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4. 21:06ㆍ나의 이야기
조사개요Ⅱ견훤의 생애Ⅱ견훤설화Ⅱ견훤산성Ⅱ성재산 견훤산성Ⅱ 견훤관련 산성 Ⅱ 민속 Ⅱ 개발방안
제3편 유적과 지명 > Ⅱ. 문경지역의 지명 ▒▒▒▒▒▒▒▒▒▒▒▒▒▒▒▒▒▒▒▒▒▒▒▒▒▒▒▒▒▒▒▒▒▒▒▒▒▒▒▒▒▒▒▒▒▒▒▒▒▒▒▒▒▒▒▒▒
실제로 아차리 마을은 형세가 마치 물오리가 호수에 내려앉는 형상(군아투호형群鵝投湖形)이라 해서 아호동(鵝湖洞)이라 했다. 또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상인 금차낙지형(金차落地形)이기 때문에 여기서 한 글자씩 취하여 아차라고도 불리고, 혹은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의 이름을 따 아개동(阿介洞)이라고도 한다.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명당임을 뜻하는데 마을 뒤쪽으로 큰 산이 솟아 있어 이웃 상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마을 앞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영강이 흐르고 그 주변을 따라 속개들이라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마을 밖에서 보면 마을 전체가 잘 보이지 않으므로 마을의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서면 상당히 큰 마을이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 이 마을에는 56호에 150명 가량의 인구가 살고 있다. 문경시 농암면 연천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아주 옛날부터 불리워지던 동명은 ‘말바위’이다. 마을 앞산 험준한 절벽으로 된 산이 가로막아 온갖 잡목이 우거져 있고 그 앞으로 아름다운 정경을 이룬 내가 흐르고 있으며 산줄기가 굽이치는 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이것이 ‘말바위’이다. 옛날 견훤이 후백제의 왕이 되기 전에 이웃 궁기리에 살면서 그는 매일 이곳 강변에서 칼쓰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있었다. 다만 군마가 없어 고심 중이던 어느날 그는 모래밭 위를 걸어간 말발자국을 발견했으나 매일 그가 모래밭에서 나오는 시간에 말이 지나가는 시간보다 늦어 말을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드디어 바위 속에서 한 마리의 용마가 “히힝” 소리를 치며 뛰어 나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달려나가 고삐를 잡았다. 한참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은 견훤은 이윽고 입을 열어 말에게 일렀다. 내 장차 후백제를 세울 몸인데 장수 나자 용마나니 과연 네가 내 말이로구나. 이제 너늘 시험할 터이니 활을 쏘아 네가 화살보다 빠르면 나와 일생을 같이 할 것이나 만약 그렇지 못하면 네 목을 칠 것이다.”라고 말이 하늘을 우러러 큰 소리로 울어 응답하자 곧 화살이에 시위를 떠났고 이어 말도 번개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달은 곳이 거기서 20리 떨어진 가은읍 아차산이었다. 그러나 날아오는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견훤은 화살보다 늦었구나. 한탄하고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쳤다. 억울한 말의 목이 땅에 떨어지기가 바쁘게 쏴-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그제사 날아와 쓰러지 말 앞에 꽂히는 것이 아닌가! 견훤은 “아차!” 가슴을 치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후 용마가 난 바위를 “말바위”, 그 마을 이름까지도 “말바위”로 불렀으며, 말목을 친 가은읍의 그 산 이름을 “아차산”이라 하고 동명도 “아차동”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웃 마을 궁기리는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라 하여 마을 이름이 이에 연유한 것이라 한다. 우리 고장에서 천마산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앞의 기록에서 산성 안에는 돌샘(石泉)이 한 곳 있다고 한 것을 보았다. 이 샘물은 지금도 나오고 있으며 천마천(天馬泉)이라 부르고 있다. “견훤이 젊을 때에 이 천마산에서 군사를 모아 놓고 전쟁연습을 하고 있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이 샘에 갔더니 자기보다 먼저 야생마 한 마리가 물을 먹고 있었다. 견훤이 야생마를 살펴보니 날래고 억세게 잘 생겼으므로 이 말을 자기의 승용마로 삼으려고 시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말과 화살 중 어느 것이 빠른가를 시험하는데 만약에 말이 화살보다 늦으면 말의 목을 자르기로 마음먹고서 천마산에서 말을 타는 것과 동시에 연천쪽 벼랑을 보고 화살을 당겼다. 한편 견훤의 집안은 농암면 가장 서쪽 오지인 궁기리의 궁터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살던 곳이 아차리라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궁터라는 지명은 후백제왕 견훤이 출생한 곳인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즉 임금이 나온 곳이라 해서 궁터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문경시 농암면 종곡1리는북짓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견훤이 북을 울리면서 군사를 조련했던 곳이라 하여 붙인 자연마을 이름이다. 어류동은 문경읍 상초리 혜국사에서 주흘산 정상 사이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칠 때에 이곳에 머물며 성을 쌓고 이름을 어류(御留)라 하고 절을 세우고 이름을 보제(普濟)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고려말년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여기에서 피하여 궁궐의 유지가 있다고 한다. 견훤의 고향인 문경시 가은읍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왔다는 전설이나, 왕비가 이곳에 왔다가 아이를 낳아 태(胎)를 묻었다는 전설과 더불어 본시 왕릉이 있었기에 가은읍 왕릉리였는데 다시 이장했기에 일(日)자를 넣어 왕릉(旺陵)으로 표기한다는 등의 전설들이 있다. 929년 10월 견훤의 침공 소식을 들은 고사갈이성의 성주 흥달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흥달이 출전하기에 앞서 목욕을 하는데 갑자기 오른팔 위에 '멸(滅)'자가 나타났다. 그런 지 열흘만에 흥달은 별들어 죽었다. 견훤이 고사갈이성을 함락시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견훤은 이어서 가은현을 포위했다. 가은현의 치소는 지금의 문경시 농암면에 소재한 해발 356m 성재산에 축조된 견훤산성과 그 주변을 지목할 수 있다. 아니면 가은읍 성저1리 부근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성저(城底)는 '성 밑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그곳 너머는 '성 너머'(성유)라고 한다. 이런 것을 볼 때 본디 산성이 있고 이 성이 가은현의 통치 거점이었던 현 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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