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유적과 지명 > Ⅰ. 문경지역의 유적 /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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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유적과 지명 > Ⅰ. 문경지역의 유적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 문경문화원 자료 

2012/06/1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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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제3편 유적과 지명 > Ⅰ. 문경지역의 유적  

  1. 금하굴

  2. 견훤산성

  3. 가은성

  4. 근품산성과 치마단

  5. 희양산성

  6. 작성

  7. 숭위전

 

Ⅰ. 문경지역의 유적

  1. 금하굴(金霞窟)

  위  치 : 문경시 가은읍 갈전2리 아차마을

  견훤의 출생과 관련한 설화는 많이 남아 있지만 다음의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으로 전해오는 바 여기에서는 이 내용을 싣기로 한다. 아차마을의 부유한 농가에 과년한 외동딸이 있었는데 밤이면 미소년이 찾아와 사랑을 하게 되어 몇 달이 지나니 처녀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배가 불러오니 숨길 수도 없이 가족들에게 전후 사실을 이야기 하였는 바 아버지의 말이 “커다란 실꾸리를 몰래 놓았다가 실을 꿴 바늘을 소년의 옷에 꿰어라” 하기에 그날밤 그대로 하였다. 그리고 아침에 실을 따라 갔더니 금하굴 속에 커다란 지렁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래서 견훤왕은 지렁이의 자식이라고 한다. 그 후 지렁이가 살던 굴은 아침 저녁으로 오색이 영롱하고 풍악소리가 요란하여 금하굴이라 이름하였고, 원근 각지에서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몰려오므로 이 마을에 살던 부호가인 심장자가 매일 손님 접대에 곤혹을 치루자 그는 하인을 시켜 금하굴을 묻어 버렸다. 그 후로는 풍악소리도 끊어지고 심장자 집도 졸지에 망해 버렸다 전한다. 해방 후 다시 굴을 원형대로 파냈으나 풍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2. 견훤산성(甄萱山城)

  견훤산성은 가은읍 민지리와 농암면 농암리 사이에 있는 천마산에 있다. 일명 천마산성이라 하고 벡제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경현지(영조본) 고적조에는 “견훤산성은 가은현 서남 5리에 있다. 산 위에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백6십5척이다.” 하였고 환여승람에는 “백제성, 일명 견훤산성이라 한다. 청화산 동쪽 10리에 있다. 견훤이 그 가운데 웅거했었다고 한다. 석천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에 견훤과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축성방법은 가까운 곳에 있는 돌을 모아 쌓았는데 성의 높이는 불과 2m정도이며, 높은 곳이 3m를 넘지 않는다. 가까운 고부성이나 고모성의 축성방법과 같은 것으로 보아 삼국전기부터 있었던 성으로 보아야겠다. 왜냐하면 상주시 화북면에 가면 견훤이 쌓았다는 견훤성이 있다. 화북의 견훤성은 돌을 다듬어서 견고하게 축성한 것으로 보아 견훤의 활동시대부터 적어도 4,5세기 전에 농암 견훤성이 축조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견훤성의 위치는 밑으로 속리천이 돌아 흘러 섬을 연상하는 지점 우뚝한 산봉우리에 있어 농암, 화북방면과 연천, 궁기방면, 가은방면을 한눈에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은~화북, 농암~송면으로 통하는 길이 반드시 성 밑을 통과해야만 갈 수가 있다. 동,남,서로 강물이 흐르고 북쪽은 가실목(加西項)의 단일로가 있을 뿐이다. 견훤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보은,옥천 방면에서 화북을 거쳐 쌍룡계곡을 통과하는 곧 속리천을 따라 침입하는 서쪽으로부터의 적을 방어함은 물론, 계립령을 넘어 상주 등 내륙으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는데도 중요한 지점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성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가은성, 30리 거리에 있는 고모성과 고부성, 상주 화북에 있는 견훤산성 등이 하나 같이 북,서쪽을 방비토록 축성되어 있다. 서,북의 세력이 비록 소백산맥을 넘어 왔다고 하여도 요충지가 되는 길목에 이들 성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 내지로의 진입이 항시 우리지역에서 저지되었다고 추측된다. 이곳 견훤산성에서 신라의 경순왕과 견훤과의 싸움이 있었다고 전해져 있으나, 역사기록에서는 찾을 수가 없고, 백제 무녕왕 12년 9월에 가불성을 쳐서 빼앗은 고구려군이 원산성(현 용궁)까지 진격 했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이 가불성이 있던 곳이 불분명하여 단정 할 수는 없으나 이 곳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3. 가은성(加恩城)

  가은성이라 지목되는 성은 가은 왕릉에서 농암을 향하여 가다가 보면 성저리(성밑)와 성유리(성너뫼)가 있다. 이 성저와 성유를 잇는 산이 둘러있으며, 이 성이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먼저 축조된 토성이다. 지금은 가은~농암간 도로가 개통되어 절벽과 맞대어 흘렀다. 이 산등성이는 성유에서 성저가 이어져 주위가 1㎞ 정도 된다. 안쪽 능선을 연화봉이라 부르며 바깥편은 영강이다. 옛 신라 때에 가해현, 가선현이 있던 위치가 바로 이곳이다. 부근의 산과 밭에는 신라 때의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 성은 상주,보은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다. 계립령이나 화북,보은방면에서의 침입을 차단할 수 있는 곳이며, 소백산맥 이북의 괴산,청천 등지에서의 침입도 방어할 수 있는 곳이다.
  신라 경순왕 3년 10월에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하였으니 이 지역은 바로 견훤의 출생지이다. 우리 고장에 전해져 오는 전설에은 견훤이 이곳에서 영강 건너편인 갈전리 아개동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며, 아개동은 아자개(견훤의 아버지)가 살았다고 하여 지금까지 아개동이라 부르며, 이 아개동에는 견훤이 독서하던 독서굴이 있었다고 하며 그 암굴 이름을 금하굴이라 불렀으나 그 굴속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굴 입구를 봉했었다고 전해진다. 또 성저리 산 기슭에는 모산굴(茅山窟), 일명 갈생굴(蝎生窟)이라는 동굴이 있다.

  4. 근품산성(近品山城)과 치마단(馳馬壇)

  소재지 : 산양면 현리. 축법 : 석축. 시대 : 삼국시대

  『삼국사기』·『고려사』 등에 등재되어 있는 산성으로 927년 견훤과 왕건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현재 산양면 현리 뒤산에 위치하고 있다. 정상부에는 현리 서낭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서낭당을 둘러싼 담장도 성의 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부의 북서쪽으로 성벽 일부가 수직으로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근품성이라고도 불리며 근처에는 말을 훈련시켰던 치마단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5. 희양산성(曦陽山城)

  희양산성은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뒷산인 희양산 정상에 쌓여 있는 석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성이 있으니 삼면이 모두 석벽이며 옛 군창이 있었다.”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 관방조에는 “희양고성(曦陽古城)은 여람(동국여지승람)에 가은폐현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삼면이 모두 석벽이다.”고 하였다. 문경현지에도 같다. 삼국말기에 경순왕이 이 성에서 견훤과 싸웠다고 하며, 삼국사기 경순왕조에는 “3년 10월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하였으니 싸웠다면 이 때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또 문경현지 영조본에는 “봉암사에는 신라 경순왕이 창건한 극락전이 있으며, 본조(조선조) 세조대왕의 어첩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으니 경순왕이 이곳까지 왔었다고 추측은 되거니와 과연 후삼국말기의 혼란이 극심할 시기에 임금이 여기까지 거동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희양산은 삼면이 발을 부칠 수 없는 층암절벽이며 원북리 한배미쪽에서 오를 수가 있고 충북 연풍면에서 오를 수 있는 길이 한 곳 있다. 희양산성은 소백산맥의 주령 중 가장 바위 석벽이 웅장한 산이다. 이 산의 성은 괴산,연풍방면에서 남으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쉽고 남에서부터 오는 적도 넘을 수가 없다. 축성방법은 남쪽과 서쪽의 석벽 정상과 북쪽,동쪽의 능선 위에 돌로 쌓았으며 주위는 넓지 않다. 충북쪽 오봉정에서 넘어노는 단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그 정상에서는 괴산 청천방면도 감제할 수가 있어 위치상으로는 중요한 곳이다. 6.25전쟁 때 7월 21일 괴뢰군은 3번 국도의 진격이 어려워 이 오봉정 샛길로 넘어와 가은 옥녀봉을 공격한 사실로 보아 희양산성의 중요성이 증명되고 있다. 이 희양산 아래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주위의 수려한 경관은 소금강이라 일컬어 왔다. 야유암(夜遊岩), 기연(妓淵), 백운대(白雲臺)는 천하의 절경이다.

  6. 작성(鵲城)

  작성은 동로면 명전리 황장산 기슭 골짜기에 있으며, 우리 고장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왔을 때 공민왕은 주흘산 어류동에서 기거하고 공민왕비 노국공주가 이 작성에서 피난하였으며 공민왕이 작작군에게 명하여 이 성을 쌓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성이 고려말기에 축성되었다고 보기에는 그 축성방법이 삼국시대 신라 축성방법과 다른데가 없고 또한 이 성의 위치가 적성로의 북단에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노고성의 전진성이며 한강 진출의 최전방 기지인 신라성으로 보여진다.
  증보문헌비고 권 17 예천군 관방조에는 “작성은 둘레가 6백10척이요, 높이가 11척이며 너비가 10양척”이라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황장산을 작성산이라 예천군 산천조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작성은 둘레가 6백10척이며 서쪽으로 돌문이 있으니 높이가 11척, 넓이가 12척이며 삼면이 모두 바위돌이다.”” 라 기록하고, 옛 예천군지에는 작성산은 군에서 북쪽 75리에 있으며, 황장금림(黃腸禁林)으로 봉해졌으니 둘레가 40리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서나 예천군지에서는 모두 황장산으로 부르지 않고 작성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단양현 건치연혁에 “본시 고구려의 적산현이며 또한 적성이라 이른다. 또 단양현 산천조에 남천은 군의 소족 30보에 있으니 그 근원은 경상도 예천군 작성산에서 나와 이락루 앞에서 하진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작성이란 지명을 살펴보면 현재의 동로면소재지를 적성리라 부르고 이 적성리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영을 벌재라 부르고 있음을 볼 때 적성령 북쪽지역 일원은 삼국시대에는 단양(적성현)에 속했던 게 아닌가 추측된다. 현재의 소백산맥 넘어에 있는 동로면 명전리 일원은 단양현지역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작성에서 남쪽 적성(동로)과의 거리나 북쪽 단양적성(하방리)과의 거리가 비슷할 뿐 아니라, 단양 북쪽의 온달성 등과 연관시켜 볼 때 작성은 벌재재(赤城嶺)를 방어하고 신라로의 진입을 하기 위한 고구려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고구려는 장수왕(413~476)대에 죽령을 넘어 영천(지금의 영주),봉화,청송,예안지역까지를 차지하였음은 물론 단양,제천,청풍,충주,괴산지역도 차지하였다. 단양의 옛 이름 적산(赤山),적성(赤城)은 고구려의 지명이다. 그렇다면 작성도 또한 고구려성일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보여진다. 작성은 그 서쪽으로 호항령(狐項嶺:여우목고개)의 관애와 멀지 않으며, 노고성과의 거리도 20리가 넘지 않는다. 고구려 세력이 여기에서 남진을 한다고 해도 노고성의 요충을 뚫고 나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작성이 신라의 한강 진출의 전위 기지였다면 한강 상류에 도달하기는 여간 쉬운 길이 아닐 수 없다. 이와같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성에 대하여는 그 축성년대와 신라,고구려의 어느쪽의 축성인지를 명확히 구별하기 위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작성은 황장산(1,077.4m) 정상까지 어디에 가도 물이 풍부하고, 단양의 삼선구곡과의 거리는 물론 단양 대강면 일원을 내려다 보며 감제할 수가 있다.

  참고로 작성과 관련된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361년 홍건적이 고려에 침입하여 공민왕은 서울인 개경을 떠나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난하였다가 돌아가는 길에 우리고장 어류성에서 상당기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 때에 이곳 황장산에 작장군에게 명하여 성을 쌓게 하고 노국공주(공민왕비)와 비빈, 궁녀들을 이 작성에 대피시켜 머물게 하고는 며칠에 한번씩 이 작성에 왕래하면서 피난길의 고생을 위로하고 개경이 수복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전하는 속설에는 작장군이 성을 쌓았다고 하여 작성이라 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과연 당시에 작씨 성을 가진 장군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작성이란 이름을 가진 성이 멀지 않은 청풍에도 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지에 보면 미상지에 적현성이 있다. 우리말로는 벌재성이다. 견아성(개이성)을 이병도는 조선역사지리지에서 문경의 서쪽으로 보고 있으니 적현성이 삼국사기지지에 바로 견아성 밑에 기재된 것으로 보아 오늘의 문경지방으로 추정한다면 적현성(벌재성)을 작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더 많은 연구와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7. 숭위전(崇威殿)

  위치 : 가은읍 갈전리 산 170-1. 부지 : 6.6평. 건평 : 6평. 형태 : 맛배지붕,정면3칸,측면1.5칸

  견훤의 묘는 현재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 18-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견훤의 혼을 달래는 사당은 전국에 없는 실정이다. 상주시 화서면과 화남면에 있는 당집을 제외하곤 그럴 듯한 사당은 없는 셈이다. 문경에서 태어나 비록 호남지역에서 후백제 건국을 위한 활동을 하였지만 역사적 패배자라는 낙인으로 인해 수많은 전승과 업적이 역사속으로 사장되어 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이제 더 이상의 역사왜곡을 막고 견훤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짐을 금번에 시행되는 사당 건립을 통해 그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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