스님)이 완산(전주)의 지세가 대략 앉아있는 개의 모양이므로 이곳에 탑을 세워 개의 꼬리를 누르니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눌러 이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며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3일 동안 어두웠다고 한다.」

  15. 마의태자

  마의태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로서 국운의 쇠잔을 최후까지 지켜본 인물이다. 신라가 신흥세력인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에게 눌러 대항할 힘이 없으며,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죽일 수 없다 하여 친히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충신과 의사로 하여금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지킬 것을 주장하며, 천년사직을 일조일석에 버릴 수 없다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대세는 기울어져 고려에 귀부하는 국서가 전달되자 태자는 통곡하며 개골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마의태자는 그가 입산후 평생동안 베옷을 걸치고 지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16. 용문사의 은행나무

  경기도 양평군에 소재하고 있는 용문사는 신라 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한 고찰로서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마의태자가 짚고 가던 단장을 꽂은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인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성장한 것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60m에 이르고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도 14m가 넘고 동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또한 이 은행나무는 6.25사변때와 고 박정희대통령 서거 당시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목차후백제 연표사 료설 화유적과 지명문경지역의 유적문경지역의 지명그외지역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