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비로사 들꽃다회 - 다섯

2014. 6. 29. 10:25들꽃다회






       백산 비로사 들꽃다회 - 다섯

              

                           /  20140614 토요일, 맑음

       





    비로사는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義僧軍)의 주둔지가 되었다.

부산진(釜山鎭)에 상륙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왜병의 일부 부대가 

강원도 영월로 진격하기 위하여 지름길인 비로사 앞을 지나 가려하자 이를 

저지하려던 1,000여 명 의승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힘이 약하던 의승군 전원은 

순국하고 비로사도 불탔으나, 다행히 적광전 안의 두 부처님과 당간지주, 

진공대사 탑비는 화마를 피해 남았다고 한다.

 

    1609년(광해군 1년) 중건과 1684년(숙종 10년)에 중창이 있었지만 

1908년 갑오경장 때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과 1927년, 1932년에 중건 중수가 있었는데,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다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중건 불사가 계속되어 

현재의 가람 모습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소백산사'로 불렸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비로사'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제자인 진정의 홀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현 비로사 자리로 

추정되는 소백산 추동에 초가를 짓고 '화엄경'을 강의하였고, 90일 동안 계속된 

이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하늘에서 환생했다고 말했다 한다.





                         - 다음 블로그 < 토함산솔이파리> 솔뫼님의 글 중에서







<조선고적도보>로 우리 문화재 살펴보기(12): 영주 비로사 부도비와 부도| 역마살 향기
하늘사랑|조회 71|추천 0|2013.02.03. 10:50

-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위:이수, 가운데:비신, 아래:귀부)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8년 출판)

    경북 영주 비로사(毘盧寺)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신라 신문왕 때 승려 진정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소백산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중창되었으나, 1908년에 일어난 병화로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려 거의 폐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1912년 이곳을 탐방한 다니이 세이치(谷井済一)의 기록에는 "고려시대 진공대사 

묘탑은 파괴되었고, 비는 넘어져 비신이 결단되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병화를 당한 뒤 도굴꾼의 약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선고적도보>의 사진도 
다니이 세이치의 기록과 다르지 않습니다. 

위 사진은 당시 진공대사보법탑비의 모습입니다. 

부도비는 완전히 무너져, 이수, 비신, 귀부가 따로 있습니다. 

비신도 여기저기 깨어졌는데, 깨어진 한 조각은 귀부 옆에 있습니다.





-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

      (사진 출처: 블로그 <이 땅에서 잘 놀기>)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는 1972년에 지금의 

형태로 복원되었습니다.

    귀부는 
용머리 형태를 하였고, 다소 둔중한 감이 있으며, 새김도 규모에 

비해 얕습니다. 비좌도 낮은 편이며, 귀갑문은 연속된 육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수는 산 모양을 하였고, 양 모서리가 파손되었으며, 다소 도식화된 운룡문이 

얕게 새겨져 있습니다. 전면 중앙부에 '고진공대사비(故眞空大師碑)'라는 전액이

새겨져 있습니다.

진공대사(眞空大師, 855~937)는 경주 출신으로, 가야산으로 들어가 선융화상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이후 도의선사의 자취가 서린 진전사를 찾는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선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부름을 받아 경주와 개경 등을 방문하기도 했고, 소백산사를 중수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 7~8년을 이곳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습니다. 


그가 입적하자 400여 명의 문도들은 
절에서 300보 떨어진 곳에서 장사를 지내고, 

태조에게 탑비를 세워줄 것을 주청하였습니다. 

    이에 태조는 시호를 진공대사, 탑호를 보법지탑이라 내리고, 최언위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였습니다. 

   부도비는 그가 입적한 지 2년 만인 939년 8월 15일에 세워졌습니다. 






-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의 잔석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8년 출판)





    이제 진공대사의 부도에 대해 알아볼까요?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터(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址)의 모습입니다.

    부도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2매 석재 위에 2단의 네모꼴 석재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부도의 형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방형 부도는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은 해봅니다.  

그러면 이 부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진공대사보법탑비 부근 어디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될 뿐입니다. 






- 비로사 동봉 부도 (사진 출처: 조선고적도보, 1918년 출판)

    비로사의 또 다른 부도인 비로사 동봉 부도(毘盧寺東峰浮屠)의 모습입니다. 

이 부도도 지금은 없습니다. 

대신 최근에 같은 모양으로 만든 부도가 비로사에 있습니다.

    1964~1967년까지 신라오악종합학술조사단에 의해 실시된 조사 당시까지만 

해도 비로사 동봉 부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와 고려시대 석조부도>의 저자 엄기표는 이 부도에 대해 "사찰 측을 따르면, 

원래 자리인 비로사 동봉에서 도괴되어 마을 사람들이 비로사 경내로 이건하였는데, 

1970년대 초반에 반출되어 사라졌다고 한다. 


   2002년 8월 안내를 받아 원래 위치를 찾아가 본 결과 전혀 흔적이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 다음 카페 <옛님의 정취 그 향기를 따라>   

                                        하늘사랑 님의 글 중에서









     소백산 비로사 나한전 편액








       나한전








       나한전 벽화 - 심우도......




               소가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 십여년 전에 구한 다호(茶壺)에 새겨진 명문 에서.....

























































     아래에 있는 나한전 벽화 사진 몇장은 이전 글과 중복되나

심우도의 일관성을 위하여 다시 게재하오니 혜량바랍니다.





























       고려시대 귀족문화의 발달 < 건축과 조각>





                 부석사 무량수전 (경북 영주)






                                  수덕사 대웅전 (충남 예산) 






                  

       불일사 5층 석탑 (경기 개성)                                           무량사 5층 석탑 (충남 부여) 







                 


       월정사 팔각 9층 석탑 (강원 평창)                     경천사 10층 석탑 (경복궁 전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시대의 건축은 궁궐과 사원이 중심이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개성 만월대 터를 보면 당시 궁궐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경사진 면에 축대를 높이 쌓고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에 건물이

층층으로 나타나 웅장하게 보였을 것이다.



     고려 전기에는 주로 주심포 양식이 유행하였는데, 13세기 이후에 지은 일부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은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균형잡힌 외관과 잘 짜여진 각 부분의 

치밀한 배치로 고려 시대 건축의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다포식 건물도 등장하여 조선 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황해도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은 고려 시대 다포식 건물로 유명하다.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 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다.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개성 불일사 5층 석탑과 오대산 월정사 팔각 9층 석탑이 유명하며, 

고려 후기의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의 석탑을 본뜬 것으로,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승려의 승탑은 고려 시대에도 조형 예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달사지 승탑처럼 신라 후기 승탑의 전형적인 형태인 팔각원당형을 계승하는

것이 많고, 특이한 형태를 띠면서 조형미가 뛰어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등도 있다.




     고려 시대의 불상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독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도 조성되었다. 



      또,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같이 신라 시대 양식을 계승한 걸작도 있다. 




*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


      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면서 건물을 치장하는 장치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짜여져 있는 건축 양식




 다포식(多包式) 건물


    다포식(多包式) 건물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짜여져 있는 건물.

웅장한 지붕이나 건물을 화려하게 꾸밀 때에 쓰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나한전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좌상과 

                협시불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좌상


             - 조성연대는 그리 올라가지 않는 상호를 보여주신다.









       석가모니불좌상









       관세음보살좌상









       대세지보살좌상


            -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거의 좌우대칭형으로

               근대의 불상 조형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나한전 천장의 가구구조와 단청








       

       나한전 16나한상과 탱화









         나한전 16나한상........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찬란한 불교문화재를.......








































     16나한상과 나한탱






























[스크랩] 아미타 내영도| 夢圓寺
한베러브|조회 2|추천 0|2014.01.1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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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타 삼존 내영도

고려 14세기, 110cm×51cm, 비단에 채색,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아미타불로부터 한 줄기 빛이 뿜어져 나와 공양자를 비취고 있다.

아미타불은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부처.

그에 의해 극락정토로 이끌려가는 숨막히는 장면이다.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 불화.

 고려 후기 귀족들의 염원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아울러 그들의 재력, 미적 수준들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행복만이 보장된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려면,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정성되이 외워야 한다.

이렇게 염불을 잘 한 중생은 그가 세상을 하직한 다음이나,

혹은 수행이 성숙해졌을 때 아미타불이 직접 그의 권속과 함께 마중해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고 한다.

이러한 염불왕생신앙은 이미 신라 때부터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욱면의 설화에서처럼.

아미타불의 협시로 관음과 세지가 아니라, 세지 대신 지장이 등장하고 있다.

본존은 다소 정적인 모습이지만, 풍만한 얼굴, 근엄한 표정, 활기찬 어깨와 당당한 가슴,

쑥 내민 팔 등에서 건장한 장자풍 부처의 위엄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미타 삼존 내영도 세부

 

고려 14세기, 110cm×51cm, 비단에 채색, 호암미술관 소장.

대자대비의 관음보살이 본존의 한발 앞에 나와 몸을 앞으로 굽힌 채 내영자에게

두 손을 뻗어 손 위에 올려놓은 연꽃 대좌 위로 맞아들이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옥에 떨어진 마지막  한 명의 중생까지 구원하지 않고서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지장 보살은 소년처럼 앳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구도자처럼 관음과 지장의 도움으로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에 왕생하고픈

고려 귀족들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혜허의 양류관음도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 작자를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고려 수월관음도 중에서 구도와 형태가 특이한 그림이다.

대각선적 구도는 다른 수월관음도와 비슷하지만 버들잎 속에 서 있는 입상이나

화면  오른쪽의 절벽과 대나무가 없어지고 버들잎 광배가

화면의 중심을 압도하는 구도는 이 상의 독특한 특징이다.

역시 풍만하고 여유로운 표정,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어깨의 곡선이나

완만한 굴곡을 이루는 신체의 흐름, 오른쪽으로 휘어진 늘씬한 자태 등은

당대 왕공 귀족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부석사 조사당 사천왕상,보살상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浮石面) 북지리(北枝里) 부석사에 있는 고려 말기의 벽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의 후불 탱화 (아미타삼존도)

조선 1476년, 가로 210 세로 270cm,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무위사 극락보전. 보물 제1313호.

무위사 극락전 후벽에는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 명의 시주로

대선사 해련(海連) 등이 1476년(성종 7)에 그림을 조성하였다는

화기(畵記)가 있는 아미타 삼존 벽화와 수월관음도가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흙벽에 그려진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후불 벽화로 화려하고 섬세한 것으로

유명한 고려 불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뛰어난 작품이다.

고려 불화는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아미타여래의 무릎 아래에 그려 위계 질서를 강조하는 2단 구도이다.

그러나 무위사의 후불 벽화는 협시보살이 아미타여래의 양 옆에 서고

그 위로는 6명의 나한이 구름으로 싸여 있어,

부처님과 친화 관계를 유지한 원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형식의 차이에서 시대상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아미타구존 내영도 - 일본 구세열해미술관 소장

 

 
        -   :제주 향림사 파라밀 원문보기   글쓴이 : 지산









       소백산 비로사 나한전 16나한상과 나한탱.......

























   나한신중상









       소백산 비로사 나한전 16나한상








































   사진이 흔들렸으나 한장 밖에 없어서 게재함..... ㅈ   ㅅ.....   

                                                              ......... (()) .........
























       나한전 앞마당에서 내려다 본 월명루.....














법당의 부처님 명호를 알아보는 방법에 대한 고찰| 사찰문화해설포교팀
원경 윤병구|조회 43|추천 0|2014.06.05. 16:19

               

                법당의 부처님 명호를 알아보는 방법에 대한 고찰

 

 

                                                                        사찰문화해설포교팀 제3회 공동학습 자료

                                                                                                    편집  :  원경 윤 병구

 

 

  Ⅰ.  서론

 

    불상은 깨달은 부처님을 형상화시킨 것이다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어느 때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기에 과거현재미래를 막론하고 수많은 부처가 존재한다이렇게 많은 부처를 형상화하다보니 수많은 불상이 존재하게 된다불상을 넓게 보면 부처님뿐만 아니라 보살상,나한상신장상나아가 조사스님 상까지 포함하여 말할 수 있다따라서 이들의 개괄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불상은 머리에 나발을 가졌으며보살상은 보관을 쓰고 있고나한상은 삭발한 수행자의 모습을 지니며조사상은 스님 상으로 되어 있고신장상은 무장한 장수의 모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불상들은  한분을 모신 경우를 단독상이고두 분을 모신 경우는 병좌 상 또는 병립상이며세분을 모신 경우를 삼존 상이라 부르고또한 천분이나 삼천 분을 모신 경우도 있다또한 부처님이 계신 모습에 따라 입상좌상와상유행상 등으로도 구분하고, 한편 불상은 조성한 재료에 따라 금동불목각불석불바위에 새긴 마애불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종이 등으로 만들어 옻을 칠한 건칠불 등으로 조성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렇게 많은 부처님을 형상화하다보니 수많은 불상들이 만들어지게 된다실제로는 단독으로부터 53, 1천불, 3천불, 1만불 등까지도 만들어 지고 있으나 시대를 막론하고 즐겨 만들어진 불상의 종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만들어진 불상으로는 석가불비로자나불아미타불약사불미륵불 등 경전에 따른 부처님과 1천불이나 3천불과 같은 시간 불 그리고 53불이나 1만 불의 같은 다불그리고 4방불 이나 5방불 등의 방위불이 있다여기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자주 만들어지는 불상들을 어떻게 하면 쉽게 알아볼 수 있는지 그 구별하는 방법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Ⅱ.  불상을 잘 알아볼 수 있는 기준

 

 

대승불교시대의 많은 불상들은 종교적인 표상으로서 일정한 법칙성과 의궤성에 의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얼핏 보면 그 부처님이 그 부처님 같기에 구분하기가 어려우나아래와 같이 몇 가지 기준을 적용하여 파악해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1.  법당에 걸린 현판을 보고 구별한다.

 

   사찰의 법당에 걸려있는 현판의 글씨를 보면 법당의 주존 부처님이 어느 부처님을 모셨는지 약 95%정도는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불상의 조성은 경전에 의거 의궤성에 따르기에 보통 대웅전(대웅보전황금보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대적광전(대광명전대광보전대광전광명보전대방광전비로전 )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극락전(극락보전미타전수마제전보타전보광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이약사전(만월보전유리광전)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이용화전(용화보전미륵전)에는 미륵부처님이 계시게 된다그리고 관음전(원통보전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님이명부전(지장전시왕전)에는 지장보상님이응진전(나한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500나한이나 16나한 등이 계시기 때문에 현판의 글씨를 보면 어떤 부처님이 계신지 거의 다 알 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대웅전의 경우에는 위의 기준과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대웅이란 위대한 영웅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로서 대웅전에는 대개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만모든 부처님 또한 위대한 영웅이신 대웅이기 때문에 간혹 대웅전에 석가모니부처님 이외에 다른 부처님을 모신 경우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우선 충남 서산시 개심사의 주 존불이 모셔진 건물 현판에 대웅전이라고 한 전각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아미타여래 부처님이 계시고또한 충북 보은의 법주사 대웅보전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비로자나 부처님을 비롯한 삼신불이 계시며그리고 충남 청양의 칠갑산 장곡사의 대웅전에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약사여래부처님이 계신 것을 들 수 있다.

 

 


        2.  부처님의 손 모양과 그 외 여러 특징을 보고 구분한다.

 

   부처님의 손 모양인 수인은 그 모양에 따라 하나하나의 의미가 있기에 교리 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따라서 수인과 부처님의 명호는 상당히 관련이 있음으로 수인을 보면 어느 정도 그 부처님의 명호를 알 수가 있다즉 손에 지권인을 하고 있으면 비로자나 부처님이 되고손에 아미타여래 구품인 중 하나를 하고 있으면 아미타여래 부처님이 되고손에 약함을 들고 계시면 약사여래 부처님이 된다.

 

   또한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으면 대부분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볼 수 있으나모두가 다 그러하지는 않는 것 같다왜냐하면 경전을 보면 부처님들은 팔상성도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수하항마상을 짓기도 함으로부처님들이 자기 고유의 특징을 표시하지 않고 통칭으로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는 경우가 나타난다이는 앞서 말한 대웅의 경우와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그 실례로 우선 석굴암의 부처님을 들 수 있다석굴암 부처님은 수인으로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계시기에수인으로 볼 때는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할 수가 있다그러나 학자들은 석굴암 조성 당시 불교사상의 흐름(화엄사상)과 주존 불을 중심으로 한 주위 여러 보처들과 관련지어 볼 때 화엄경의 교주이신 비로자나 부처님이라고도 보기도 하고또한 석굴암과 조성 연대와 같은 경북 군위의 제석굴암의 본존불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있기에 아미타부처님이라고 하는 것과 관련지어 석굴암의 부처님도 이와 같음으로 아미타여래라고도 보는 등 각기 논거에 따라 명호를 달리 붙이기도 한다.

 

   또한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부처님도 위와 비슷하다무량수전의 현판을 보면 법당의 본존불은 아미타여래 부처님이시다그런데 법당 안으로 들어가면 부처님이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계시기에 수인으로 볼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된다그러나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서방정토에서 덕화를 베푸시는 아미타여래 부처님을 모신 것으로 되어 있기에우리는 이 부처님은 선정인에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을 지라도 아미타여래 부처님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살의 경우는 모두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어려우나쉬운 것은 보통 보살님들은 보관을 쓰고 계시는데 비하여 지장보살님은 삭발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계시거나 두건을 쓰고 계기기 때문에 알기가 쉽다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구별은 관세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이 계시고,대세지보살님은 보관에 보병이 있다또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좌우 대칭으로 부처님을 보좌하고 계신데부처님의 왼쪽에 계시며 청 사자와 관련 있는 분이 문수보살이고 오른쪽에 계시며 코끼리와 관련 있는 분이 보현보살님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3.  대중의 마음즉 주인 마음을 알고 구분한다.

 

   법당에 그 부처님을 모셨거나현재 모시고 계신 대중의 염원을 알면 구분할 수가 있다학자들은 부처님의 상호 등 여러 근거를 통해 부처님 명호를 규정하지만만약 해당 사찰의 관계 비문이나 사찰 안 불상의 복장물 등을 통해 기록이 남아있다면 그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이는 우리들이 이런 저런 근거로 그 부처님을 규정하려 하지만그 부처님을 모신 대중의 마음이 제일 우선이라는 것이다그 실례로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부처님이 아미타여래인 경우와 같은 것이라 하겠다.

 

   이는 불화에서도 나타난다경기 안성의 청룡사에 탱화가 있는데이에 존치되어 있는 부처님의 수인은 아미타여래 부처님의 설법인을 하고 있다그러나 이의 당시 기록을 보면 영산쾌불로 조성된 영산회상도 임으로따라서 이 부처님은 수인에 따른 아미타여래 부처님이 아니라 대중의 마음이 담긴 기록에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  중생의 염원을 살펴 본다.

 

   부처님의 명호는 한번 정해졌다고 그 명호가 고정적인 것은 아니라그 시대에 사는 중생의 염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실례로 우선 충남 논산시 은진 미륵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이 불상은 역사의 기록이나 조성양식을 통해 보면 관세음보살님이라고 한다그러나 이는 우리들에게 관세음보살님이라기보다는 은진미륵이라는 미륵보살님으로 더 각인되어 있다근래 사찰의 주지로 부임하신 스님께서 이를 알고 관세음보살님으로 다시 모시자고 하였으나대중들의 염원이 여의치 않아 그대로 두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을 들 수 있다이 불상도 몇 십 년 전만해도 사람들에게 약사여래 부처님이 아니라 미륵 부처님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이는 그 전의 부처님이 지금은 팔공산 약사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볼 때 우리들에게 약사여래 부처님으로 나타나셨는지 모른다아마 어느 순간에 우리들의 약사여래 부처님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그렇게 나타났다고 보인다그렇다면 불상은 단지 어떤 재료나 근거로 만들어진 불상이 아니라대중의 염원과 함께 살아 숨 쉬며 자비의 손길로 여법하게 나타나시는 부처님이라 할 것이다.

 

 


   Ⅲ.  결 론

 

    법당의 불상들은 창작성이 아니라 일정한 의궤성법칙성에 의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어려우나그 불상이 어느 부처님인지의 판단은 위와 같이 해당 사찰의 법당에 걸려있는 현판의 글씨를 보거나부처님의 손 모양과 여러 특징을 비교해 보거나그리고 법당에 그 부처님을 모셨거나 현재 모시고 계신 대중의 염원에 의하여 알 수 있으며또한 부처님의 명호는 한번 정해졌다고 그 명호가 고정적인 것은 아니라 그 시대에 사는 중생의 염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또한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하심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사찰에 가서 교과서의 몇 가지 기준을 적용하여 감히 대추니 감이니 하면 큰 실례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왜냐하면 교과서의 기준(원칙)은 일반화하여 설명한 것임에 반해현실은 다양한 변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만약 그 사찰의 대중의 연원을 생각하지 않고 어 이거 아닌데어 이거 아닌데” 하며 단순하게 단정한다면,자신의 선입견에 매몰되어 자신도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되고 또 상대방과의 마음만 상하게 될 수도 있다 할 것이다이는 교과서 다르고 현실 다르다는 의미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교과서는 하나의 틀이기 때문에 그 틀을 통해 다른 변수가 있다면 왜 이렇게 했지이 절에는 또 다른 가르침이 있는가 보다누구에게 불어 봐야지” 하는 마음의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자신을 낮추고 불보살님과 사부대중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 불상이 어느 부처님인지의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사찰 내에 있는 조그마한 것 하나하나 또는 한 순간 한 순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

 

        자현스님 저사찰의 상징세계 상 · 불광출판사, 2012.

        자현스님 저붓다 순례불광출판사, 2014.

        문명대 저한국불교미술사한언, 2010.

        문명대 저한국불교미술의 형식한언, 2002.

        목경찬 저사찰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조계종출판사, 2010.

        석길암 저불교동아시아를 만나다불광출판사,2010.

        김정희 저불화(찬란한 불교미술의 세계), 돌베개, 2013.

        허 균 저사찰 100 100선 상 · 불교신문사, 2007.

 


                - 다음카페 <포교사단 서울지역단> 원경 윤병구 님의 글 중에서




            



       소백산 비로사 망월당  - 요사채로 보임








       망월당 편액








달 바라보기......


 

                                                          출처 :한국교사천문동호회 (TSA) 원문보기   글쓴이 : Kevin/박기현








         익어가는 뻐찌 - 산중식구들.... 

                      사람, 산새, 소동물에게 휼륭한 산과일....









         삼성각으로 가는 계단









   계단에서 되돌아 본 망월당 


      - 맞배지붕이 간결하고 소박하다.

        단청을 생략하고 도리와 들보에만 간략하게 단청을 한 것으로 보아

        노장스님을 위한 요사채로 보인다.








       삼성각 가는 계단에서 내려다 본 

             반야실, 나한전, 적광전(좌로부터)

             나무 아래가 월명루...









        맺배지붕의 풍판이 생략된 삼성각











■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16)


▶국보 제45호

 
●부석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고려초기 불상
 

 

 

   무량수전 법당 서편 불단에서 동향을 하고 계신 아미타여래불이다.
소조(塑造)불상으로서 나무를 깎아 본을 뜬 다음 진흙을 붙여 만든 불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소조불상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불상의 전체적 인상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근엄함이 서려있다. 
이마의 백호에서는 아미타불의 무량광이 발하고 있고, 지그시 내려 깔은 눈매에서는 한없는 자비심이 가득하다.
   서방정토에 좌정하시여 당신이 세운 수많은 서원으로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시는 부처님이시니 그래서 무량수불이다.



 

 

   좌, 우 협시보살은 어디로 물리치시고 홀로 법당을 지키시니 그 외로움과 고독함이 또한 얼마나 무량 하실까?
수인이 아미타정인이 아니고 
석굴암 본존불 같은 항마촉지인이니 이 또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무량수불의 이타행이 아니던가.

 

 


    비록 단청은 퇴색되고 바랬지만 천정에 붙은 금빛 찬란한 천개(天蓋)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보궁(寶宮)은 아미타불의 품격을 한층 더 경외(敬畏) 스럽게 하고 있다.




사진 촬영금지 경고문을 무시하고

반쯤 열린 무량수전 문 사이로

보이는 아미타불을 살짝 찍는데도

부처님은 그저 말이 없으시다.


나도 잠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을

가슴에 그려 본다.

 

 

 

 



 

 

■ 문화재 설명(*문화재청)


●국보 제45호-무량수전 아미타여래좌상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2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3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찰의 극락전, 극락보전, 무량수전, 아미타전에 봉안되며 우협시보살로 관음보살, 좌협시보살로 대세지보살과 함께 삼존불을 봉안되어있다.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등장하기도 한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아미타정인이나 설법인, 항마촉지인을 주로 취한다.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이 유명하다.(*자료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다음 블로그 <미지로 떠나는 여행~ 미지로 떠나는 여행> 미지로 님의 글 중에서 발췌미지로 떠나는 여행~









       고려시대 귀족문화의 발달 <불교문화재와 청자>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충남 논산)                                고달사지 승탑 (경기 여주)









                       




       청자 상감 운학무늬 매병 (간송미술관)                           청자 진사 연화무늬표주박 모양 주자 (호암미술관)   




     



    고려 귀족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 즐겼다. 
공예는 귀족의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구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


     고려자기는 신라와 발해의 전통과 기술을 토대로 송의 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귀족 사회의
전성기인 11세기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자기 중에서 가장 이름난 것은 비취색이 
나는 청자인데, 중국인도 천하의 명품으로 손꼽았다. 청자의 그윽한 색과 다양한 형태, 
그리고 고상한 무늬는 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민족의 정취를 풍기고 있다.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상감청자는 무늬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상감청자는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퇴조해 갔다.



     고려의 청자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생산되고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서 구워졌는데,

전라도 강진과 부안이 유명하였다

특히, 강진에서는 최고급의 청자를 만들어 중앙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금속 공예 역시 불교 도구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청동기 표면을 파내고 

실처럼 만든 은을 채워 넣어 무늬를 장식하는 은입사 기술이 발달하였다. 

은입사로 무늬를 새긴 청동 향로와 버드나무와 동물 무늬를 새긴 청동 정병이 대표작이다.



      한편, 옻칠한 바탕에 자개를 붙여 무늬를 나타내는 나전 칠기 공예도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불경을 넣는 경함, 화장품갑, 문방구 등이 남아 있다. 나전 칠기 공예는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 청자 만드는 과정


     청자는 물에는 묽어지고 불에는 굳어지는 자토로 모양을 만들고 무늬를 새긴 후 청색을

내는 유약을 발라 1250도에서 1300도 사이의 온도로 구워서 만든다. 

유약은 규석과 산화알루미늄이 주성분으로, 이들이 높은 온도에서 녹아 유리질화되는데, 

유약에 함유된 철분이 1~3%가 되면 녹청색을 띠어 청자가 된다.



 상감법 (象嵌法)


      나전 칠기나 은입사 공예에서 응용된 것으로,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법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부석사(浮石寺) 
                                                           金笠 炳淵(1807-1863)


평생미가 답명구(平生未暇 踏名區) 백수금등 안양루(白首今登 安養樓) 
강산사화 동남열(江山似畵 東南列) 천지여평 일야부(天地如萍 日夜浮)


평생동안 느긋하게 명승지를 밟지 못하다가 흰머리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음이여 
강과 산은 그림처럼 동남으로 펼쳐있고 천지는 부평초처럼 밤낮 없이 떠있네



 

풍진만사 홀홀마(風塵萬事 忽忽馬) 우주일신 범범부(宇宙一身 泛泛鳧) 
백년기득 간승경(百年幾得 看勝景) 세월무정 노장부(歲月無情 老丈夫)


풍진세상 만사가 홀연 달리는 말인 듯 우주간의 이 한 몸 정처 없이 떠다니는 오리같음이여 
백년동안 몇 차례나 수승한 경계를 보았던가 세월은 무정도 하여 늙은 장부 되나니.



                                                     <안양루 누각에 게시된 김삿갓 시>



                              - 다음 카페 <경북문화관광해설사 > 잠보님의 글 중에서 발췌








         소백산 비로사 삼성각 편액