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유적과 지명 > Ⅱ. 문경지역의 지명 /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2014. 5. 14. 21:06나의 이야기






      

제3편 유적과 지명 > Ⅱ. 문경지역의 지명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 문경문화원 자료 

2012/06/1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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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와 전설로 보는 견훤  

 

 

제3편 유적과 지명 > Ⅱ. 문경지역의 지명  

  1. 갈전리(아호동, 아차동, 아개동)

  2. 말바위와 아차산

  3. 천마산과 농암

  4. 궁기리(궁터)

  5. 북짓골

  6. 어류동

  7. 왕릉

  8. 성저와 성유

 

Ⅱ. 문경지역의 지명

  1. 갈전리,아호동,아차동,아개동

  실제로 아차리 마을은 형세가 마치 물오리가 호수에 내려앉는 형상(군아투호형群鵝投湖形)이라 해서 아호동(鵝湖洞)이라 했다. 또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상인 금차낙지형(金차落地形)이기 때문에 여기서 한 글자씩 취하여 아차라고도 불리고, 혹은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의 이름을 따 아개동(阿介洞)이라고도 한다.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명당임을 뜻하는데 마을 뒤쪽으로 큰 산이 솟아 있어 이웃 상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마을 앞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영강이 흐르고 그 주변을 따라 속개들이라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마을 밖에서 보면 마을 전체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마을의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서면 상당히 큰 마을이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 이 마을에는 56호에 150명 가량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와는 달리 문경시 농암면 연천리 개천가에는 말에 스친 자국이라 해서 말바위라는 암석이 남아 있다. 여기에도 전설이 묻어 있지 않을 수 없다. 이 말바위 밑에는 물이 고여 있는 시퍼런 소가 있는데 여기서 말 한 마리가 나와서 놀다가 사람이 곁에 가면 물 속으로 쏙 들어가는 바람에 잡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견훤이 꾀를 내어 냇가에 허수아비를 세워 놓았다. 이 말은 허수아비를 매일 보게 되자 두려워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견훤이 허수아비 뒤에 숨어 있다가 물 밖으로 나온 말을 꽉 붙잡아 키웠다는 것이다. 어느날 견훤이 산꼭대기에 있는 소나무를 향하여 활시위를 당김과 동시에 부리나케 말을 몰아갔다. 그런데 소나무에는 이미 화살이 박혀 있었다. 자신의 말이 화살보다 늦었다고 생각한 견훤은 칼을 뽑아 백마의 목을 후려쳤다. 순간 쉬익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날아와 소나무에 박혔다. 순간 견훤은 ‘아차’ 소리를 내뱉았다. 소나무에 박혀 있던 화살은 견훤이 전날 연습할 때 쏘았던 화살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견훤이 출생한 동리가 ‘아차’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바위는 결국 견훤으로 하여금 전라도로 향할 수밖에 없는 설화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2. 말바위와 아차산

  문경시 농암면 연천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아주 옛날부터 불리워지던 동명은 ‘말바위’이다. 마을 앞산 험준한 절벽으로 된 산이 가로막아 온갖 잡목이 우거져 있고 그 앞으로 아름다운 정경을 이룬 내가 흐르고 있으며 산줄기가 굽이치는 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이것이 ‘말바위’이다. 옛날 견훤이 후백제의 왕이 되기 전에 이웃 궁기리에 살면서 그는 매일 이곳 강변에서 칼쓰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있었다. 다만 군마가 없어 고심 중이던 어느날 그는 모래밭 위를 걸어간 말발자국을 발견했으나 매일 그가 모래밭에서 나오는 시간에 말이 지나가는 시간보다 늦어 말을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드디어 바위 속에서 한 마리의 용마가 “히힝” 소리를 치며 뛰어 나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달려나가 고삐를 잡았다. 한참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은 견훤은 이윽고 입을 열어 말에게 일렀다. 내 장차 후백제를 세울 몸인데 장수 나자 용마나니 과연 네가 내 말이로구나. 이제 너늘 시험할 터이니 활을 쏘아 네가 화살보다 빠르면 나와 일생을 같이 할 것이나 만약 그렇지 못하면 네 목을 칠 것이다.”라고 말이 하늘을 우러러 큰 소리로 울어 응답하자 곧 화살이에 시위를 떠났고 이어 말도 번개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달은 곳이 거기서 20리 떨어진 가은읍 아차산이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견훤은 화살보다 늦었구나. 한탄하고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쳤다. 억울한 말의 목이 땅에 떨어지기가 바쁘게 쏴-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그제사 날아와 쓰러지 말 앞에 꽂히는 것이 아닌가! 견훤은 “아차!” 가슴을 치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후 용마가 난 바위를 “말바위”, 그 마을 이름까지도 “말바위”로 불렀으며, 말목을 친 가은읍의 그 산 이름을 “아차산”이라 하고 동명도 “아차동”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웃 마을 궁기리는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라 하여 마을 이름이 이에 연유한 것이라 한다.

  3. 천마산과 농암

  우리 고장에서 천마산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앞의 기록에서 산성 안에는 돌샘(石泉)이 한 곳 있다고 한 것을 보았다. 이 샘물은 지금도 나오고 있으며 천마천(天馬泉)이라 부르고 있다. “견훤이 젊을 때에 이 천마산에서 군사를 모아 놓고 전쟁연습을 하고 있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이 샘에 갔더니 자기보다 먼저 야생마 한 마리가 물을 먹고 있었다. 견훤이 야생마를 살펴보니 날래고 억세게 잘 생겼으므로 이 말을 자기의 승용마로 삼으려고 시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말과 화살 중 어느 것이 빠른가를 시험하는데 만약에 말이 화살보다 늦으면 말의 목을 자르기로 마음먹고서 천마산에서 말을 타는 것과 동시에 연천쪽 벼랑을 보고 화살을 당겼다.
  그와 동시에 말을 채찍하여 연천 벼랑에 와보니 화살이 보이지 않으므로 말이 화살보다 늦게 왔다고 하면서 말의 목을 자르고 나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견훤이 아뿔사 후회했지만 말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와는 다른 한가지 전설은 “천상의 옥황상제께서는 무남독녀의 공주가 있었는데 공주는 구호라는 총각과 남의 눈을 피하여 사랑을 속삭여 오다가 끝내는 옥황상제께 발각되었다. 구호는 인간세상으로 유배되어 떠나올 때 공주로부터 보물상자 둘과 백마 한 필을 받았다고 한다. 천상에서 유배당한 구호는 바로 이 천마산에 내려와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어떤 처녀가 슬피 우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더니 자기는 아비라는 처녀로 간밤에 아버지가 호환을 당하였으나 여자의 몸이라 어찌 할 수가 없기에 울고 있다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구호는 그 범을 잡아 원수를 갚아줄테니 안심하라 이르고 천마산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맨손으로 범을 잡아 처녀의 원수를 갚아 주었다. 그런 뒤에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같이 살던 중에 아비처녀가 잉태하여 만삭이 되어 해산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구호의 형기가 만료되어 하늘로 돌아가야할 날이 다가왔다. 아비를 데리고 하늘로 오르자니 공주에게 면목이 없고 두고가자니 불쌍한 생각이 들어 아비를 데리고 천상에 오르자, 이를 본 옥황상제와 공주는 그만 대노하여 다시 내쫓으니 구호가 타던 백마가 떨어져 천마산이 되고 구호와 아비는 천마산 동쪽에 떨어져 두 개의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바위가 오늘의 농바위(농암 籠岩)라 한다.

  4. 궁기리(궁터)

  한편 견훤의 집안은 농암면 가장 서쪽 오지인 궁기리의 궁터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살던 곳이 아차리라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궁터라는 지명은 후백제왕 견훤이 출생한 곳인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즉 임금이 나온 곳이라 해서 궁터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5. 북짓골

  문경시 농암면 종곡1리는북짓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견훤이 북을 울리면서 군사를 조련했던 곳이라 하여 붙인 자연마을 이름이다.

  6. 어류동(御留洞)

  어류동은 문경읍 상초리 혜국사에서 주흘산 정상 사이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칠 때에 이곳에 머물며 성을 쌓고 이름을 어류(御留)라 하고 절을 세우고 이름을 보제(普濟)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고려말년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여기에서 피하여 궁궐의 유지가 있다고 한다.

  7. 왕릉(旺陵)

  견훤의 고향인 문경시 가은읍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왔다는 전설이나, 왕비가 이곳에 왔다가 아이를 낳아 태(胎)를 묻었다는 전설과 더불어 본시 왕릉이 있었기에 가은읍 왕릉리였는데 다시 이장했기에 일(日)자를 넣어 왕릉(旺陵)으로 표기한다는 등의 전설들이 있다.

  8. 성저와 성유

  929년 10월 견훤의 침공 소식을 들은 고사갈이성의 성주 흥달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흥달이 출전하기에 앞서 목욕을 하는데 갑자기 오른팔 위에 '멸(滅)'자가 나타났다. 그런 지 열흘만에 흥달은 별들어 죽었다. 견훤이 고사갈이성을 함락시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견훤은 이어서 가은현을 포위했다.

  가은현의 치소는 지금의 문경시 농암면에 소재한 해발 356m 성재산에 축조된 견훤산성과 그 주변을 지목할 수 있다. 아니면 가은읍 성저1리 부근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성저(城底)는 '성 밑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그곳 너머는 '성 너머'(성유)라고 한다. 이런 것을 볼 때 본디 산성이 있고 이 성이 가은현의 통치 거점이었던 현 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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