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4. 21:05ㆍ나의 이야기
목차Ⅱ후백제 연표Ⅱ사 료Ⅱ설 화Ⅱ유적과 지명Ⅱ문경지역의 유적Ⅱ문경지역의 지명Ⅱ그외지역 유적
제3편 유적과 지명 > Ⅰ. 문경지역의 유적 ▒▒▒▒▒▒▒▒▒▒▒▒▒▒▒▒▒▒▒▒▒▒▒▒▒▒▒▒▒▒▒▒▒▒▒▒▒▒▒▒▒▒▒▒▒▒▒▒▒▒▒▒▒▒▒▒▒
위 치 : 문경시 가은읍 갈전2리 아차마을 견훤의 출생과 관련한 설화는 많이 남아 있지만 다음의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으로 전해오는 바 여기에서는 이 내용을 싣기로 한다. 아차마을의 부유한 농가에 과년한 외동딸이 있었는데 밤이면 미소년이 찾아와 사랑을 하게 되어 몇 달이 지나니 처녀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배가 불러오니 숨길 수도 없이 가족들에게 전후 사실을 이야기 하였는 바 아버지의 말이 “커다란 실꾸리를 몰래 놓았다가 실을 꿴 바늘을 소년의 옷에 꿰어라” 하기에 그날밤 그대로 하였다. 그리고 아침에 실을 따라 갔더니 금하굴 속에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래서 견훤왕은 지렁이의 자식이라고 한다. 그 후 지렁이가 살던 굴은 아침 저녁으로 오색이 영롱하고 풍악소리가 요란하여 금하굴이라 이름하였고, 원근 각지에서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몰려오므로 이 마을에 살던 부호가인 심장자가 매일 손님 접대에 곤혹을 치루자 그는 하인을 시켜 금하굴을 묻어 버렸다. 그 후로는 풍악소리도 끊어지고 심장자 집도 졸지에 망해 버렸다 전한다. 해방 후 다시 굴을 원형대로 파냈으나 풍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견훤산성은 가은읍 민지리와 농암면 농암리 사이에 있는 천마산에 있다. 일명 천마산성이라 하고 벡제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경현지(영조본) 고적조에는 “견훤산성은 가은현 서남 5리에 있다. 산 위에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백6십5척이다.” 하였고 환여승람에는 “백제성, 일명 견훤산성이라 한다. 청화산 동쪽 10리에 있다. 견훤이 그 가운데 웅거했었다고 한다. 석천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에 견훤과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축성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는 돌을 모아 쌓았는데 성의 높이는 불과 2m정도이며, 높은 곳이 3m를 넘지 않는다. 가까운 고부성이나 고모성의 축성방법과 같은 것으로 보아 삼국전기부터 있었던 성으로 보아야겠다. 왜냐하면 상주시 화북면에 가면 견훤이 쌓았다는 견훤성이 있다. 화북의 견훤성은 돌을 다듬어서 견고하게 축성한 것으로 보아 견훤의 활동시대부터 적어도 4,5세기 전에 농암 견훤성이 축조되었다고 추측된다. 가은성이라 지목되는 성은 가은 왕릉에서 농암을 향하여 가다가 보면 성저리(성밑)와 성유리(성너뫼)가 있다. 이 성저와 성유를 잇는 산이 둘러있으며, 이 성이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먼저 축조된 토성이다. 지금은 가은~농암간 도로가 개통되어 절벽과 맞대어 흘렀다. 이 산등성이는 성유에서 성저가 이어져 주위가 1㎞ 정도 된다. 안쪽 능선을 연화봉이라 부르며 바깥편은 영강이다. 옛 신라 때에 가해현, 가선현이 있던 위치가 바로 이곳이다. 부근의 산과 밭에는 신라 때의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 성은 상주,보은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다. 계립령이나 화북,보은방면에서의 침입을 차단할 수 있는 곳이며, 소백산맥 이북의 괴산,청천 등지에서의 침입도 방어할 수 있는 곳이다. 소재지 : 산양면 현리. 축법 : 석축. 시대 : 삼국시대 『삼국사기』·『고려사』 등에 등재되어 있는 산성으로 927년 견훤과 왕건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현재 산양면 현리 뒤산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부에는 현리 서낭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서낭당을 둘러싼 담장도 성의 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부의 북서쪽으로 성벽 일부가 수직으로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근품성이라고도 불리며 근처에는 말을 훈련시켰던 치마단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희양산성은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뒷산인 희양산 정상에 쌓여 있는 석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성이 있으니 삼면이 모두 석벽이며 옛 군창이 있었다.”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 관방조에는 “희양고성(曦陽古城)은 여람(동국여지승람)에 가은폐현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삼면이 모두 석벽이다.”고 하였다. 문경현지에도 같다. 삼국말기에 경순왕이 이 성에서 견훤과 싸웠다고 하며, 삼국사기 경순왕조에는 “3년 10월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하였으니 싸웠다면 이 때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또 문경현지 영조본에는 “봉암사에는 신라 경순왕이 창건한 극락전이 있으며, 본조(조선조) 세조대왕의 어첩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으니 경순왕이 이곳까지 왔었다고 추측은 되거니와 과연 후삼국말기의 혼란이 극심할 시기에 임금이 여기까지 거동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작성은 동로면 명전리 황장산 기슭 골짜기에 있으며, 우리 고장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왔을 때 공민왕은 주흘산 어류동에서 기거하고 공민왕비 노국공주가 이 작성에서 피난하였으며 공민왕이 작작군에게 명하여 이 성을 쌓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성이 고려말기에 축성되었다고 보기에는 그 축성방법이 삼국시대 신라 축성방법과 다른데가 없고 또한 이 성의 위치가 적성로의 북단에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노고성의 전진성이며 한강 진출의 최전방 기지인 신라성으로 보여진다. 참고로 작성과 관련된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361년 홍건적이 고려에 침입하여 공민왕은 서울인 개경을 떠나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난하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우리고장 어류성에서 상당기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 때에 이곳 황장산에 작장군에게 명하여 성을 쌓게 하고 노국공주(공민왕비)와 비빈, 궁녀들을 이 작성에 대피시켜 머물게 하고는 며칠에 한번씩 이 작성에 왕래하면서 피난길의 고생을 위로하고 개경이 수복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전하는 속설에는 작장군이 성을 쌓았다고 하여 작성이라 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과연 당시에 작씨 성을 가진 장군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작성이란 이름을 가진 성이 멀지 않은 청풍에도 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에 보면 미상지에 적현성이 있다. 우리말로는 벌재성이다. 견아성(개이성)을 이병도는 조선역사지리지에서 문경의 서쪽으로 보고 있으니 적현성이 삼국사기지지에 바로 견아성 밑에 기재된 것으로 보아 오늘의 문경지방으로 추정한다면 적현성(벌재성)을 작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더 많은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위치 : 가은읍 갈전리 산 170-1. 부지 : 6.6평. 건평 : 6평. 형태 : 맛배지붕,정면3칸,측면1.5칸 견훤의 묘는 현재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 18-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견훤의 혼을 달래는 사당은 전국에 없는 실정이다. 상주시 화서면과 화남면에 있는 당집을 제외하곤 그럴 듯한 사당은 없는 셈이다. 문경에서 태어나 비록 호남지역에서 후백제 건국을 위한 활동을 하였지만 역사적 패배자라는 낙인으로 인해 수많은 전승과 업적이 역사속으로 사장되어 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이제 더 이상의 역사왜곡을 막고 견훤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짐을 금번에 시행되는 사당 건립을 통해 그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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